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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춘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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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대상 코미디 부문 최우수상[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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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춘 (198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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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서영춘 徐永春|Seo Young-ch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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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8년 8월 25일[2] |
전라북도
임실군 (現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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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6년 11월 1일 (향년 58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 |
본관 | 이천 서씨 |
가족 |
11남매(7남[4] 4녀) 중 다섯째 슬하 2남 3녀[5] 아내 이영옥[6] |
종교 | 불교 |
데뷔 | 1961년 MBC 라디오 - 웃겨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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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코미디언. 1세대 코미디 트로이카(서영춘, 구봉서, 배삼룡) 중에서 가장 늦게 데뷔하고 가장 단명했다. 이주일을 시작으로 전성시대를 맞이한 1980년대 코미디계에서 다른 2명과 다르게 원로 코미디언으로 활약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7]2. 활동 내역
원래는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화공 출신으로, 어느 날 무대에 출연할 예정이었던 배우 한 명이 사정으로 불참하면서 악극단 단장의 제의를 받고 대타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발군의 연기 실력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기로 악극단의 정식 배우로 발탁되어 1950년대 악극 활동을 통해서 세간에 알려졌다.1961년 MBC의 개국과 더불어 방송가에 입문하였다. 웃으면 복이와요 등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1960년대에 스타덤에 오르며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구봉서, 배삼룡과 맞먹는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를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그의 극장식 패키지쇼, 이른바 서영춘쇼 또한 큰 히트를 치게 된다. 당시 살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세를 탔다.
여담이지만 슬랩스틱과 간신 수염 분장, 표정 연기를 장기로 해서 그렇지, 분장하지 않은 서영춘의 모습은 훤칠한 키에 뽀얀 낯빛을 가진 미남이었다. 서영춘 사후 개그계의 미남 미녀로 꼽히던 아들 서동균과 딸 서현선을 보면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TBC로 자리를 옮기며 고전 유모어극장 등을 통해서 1970년대 중후반 부터, 1980년대 초반 이주일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코미디계 부동의 1인자 자리를 유지하였다. 1960, 70년대 구봉서, 배삼룡 등과 코미디 트로이카로서 인기를 나눠 가졌다고는 하나, 적어도 1970년대 중반기부터 누가 1인자였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영춘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전성기 시절에 관한 부분은 더욱이 자세히 봐야 하는 게 그가 구봉서, 배삼룡보다 데뷔 시기나 주목받은 시기가 확실히 눈에 띄게 늦은 편이다. TV 방송 이전 악극단, 영화 시절 그리고 웃으면 복이와요 초창기 시절만 보더라도 메인은 서영춘이 아닌 구봉서, 배삼룡이었다. 실제로 웃으면 복이와요 초기 오프닝을 보면 배삼룡, 구봉서의 이름이 맨 처음에 등장하고 이 두 명을 중심으로 오프닝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69년 당시 웃으면 복이와요 오프닝 링크
사실상 말이 트로이카지 선배 구봉서, 배삼룡의 인기가 조금 식어갈 시기에 서영춘이 원톱급으로 발돋움한 시기가 맞물렸으며 사실상 당시를 보면 완전한 트로이카 체제보다는 구봉서, 배삼룡에서 서영춘으로 이어진 세대교체로 봐도 좋을 정도다.[8] 실제로 서영춘은 저 두 명을 깍듯하게 선배로 대했으며 아래에서 후술된 대로 특히 구봉서는 막 주목받던 시기의 서영춘을 데리고 다니면서 코미디계 인맥도 소개시켜주고 술도 가르치고 하던 직속 선배였다. 즉, 시대적으로 약간의 개인차가 있었을 뿐 누구 한 명이 어느 특정 시대에 완전히 압도했던 상황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이들이 엎치락 뒤치락 하던 시기가 한동안 지속되던 때에 다들 알다시피 어떤 얼굴천재가 갑툭튀해서 연예계를 뒤엎어 버렸으니...[9]
바보 연기에 특화된 배삼룡, 노래 실력을 활용한 개그나 신체 조건을 이용한 몸개그가 장기였던 이기동, 미남 역을 자주 담당했고 선역과 정극 연기도 능했던 구봉서, 미국물(미군 8군 무대)을 먹은 덕택에 미국식 스탠드업 코미디로 이름을 날린 곽규석, 성대모사에 특화된 개그맨인 남보원과 백남봉처럼 서영춘 역시 특유의 개그 스타일이 있었는데 서영춘은 얼굴 표정 연기에 능하고 연기도 두루 잘 하는[10] 자신의 장점을 살려서 강한 개성을 가진 특유의 캐릭터를 활용한 콩트 개그가 주특기였다.
서영춘은 특히 무대 위에서 애드립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희극인이었다.[11] 변화무쌍한 얼굴 표정과 판타스틱한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TV가 대중화되면서 실질적으로 1세대가 된 당시 악극단 출신 코미디언들 대부분이 그랬듯, 연기 패턴은 왜정 시대부터 내려온 악극, 만담에서 출발한 것이 많고 내용도 일본 것을 그대로 번안한 것이 상당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서영춘이 지상파에서 선보인 "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담벼락에 서생원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 어쩌고 하는 긴 이름 가진 아이 이야기도 일본 설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사실 한국의 문화 예술에서 당시에 이미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의 그림자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여전히 짙던 시절이었고,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고 저작권 의식이 희박했기에 부산이나 경남 일부 지역 사람들을 빼면 볼 수 없던 일본 TV 프로그램의 포맷이나 내용을 방송국들이 많이 베끼던 시절이었다. 당시 일본 방송의 성적인 수위까지는 따라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2000년대 이전의 프로그램을 보면 묘하게 일본색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게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세운 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배우들이 TV 시대가 되면서 TV에 등장한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영춘을 비롯한 당시 코미디언들이 독창성 면에서 부족한 개그를 하였더라도 폄하할 수만은 없다. 일단 악극도 연주와 노래 개그가 들어가는 뮤지컬 비슷한 형식이지만 분명히 순발력과 암기력이 필요한 연극이었기 때문에 연기력은 필수였고, 노래와 춤도 대충해서는 안 되었던 분야였다.
1960년대 극장쇼 무대에서 콤비로 활동한 백금녀[12]와 함께 한 음반. 서영춘이 홀쭉이, 백금녀가 뚱뚱이 기믹으로 활동했다. 이런 음반엔 주로 재미있는 가사의 노래가 들어갔는데, 노래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꽁트, 개그가 들어가 있기도 했다. 유튜브에 서영춘-백금녀 만담 녹음본이 있다.[13] 50년이 훨씬 지난 개그지만 현대의 개그와 비교해도 웃음의 수준이나 배우들의 연기력 수준이 상당히 높다. 서영춘의 대표작 " 시골영감 서울 가는 기차..." 노래가 이런 판에 들어간 종류.
3. 사망
당초부터 배우를 지망하지 않았던지라 무대 체질이 아니었고, 공연 전 긴장을 풀 생각으로 늘 소주 반 병 정도를 마신 후 무대에 올랐는데 그게 지나치게 심해져서 잦은 음주로 인하여 간(肝) 건강이 나빠졌고, 끝내 간암이 발병하며 긴 시간 병고(病苦)를 치렀다.게다가 한때 주당으로 유명한 구봉서가 싫다는 서영춘을 억지로 술자리에 매번 데려갔다고 한다. 훗날 구봉서는 개신교에 귀의해 술과 담배를 모두 끊었고, 뒤늦게서야 서영춘의 음주 습관을 말리려 했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사적으로 서영춘과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던 구봉서는 이를 두고두고 애통해 하며 소싯적에 서영춘을 술자리에 끌고갔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한번은 구봉서가 서영춘의 건강을 걱정하며 술을 끊으라고 충고하자, 서영춘은 "형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유!!"라며 대들었고, 구봉서는 그 말에 너무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한 채 뒤돌아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참고로 서영춘이 사망한 다음날(1986년 11월 2일)은 구봉서의 환갑 날이었다. 구봉서는 이를 회고하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식들이 마련해준 환갑 잔치인데도 전날 영춘이가 죽는 바람에 도무지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고 회고했다.
서영춘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단체로 문병 온 후배 코미디언 중 최병서의 낯빛이 유독 어둡길래 서영춘이 "병서야, 요새 어떻게 지내냐?"고 안부를 물었는데 최병서가 무심코 "네 선생님,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대답하자 "너는 죽지 못해 사냐? 야 이놈아! 나는 살지 못해 죽게 생겼다!"며 일갈했고, 이 한마디에 병실에 있던 후배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꺽꺽댔다고 한다. 그런데 위에서는 최병서라고 했지만 이 일화를 얘기하는 사람마다 그 당사자가 다르다. 이경규이기도 하고 심형래가 되기도 하고...
1990년대 웃으며 삽시다의 한 코너였던 개그실화극장 코미디천국에서 이 일화를 재연했다. 이 코너는 7~80년대 원로 개그맨들의 일대기를 후배 개그맨들이 재연한 코너였는데, 여기서는 서영춘과 이상해 사이에서 있었던 일화로 나왔으며 서영춘 역할은 최양락이 맡았고 이상해 역할은 최병서가 맡았다. 이 코너가 실화를 그대로 재연한 것이라면 실제 당사자도 이상해일 가능성이 높고, 당사자가 최병서라는 주장은 이 코너의 내용이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코너 제목이 개그실화극장이라고는 해도 실화를 어느 정도 각색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결국 그 당사자만 아는 일일 듯.
결국 앞서 말했듯 그는 간암을 이기지 못하고 1986년 11월 1일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서영춘이 세상을 떠나고 영결식에서 후배 개그맨 엄용수가 "살살이 고 서영춘 선생님께서는 생전 국민들의 웃음과 즐거움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고, 대표적인 유행어로 요건 몰랐지 가갈갈갈, 붑빠라밥빠 붑빱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마십니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이라는 내용의 고인 약력을 눈물을 삼키며 읽어 내려가는데, 정작 조문객들은 슬픈 분위기임에도 평소 서영춘의 우스꽝스러운 연기가 생각이 났는지 키득키득 거렸다고. 21세기인 현재까지도 개그맨들 사이에서는 서영춘 이야기가 나오면 계속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로 죽어서도 사람을 웃기는 뼈그맨의 숙명인듯 하다.
4. 사건사고
4.1. 무단횡단 보행자 사망 사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2년 4월 10일, 무단횡단 중인 보행자를 치어 숨지게 한 흑역사가 있으며, 이 때문에 1살 많은 동료 코미디언 송해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한다.
지금이야 법 개정으로 면허정지에 해당하지만, 서영춘은 당시만 해도[14] 음주운전 적발 기준에 들어가지 않는 혈중알콜농도 0.04%(맥주 2잔)의 수치가 나왔고, 이로 인해 음주운전으로 인한 가중처벌이 아니라 사람을 치어 사망하게 한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 혐의로만 구속됐다. 또한 사건 시간 밤 11시대에 피해자가 무단횡단을 한 상황이었다고 하면 술을 마시지 않은 운전자들도 어둠 속에서 무단횡단하여 갑자기 튀어나오는 보행자를 피하기는 어렵다.
다만 송해의 인터뷰 기사 내용과 사건 당시 기사 내용은 차이가 있으며 송해 기사에는 피해자가 20대에 무단횡단한 것으로 나오나, 사건 당시 기사에는 피해자가 30세로 나오며 길을 건넜다고만 서술되어 무단횡단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의 무단횡단 진위 여부에 따라 사건에 대한 평가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5. 그 외
서현선 | 서동균 |
- 가족으로는 딸 서현선과 아들 서동균이 있으며, 둘 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미디언, 연극 배우의 길을 밟았다. 서현선은 1990년대 초반 KBS 한바탕 웃음으로에서 레귤러로 이름을 알렸다. 봉숭아 학당에서 오서방( 오재미)과 합을 맞추는 미녀 코미디언이 바로 서현선이다. 동료들이 서영춘의 성대모사를 시전하자 발끈하는 모습을 (물론 개그로) 보여주기도 했다. 서동균은 개그콘서트 초중반기에 출연하며 로보캅 연기로 인지도를 쌓았으나, 이정수처럼 연극 및 뮤지컬 배우로 전업하여 활동하다 은퇴하였고 현재는 광교신도시에서 미역국 전문 식당을 운영중이다.
- 서영춘은 자녀들이 성인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요절했으므로 자녀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일은 없었다.[15] 대신 서영춘의 생전 공연 영상에 자녀들을 합성해 만든 고려제약의 감기약 하벤플러스 광고에서 함께 브라운관을 타기는 했다.
- 악극단 배우로 뛰던 시절 어느 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관객들이 갑자기 배를 잡고 껄껄 웃는 것이었다. 서영춘은 자신이 눈웃음을 치며 노래하는게 우스운 모양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눈웃음을 살살 치면서 간드러지게 노래를 부르자 객석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런데 알고보니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린 이유는 서영춘의 바지 지퍼가 활짝 열려있었기 때문이었다(...).
-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시절 크고 작은 스캔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행사에 지각했다고 지명수배가 내려진 일도 있었다. 이 행사가 다른 행사도 아니고, 경찰의 날(1965년 10월) 행사의 사회자로 참석해야 했는데 그걸 지각한 것. 21세기 현대에도 이런 대형 행사에서 지각하면 방송인으로서 보통 문제가 아닌데 하물며 살벌한 독재 정권 시대에 이랬으니... 겨우 서영춘이 행사장에 도착하자 당시 참석한 종로경찰서장이 너무 열받은 나머지 행사가 끝난 직후 서영춘을 직접 불구속 입건 조치해버렸다. 죄목(?)은 사기 혐의.
- 한 가지 깨는 일화도 있는데, 서영춘이 이주일을 비롯한 후배 코미디언들을 데리고 부산에서 회식할 적에 서영춘이 완월동의 아가씨[16]들을 불러와서 이주일과 다른 코미디언들에게 짝을 맞춰주고 알아서 잘 모셔라. 이 나라에서 코미디로는 일인자들이다.라고 여자를 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70년대 이야기라 망정이지, 지금이었다면 난리가 날 상황이었을 것이다.
- 12.12 군사반란의 신군부가 하나회 축하파티를 벌일때 불려나갔다. 영상
6. 출연작
- 웃으면 복이와요
- 일요일 밤의 대행진
- 폭소대작전
- 좋았군좋았어
- 고전유모어극장
- 오부자
- 형님먼저 아우먼저
- 민며느리
- 밤하늘의 브루스
[1]
1984년부터 1990년까지
MBC 연기대상에서 코미디 부문을 따로 시상하였고, 1991년부터 1994년까지 MBC 방송대상 코미디 부문, 1995년부터 2000년까지 MBC 코미디대상, 2001년부터
MBC 방송연예대상으로 바뀌었다.
[2]
다만, 방송에서 아들
서동균이 56세 때 사망했다고 언급한 걸 보면 1931년 생일 가능성도 있다.
[3]
이천 서씨 집성촌이다.
[4]
형 중 한 명이 작곡가
서영은이다. 그리고 남동생인 서영수와 서영환 역시 코미디언으로 활약했다.
[5]
그중 2남은 개그맨
서동균, 3녀는 개그우먼
서현선이다.
[6]
1940년 생이라 한다.
출처
[7]
거기다 이들 중 유일하게 환갑조차 넘기지 못했다. 적어도 이들은 못해도 환갑은 넘겼고 특히 구봉서는 89살까지 살아서 드문 장수를 누렸다.
[8]
정확히는 악극단 시절부터 1970년대 초까진 구봉서, 배삼룡이 우위였고 1970년대 중후반 경부터 서영춘의 우위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서영춘 역시 악극단 시절부터 최고의 톱스타였으며 구봉서, 배삼룡 역시 1970년대 중후반에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렇듯 전성기 시절 3명이 팽팽하게 인기를 가져갔으며 트로이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9]
여담으로,
이주일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도 바로 서영춘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방송국 대기실에 들어온 이주일을 본 서영춘은 속으로 '저 놈 방송에 나오면 무조건 뜬다!'고 예상했는데, 약간의 곡절을 겪은 후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10]
실제로 영화계에서도 활동했다.
[11]
그래서 같이 연기하던 코미디언들은 대본에서 벗어난 서영춘의 뜬금없는 애드립에 빵 터져 NG를 내기 일쑤였다. 반면
구봉서는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경력 때문인지 대본에 충실한 희극 배우였다.
[12]
악극단 출신의 코미디언. 드센 뚱녀 컨셉으로 1960~197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었고, 음반도 취입했다.
이국주와 흡사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노래도 매우 잘 해 지금의 이국주보다 훨씬 인기가 높았다. 1995년 사망. 아들 강민도 1990년대 중반 어머니처럼 개그맨으로 활동했다.
[13]
6분 16초부터 나오는 노래가 그 유명한 '사이다송'이다. "인천 바다에 사이다 떴어도 고뿌 없으면 못 마십니다"라는 구절이 이 곡에 등장한다. 전체적인 곡조가 오늘날의 랩과 매우 비슷하다.
[14]
당시라고도 할 것 없이 현 개정은 2019년 6월 25일부터 적용된
개정안이다.
[15]
그러나 주변사람들이나 서동균 본인에 증언에 따르면 서영춘은 집에서는 매우 엄한 아버지였다고 하니 서영춘이 서동균이 어른이 될때까지 오래 살았다면 서동균과 서현선의 코미디언 지망을 반대했을 수도 있다.
[16]
부산 내에서 집창촌과 보도방으로 유명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