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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저자 | 사도 바울로 | |
기록 연대 | AD 56-57년경 | |
분량 | 16장 | |
수신자 | 로마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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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8절 ( 공동번역 성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8절 ( 공동번역 성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8장 28절 (공동번역 성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8장 28절 (공동번역 성서)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1장 33-34절 (공동번역 성서)
성경의 52번째/45번째 권.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1장 33-34절 (공동번역 성서)
신약 성경의 한 권으로 사도 바울이 쓴 서간 중에서 배치 순서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서간이다. 로마 교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로,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에 있던 기원후 56~57년경 예루살렘으로 올라기기 직전인 3개월 동안 코린토에서 썼다고 여겨진다.
2.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
Et hoc scientes tempus: quia hora est jam nos de somno surgere. Nunc enim propior est nostra salus, quam cum credidimus.
Nox praecessit, dies autem appropinquavit. Abjiciamus ergo opera tenebrarum, et induamur arma lucis.
또한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장 11-12절 ( 라틴어 성경-천주교 성경)
본서의 내용에 근거하여 학자들이 제시하는 기록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Nox praecessit, dies autem appropinquavit. Abjiciamus ergo opera tenebrarum, et induamur arma lucis.
또한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장 11-12절 ( 라틴어 성경-천주교 성경)
2.1. 선교적 목적
바울로는 그의 에페소에서의 활동이 2년 이상 계속되고 그 성과가 주변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때, 자신의 선교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5:23에 근거해 볼 때 아마도 그는 오래전부터 로마 전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로가 다른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고(1:5, 6, 13-15), 그곳에서 자신의 선교적 임무를( 사도행전 26:16-18) 수행하고 싶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본 서신을 쓰게 된 일차적인 목적이 로마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방문을 미리 알아 준비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뵈뵈(포이베) 편에 짧은 편지를 보내어도 되었을 텐데 본 서간처럼 장문의 글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을 생각할 수 있다.- 바울로는 로마에 가는 것이 그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로마를 지나 스페인 지역까지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로마 교회를 안티오키아 교회처럼 전도 활동의 기지로 삼으려는 기대를 가졌다고 가정하는 데서 본 서신의 기록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즉 바울로는 먼저 로마 교인들에게 지난 20여 년간 전파해 온 복음을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그 복음을 이해시키고 한 걸음 더 나가아 그들을 자신의 사역에 동참토록 준비시킬 목적으로 본 서신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
바울로가 먼저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진술한 후 결론 부분에서 그가 로마로 가기 전에 먼저 유다를 방문할 것인데 이때 안전하게 그의 일이 성사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아(15:30-32)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불길한 징조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데서 본 서간의 기록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즉 바울로는 만일의 경우 자신이 죽게 될지라도 로마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직무을 바르게 계승하여 전해 준 그 복음을 로마 제국 끝까지 전파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본 서간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서간은 바울로의 마지막 유언장이고 로마 교회에 물려주는 값진 유산이었으며, 동시에 로마 교회를 통하여 주님을 믿는 전 세계의 성도들에게 물려주는 영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2.2. 변증적 목적
바울로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당시 모든 그리스도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잠재성을 가진 로마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올바르고도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본 서신의 서두인 바울로의 문안 인사(1:1-7)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또한 3:8을 보면 바울로는 그가 전하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자들에 대하여 자신과 복음을 위하여 변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2.3. 교훈적 목적
본 서신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체계적인 말씀으로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믿음을 계도하고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 바울로는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관한 심원하고 상세한 교훈을 주고자 하였다. 본 서신에 질문과 권유 형태의 문구(2:1, 3, 23, 26, 27; 3:1, 5, 8, 9, 27; 4:1, 10; 5:1; 6:1-3, 15; 7:1, 7, 13; 8:24, 31, 32; 9:14, 19, 23, 30; 10:14; 11:1, 2, 4, 7, 15; 12:2, 3, 14; 13:1; 14:1, 10; 16:17)가 허다하게 등장하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특별히 바울로는 본서를 통해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을 규명하였고 이 기반 위에서 각 개인의 구원과 성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자세, 국가와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 세계 열국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 등을 포괄적으로 그리고 세세하게 교훈하였다.3. 로마서의 구조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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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두(1:1-7)
1:1 발신자: 사도 바울로
1:2-6: 복음과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증언
1:7: 수신자: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신 로마의 교우 및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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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몸통 (1:8-15:13)
1)서언 및 논증의 주제 (1:8-17)
1:8-15: 감사말과 바울로의 의도
1:16-17: 총제목: 복음의 정의
2) 논증부(1:18-11:36)
1:18-4:25 의화론
5-8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누리는 삶
9-11장 하느님의 구원 섭리 안에 있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의 관계
3) 권면부(12:1-15:13)
12-13장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의 자세에 대한 훈계
14:1-15:13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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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말(15:14-16:27)
15:14-33 바울로의 여행 계획과 축복 인사
16:1-13 뵈뵈를 추천하는 말과 아는 지인들에 대한 문안 인사
16:25-27 송영
3.1. 내용 요약
개신교 용어로 적힌 요약에 대한 내용은 성경/신약성경/요약 문서
의
로마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로마서 1장 1-17절
사도 바울로는 이방인들에게 성경에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 교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빈다. 바울로는 로마 성도들에게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그동안 가지 못했다. 바울로는 로마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하는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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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8-32절
만물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증거하며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온갖 죄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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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 1-16절
모든 사람은 남을 정죄할 자격이 없는 죄인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각 사람이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유대인은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며, 이방인 역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지만 양심이 이방인 역시 율법의 요구[1]대로 행해야 한다는 증거가 되며 율법의 역할을 한다.[2]
-
로마서 2장 17-29절
몸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율법을 어기면 참유대인이 아니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사람일 뿐이다. 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에 할례를 받고 속사람이 거듭났다면 그 사람은 참유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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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1-8절
유대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 하느님을 믿을 기회를 더 많이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방인에 비해 혜택이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의 불의와 하느님이 대비되어 하느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난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을 통해 하느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그 자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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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9-20절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율법의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질 사람은 없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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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21-31절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위로는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 율법의 행위와 상관 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써 이전에 지은 죄가 간과되어 하느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고, 그로써 율법이 도리어 굳게 세워진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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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어떤 행위를 한 것 없이 믿음만으로 하느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만으로 하느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하느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할례를 받기 이전의 일이고, 할례는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표일 뿐이므로,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하느님에게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고,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역시 그 믿음으로 하느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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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1-11절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화평을 누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 천국을 소망하며, 환난은 인내, 연단, 소망을 이루게 하는 줄 알기에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도 드문데,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은 우리는 하느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을 것이고,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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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12-21절
아담의 원죄로 인해 그때부터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던 세상에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하여 율법이 들어왔으나, 그로 인해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의 은혜가 넘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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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1-14절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죽은 바 된 사람은, 죄에 대해서도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죄를 지으려는 욕구를 죽여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옛사람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장래에 자신도 부활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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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15-23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은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다. 정말 믿는 사람은 이전에 자신을 불법에 내주었던 것 같이 자신을 의에게 내주어,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지 않고 의의 종이 되어 영생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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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 1-6절
남편이 죽은 여자는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율법에 대해 죽은 자가 된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으로 하느님을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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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장 7-25절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지만 율법이 죄에 대해 알려줌으로써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긴다. 사람이 마음으로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여도,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아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5] 그 사람은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해 더욱 생생히 자각하게 된다.[6]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행하고자 하여도 죄의 본능 밖에 남아있지 않아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망의 몸에서 사람들을 건지셨고, 그로써 구원받은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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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1-14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평안함으로 율법의 요구[7]를 이룰 수 있으며, 그 사람의 영혼은 정죄함을 받지 않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 반면 육신의 것을 생각하며 육신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게 되고, 성령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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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15-30절
우리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 하느님의 자녀이면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상속자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성도들이 현재 받는 고난은 미래에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소망 가운데 참고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도우시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하느님은 미리 아신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미리 정하셨고,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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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31-39절
아무도 하느님이 택하신 자들을 대적하고 정죄할 수 없다. 성도들은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로 인해 넉넉히 이길 수 있고, 어떤 존재도 성도들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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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1-5절
바울로는 원래는 하느님의 선민이었으나 지금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신의 동족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으로부터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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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6-33절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고, 약속의 자녀여야 하느님의 자녀다. 야곱과 에서가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느님의 택하심에 따라 야곱만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듯이,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는 것은 개인의 희망사항이나 육신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완악하게 할 자를 완악하게 하셔서, 주권적으로 각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유대인 중에서만 긍휼히 여길 자들을 택하시지 않고, 이방인 중에서도 긍휼히 여길 자들을 택하셨다. 믿음을 의지한 이방인들은 의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율법적 행위를 의지한 유대인들은 의에 이르지 못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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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장
바울로는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지만, 그들은 하느님께 열심은 있으나 믿음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써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며 하느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야만 의에 이를 수 있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복음을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했으나,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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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장 1-10절
그러나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시지 않았고, 유대인 중에서도 현재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유대인들은 완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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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장 11-24절
하지만 바울로는 완악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른 것을 보고 시기하게 만들어 그들 중 얼마라도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한다. 참올리브 가지들이 부러져 그 자리에 돌올리브 가지를 접붙힌 상황 같이, 믿음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에게 버림받음으로 이방인들이 하느님에게 선택받게 되었다. 그러나 원가지인 유대인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볼 때, 현재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방인들도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며 마음에 교만을 품지 말아야 한다. 또한 현재 완악한 유대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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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장 25-36절
충분한 이방인의 수가 구원을 받기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일부가 완악하게 되었는데, 결국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9]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셨고, 하느님의 부르심은 번복될 수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방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처럼, 완악한 유대인들도 결국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이 그들 모두를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그들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다. 하느님의 판단과 지혜는 헤아릴 수 없고, 만물은 하느님으로 말미암고, 영광이 하느님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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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1-2절
성도들은 자신의 몸을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하고 이것이 하느님께 드릴 영적 예배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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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3-8절
각 사람마다 하느님에게 받은 믿음의 분량과 은사가 다르므로, 각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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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9-21절
거짓없는 사랑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붙들어야 한다.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소망 가운데 기뻐하며 환난을 참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핍박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며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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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1-7절
위에 있는 권세들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이 세우신 일꾼들이기 때문에, 그 권세에게 복종하며 조세를 잘 내면서 사회질서에 순종해야 한다.[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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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8-10절
서로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아야 한다. 율법의 모든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신 말씀 안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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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11-14절
구원의 때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대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단정히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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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장
강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특정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 같이 믿음이 연약하여 각자의 마음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자기 자신이 아닌 하느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의심하며 행하는 것은 죄이므로,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는 특정 행위를, 믿음이 연약하여 그것을 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형제 앞에서 함으로써 그 형제가 죄에 걸려 넘어질만한 상황을 조성해서는 안된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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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장 1-7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기쁘시게 하지 않으신 것 같이, 믿음이 강한 사람들도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주며, 서로가 서로를 받아주고, 모두가 한 입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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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장 8-13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유대인의 조상에게 주신 약속을 확증하고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긍휼하심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할례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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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장 14-33절
바울로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하느님에게 부르심을 받았고, 하느님은 말과 행동과 표적과 기적 등으로 바울로를 통해 여러 일을 이루셨다. 바울로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지만, 남의 터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고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지역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 했었다. 그래서 바울로는 여러차례 로마로 가려는 길이 막혔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로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예루살렘에 전달한 후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리려고 한다. 바울로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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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6장
개인적인 문안인사들과 권면 및 축복의 말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지식적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 선행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매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도록 만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라는 의견이 다수이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머리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구원파 등에서 주장하며, 대다수의 기독교에서 이단적인 가르침이라고 여긴다.
4. 신학적 중요성
로마서는 단순히 justification만 중점적으로 바라다보면 안 된다. 물론 로마서 자체도 바울로의 모든 신학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로의 신학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로 이용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장에 근거하여 원죄에 대한 신학을, 칼뱅(칼빈)은 로마서 9장에 근거하여 예정에 대한 신학을, 가톨릭 교회는 로마서 2장에 근거한 자연법에 대한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When any one understands this Epistle, he has a passage opened to him to the understanding of the whole Scripture.
누구든지 이 서간을 이해할 때에, 그에게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린다.
ㅡ 장 칼뱅, "Commentaries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中
역사적으로도 이 로마서는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개신교에 큰 의미가 있는데 종교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었고, 감리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에게는 기적적인 회심의 체험을 맛보게 했으며, 현대 신학자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를 폭파시킨 폭탄이 된 것도 로마서다.누구든지 이 서간을 이해할 때에, 그에게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린다.
ㅡ 장 칼뱅, "Commentaries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中
4.1. justification의 의미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는 이 로마서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justification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한국어 번역 역시도 차이가 난다. 서방교회라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가톨릭과 개신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설을 바탕으로 바울로의 justification을 매우 중요한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두 종파는 미세한 관점의 차이를 갖고 있는데 개신교는 이를 '칭의', 천주교는 '의화'로 번역했고 이 둘이 내포하는 의미는 차이가 있다.justification 개념은 로마서 3장 23~24절에 나오는 개념인데, 대부분의 한국의 개신교 종파에서 사용하는 개역개정 4판 성경과 한국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 성경에서는 여기서 명백하게 차이 나는 번역을 보여주고 있다.
천주교 (성경) | 개신교 (개역개정 4판) | |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13][14] | |
로마서 3장 23~24절 |
이 번역의 차이는 어찌 보면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 종파들의 교리 차이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의 칭의와 가톨릭의 의화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단순하다. 칭의는 원래 인간이란 작자들은 절대로 의로울 수 없는 존재인데 예수가 수난과 부활로 인간의 죄를 사해 주었고 그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가 인간들에게 미쳐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의인이 아니었던 자가 예수의 죄사함을 믿으면 하느님의 은혜를 얻어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의화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진짜로 의로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결국 가톨릭과 나머지 개신교 종파들의 구원관이 여기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들은 "인간은 의인이 될 수 없는데 예수를 믿으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의인으로 칭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니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해석은 로마서 1장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과도 모순이 없고 마르틴 루터 역시 이 구조의 이신칭의를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개신교 종파들의 구원관이 흔히 오해되기도 하는데, '칭의'는 믿기만 하고 아무 짓 안 해도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절대로 아니다. 이런 주장은 구원파가 즐겨 하는데 전형적인 도덕무용론으로서 개신교에서도 이단 취급 당한다. 일반적으로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칭의 이후에는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선하게 살려 노력한다'는 설명이 뒷받침된다.
그러나 칭의론 자체가 잘못 해석하면 구원파스러운 해석으로 빠지기 십상인 신학적 이론이라 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루터를 대신하여 칼뱅과 웨슬리는 중생(거듭남)과 성화에 대한 신학적인 이론들을 재정립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15]
반면 가톨릭의 의화는 의인들은 구원을 받고 그 의로움이 믿음에서 온다는 것 자체는 같은 그리스도인 만큼 동일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믿는 이들이 정말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톨릭 신자도 나쁜 짓 할 수 있던데요?"라는 당연한 질문이 따라오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는 로마서의 또 다른 구절은 5장 1-5절을 덧붙여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5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본)
로마서 5장 1-5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본)
즉 가톨릭에서 말하는 의화의 내용은 '죄의 용서와 내면적 쇄신'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인간은 이 은총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쇄신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은 인간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와 선행을 개신교보다 더 강조하는 편이다.
간혹 가다 가톨릭이 인간의 행위를 믿음과 동등한 구원의 조건으로 여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일부 가톨릭 비판자들의 잘못된 교리해석 혹은 악의적 왜곡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똑같은 믿음이지만 가톨릭에서는 행함 자체를 믿음의 한 측면이라고 보기 때문에 행위와 믿음을 분리해서 보는 대다수의 개신교 종파들과는 차이가 있다. 사실 믿음이 행위를 포함한다고 보든 아니든 성경 해석 자체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신교 종파들은 행위는 믿음의 열매와 같은 것이며 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선행으로 그 믿음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결과론적으로 놓고 보면 가톨릭과 개신교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관점 차이는 사실 교리상으로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며 결국 표현상의 차이로밖에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둘과 정교회 사이의 교리적 갭이 더 큰 편이다. 야고보서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가톨릭의 교리와 개신교의 교리로 모두 설명 가능하다. 결론적으로는 가톨릭의 교리의 핵심도 결국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이고, 행위구원론은 일찍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발라버려서 박멸시켰기에 가톨릭에서도 이단이다.
물론 가톨릭에서 개인의 선행과 보속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는 중세 가톨릭 교회가 이웃에 대한 자선 등의 선행을 강조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 다만 부정적 효과도 낳았는데, 자선의 본 의미가 퇴색되고 신자들이 이를 마치 일종의 퀘스트마냥 인식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이런 부작용의 가장 극단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터 시대에 독일을 뒤집어놓은 면죄부다.[16] 그리고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는 개신교가 유럽에 출현하는 계기가 된다.
당연히 가톨릭 입장에서는 훗날 개신교를 반박하면서도, 신자들이 선행을 퀘스트로 인식하는 부작용을 해결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제6차 회기 전체를 의화에 대한 회의에 할당했으며, 그 결과로 '의화에 관한 교령(Decretum de iustificatione)'를 선포한다.[17] 가톨릭 교회의 의화론에 대한 상세한 정리는 트리엔트 공의회 문서를 참조하는 것을 추천한다.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justification의 해석에 대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가 늘어나고 있다. 루터교회, 감리회와 의화교리 공동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 종파들이 기존 교리를 수정하였다기보다는, 서로 공통되는 사항들을 정리한 것에 가깝다.
의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영문 위키백과 참조.
정교회는 바울로가 말한 justification을 다른 뉘앙스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동방 서방 교회의 교리상의 강조점 차이에서 기원한다. 정교회의 구원론은 '테오시스'(神化)라고 칭한다. 자세한 내용은 예정설 문서의 '정교회의 구원론' 문단 참고.[18]
5. 논란
5.1. 권력에 대한 복종의 문제
로마서 13장의 1~7절의 경우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복종해야 하며 이를 거스르는 자는 곧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에 지나치게 유착된 성직자들이나 신자들은 마치 국가 권력에 무조건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식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런 국가주의적 해석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을 내리는 편이다.권력자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정의에서 일탈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레위 19,15)
통치자가 성스러운 정의의 계율을 지키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지상의 권세는 때때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가 성스러운 정의에 반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지상의 권세는 때때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음모를 꾸미는구나."(시편 2,2)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통치자와 권세에 대항했으나 영벌에 처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을 받았다. 사도 바울로는 지금 하위 권력에 대항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스러운 질서는 예를 들어 왕에게 반하여 공작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이 상위 권력에 반하여 하위 권력에 복종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모든 권세는 성스러운 권력의 하위 권력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반하여 지상의 권세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로마서 주석. 1022, 1028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레위 19,15)
통치자가 성스러운 정의의 계율을 지키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지상의 권세는 때때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가 성스러운 정의에 반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지상의 권세는 때때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음모를 꾸미는구나."(시편 2,2)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통치자와 권세에 대항했으나 영벌에 처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을 받았다. 사도 바울로는 지금 하위 권력에 대항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스러운 질서는 예를 들어 왕에게 반하여 공작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이 상위 권력에 반하여 하위 권력에 복종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모든 권세는 성스러운 권력의 하위 권력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반하여 지상의 권세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로마서 주석. 1022, 1028
즉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작정 권력에 복종하는 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어디까지나 '성스러운 정의의 계율'을 지키는, 즉 하느님의 뜻에 맞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권력에만 복종해야 한다는 것.
한편 기독교인은 초기에 고대 로마의 이교 희생제와 황제 신격화를 거부해서[19] 박해의 명분을 주기도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참조.
5.2. 거짓말은 죄가 아닌가?
나의 거짓으로 하느님의 진실하심이 더욱 돋보여 그분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로마서 3:7
기독교에서는 거짓말이 죄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로가 거짓말을 합리화하는 설명을 한다고 하여 바울로의 사도 정당성을 부인하는 소수 사람들도 있고, 이 구절을 이상하게 써먹어 거짓말은 죄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한 사이비 단체도 있다. 하지만 이 오해는 문맥을 무시한 인용이다. 좀 더 길게 보면로마서 3:7
나의 거짓으로 하느님의 진실하심이 더욱 돋보여 그분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더 나아가서 “악을 행하여 선이 생기게 하자.”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어떤 자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면서 우리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합당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 3:7-8
로마서 3:7-8
즉 이 말은 이렇게 거짓말을 합리화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자신은 그런 주장을 한 적 없다는 내용이다.
5.3. 간편한 구원?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 10:9-10)
이 구절을 들어 머리로만 믿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교파들이 종종 있다. 이런 강경 침례파에서는 구원 영접기도라 칭하기도 한다. 그런 주장에 따르면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등 기독교 계열 사이비 종교도 다 구원 받아야 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이단 사이비 종교들이 퍼지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물론 25억 기독교 인구 중 90프로 이상은 이런 주장을 하는 교파에 속해있지 않다.
이 구절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믿고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그 고백대로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절대적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자신의 육신의 욕망대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거짓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5.4. 온 이스라엘의 구원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로마서 11:25-27
로마서 11:25-27
종종 로마서의 이 구절을 들어 말세에는 현재 존재하는 국제법상의 이스라엘이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하나,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지기 쉽지 않아보인다.
로마서 11장 14절[20]을 보면 바울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른 것을 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도록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차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충분한 숫자의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른 것을 유대교인들이 보게 된다면 모든 유대교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전 세계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겨난 후에도 대부분의 유대교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내세운 거대 집단들이 대부분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오히려 종교를 내세워 각종 만행들을 저질러서 유대교인들의 반감만 샀기 때문이다. 로마서 11장 26-27절에서 인용된 이사야의 예언 처럼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들 중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자체는 꽤 있게 되었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기독교인들이 충분히 많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유대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5.5. 임파테이션?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로마서 1장 11절 (개역개정)
로마서 1장 11절 (개역개정)
개신교의 해석 중 일부인 신사도 운동에서는 이 구절을 들어 안수 등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령의 은사를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장 10-11절 (개역개정)
고린도전서 12장 10-11절 (개역개정)
위와 같은 주장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사람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며, 로마서 1장 11절은 단순히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해석한다. 구원, 사랑 등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길 원하시는 은혜 이외의 것[21]을 어떤 절차를 따르면 100퍼센트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주장이다. 임파테이션 믿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안수 받은 후에 초능력자 행세하며 당최 맞는 게 없는 엉터리 선지자 노릇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신사도 운동에서는 모세-여호수아, 엘리야-엘리사 같은 케이스들이 임파테이션의 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사역을 다 마친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세워진 후계자에게 바통을 넘겨준 것이지 사람 마음대로 아무에게나 은사를 전이시킨 것이 아니다.
신사도 운동에서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장면과 디모데전서 4장 14절[22], 디모데후서 1장 6절[23]에 나오는 안수를 통해 은사를 받는 디모데와 관련된 내용을 들어 임파테이션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수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성령을 못 받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안수를 받기만 하면 성령을 무조건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 장면은 단순히 하느님이 안수받는 사람의 믿음을 보고 성령을 안수 받는 타이밍에 주신 것이고 안수라는 행위 자체는 단순히 사도들의 영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디모데가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이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에 디모데에게 은사를 주기를 원하셨는데, 하느님이 그것을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을 통해 선포하신 것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안수를 통하여 디모데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도록 하겠다는 말 역시 단순히 간절히 디모데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린도전서에는 분명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의 여부는 하느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나오는데, 임파테이션 등을 통해 초능력 놀이를 하는 신사도 운동의 행태는 상당히 불건전하며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한다.
[1]
율법에서 요구하는 안식일, 할례 등등도 다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로마서 13장 8절에서 말하고 있다. 원래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만 지키면 되고, 그것이
최상위법이다. 그리고 그 밖의 율법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하위법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육신의 힘으로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없기에, 믿음을 통해 성령을 따르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사함받아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로마서의 가르침이다. 모세의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각종 종교적 의식을 통해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훈련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회개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2]
양심은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인간의 행동에 대한 제어장치의 역할을 할 뿐이지, 믿음을 따르지 않았다면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고 해도 그것은 죄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양심적으로 길가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주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은근히 치켜세우는 마음을 품었다면 그것은 죄이다. 믿음은 회개로써 마음 속의 교만을 없앤 상태이므로, 믿음으로 행하는 자는 선한 일을 행할 때 자기 자신을 치켜세우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
[3]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는 성향이 있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의 죄를 대부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다.
[4]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의 요구가 삶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5]
육신 그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죄로 더러워진 육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 이상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짓는 것 밖에 없다는 뜻이다.
[6]
믿음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율법에 나와있는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바로 뒤에 나오는 로마서 8장은 이와 대비하여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바울로가 거듭나기 이전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이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이 부분의 핵심은 믿음을 따르고 있지 않을 때의 상황에 대한 묘사이므로 이러한 논란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7]
율법에서 요구하는 안식일, 할례 등등도 다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로마서 13장 8절에서 말하고 있다. 원래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만 지키면 되고, 그것이
최상위법이다. 그리고 그 밖의 율법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하위법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육신의 힘으로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없기에, 믿음을 통해 성령을 따르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사함받아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로마서의 가르침이다. 모세의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각종 종교적 의식을 통해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훈련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회개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8]
이 부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칼빈주의 예정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구원 받을 사람들은 하느님이 일부러 구원 받도록 창조하셨고, 구원 받지 못할 사람들은 하느님이 일부러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반면,
칼빈주의 예정론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하느님은 각 개인의 특성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믿음을 가지게 될 것으로 예지된 사람은 미리 긍휼히 여기셔서 하느님의 자녀로 택하시고, 기회를 주어도 어차피 그 기회를 거절할 것이 뻔한 사람은 택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한다.
[9]
#s-5.4 참조
[10]
우상숭배 강요 등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요구까지 순종하라는 것은 아니다.
[11]
여기서 권세로 나타나는 표현 중 'the powers that be(TPTB)'라는 표현은 이후 영어에서 당국(the authorities), 책임자(the people in charge), 권력층(the establishment) 등을 의미하는 관용구적 표현의 유래가 되었다.(로마서 13:1)
[12]
예를 들어 기독교를 믿지만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자신의 의로 삼지 않고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정죄하지만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런 사람한테 억지로 돼지고기를 먹도록 해서 그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거리끼는 마음을 품는 죄를 짓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13]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 '칭의(稱義)'. 다시 말해 '의로움을 칭함받는 것'이다.
[14]
한편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하느님과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어 상당히 애매하게 번역하였다.
[15]
사실 위의 설명은 로마서 해석차의 간단한 설명일 뿐이고 개신교 종파들은 출발부터가 가톨릭 교리의 대다수를 뒤엎어버리고 새로 출발한 교파들이라 각주에 덧붙인 믿음과 행위에 관한 사소한 시각 차이 외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나 예정설, 그리고 가톨릭의 구원관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교리인 연옥과
7성사 등 무수하게 많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로마서와 칭의/의화의 관계에 관한 간단한 설명만 덧붙인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으로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에 사제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있다.
[16]
사실 이것 역시도 파고들면, 가톨릭 교리상으로는 '기부하면 보속으로 취급해 드립니다'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일 지역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선행이 퀘스트로 인식되었던 부작용의 가장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7]
간혹 현대
가톨릭은
루터교와 대화하기 위해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선언을 포기했다는 이상한 인식이 있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다.
트리엔트 공의회와 같은 세계 공의회에서 말한 신앙과 도덕에 관한 선언들은, 무류성을 지닌다고 가톨릭은 해석한다. 따라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뜻에 반하는 순간, 그 즉시
가톨릭 교리에서 이탈한 것으로 간주된다.
[18]
다만 실질적으로는 가톨릭과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가톨릭 교회에서도 의화의 도달점인 성화는 곧 신화(神化)이고, 천국은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를 누리는 상태'로 설명된다. 걍 뉘앙스 차이가 요렇구나…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이자.
[19]
3세기 말에 기독교 인구가 늘기 시작하면서 동방 속주에서 기독교인이 공직에 진출하기 시작했지만, 297년경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따라 이교 제의에 참석한 기독교인 관료들이 성호를 그어서 황제에게 찍혔다.
테베스테의 성 막시밀리아노처럼 입대 시 기독교인이라며 황제 숭배와 군입대를 거부했다가 처형된 사례도 있었다.
[20]
나는 아무쪼록, 내 동족에게 질투심을 일으켜서, 그 가운데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하고 싶습니다.
[21]
가장 흔한 은사라고 하는 방언도 여기에 포함된다.
[22]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23]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