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 라틴어: Gaius Sempronius Blaes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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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조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아버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아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아들)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53년 |
전임 |
스키피오 아시나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
후임 |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임기 | 기원전 244년 |
전임 |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
동기 |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
후임 |
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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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고위 행정관을 정기적으로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셈프로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그처럼 티베리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기원전 253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집정관이 되기 이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그는 동료 집정관과 함께 26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해안을 공격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들은 상륙을 매우 빈번하게 했지만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그들은 아프리카 해안 마을들을 황폐화시키고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하여 배에 엄청난 전리품을 실었다고 한다.
그들은 해상 습격을 이어가다가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공세를 중단하고 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그러다가 폭풍을 만나자 모든 화물을 배밖으로 던지고 가까스로 파노르무스에 상륙했다. 이후 다시 이탈리아로 이동했으나, 티레니아 해에서 새로운 폭풍을 만나 150척의 로마 선박이 침몰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폴리비오스는 이 함대가 침몰한 장소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오로시우스는 루키니아 지방의 서쪽 해안에 있는 파이누르 곶 앞바다라고 설명했다. 그 후 로마는 새로운 함대를 제작할 자원이 없었기에 일시적으로 해전을 포기했다.
기원전 244년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두 사람은 에릭스 산을 거점으로 삼고 로마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며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게 한 하밀카르 바르카를 상대로 거의 매일 소규모 접전을 치렀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해 장기전으로 치닫는 것을 막지 못했다.( 에릭스 산 전투) 이후의 행적인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는 기원전 211년 호민관, 기원전 210년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역임했고, 또다른 아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는 기원전 217년 재무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