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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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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평성문 德壽宮 平成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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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정동 5-1) | |
건축시기 | 1896년 (창건) / 1911년 (철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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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평성문 지붕(분홍색 원 안). 현존하는 유일한 평성문의 사진이다. |
[clearfix]
1. 개요
덕수궁의 서쪽 궁문이다. 미국공사관과 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2. 이름
'평성(平成)' 뜻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조화된다'이다. 《 서경(書經)》 - 〈대우모(大愚謨)〉 에 나오는 '지평천성(地平天成)', 즉, '땅(地)을 다스림(平)으로 하늘(天)의 일이 이루어진다(成).'에서 따왔다. #3. 역사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 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은 향후 돌아갈 궁으로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고,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 중건 공사를 지시했다.[1]이 때 평성문도 지은 듯 하다. 확실한 건립 연대는 모르나, 1896년( 건양 원년) 9월 13일[2] 박기양을 평성문 현판서사관으로 임명했다는 《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아 그 무렵 완공한 듯 하다. #
평성문 안쪽에는 넓은 마당이 있었고 남쪽에는 경비병 초소와 탄약고가 있었다. 군사 관련 공간이었기에 고종은 평성문 안에서 평양대를 훈련시키고 # 관북에 주둔시킬 강화대의 교련을 참관했다. # #
평성문이 헐린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11년 경인 듯 하다. 1911년 2월 28일 자 《 매일신보》 기사에는, 당시 (갓 준공한) 석조전 앞에 정원을 만들기 위해 평성문을 비롯한 주변 건물들을 철거할 예정이란 내용이 실려 있다.
덕수궁에서는 100만 원을 투입하여
광대한 양식 석전(석조전)을 건축했는데 이번에 석조전 앞에 큰 정원을 짓기 위해 전이사실(前理事室), 평성문(平成門), 전위병소(前衛兵所)를 훼철하기로 어제 낮 12시에 입찰을 끝냈는데 ...(후략)...
1911년 2월 28일 자 《매일신보》 기사
평성문이 헐린 후
이왕직[3]에서 석조전 정원을 완공시켰고, 또한
덕수궁 서쪽으로 궁장을 더 넓혀
돈덕전 권역을 덕수궁 본궁으로 편입시켰다.[4]1911년 2월 28일 자 《매일신보》 기사
언제인지는 모르나, 새로 생긴 서쪽 궁장에 평성문을 대신할 덕수궁 서문이 생겼다. 그리고 그 문에 쌩뚱맞게 덕수궁 동북쪽에 있다 사라진 포덕문 현판이 걸렸다.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나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1965년 6월 이전에는 지은 듯하다. 포덕문 현판은 2010년 11월 이전에 떼어냈고[5]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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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새로 지은 덕수궁 서문 |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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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광무 8년) 4월에 일어난
경운궁 대화재 때
고종이 황실 가족들과 함께 평성문으로 빠져나가
중명전으로 피신했다.
이 때 하마터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조선 시대에는 궁궐에서 불길이 일어나면 궁궐 문을 모두 걸어 잠갔다. 화재를 틈타 수상한 자가 들어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평성문 역시 빗장으로 굳게 잠겼다. 그런데 문제는 하필 당시 바람이 서쪽으로 강하게 불었고[6], 점점 평성문 쪽으로 불길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 위에 썼듯 평성문 남쪽에는 경운궁 경비병 초소와 탄약고가 있었고, 가만있다간 불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경비병들은 평성문 빗장을 있는 힘껏 풀고 문을 열어 간신히 탈출했다. 평성문 밖에는 바로 옆에 있는 미국공사관의 경비병들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대기해 있었는데, 경운궁 경비병들은 그들에게 탄약고 존재를 얘기했고, 깜짝 놀란 미국공사관 경비병들은 경운궁 경비병들과 함께 평성문으로 들어가 탄약을 밖으로 빼내왔다. 만약 이 때 옮기지 않았다면 단순한 화재를 넘어 경운궁과 미국공사관이 폭발하는 참변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 내용은 호머 헐버트 박사가 1904년에 쓴 《The korea Review》에 나와있다. 출처
[1]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고,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새로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2]
음력 8월 7일.
[3]
일제강점기에 구 대한제국 황실(이왕가)과 관련한 사무를 보던 곳.
[4]
최상단 사진에서 보듯, 돈덕전은 평성문 안쪽에 있지 않았다. 즉, 원래는 덕수궁 본궁 영역에 속한 건물이 아니었다.
[5]
2010년 11월에
카카오맵에서 촬영한 사진에는 현판이 안보인다.
[6]
화재의 진원지인
함녕전은 경운궁의 동쪽 영역에 있었다.
[7]
被服費. 옷이나 침구류, 세탁비, 바느질삯, 장신품 등에 쓰이는 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