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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15 10:12:13

프톨레마이오스(마우레타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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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레타니아 군주
ⴱⵜⵓⵍⵉⵎⴰⵢⵓⵙ | 프톨레마이오스
파일:프톨레마이오스(마우레타니아).webp
제호 한국어 프톨레마이오스
베르베르어 ⴱⵜⵓⵍⵉⵎⴰⵢⵓⵙ
라틴어 Ptolemaeus
가족 히엠프살 2세(증조부)
유바 1세(조부)
유바 2세(아버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어머니)
드루실라(누이)
율리아 우라니아(아내)
드루실라(딸)
생몰 년도 미상~40년
재위 기간 23년~40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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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우레타니아 왕국 마지막 군주. 훌륭한 내치와 외정으로 마우레타니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지만, 40년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암살당했고 마우레타니아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했다.

2. 생애

옵티마테스파의 편을 들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맞서 싸우다 탑수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자결한 누미디아 국왕 유바 1세의 손자이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마우레타니아 왕으로 옹립된 뒤 40여 년간 선정을 베푼 유바 2세의 아들이다.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클레오파트라 7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이다. 그는 아마도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수도인 카이사레아에서 출생했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로마로 유학가서 21살까지 소 안토니아의 집에서 살면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동년배 남자 황족들과 친분을 다졌다. 그 후 조국으로 돌아와서 서기 19년 아버지와 함께 공동 군주가 되었으며, 4년 후인 23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마우레타니아의 단독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예술, 지식, 문학, 및 스포츠에 막대한 지원을 했으며, 그리스 도시들에도 상당한 기부를 했다. 아테네인들은 이에 보답하고자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가족에게 경의를 표하는 여러 개의 비문을 세웠다. 한편, 베르베르 부족인 타파리나스와 가라만테스가 서기 17년에 마우레타니아 왕국과 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착수했지만 여의치 않자 아프리카의 로마 총독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윽고 로마군이 도착하자 그들과 함께 반란 진압에 나섰고, 서기 24년에 반란을 최종적으로 진압했다. 원로원은 그가 로마를 위해 싸운 것에 감명을 받고, 사절을 파견해 그에게 상아 홀과 개선식에 쓰이는 의복을 수여했다.

그는 마우레타니아의 왕으로 있으면서 '로마의 친구'이자 '로마의 클리엔테스'를 꾸준히 강조하며 로마를 자극하지 않고 주변국을 다룰 때 로마가 자신의 뒷배인 것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부국강병에 몰두했다. 자신을 사자, 코끼리로 비유하고 헤라클레스의 유일한 후계자로 내세웠다. 또한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예인 점을 들며, 자신을 고귀한 인물로 추켜세웠다. 마우레타니아에 남아있는 비문에 따르면, 그는 증조부인 히엠프살 2세부터 자신의 가문을 숭배하는 사원을 세우고 전국에 왕실 숭배 의식을 거행하게 했다고 한다. 3세기의 기독교 신학자인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펠릭스는 베르베르인들이 유바 2세를 신격화했다고 기술했으며, 또다른 기독교 신학자 키프리아누스는 마우레타니아인들이 그들의 왕을 거리낌없이 숭배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이를 종합하면, 베르베르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생전과 사후에 유바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를 신으로서 섬긴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그는 농업과 상공업 진흥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고 군사력 증진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칼리굴라 시대에 이르면 마우레타니아 왕국은 로마 제국의 속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로 손꼽혔다. 이에 로마에서 그를 경계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는 이를 감지하고 로마 내 인맥을 동원해 자신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희석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칼리굴라 황제는 속국 왕인 주제에 막강한 부와 군사력을 구가하는 그를 경계한 끝에 40년 로마를 방문한 그를 암살해버렸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칼리굴라를 만났을 때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보라색 의복을 착용했고,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칼리굴라에게 독살당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하필이면 칼리굴라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사람을 꼭 죽이기로 작정한 날에 찾아갔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물론, 이 주장과 기록은 오늘날 수에토니우스 특유의 과장과 끼워 맞추기식 기록과 허위 주장이라서 칼리굴라가 프톨레마이오스를 죽인 것을 개인적 결함으로 믿는 이는 많지 않다. 되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칼리굴라에 대한 암살 음모가 있었던 점을 근거 삼아 프톨레마이오스가 이 음모에 개입했을 거라 의심해 암살을 단행했다거나, 칼리굴라와 원로원이 로마 위정자들이 전통적으로 벌인 속국, 보호국 견제 방법 그대로 위험인물로 찍힌 프톨레마이오스를 극단적으로 제거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런 분석처럼, 칼리굴라의 명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가 암살되고 그 숨통이 끊어졌다는 보고는 원로원에 올라온다. 이때 원로원은 칼리굴라와 냉랭한 사이임에도, 기다렸다는 듯 마우레타니아의 속주화를 선언하고 칼리굴라의 냉혹한 술수에 토를 달지 않았다. 따라서 여러 정황, 근거상 프톨레마이오스 암살은 칼리굴라의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행동으로 벌어지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어쨌든 로마는 군대를 보내 마우레타니아인들이 대응하기도 전에 왕국을 접수함과 동시에, 원로원 의결을 통해 마우레타니아를 둘로 쪼갰다. 이 결과, 두 가지 트랙 하에 마우레타니아 왕국은 수장을 한순간에 잃고 속주화 작업 하에 로마에 강제 편입됐다.

선정을 펼치던 왕을 살해하고 왕국을 무너뜨린 로마에 대한 마우레타니아인들의 분노가 갈수록 확산되던 서기 41년, 칼리굴라가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율리우스 루푸스, 사비누스 등 20명이 채 안 되는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에게 암살당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전 노예였던 아이데몬이 주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칼리굴라의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1세 티베리우스-칼리굴라 시대때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이 자자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를 파견해 반란을 제압했고, 마우레타니아는 2년 후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와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로 개편되었다.

그는 생전에 해방노예 또는 에메사 왕가의 일원으로 알려진 율리아 우라니아와 결혼하여 딸 드루실라를 낳았다. 드루실라는 해방노예 출신인 유대 속주의 로마 총독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펠릭스[1]와 결혼했다.


[1] 소 안토니아의 그리스인 해방노예로, 팔라스의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