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라틴어: Lucius Postumius Alb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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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5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리타나 숲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아버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팀파누스(아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4년 |
전임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
동기 |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29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 |
동기 |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
후임 |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15년 |
전임 |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동기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1]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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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기원전 215년 실바 리타나 전투에서 보이족의 매복 공격으로 전사했다.2. 생애
로마 공화국의 첫 10년 동안의 자료에 언급될 정도로 유서깊은 귀족 집안 중 하나인 포스투미아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기원전 242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234년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아버지는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리구리아 전선을 맡았고, 막시무스는 코르시카로 보내졌다. 그는 리구리아를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 활동을 보였지만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해서, 코르시카를 평정한 동료와는 달리 개선식을 거행하지 못했다.기원전 229년, 그는 두 번째로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로마는 해상 약탈을 일삼는 일리리아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2만 보병과 2천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었고, 풀비우스 켄투말루스는 이 군대를 브룬디시움에서 아폴로니아까지 호송할 함대의 사령관을 맡았다. 아폴로니아와 에피다누스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고, 그는 일리리아 깊숙이 진격하여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대부분의 영토를 로마와 협조하겠다고 약속한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에게 넘겼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켄투말루스는 연말에 이탈리아에서 겨울을 보냈고, 그는 일리리아에서 겨울을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227년 봄, 일리리아의 여성 섭정 테우타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테우타는 이 협약에 따라 일리리아 함대가 리사 남쪽으로 항해하는 걸 허용하지 않고, 조공 지불을 보장했으며, 로마가 통제하는 도시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포기했다. 이후 그는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7년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로마군이 패배한 후,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이탈리아 북부)로 파견되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의 임무는 한니발 바르카의 군대에 가담한 켈트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단독으로 군대를 이끌고 포강 이북으로 진군하여 켈트인들의 땅을 약탈했다. 그 동안 로마에서 기원전 215년 집정관으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함께 선임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실제로 취임하지 못했다.
기원전 215년 초, 그는 군대를 이끌고 라티나 숲 깊숙이 진군했다. 그런데 숲속에 숲어있던 보이족 전사들이 통나무를 도끼로 찍어서 로마군을 덮치게 한 뒤 사방에서 습격했다.( 실바 리타나 전투) 많은 장병이 통나무에 깔려 사망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근처 다리를 건너 도망치려 했지만 건널목을 지키는 보이 분견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는 전투 도중에 전사하여 목이 잘렸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의 두개골은 금을 입힌 뒤 제물을 바치는 그릇으로 사용되었고, 성전의 제사장을 위한 술잔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로마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 그들은 지난 해 칸나이 전투의 충격에서 간신히 벗어나고 있었지만, 또다시 켈트족에게 전군이 몰살당했으니 이제 로마는 끝장이라고 여겼다. 상점은 문을 닫았고,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으며, 밤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이에 원로원은 순찰대를 시켜 거리를 돌며 가게를 다시 열게 하고 애도를 중단하게 했다. 이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그를 대신하여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나, 원로원이 평민 출신 집정관이 두명 뽑힌 것에 반감을 품고 불길한 징조를 핑계로 마르켈루스의 취임을 무효로 처리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선출했다.
그에게는 두 아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팀파누스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있었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는 기원전 194년 재무관을 역임하였고,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기원전 186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