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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대한민국 사적 | |
<colbgcolor=#315288> 경주 명활성 慶州 明活城 Myeonghwalseong Fortress, G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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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
면적 | 894,850㎡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건축시기 | 신라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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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북도 경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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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976 | |
등재연도 | 2000년 | |
등재기준 | (ii)[1], (iii)[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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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 명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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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 사적 제47호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받았다.2. 역사
정확한 축성 시기는 기록이 없지만 실성 마립간 4년(405)에 왜구가 동해 쪽에서 들어와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때 만들어진 명활산성비에는 551년에 성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없던 성을 완전히 새로 만든 것이 아니고 기초로 해서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왜군이 이 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이따금 삼국사기에 나온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왜구가 주로 침공하는 경로인 동해 바닷가와 상당히 가깝기 때문에 수도가 일본에서 멀어서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고려나 조선보다도 일본군 방어가 훨씬 큰 과제였다. 즉 동해와 경주 시가지 사이 요충지에 있는 이 성이 매우 중요했던 것.아예 자비 마립간 때인 473년 성을 고치고 475년에는 아예 임시수도 격으로, 경주 월성에서 이곳으로 옮겨 와 살았을 정도였다. 이 시기는 고구려 장수왕이 한창 남진정책을 펼쳐 백제 개로왕이 474년 전사할 정도로 고구려의 기세가 강했기 때문에 신라 측도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2년이 지난 다음 왕 소지 마립간 때에 다시 월성으로 왕의 거처를 옮긴다. 왕의 거처로 그리 오래 사용되지는 않았고 같은 경주시 영역 안쪽에 있는 곳이고 해서 그런지 신라의 수도 변천사에서는 보통 언급을 생략하는 편이다.[3]
이후 선덕여왕 말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 때 비담이 난을 일으킨 근거지가 이 곳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의 5개 지구 중 산성 지구가 이 곳이다.
위 사진을 보다시피 아직 본격적인 복원은 시작되지 않아서 일반 관광객 접근성은 나쁘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경주시가 유적 복원(+관광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여기도 복원될 예정이다.
대체로 온전한 상태로 명활산성비가 나왔는데, 551년에 명활성을 만들 때 참여한 지방관과 인부를 동원한 지역 촌주, 실무자의 이름, 공사 구간, 공사 기간, 비석의 위치, 성의 높이와 길이, 일꾼들은 어느 마을에서 데려왔는지, 비석을 만든 책임자 등의 여러 정보가 새겨져 있다. 551년 11월 15일에 쌓기 시작해 12월 20일까지 35일 걸렸다고 한다. 특이점으로 신라의 금석문 가운데 군(郡)이란 표기가 최초로 나와서 군제 행정구역 정비와 관련해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