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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5:51:43

마이클 조던/여담


1. 개요2. 매너3. 카리스마4. 호불호5. 독기6. 피해자7. 인기8. 에어 조던9. 조던 룰즈 관련10. 코비 브라이언트 관련11. 가족12. 저택13. 밈
13.1. Stop It, Get Some Help
14. 기타

1. 개요

마이클 조던에 대한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매너

마이클 조던은 코트 밖에서 매너에 대해서도 좋냐, 좋지 않냐 여러 설이 있다. 일례로 흑인 래퍼인 Chamillionaire가 동영상으로 자신이 왜 마이클 조던을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한 동영상이 있는데 한마디로 팬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2년 드림팀에 코치로 있었던 마이크 슈셉스키 듀크 감독은 이와 반대로 마이클 조던이 매너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슈셉스키는 조던이 매우 유명한 프로선수이기 때문에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드림팀이 첫 훈련을 마친 직후, 조던이 아주 정중하게 자신에게 다가와 "함께 훈련하는 것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요청했다는 것.[1]

애초에 사람의 성격이란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조던같은 스타의 경우 사람마다 일화가 다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듯 하다. 일단 조던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한 사람에게 잘해줬다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잘해준다는 얘기도 아닐 것이고, 반대로 한 사람에게 못했다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싸가지 없게 군다는 것도 아닐 것이기에 카밀리온에어와 슈셉스키의 경험담을 두고 마이클 조던의 성격을 알기는 힘든 것. 그리고 슈셉스키는 감독으로서 조던을 만난 것이고 카밀리온에어는 별로 관련이 없는 타인으로서 만났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대로 Chamillionaire랑은 딱 한 번 만난 것, 슈셉스키와는 대회 내내 보면서 이런저런 면모를 전부 봤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것도 이 사람 입장에서 한 증언만 있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 조던 성격이 정말 별로인지,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 좋았던지, Chamillionaire이 무례하게 대한 것이던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의 성격을 한 두 번의 일화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노릇이고 조던이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이런저런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조던은 평소에 사진 찍는 걸 엄청 싫어한다. 사진 요청하면 웬만하면 거절 당할꺼라고 생각하자. 일말로는 조던은 그때 폴 피어스, 스파이크 리이랑 편하게 술 마시고 있는 상태에서 Chamillionaire가 사진 요구를 해서 좀 완강하게, 거친 말투로 거절한 거라고 한다. 인터뷰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자. ##

또한 유튜브라든지 미국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면 조던의 팬서비스가 좋지 않았다는 댓글이 종종 있으나, 사인을 해달랬더니 자녀들 앞인데도 욕했다는 등 구체적인 근거가 없거나 정황도 억지스러운 댓글도 많다. 다만 이 부분은 애초에 언론에 나오거나 관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든 아무 소리나 할 수 있는 댓글에 불과하기에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이런 식이면 털어서 나쁜말 안 나오는 선수가 없으니까. 애초에 조던이 현역 시절에는 저런 식으로 '욕하면서 꺼지랬다'는 것 자체가 신빙성이 따소 떨어지는 게, 조던은 1980년대부터 어마어마하게 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기 때문에 일반 팬들에게 저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조던은 항상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 사이를 급하게 통과해야 했기 때문.[2]

또한 조던은 의외로 현역 시절에 이미지 관리를 굉장히 열심히 하던 선수였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올때는 거의 정장차림만 고집했으며, 그의 인터뷰 스킬 역시 철저한 이미지 메이킹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3] 흔히 국내에서 좋은 의미의 리얼월드 발언으로 알려져 있는 조던의 인터뷰만 보더라도, 조던은 선수들이나 구단주 제리 크라우스 등 동업자들에게는 거침이 없었을지 언정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데에 있어서는 강박에 가까운 프로의식을 가졌고 자신의 우상으로서의 이미지를 견고하게 지켜나가는 인물이었다. 이렇다 보니 자녀가 보는 앞에서 팬에게 꺼지라고 욕을 했다는 건 쉬이 상상하기 어려우며, 상기하였듯이 그런 말들의 출처는 결국 넷상 댓글들에 불과하다. 진위 여부도 알 수 없지만 혹여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무언가 선을 넘은 행동을 해놓고 그런 부분을 축소하거나 부풀려 말하는 등의 왜곡도 충분히 의심할 만 하다.

그와 별개로 마이클 조던의 싸인은 받기가 매우 힘든 건 사실인데 희소성 유지를 위한 상업적 계약이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카드 제조회사인 어퍼 덱 컴퍼니(Upper Deck Company)와 장기 계약을 맺고 있으며[4] 마이클 조던의 사인은 1년에 할 수 있는 갯수가 정해져 있다. 마이클 조던 사인의 진 가품여부를 가려주는 유일한 업체이기도 하며, 중고로 나오는 물건을 제외하면 어퍼 덱 컴퍼니에서 운영하는 마이클 조던 오토그래피 사이트에서만 조던 사인이 있는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다만 라스트 댄스에서 보면 아이들에겐 사인을 해주고, 프랑스 오디오맨의 사인 요청을 거절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1991년엔 어퍼 덱 컴퍼니와 계약을 맺기 전으로 어퍼덱과 계약을 맺은 것은 1992년 부터 였기 때문에 그냥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인을 잘 안 해주는 타입이긴 한 듯. 어퍼 덱과의 계약 이후에는 사인 횟수를 팬 사인회를 포함해 일정 갯수 이상을 넘지 않게 제한을 하고 있으며, 2015년 재계약 이후에는 그 수량을 더 줄이겠다고 어퍼덱 측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Upper Deck, the exclusive provider of trading cards and memorabilia for some of the world’s greatest athletes, including LeBron James, Wayne Gretzky, Tiger Woods, and Rory McIlroy, has announced a long-term renewal deal with Michael Jordan. Under the new agreement, the company will continue to be the sole producer of authenticated collectibles, trading cards and memorabilia featuring the basketball legend’s image and autograph. The new deal will also limit the number of Jordan autographs and make Jordan’s highly coveted signature even more valuable for fans and collectors.
르브론 제임스, 웨인 그레츠키, 타이거 우즈, 로리 매킬로이를 비롯한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들을 위한 트레이딩 카드 및 기념품 독점 공급업체인 어퍼 덱(Upper Deck)은 마이클 조던과의 장기 갱신 계약을 발표했습니다. 새로운 계약에 따라 회사는 농구 전설의 이미지와 사인이 포함된 인증 수집품, 트레이딩 카드 및 기념품의 유일한 생산자가 됩니다. 새로운 거래는 또한 조던의 사인 수를 제한하고 팬들과 수집가들에게 조던의 탐나는 시그니처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들 것입니다.
어퍼 덱 컴퍼니. 2015년 마이클 조던과의 계약 연장 소식을 전하는 자사 홈페이지 中 ##

3. 계약
마이클 조던은 어퍼 덱 컴퍼니(Upper Deck Company, 이하 UDA)와 계약이 되어있는 상태다. UDA에서는 그의 사인을 관리하고 그의 사인이 들어간 각종 기념품 판매를 통해 수익을 올린다. 마이클 조던 외에도 여러 운동선수들이 이와 같은 계약을 맺고 있는데, 이 경우 운동선수는 허락된 경기, 이벤트 등에서만 사인을 할 수 있다.

무분별한 사인을 막아 해당 선수의 사인 가치를 높이는 효과도 있고, 계약 회사 또한 천문학적인 수준의 계약금을 선수에게 지불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회수하기 위한 관리이기도 하다.
무신사 매거진 中 ##

3. 카리스마

"마이클이 (첫 번째로) 컴백한 뒤 멤버들은 다들 알아서 열심히 뛰었다. 연습도 전쟁이었다. 때문에 나로서는 좀 편한 점도 있었다. 불스가 대학생이라면 (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끈) 레이커스는 초등학생들이었다. 이들의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내가 선수들 개개인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할 필요성을 느꼈다."
필 잭슨 - 1989~1998년 시카고 불스 감독
"어떤 팀이든 간에 우열 순서의 확립은 필수적이야. 우리 팀의 경우엔 별 문제가 없었어. 우리에겐 마이클이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지. 물론 그건 리더가 없을 때에는 상당히 어려울 거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NBA에서 가장 위대한 아니,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리더가 있었어. 모두가 그를 절대자로서 인정했고, 데니스도 마이클에게 대들지 않았어. 아니, 그럴 생각조차 없었지."
스티브 커 - 1993~1998년 시카고 불스 포인트 가드

조던 시대의 시카고 불스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수차례 우승을 경험했고, 2014년부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스티브 커는 "연습 때 마이클이 하도 지독하게 갈궈대서 경기 때는 긴장하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경기보다 연습이 더 힘들었으니까.[5] 사람들은 데니스 로드맨이 마이클한테 대들다가 혼쭐난 뒤 쫄아서 얌전히 지낸 줄 아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다. 애초에 로드먼은 마이클에게 대들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6] 어떤 경기에서는 스카티 피펜이 4쿼터에 조던과 필 잭슨의 지시를 무시하고 결정적인 포지션에서 슛을 던졌는데, 조던이 그 즉시 타임아웃을 부르고 면전에서 피펜을 호되게 질책했던 일도 있었다.

하물며 상대팀도 예외는 아니어서 미숙하게 수비하거나 기분이 불편해지면 상대팀 선수들에게 정말 뚜껑열리게 하는 트래시 토크를 시전하여 멘탈을 부수었다고 한다. 조던에게 일대일로 쇼다운을 시전한 선수들은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게리 페이튼,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레지 밀러, 유타 재즈의 제프 호너섹과 존 스탁턴, 디트로이트의 아이제아 토머스, 뉴욕 닉스의 존 스탁스[7]정도로 리그에서 손 꼽히는 실력과 멘탈을 겸비한 선수들이며 상대팀 선수들도 조던을 굉장히 의식하고 부담스럽게 여겼다. 조던은 자신이 인정했거나 친한 상대팀 선수들에게는 경기중 종종 농담을 걸거나 함께 웃기도 했지만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나 신인, 벤치멤버와는 말조차 섞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던은 본인의 무시무시한 승부욕과 연습량 때문에 나태한 팀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나태하진 않더라도 움직임이 둔하거나 해서 팀 연습을 따라오지 못하는 선수들은 무섭게 몰아세웠는데 이 희생양이 된 선수가 바로 빌 카트라이트였다. 조던이 카트라이트를 싫어한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절친인 찰스 오클리를 보내고 받은 선수란 것이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노장이었고 건강이 안 좋던 카트라이트는 둔한 움직임 때문에 공격에서 조던의 패스를 놓치기 십상이었고 부족한 공격 기술 때문에 공격 기회를 날려먹곤 했다. 샘 스미스의 《Jordan Rules》라는 책에 따르면 조던은 팀 동료들에게 카트라이트에게 패스하지 말라고 강요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책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1년간 갈등을 겪고 난 뒤 조던은 카트라이트가 수비에서 해주는 공헌, 그리고 부드러운 리더로서 팀 동료들을 이끄는 것을 인정하고 갈등을 봉합했다고 한다.[8]

오죽하면 "당시 필 잭슨은 감독이 아니었다. 마이클이 감독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물론 그만큼 조던이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휘어잡았다는 소리지, 조던이 감독을 무시하거나 항명을 했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조던은 필 잭슨을 굉장히 존중했으며, 잭슨을 잡지 않으면 바로 은퇴하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실제로 전술되는 빌 카트라이트와의 마찰과 후술되는 스티브 커와의 마찰 이후에도 조던이 뉘우치는 데 잭슨의 조언이 컸으며, 로드맨과 피펜은 앙숙에 가까웠는데 둘이 화해하고 잘 지내는 데도 잭슨의 리더십이 컸다. 샤킬 오닐도 잭슨에게 무한한 존중을 표한 걸 보면 그만큼 필 잭슨이 감독으로서 리더십이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드물게도 스티브 커가 보기와는 다르게 조던에게 상당히 개긴 케이스. ESPN Sports century의 조던 편에서 두 선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일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연습 경기 중 커와 조던이 매치업되었는데 (조던 주장에 따르면) 심판들이 커에게만 유리하게 불렀다고. 그러자 조던이 슬슬 열이 뻗치면서 상당히 거칠게 플레이하기 시작했고 트래시 토크까지 시도하자 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고. 결국, 분위기가 과열되면서 조던이 주먹으로 커를 가격했고, 이후 연습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두 선수의 체격, 운동능력, 힘 차이를 생각하면 커가 대단한 것. 조던은 이후 커에게 전화해서 사과를 했으며 이후 커의 승부 근성을 높게 평가해서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커와 조던은 서로 잘 지냈으며, 위에 언급된 싸움에 대해 커는 인터뷰에서 "이 사건 이후 마이클이 나를 정말 존중하게 되었다"면서 조던이 자신에게 쥐여사는 동료보다 자신에게 덤빌 수 있는 동료를 더 존중한다고 한 바 있다.[9] 이는 친분보다는 동료로서의 상호존중의 문제다.

영혼의 파트너는 피펜이었지만 조던과 피펜은 사적으로 그리 친하지 않았다. 조던의 베프는 유잉, 바클리, 암스트롱 등이었으며, 2차 3연패 기간 동안 조던 피펜 로드맨 트리오는 코트에서 찰떡궁합과 별개로 사적으론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론 하퍼가 클리블랜드 소속일 때부터 조던과 매우 친했던 편. 조던은 개인적 친분과 동료애를 연계시키는 선수가 아니었으며, 본인이 인간적으로 좋아하냐마냐를 떠나 본인과 마찬가지로 농구에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는 동료를 아꼈던 것. 스티브 커 외에 스카티 피펜 역시 조던을 상대로 쫄지 않고 도전을 하는 선수였는데, 비록 조던과 피펜이 사적으로 친한 것은 아니지만 조던은 피펜을 존중했다고 한다. 반대로 성격이 유순한 호레이스 그랜트는 조던이 제법 힘들게 굴었다고.[10] 1차 쓰리핏의 주전 센터였던 빌 카트라이트도 라커룸에서 그간 조던한테 워낙 갈굼을 당하며 쌓인 것이 폭발해 조던의 면전에서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11]

국내에 많이 퍼진 이야기로 절친 찰스 오클리와 트레이드되어 불스에 온 빌 카트라이트를 조던이 못살게 굴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조던이 오클리 트레이드에 분노했지만 그 분노는 카트라이트보다는 구단주와 프런트를 향한 것이었다. 합류 초반에 상냥한 성격의 카트라이트가 코트 위에서 전투적이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다가도 제법 시간이 지나서야 오해를 풀고 팀원으로 받아들인 것. 조던은 승리에 모든 것을 거는 타입의 선수였기 때문에 전쟁 같던 연습시간, 제왕 같은 성격 때문에 동료들을 빡세게 다루더라도 그것이 불화와 팀 와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참을 수 있는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조던 룰즈 책에도 나온 내용으로 조던이 카트라이트에게 까칠하게 굴거나 일부러 잡기 힘든 빠른 패스를 얼굴로 던져서 놓치게 만드는 등 망신을 주었다. 그러나 이는 카트라이트를 꼬집어 괴롭히기보다는 끝없는 승부욕을 가진 조던이 동료들을 자극하기 위해 다른 동료들에게도 행한 방식이다. 피펜과 그랜트를 포함한 다른 주축 선수들도 이에 똑같이 당했으며, 기대가 클수록 이런 조던의 도전은 더욱 심했다.[12] 물론 카트라이트의 라커룸 폭발 건만 보아도 당하는 입장에서야 죽을맛이고, 실제로 조던의 리더십에 대한 호불호는 이런 부분에서 나온다. 어디까지나 카트라이트만 콕 집어서 왕따 시켰다느니 하는 건 비약이라는 것.[13]

이런 조던의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스카티 피펜은 악에 받혀 실력을 갈고 닦아 정면으로 받아치는 타입이었고, 호레이스 그랜트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조용히 상처를 받았다. 앞서 언급한 카트라이트는 초반 갈등 이후 조던과 서로 적당히 맞춰가며 그의 리더십 뒷면에서 팀원들을 보듬어주는 역할을 맡았고[14], 그 유명한 룩 롱리는 이를 호인답게 웃으며 받아들였다.[15] 위에 언급된 커도 특이한 케이스로 실력은 조던이나 피펜에 비할 바가 못됐지만, 조던에게 도전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리 정면으로 받아친 것이다.나머지 벤치멤버들은 감히 조던에게 대들 생각조차 못했다.[16] 팩슨의 경우 일화가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 까다로운 조던이 꽤나 신뢰한 걸 생각하면 뭔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팩슨이야 위닝샷으로 알려져있지만 순수한 1번 선수이고 기복없는 꾸준함. 클러치에 주저않고 날리는 3점 슛, 농구에 대한 태도 등이 조던의 마음에 들었을 수 있다.그리고 빌 웨닝턴이나 주드 부쉴러같은 백인 백업선수들도 역시 느리다며 욕받이 역할을 맡아야만 했다. 훗날 다큐멘터리에서 윌 퍼듀는 조던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단언코 선수로서는 최고이며 최고의 리더라고 인간으로서 불호와 별개로 그의 리더십과 실력에 대해서는 극찬하는 입장을 보였다.
다큐멘터리의 당시 연습영상을 보면 거의 과거 한국군대식으로 집요하게 잔소리하고 무시하고 "갈굼"을 시전하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좋던 싫던 이를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불스왕조를 세운 팀원들의 멘탈도 보통사람의 그것은 아닌 것이다.

조던의 성격 자체가 극단적으로 승부욕이 강하며 까다롭고 예민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조던의 갈굼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선수들도 있긴 했다. 듣보잡 벤치 선수들에겐 애초에 기대치가 없으므로 심하게 갈구지 않았다고 하며, 또한 론 하퍼, 존 샐리, 데니스 로드맨 등 자신과 경력도 비슷하고 직접 맞붙으며 실력을 인정한 선수들은 자유롭게 내버려뒀다. 하퍼 같은 선수들하곤 워낙 친하기도 했고, 클리블랜드 시절 치열하게 맞붙으며 인정한 상대니 갈굴 이유도 없었다. 반면 조던과의 관계가 최악까지 치달았던 사례로 콰미 브라운이 있는데, 이는 워낙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는지라 다른 사례들과 같이 두긴 어렵다.[17]

즉, 종합하자면 조던이 팀을 이끄는 방식은 가혹했고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만, 그 호불호를 떠나 '카리스마'라는 측면에서는 NBA에서 특정 팀의 한 시대를 이끈 모든 리더들을 통틀어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4. 호불호

일화를 보나 성과를 보나 조던의 리더십 자체는 훌륭한 수준이다. 동료들이 따르게 하는 아우라 자체는 NBA 역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과격함에 있어서도 사람으로서의 선을 넘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조던의 리더십은 그 동료들에게 '조던의 가혹함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견고한 멘탈'을 요구했고, 어떤 의미로는 정서적으로 유한 이들은 조던과의 동행 과정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다.

단적인 예시로 그랜트가 경기를 망친 날 조던이 승무원에게 x같이 플레이한 그랜트한테 기내식을 주지말라고 하였고, 그랜트는 니가 와서 (기내식을) 가져가보라고 맞받아 친 일화도 존재한다.[18] 또한 그랜트는 "조던이 나를 괴롭히려고 하면, 나는 바로 조던에게 대들었어. 하지만 퍼듀, 커, 버렐이 당하는 모습을 보는 건 가슴 아팠어. 리더가 선수들을 때리고, B H라고 부른 건 선을 넘은거야." 라며 조던의 방식에 불만을 표했고, "연습할 때 조던은 엄마, 마누라, 자식, 가족, 연봉 등을 limit가 없이 갈궈댔다" 라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즉, 조던의 그 과격함이 도를 지나친 구석 또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마이애미 히트의 원클럽 프랜차이즈 성골인 유도니스 하슬렘의 경우 "나도 조던을 좋아하고 그는 GOAT이지만, 나와 팀원들을 b****, h** 로 부르는 건 문제가 있다. 나라면 바로 맞짱을 떴을 것이다" 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표했고, 마이애미의 레전드인 드웨인 웨이드 역시 이에 동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팬들 중에서도 조던이 가혹한 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조던의 지지자들이라 해도 조던이 뛰어난 리더일지언정 호불호가 갈리는 스타일이라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세상에 '완벽한 리더십'이란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조던의 경우에도 당연히 모두가 그의 '방식'을 긍적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즉, 그의 리더십은 뛰어날지언정 '호불호가 갈리는 리더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호레이스 그랜트나 빌 카트라이트, 룩 롱리 등 MJ가 가장 괴롭혔던 동료들 중에서도 그의 성격이나 행동 방식에 대해 혹평하는 이들도 방식의 문제이지 그가 나쁜 리더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던은 동료만큼이나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세웠던 사람이고, 이러한 방식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그의 리더십이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주목할 것은 위에 언급된 동료들 중 조던 때문에 트레이드를 요청하거나 팀을 자발적으로 떠난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 위에서 그랜트가 '괴롭혀서 가슴이 아팠다'고 언급한 퍼듀나 커 등 동료들은 항상 조던에 대해 긍정적인 코멘트를 하는 선수들이며, 커는 예전부터 현재까지 조던에 대해 가장 높이 평가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즉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인간하고 같이 뛰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는 당사자들의 경우 좀 달랐다고 볼 수 있다.[19]

마이클 조던의 리더십을 정리하자면 "함께 있는 게 유쾌한 동료는 절대 아니지만 자신과 동료들을 극한까지 가혹하게 몰아붙여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리더"라고 볼 수 있다. 조던에게 가장 갈굼당했던 동료였던(따라서 조던을 동료로서 가장 덜 좋아하는 선수 중 하나인) 룩 롱리의 코멘트가 이를 잘 정리해준다. (출처: "One Giant Leap"란 호주 ABC의 다큐멘터리)
MJ(조던)이 제게 더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것, 제 약점을 그의 훌륭함으로 채워준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누구랑 같은 팀에 있기 위해서 그 사람을 좋아할 필요는 없어요. 같이 뛰기 위해서 굳이 그 사람에 대해 애정을 가질 필요도 없죠. 난 MJ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전 그가 매우 어려운 상대라고 여겼고 동료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다고 여겼어요. 그냥 그 주변에 있는 게 그렇게 즐겁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건 괜찮았죠.(It was cool) MJ에게도, 저에게도 괜찮았어요. 저희는 전혀...결국엔 우리는 서로를 존중할 방법을 찾아냈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I'm deeply thankful for MJ for showing me how to be a showing me how to be a better basketballer, for compensating for my weakness with his brilliance. You don't have to love a bloke to be on his team, to care about him, to play basketball together. I didn't love MJ. I thought MJ was difficult and unnecessarily harsh on his teammates and probably on himself. And I just didnt' enjoy being around him that much. And that was cool. It was cool with MJ and it was cool with me. There was no...At the end of the day, we found a way to respect each other on the court and coexist and that was cool.

즉 롱리는 '난 조던을 좋아하진 않지만 서로를 존중했다'고 하는 것이고, 조던의 동료들 중 불호에 가까운 이들 대부분이 이런 식의 의견을 표하고 있다. 그랜트가 조던과 빈말로라도 가깝다고 할 수 없던 사이면서도 주저없이 조던이 최고의 선수였다고 치켜세우거나, 그가 몰아세웠던 커가 매번 조던을 최고의 리더이자 최고의 선수였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그랜트가 "갈굼당해서 가슴아팠다"고 언급한 윌 퍼듀가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조던에 대해 언급한 멘트도 참고할 만하다.
오해하진 말아요. 그는 나쁜 새끼(asshole)였어요. 재수없는 놈(jerk)이었고, 무수히 많이 선을 넘었어요. 하지만 되돌아보고 그가 뭘 하려고 했던지 생각해보면, '녀석은 대단한 동료(he was a hell of a teamate)였어'라고 하게 되죠.
Let’s not get it wrong: He was an a**hole, he was a jerk, he crossed the line numerous times but as time goes on you think back about what he was actually trying to accomplish — you’re like, he was a hell of a teammate.

즉 조던의 가혹함에 대해 쓴소리를 내는 동료들도 그가 리더로서 확실한 성과를 냈다는 점, 이 점에서 대단한 동료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5. 독기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스스로 그 일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 한다.
You have to expect things of yourself before you do them.
나는 농구를 시작한 이래 9,000번 이상의 슛을 놓쳤다. 나는 거의 300번의 경기에서 졌다. 나는 26번의 경기를 결정짓는 위닝샷을 놓쳤다. 나는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다.
마이클 조던, 나이키 광고에서.
마이클 조던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의 심장을 도려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그것이 그의 최고의 재능이기 때문이다. (그의 강함의 비결은) 그의 배짱에, 그의 마음 속에 있다.
You're gonna have to cut Michael Jordan's heart out to beat him. Because, people don't understand that's his greatest talent. It is in his inner gut, it is in his inner heart,
조지 칼 1992~1998 시애틀 슈퍼소닉스 감독
난 그걸 개인적으로 받아들였다.
And I took that personally.
마이클 조던, 더 라스트 댄스에서[20]
천부적인 재능도 있었으나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엄청난 노력을 더했다. 이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서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특히, 이런 노력의 바탕에는 그 스스로가 지닌 엄청난 승부 근성과 경쟁심이 있었다.

* 1994-95 시즌, 밴쿠버 그리즐리스와의 경기에서 그리즐리스가 4쿼터 시작 후 11:2로 앞서나가자, 그리즐리스 선수 데릭 마틴(Derrick Martin)이 마이클 조던에게 “우리가 오늘 널 박살낼 거라고 했지?(I told you that we’re gonna beat you tonight.)”라며 조롱했다. 이 말을 듣고 빡친 조던은 4쿼터 6분동안 19득점을 꽂아 넣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는데, 위의 영상 3분 50초쯤 보면 경기 중 덩크를 성공시키고 밴쿠버 벤치로 가서 "입 닥쳐, 이 X만한 개자식아(Shut up, you little bitch)."라고 말하는 게 나온다.

마음만 먹으면 꼭 언젠가 그 플레이를 실현한다는 게 조던 최대 강점이다. 실제 조던이 포인트 가드를 보던 시즌에는(32.5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2스틸, 1블록) 모든 부분 초과를 찍었을 정도였다. 만약 당시 어떤 기자, 타구단 관계자가 '시즌 트리플 더블은 조던이라도 무리' 라고 말했다면 이에 반발하듯 시즌 트더를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르브론, 웨스트브룩 유형의 선수들과 달리 조던은 득점력 자체가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본인도 잘 알기에 무리해서 다른 부분 스탯을 올리려 하지 않았다.[39]

이런 승부근성과 경쟁심이 너무 지나쳐서 병적일 정도였다는 평까지 듣는다. 심지어 플레이오프 중간중간 쉬는 날에 도박이나 골프, 여타 스포츠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승부 근성을 불태웠다고 한다. 뭐 이렇게 보면 도박 중독에 가까워 보이고, 이런저런 루머[40]도 무수히 많았지만 스포츠 도박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덕분에 자기 자신의 본업이나 생활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

NBA 사무국이 조던의 아버지를 청부살해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기도 하는데 NBA 사무국이 이 정도 사건을 저지르고 묻어버릴 정도로 파워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NBA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꼴. 참고로 NBA 사무국의 최정점에 있는 총재의 연봉이 800만 달러로, NBA 선수 중에서는 평균(5~600만)보다 약간 많고, 스타팅 멤버급의 선수의 연봉도 되지 못한다. NBA는 구단주들의 돈으로 돌아가는 리그다. 그리고 돈줄을 쥐고 있는 이들이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현대 사회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진리이다. NBA 총재는 리그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구단주들이 뽑은 월급쟁이 사장이지, 결코 절대 권력자가 아니다.

그 외에 "나 오늘 50점 정도 넣을 것 같은데, 자네 아들이 보고 있다면 미안하게 됐어." 실제로 조던은 당대 최고 트래시 토커였던 게리 페이튼과 버금가는 트래시 토커였다.[41] 이렇게 보면 정말 어그로 투성이인 인물이지만, 실력이 너무도 아득해서 상대팀 팬들조차도 욕을 퍼붓다가 그가 플레이를 펼치면 넋을 잃고 바라봐야만 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와의 악연도 유명한데 자기 야구 선수 시절 악평을 했다고 1993년부터 지금까지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다. 50세 생일날 표지는 허락했지만 인터뷰는 거부했다.

2013년 2월 17일 50세 생일을 맞아서 이런저런 칼럼이 전 세계에서 폭주했는데 아래의 칼럼을 읽어보면 조던의 경쟁심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그가 겪고 있는 나름의 애환을 살펴볼 수 있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조던의 모습을 보고 싶은 팬이라면 추천. 1편 2편 3편

6. 피해자

압도적인 시대의 지배자였던 만큼, 조던만 없었다면 우승이나 개인 수상에서 더 큰 업적을 세웠을 레전드들이 많다. 물론 해당 목록의 선수들이 조던을 증오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오히려 리스펙하거나 절친한 사이인 경우가 많다.[42]

* 도미니크 윌킨스: 소속팀 애틀랜타 호크스도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조던과 전성기가 겹치며 번번히 좌절을 맛봤고, 개인적으로도 조던에 밀려 득점 2위만 3번을 기록했다.[43] 거기에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마저도 조던에 밀려 2위를 기록하고 만다. 심지어 이 경우는 윌킨스가 홈 어드밴티지에 밀려 조던에게 챔피언을 내줬다는 얘기도 있어서 억울함은 2배. 이때 도미니크 윌킨스는 본인 커리어에서 역대 최고라고 할 수도 있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1986년에 팀동료 스퍼드 웹보다 객관적으로 더 뛰어난 덩크를 보였음에도 단신 임팩트 때문에 패하고, 1987년에 부상으로 결장했던 윌킨스는 우승 트로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지금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덩크들을 연달어 선보였는데, 마지막에 본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투핸드 파워 윈드밀을 선보였다. 전에 시도한 조던의 투핸드 rock-the-cradle 덩크가 예상외로 48점을 받았기에 이 덩크가 만점이라면 윌킨스의 우승이 확정되는 상황이었고, 당연히 저건 만점감이었기에 다들 윌킨스의 우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이 덩크가 말도 안되게 45점을 받아서 윌킨스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심지어 시카고의 관중들조차 야유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뒤이어 조던이 그림같은 자유투 라인 덩크를 성공시키며 우승. 당시는 같은 덩크를 계속 해도 페널티가 별로 없는 시대이기도 했고[44] 도미니크가 윈드밀 일변도인 성향이 없잖아 있지만[45], 이날 도미니크는 똑같은 덩크를 거의 하지 않았고, 백보드에 볼을 튕겨 원맨 앨리웁을 하는 등 지금까지 기억되는 수많은 덩크를 선보였다. 특히 원맨앨리웁에선 방송국에서 그의 높이를 자체측정했는데 (물론 첨단 기술은 아니고 그냥 녹화화면 보고 한거라 정확하진 않다) 무려 10피트 2인치 (약 310cm)가 나왔다. 심지어 조던은 자유투 라인 덩크를 준결승과 결승에서 두 번했다. 그만큼 윌킨스는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이고도 우승을 강탈당한 거나 마찬가지라 그는 이때 준우승과 1986년 준우승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나 4번 우승했는데 두 번만 인정해주더라고." 다만 이게 논란이 적게 된 이유는 어쨌든 조던도 역대 최고의 덩커 중 하나인데다가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자유투 라인 덩크가 아름답기까지 할 정도로 완벽하고 멋진 덩크[46]라서 그의 우승이 충분히 납득이 갔기 때문. 이유가 어찌됐든 윌킨스가 당시 기준으로 만점이 당연한 덩크를 하고도 45점이란 말도 안되게 낮은 점수를 받고, 이 때문에 우승 기회가 사라진 건 맞다. 여담이지만 1985년에 루키 조던과 슬램덩크 콘테스트 결승에서 붙었을 때는 윌킨스가 우승했다.[47]
* 아이제아 토마스: 토마스를 위시한 배드 보이즈는 조던의 팀을 세 번 연속으로 탈락시키는 등, 조던의 성장 과정에서 있던 가장 큰 걸림돌이자 조던의 아치 에너미라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결국 조던의 성장으로 인해 스윕당하며 쓰리핏에 실패하는 결과를 맞는다. 토마스 본인은 조던의 인생 첫 올스타전의 Freeze-out 사건부터 시작해서 계속 악연으로 얽히게 되었고, 결국 조던을 중심으로 구성된 1992 올림픽의 1기 드림팀에 합류하지 못하는 결과를 맞았다. 커리어 전반적으로 보면 피해자라기보단 오히려 조던의 가장 큰 벽이라고 보는 게 맞다. 커리어 초반에 디트로이트는 불스를 지독하게 괴롭혔으며, 토마스 본인은 부상으로 인해 꽤 이른 나이에 은퇴했기 때문에 통산 전적이 36승 29패로 조던에 앞서며, 그 중 플레이오프에선 22승 12패로 압도한다. 플레이오프에서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불스는 3년 연속 디트로이트에게 패했고, 1991년에 불스 왕조가 시작된 직후에 팀이 몰락했기 때문에(1991-92 시즌에는 48승으로 5번시드를 받았지만 1라운드 탈락했고 이후 1995-96 시즌 이전까지 계속 플레이오프 탈락) 불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붙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또한 드림팀의 경우 토마스의 오랜 동료인 존 샐리가 "조던이 아닌 매직(존슨) 때문에 탈락했다"고 잘라 말할 정도로 조던 한 명 때문이 아닌, 전체적으로 여론이 안 좋아서 탈락한 것인데 가장 토마스를 싫어했던 조던이 탈락시켰다고 억측이 돌았을 뿐이다.[48]
* 찰스 바클리: 1993 파이널에서 역사상 최고의 파이널 퍼포먼스에 당하며 첫 번째 쓰리핏의 제물이 된 걸로 유명하지만, 그 전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있을 때부터도 심심하면 털렸다. 다만 사적으로 바클리는 조던의 절친이었다.
* 칼 말론 & 존 스탁턴: 조던의 두 번째 쓰리핏의 제물들. 팀과 본인들의 전성기가 하필 조던의 전성기와 겹치는 바람에 2연속 준우승이라는 쓴맛을 맛보게 되고, 특히 말론은 1998 파이널 6차전에 조던에게 결정적인 스틸을 당하며 패배의 원흉이 된 바 있다. 말론은 이후 말년에 레이커스로 헐값에 이적하면서까지 우승을 노렸으나, 디트로이트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 개인 기록의 측면에서는 말론은 조던에게 밀리는 바람에 득점 2위만 4차례 달성한 바 있다.
* 코비 브라이언트: 조던과 가장 유사한 스타일의 선수인데, 하필 조던 바로 이후의 시대에 활약했던 선수라 모든 면이 조던과의 비교 대상이 된 측면이 있다. 물론 상술했듯 조던이 코비를 자기가 남긴 직계 후배이자 동생처럼 여겨 실제 둘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감독 레니 윌킨스, 리더 마크 프라이스를 필두로 한 젊고 떠오르는 강팀이었지만, 조던과 전성기가 겹친 것이 불행이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4번 붙어 전패하였고, 특히 1989년에는 The Shot으로 대표되는 전설적인 업셋의 희생양이 되었다. 클리블랜드 입장에서 조던은 르브론 제임스 등장 이전 팀 최대 전성기를 낭비하게 한 원흉이라 부를 만하다.[49]
이들에게 제일 억울한 점은, 해당 문단의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조던의 라이벌 내지는 희생양으로 언급조차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패트릭 유잉: 해당 분야 끝판왕. 조던의 불스와 플레이오프에서 5번 붙어서 전패하였다. 심지어 조던이 (1, 2차 모두) 은퇴하자마자 파이널에 올라간 것을 보면[50], 조던만 없었다면 스포츠에 만약은 없다지만 우승 한 번은 해보고 선수 평가도 더 올라갔을지 모른다. 유잉에게 우승의 적기는 바로 1992-93 시즌이었다. 이때 유잉은 올-NBA 퍼스트 팀 하킴 올라주원과 별 차이가 없는 리그 최고의 센터 중 하나였으며, 팀도 특급 롤플레이어 찰스 오클리, 전 시즌에 가능성을 보이다 이제 완전히 믿음직한 조력자가 된 존 스탁스 등을 위시한 좋은 조력자들과 팻 라일리의 지도로 전력이 절정 (60승)에 오른 시점이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못지않게 조던을 괴롭힌게 바로 이 뉴욕 닉스로 1993년 시리즈에 조던은 평균 32점을 넣었지만 야투율 40%에 그쳤고 연패한 1, 2차전에선 거의 골밑으로 못 들어가는 등 최악의 부진에 시달렸다. 끈적끈적하고 거친 뉴욕을 당해낼 동부팀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이들의 대항마가 될 수 있는 건 유잉을 맞상대할 수 있는 서부 컨퍼런스의 거물 센터들 뿐이었지만 (데이비드 로빈슨과 하킴 올라주원. 오닐은 이때 동부 컨퍼런스였고 플레이오프 실패), 이때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른 두 팀 (피닉스, 시애틀)은 모두 센터가 매우 약하고 골밑 수비가 없다시피한 팀이었다. (시애틀의 수비는 매우 좋지만 골밑 수비는 약했다) 두 팀 중 누가 파이널에 올라왔어도 유잉이 날뛰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팀은 빠른 페이스의 공격팀이라, 이들의 공격을 삐걱거리게 할 만한 강한 수비팀이나 특급 수비력을 지닌 센터에게 약하다. 이 때문에 1994년 플레이오프에선 시애틀이 60승 넘게 거두고도 플레이오프에 턱걸이 한 덴버 너기츠에게 업셋 당한 적이 있다 (디켐베 무톰보의 존재가 컸다) 게다가 뉴욕이 최종전을 세 번이나 치러야했던 1994년 플레이오프와 달리 이때 이들은 1, 2라운드에서 각각 1패만을 안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안착했다. 또한 유잉은 부상 때문에 30대에 접어든 이후 동년배 라이벌들 (올라주원, 조던, 말론, 스탁턴)에 비해 빨리 기량이 줄었기 때문에 아직 최전성기 범위에 있을 때 우승을 해야했다. 어떻게 봐도 우승하기 딱 적기인데 조던과 시카고의 존재 때문에 좌절을 겪은 것. 조지타운 대학교 1학년 재학시 NCAA 전국 파이널에서 조던에게 결승 샷을 맞고 준우승에 그친 바 있다. 가히 선수생활 시작부터 끝까지를 관통하는 악연. 그런데 이것과 별개로 조던과 유잉은 절친이었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NCAA 파이널이었지만, 1984 올림픽 대표팀에 팀의 기둥 역할을 하면서 급격히 친해진 것.
* 팻 라일리: 19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를 이끌면서 이미 많은 우승을 맛봤고, 2000년대 이후 마이애미 히트의 수장으로도 우승을 만들며 이미 엄청난 업적을 세웠지만, 1990년대에 조던과 플레이오프에서 4번 만나 역시 전패하였다. 문서에도 있지만 뉴욕에서 2번, 마이애미에서 2번 만났다. 오죽하면 마이클 조던/어록에도 있지만 "왜 다시 복귀해서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라고 할 지경.
* 레지 밀러: 1990년대 은근히 강팀이었던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최고의 선수. 레지하면 조던보다는 뉴욕 닉스와의 악연이 깊은 선수로 조던과는 거의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밀러가 가장 우승에 근접했을 시절인 1998년에 조던과 만나서 7차전의 혈투를 벌인 뒤 패했다. 만약 여기서 조던을 이겼다면 밀러의 평가 자체가 달라졌을 것. 2000년도 인디애나가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1998년의 인디애나의 전력이 더 좋았다는 평도 있었고 무엇보다 딱 5점차로 7차전에서 패했기에 정말 아쉬웠을듯. 밀러는 조던과는 개인적으로도 주먹질을 하다가 퇴장을 당한적도 있다. 본인의 주장대로 올스타나 올-NBA 팀에도 조던에 밀려 많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올스타 같은 경우는 무조건 가드 한자리는 조던이기 때문. 물론 조던 다음에 드랙슬러도 있었고 다른 인물들도 있었지만 조던과 포지션이 겹치기에 조던이 없었다면 최소한 올-NBA 세컨드 팀, 서드 팀에는 몇번 더 올랐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건 선수 시절에 그랬고, 은퇴 이후에는 조던을 존경하고 공개적으로는 농담도 하는 사이. 자신의 명예의 전당에서 조던을 노골적으로 밀친것에 대해서 "그래 조던, 나 너 밀친것 맞아" 하고 쿨하게 인정하고 조던도 웃는 사이가 되었다.

7. 인기

8. 에어 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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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이 에어 조던 브랜드를 런칭한 이후 운동선수들이 자기 이름을 딴 신발을 출시하는 게 유행했는데, 에어 조던의 발끝이라도 근접한 시그니쳐 슈즈(선수 본인의 이름을 단 신발)는 없다. 당연히 에어 조던으로 받은 광고비도 천문학적이다. [59] 조던은 커리어 통틀어 연봉을 1억달러도 못 받았는데 1998년에 은퇴할 때 시카고 불스가 박봉에 대한 보상 겸 퇴직비로 연봉을 3천3백만달러를 주었다. 그러나 그 해 그가 번 광고수익은 4천만 달러를 넘었다. 1998년 은퇴 당시 그의 재산은 5억달러에 달했는데, 여기에서 연봉이 차지하는 비율은 10%도 안된다. 은퇴 이후 에어 조던이 계속 잘 팔리면서 광고비도 더 많이 받게 되는데, 포브스에 따르면 조던이 2014년에 받은 광고비는 15년치 연봉보다 많은 1억 달러에 달한다. 출처

9. 조던 룰즈 관련

1992년 당시 시카고 트리뷴의 샘 스미스 기자가 펴낸 "Jordan Rules"에서는 조던의 가혹한 면, 빌 카트라이트와 갈등을 포함해 불스 팀 내에서 여러 인원들간의 갈등에 대해 상세히 적혀있다. 책을 전부 읽어보면 알겠지만 스미스가 조던을 쓰레기로 묘사한 것은 결코 아니며 그의 위대함과 더불어 그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조명한 것에 가깝다. 카트라이트와 갈등을 하다 결국 화해하고 그를 인정했으며, 제리 크라우스와의 갈등도 크라우스의 잘못한 면들도 소개하며, 미디어에서 다뤄지지 않은 조던의 인간적인 한계를 다룰 뿐이지 결코 조던을 악인으로 그리고 있진 않다.

지금에 와서는 "쪼잔왕" 이미지가 강한 조던이지만 1990년대 초반, 그리고 조던 룰즈가 발매된 이후에도 그가 불스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조던의 이미지는 완벽에 가까웠다. 나이키 게토레이, 맥도날드 등 그의 메인 스폰서들은 잘생긴 외모와 화사한 미소를 가진 조던을 친근하고 상냥한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 했으며, 실제로 그는 팬들을 대할 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이미지에 맞춰 친절하게 대했다. 그가 항상 입고 다닌 깔끔한 정장도 여기서 나온 것.[60]

그런 만큼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린 책의 충격은 컸다. 발매 직후 제리 크라우스 필 잭슨을 사무실로 불러 책에서 인용한 부분들을 읽어주며 "누가 준 정보같냐"고 물었으며, 팀 내에서 서로에 대한 의심이 퍼졌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이 풀린 직후인 1992-93 시즌 당시 팀이 67승에서 57승으로 추락한데에는 팀케미스트리 붕괴가 컸으며, 여기에 조던 룰즈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도 한 몫한 것으로 보인다.[61]

샘 스미스는 시카고 트리뷴에서 불스를 맡기 전 의혹들을 파헤치는 탐사보도 기자였으며, 이 때문에 스포츠 측면에서 접근한 다른 기자들과 달리 불스의 어두운 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트리뷴에 1979년 입사했을 당시 정치/사회부 기자였으며 트리뷴에 오기 전에도 하원 출입기자였다. 1983년도에 스포츠를 담당하기 시작했고 1987년부터 불스만 담당한 것.

당시 스미스는 조던을 포함한 불스 멤버들과 편하게 얘기하는 사이였지만, 가장 친했던 선수가 호레이스 그랜트였기 때문에 그가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고, 현재도 받고 있다.

여기에 대해 그랜트는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아닙니다. 나와 내 전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샘 스미스에게 제보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샘과 매우 친하기 때문에 저를 희생양(scapegoat)로 삼는데, 뭐 그러든지요(so be it)."이라고 딱 잘라 부인했다.

B.J. 암스트롱은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호레이스 뿐일리는 없어요. 다양한 출처가 있었겠죠. 코치진, 구단주, 경영진일 수도 있고요."라고 했으며, 윌 퍼듀는 "우리(불스)가 우승을 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다들 마이클 얘기를 하고, (그랜트를 뺀) 다른 사람들 얘기를 하기 시작했죠. 호레이스가 이것 때문에 정말 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사기당한 느낌이었겠죠"라고 추측했다. 조던은 그 정보를 제공한 것은 내가 아니라며 "호레이스였을 겁니다"라고 추측했다.

스미스는 책 발매 이후 욕을 엄청나게 먹은 것은 물론 협박까지 받고, 신문사에선 안전을 위해 1주일간 출근하지 말라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조던은 이후 몇 주 동안 스미스와 눈도 안 마주치다가, 말을 다시 섞는 관계로 돌아가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던 외에 잭슨 감독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별 마찰이 없었다고 한다.[62] 스미스는 이후에도 불스를 담당하다가 시카고 트리뷴에서 2008년까지 일했다.

2020년 기준으로 샘 스미스에게 누가 제보했는지에 대해 정확히 팩트로 드러난 것은 없다. 다만 책에서 직접적인 팀 관계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부분 (선수들이나 경영진과의 대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랜트가 스미스와 가장 친한 관계였던지라 그랜트가 가장 의심받고 있다. 그랜트 본인은 아직까지도 강하게 부인하고 있으니 만큼 섣부른 판단은 금물.

10. 코비 브라이언트 관련

최근에서야 부각되었지만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관계가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63] 둘은 코비가 고등학교 졸업반(4학년) 시절에 처음 만났는데, 코비는 줄리어스 어빙과 조던에게 자신이 6월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프로 데뷔를 할 것이라고 했으며, 이 만남에 대해 코비는 "난 작은 사이코패스였습니다. 그들만큼이나 집요했죠"라며 세 사람 사이의 비슷한 점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벤치출장해 불스를 상대로 무려 33점을 넣은 것으로 유명해진 1997년 12월 17일 경기(불스가 104대83으로 승리) 이후 조던은 코비에게 다가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거라"라고 했고, 이에 코비는 "릴리스 포인트는 어떻게 정하나요? 슛 쏠 공간 마련하려면 수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야(misdirection) 하는 게 필수인가요?" 등 페이더웨이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코비는 "마이클은 본인의 모습을 제 안에서 본 것 같아요"라며 "그는 우리 둘 다 무서운 타입이란 걸 알았죠"라고 말했다.

직장폐쇄로 리그가 중단되었던 1999년에 코비는 조던에게 다시 한 번 연락을 해 자신보다 더 힘이 센 윙플레이어들을 포스트에서 상대하는 법에 대해 질문했고, 이에 대해 조던은 선수들을 떼어놓는 법, 그들이 비교적 잘 못 하는 곳으로 몰아넣는 법,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수비할 때 상대가 수비가 어딨는지 감을 잃도록 뒤로 물러서는 법[64]에 대해 가르쳤다고 한다. 이에 대해 코비는 "기본기였죠. 그가 위대한 딘 스미스 감독 밑에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 다닐 때 배웠던 것들이겠지만 저한테는 그게 없었어요. MJ와 얘기하는 것은 마치 최고 수준의 대학 교육을 개인적으로 받는 것과 같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대화는 이후 수십년간(decades) 이어졌으며 이는 자신에 대한 다른사람들의 기대감에 대처하는 방법부터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요령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조던은 코비에 대해 "그 친구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무시하고 승리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터널 시야'가 있어요. 당신은 코비를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그거 아나요? 그 친구는 그건 전혀 신경쓰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코비 브라이언트에 대한 추도식에서 연설을 한 조던은 시종일관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리며 코비에 대해 얘기했고, 결국은 눈물을 보였다. 두 사람의 친분에 대해 얘기하며 "코비는 제 소중한 친구였고, 제 막내동생 같았습니다"라고 하며 "코비 브라이언트가 사망했을 때 제 일부가 같이 죽었습니다."라며 슬퍼했다. 연설 전문 번역: https://cafe.daum.net/ilovenba/7n/276126

코비가 2021년 5월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때 그 소개자로 조던이 선택되면서 둘의 각별한 관계가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65]

또한 코비 브라이언트에게 자신의 트레이너로 유명한 팀 글로버를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그로버가 GQ스포츠와 인터뷰에서 2019년 밝힌 바에 따르면, 2007년 당시 코비가 조던에게 "무릎 아파 죽겠는데 도와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고 이에 조던이 "내 트레이너 더 이상 안 쓰는데 한 번 전화해보지 그러냐"고 추천했다고 한다.[66]

11. 가족

조던 가족은 아버지 제임스, 어머니 들로리스 밑에 5남매로 이뤄졌으며, 첫째 제임스 주니어, 둘째 들로리스, 셋째 래리와 넷째 마이클, 막내 로잘린으로 이뤄져있었다.

이 중 장남인 제임스 R.조던 주니어는 미군이었으며 한국에서도 근무했었다. 아버지와 이름이 같았기에 로니라고 불렸는데, 제임스와 친한 마이클과 달리 아버지와 갈등이 심해 어린 시절 군 입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다만 로니, 래리, 마이클 3형제의 우애는 매우 좋았으며 특히 나이가 비슷한(한 살 차이) 래리와 마이클은 매우 친하게 자랐다. 물론 친분과 별개로 둘 다 승부욕이 엄청났기에 스포츠 경기에서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고 한다. 조던가 5남매 중 장남 로니와 장녀 들로리스는 부모와 갈등을 겪었지만, 나이가 어린 래리, 마이클, 로잘린은 이런 갈등이 적었으며 특히 마이클은 제임스와, 로잘린은 어머니 들로리스가 유독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198cm에 달하는 조던의 키를 보면 잘 연상이 되지 않겠지만 조던 가족은 그를 제외하곤 장신이 없었다. 조던을 제외하곤 178cm 정도인 아버지 제임스가 제일 클 정도였고, 래리 조던도 농구를 했지만 키가 5.8ft(약 175cm)밖에 안되어서 농구를 오래하진 못했다.[67] 하지만 저 키에 덩크 슛을 하는등 꽤 운동신경이 뛰어나다. 사실 유튜브에 래리 조던 덩크를 쳐서 나오는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꽤"가 아니라 괴물 수준으로 뛰어나다. 덩크도 그냥 덩크가 아니라 리버스 덩크나 백보드를 한 손으로 치고 덩크를 하는 등 1980년대 당시 기준으로 슬램덩크 콘테스트급 덩크를 선보인다. 조던이 키가 래리보다 훨씬 커지기 전까지 그를 한 번도 못 이겼다는 걸 생각해보자. 위의 영상을 보면 조던이 장난스럽게 "형이 에어 조던 1호에요. 전 2호고요"하고 한다.

키가 작은 조던 집안에서 혼자 장신인 것에 대해 초창기에 조던이 농담식으로 언급한게 "(우리 집에 오는) 우유 배달부 키가 6피트 7인치(2m)였어요"였는데 당연히 미국식 조크다. 이와 같은 조크는 조던이 부모와 관계가 각별했기에 가능했던 것.[68] 현재 같은 매니지먼트 개념이 희박했던 그의 데뷔 초기에 조던을 케어해주던 것은 조던 부부였으며, 이들은 조던의 경기에 거의 매번 참석했다. 다만 이들 부부는 조던의 큰 누나 들로리스와(조던 어머니와 이름이 같다.) 제임스 사이에서 갈등을 두고 점점 사이가 벌어졌는데 (들로리스는 제임스가 자신을 성적 학대를 포함해 학대했다고 주장했다. 진위 여부는 불명), 조던은 둘 사이에서 난감해했다고 한다. 조던은 가족을 잘 챙겼으나 제임스의 사망 이후 (누나와 친했던) 어머니와는 금전적으로 지원해주면서도 어색한 관계가 된 적이 있으며, 조던은 어머니와 관계는 회복했지만 누나는 제임스 조던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폭로하는 책을 내기도 했다. 이러한 가족 문제와 조던의 개인사에 관한 내용은 2020년 8월에 번역 출간된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 The Life)》 전기(롤랜드 레이즌비 저, 1984출판사)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어쨌거나 아들 중 막내인 마이클은 유독 아버지 제임스를 잘 따랐는데, 조던이 집중할 때 혀를 내미는 버릇이 제임스를 따라하다 생긴 것이란 건 유명한 얘기다. 조던 부부는 1차 3연패 때까지 조던의 거의 모든 경기에 참석했기 때문에 당시 사진을 보면 거의 매번 제임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던의 친구들은 제임스를 pops(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라고 불렀는데, 조던이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전적으로 믿는 존재인만큼 그의 매니저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실제로 92-93시즌 당시 조던이 언론매체들을 보이콧하는 일명 media blackout 사건이 있었을 당시 조던을 대변해 언론에 그의 입장을 대신 전한게 바로 제임스 조던이었다.

이러다보니 아버지의 죽음은 조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실제로 93년 은퇴발표 기자회견 당시 "최소한 아버지가 제 마지막 경기를 본 건 다행으로 여긴다"고 언급했으며, 야구를 선택한 것도 아버지가 야구 매니아였기 때문. 96년 아버지의 날에 우승을 확정지은 후 조던은 라커룸에서 공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으며, 당시는 물론이고 50대 중반이 훌쩍 넘은 시점인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 나온 인터뷰 당시에도 아버지 얘기를 하다가 터질듯한 울음과 감정을 참지 못하고 짧게 "쉽시다(Break)" 한마디 겨우 하고 인터뷰를 끊을 정도.

마찬가지로 라스트 댄스에 나온 부분이지만, 2차 3연패 당시 이런 조던에게 힘이 된 것은 개인 경비원이었던 거스 렛이었다고 한다. 현재 고인이 된 렛은 시카고 경찰 출신으로 조던의 아버지뻘이었는데, 그는 조던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father figure)"이었다고 한다. 렛의 부인에 따르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조던이 새벽 두시에 울면서 전화를 하면 렛은 곧바로 그를 찾아가곤 했다고 한다. 거스는 97-98시즌 도중 폐암을 진단받아 조던과 동행하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98동부 파이널 7차전을 앞두고 다시 합류했다. 조던은 훗날 이에 대해 "거스를 위해 이기고 싶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69]

조던은 1989년에 4살 연상의 후아니타 바노이와 결혼해 제프리, 마커스, 자스민으로 2남 1녀를 두었다. 조던 부부는 13년간 결혼생활을 지속해왔으나 2002년에 이혼서류를 제출했고, 잠깐 재결합했다가 2006년에 최종적으로 이혼에 합의했다.[70]

후아니타와 이혼 이후 2008년에 이베트 프리토란 15살 연하 모델을 만나 쭉 교제해오다가 2013년에 결혼했다. 둘은 슬하에 쌍둥이 자매(2014년생)를 두었고, 현재 조던은 총 2남 3녀를 자녀로 두고 있다.

조던의 아들 제프리와 마커스 조던은 둘 다 농구를 했고, 아버지가 아버지기에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88년생인 제프리의 경우 2007년에 일리노이 대학에 입학했으나 2년 만에 농구를 그만두었고, 이후 농구부에 복귀했다가 동생 마커스와 함께 뛰기 위해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교로 전학을 갔다. 얼마 후 그는 완전히 농구부를 그만 두었고, 프로에는 도전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그의 평균 스탯은 11.3분 출전 1.6점 1.2어시스트 0.8리바운드로 미미했다.

90년생인 마커스는 제프리보단 실력이 좋다고 알려졌고, 3년간 평균 31.1분 12.3점 2.7어시스트 2.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러나 강팀인 일리노이에서 뛴 제프리와 달리 센트럴 플로리다는 마커스가 3학년때 NIT 토너먼트 한번 진출(1라운드 탈락)한 약팀이었고, 약체컨퍼런스인 Conference USA에서 프레스맨 팀, 그리고 2학년 때 세컨팀에 오를 정도로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프로에는 근처도 가지 못했다.

둘 다 경미한 사고를 좀 쳤는데, 제프리는 2021년에 병원 직원을 폭행해 체포되는 정도로 경미한 사고를 쳤고, 마커스는 2010년에 라스 베가스 나이트클럽에서 5만달러를 썼다고 트윗을 했다가 조사받기도 했고, 2012년엔 여성 두명과 술에 취해 다투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제프리 조던은 2020년에 컨설팅 기업인 Jordan Avakian Group을 공동으로 창업했고, 마커스는 2016년에 "트로피 룸"이란 고급 농구화 매장을 열었으나 매출이 시원찮아 오프라인 전용 매장으로 전환한 상태이다.

마커스 조던은 최근 스카티 피펜의 전 부인인 라르사 피펜(Larsa Pippen)과 사귀는 것으로 알려졌다. 라르사 피펜은 74년생으로 마커스보다 16세 연상인데, 2022년 10월에 같이 있는 사진이 유출되었을 때는 친구 사이일 뿐이라며 관계를 부인했다가 2023년 1월에 인정했다.

12. 저택

2022년에 유튜브 채널에 마이클 조던이 살던 시카고 저택이 매물로 나와 소개되었고 한글 자막도 볼 수 있으니 조던 팬이라면 구경해 보자.

세계적인 고급 부동산 매물을 Youtube에 소개하는 Enes Yilmazer의 채널에 소개되었는데 1995년부터 계속 살다 2007년과 2008년에 리뉴얼을 거친 고급 매물로 건축비에만 5천만불을 들였다고 알려졌지만 매물은 가구 모두 포함 1485만불[71]이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나왔으며 업자도 굉장히 싸게 나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시카고에 인접한 하이랜드 파크에 있는 7.39에이커(9046평)에 달하는 크기로 정원에는 연못과 수영장이 있고 물고기, 다람쥐, 사슴등도 살며 퍼팅이 가능한 작은 골프장이 있고 잔디밭 정원에선 공연도 가능하며 무엇보다 숲속에 독립적으로 위치해 150그루의 나무로 집을 둘러싸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준다.

9개의 침실, 15개의 욕실, 4개의 화장실과 실내 영화관 엔터테이먼트 룸은 물론 정식규격의 실내 농구장이 따로 완비되어 있다. 재미있는 부분은 완벽하게 빈 모델하우스 같은 촬영[72]임에도 불구하고 조던의 침실만은 촬영불가로 공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조던의 흔적이 없음에도 아예 촬영을 금지시켜 철저하게 취향이나 사생활을 보호하고 있다. 다만, 조던이 사용하던 집안의 개인 사무실은 실제로 공개를 하였다.

사생활이 베일에 싸인 것으로 유명한 마이클 조던인 만큼 관심이 있다면 조던이 살던 집을 구경해 보자.

결국 처음 매물로 내놓은지 12년만인 2024년이 되어서야 구매자가 나왔다는 기사가 떴다. 현재는 조건부 계약(contingent) 상태로, 매수자와 매도자(조던)이 매매를 위한 계약을 체결했지만 하자 발견이나 대출 진행 등 여러 조건에 따라 계약 파기가 가능한 상황이다. 매수자의 조건은 현재 확인되지 않았다.

13.

13.1. Stop It, Get Some Help

Stop it, Get some help.
(만약 마약을 복용하고 있다면) 당장 멈추고, 도움을 받아요.
마이클 조던이 1987년 맥도날드의 후원을 받아 어린이 마약 근절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했던 여러 말들 중에 "Stop it, Get some help"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게 진지하면서도 뭔지 모르게 웃겨서 그런지 해외에서 저 부분만 잘라서 밈으로 쓰이고 있다.

14. 기타



[1] "'코치님', '부탁드립니다'는 식으로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제 생각엔 그는 나름 저를 편하게 (making me comfortable)해주려고 노력한 듯 했습니다."라고 슈셉스키는 말했다. 이 인터뷰가 나온 것은 2010년이고 조던의 병적인 승부욕 등에 대해 이미 다 까발려진 상태였고, 슈셉스키는 조던과 개인적 친분도 없는지라 쉴드쳐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위에 나온 래퍼와 정반대로 슈셉스키는 조던과 대표팀 생활을 몇주간 하면서 조던의 성격에 대해 상세히 경험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2] 실제로 2005년에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찰스 바클리가 밝혔던 일화에 따르면, 둘이서 당구를 치기 시작했는데 조던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조던이 당구 치는 공간은 줄로 막아놔야 했고, 사람들은 그 줄 뒤에서 멍하니 구경하기만 했다고 한다. (오프라가 "그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요? 그런 카리스마가 있다는 걸까요?"라고 묻자 바클리는 "그냥 제정신이 아닌거죠(They're just nuts)"라고 반응했다.) 당시 바클리는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사인 요청하거나 사진 찍자고 하거나 그러는데 마이클을 대하는 건 다르다'라며 조던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설명했다. 실제로 마이클 잭슨같은 사람들은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일반 팬들과 삼삼오오 모여 얘기 나누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조던도 그런 위치였다. [3] 라스트댄스에는 대학 1학년 시절 우승 직후 기념행사에서 조던이 발언하는 장면이 있는데, 노스캐롤라이나 출신답게 남부 사투리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트래시 토킹을 할 때나 편하게 있을 때 흑인 특유의 슬랭을 쓴다.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는 표준어로만 말한다. [4] 르브론 제임스, 웨인 그레츠키, 타이거 우즈, 로리 매킬로이 등 슈퍼스타들도 이 업체와 계약되어 있다. [5] 실제로 조던과 절친했던 전 동료 B.J. 암스트롱은 조던이 "연습에서 상상도 못 한, 경기에서 볼 수 없었던 플레이를 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Jordan Rules에 보면 (피펜이 성장하기 전인 1980년대 후반까지) 조던을 막을 선수나 전술이 없어서 연습이 지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당시 조던의 이기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걸로 부정적으로 서술되었다. 팀 전술 훈련이고 뭐고 그냥 자기가 다 박살내 버렸다고). [6] 실제로 로드맨은 아이제아 토마스, 마이클 조던 등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리더를 좋아했다. 불스로 온 계기가 코트 위에서 신사적이고 상대적으로 유순한 데이비드 로빈슨의 성격이 우승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했다고 느껴서 이다. 요란한 염색과 코트 밖에서의 기행이 또라이 이미지를 만든 것이지 농구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팀에 헌신했고 감독, 리더의 말에 잘 따르던 타입. [7] 유명한 선수는 아니나 조던의 전담 마크맨인 조던 브레이커의 롤을 수행했던 선수이다. 조던 또한 녹록치 않은 상대임을 은연중에 인정했다. [8] 그리 친하진 않았지만, 이후에 3연패 기간 동안 둘은 공동주장으로 활약한다. 문제는 이 책이 1992-93 시즌에 나왔는데 당시 기자들이 조던과 카트라이트가 1년 뒤 화해하고 우승할 때는 큰 갈등이 없었다는 건 쏙 빼놓고, 앞의 자극적인 부분(패스 금지, 공개적 갈구기)만 크게 보도해서 마치 불스의 팀 케미스트리가 아직도 개판인 것처럼 몰아간 것이다. 때문에 당시 선수단은 크게 분노했으며, 1992-93 시즌 내내 이어진 조던의 도박 스캔들 관련 조사와 더불어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데 한 몫 했다. 추가로 샘 스미스는 분명이 둘이 갈등 봉합했다는 부분을 책에 써넣었기 때문에 왜곡을 한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조던이 스미스와 대화를 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상했었다. [9] 물론 이 당시도 커는 덩치도 작고 별로 눈에 안 띄여서 그렇지 한 성깔하는 인상이긴하다 [10] 다만 그랜트는 ESPN의 빌 시몬스가 진행하는 b.s. report에 출연해 조던과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해명한 바 있다. 또 그랜트는 여기서 조던을 높게 평가했는데, 본인이 뛰었던 2000년대 초 레이커스와 1990년대 초 불스와의 비교에서 불스의 손을 들어주며 "마이클은 어떻게든 승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선수다."라고 평한 바 있다. [11] 당시 조던이 빌 카트라이트를 유독 못살게 굴었던 것은 당시 시카고의 보디가드이자 팀 내에서 얼마 안 되는 조던의 절친이기도 했던 찰스 오클리를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를 시키고 데려온 선수가 빌 카트라이트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때 조던의 분노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단장의 사무실까지 찾아가 몇 시간이나 시위를 할 정도였다고. 그리고 상술되어있듯 둘은 화해하며 갈등을 봉합한다. [12] 특히 피펜은 자신을 가혹할 정도로 대하는 조던에게 오히려 악으로 깡으로 덤벼들며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 케이스. [13] 카트라이트의 경우 노쇠화와 계속된 부상으로 기동력과 득점력이 크게 하락했고, 조던은 그가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따라올 수 있을지 의구심을 느꼈다. 게다가 그의 대가로 포기한 찰스 오클리는 리그 순위권 리바운더일 뿐 아니라, 리바운드를 잡고 바로 속공하는 조던에게 롱패스를 찔러주는 센스가 있을 정도로 판단력이 빠른 선수였다. 단순히 조던의 절친이 아니라 불스에서 매우 중요한, 젊은 선수였다는 것. 그러나 카트라이트가 수비의 앵커 역할을 할 것이라 믿었던 불스 프런트의 안목은 정확했고, 조던 역시 카트라이트의 가치를 알게 되자 그를 신뢰했다. 상술한 갈등은 어디까지나 영입 초반의 일이다. [14] 피펜의 유명한 Sit-down 사건 직후 라커룸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실망을 표했고, 피펜이 이에 크게 뉘우치게 된 것도 카트라이트이다. 많이들 간과되는 게 이 사건은 4차전이었고, 당시 불스는 전력상 우위인 뉴욕을 상대로 7차전까지 갔다. 즉, 이런 참사에도 팀 케미스트리를 유지한 것. 여기엔 1차 3연패 시절부터 조던과 함께 공동주장이었던 인격자 카트라이트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이 시즌 이후 자유계약으로 시애틀로 이적, 여기에 피펜의 절친이자 동기인 그랜트까지 팀을 떠나 케미가 완전히 붕괴하게 된다. [15] 롱리는 갈굼은 계속 당하는데 피펜처럼 도전하지도, 그랜트처럼 상처받지도 않고 무난히 넘기는 특이한 멘탈로 평가받는다. [16] 싸움 이후 조던이 커를 존중하고, 클러치 슛을 맡길 정도로 신뢰했던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17] 콰미의 맨탈이 그리 훌륭하지 않은 것도 있고, 고졸인 그가 어려서 상처 입기 쉬운 섬세한 성격이었던 것이 크다. 그리고 1980년대 거칠었던 문화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 밀레니엄 세대인 콰미에겐 충격적으로 다가온(즉, 세대 차이) 부분도 크다. 가뜩이나 어리고 멘탈도 약한데 그야말로 농구계 최고의 전설로부터 갈굼당하는 위치였다는 것. 카트라이트 같은 베테랑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당시 워싱턴에는 퇴물이거나 존재감이 없는 베테랑이나 어린 선수들뿐이었다. 2002-03 시즌에 찰스 오클리가 합류하긴 했으나 이 양반은 맥그레이디한테도 한 소리 할 정도로 조던 못지 않는 성깔을 지녔다. [18] 아무리 그래도 진짜 가져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19] 조던과 달리 동료들을 많이 챙겨줬고 서로 인간적인 호감을 표했던 스카티 피펜의 경우, 그가 리더로 있던 포틀랜드는 팀 분위기가 그야말로 개판이었고 성적도 기대에 못 미쳤다. 반면 조던의 리더십에 대해 안 좋은 소리가 가장 많이 나오던 워싱턴 시절에도 팀은 조던 영입전 19승에서 영입 후 두 시즌 연속 37승을 올리고 조던이 건강할 때는 5할을 훌쩍 넘기는 등 결과는 확실히 나왔다. [20] 영어에서 "Don't take it personal"하면 "너 개인에게 모욕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니니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라"란 의미이다. 그러나 조던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동기부여할 계기를 찾는 인물답게 스포츠 측면에서 이뤄진 결정(제리 크라우스가 댄 멀리에게 보인 관심, 칼 말론의 MVP수상)이나 언론의 설레발(본인과 드렉슬러의 비교) 등을 개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동기로 삼았다. 이를 상징하는 발언. 유튜브에 조던이 이런 식으로 빡돈 것들을 모은 영상이 올라온 적이 있는데, 2022년 9월 기준으로 천만뷰를 넘겼다. # 영미권에선 이 발언이 밈이 되어서 운동선수가 과소평가된 이후 맹활약을 했을 때 조던의 발언과 짤이 나오곤 한다. 손흥민 선수가 2022-23시즌 부진하다가 레스터시티전에서 1년반만에 벤치출장해 13분만에 3골을 넣는 맹활약을 하자 영미권에서는 어김없이 조던의 짤과 함께 이 밈이 튀어나왔다. [21] 아직까지도 그 관객의 정체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소문에 따르면 유타 재즈 구단주였다고 하는데, 칼 말론 증언에서도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유타 재즈 구단주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한다. 구단주 래리 밀러는 말론이 입단하던 1985년에 구단주가 되었고, 말론과도 당연히 잘 알던 사이였는데 저렇게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표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래리 밀러설은 샘 스미스가 그 유명한 Jordan Rules란 책에서 제기한 설인데, 스미스가 시카고 트리뷴에서 불스를 오랫동안 담당한 저명한 조던 전문가이긴 하지만 해당 경기는 정규 시즌, 게다가 유타 원정인데다 1987년 당시 유타는 그냥 중위권 팀인지가 이 경기에 동행했는지도 의문이다. 이 시즌에 전 경기 출장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었을게 확실한 말론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다. [22] 윌킨스는 레전드 도미니크 윌킨스의 친동생으로, 형과 마찬가지로 운동 능력이 매우 뛰어나 조던을 상대적으로 잘 막는 선수이긴 했다. 그는 1급 수비수까진 아니었지만 당시 조던은 너무나 빠르고 강한 선수라 일단 그의 운동 능력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는 선수여야 매치업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좋은 외곽 수비수는 크레익 일로였지만 조던을 막는 게 상성이 좋았던 선수는 1998-89 시즌까지 클리블랜드에서 뛴, 운동능력과 사이즈가 되고 팔이 긴 론 하퍼였다. 클리블랜드는 전 시즌에 57승을 거두고도 조던을 못 막아 불스에 석패했기 때문에 전 시즌까지 뉴욕에서 뛰던 윌킨스를 조던을 막으란 특명을 주고 영입한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Jordan stopper"란 수식어까지 붙었을 정도. 물론 윌킨스고 하퍼고 조던에게 "덜 털렸다" 수준이지 잘 막진 못했다. 하퍼는 말 한 번 잘못 했다가 플레이오프에서 한 경기 55점을 얻어맞을 정도. [23] http://cafe.daum.net/ilovenba/7n/245200 영어 원문기사: http://articles.chicagotribune.com/1988-05-01/sports/8803130519_1_bulls-domination-craig-ehlo-solitary-confinement 하퍼로선 좀 억울할 만한 것이, 해당 멘트는 기자들과 얘기하다가 자연스레 나온 말일 뿐이었고 정작 하퍼와 조던은 바로 전 주에 같이 식사를 할 정도였기에 신경전을 벌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던의 거의 편집광적인 승부욕의 피해자. 여담이지만 하퍼는 성격이 좋기로 유명한 인물이라 시카고 시절에도 조던을 포함해 다른 팀원, 관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런 하퍼의 리더십, 원만한 성격과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대한 높은 이해도 때문에 필 잭슨이 레이커스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은퇴하려던 하퍼를 만류하고 자기 팀으로 데려온 적이 있다. [24] 서태웅이 풍전전에서 한 쪽을 다치자 두 눈 감고 던진 장면은 이 부분을 참조했다. 무톰보 신인 시절은 1991-92 시즌이고, 전국대회 연재는 1996년도 이다. [25] 무톰보의 시카고와의 첫 대결에서 조던이 무톰보에게 그가 슛을 한 번이라도 성공시키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도발하였고, 무톰보가 골밑 슛 하나를 성공시킨 뒤 조던에게 눈 감고 자유투를 한 번 던져보라고 받아쳤던 것. 이 이야기가 와전되면서 국내에서는 건방진 신인 무톰보가 조던에게 깝쳤다가 참교육 당한 일화로 부풀려졌다. 5분 50초부터 [26] 조던은 1993년에 은퇴하고 1995년에 복귀한 이후 운동능력이 예전에 비해 약간 떨어지고, 특히 스피드가 그때만 못했는지라 은퇴 전에 비해 돌파 비중이 많이 줄었고 캐치앤 슛이나 포스트업 페이더웨이의 비중이 늘었다. [27] 링크 영상의 2분 36초부터. [28] https://www.nytimes.com/1997/02/03/sports/nettled-jordan-stings-the-sonics.html하지만 경기 후 기사를 보았을 때, 동 시기의 사람들, 그리고 조단 본인은 조지 칼의 발언을 "나이 먹고 부상이 두려워서 돌파보다는 점프 슛을 많이한다"라고 인식했으며, 이에 조던 본인이 불타올랐다고 생각했다. 조지 칼 본인도 "내가 그런 말을 해서 조던이 불타올랐다면, 실망스러운 일이다. 난 그저 그가 점프 슛을 너무 많이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응답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조던은 "코트 어디든 난 두렵지 않다. 감독들이 나를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려고 그런 발언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런 계획이라면 말려들지 않을 거다. 돌파를 더 하게 만들고 싶다면, 더블 팀, 트리플 팀을 하는 것보다 길을 열어주는 게 나을거다" 라고 응답했다. 애초에 몸을 사린다는 것 자체가 피지컬한 플레이를 덜 한다는 뜻이다. 빅맨의 경우 대표적으로 리바운드나 수비에서 적극성이 사라지는 것을 들 수 있으며, 그 외에 허슬플레이도 있지만 조던같은 퍼리미터 선수들은 가장 대표적으로 돌파의 비중이 줄어드는 현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던처럼 역대급 돌파력으로 유명한 선수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건 "몸을 사리는 것 같다=예전보다 적극적으로 플레이(돌파 등)을 안 하네"라고 받아들여질 여지가 충분한 것. 실제로 조던은 2차 3연패 당시 돌파의 비중이 1차 때 비해 확실히 줄었으며, 3점 라인 안쪽에서는 슈팅력이 여전히 정교했음에도 야투율이 떨어진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물론 칼은 감독으로서 당시 리그에서 가장 무서운 공격무기였던 조던에 대한 분석멘트에 불과했지만, 조던의 성격상 이런 평범한 말조차 동기부여로 삼는 인물이라 이 정도면 충분했다. [29] 애초에 아무리 뛰어나도 NBA무대에서 저런 식으로 한 선수가 스스로 제약을 두고 맘대로 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유명해진 래리 버드의 "왼손만 써서 득점하겠다" 경기에서도, 중장거리 점프 슛은 오른손으로 쐈으며, 전체적으론 오른손으로 득점한게 좀 더 많았다. 조던이 아무리 뛰어나도 수비수들이 호구도 아니고, 특히 시애틀처럼 뛰어난 팀을 상대로 주옵션을 아예 봉인하고 경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저런 식으로 일단 점퍼만 노골적으로 노리는 식으로 경기하는 것만 해도 상식 밖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30] 당시 디트로이트는 듀마스로 조던을 주로 막았지만 불스가 조던까지 가드 세 명을 내세우는 스몰라인업을 할 때는 로드맨으로 조던을 막았다. 로드맨이 블록이 이 때 나온 것. 그러나 조던은 상황에 따라 아이제아 토마스와 매치업될 때도 있었지만 조 듀마스를 주로 막았다. [31] 둘은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선수들은 아니었다. 둘 다 NBA에서 10년 가까이, 혹 10년 이상 뛰었으며 특히 랜디 브라운은 불스 가드 중 (조던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라서 수비에서 은근 보탬이 됐다. 물론 나머지 능력이 떨어져서 출전시간은 별로 못 받았지만. 둘 다 지극히 평범한 벤치멤버지만 G 리그급은 너무 나간 것이었다. [32] 밴 건디의 해당 코멘트는 억지인 것이, 조던의 친구들은 한 번도 그를 슬슬 대한 적이 없다. 조던을 가장 괴롭힌 것은 디트로이트지만, 1차 3연패 기간에 그를 가장 육체적으로 몰아붙힌 시리즈, 그가 가장 심하게 부진했던 시리즈가 바로 뉴욕을 상대한 1992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 그리고 1993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이다. 조던의 절친들인 패트릭 유잉과 찰스 오클리가 엄청나게 하드 파울을 해대는 바람에 그는 골밑 돌파를 거의 할 수가 없었던 것. 오클리는 조던을 내동댕이치거나 유잉은 돌파하는 조던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하기도 했다. 한 번은 조던이 덩크를 하는데 유잉이 뒤에서 밀자(다행히 착지를 잘했지만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었다) 조던이 화가 끝까지 나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며 유잉에게 다가간 적이 있었다. 스스로의 회고로 "한 번은 시리즈 도중 싸울 뻔했죠(At one point in that series, I was ready to go to blows with him)"라고 한 시점. 조던은 NBA에서 친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당시는 이런 친분과 상관없이 빡세게 농구했다. 또 다른 예가 붙을 때마다 승부욕을 불태우며 트래시 토킹하며 치열하게 맞붙은 찰스 바클리와 조던(바클리는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저건 파울 맞아요! 저 놈이 마이클 조던이건 아니건요!"라고 빈정거렸다가 테크니컬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조지타운 선후배인 유잉과 알론조 모닝이 있다. 이들은 유잉이 모닝에게 신장 하나를 떼어주겠다고 검사를 받을 정도로 절친했는데, 유잉의 표현의 따르면 자신들은 형제나 다름없지만 코트에선 서로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이때로 끝난 게 아니라 은퇴하고 나서도 잊지 않고 있다가 자신의 명예의 전당 입회연설때 제프 밴 건디의 실명을 거론하며 자신은 그저 친구들과 밥한끼 먹으려 했을 뿐인데 그것도 못했고 어쨌든 동기부여가 되었다며 콕 집어 언급했다. [33] 1993년 3월 19일 경기 [34] 당시 스미스는 경기당 평균 9득점 하는 별 볼일 없는 슛가였지만 이날 조던의 매치업으로 나와서 15/20개의 2점 야투를 성공시켜버리며 37점으로 자신의 커리어하이 기록을 쓴다. 조던은 이날 9/27로 25득점을 기록했다. [35] 경기 시작전 기자들에게 전반전에 전날 스미스가 넣었던 37득점을 넣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더불어 스미스는 이날 15득점 밖에 못했다고 한다. [번역] "내가 해낼거라고 말했지?" [37] 닉 앤더슨은 1989 드래프트 1라운드 11순위로 올랜도 매직에 지명된 준수한 슈팅 가드였으며 해당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괜찮은 활약으로 팀을 파이널로 이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의 파이널 1차전 110-107로 앞서던 종료 5초전 1개만 넣으면 승리가 확정적인 상황에서 연달아 얻어낸 자유투 4개를 몽땅 실패하는 대삽질. 이후 케니 스미스에게 3점 슛을 얻어 맞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그리고 연장 종료 직전의 하킴 올라주원의 팁인으로 1차전을 내준 이후 올랜도 매직은 무기력하게 스윕당하며 우승을 헌납한다. 그리고 닉 앤더슨은 파이널의 역적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38] 해당 시즌 올랜도 매직은 지난 시즌보다 3승을 더 올린 60승 22패의 성적으로 동부 컨퍼런스 애틀랜틱 디비전 수위를 차지한 여전한 강팀이었다. (단, 호레이스 그랜트가 불스와의 1차전 이후 아웃되는 악재가 있긴 했다.) 매치업 상대인 닉 앤더슨 역시 무자비하게 털어주셨는데 닉 앤더슨의 1차전부터 3차전까지의 FG-FGA를 보면 1차전 0-7 2점, 2차전 3-11 9점, 3차전 6-11 14점이었다. 그리고 4차전은 부상으로 아웃. 조던의 그것은 1차전 9-17 21점, 2차전 9-21 35점, 3차전 5-14 17점, 4차전 16-23 45점이었다. 해당 시리즈의 영상을 보면 1-3차전 동안 눈에 불을 켜고 닉 앤더슨을 막는 조던의 위엄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2차전에서는 지난 시즌의 스틸을 잊지 않고 똑같이 닉 앤더슨의 공을 스틸로 갚는 쪼잔한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렇게 아웃된 닉 앤더슨이 빠진 4차전은 최종 목적인 올랜도 매직을 이기기 위해 득점을 퍼붓는 조던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1차전, 2차전, 3차전, 4차전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던의 1988-89 시즌 당시 트리플 더블이 무서웠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조던은 원래 트리플 더블에 목메는 선수가 아니었다. 조던은 1988-89 시즌 이전까지 통산 트리플 더블이 네 시즌 동안 5번, 이후론 10시즌 동안 8번에 불과했다. 이 시즌에 65경기를 소화한 시점까지 그는 32.6득점 7.6어시스트 7.6리바운드를 기록하고 있었다. 트리플 더블은 5개. 그러나 언론에서 득점만 뛰어날 뿐, 어시스트와 리바운드가 약하다는 기사를 트리플 더블을 바탕으로 냈다. 조던은 이 기사를 접하자마자 이에 시위하듯이 나머지 16게임 동안 10개의 트리플 더블을 찍었다. 정확히는 7게임 연속 트리플 더블 후 한경기 쉰 후에 3연속 트리플 더블을 달성했다. 말 그대로 원하면 원하는 대로 스탯을 찍은 것이며, 더욱 무서운 건 그 기간 동안 득점은 그대로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11경기 중 10개를 하던 (그 중 7개 연속) 기간에는 33.6점 11.4어시스트 10.8리바운드,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가 모두 올랐다. 이로 인해 해당 시즌 조던은 32.5득점, 8어시스트, 8리바운드를 달성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공격과 리바운드 관련 스탯만 본 것이다. 조던이 1987-88 시즌 올해의 수비수상 및 스틸왕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당시 그가 리그 최고의 수비수였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공격은 관중을 부르고 수비는 승리를 부른다."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되는 이 격언을, 문자 그대로 모두 달성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40] 조던이 은퇴하고 야구에 도전한 이유가 조던이 자신이 출전한 경기를 포함해서 NBA 경기에 돈을 걸다가 걸린 걸 조던의 상품성 때문에 징계를 주지 않고 참던 NBA 수뇌부가 폭발한 것이라거나, 심지어 아버지가 살해당해서 늪에서 발견된 것도 도박 빚이 원인이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정도 건이라면 그건 상품성과 무관하게 언젠가 터져버릴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대로 안고 가려야 갈 수가 없다. 게다가 버리지 않고 상품성을 보존한답시고 징계 대신 다른 스포츠, 그것도 프로에 도전하게 내버려 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몸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르는데? 일부 농구팬들의 생각과 달리 야구는 어깨와 무릎에 엄청난 무리를 주는 스포츠다. 그나마 조던이라 2년 동안 이런 뻘짓을 하고도 농구하는 게 가능했던 것 뿐이다. 실제로는 이건 거의 미친 짓이고, 은퇴 후 몇 년을 딴 짓하다 복귀해서도 여전한 지배력을 보여주며 성공한 사례는 그만이 유일하다. [41] 페이튼이 상대를 인격적으로 도발하는 입발이었다면, 조던은 상대방을 실력으로 무시해서 살짝 비꼬는 입발. 혹자는 우아하다고도 표현했지만 달리 보면,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고 짜증나는데, 근데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은 못하는, 사람 환장하게 하는 트래시 토킹의 소유자였다. 물론 조던도 페이튼의 트래시 토크에는 넌더리를 치면서 '그의 아가리에 농구공을 쳐넣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42] 윌킨스는 서로 개인감정이 딱히 없었고, 바클리와 유잉은 절친 중 하나였으며, 코비는 가장 아끼는 후배였으며, 캐벌리어스 중에서도 별다른 악연이 없었고 오히려 론 하퍼와는 친한 사이였다. 말론&스탁턴은 친구까진 아니지만 악연도 아니며, 팻 라일리는 마이애미 히트 사장 시절에 조던의 23번을 (좀 생뚱맞게) 영구결번해줄 정도로 리스펙했다. 레지 밀러의 경우 둘 다 호전적인 성격이라 주먹다짐을 한 적도 있었지만, 코트 밖에선 상호 리스펙하는 사이였다. 저 중 유일한 예외는 아이제아 토마스로 유명한 앙숙 사이이다. [43] 상술되어 있지만 조던의 1차 은퇴 이전 득점왕 7연패 기간동안 칼 말론과 각각 3, 4번씩 2위를 나눠가졌다. [44] 이때문에 1990년에 윌킨스와 붙어 아깝게 우승을 놓친 케니 스미스는 "도미니크가 나랑 붙었을 때 똑같은 덩크를 세 번 했는데 똑같은 점수를 받았다"고 야유했다. [45] 이 부분은 당시 트렌드를 감안해야할 부분으로, 80년대엔 덩크 콘테스트에서 모든 참가자들이 자신의 주무기를 여러번 선보였다. 2라운드로 진행되는 현행과 달리 92년도까진 3라운드 체제였으며, 심지어 88년까진 준결승과 결승에선 덩크를 세번 해야했다. 즉 네 번의 덩크로 우승이 결정되는 현재와 달리 당시엔 우승을 할 때까지 덩크를 8번이나 해야했다. 덩크의 가짓수나 기술 자체가 현재만큼 발전하지도 않은 시기다보니 당연히 윌킨스, 그리고 후술되는 조던을 포함한 참가자들은 같은 덩크를 여러번 선보일 때가 많았고, 이게 마이너스 요소도 아니었다. [46] 조던은 슬램덩크 콘테스트에 나올때마다 최소 1번 이상 자유투 라인 덩크를 했는데 이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적은 없었다. [47] 사실 윌킨스같은 경우 피해자라고 보기도 좀 애매한게, 이벤트전에 불과한 덩크 콘테스트나 득점왕은 사소한 자존심 싸움에 불과하고, 정작 중요한 플레이오프에선 둘이 한번 붙었을 뿐이다. 그것도 호크스가 우승권과 거리가 멀었던 93년에 1라운드에서 붙었으니 윌킨스의 우승 기회를 조던이 뺏은 적은 없다. 윌킨스의 우승을 향한 꿈을 꺾은 상대라면 57승을 한 87년에 호크스를 탈락시킨 피스톤즈, 그리고 88시즌에 7차전 명승부 끝에 자신을 좌절시킨 래리 버드, 그리고 셀틱스를 꼽을 수 있다. [48] 애초에 조던은 인터뷰때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라 남은 공개적으로 저격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드림팀 당시에도 조던에게 기자들이 꽤나 집요하게 질문했는데 요리조리 잘 피해가는 조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9] 여담으로, 그들은 조던이 은퇴한 1994년에 플레이오프에서 불스에게 밀려 또 탈락한다. 불스를 상대로는 5전 5패. [50] 물론 1999 파이널 당시 유잉은 부상중이었다. [51] 단, 조던이 현역 선수보다 가끔 인기에서 밀릴 때가 있듯이, 100년 전 스타인 루스가 조던보다 인기 조사에서 불리함은 감안해야 한다. 아무튼 조건을 아무리 깐깐하게 잡더라도, 2차 대전 이후의 현대 미국사에서 조던만큼의 스포츠 스타는 단연코 없다고 할 수 있다. [52] 한 예로 토니 파커와 에바 롱고리아가 사귈때, 파커는 올스타급 선수고 롱고리아는 나름 인기가 많지만 연예계에서 정상급 스타는 아니었음에도 주목도는 롱고리아가 훨씬 높았다. [53] MJ는 그녀의 오빠인 마이클 잭슨의 이니셜과도 같다. 당연하지만 자넷이 조던을 잭슨으로 착각하고 전화한 건 아니다. [54] 연속 1위 부문은 2017년부터 2023년까지 마찬가지로 1위를 차지한 르브론과 타이 기록이다. 르브론은 20년동안 10번, 조던은 15시즌 동안 9번(이 중 한번은 95시즌으로 올스타 투표 기간 이후 복귀해 투표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후보에 오른 건 14번) [55] 이 두 선수는 조던 이후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린 선수인데 커리어를 통틀어 이 리스트에서 조던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한게 각각 한 번씩 뿐이다. 르브론은 아직 커리어가 남았으니 그렇다고 쳐도 코비는 2010년 1위 이후 계속 순위가 하락세인데다, 2015년 12월 현재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더 올라가긴 힘들어졌다. [56] 미국에서 공식문서를 쓸때 제외하면 미들네임을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미들네임을 서로 모르는 경우도 많을 정도. [57] NBA 경기장이 훨씬 작고 선수들도 미식축구보다 적기 때문에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농구경기를 하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2010 올스타전 같은 경우 카우보이 스타디움의 대형 화면이 크고 화질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고 시설도 특급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인데, 시설이 훨씬 안 좋고 기술이 떨어지던 1998년에는 6만명 수용한 것도 무리해서 한 것이다. 실제 당시 장면을 보면 꼭대기 자리에선 코트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58] 브래디가 입단하던 2000년도에 조던은 2차 은퇴 상태였으며, 3년 뒤에 최종은퇴를 했다. 2021년은 조던이 데뷔한지 37년이 지난 시점이다. [59] 기존 버전에는 마이클 조던이 은퇴할 때까지 받은 연봉이 에어조던으로 받은 광고비의 1%도 안된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건 와전된 것이다. 조던이 97년에 모든 광고수익으로 받은 돈은 4천7백만 달러였고 90년대 초반까진 이 수입이 절반 정도였으며 당연히 80년대엔 저것보다 훨씬 적었다. 설령 84년부터 98년까지 15년 연속 매년 4천만 달러를 받았다고 쳐도 6억 달러로, 누적 연봉의 6배 조금 넘는 비용이다. 현재 조던은 광고수익으로 연간 1억3천만달러 정도를 벌고 있는데, 저 서술이 진실이 되려면 조던은 똑같은 수입을 70년 연속으로 올려야 한다. [60] 아이러니하게 위에도 적혀있지만 이런 점이 그의 인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조던은 2005년까지 해당 항목에서 전 종목을 통틀어 최고의 인기선수였고, 그는 그의 수입에도 반영되었다. 실제로 르브론 제임스는 데뷔 초에 조던처럼 철저하게 이미지 메이킹을 하다가 마이애미 이적부터 부정적인 이미지가 추가되었는데도 최고의 인기선수로 군림했다. 또한 악동 찰스 바클리만 하더라도 조던 다음으로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다만 조던이 농구 자체의 항목을 넘어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것에는 특유의 그 완벽한 이미지가 크긴 했다. [61] 제리 크라우스는 라커룸 관련 이야기의 소스가 필 잭슨이었다고 의심했으며 굳건했던 둘의 관계가 틀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항목의 기사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 나오는 내용으로 필 잭슨은 과거 MAVERICK이라는 자서전에서 본인의 LSD 복용 및 업계의 뒷 이야기를 서술하여 업계에서 찍힌 인물이었다. 라스트 댄스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제리 크라우스는 코치 면접에서 입을 복장을 정해주거나(일전에도 면접을 보았지만, 면접에 적합하지 않은 복장을 입고 와서 탈락했다), 면접에서 나올 질문 내용을 알려주었으며 당시 감독인 덕 콜린스에게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영입하자며 영입을 주장했을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했는데, 라스트 댄스에서 필 잭슨의 선수 시절을 1970년대의 데니스 로드맨이라고 평했던 것처럼 불스 감독 부임 이전 필 잭슨의 평판은 자서전 팔아먹으려고 업계 치부(마약, 문란한 사생활 등)나 밝히는 약쟁이 수준이었다. [62] 당연한게 책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조던을 제외하면 부정적인 묘사가 나온 인물은 제리 크라우스 뿐인데, 크라우스는 책 발매 이전이나 이후나 항상 언론과 사이가 안 좋았다. [63] 코비의 비극적인 사망 전후로 많이 부각되었다. 오히려 그 전까지는 팬덤끼리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코비의 추모 분위기였던 2020 시카고 올스타전 때 조던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었다. 되돌아보면 코비 추모 분위기가 되어야 할 올스타전에 시카고 불스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자신이 등장하면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몰릴까봐 불참한 것으로 보인다. [64] 공격수가 포스트업하고 힘으로 밀어내고 있을 때 수비수가 갑자기 확 뒤로 물러서면 공격수가 밀어내던 힘이 갈 곳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넘어지거나 공을 놓치게 된다. 한국에선 소위 "의자빼기"라고 불리는 기술로, 잘 쓰면 상대의 실책을 유도할 수 있지만 공격수가 낚이지 않으면 그냥 비켜주는 꼴이 되는 수비 기술. [65] 명예의 전당 헌액자를 소개하는 것은 기존 헌액자 중 그 인물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사람을 선택한다. 과거 조던은 어린 시절 우상 데이비드 톰슨을, 피펜은 조던을, 이번에 코비와 같이 헌액되는 팀 던컨은 절친한 선배이자 스퍼스의 첫 우승을 같이 이끈 데이비드 로빈슨을 선택했고 케빈 가넷은 같은 시카고 출신의 아이제아 토마스를 선택했다. [66] 그로버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 코비를 담당했는데 실제로 코비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로버가 담당하기 전까지 코비 브라이언트는 단 한 번 전경기 출장을 했었고, 데뷔 이후 평균 71.2경기만을 출장했었지만, 그로버가 담당한 5시즌간은 무려 3번을 전경기 출장하고 평균 75경기를 출장했다. 이것도 2011-12 시즌 후반기에 시즌아웃급 당했기 때문에 58경기 결장한 것 때문. 물론 그전에 비해 출장시간 관리를 받긴 했지만, 18~28세 구간동안 71경기씩 뛰던 선수가 12년차에 접어든 29세~33세 구간동안 출장경기수가 늘었다는 게 확실히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67] 그는 North Carolina A&T State University에 진학해 농구를 했고 그의 재학 시절 NCAA 토너먼트에 나가긴 했지만, 이 학교는 2013년이 되어서야 NCAA토너먼트에서 첫 승을 할 정도였다.(2023년 현재까지 유일한 승) 이후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존재한 World Basketball League란 마이너 농구 리그에서 잠깐 뛰었다가 농구선수 생활을 그만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그는 동생 마이클이 소유하고 있는 샬럿 호네츠의 경영진으로 일하고 있다. [68] 설마? 싶은 사람들은 조던 아버지의 생전 사진을 보고 오면 된다. 거의 조던 얼굴의 복붙 수준이라 절대 다른 씨일 리가 만무하다... [69] 실제로 조던은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우린 7차전을 이길 겁니다"라고 호언장담한다. [70] 후아니타는 위자료로 1억6천8백만 달러를 받았다. [71] 2023년 12월말 기준 192억 5300만원 [72] 집을 비운 상태로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구도 모두 새걸로 바꿔놓은 모델하우스와 동일한 상태 [73] 전 구단주 [74] 조던이 특별했던 것은 비슷한 체격의 선수들 중 특히나 힘과 스피드가 우월했기 때문이지, NBA 전체로 보면 그보다 스피드만큼은 빠른 선수도 몇 있었고 조던보다 힘 쎈 선수들은 많았다. 당장 동시대 슈팅 가드 중에도 'The Rock'이란 별명이 붙은 미치 리치몬드는 조던 못지 않게 근육질이고 단단한 체격을 지녔으며, 조던과 달리 대학시절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몸무게도 더 무거웠던 "Thunder" 댄 멀리는 오히려 파워면에서 조던을 상회했다. 이런 선수들과 차이점이라면 조던은 힘도 세면서 이들보다 훨씬 빨랐고, 또한 자신의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 당장 후대의 르브론만 해도 신장과 체중 등의 프로필은 조던보다 훨씬 우월했지만 포스트업에선 피지컬 값을 못한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고, 2011 파이널에서 키드를 포스트업으로 제압하지 못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때를 기점으로 르브론도 포스트업의 효용을 깨달았는지 하킴 스쿨을 수강하고 추가로 흔히 갈통더웨이라고 불리는 포스트-페이드 옵션을 단련하며 한 단계 더 성장하긴 했지만, 이 역시 포스트업은 힘쎄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75] 그리고 코비 브라이언트의 은퇴경기 때 안 좋은 의미로 비교되었다. [76] 마이클 잭슨은 실제로 운동을 잘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거식증으로 몸이 굉장히 말랐었다. 사실 운동은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애초에 콘서트에서 격렬한 춤을 2시간동안 추는 사람이니... [77] 여담이지만 당시 게임이라는 한계상 선수들의 기량을 100% 정확히 반영하진 못하기 때문에 비슷하게 외곽슛이 없고 운동능력이 좋으며 스틸/블록 능력도 비슷한게 덩치가 약간 좋은 피펜이 전체적인 능력치가 더 높은 로스터 플레이어보다 활용도가 더 좋았다. 1990년대에 나온 농구게임엔 조던이 안 나오는데 불스 왕조가 워낙 인기가 좋은지라 2인자인 피펜이 거의 깡패급으로 능력이 좋게 나온 것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피펜이 (말그대로) 끝판왕이었던 NBA Hangtime. 파울이 없고 만화적인 덩크가 넘치는 이 게임에서 끝판왕은 불스의 피펜과 로드맨이었는데, 빅맨과 스윙맨의 파워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은데다 거의 전 능력치가 만빵에 가까운 (심지어 외곽슛조차 5점만점의 4점으로 스티브 커와 똑같다. 실제 능력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수치) 피펜은 거의 악마급의 위용이었다. [78] 정확히 말하면 선수협(NBA Players Association)에 소속된 선수들은 현역일 경우는 선수협과 계약되어 있는 게임은 전부 등장시킬 수 있다. 조던이 선수협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탈퇴했다는 것은 와전된 것으로 라이센싱 딜에서만 이탈한 것이지 선수협 탈퇴가 아니다. 해당 사실에 대한 ESPS 기사(영문) 또한 은퇴선수들의 경우 당연히 선수가 아니라 선수협회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해당 선수와 따로 계약을 체결해야 하며, 이 때문에 2024년 현재 기준 NBA 2K에는 등장하지 않는 은퇴선수가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찰스 바클리 레지 밀러. 이 때문에 현역이면서 게임에 등장하지 않은 조던은 당시에도 현재에도 특이한 경우이며, 은퇴선수들은 2K24 기준 바클리과 밀러 외에도 라시드 월러스, 테이션 프린스, 제임스 존스가 있다. [79] 본인이 출연한 그 영화의 게임 버전. [80] 스페이스 잼 게임에는 각 캐릭터마다 필살기가 존재했는데 조던은 외곽지역에서 팔이 쑥 길어지면서 덩크하는 모션이 필살기였다. [81] 실사 디지타이징을 사용한 그래픽은 뛰어났지만, 너무 과하게 시뮬레이션을 추구했다는 평을 받아 흥행은 별로 좋지 않았다 [82] 이기지 않고는 못배기고, 이길때까지 성장하지 않고는 못배길 정도로 승부욕에 미쳐있다는 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83] 콰미랑은 좀 다른 것이, 콰미는 정말 포텐봤다 망한 거지만, 애덤 모리슨은 지병이 있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뽑은 것이다. 물론 이런 애를 3순위로 뽑은 것 자체가 뻘짓이란 건 다를 바 없지만, 최소한 애덤 모리슨은 대학 무대를 주름잡았던 선수였다. 그리고 콰미는 하필 워싱턴이 1순위로 뽑아서 그렇지, 당시 스카우팅 리포트와 워크아웃 결과에 따르면 리틀 가넷이나 크리스 웨버에 비견되었다. 당시 1~4순위 안에 고졸 루키인 타이슨 챈들러, 에디 커리가 포함된 것을 볼 때 콰미는 어차피 최소 3순위 안에는 뽑힐 것이었다. 뭐 레전드가 된거야 어쩔 수 없지만. [84] 시카고 선수들이 끝나고 맥주 한두캔씩 했다거나, 알콜 중독이 좀 있는 제이슨 키드가 맥주가 가득찬 간이냉장고를 비웠다거나 하는 얘기가 있지만 썰이지 사진이나 영상은 없다. [85] 과거 무려 8연패를 이끈 레드는 승리를 확정지었다 싶으면 시가를 피워물곤 했고 NBA에서 유행이 되어 우승 후 시가를 피우는 전통이 생겨난 것. 또한 이제는 농구 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우승한 다음에 시가를 피운다. 아예 light a victory cigar란 속어가 생길 정도. 실제로 최근에 우승한 르브론 제임스 스테판 커리도 우승기념 모자와 셔츠를 입고 시가를 라커룸이나 코트에서 피우는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86] 물론 구강암 등의 위험 때문에 건강에 좋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지만 조던의 운동 능력을 크게 해치지는 않았을 것이기도 한데 오프 시즌 당시 시가를 자르다가 손가락 인대를 베인 사건도 일어난 걸 보면, 좀 많이 악영향을 받은 건 맞다. [87] 플레이보이 1992년 5월호 인터뷰 중. [88]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가 조던으로 인해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비단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뿐만 아니라 조던 시대에 스포츠 미디어는 웬만하면 흥했다. [89] 출처 [90] 출처 [91] 레지 밀러같은 샤프 슈터들은 중요한 공격권 직전에 타임아웃에서 잔뜩 바르고 나오기도 한다. [92] 케빈 가넷은 조던에 대한 존경심에서 이를 따라하곤 했다. 실제로 가장 유명한 가넷 경기 중 하나인 2004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 7차전에서 해설을 맡은 케빈 할런이 "가넷이 조던에 대한 경의(tribute)를 표하고 있군요"라고 언급한다. 어린 나이에도 당돌했던 그 역시 훨씬 나이 많은 해설자들에게 친근하게 파우더를 뿌리곤 했다. 실제로 그에게 "Big Ticket"이란 별명을 지어준 유명 해설자 케빈 할란 역시 팀버울브스 전속 해설자 시절 파우더 테러를 맞곤 했으며, 둘은 지금도 만나면 친근하게 투닥투닥 장난 치는 사이다. 이런 훈훈하고 소소한 세러모니인데, 르브론이 하는 것은 해설자고 뭐고 그냥 하늘에다 냅다 뿌리면서 포즈를 잡는 것 뿐이다. 거기에는 조던과 커, 가넷과 할란 사이의 일화나 우정도 없다. 조던의 세러모니를 더 충실히 따라한 사람은 케빈 가넷이다. 가넷은 조던과 마찬가지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시절 친한 해설자들에게 파우더 테러를 하곤 했는데, 조던이나 르브론만큼 엄청나게 인기 많은 선수는 아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는 상대적이다. 가넷의 세레모니도 유명했고 동시에 은퇴한 코비, 던컨과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레전드 선수이다. [93] 제프리는 2018년 7월 기준으로 만 29세, 마커스는 만 27세다. 둘 다 농구를 은퇴하고 마커스는 사업을, 제프리는 2013년에 나이키의 경영자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이 마지막 소식인데, 현재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94] 블로거들을 불러 구경시켜줬는데, 이 영상에서 나오는 차고만 여섯개 있는 저택은 게스트하우스다. 조던 본인과 가족이 쓰던 시설들은 나오지도 않은 것. 해당 영상 [95] 출처 [96] 이런 집은 골치아픈게 한화 150억 원 이상을 집에 쓸 수 있는 사람이면 이미 상당한 부호다. 높은 확률로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인사일 것이다. 근데 그런 사람이 허구헌날 구경꾼들이 찾아와 귀찮게 하고, 집 구석구석에 남의 흔적이 있는 집을 굳이 거액을 주고 살 필요가 있을까? 설령 조던 광팬이라고 해도 천오백만불은 "덕질"에 쓰기는 부담스러운 액수다. 차라리 1~2백만불 정도 적당한 액수였다면 기념품 사는 셈치고 살 수도 있겠지만. 또한 집 자체에 예술적 가치가 있다면 저런 돈을 주고 살 수도 있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조던이 자기 취향대로 기념품과 조형물로 떡칠해놓은 집이다.조던의 흔적이 싫다고 이런걸 싸그리 치우고 리모델링을 하려면 애초에 굳이 이런 집을 살 이유가 없다. 즉, 어떻게 봐도 구매자가 나오기 힘든 구조다. [97] 요즘 팬들의 경우 탈모하면 르브론 제임스가 가장 유명하겠지만, 조던은 20대 중반부터 정수리 부분까지 훤히 벗겨지는 등 르브론보다도 더 심했다. 이 때문에 1988년, 1989년 정도의 조던을 보면 머리 때문에 유독 더 나이들어 보인다. 다만 얼굴 자체는 젊고 상당한 미남이기 때문에 머리를 아예 밀어버리자 오히려 젊어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머리를 민 19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의 워싱턴 시절까지 사진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크게 없다. 다만 은퇴한 이후 급격하게 살이 찌기 시작해 급노화하기 시작했다. [98] 도를 넘는 인신공격이나, 인종차별발언은 절대 하지않는다 [99] 그 외엔 "King"이라고도 불렸는데 1998 올스타전 전에 해설자 밥 코스타스가 코비 브라이언트를 소개하면서 "아직 왕이 건물 안에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라고 언급했고, 1996 파이널 도중에 조던이 페이더웨이를 넣자 "왕이 두 점 더 넣습니다!(Two more down for the king!)"이라고도 했다. [100] NBA 팀들은 보통 선수나 관계자들에게 지인들이나 가족, 친구들에게 줄 티켓을 몇 장씩 배부한다. 당연히 원한다고 다 주는 건 아니고 팀 내 비중에 따라 다른데 연공서열은 무시되고 철저하게 인기/비중 순이라서 2004-05 시즌 샬럿 밥캣츠처럼 약체 신생팀인 경우 에메카 오카포는 루키면서도 에이스이기 때문에 티켓을 넉넉하게 받아 친지들에게 보냈다. 어쨌건 시카고 불스같이 초초초인기팀의 경우 (1997-98 시즌 당시 티켓 판매를 시작하기 전부터 줄이 길게 늘어져서 당일 정오에 전 시즌 티켓이 다 팔렸다고 한다) 후보들은 사비로 사거나 아예 못 사는 경우도 많았는데 조던은 매 경기 12~20장씩 원하는대로 다 받을 수 있었다(이런 티켓들은 비매용으로 빼놓는 경우가 대부분). 브라운은 팀에서 11~12번째 정도 비중을 가진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였기에 (3연패 기간동안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6분을 뛰었다), 티켓을 못 받은 것. [101] 다만 저녁 같이 먹고 계산서를 먼저 집는 건 잘 못한다고. 조던은 과거 절친이었던 찰스 바클리가 인증했듯이 천하의 짠돌이라고 한다. 재밌는 건 위에서 승부욕의 화신으로 언급된 우즈 역시 짠돌이라고. 바클리 왈, "조던과 타이거는 제가 아는 사람들 중 제일 짜요." [102] 이 부분은 퍼듀가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팩슨은 1994년에 은퇴했고, 하퍼는 1994 오프 시즌에야 불스에 합류했으므로 둘은 불스에서 같이 뛴 적이 없다. 그리고 팩슨은 퍼듀가 불스를 떠난 1995-96 시즌부터 코치로 합류했다. 즉, 팩슨, 하퍼, 퍼듀 셋이 동시에 불스에 몸을 담았던 적은 없다. 퍼듀는 1993-94 시즌에 팩슨과, 1994-95 시즌에 하퍼와 동료였으므로 헷갈린듯. 피펜은 NBA 생활에 익숙해지자 조던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따라하기 시작했는데, 1차 3연패 당시 조던, 피펜 등 슈퍼스타들과 잘 어울린 건 롤플레이어 클리프 레빙스턴이었다. 여담으로 레빙스턴은 애틀랜타 시절 도미니크 윌킨스와 어울리다가 돈이 쪼달려 고생을 했는데, 1989-90 시즌 불스와 협상 도중 급전이 필요했던 그가 제리 크라우스에게 낚여 피본 적이 있다. [103] 같이 훈련을 했던 동료 B.J. 암스트롱에 따르면 "최고의 선수들을 초청하면 시즌 시작 전부터 마이클이 그 선수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란 계산 하에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유행 비슷하게 되어서 너도나도 스튜디오에 와서 조던을 상대하게 된 것. [104] 여기서 다시 한 번 주목할 점은 이 미친짓을 한 것은 오프 시즌, 즉, 휴가기간이었다. 영화 촬영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닌데, 촬영을 하면서 시간을 쪼개 하루에 다섯시간 이상 운동을 하는 오프 시즌을 보낸 것이다. 그것도 야구하다 복귀한 32세 선수가. 저런 오프 시즌을 보내고 난 조던은 1995-96 시즌에 당연한 듯 정규 시즌+플레이오프 전경기에 출장하며 MVP+올-NBA 퍼스트 팀+올-디펜시브 퍼스트 팀+파이널 MVP를 석권했다. [105] 물론 샬롯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조던의 탓이 크다. [106] 심지어 1997년에 친선 토너먼트 형태로 오프 시즌에 유럽팀들과 붙은 1997년 맥도날드 챔피언십 파이널에서도 팀내에서 가장 많은 29분을 뛰었다. [107] 당시 의사들은 부상이 재발해 커리어가 끝장날 확률이 10%라고 했다. 당시 제리 레인스도프는 그를 아웃시키겠다는 결정이 지극히 타당하다고 여겨 알려준 것이다. 당시 시카고 불스의 시즌은 이미 망한 상태였으며 조던이 돌아와 뛴다고 해도 우승확률은 없고, 이미 망한 시즌 몇 경기 더 뛴다는 의미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던은 자신이 뛸 수 있는데 못 뛴다는 이유로 길길히 날뛰었으며, '팀이 드래프트 확률을 높이려고 꼼수를 부리는 게 아니냐'고 하기까지 했다. [108] 킹스전에서도 전반에 부상을 당했음에도 40분을 뛰었다. [109] 당시 신인이었던 이탄 토마스의 증언에 따르면 조던은 부상 이후 매경기 무릎에 물이 차 기형적으로 무릎이 퉁퉁 부었고, 라커룸에서 의료진이 거대한 바늘을 꽂고 피와 고름을 빼내야했다고 한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조던을 보며 토마스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에요? 당신은 마이클 조던이잖아요. 증명해야할게 있는 것도 아니면서"라고 하자, 조던은 그를 한참 쳐다보더니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전까지 별다른 부상 후유증이 없던 조던은 2001-02 시즌에 당한 이 부상 이후 무릎이 고질적으로 약한 부위가 됐으며,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아들 제프리 조던과 시합한다고 하면서 "내 무릎이 버텨주는 한 말이죠"라고 장난스럽게 언급하기도 했다. [110] 물론 말실수로 생기는 안티가 없다는 거지 안티 자체는 예전부터 많았으며, 대체로 그가 박살낸 동시대 선수들의 팬이나 그와 비교되는 후배 스타들의 팬인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조던 특유의 공격적이고 제왕적인 성격에 대한 호불호가 좀 있는 편. [111] 오펜시브 라인맨 등번호가 50~79중에서 골라야하는데 풋볼 조던은 73번이다.조던을 의식하고 등번호를 정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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