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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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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감자골 사태3. 역사적인 전성기
3.1. 사상 최고 인기 연예인?
4. 몰락5. 재기6. 2010년대 ~

1. 개요

방송인 김국진의 활동을 정리한 문서이다.

2. 감자골 사태

파일:감자골_리즈시절.png
김국진의 최전성기와 인기 하락이 강렬해서인지, 그 전의 인기와 위기의 과정은 대중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 시기 데뷔한 KBS 개그콘테스트 시대 멤버들은, 당시 SBS의 코미디언 영입전략 덕분에 기회를 빨리 잡았다. 기존의 KBS식 콩트와 맞지는 않았지만 선배들의 이적으로 인해 생긴 공백을 김국진이 김용만, 김수용, 박수홍 등과 함께 이른바 ' 감자골'이라는 개그팀을 통해 완전히 메워버렸다. KBS의 모든 예능 프로에는 이들이 출연했을 정도로 히트도 쳤고 KBS도 팍팍 밀어줬다. 1992년 KBS 코미디대상 신인상을 탄 것이 그 증거.

문제는 감자골의 인기로 인한 혹사. 이들은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방송사에 조정을 요구했으나 KBS는 전속 계약을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김용만이 무리한 스케줄에 탈이 나서 드러눕고 만다. 그러자 화가 난 김국진이 1993년 1월,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를 선언하고 박수홍, 김수용이 동참, 나머지 둘도 결국 하차를 하게 된다. 사실 이 때 화가 나서 가장 먼저 도피성 유학을 제안하고 계획을 짠 사람은 박수홍이었다는 모양.

평소 신인 주제에 벼락스타가 된 이들을 아니꼽게 보던 코미디계 선배들은 프로그램을 갑자기 그만 둔 것은 프로에게 걸맞지 않은 모습이라며 성토를 하기에 이르렀다. KBS 희극인실의 최고참인 임하룡[1]이 "얘네들이 어린아이들도 아니고 군대 갔다 온 성인이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방송사 측에 항변한 것일 텐데 왜 우리 동료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주지는 못할망정 싹도 안 자란 아이들을 영구제명 시키냐."면서 이경규와 함께 그들을 옹호해 주었다고 한다.

1993년 2월 감자골은 당시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고별인사를 하고 미국행을 하기로 했는데, 녹화가 시작되기 직전 " 프로그램을 10개씩 하던 감자골이 갑자기 그만 둔 것은 MBC로 이적하기 위함이었다!"라면서 임하룡을 제외한 방송 3사 코미디언들 거의 모두가 MBC로 쳐들어와서 녹화를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난동을 피우는 통에 김국진은 스태프들을 따라서 개구멍으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2]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코미디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씁쓸해지는 대목.

감자골은 "자신들이 다른 곳으로 이적하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언으로서 은퇴하고 이민 가는 것이다."라고 설득해서 겨우 시청자들에게 고별 방송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감자골은 방송 3사 코미디언 협회에서 제명당한다. 이들의 KBS 선배 개그맨 이봉원은 후일 방송에서 감자골 사태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당시 나는 SBS로 이적한 상태라 아무 관련이 없다'는 파렴치한 변명을 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이상한 사건.

그런데 미국행 직전에 박수홍은 입대 영장이 나왔고, 김수용은 미국 비자가 나오질 않아서[3] 결국 감자골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후 김국진은 김용만과 함께 미국에서 1년 동안 지내면서 이것저것 한 모양. 이현도의 증언에 따르면 나이트 클럽까지 인수했었다고 한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큰 규모는 아니고 쌀국수집 옆 지하의 작은 규모였다고.

3. 역사적인 전성기

김국진은 1994년 미국에서 1년 만에 귀국해 MBC로 입사[4]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 연예계 역사상 가장 높은 단기 인기를 누린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최전성기의 김국진은 단순히 개그계를 넘어서 당대 연예계 통합 1위로 여겨지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었고, 나아가 지금까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엔터테인먼트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연예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96~1999년 김국진의 최전성기 당시 TV 드라마 역사상 최상급 단기 인기를 누린 여배우인 김희선이나 한국 영화 역사상 최상급 단기 인기를 누린 한석규 등 당대 최고 배우들과 H.O.T., 젝스키스 등 최정상급 인기 아이돌들, 그 밖에 당대 연예계의 어떤 인물을 비교해도 김국진의 인기에 미치지 못했다.

파일:1998년 개그맨 김국진.jpg 참고로 김희선이나 한석규의 1996-1999년도 인기는 TV 드라마나 영화 역사상 최상위권 임팩트로 평가받으며 현재까지 그 정도의 단기적인 위상을 확실히 넘는 배우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김국진은 이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며, 대한민국 국내의 단기적인 인기만 따지면 건국 이래 가수, 배우, 모델을 전부 통틀어서 김국진이 그 어떠한 비교 대상보다 인기있었다는 일명 '김국진 GOAT설'이 그것.
전성기에는 테마게임 일요일 일요일 밤에 등에 주로 출연하며 "어라~?", "여보세요~", "사랑해요~", "밤 새지 마란 말이야!", "나 소화 다 됐어요~" 등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유행어를 양산했고 코미디, MC, CF, 연기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약했다.

그 당시 김국진의 영향력은 숨 쉬는 것도 김국진이 쉬면 유행어가 될 정도라고 회자될 정도로 컸으며 전지현, 송혜교 등 지금 잘 나가는 스타들도 당시엔 김국진의 CF에 으로 나올 정도였다. 이때 당시 김국진의 인기는 단연 원탑이어서 이병헌 H.O.T.를 기다리게 할 정도였고, 단독 주연의 MBC 미니시리즈 반달곰 내 사랑을 찍을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탁월한 개그 감각 같은 건 별로 없다고 평가 받지만, 도시 서민적인 외모와 왜소한 체격, 약간 어눌하면서도 친근한 말투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것이 히트의 비결로 추측된다. 거기다 그 당시 김국진은 좀 어색하긴 해도 테마 게임을 통해 정극 연기가 되는 개그맨이었기 때문에 드라마 등에도 자주 얼굴을 비출 수 있었던 것이 플러스 요인.

당시 김국진의 인기 비결 중 가장 큰 것은 그 특유의 캐릭터가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그맨은 심형래, 이경규 같이 세거나 대놓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이 다수였고, 다른 쪽으로 둘러봐도 주병진같은 신사 및 토크쇼 스타일이 있었지만, 김국진처럼 친근감 있고 귀여우면서 뭔가 옆집에 실제로 있을 것 같은 어리숙한 동네 형스러운 캐릭터는 별로 없었다. 김국진은 올망졸망한 생김새, 작은 체구, 특이한 말투,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오는 행동으로 호감이 가는 캐릭터였고, 이 부담없는 캐릭터가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그 예로, "여보세요?"란 유행어만 해도 딱히 웃긴 말도, 웃긴 꽁트에서 나온 말도, 의식해서 억지로 민 것도 아니지만 김국진이 하니 사람들이 단체로 빵 터져서 유행어가 된 것. 김국진 그 자체가 유행어이자 브랜드였다고 보면 된다. 라디오스타에서 "내가 예전에 뭔 말만 하면 유행어가 됐다"는 말이 과장 같지만 실제로 그랬다. 김국진이란 캐릭터 자체에 거의 전국민이 빠져있던 시절.

김국진의 역사적인 최전성기를 대표하는 사례로는 국찌니빵이 있는데, 이 빵은 본인의 이름과 본인 캐릭터 띠부띠부씰을 포함한 상품이다. 국찌니빵 역시 대한민국의 식품 산업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큰 단기적 인기를 끈 상품으로 여겨지며, 아예 당시 IMF 외환위기로 인하여 도산 직전이었던 삼립을 홀로 재기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국찌니빵은 당시 연매출 210억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게 어느 정도 성적인지 감이 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참고로 말하자면 2014년 말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허니버터칩도 3개월만에야 매출 50억을 기록할 수 있었다. 물가 상승 등을 고려하면 얼마나 초대박이 났는지 짐작이 갈 만하다. 연예인의 이름과 얼굴을 건 상품이 최초로 나온 사례이자 스타 마케팅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사례로, 마케팅 전공 수업 시간에도 언급될 정도.[5]

사측에서 IMF 당시의 기업 형편이 어려워 많이는 못 드린다고 조심스레 말했더니, 김국진이 개런티 없이 캐릭터 사용을 허용했다고 한다. 때문에 상품은 대박났지만 그가 받은 돈은 거의 없다고 한다. 당시 국찐이 빵을 먹었던 사람들의 추억담을 들어보면, 스티커는 국찐이의 세계여행 등 몇 가지 테마를 가지고 만들어졌고, 빵 종류는 여러 가지였는데 가격은 500원으로 동일했고, 양도 요즘 800원 ~ 1,000원 하는 빵보다 비슷하거나 많은 편이었다. 핑클빵도 국찌니빵 같은 히트 사례가 없었다면 출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김국진은 개그맨이 연예계 최고 스타가 된 정말 몇 안되는 희귀 사례로 꼽힌다.[6] 당시 김국진은 코미디 30년을 통틀어서 최고의 코미디언에 선정되었는데, 2위가 한국 코미디계의 영원한 대부 구봉서. 또한 광복 50년 최고 연예인으로 선정되었는데, 2위가 가왕 조용필. 광복 50년 최고의 연예인 설문조사에서 2위를 기록한 조용필을 이겼다는 건, 그야말로 당시 중장년층을 넘어 노년층의 인기마저도 지배했다는 이야기이다.

김국진을 제외하고 코미디계를 넘어 연예계 전반 최강의 포스를 보여준 이전 세대 코미디언은 1980년도에 말 그대로 2주일만에 원톱이 되어 80년대 초중반 내내 연예인 소득 1위를 차지했던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그리고 영화로도 전국 300만 관중을 돌파할 수 있었던[7]전성기 심형래 정도 밖에 없다. 김국진 이후 세대에선 폭발적인 전성기는 이들보다 덜 했지만 전무후무하게 십 수년 이상의 한국 코미디/예능계 1위를 유지해오며 전 국민적인 호감도와 셀럽으로서의 엄청난 위상을 긴 세월 동안 누적시킨 유재석 정도가 유일하다.

당시 김국진의 인기를 한 줄로 줄인 말이 바로 대한민국 방송계를 움직이는 네 인물 중 한 명(KBS 사장, MBC 사장, SBS 사장, 그리고 김국진).[8] 2014년 방영된 라디오 스타 내가 제일 잘나가 특집에서 일본계인 강남이 김국진이 뭐하는 사람인지 묻자 김구라한국의 시무라 켄이라 소개했다. 실제로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한일 양국에서 한 시대를 지배한 국민적 코미디언들이었고, 화려한 전성기가 끝나고 적지 않은 시간동안 몰락해 있었다는 점과 다시 재기에 성공했다는 점이 상당히 흡사하다. 다만 시무라 켄은 1970년대 후반~80년대에 활약한 정통 코미디언인 이주일, 심형래의 위치와 더 가깝고 김국진은 버라이어티 예능인에 가까웠다.
파일:1998년 연예인 인기순위.png
1998년 연예인 부문별 인기순위
개그맨 부문 1위와 2위의 득표율 차이를 참고하자.[9][10][11]

1990년대 가요계 끝판왕 서태지와 흥행보증수표라는 별명을 가지며 당시 "한국 영화는 한석규가 나오는 영화, 그렇지 않은 영화로 나누어진다"는 소리까지 듣던 한석규, 방송 3사 메인드라마의 주연 배우로서 모두 흥행시키며 인기를 누리던 류시원, 당시 트렌디 드라마를 휩쓸며 최진실의 뒤를 이어 TV 드라마계의 아이콘이었던 김희선 등, 다른 연예인들이 각 부문에서 10~20%대 지지율을 보였던 반면, 김국진은 개그맨 부문에서 55%라는, 말 그대로 넘사벽의 인기를 구가했다. 게임잡지 V챔프[12]에서는 '김국진이 돈 벌려고 마음 제대로 먹고 뛰었다면 지금쯤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대기업이 될 수도 있었다'라는 말을 남겼다.[13]

이 시절 김국진은 딱히 연기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는 평가에도 시트콤 뿐만 아니라 정극 드라마에도 출연했었는데, 이는 김국진을 좋아하는 시청자폭이 너무나 넓었기에 대박 드라마가 안 되더라도 최소한 망하지 않을 정도의 시청률은 보장될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정극 드라마 시청률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3.1. 사상 최고 인기 연예인?

김국진이 한국 연예계 역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렸는지에 대한 떡밥이 있는데 일명 김국진 GOAT설. 워낙 엄청난 인기를 누린 개그맨이라서 현세대 개그맨의 아이콘격 인물인 유재석과의 vs놀이도 인기있는 조합이다.[14]

일단 김국진의 전성기는 확실히 한국 개그맨 역사 내에서는 손꼽혔다고 말할 수 있다. 상술한 대답도 "전성기의 기간은 유재석이 길지만 최전성기 기준만 보면 김국진이 우위에 선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코미디언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린 심형래와 이주일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결론은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시대상이나 문화 등 여러가지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15]

그 외 김국진보다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고 비슷한 기간의 전성기를 이룩한 서태지와도 비교가 된다. 전체 인기는 남녀노소를 아우른 김국진의 인기가 더 크지만 서태지는 젊은 층의 인기를 떠나 아예 문화를 바꾼 아이콘이라고 평가받는다. 서태지도 위의 1998년 연예인 부문별 인기순위에서 은퇴 후 2년이 지났음에도 1위에 등극하는 등 대단한 인물이지만, 분야도 다르고 시기도 미묘하게 엇나갔기 때문에 둘의 인기를 두고 직접적인 비교를 하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종합적으로 따지면 부동의 원탑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린 코미디언 중 한 명이라고 볼 수 있다.

4. 몰락

최고 전성기이던 1999년 갑자기 방송을 그만두고 1년 가까이 휴식을 취했다.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골프 때문에 그만 두었다고 알려졌었으나 김국진 본인이 tvN의 스타 특강쇼에 나와 밝힌 바에 의하면 최고로 인정받으며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리던 상황이였지만 그 대가로 건강을 포기해야했다고 한다.[16] 본인 왈, 사람들은 골프 때문에 그만둔 줄 알지만 사실은 나 죽을까봐 그만둔 것.이라고.

김국진은 2001년, MBC의 미니시리즈 " 반달곰 내 사랑"에서 주인공인 체육교사 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17] 주된 활동 방향을 코미디언에서 정극 연기자로 옮겼다. 실제로 김국진은 정극과 희극의 경계에 있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고[18] 테마게임에 출연했을 때도 당시 출연하던 개그맨 중 독보적인 연기력을 보여준 개그맨이었다. 또한 김국진은 자신의 '혀짧은 국진이' 캐릭터에 별로 애착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반달곰 내사랑>에서 김국진이 맡은 배역에는 당초 유오성, 차승원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이들이 영화 촬영 등의 이유로 고사하자 김국진이 대신 들어갔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첫 회(2001년 9월 26일)부터 2001년 10월 11일까지 <신화>와 경쟁했다. <반달곰 내사랑>은 삼각관계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인지 주인공들의 주변 이야기가 없었던 데 이어 극이 너무 잔잔하게 진행됐다는 혹평을 받았고, 결국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쳤다.[19]

사족으로, 그는 <반달곰 내 사랑>에 앞서 2000년 초 방영될 뻔한 SBS 수목 미니시리즈 신화를 통해 연속극 데뷔를 할 예정이었다, 당시 또 다른 남자 주인공 역에는 김승우, 여주인공은 이승연이 낙점되었으나 이승연은 당시 출연 중이었던 KBS 2TV 주말극 사랑하세요? 스케줄과 겹쳐 캐스팅 제의를 포기하였고, 제작진은 영화 거짓말로 스타덤에 오른 모델 출신 김태연을 대타로 올리는 한편 2000년 하반기로 첫 방송일을 미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작진이 김국진과 갈등을 빚어 편성이 무산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김국진 자리에는 KBS 슈퍼 탤런트 출신 김태우, 김승우 자리에는 박정철, 김태연 자리에는 김지수가 대신 캐스팅되었고 방영일도 2001년 하반기로 변경되었다.

이후 2002년 MBC 시트콤 <연인들>에 출연, 같이 호흡을 맞춘 이윤성과 2002년 10월 17일 결혼했다.[20] 시트콤 연인들에 출연하던 2002년까지만 해도 김국진은 90년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인기를 끌었고 대중적 인지도 역시 건제했다.[21] 그러나 이윤성과 김국진은 2003년 7월부터 돌연 별거를 시작하다가[22], 2004년 3월 15일에 이혼했고 이윤성 측에 막대한 위자료까지 지불하게 된다.[23]

또한 이때 김국진은 골프에 빠져서 프로 골퍼에 도전했지만[24] 프로 등단 시험마다 탈락하면서 막대한 돈을 잃었다. 거기다 이 때 시도한 골프의류 사업과 주식투자 모두 실패.[25][26][27] 또한 김국진은 사람이 좋아 후배든 친구든 돈 빌려달라는 사람에게 돈을 내주었지만 정작 돈을 빌린 사람들 중 김국진에게 돈을 갚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으며 설상가상으로 절친했던 인물에게 사기도 당했다고 한다.[28] 이러한 일들이 겹쳐서 수 년만에 김국진은 그 동안 벌어들인 그 많은 재산을 잃고 파산 직전까지 가게된다.

이처럼 김국진은 2006년 MBC의 정극 드라마 진짜진짜 좋아해[29] 2007년 MBC의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MC로서 출연하며 재기에 성공하기 까지 4~5년여간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슬럼프 당시 그는 세상에 회의를 느껴서 자살시도도 여러번 하고 대인기피증이 와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피했으며 친구들과도 만나지 않는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김국진 본인은 이 경험에 대해 훗날 방송에서 "난 빵을 맞았다"고 표현했다. 유행어가 될 조짐이 있었으나 너무 처절해서 개그로 인식되지 않은 탓인지 금방 잊혀졌다.

김국진의 전성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대체 뭘 하면 그 위치에서 이렇게까지 낙오할 수 있는가에 경악하게 된다. 본인이 이 시절에 대해 남자의자격 청춘에게 고함 강연 당시 자평하기를 '5년간 끊임없이 내려치기만 하는 롤러코스터에 탑승해 있었다.'고 자평했을 정도이다. 그걸 여실히 보여주는 게 방송 복귀 초기의 모습인데,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도 어느 정도 안정된 현재에도 호리호리한 편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이지 앙상하게 말라있었다.

명랑히어로 비장의 카드로서 그가 등장한 촬영분에서 자신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요즘은 뭐든지 다 재밌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듯하다.

5. 재기

파일:라디오스타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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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울하게 살고 있던 김국진을 안쓰러워 했던 친구와 지인들이 다시 방송 복귀를 권유해서 김국진은 드디어 방송계에 복귀한다. 여담으로 복귀 당시에 대형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 아니라 여행 프로그램 등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전의 김국진에 비하면 엄청나게 마르고 아파보여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원래 마르기는 했으나, 정말 고생했다는게 느껴질 만큼 마른 것.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50418_20_01.jpg
2005년 토요일 오후 6~7시대 버라이어티의 늪에서 고전하고 있던 MBC에서 회심의 카드로 제작된 토요일이라는 버라이어티[30]로 복귀를 선언하고, 당시 김용만, 박경림 등과 중국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여행하는 "커이 커이"라는 프로그램으로 간만에 주말 버라이어티에 출연했다. MBC가 야심차게 준비한 특대형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으로 기획이 된 프로인 데다가, 유학 후 복귀하려 했던 박경림과 함께 다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참신한 기획보다는 유명 MC의 복귀라는 화제성에만 치우친 분위기였고,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코너가 없어졌고 프로그램명도 토요일에서 강력추천 토요일로 바뀌었다. 이후 그는 다시 방송 활동이 스톱된다.

그러나 쌓아놓은 인망이 있었기 때문에 방송가에서 동기들과 후배들의 지지를 받아왔다.[31]이후 무릎팍도사 출연을 시작으로 라디오 스타를 맡게 되는데, 처음에는 라디오 스타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그 시기에도 매우 센 방송이었기에,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방송 트렌드를 따라가질 못하면서 오는 무리수로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김구라의 멱살을 잡거나 대본을 집어던지거나 했던 것도 이 시기 쯤.[32]

이렇듯 어려움도 많았지만 회가 갈수록 조금씩 캐릭터를 잡아가기 시작하면서 레전드 짤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등 자신감을 얻어 라디오 스타 MC로써 확실히 자리 잡기 시작한다. 특히 김구라가 없던 비상(?) 체제에서는 조용조용하게 직설적인 화법으로 게스트를 당황하게 만들 정도가 되었고, 라디오 스타가 특정 매니아 층 형성에 성공하면서 소위 알까기 프로그램인 명랑히어로, 음악여행 라라라, 위기탈출 넘버원[33] 등에도 출연했다.

또한 SBS에서도 절친노트에 호스트로 출연해 '친해지고 싶은 유명 연예인들을 지명해달라'는 제작진의 요청대로 지명한 후에[34] 이완을 포함한 그 연예인들과 친해지는 과정이 가감없이 나오고, 이전처럼 다른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을 보여주면서, 파일럿 방송 후 이제 갓 정식 방송을 시작한 절친노트의 흥행을 이끈 공신이 된다.[35] 이와 동시에 남자의 자격에서도 이경규를 유일하게 견제하는 역할로 나름의 영역을 보여주며 활약을 선보였고, 지상파 뿐 아니라 종편에서도 MC를 하는 등 단순한 재기를 넘어서 제3의 전성기가 왔다는 말이 돌 정도로 부활에 성공했다.

2008년 중반기에는 라디오 스타에서 나이를 잊은 골반춤(일명 '예~' 춤)에 큰 스퍼트를 받았으며, 모두들 그를 보면서 귀엽다는 평가를 했다.[36] 이후에도 가끔씩 선보이면 좋은 반응을 얻는다. 특히 다른 쪽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는데, 카라의 2집 미니앨범 타이틀곡인 ' Pretty Girl'의 안무를 보면 '예~' 춤을 응용한 비슷한 동작이 있는데, 카라가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김국진 선배님의 춤을 응용한 거'라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2008 MBC 방송연예대상에서는 김용만과 같이 시상을 하러 나와서 아직 둘의 콤비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유감 없이 보여줬다.

6. 2010년대 ~

2013년에는 연예계 정보 프로그램 섹션TV 연예통신의 11대 남성 MC로 발탁되었고, 같은 방송사인 만큼 라디오 스타에서 언급을 자주 했다. 주요 패턴은 '다작'이나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김구라가 김국진은 MBC에서 스튜디오 예능 2개로 꿀빨고 있다고 공격하고, 윤종신 규현이 옆에서 깐족대는 것.

라디오 스타 추신수, 이대호 편에서는 스윙으로 촛불 끄기에 도전했다가 초를 날려버리는 레전드 영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 이후 불타는 청춘에서 다시 한 번 도전했는데, 여기서는 시원하게 성공했다.[37] # 다만 여기서는 구본승이 라디오 스타의 아성을 재현한다

2015년 설 특집 파일럿 방송이였던 불타는 청춘에 출연. 정규 편성 후에도 고정 출연하며 사실상 프로그램의 흐름을 조율하는 MC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역시 같은 고정 출연자인 강수지와는 ' 치와와 커플'이라는 별칭까지 얻을 만큼, 실제인지 설정인지 헷갈리게 하는 케미스트리[38]로 인기몰이 중이었다. 강수지와의 케미 덕분에 2015 SBS 연예대상에서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했다. 본 방송을 보면 알겠지만 강수지의 매우 적극적인 수상 소감에 당황하며 얼버무리는 모습이 백미. 앞선 발언도 한참 쩔쩔매다가 말한 거다.[39] 물론 강수지와의 케미스트리가 전부가 아니라, 불타는 청춘 초창기와 현재의 김국진 모습을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사람이 많이 밝아지고 적극적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6년에는 강수지와 열애를 인정하고 높은 화제성으로 대상 후보까지 오르게 되었으며[40], 2018년에 결혼까지 골인했다. 여러모로 김국진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프로그램.

2016년 3월 22일 tvN에서 첫방송을 한 집밥 백선생 시즌 2에 출연하게 되었다. 요리 실력은 그냥 없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41] 팔순인 김국진의 어머니가 '내가 너 이렇게 밥 해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얘기를 한 게 출연 계기라고 한다.[42] 방송에선 백주부가 가르쳐주는 레시피를 적극적으로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7년 9월 7일부터 방영하는 TV조선의 예능 방송인 시골빵집에서는 직접 빵을 만들어 파는 일을 맡게 되었다. 카스텔라를 전담하는 김갑수, 오빠들 챙기며 나머지 빵들을 만드는 이수경과 함께 추억의 찐빵을 만들려는 중인데, 백선생에게 배우던 열정이 식지 않았는지 초보자임에도 나름 열심히 기술을 익혀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9년에는 부인 강수지와 나레이션을 맡은 자연스럽게에 2020년까지 출연했으며, 동년에 tvN에서는 10부작 골프 예능을 런칭했다. 연말에는 TV조선에서 킹스맨에도 출연하며, 모두 종영하긴 했지만 종편과 케이블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다만 역시 동년 9월에 시작된 '한번 더 체크타임'은 방송사 치고 시청률이 잘 나오며 순항하는 중이다.


[1] 대선배지만 후배를 아끼고 이해하기로 유명. [2] 이때 김국진을 탤런트실에 숨겨준 사람이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이라고 라디오 스타에서 밝혔다. [3] 2016년 10월 26일 라디오 스타에서 박수홍이 밝힌 바로는 귀차니즘으로 인해 비자 발급 인터뷰 문항을 제대로 읽지 않고 마약 경험과 총기소지 상황에 를 체크하는 바람에 실제로 미국에 몇 년간 입국 금지처분을 받았다고. 김국진과 김용만은 처음엔 김수용이 미국에 오기 싫어 거짓말하는 걸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김수용은 캐나다를 통해 밀입국을 할 생각으로 밴쿠버로 건너갔다고 한다. 골프장을 가로질러서 국경을 건널 생각이었으나 절벽이라 못 넘었고, 멕시코 마약 밀매단에 섞여서 건너오는 방법과 국경 근처에서 헤엄쳐서 건너는 방법 등을 알아보기만 하고 돌아왔다 한다.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에 본인이 출연해서 직접 언급. 애초에 밀입국 자체가 불법이기도 하지만 이런 밀입국은 절대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미국은 밀입국자가 하도 많다 보니 출입국 심사 자체가 엄격하고, 밀입국자로 인한 사회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보니 이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 어쩌다 운이 좋아 당국의 시선을 피해도 정상적인 직업을 찾는 건 불가능하고 갑질에 시달리는 건 물론, 잘못하면 영영 미국 방문할 길이 막힐 수도 있다. 불법 이민자들이 이걸 감수하고 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생활이 고국보단 그나마 낫기 때문. 치안도 나쁘지 않은 한국에서 멀쩡히 살던 김수용이 진짜 이 길을 택했으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의리와 젊은 혈기 때문에 갔었던 듯. [4] 귀국 후 처음에는 KBS에서 '오키도키쇼', '토요일 7시가 좋다' 등의 프로그램을 김용만과 진행하다가 1995년 중반 MBC의 '도전 추리특급'과 ' 테마게임'을 진행하면서 활동 영역을 MBC로 옮기게 된다. 청춘행진곡 폐지와 함께 개그계에서 은퇴한 박세민 이원승, '청춘행진곡'이 폐지되어 SBS로 이적했던 김창준, 김은태, 이웅호 등의 대안으로 김국진과 김용만을 영입한 것으로 추측된다. [5] 물론 이전에 배삼룡의 '삼룡사와'도 있긴 한데, 삼룡사와는 배삼룡 소유의 음료 회사에서 출시한 제품이다보니 상황이 좀 다르다. 게다가 삼룡사와는 '파는 곳이 없어 먹어보지 못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쫄딱 망했다는 점에서, 본인 회사가 아니었으면 출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증이 될 듯. [6] 개그맨, 예능인이 가요계, 연기계를 넘어 연예계 전반에 걸쳐 최고의 위상을 지닌 톱스타가 된 경우는 정말로 극히 드물다. 현재 예능계 최고수준의 MC들인 이경규, 강호동, 신동엽도 연예계 종합 최고 스타의 위상을 가져본 적은 없으며, 역대로 꼽으면 80년대의 이주일 심형래, 전성기 시절의 김국진, 유재석 정도만이 달성한 매우 극히 드문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유재석의 경우 임팩트보다는 20년 가까이 정상의 자리에 위치하며 50이 된 지금까지 최고의 연예인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큰 반면, 김국진은 역사에 남을 5년을 보냈다는 차이점이 있다. [7] 다만 지금처럼 정확히 관객 전산집계가 되었다면 아마 1,000만 이상까지도 집계되었을 거라고 한다. 적어도 코미디뿐 아니라 영화 쪽까지 고려했을 때는 압도적인 관중동원력을 여러 번 보여줬다는 점에서 전성기 심형래의 임팩트가 전성기 김국진의 임팩트보다는 높을 수 있다. [8] 실제로 라디오 스타에 의하면 모 방송국 PD들이 그를 출연시키기 위해 그의 집 앞에서 밤샘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9] 다른 항목의 1위와 그 아래 차순위자와의 % 차이가 비교적 격차가 많이 안 나는 상황에서 김국진은 혼자 과반수를 넘기다 못해 60%에 육박하는 득표율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김국진을 제외한 모든 득표율을 합쳐도 김국진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 물론 서태지는 당시 은퇴한 지 2년도 더 지났고 그동안 일체의 미디어 노출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보면, 어떤 면에서는 서태지가 더 대단하게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서태지가 은퇴를 하지 않았어도 김국진처럼 과반수를 넘기는 건 불가능했을 확률이 높다. 김국진에 비해 서태지의 인기는 젊은 층에 한정되었기 때문. [11] 참고로 현재는 잘 쓰지 않는 "탤런트"란 분류가 있는데, 90년대 당시는 배우는 영화에 주로 출연하는 배우, 탤런트는 TV에 주로 출연하는 배우를 지칭했다. 한 예를 들면 현재는 영화배우란 이미지가 더 큰 이병헌은 '공동경비구역 JSA' 전까지는 주로 드라마에 출연해 TV배우의 이미지가 강해 탤런트로 분류되었다. 사실 TV와 영화의 급이 확연히 나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드라마와 TV 양쪽에 다 출연하는 배우들이 대부분이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나뉜 분류법에 가깝다. 실제로 신현준과 김승우, 최진실, 최지우 등 배우/탤런트 양 부분에 이름을 올린 배우도 많다. 다른 예로 2000년대에 유재석, 강호동 등 인기 개그맨들이 MC로 두각을 나타내자 아예 유강, 신동엽 등을 'MC'로 분류하고 '개그맨'과 순위를 따로 매긴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현재같으면 '예능인들'이라고 분류될 법한 개그맨 순위에서 김국진의 위상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12] 대원씨아이에서 펴내던 V점프의 한국어판. 말이 한국어판이지 사실상 로컬라이징이다. [13] 그렇다고 해서, 이를 김국진이 마음 먹고 뛰어다니며 돈 벌지 않았다는 얘기로 오해하면 안 된다. 당장 김국진은 지쳐서 1년 간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로 무리해 가면서 돈을 벌고 있는 상황이었다. [14] 유재석뿐만 아니라 김국진의 인기는 어느정도였는지 비교하는 떡밥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심심하면 돌아다닌다. [15] 실제로 이주일과 심형래(조금 더 포함하면 주병진, 서세원 등)와 김국진의 전성기 시기는 무려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 SBS가 개국하고, 컴퓨터가 이전보다 많이 보급되는 등 문화적으로도 큰 차이가 난다. 그래서 단순 인기만 놓고 비교하기엔 또 셋 다 비슷비슷하다. [16] 90년대에 일주일에 1억을 벌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건강 때문에 스케줄을 절제한 결과라고 한다. 참고로 1990년대 강남 대치동 현대아파트와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약 1억 5,000만 원이었다. [17] 당시 전성기였던 여배우 송윤아가 상대역이자 여주인공인 한정은 역을 맡았다. [18] 전성기 시절 그가 출연했던 콩트의 대다수는 극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것이 상당히 많았다. [19] 참고로 <반달곰 내사랑> 출연진이었던 이세은, 박정수 등은 차승원이 출연한 드라마인 KBS 2TV 보디가드에서 조연이었는데, 이 드라마 출연진 중의 한 명인 이원종은 김국진의 대학 1년 후배다. [20] 여담으로 이 시트콤에 이선균이 이윤성의 동생으로 분했다. [21] 김국진은 2000년대 초반까지 방송가에서 왕성히 활동하던 인기 방송인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90년대에는 라이벌이 1명도 없는 원탑 그 자체였다면, 2000년대 초반에 들어 신동엽, 박수홍, 강호동, 남희석, 김용만 등 여러 MC들과 경쟁관계였다는 것이 다르다. [22] 결혼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시점. 김국진이 수면제를 과다복용하여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실제로 병원에 실려가서 위세척을 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김국진은 아스피린을 좀 많이 먹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윤성의 외도설 또한 상당히 탄력받을 수 밖에 없는 게 이윤성이 현 남편을 만난 시기가 김국진과 결혼 생활 중이었을 때였다. 다만, 이윤성 역시 김국진과의 결혼 생활 중 유산을 했다고 알려져있고 2015년 채널A 웰컴 투 시월드에 출연해서 "살기 위해 이혼했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23] 김국진의 성격을 감안해본다면 빠른 이혼을 위해서 위자료를 줬을 확률이 높다. 왜냐면 짧은 결혼 생활 속의 위자료는 생각보다 크지 않으며, 당시 김국진의 재산 등을 감안하면 이게 맞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윤성과의 결혼 생활이 어쨌든 그녀와의 결혼 이후 김국진이 망가진 걸 감안한다면,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김국진 인생에서 최악이었을 테니 하루빨리 이혼을 위해 위자료를 준 거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4] 1990년대에도 골프를 취미로 했었다는 말을 박수홍이 라디오 스타에서 언급하긴 했었다. [25] 그나마 골퍼로서 입지가 안정된 후에는 집중력 향상 드링크제 광고를 찍기는 했다. [26] 프로 골퍼 시험에 계속해서 도전한 것은 매년 프로 골퍼 시험마다 턱걸이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년이었으면 될 성적인데 올해는 합격이 어려운 성적이었다든지...마지막 홀에서 3퍼트를 하고 1타 차이로 떨어졌다던지... 근데 이 합격 기준 타수라는 건 매해 해당 코스의 난이도에 따라 설정되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된다. [27] 한창 프로 골퍼에 도전하던 시기, 케이블에서 최홍림과 함께 <김국진의 파워골프쇼> 라는 골프예능을 진행하기도 했었다. 당시 김국진의 인기와 더불어 시청률이 무척 높았으며, 3년 넘게 진행하였다. 당시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하게 해달라고 PD에게 부탁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28] 아래에 김수용에게 빌리지도 않은 돈을 세 번이나 갚은 일화만 봐도 돈에 별 관심이 없는 성격이다보니 채무자에게 딱히 독촉도 할 리 없고, 돈을 악착같이 받아낼 리도 없다보니 많이 당한 것으로 보인다. [29] 이영자가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정극 드라마 출연을 했다. 그 전에는 시트콤이나 특집극 위주로 출연했다. [30] 이 프로그램에서 무한도전의 전신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31] 감자골 멤버들이 모두 인성이 좋았던 것으로 유명했었으며 침체기 이후 동기들과 후배들이 나서서 도와줬다는 점에서 복귀 과정이 김수용과 비슷하였다. [32] 다만 비난과 별개로 당시 라디오스타의 근본없고 막나가는 컨셉과 딱 맞았기 때문에 이 시절을 라디오스타의 전성기로 회고하는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면 김국진이 차분하게 진행을 하려는데 김구라가 아픈 곳을 찌르며 돌직구를 던지면 윤종신이 이를 받아 깐족거리고, 옆에서 신정환은 한 술 더 떠는 형식. 이 과정에서 수습해보려던 김국진이 결국 폭발해 버럭하면서 "야야야!"하면서 대본을 집어던지고 김구라의 멱살을 잡으며 절정에 달하는 방식. [33] 2010년 5월 10일부터 2012년 9월 3일까지 고정 MC로 출연. [34] 당시 김국진은 본의 아닌 강제 휴식기 후 중증 대인기피증으로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다. 때문에 제작진들과의 만남에서도 긴장과 두려움을 심하게 느끼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나왔다. [35] 더 나아가 나중에는 김구라, 문희준과 함께 절친노트의 MC로 발탁되면서 재기에 성공했음을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36] 사실 전성기 때도 김국진의 포인트 중 하나는 귀여움이었다. 그 시절은 남자에게 절대로 귀엽다는 말을 하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귀엽다는 말을 실제로 들은 적은 없지만, 사실 빵 터지는 개그맨까진 아니던 김국진이 절대적인 인기를 누린 건 캐릭터 자체가 극히 호감형이었다는 것. 특유의 혀짧은 말투만 해도 김국진이 대놓고 민 건 하나도 없으나, 특유의 말투나 엉성한 행동이 너무 재밌고 호감가서 다들 따라한 것. 물론 김국진이 캐릭터 하나만으로 인기를 끈 건 아니고 연기력이나 개그감도 훌륭한 편이었다. [37] 초가 세워진 단상 높이가 확연히 낮아서 치기 쉬웠던 듯 하다. 역으로 라디오 스타 때의 초 높이가 유독 높았다. [38] 물론 두 사람은 프로그램 출연 전부터 25년 가까이 알고 지내던 사이. 2016년 첫 촬영 시기부터(2월 16일 방송분으로 추정) 수상 소감의 영향인지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의 김국진을 볼 수 있다. (??? : 딱 좋아요!) [39] 시청자들은 역대급 수상 소감이라고 얼른 결혼하라고 난리. [40] 하필 당해 새로 런칭된 미운 우리 새끼 신동엽에게 밀려 수상은 아쉽게 실패했다. [41] 남자의 자격에서 라면 포도주를 넣는 용자짓을 저질렀다. 결과는 기껏 넣은 포도주가 라면스프 맛에 묻힌 '와인 실종 라면'(...). [42] 집밥 백선생 시즌 2 첫 방송에서 김국진이 말하기를 김국진의 어머니가 얼마 전 큰 수술을 하셔서 언제나 차려주시던 밥이 없었고, 미안하다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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