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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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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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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본명 가오총더(高崇德, 고숭덕)
정체 高崗
간체 高岗
한국식 독음 고강
영문 Gao Gang
석경(碩卿)
출생 1905년 10월 25일
청나라 섬서성 미지현 [1]
사망 1954년 8월 17일 (향년 48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시베이중산군사학교 재학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없음( 무신론)
부주석
재임기간
1대 1949년 10월 1일 ~ 1954년 9월 27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일전쟁 시기2.3. 국공내전 시기2.4. 동북왕2.5. 라오수스 사건2.6. 자살, 그리고 제명
3. 가오강은 반역을 꾀했는가?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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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정치인. 국공내전 동북 일대를 장악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동북왕으로 불렸으나, 가오강-라오수스 사건으로 몰락하여 1954년 자살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가오강은 1905년 10월 25일 청나라 산시성 헝산(橫山) 미지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 용진(龍鎮) 소학교에서 공부한 후 헝산 지역의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그는 헝산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중에 류즈단(劉志丹)과 만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했다. 같은해 위린 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한 그는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동시에 중국국민당에도 가입해 펑위샹 휘하의 국민혁명군에 소속되어 시베이중산군사학교(西北中山軍事學校)에서 공부했다.

그러던 1927년, 장제스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해 국민당 내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에 가오강은 국민당을 탈퇴해 산시성 공산당 지부에 들어가서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산시성 홍군 정치위원으로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1932년, 그는 산시성과 간쑤성 위원회의 서기를 맡았으며 나중엔 섬서성 당위원회에 파견되어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1933년 7월 28일 내부 밀고자로 인해 산시성위원회가 무너지고 위안예둥(袁岳棟) 산시성 당비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가오강은 가탁부(賈拓夫)와 함께 간신히 탈출했다.

1933년 8월, 가오강은 산시성과 간쑤성의 홍군 임시 총사령관을 맡았고 11월 이후엔 42사단의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1934년 1월 초, 가오강은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간쑤성 정닝현을 습격했다가 여성 민병대에게 패한 후 정치위원을 사퇴하고 시안-간쑤 국경 지대의 농민 게릴라 부대로 파견되어 일반 사령부의 정치위원으로 봉사했다. 1934년 4월 가오강이 소속한 홍군은 화츠(華池) 전투에서 승리했고, 가오강은 다음 달에 제42사단의 정치위원으로 재임명되었다. 그리나 1935년 7월, 가오강은 곽홍도(郭洪濤)에 의해 "초산주의(梢山主義)" 파벌로 분류되어 42사단 정치위원 직책에서 제외되었다.

1935년 2월, 가오강은 북서혁명 군사위원회의 홍군 본부 정치위원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9월엔 홍군 25사단, 26사단, 27사단이 합쳐 홍군 15군단이 결성되었고, 가오강은 이 15군단의 정치국장을 맡았다. 이후 15군단은 쉬하이둥과 류즈단의 지휘를 받으며 라오산(勞山) 전투에 투입되어 국민혁명군 1개 사단을 괴멸시키고 사단장 허리중(何立中) 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얼마 후 류즈단은 소련 유학파로부터 "반혁명 분자"라는 비난을 받고 감옥에 갇혔고 대대장 이상 간부들도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 가오강 역시 감옥에 갇혀 총살 위협을 받았다.

그러다가 1935년 10월 19일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중앙 인사들이 대장정을 마치고 우치전(吳旗鎭)에 도착했다. 류즈단과 간부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즉시 그들을 모두 석방시키고 소련 유학파들을 축출했다. 이로서 석방된 가오강은 1936년 1월 내몽골로 보내졌으며 6월부터 10월까지 중국 공산당 몽골 노동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그후 10월에 산시성 위원회 실무위원회 차관을 지냈으며 12월엔 비서관을 역임했다.

2.2. 중일전쟁 시기

중일전쟁 발발 후, 가오강은 산시성 북부 지대에 머무르면서 산시-간쑤 국경지역의 보안사령관과 당위원회 소수민족 위원회의 비서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1937년 11월, 그는 산시성 팔로군 기병대 지휘관을 지냈으며 그해 12월엔 제7차 전국 대회 준비위원회 위원 중 한 명으로 뽑혔다.[2] 1938년 5월, 가오강은 산시성위원회 비서관을 맡았으며 1939년 1월 이래 상원 의장과 민중 대회 연사로 활동했다. 1940년 9월, 그는 산시-간쑤 경계 지역의 중앙국 서기를 맡았다.

1941년 5월, 가오강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관을 맡았다. 또한 그는 북서국 연합전선 국장과 민족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북서부 지역의 정당 문제와 산시-간쑤 국경 지방정부의 대량 생산운동을 담당했다. 1943년, 가오강은 산시썽-간쑤 합동 방위군의 정치 위원을 역임했고 1945년에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3. 국공내전 시기

1945년 10월 말, 가오강과 장원톈(張聞天)은 옌안에서 충칭으로 가서 국민당과 평화적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협상 기간 동안 다가올 전쟁을 준비했고, 가오강은 이듬해 4월 하얼빈 전선의 지휘관을 맡아 하얼빈에 대한 공격 작전을 계획했다. 그후 그는 1946년 6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북동부 부국장과 동북 민주연합 정치위원을 역임하면서 동북국의 업무를 총괄하고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47년, 가오강은 츠펑(赤峰)으로 가서 토지 개혁 사업을 준비했다.

청쯔화의 회고록에 따르면, 가오강은 토지개혁을 준비할때 극단적 좌파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청쯔화는 1947년에 실시된 국토 조사회의 이후, 가오강은 펑전의 과감한 토지분배 실시 주장을 마음에 들어했고 펑전의 주장은 시기에 적합하지 않다며 반대하는 류사오치에게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1948년 1월 동북 민주연합이 동북 군사지역으로 개명되었고, 가오강은 동북 군사지역 최초의 부사령관이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리고 1948년 말 라오산 전역이 끝난 후, 린뱌오는 동북 군대가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오게 했지만 가오강은 동북 지역에 계속 머물렀다. 그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북동부 국장, 동북부 인민 정부 의장, 동북 군사지역 지휘관 및 정치위원장을 역임했다.

가오강은 1949년 7월부터 8월까지 류사오치, 왕자샹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며 9월에 중국 인민협상회의 첫번째 본회의에 참석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행사에 참석했다.

2.4. 동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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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1월 7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혁명 3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마오쩌둥(왼쪽에서 첫번째)과 가오강(맨 오른쪽)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가오강은 중국공산당 동북국 제1서기 겸 동북인민정부 주석에 임명되었다. 그후 그가 다스리는 동북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동북 지역의 곡물 생산량은 1949년에 전년 대비 약 20% 증가했으며 연간 산업 생산액은 당초 계획보다 4.2% 늘었다. 또한 가오강은 6.25 전쟁 시기 한반도로 파견된 인민해방군에 대한 물자 지원을 착실하게 수행했으며 타 지역보다 먼저 증산절약운동을 실시해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동북국 관내 철도계통이 절약하여 국가 유동자금으로 헌납한 금액은 4조원 이상이었으며 철도국 역시 지난해 연말보다 1조원에 달하는 금액을 절약했고 1040만 톤의 식량을 증산절약했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가오강 동지가 1951년 12월 3일 공장, 광산 기업 작업장에서 전개한 증산절약운동에 관한 보고는 매우 훌륭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각지에 배부하여 참고해야 한다. (중략) 이런 경험은 중국의 모든 공장, 광산 기업에 유포해야 하며,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적절히 실행해야 한다."

또한 가오강은 증산절약운동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간부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불거지자 삼반오반운동을 전개해 부패 관료들을 모조리 감옥에 투옥시키거나 처형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당중앙 공식문건을 통해 동북 지역의 반부패운동을 본받아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삼반오반운동을 전 중국에 시행하게 했다. 이렇듯 그는 동북 지역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고, 자연히 그의 위세는 극에 달해 사람들에게 동북왕(東北王)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이 남침 결심을 굳히고,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해서 군사지원을 요청하자 중국공산당 최고위 지도부 중에서 유일하게 적극적인 지원을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 주더,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등이 내부정세와 미군 참전 가능성 등을 이유로 신중론을 견지했지만, 가오강은 북중우호와 "3주안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김일성의 호언장담을 근거로 참전을 지지했다고 한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17) 한국전쟁 (중)

1952년, 가오강은 중앙인민공화국 중앙 계획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53년 베이징으로 향했다. 당시 그의 위세는 실로 대단해서 류사오치, 저우언라이에 비견된다고 보는 이들이 많았다. 가오강 역시 그리 생각했고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2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류사오치 저우언라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마오쩌둥도 이들을 숙청하고 싶어한다고 여겼다.

가오강의 이러한 판단은 마오쩌둥이 1953년 6월 15일 정치국 회의에서 "신민주주의 사회질서 확립" 주장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마오쩌둥은 정치국 회의의 연설에서 "신민주주의 사회질서 확립", "신문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 그리고 "사유재산 보호" 등 세 가지는 총노선에서 이탈한 우경적 관점이라며 비판했다. 이는 1951년 류사오치가 제기한 "현재로서는 중국 공산당이 신민주주의 제도를 공고화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관점이나 저우언라이가 1952년에 제기한 "중국 경제의 발전의 길은 신민주주의를 통해야만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었다.

실제로 마오쩌둥 류사오치의 견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49년 4월 25일, 류사오치는 텐진에서 "공산당 점령 이후 마비된 생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톈진의 자본가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직후 마오쩌둥은 톈진시 서기 황커청(黃克誠)에게 "주요 임무는 계급투쟁이며, 자본가 계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류사오치의 연설에 명시적으로 반대했다. 그럼에도 류사오치는 신민주주의의 관점에 따라 동북 지역의 자본가 계급에 대한 억제 정책을 즉각적으로 자본가 계급을 소멸시키자는 좌경 민주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신세제(新稅制) 문제가 겹쳤다. 신세제는 기존의 합작사에 대한 우대를 취소하고 공유제 부문과 사유제 부문에 동일한 세금을 적용하는 것으로, 사영기업을 배려하고 국영기업과 합작사의 경영 개선을 촉진시키기 위해 보이보(薄一波)[3]의 주도로 추진된 세금제도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공사 일률 평등납세는 자본주의적 주장이며 세제 개혁에 대해 사전에 당 중앙에 보고하지 않은 건 문제다."라며 엄중하게 비판했고 보이보의 신세제를 승인한 저우언라이 역시 호되게 비판했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1953년 무렵엔 외교에 관해서만 권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마오쩌둥이 1953년 초 가오강에게 류사오치가 1929년 펑톈에서 국민당에게 체포된 상황에 대해 조사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리면서, 가오강은 류사오치 저우언라이를 제거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일단 저우언라이는 내버려두고 류사오치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먼저 자신과 오랜 친분을 유지했던 천윈(陳雲)에게 마오쩌둥이 류사오치의 과거 행적에 대해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동북에서 오랬동안 같이 활동했던 린뱌오와 6.25 전쟁 지원 과정에서 긴말한 관게를 맺었던 펑더화이와도 접촉했으며 상하이의 라오수스(饶漱石)로부터 지지를 확보했다.

가오강은 1953년 6월 13일부터 8월 13일까지 개최된 재정공작회의에서 안즈원(安志文)이 기초한 중앙정치국 위원 명단을 유포해 류사오치를 비판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 명단의 핵심은 "보이보는 포함되어 있는데 린뱌오는 없다."는 것이었다. 안즈원이 류사오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오강은 이 명단이 류사오치가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규합함으로서 분파 활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가오강은 1953년 10월 3일부터 11월 2일까지 상하이, 항저우, 광저우 등 남방의 주요 도시를 여행하며 그곳의 지도자들과 만나 인사 문제와 당내의 세력 문제 등을 협의했다.

이때 소위 '군당론(軍黨論)'이 등장했다. 가오강은 혁명의 주류는 근거지인데 당의 역사에서 후난성 지역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평가되고 있으며, 7차 당대회의 인사에서 다른 지역과 군대의 인사들을 배려하기 위해 징강산 출신들이 배제되었다며, 8차 당대회에서는 분파를 고려하지 말고 실제 능력에 따라 인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의 주직이 "근거지와 군대의 당"과 "후난성의 당"으로 나뉘며 당은 군대가 만든 것이라는 '군당론'과 밀접히 관련된다. 또한 가오강은 당을 개조하여 "근거지와 군대의 당"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같은 주장이 제 무덤을 파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2.5. 라오수스 사건

1953년 11월, 마오쩌둥은 가오강의 활동에 대해 전달받고 이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이때 가오강은 안즈원이 만든 정치국위원 명단 유포에 대해 "동지가 명단을 누설했소?"라는 마오쩌둥의 질문에 이실직고하지 않아 마오쩌둥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그후 1953년 12월 15일, 마오쩌둥은 휴가기간 중 자신을 대신해 중앙의 업무를 처리할 책임자 문제를 논의했다. 마오쩌둥은 관례대로 류사오치가 대신하도록 제안했지만, 가오강은 류사오치가 대리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으며 회의 후 천윈 덩샤오핑을 방문해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특히 그는 천윈에게 "부주석을 몇 명 두자. 당신이 하나를 하고 내가 하나를 하자."고 말했다.

천윈은 곧장 마오쩌둥을 찾아가 가오강이 자신에게 한 말을 알렸다. 마오쩌둥은 가오강이 당과 국가의 영도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폭로했다고 여기고 깊이 분노했다. 그는 12월 19일 덩샤오핑, 천윈과 대화를 나눈 후 천윈을 남방에 보내 가오강의 남방 여행에 대해 조사하고 남방의 지도자에게 가오강이 류사오치에게 반대하고 당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으니 그에게 속지 말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그는 천윈 린뱌오에게 가서 그가 아직도 가오강을 지지하는 지를 알아오게 하면서 "린뱌오가 의견을 바꾸지 않는다면 나와 그는 나누어질 것이며 의견을 바꿔야만 그와 함께할 것이다."라고 린뱌오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이 말을 들은 린뱌오는 즉각 가오강을 더는 지지하지 않으며 마오쩌둥의 영도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12월 24일, 마오쩌둥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가오강 문제를 폭로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베이징에는 두 개의 사령부가 있다. 하나는 나를 우두머리로 하는 사령부로 광명정대한 것이고, 하나는 다른 사람을 우두머리로 하는 어둠의 활동을 하는 지하세력이다."

그리고 <당의 단결을 강화하는데 관한 결의>를 기초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 뒤, 마오쩌둥은 항저우로 떠났고 류사오치가 대리를 맡아 일체의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후 마오쩌둥은 1954년 1월 7일 <결의> 초안을 검토한 후 류사오치와 중앙서기처에게 편지를 보내 결의안을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통과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은 가오강을 제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1월 22일 류사오치에게 "누구든 자아비판하는 건 환영하지만 누구에 대한 비판은 가능한 피하고 과오를 범한 동지들이 깨닫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또한 1월 28일엔 양상쿤에게 "정면 비판을 견지하고 지난 과오를 경계삼아 잘못을 고쳐 사람을 구하는 것이 내 방침이다."라고 말하며 가오강을 숙청할 생각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내비쳤다.

2월 6일~2월 10일, 중국 공산당 7기 4중전회가 개최되었다. 류사오치의 주재로 개최된 이 회의에서 가오강과 라오수스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뤘지만, 이들 뿐만 아니라 류사오치, 보이보, 펑전 등도 자아비판했다. 그러나 가오강은 자신이 권력탈취 음모를 꾀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2월 중순 중앙서기처의 결정으로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37명 및 주요 업무 인원 40명이 참여한 가오강 문제 좌담회가 개최되었고 가오강은 이 좌담회에서도 자아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권력을 탈취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1954년 2월 17일, 가오강은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베이징 의과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 자살시도는 그가 자신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죽음으로 당의 결정에 항거하고 당을 배반한 것으로 여겨져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가오강이 자살을 선택한 것은 진퇴양난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거리낌없이 털어놓은 대상인 천윈이 전날 좌담회에서 자신을 강하게 비판한 것에 깊은 배신감을 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중앙위원회는 가오강이 상하이정부 주석 라오수스와 공모했다고 판단해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1954년 4월 동북국에서 동북지구당 고급간부회의를 개최해 가오강의 추종자들의 반당 활동에 대한 폭로 활동을 전개했으며 그와 동시에 상하이 시, 당 대표회의 및 산둥성 당 대표대회를 개최해 라오수스와 그 추종자에 대한 비판 활동을 전개했다. 동북국의 장수산, 장민위원, 자오더쥔, 마홍, 궈펑, 천보춘 등이 가오강과 연좌되어 비판받았으며, 산둥분국 대리서기 샹밍이 라오수스의 추종자로 비판받았다.

2.6. 자살, 그리고 제명

1954년 8월 초, 가오강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완치되는 즉시 인민재판소로 소환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가오강은 감전사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8월 17일 수면제를 과다복용함으로서 자살했다. 1955년 3월, 가오강은 제7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5기본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제명되었다. 그후 그는 베이징의 워난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에게 묘비가 박살났다.

3. 가오강은 반역을 꾀했는가?

가오강 사건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가오강의 권력탈취음모 사건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 의견과 일치한다. 프레데릭 티비스(Frederick Teiwes) 교수도 마오쩌둥이 우월한 권위를 지닌 1인 우위체제에서 가오강이 류사오치를 대신해 후계자가 되려고 권력을 탈취하려 했다는 관점을 받아들인다.

또다른 의견은 가오강과 소련과의 관계를 줌점으로 둔다. 스탈린 사후 소련파인 가오강을 제거한 것이 가오강 사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흐루쇼프의 회고록에서 기원하며, 이후 서구의 많은 연구들은 이러한 관점을 견지했다. 실제로 저우언라이는 1954년 2월 가오강 문제에 대한 좌담회 때 소련과의 관계 문제를 지적했으며 마오쩌둥도 가오강이 외국과 내통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지적은 일견 타당해보인다.

그러나 최근에 풀린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밀 문서를 연구한 학자들은 가오강 사건과 소련의 관계는 극히 부차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류사오치, 펑더화이 등도 숙청 과정에서 외국과 내통했다는 혐의가 씌였지만 훗날 무고로 복권되었듯이, 외국과의 내통 문제는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조작되거나 과장되어 관례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가오강 사건은 당시 마오쩌둥의 권력이 그렇게까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사례다. 물론 마오쩌둥은 쭌이 회의에서 1인자로 등극한 뒤 정풍운동을 통해 명실상부한 공산당 주석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수많은 파벌들의 연합체여서 아무리 강대한 권력과 권위를 갖춘 마오쩌둥이라고 해도 이 권력구조의 변동은 쉽지 않았다. 특히 류사오치는 오랜 세월 자신과 함께 공산 혁명에 투신한 핵심 인사였고 따르는 무리가 가득해서 함부로 건드리기 힘들었다. 그 때문에 마오쩌둥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데 신중하고 모호한 태도로 대했고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의도와 상반된 대안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이때까지만 해도 류사오치가 자신의 후계자로 적합하다고 판단했으며 저우언라이 역시 없어서는 안될 인재라며 높게 평가했다. 신민주주의 문제, 신세제 문제로 갈등을 빛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 정책 집행 과정에서 견해 차가 생긴 것일 뿐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두 사람을 제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가오강에게 류사오치의 과거를 조사하게 한 것은 류사오치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오강이 류사오치 저우언라이를 배제하고 2인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었던 건 사실로 보인다. 그의 류사오치 비난 수위는 마오쩌둥의 기대를 지나치게 초월했다. 게다가 그는 린바오, 펑더화이, 천윈, 라오수스 등과 접촉해 함께 류사오치를 도모하자는 뜻을 밝혔으며 급기야 천윈에게 "부주석을 몇 명 두자. 당신이 하나를 하고 내가 하나를 하자."는 위험 발언을 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마오쩌둥의 의중을 잘못 읽고 자신의 권력욕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내비치다가 자멸하고 말았다.

4. 참고 문헌



[1] 現 위린시 헝산구 [2] 다만 서열은 최하위였다. [3] 보시라이(薄熙来)의 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