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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고르바초프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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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c0000>생애 | <colbgcolor=#fff,#1f2023> 생애 | ||
가족 | 아버지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 · 어머니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 아내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 딸 이리나 미하일로브나 비르간스카야 | |||
관련 인물 | 블라디미르 레닌 · 보리스 옐친 | |||
평가 | 평가 | |||
사건 · 사고 |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 · 8월 쿠데타 · 소련 붕괴 | |||
관련 전쟁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 | |||
정책 |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 |||
기타 | 전략무기감축협정 · 주권국가연맹 | |||
사회주의 | }}}}}}}}} |
1. 개요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를 기록한 문서이다.2. 긍정적 평가
대외적으로는 사상 최초로 서방 세계와의 군비 축소와 평화 무드를 만드는 업적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가 되며, 무엇보다도 냉전을 종식시켰다. 소련의 발목을 잡던 아프가니스탄에서 1989년 철군했다.[1] 1989년 5월에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을 만나 1960년대 수정주의 논쟁 이후 격렬하게 대립하던 중국과 가까스로 화해 했다. 또한 1989년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한다.[2] 고르바초프의 비간섭 노선은 1989년 동유럽 혁명 및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다수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미소간 긴장 완화로 인해 전세계적인 민주화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한국, 필리핀을 비롯한 아시아 및 남미 국가들에서 군사독재가 끝나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1989년 12월 몰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1945년 이후부터 이어져 오는 냉전의 공식적인 종결을 선언하였다. 한마디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40여년 이상 이어오던 공포, 대립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의 물꼬를 튼 인물. 이러한 업적으로 서방 세계로부터 이 사람이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결국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정치인으로써 고르바초프가 세운 세계적인 공로가 하나 더 있다면 집권 중이던 1986년에 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3]와 북극해안의 핵 폐기물 문제를 세계에 공개한 점이다. 비슷한 사례로 1957년 예카테린부르크 근처 첼랴빈스크-40에서 약 800㎢ 정도 면적의 땅에 7,600㎥ 규모의 방사능 폐기물이 쏟아진 키시팀 사고로 인해 우랄 강이 삼도천으로 변하자, 당시 소련 정부는 24개 마을을 불도저로 쓸어버리고 거주민 1만 명을 강제 이주시켰을 때는 정보 통제로 철저히 묻었다. 이처럼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 사고 처리 과정에서 경직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체제 한계를 절감하고 보다 더 급진적으로 소련 사회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3. 부정적 평가
이처럼 고르바초프는 국제정치적으로는 냉전을 해소하고 핵전쟁의 위기를 해소하는 대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내정면에서도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서유럽식으로 국민의 의사를 적극 행정에 반영하는 개혁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다민족-다인종 국가였던 소련의 현실을 간과한 이런 내정개혁은 실패했다. 특히 현대 러시아에서는 거의 매국노 수준으로 취급하는 여론이 많다.우선 고르바초프는 선출 때부터 소련 정부 내 주요 권력기관에 대한 지도력이 확고하지 못했던 점이 가장 큰 태생적 약점이었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 3월 서기장에 선출될 당시 브레즈네프 시절 KGB 의장이자 브레즈네프 사후 서기장으로 취임했던 유리 안드로포프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당지도부에 진입한 신진인사였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할 고르바초프가 속한 19명 정원의 제27기 당정치국에서도 나이순으로 막내였다.[4] 명목상이라도 집단지도체제의 도구였던 당정치국에서 여러모로 고르바초프보다 경력도 많고, 오랜 세월에 걸쳐 입지를 쌓은 다른 정치국원들을 고려한다면 고르바초프의 정치력은 기존 원로에 비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개혁에 대한 당시 소련 정치인들 사이 입장 차이도 결국 고르바초프와 동맹격이었던 정치인들을 하나둘씩 떠나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 대표 정치인이었던 니콜라이 리즈코프는 초창기 고르바초프와 협력 관계였으나, 이후 고르바초프와 개혁 진행 방향을 두고 갈등을 빚으며 보다 보수적인 접근을 강조하여 고르바초프와 마찰을 빚었다. 결국 보리스 옐친 등 급진개혁파의 의견을 들어준다고 생각한 리즈코프는 고르바초프를 떠났다. 이후 시네트라 독트린을 발표한 외무장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나 고르바초프의 주요 조언가였던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등, 고르바초프는 급진개혁파나 개혁파, 온건보수파나 강경보수파 등 여러 세력 사이에서 어느 한 세력을 편들수록 점차 주위에 있는 우군을 잃어갔다.
고르바초프는 집단지도체제인 당정치국 제도의 문제점을 깨닫고 1980년대 말 대통령제를 신설해서 소련 대통령 자리에 오르지만, 이 때는 오히려 소련 공산당을 탈당한 보리스 옐친 등 급진개혁파 출신 정치인들로부터 반대에 직면하면서 사실상 정국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글라스노스트로 확대된 언론의 자유는 기존 소련 체제 내부의 문제점들을 좀더 투명하게 드러내서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체제 개선보다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창구로 기능하면서 소련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민주화와 선거를 일부 허용하더라도 독립 민족주의가 있는 공화국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지방자치를 허용한 것은 실수였다. 실제로 고르바초프의 지방선거와 지방자치 허용 이후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등의 공화국들에서는 독립파가 무더기로 공화국 최고회의에 진출하여 독립을 외치면서 소련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고, 중앙아시아와 캅카스에서도 광범위한 자치권을 얻은 지역 정치인들의 갈등으로 소수민족 폭동 사건들이 발생했다.
고르바초프가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자, 아르메니아 SSR과 아제르바이잔 SSR 최고소비에트 대표들의 갈등으로 1988년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소련 붕괴 이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전쟁이 터지고야 말았다. 이런 난맥상에 군부와 관료 등 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이 대거 반발하면서 8월 쿠데타로 이어지게 된다.
4. 소련 경제 붕괴와 고르바초프의 실책
고르바초프는 내정개혁과 더불어 경제면에서도 시장경제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현실을 무시한 급진적 개혁은 대참사를 불렀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불렀다.고르바초프가 취임할 당시 소련 경제 상황은 여러가지 사유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우선 아프간 전쟁을 위해 매년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전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또한 1980년대 초에 비해 크게 떨어진 유가의 영향으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체르노빌 사태나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 등 여러 대형악재들이 연달아 발생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개혁을 추진할 여건이 못 되었다. 그럼에도 고르바초프는 사회와 경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급하게 개혁안을 실시해 소련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초래했다.
사실 고르바초프의 이전에도 소련 내에는 여러 경제적 문제가 존재했다. 농업이고 공업이고 모두 선진국에 비해서 생산성이 매우 낮은데다가, 루블화의 통화적 지위도 모호했고, 거기다가 매년 수십억 달러의 전비를 쓰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있었고 체르노빌 참사과 같은 인재도 발생했다. 소련이 근본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영미권 논객들이나 일부 고르바초프 옹호자들이 이런 문제들이 고르바초프 내에서 발생된 문제가 아니거나 근본은 이전시대부터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에게는 민생안정 실패, 개혁 실패와 결과적인 소련 해체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정치인의 책임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 것으로, 고르바초프가 최고지도자에 오른 것은 젊은 리더십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공산당 고위직의 기대로 선출되었던 것이고, 본인이 이런 중책과 권한을 함께 떠맡았으면서도 결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국가의 해체를 불렀으므로 당연히 개혁 실패는 당연히 고르바초프의 책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5] 특히 고르바초프는 조급한 마음에 1987년부터 검증되지 않은 실험적 정책을 밀어붙였다가 위태위태하던 소련경제를 완전히 박살냈기 때문에 소련 멸망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소련의 위에서 든 여러 단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상쇄하는 장점도 상당히 많았다. 일단 세계 최고수준의 과학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6], 국민들의 교육수준도 매우 높았다.문해율은 거의 100%에 가까웠고 무궁무진한 자원과 표트르 대제시절까지 올라가는 강력한 중앙집권제의 전통, 그리고 인구도 2.8억이나 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문화대혁명으로 나라가 1950년대로 퇴보해서 경제성장을 겨우 시작한 중국보다도 사정이 훨씬 나았고.[7] 1980년에 당시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이 개혁을 추진하게 될 중국보다 훨씬 더 나은 사정이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아예 국가를 붕괴시켰다.
고르바초프는 집권 처음 2년간은 점진적인 개혁을 취했는데, 이당시만 해도 소련은 여러 문제를 겪었을지언정 고르바초프 말기의 혼란상은 나타자니 않았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개혁의 결실을 빨리 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집권 2년차인 1987년부터 갑자기 여러 개혁조치들을 한꺼번에 시행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국영기업만 있었는데, 민간기업이나 외국합자 기업투자 허용, 여기다가 정치적 자유까지 보장했다. 의도는 물론 좋은 것이었으나, 사회주의에 길들여져 있던 여러 경제주체들이 갑작스럽게 도입된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 못하는 것은 당연한 터였다. 이는 며칠 굶어 있던 사람에게 갑자기 철인3종 경기 출전하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혼란이 계속되는건 당연했는데, 고르바초프는 속도를 늦출 생각을 하지 않고 더 급진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1990년 9월 모스크바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샤탈린의 제안으로 500일 계획이라는 급진적인 시장 경제 계획을 발동했는데, 이는 500일동안 국유재산의 전부를 사유화, 모든 국유기업의 민영화, 국가가 제공하던 의료, 주택, 교육서비스들의 민영화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1년 조금 넘는 기간동안 사회주의로 돌아가던 소련과 같은 거대 경제를 완벽한 서구식 자본주의로 바꾼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마치 1950년대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10년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망상으로 펼친 대약진운동처럼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고, 결국 이는 1991년 소련 전역에서 아비규환을 불렀다.
500일 계획이 실행된 직후인 1991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11%를 기록하였으며 인플레이션은 300%가 되었다. 배급으로 돌아가던 여러 생필품들의 공급이 중단되고, 교통과 같은 서비스까지 중단되면서, 기업은 물론이고 국가 운영 자체가 마비될 작정이었다. 여기에다가 정치적 자유를 지나치게 보장한 결과, 자유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여러 소련 인민들이 방종으로 흘렀고, 걸핏하면 시위나 파업에 들어가 혼란이 가중되었다. 더 안좋은 것은 소련 산하 각 공화국에서는 소련에서 독립하겠다는 독립세력들의 운동이 불붙었는데 고르바초프는 수수방관했고 이는 그동안 억눌려왔던 민족갈등까지 폭발하여 여러지역에서 민족간 학살극이 벌어지는 등(위 참조), 국가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1991년 8월 이를 참다 못한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하야시키려고 했으나, 보리스 옐친이 시민을 규합해서 항의를 조직해 실패했고, 옐친의 도움으로 대통령직에 복귀한 고르바초프는 아예 권력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쿠데타를 저지한 옐친에게 선양하듯이 정권을 넘겨주었다. 옐친의 손에서 소련은 허무하게 해체된다. 그러니까 아예 옐친은 연방체제는 자기 지도력 밖이라고 생각했는지 첨부터 균질하고 경제력이 높은 알짜 지역인 러시아만 가지고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를 밀어내고 집권한 보리스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실행하다가 실패한 샤탈린의 500일 계획을 중단하기는 커녕 이름만 바꿔 그대로 밀어붙였고, 서방측의 조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가격 자유화 및 예금동결 정책으로 물가 폭등을 유발하며 예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서 러시아 서민들의 재산을 완전히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고, 소련 시절 돌아가던 사회복지제도도 유명무실해지고 알짜 국영기업들을 헐값에 민영화하며 소수의 올리가르히에게 국부를 넘기는 대신에, 이들 민영기업들이 경영합리화 명목으로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면서 실업률이 급등하여 그야말로 지옥도가 열리게 되었다. 그 결과 옐친이 집권한 1990년대에는 러시아 민중들은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던 1980년대보다도 훨씬 더 참혹한 삶을 갈게 된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이 지향하는 지방 분권화와 경영 자율권의 확보는 1920년대 소련, 그리고 1960-80년대의 헝가리에서는 효과를 봤지만 고르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로 이어졌고 거기에다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간에 정치적인 급변 상황까지 겹치며 경제파탄을 일으킨 것이었다. 거기에 소련 붕괴 이후로 극도로 벌어진 빈부 격차를 생각하면 경제개혁 실패의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자신의 독재를 합리화 하면서 항상 "1990년대로 되돌아 갈수 없다"고 상기하는 것을 보면 고르바초프의 경제실패가 얼마나 러시아인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는지 알 수 있다.
5. 중국과 비교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동시기 추진되었던 덩샤오핑의 개혁과 자주 비교된다.두 나라의 사정을 우선 비교해보면 소련 말기 경제 사정이 상당히 나쁘기는 했지만,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문화대혁명 직후 중국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80년대초 중국의 1인당 GNP는 200달러 남짓이였다. 당시 중국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당간부도 식량배급을 받을 정도로 못살았다.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은 1985년 소련의 GNP는 3,300불 언저리로,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당시의 중국보다는 훨씬 더 잘 살았다. 고르바초프나 소련 공산당이 잘 수습했다면, 민주제는 몰라도 현재의 중국식 체제를 이뤄 국민의 경제생활을 훨씬 윤택하게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2000년대 중국공산당이 개최한 회의에 초청되어 자신이 너무 정치개혁에 성급했다고 인정하고, 중국 공산당의 길이 더 바람직한 길같다며 뒤늦게 후회하기도 했다.[8]
덩샤오핑의 경우는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같은 급진책을 남발하다가 국가를 재앙에 빠뜨리는 것을 자신이 직접 목격했기 때문인지, 어떤 정책이라도 경험적으로 검증하며 신중하게 추진했고,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어 냉전 초,중기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진 중국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런 느린 접근도 덩샤오핑이 워낙 혁명가나 행정가로서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개혁의 추진과정과 그 주체가 달랐다는 것이다. 중국은 과거나 지금이나 중국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철저한 일당독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이지만 의외로 개혁개방은 각 지역 단위에서 추진해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과정을 거쳤다. 마오쩌둥 사후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구성한 덩샤오핑과 개혁파는 아주 신중하게 권력의 중심 베이징에서 가장 먼 중국 남부의 몇몇 해안가 지역을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현지 지방정부에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하였다. 그리고 이 경제특구의 지역관료들, 지방의 실무자들이 온갖 아이디어를 쥐어 짜내서 각자 자신의 지역에 맞는 경제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덩샤오핑은 각 경제특구들끼리의 경쟁을 부추겼고, 탁월한 성과를 올린 지역관료들은 파격적인 진급으로 보상받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지역에서 성공한, 즉 현실에서 검증된 정책은 다른 지역에서도 자연스럽게 따라하게 되었고, 실패한 정책은 수정되거나 조용히 묻히게 된다.[9] 또한 지역에서 경제발전의 성과를 낸 유능한 지역관료들이 파격적인 진급을 통해서 자연스레 중앙정계에 진입하면서 세대교체와 함께 전체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행정능력 또한 상향되게 된다. 여기에 경제특구에서 급성장한 토착기업인들도 그동안 친분을 쌓았던 지역관료들이 중앙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것과 발맞추어서 자연스레 전국구 인사가 되면서 기업을 크게 키울 수가 있었다.[10] 즉 개혁개방의 과실을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공산당 관료와 토착기업인들이 누리게 되면서 이들이 열정적인 개혁개방의 주체이자 덩샤오핑을 위시한 개혁파의 지지세력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율성을 보장받은 경제특구가 최초의 4개에서 20개로 그리고 대략 20여년에 걸쳐서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자연스레 중국 전역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되었다. 즉 중국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이지만, 최소한 경제개혁에 관해서는 지방의 권한이 보장된 지방자치제와 유사한 형태를 띄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지역관료와 토착기업인들이 현장경험에 기초한 성공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어떻게 보면 중국 특유의 만만디 정신이 이런 성공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철저하게 경제개혁에만 한정되어 있었고, 덩샤오핑을 위시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이루어졌다.
반면에 소련은 모든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철저한 하향식이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이란게 위에서 언급된 샤탈린의 500일 계획처럼 중앙정부의 극소수 관료들이 몇몇 교수들과 외국 전문가들의 조언 몇마디에 골방에서 급조한 정책을 어느날 갑자기 발표하고, 각 지역에 무조건 시행을 강요하는 식이었다. 구 소련은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와 3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나라였다. 당연히 각 지역별로 처한 경제상황도 제각각이었고 러시아인과는 다른 언어와 문화, 풍습을 가진 소수민족도 엄청난 숫자가 존재했다.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중앙관료 몇명이서 짜낸 정책이 현실에서 제대로 먹힐리가 만무하였다. 아무런 사전검증도 실증도 거치지 않은 수많은 설익은 아이디어들이 중앙당의 지시라는 명목하에 일괄적으로 실시되었고, 하나같이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여기에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 수준의 권위도 없었고, 이미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소련공산당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조금씩 상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정부에서 현실을 무시하고 내리꽂는 급진적인 조치들은 각 지역 공산당 관료들( 노멘클라투라)의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들 입장에선 자신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자신들한테 아무런 권한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과만을 요구하는데, 자신들에게 딱히 돌아올만한 이득도 보이지 않으니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반응하였다. 샤탈린의 500일 계획 같은건 애초부터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은 결국 정책을 집행하는 각 지역의 당관료들이 무성의한 태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눈치빠른 몇몇 관료들은 눈 먼 국유재산을 은근슬쩍 빼먹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바로 올리가르히의 출현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민중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즉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 수준의 권위도 없었고, 소련공산당은 중국공산당 수준의 인내심도 없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를 거치면서 이 경직된 체제를 바꾸려면 파격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고르바초프의 조바심이 결국 소련해체를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 같은 권위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사용했어도 결국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속에 흐루쇼프처럼 실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나 소련이나 계획경제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이 불가능했고, 양쪽 모두 개혁과정에서의 반발이 엄청났다.
여기서 덩샤오핑은 군권을 이용해 유혈사태를 감수하면서 민주화 여론을 유혈진압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오쩌둥 사후 마오쩌둥을 '공칠과삼'으로 평가해 문화대혁명을 과로 분류하면서도 공 또한 인정한 것은 덩샤오핑의 교묘한 정치술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볼 수 있다.[11] 덩샤오핑의 뛰어난 정치술 외에도, 덩샤오핑이 마오 사후 당 중앙군사위 주석을 역임하면서 군권을 장악했던 것이 덩샤오핑의 성공 요인이기도 했다. 천안문 사태 역시 이로 인한 부작용과 모순점들이 누적되면서 이에 반발하여 발생한 사건이었지만, 덩샤오핑은 천안문 사태를 무력 진압함으로써 당내외 반대파의 움직임을 잠재웠다. 이후 남순강화 등을 통해 개혁정책을 강화했다. 이렇게 중국은 조심스럽게 당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경제개혁을 추진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중국은 30여년에 걸쳐 계획경제를 자본주의로 전환 중이나 아직까지도 토지나 부동산 같은 경우는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중국의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며, 지상권의 매매만 가능하다. 지상권이 소유권에 준하는 강력한 권리인데다가,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수십년간의 지상권을 보장해주기는 하지만, 실제 본인 소유인 것은 아니므로 중국 부자들이 홍콩이나 해외 부동산 투기에 환장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중국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1998년도에 IMF발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고 경기부양을 할 목적으로 공공주택(복리방)의 공급을 축소하고 기존 공급주택을 사유화하거나 민영주택을 대거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지방정부에서 부동산 판매로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는 바람에 서구권 국가나 러시아처럼 부동산 투기가 사회적인 문제점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6. 지역별 평가
6.1. 서구권
서구권에선 반세기 넘게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 체제를 종결시키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추구한 정치인으로써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재임 기간 중에 고르바초프는 서구권에 우호적인 정책을 추구하며, SDI나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등 긴장 조성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가져다주던 냉전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독재를 겪던 동유럽 국가들이 민주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체르노빌 사태와 같은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방사능 사고가 전세계를 위협하는 일을 예방할 수 있었다.6.2. 러시아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고르바초프를 소련을 해체시킨 것도 모자라 옐친과 더불어 서방에 러시아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비난하고 있다. 비록 고르바초프는 스탈린 사후에도 청산되지 못했던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개혁하고, 소련 사회를 보다 민주적인 사회로 바꿔나가려 시도했지만, 중국이나 베트남같은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무리한 개혁개방 정책을 급격히 추구하면서 소련이 붕괴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그동안 러시아 국민들이 누려온 복지나 사회 체계가 무너지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던 중장년 세대는 고르바초프가 원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소련 해체 이후 모든 게 산산조각나면서 90년대 러시아는 초강대국에서 3류 국가로 추락했고,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힘들 정도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해버렸다. 군대만 해도 서방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소련군이 건재할 당시에는 병력이 500만 명이었다.[12] 규모만 놓고 보면 미군을 압도할 정도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의 러시아군은 병력 수가 120만 명으로 쪼그라들고 군용 물자도 줄어들었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후 10여년간 헤메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야 어느 정도의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도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는 옐친에 비하면 더 나은 평가를 받는다. 우선 옐친의 소위 '서방으로부터 조언받은 충격요법'을 실시한 후 벌어진 러시아의 참상에 비하면 고르바초프 시기는 그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고르바초프 시대에는 소련시절 만들어놓은 복지가 초반에는 작동했다.
특히 미국이 2001년 개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아프간에 주둔하다가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 후 아프간 전쟁의 조기종전 및 철군을 이끌어 낸 고르바초프의 업적도 재평가받고 있다. 결국 2021년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기도 전인 8월 15일에 항복했고, 미국의 철군 및 민간인 이송 과정이 참으로 졸렬하고 한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철수 작전이란 당연히 자국 민간인부터 대피시키고 나서 군대 철수를 하는 과정이 정석인데, 군대부터 덜컥 철수하는 바람에 철수 시점에 아직도 1,000여 명의 미국인이 아프간에 남아 있는 판이었다. 그나마 아프간을 탈레반이 완전장악하지 못하고 NRF가 결성되어 내전이 벌어지면서 서방 눈치를 안 볼 수 없게 됨에 따라 이들이 인질이 되지는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철군 과정이나 소련 철군 이후에 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던 아프가니스탄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유지 및 지원이라도 잘한 고르바초프가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물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무자헤딘에게 정권이 전복당하긴 했지만 옐친이 소련을 해체시키고 아프간에 대한 지원을 끊고 러시아까지 철저하게 말아먹은 탓이지, 이 셋 중 하나라도 안 됐으면 여전히 지원을 하여 나지불라와 휘하 아프간 정부군 장성 및 각료들은 무자헤딘들과 내전 및 준내전 상태를 유지해가면서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유지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르바초프는 소련이라는 국가를 마지막까지 수호하려 노력했고 8월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음에도 각 공화국의 자치권을 좀 더 강화하는 형태, 즉 주권국가연맹 체제로 바꿔서라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실제 고르바초프는 정치적으로 보수파의 불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화국들의 자치권을 강화시키는 형태로라도 독립을 저지하고 연방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의 인기에 타격을 준 또다른 원인으로 바로 보드카 판매와 소비를 규제한 정책이다. 1960년대 중반 이래로 러시아 평균수명이 침체된 원인 중 하나가 알코올 중독의 증가였다. 여기에 보드카 제조로 인하여 막대한 곡물이 들어가자, 보드카 판매를 규제하면서 세수를 확보하는 한편 평균수명을 증가시키려 했다. 하지만 금주령 정책은 국민들의 평균 수명을 늘릴 수 있었으나 반대로 정치적 인기를 줄어버렸고, 여기에 국제유가 하락으로 소련의 세수가 줄어들면서 보드카 판매까지 규제시켜 놓으니 세금도 줄어들어 버리는 동시에 암시장까지 활성화되고 말았다. 게다가 술을 권장하는 러시아 문화 특성상 사마곤이라 불리는 밀주나 향수 등 대체품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소련이 해체되고 자유시장이 도입되면서 보드카 배급 제한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이후 사회복지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러시아의 남성 수명은 57세까지 떨어졌다.
러시아 현지에서는 고르바초프의 성급하고 미숙한 서구화 정책이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무너뜨렸다는 공감대가 있다. 반푸틴, 리버럴한 성향인 한국 귀화 러시아인인 일리야 벨랴코프조차도 고르바초프를 "흐리멍텅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벌거벗은 세계사 올리가르히편에 출연했을 때 언급하기로는 러시아 국내에서 고르바초프의 이미지가 한국으로 치면 이완용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렇게 때문에 러시아 현지에서는 고르바초프가 추구했던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이 강하며, 이런 정서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좋은 자양분이 되고 있다.
즉 현재 러시아의 상황은 고르바초프 개혁의 실패 및 그 뒤를 이은 옐친의 막장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니, 고르바초프의 의도가 아무리 좋았다고 해도 러시아인들은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6.3. 동유럽
2017년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들 중에서 고르바초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의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이는 우크라이나(22%)나 조지아(18%), 아르메니아(13%)와 같은 다른 구소련 국가들도 마찬가지. 러시아 본토를 제외한 다른 구소련 국가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가 안 좋은 가장 큰 이유는 고르바초프가 각 민족 국가들의 독립 과정에서 유혈 사태로 독립을 저지하려 했던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는 여론이 강하기 때문이다.[13] 실제로 소련 해체 과정에서 독립 시위를 유혈진압하려 했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에서는 긍정 평가가 각각 48%, 39%라는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해당 여론 조사가 이루어진 국가들 중 고르바초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50%를 넘긴 구소련 국가는 2차대전 때 소련에 강제로 병합당한 에스토니아(56%)가 유일했다. 과거 위성국 국가들을 포함할 경우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직접적인 수혜를 입은 비셰그라드 그룹 국가인 헝가리(54%), 폴란드(51%), 체코(53%)[14]가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개혁을 추진한 지도자로써 높게 평가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독립 과정을 저지하려 했던 연방 지도자로써 평가받는다.6.4. 중국
중국에서도 고르바초프의 이미지는 매우 좋지 않다. 고르바초프는 천안문 사태 직전인 1989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해서 덩샤오핑[15]과 장시간 회견을 하고 30년전 중소결렬 이후 양국의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샤오핑은 고르바초프에 대해서 "그 친구 똑똑하기는 한데 앞으로 뭘 하려는지에 관한 생각이 분명치 않더군"이라고 부정적 평을 했고 장쩌민 시절 총리였던 주룽지는 금융개혁을 추진했는데, 서방이 자신을 '중국의 고르바초프'라고 비유한 것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나는 고르바초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주룽지의 개혁을 중국의 보수파들이 비판할 때 "고르바초프가 한 짓을 중국에서 한다"고 비판했다.6.5. 북한
당연히 평가가 좋을 리가 없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때문에 동유럽 공산국가들은 물론 소련까지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형제국들로부터의 원조가 끊겼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결국 1990년대에 이르러 고난의 행군이라는 궤멸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특히 냉전 시기 내내 북한이 공들여 온 중국과 소련 사이 줄타기 외교 전략이 완전히 무너져 버려 중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북한의 "세계력사" 교과서만 봐도 북한은 고르바초프를 현대수정주의자, 사회주의배신자라는 표현을 동원하여 신랄하게 까고 있다. 대내적으로 다당제 도입[16] 시장경제 도입, 사상문화 분야에서의 자유화, 군대의 비정치화·비사상화를 추진하여 소련을 해체로 이끌었고, 이러한 정책이 대외적으로도 영향을 끼쳐 동유럽 공산정권이 붕괴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북한 입장에선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체가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며,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포기한 것이며 바로 그랬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해체되었다고 보는 것. 북한은 1956년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한 시점부터, 흐루쇼프에 대해 수정주의 반동이라는 입장에서 비난한 적이 있다. 특히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흐루쇼프가 미사일을 뺀 것에 대해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패배주의적으로 나온 것이라 공격했다. 마찬가지로 고르바초프의 행위도 서방을 이롭게 한다고 보기에 까는 것이라 볼 수 있다.6.6. 대한민국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한 소련 지도자다. 고르바초프의 방한은 소련 붕괴 직전인 1991년 4월 19일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일본 방문 일정을 마치고 바로 귀국하려는 고르바초프를 노태우가 제주도로 초청, 4월 19일 밤에 제주도를 방문하고 4월 20일 노태우와 정상회담을 가진 후 당일 본국으로 귀환했다. 소련이 붕괴된 후 1992년 10월 경향신문과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방한이 이루어질뻔 했다가 러시아 정부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출국 금지 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무기한 연기되었고 1994년 3월이 되어서야 방한이 성사되었다. 유달리 방한을, 특히 제주도에서 열리는 포럼에 많이 참석했는데, 첫 방한 장소인 제주도의 풍경이 인상깊었던 듯. 쉬리의 언덕과 사계어촌체험마을 등을 둘러봤으며, 사별한 아내 라이사가 해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담은 동상이 제주도에 남아있다. 2001년 방한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2012년 버락 오바마가 외대에 방문해 명예동문 자격을 수여받기 전까지 외대 최고 아웃풋이 소련 서기장이란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1]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는
미국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거라고 미국에 누차 경고했다. 당시엔 모두 무시했지만 지금 보면 정확한 판단이었다.
[2]
공산주의권 전체의 이익이 개별 국가의 주권보다 중요하므로 특정 국가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이탈하거나 독자행동을 한다면, 무력 개입도 정당하다는 주장.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을 바르샤바 조약군이
탱크로 깔아뭉개면서
브레즈네프 당시 서기장이 선언했다. 즉, 이는
중부유럽 공산권이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독트린이다.
[3]
당시 고르바초프는 소련 체제의 치부를 드러내던 사고 특성 상 사고지역의 정보를 통제했지만, 동시에 재난수습 작업을 현장에서 지휘한 보리스 셰르비나(Борис Щербина)와
발레리 레가소프(Валерий Легасов) 등 현장 실무자의 의견을 적극 경청하면서 필요한 자원을 최대한 지원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소련 전역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건 고르바초프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4]
고르바초프보다 어린 사람은 유리 마슬류코프(1937-2010) 뿐이었다.
[5]
한국에서도
IMF 사태의 근본원인은 박정희 시대 이래 한국경제가 부채에 의존해 성장했기 때문이지만,
김영삼 정부가 1993-95년에 부양책을 남발했다가 국가부도사태를 불러왔기 때문에 IMF의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여져지고 있다.
[6]
특히 수학 같은 경우는 미국보다도 수준이 높았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 미국의 각 명문대에서는 소련 출신 수학대가들을 대거 영입했다.
[7]
1980년에 1인당 GNP(당시는 GDP보다 GNP를 많이 썼다)를 비교해보면 소련이 9000달러였지만, 중국은 200달러에 불과했다. 또한 대한민국조차도 1700달러에 불과했다.
[8]
중국 관영 언론 인터뷰에서는 "내가 중국의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충고는 ‘민주화’와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
(민주화를 용납하면)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소련 해체 과정에서 공산당이 영도력을 잃었던 부분에 대한 후회를 밝혔다.
[9]
한국의 지방자치도 수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측면에선 상당한 순기능을 하고 있다. 함평 나비축제가 대박이 나니까 전국적으로 축제붐이 일어나면서 보령머드 축제, 화천 신천어 축제 같은 성공사례가 나온게 대표적이다. 100원택시 같은 정책은 서로 베끼고 개선하면서 원조논쟁이 일어날 지경이다. 어느 지역에서 뭐가 성공했다 하면, 그 다음번 지방선거 때 당을 가리지 않고 모든 후보들이 비슷한 걸 공약으로 들고 나오는게 일상이다.
[10]
사실상
정경유착이긴 한데, 현재 중국의 대기업들은 전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성장한 곳들이다. 흔히 말하는 중국의 초고속성장을 주도한
상하이방이 이런 인맥이다.
[11]
물론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제3자의 기준으로 봐도 공로와 과오 모두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12]
이 숫자는 지금의
미군,
중국군,
인도군의 병력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숫자다.
[13]
실제 소련 해체 과정에서 고르바초프는
소련군을 동원해
알마아타,
트빌리시,
바쿠,
두샨베,
빌뉴스,
리가 등지에서 군을 동원한 무력진압을 시도했다. 이 중
알마아타,
트빌리시,
바쿠의 경우 비교적 진압에 성공했으나,
빌뉴스와
리가에서는 경찰 특수부대를 동원해 공화국 최고회의 및 방송사를 점거하려 하다가 텔레비전으로 유혈사태가 생중계되는 과정에서 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취소하였다.
[14]
해당 통계표에서는
슬로바키아가 제외되어 있으나 체코와 함께 1992년까지
한 나라였으므로 따로 집계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15]
당시 아무런 직함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국의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16]
이때 다당제는 북한의
천교도청우당 같이 노동자당의 우위를 인정하는 사회주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당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의회제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