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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3-14 21:46:24

덕수궁 준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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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준명당
德壽宮 浚眀堂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정동 5-1)
건축시기 1904년 (창건)
파일:준명당.png
<colbgcolor=#e3ba62> 준명당[1]

1. 개요2. 이름3. 역사4. 구조5. 여담

[clearfix]

1. 개요

덕수궁 건물이다. 석조전의 동쪽, 중화전의 서북쪽에 있으며 즉조당과는 복도로 이어져있다.

현판 글씨는 의정부찬정 박제순이 썼다. #[2]

2. 이름

'준명(浚眀)' 뜻은 '다스려 밝힌다', 또는 '다스리는 이치가 맑고 밝다'이다. 《 서경(書經) - 고요모(皐陶謨)》 편에 나온 구절인 “날마다 세 가지 덕을 밝혀, 밤낮으로 소유한 집을 다스려(浚) 밝힌다(眀)."에서 따왔다. #

특이하게 '명'자를 흔히 '밝을 명'자로 쓰는 '明'이 아닌 '眀'자로 썼다. 얼핏 보면 잘 구분이 안가지만 '明'에서 '해 일()' 이 아닌 '눈 목()'이 들어가있다. '明'과 모양만 다른 같은 글자이며, '밝게 볼 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를 두고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일제가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을 대신썼다는 주장과, 반대로 일본(本)을 싫어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日'이 들어간 '明'대신 '眀'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론을 말하면 둘 다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대한제국 이전부터 쓰던 한자이다. 진짜로 '明'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은 물론 다른 전각들의 편액에 들어간 '明'을 모조리 갈아치웠을 것이다. 당장 고종의 침전 정문인 광명문 현판에도 버젓이 '日'이 들어간 '明'이 적혀있다. 저런 거짓 정보에 속지 말자.

3. 역사

파일:경운당도.png
<colbgcolor=#e3ba62> 경운당[3]
준명당은 덕수궁 건물들 중에서 창건 시기가 늦은 편이다. 기록 그림에 의하면, 1904년( 광무 8년) 이전에는 현재 준명당 자리에 경운당(慶運堂)과 덕경당(德慶堂), 그리고 관명전(觀明殿)이 있었다. 경운당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기록 상으로는 1901년(광무 5년) 2월 3일 자 《 승정원일기》에 처음 나타난다. #

준명당과 즉조당이 붙어있는 지금과 달리, 경운당이 있던 시절에는 경운당과 즉조당[A] 사이에 행각을 두어 영역을 구분했다. 고종은 경운당에서 주로 전배하거나 # 진찬을 열었다. # 이후 같은 해 7월 #에서 12월 사이에 이름을 덕경당으로 바꾸었으며 # 1902년( 광무 6년) 10월에는 관명전으로 개칭했다. #
파일:관명전도.png
<colbgcolor=#e3ba62> 관명전을 그린 그림. 왼쪽이 관명전, 오른쪽이 즉조당, 동남쪽 하단이 석어당이다.[5]
이름을 바꾸면서 건물도 새로 지었다. 즉조당[A]과 덕경당 사이의 행각을 헐어 두 건물을 한 영역에 두었다. 또한 건물도 정면을 9칸으로 늘리고 용마루에 취두, 추녀마루에 잡상도 설치하는 등 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지었다. 이런 변화는 진연 장소의 격을 높이고, 공간을 넓혀 진연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
파일:준명당 의궤.png
<colbgcolor=#e3ba62>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준명당 모습[7]
1904년( 광무 8년) 4월 14일에 경운궁 대화재로 불탔고 직후 복구했다. 재건하면서 이름을 준명당(浚眀堂)으로 바꿨으며 건물도 관명전보다 작게 짓는 등 전보다 격을 낮추었다. 관명전이 준명당으로 바뀌었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1904년 4월 13일( 음력 2월 28일), 대화재 바로 전날 고종이 관명전에서 신하들을 만났다는 《 승정원일기》의 기사를 통해 # 준명당은 화재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준명당으로 지으면서 즉조당과 통하는 복도도 같이 설치한 듯 하다.
파일:덕수궁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png
<colbgcolor=#e3ba62> 준명당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 덕혜옹주(주황색 원 안)
일제강점기 초에는 고종이 외동딸 덕혜옹주를 위해 만든 유치원이 되었다. 1919년 고종 승하 후 1933년 일제 궁궐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덕수궁의 전각이 헐렸음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구조

파일:준명당 대청.png }}} ||
<colbgcolor=#e3ba62> 대청[A]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동북쪽에 덧대인 방 4칸을 더해 총 22칸이다. 정면 기준 제일 왼쪽(서쪽)의 1칸은 온돌방이고, 그 옆에 2칸이 대청, 그 다음 온돌방 1칸, 마지막으로 제일 동쪽에 마루 1칸이다. 앞면과 대청 뒷면의 가장자리 칸에는 툇마루가 깔려있으며 동북쪽 4칸짜리 방은 온돌이다. 대청의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고 '복 복(福)'자를 써넣어 황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했다.
파일:준명당 서온돌.png }}} ||<width=388>
파일:준명당 동온돌.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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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준명당 동북온돌.png }}} ||
<colbgcolor=#e3ba62> 위 좌측 부터 서온돌, 동온돌(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라 본 방향).[A]
맨 아래는 동북온돌(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라 본 방향).[A]
서쪽 온돌방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총 2칸이다. 동온돌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으로 중간에 기둥을 두고 기둥의 동, 서, 남쪽으로 문지방을 두었다. 다만 동온돌의 북쪽 2칸과 동북쪽 온돌의 서남쪽 방은 서로 트여 '」' 자 평면을 이룬다. 동북온돌 4칸 중 동남쪽 방은 다른 방과 문지방으로 나누었고, 나머지 칸은 서남쪽 방을 제외하고 텄다.
파일:준명당 난간.jpg }}} ||
<colbgcolor=#e3ba62> 준명당 난간의 구멍[11]
준명당 남쪽 기단의 가장자리에는 몇 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 준명당이 덕혜옹주가 다니던 유치원일 때, 행여 아이들[12]이 뛰어 놀다가 떨어져 다칠 것을 우려한 고종의 배려였다.

5. 여담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2] 을사오적의 그 박제순 맞다. [3] 사진 출처. [A] 당시엔 중화전이었다. 1902년 새 중화전 건립 후 즉조당으로 환원. [5] 사진 출처. [A] 당시엔 중화전이었다. 1902년(광무 6년)에 새 중화전 건립 후 즉조당으로 환원. [7]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A]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 [A] [A] [11] 사진 출처 - 서울 스토리. [12] 덕수궁 유치원에 덕혜옹주만 다닌 것은 아니었고, 신하들의 자녀들도 같이 다니게 했다. 양반가의 딸들 중 덕혜옹주 또래의 아이들을 원생으로 모집했다. [13] '효'는 창덕궁 가정당, '애'는 창경궁 대온실 앞 정원을 대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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