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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17:59:19

정풍운동

파일:MAIN201407061231000454827801673.jpg

중국어: 风运动
영어: Yan'an Rectification Movement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제1단계: 사상학습 단계3.2. 제2단계: 정풍 개조 단계3.3. 제3단계: 심간(審幹) 단계
4. 결과5. 평가6. 여담7. 참고 문헌

1. 개요

중국 공산당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옌안에서 진행한 대중운동. 공산당 내 '나쁜 풍조'를 뿌리뽑고 당원과 홍군을 진정한 마르크스-레닌주의주의자로 육성시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2. 배경

1934년 10월, 중국 공산당은 국민혁명군 제5차 초공작전으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본거지인 루이진이 위험해지자 대장정에 돌입했다. 그후 1935년 1월에 열린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국민혁명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였다가 참패를 면치 못한 보구 등을 맹렬하게 비난했고 저우언라이 등 당의 핵심 인사들의 동조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당권 장악에 성공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완전한 지도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에는 왕밍이, 쓰촨성에는 장궈타오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서 1930년대 말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권위는 확립되지 않았다. 물론 마오쩌둥의 입지는 왕밍과 장궈타오보다 훨씬 강력했지만, 당 내부에는 여전히 분파적인 요소들이 남아있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마오쩌둥과 왕밍 간에는 이견이 계속 존재했다.

한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구를 중심으로 분산,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역마다 독자적인 엘리트 집단이 형성됐기 때문에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통일된 지도체제를 관철하기 어려웠다. 특히 통일전선에 기반을 둔 '3·3제'[1]가 추진되면서 계급연합정권이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공산당의 규모는 급격하게 팽창했다. 1937년 4만여 명이었던 당원은 3년 동안 80만으로 20배 이상 늘었으며 팔로군은 3만여 명에서 40만 명으로, 신서군은 1만명에서 10만명으로, 옌안의 인구는 44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특히 38년과 39년 이후 일본군 점령지와 국민당 지배지역의 학생과 지식인들이 옌안을 항일구국의 중심지로 보고 모여들었다. 그들은 5․4운동시기부터 중국의 옌안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근대사상과 개량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들을 옌안으로 모이게 했던 힘은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의 영향보다는 항일민족주의 사상과 강대하고 자유로운 중국을 추구하고자 하는 비전이었으며, 이러한 점은 공산당 내에 여러 가지 이질적 요소들이 공존하게 했다. 이 때문에 공산당 내부에는 사상적, 정치적 혼란과 동요가 존재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공산당은 본격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먼저 일본의 중국 침략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는 해방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940년 8월 당 중앙은 화북 5개 성에서 일본군에 대한 군사공격을 개시했다. 이 백단대전 이후 일본은 공산당 지배지역의 확장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해방구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1941년과 1942년에 일본군은 각기 중국 주둔 병력의 75%와 63%를 집중 배치하여 팔로군과 신서군을 공격했으며, 점령지역에 대해서는 가혹한 지배정책을 실행했다. 이 두 해 동안 화북 해방구를 소탕하기 위해 일본군이 병력을 1천 명 이상 병력을 사용한 것만도 무려 174회에 달했고, 화북에서 봉쇄용 도랑을 1만 리나 파고 봉쇄용 담을 6천여 리나 쌓았으며 새로운 거점도 1만여 개를 마련했다.

한편, 국민혁명군 또한 홍군과 마찰하였다. 홍군은 제2차 국공합작이 체결된 후에도 기회만 되면 국민혁명군에게 훼방을 놓기 일쑤였다. 이에 국민혁명군은 공산당 해방구에 대한 봉쇄를 강화했고 1940년에 국민당 정부는 팔로군과 신서군에 대한 군비 지급을 1/5로 줄였다. 게다가 1941년 공산당이 고액 통화를 당초 10만 원 발행한다는 계획과는 달리 200만 원을 발행하면서, 옌안 지역의 물가가 폭등해 1940년에 500이었던 물가지수가 1941년엔 2200, 1942년엔 9900으로 폭증했다.

또한 공산당은 국민혁명군의 봉쇄 강화로 보조금이 두절되자 지배지역에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였다. 구국공량의 징수량을 크게 확대했으며, 1941년에 개시된 정부 공채 500만 원, 물품세(화물세), 양모와 가축에 대한 신세 35만 원이 부과됐다. 그리고 128원을 목표로 영업세가 부과되었다. 그리고 1940년에서 1942년까지 화북에서 발생한 자연재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화북지역에서는 연이어 홍수, 한발, 병충해가 발생하여 진수(晋綏) 해방구의 식량생산은 2/3 이상 줄어들었다.

이러한 여러 문제로 인해 공산당은 위기에 직면했다. 1940년에 40만 가까이 되던 팔로군은 1942년엔 30만으로 줄어들었고 신서군은 13만에서 11만 1000명으로 줄어들었다. 해방구의 인구도 1억에서 5000만 이하로 줄어들었고 군민의 생활은 매우 빈곤해져서 입을 옷이나 먹을 기름, 채소와 종이, 병사들이 입을 신발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 차원에서 여러 정책이 추진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정풍운동이었다.

3. 전개

3.1. 제1단계: 사상학습 단계

1941년 5월, 마오쩌둥은 옌안의 고급 간부회의에서 <개조아문적학습(改造我們的學習)>이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그는 이론을 실제에 연결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본 원리를 천명하면서 "주관주의는 공산당과 민족의 적으로 주관주의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1년 9월 10일 당 중앙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당내 역사, 특히 토지혁명 전쟁기 후기의 노선 문제를 검토한 뒤 다시 주관주의와 종파주의에 대한 반대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중앙위원회는 이 회의에서 왕밍의 노선은 그릇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고급 간부 약 300명을 조직 몇 개로 나누어 고급 학습조를 구성, 정풍 학습을 진행했다. 이 학습조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란 방법에 의해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과 공산당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주관주의를 극복하고 이론 수준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1941년 12월, 마오쩌둥이 편집한 <육대이래(六大以來)>가 정식으로 출판했다. 이것은 당의 중요한 역사적 문건을 모아놓은 것으로 고급 간부들을 학습시키는 주요 교재였다. 마오쩌둥은 이를 통해 고급 간부의 사상 인식을 제고하여 전반적으로 보편적인 정풍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고자 했다. 이 준비 단계에서, 마오쩌둥은 정치력을 발휘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그는 옌안의 정치 환경을 조작함으로써 상대방, 특히 장궈타오와 28인의 볼셰비키 세력을 약화시키고 정적을 하나씩 숙청할 수 있었다.

3.2. 제2단계: 정풍 개조 단계

1942년 2월 초, 마오쩌둥은 <정돈당적작풍(整頓黨的作風)>과 <당팔고를 반대함(反對黨八股)>[2]이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이로서 옌안의 정풍운동은 소수의 고급 간부가 참가하던 것에서 나아가 전당 각급 지도 간부와 당원이 참여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학습내용도 정치노선을 주로 연구하던 것에서 더 나아가 보편적인 사상 방법, 사업 방법을 교육하고 점검하고 투쟁하며 단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마오쩌둥은 2월 1일에 발표한 <정돈당적작풍>에서 ‘종파주의에 기운 당의 기풍(당풍), 주관주의(학풍), 그리고 당원이나 작가들이 형식주의적이고 교조주의인 문장이나 보고문에 매몰되어 있는 현상(문풍)’을 바꾸자고 호소했다. 이는 당 내부 상층부에 싹트고 있던 관료주의에 대한 경계였다. 이후 마오쩌둥은 2월 8일에 <당팔고에 반대함>을 발표해 문인들을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지식인이 여전히 신문화운동 시기의 가치를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있어서 새로운 혁명적 현실에 부응하는 지식인의 자세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정풍운동의 방침과 취지에 대해서 당내 모순의 성질과 특징에 근거하여 당내 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서술하고 "과거를 징계하여 앞으로 삼가게 하며,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구한다."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비판과 자아비판을 통해 사상의 오류를 바로잡는 동시에 당내 구성원들을 단결시키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지난날의 오류에 대해서는 사정을 두지 말고 반드시 적발하여 과학적인 태도로 나쁜 점을 분석하고 비판해야 한다. 둘째, 적발하고 비판하는 목적은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마오쩌둥이 규정한 정풍 방침은 당원들이 서로 비판과 자아비판을 전개함으로서 진리를 견지하고 잘못을 바로잡아 당의 단결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1942년 2월초부터 4월 초까지 많은 문건들이 발표되었고 활발한 토론과 검증, 비판이 병행했다. 중앙연구원 문예연구소 연구원 왕스웨이(王實味)는 <들백합화(野百合花)>를 발표해 옌안 사회의 불합리함과 어두운 면을 부과시켰다. 왕스웨이에게 있어서 예술은 예술, 그 중에서도 문학의 역할은 정치가 사회제도를 개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예술의 독립성을 바탕으로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봉건적 악습을 비판하여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들백합화를 통해 항일체제 하에 대중과의 단결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시기에 일부 고위 간부들의 관료주의적 태도가 당과 혁명에 해를 끼친다고 보고 이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였다. 또 샤오쥔(蕭軍)은 <동지적인 사랑과 인내(同志的愛與耐)>에서 동지의 총알이 동지의 가슴을 뚫는 것을 지적하였고, 아이칭(艾靑)은 <작가를 이해하고 작가를 존중하자(了解作家尊重作家)>를 발표해 창작의 자유가 없음을 호소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1942년 3~4월 중에 <해방일보>에 '우리들의 학습을 개조하자.', '학풍, 당풍, 문풍을 정돈하자.'는 등 말을 개재하며 '문예정풍'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옌안 문예좌담회'를 개최하고 노동자, 농민, 병사를 위해 프롤레타리아 입장에 서서 세계를 개조하는 문예활동을 해야 하고 노동자, 농민, 병사들에게 봉사하고 대중 속에 들어가서 인간을 개조하는 활동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혁명을 위한 문예, 정치에 종속되는 문예를 요구했다. 그 결과 왕스웨이, 딩링, 아이칭 등은 절대평균주의적, 부르주아적, 또는 소부르주아적 반동 사상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2년 3월 20일, 당 중앙 정치국은 해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중앙 정치국 주석과 서기처 주석을 겸임했고, 총학습위원회 위원장 류사오치, 부위원장 캉성 펑전이 마오쩌둥을 보좌했다. 마오쩌둥은 이 회의를 통해 중앙정치국과 서기국에 대해 지도적 권위를 확보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경쟁세력을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한 그룹은 왕밍과 28명의 볼셰비키, 그리고 소련에 유학을 가 외국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마오쩌둥은 그들을 '독단주의자'라고 불렀다. 또다른 그룹은 '경험주의자'라는 낙인이 붙었는데, 류보청, 쭤취안. 런비스 등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그룹에 속한 이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아비판하도록 강요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고백과 사과문을 작성했으며 자아비판한 사람들은 나중에 자신의 고백에 따라 박해를 받았다.

이후 마오쩌둥은 총연구위원회를 통해 교정 및 숙청 작업을 단행했다. 여기서 대활약한 인물이 바로 캉성이다. 그는 위원회를 주도해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사상 교정 및 정적 숙청을 차질없이 진행했고 마오쩌둥이 선거와 임기 제한에 제한을 두지 않고 독재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이리하여 마오쩌둥은 옌안 정권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었다.

3.3. 제3단계: 심간(審幹) 단계

1943년 10월,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고위 간부들이 당의 역사적 문제를 더 깊이 연구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리하여 정풍운동은 세번째 단계로 넘어갔다. 이 단계의 주된 임무는 당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결론을 종합적, 체계적으로 요약하고 당 역사에서 몇가지 주요 오류를 매듭짓는 것이었다. 그 당시 간부 지단은 주로 <6대이전>, <6대이후>, <2가지 노선>과 같은 교리본의 편집에 초점을 맞췄고 열띤 연구와 토론을 가졌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마오쩌둥도 참가했다. "학습 및 현재 상황" 보고서는 동지들의 의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후 당 고위 간부들을 심사하여 그들의 죄를 심판하는, 소위 심간(審幹) 현상이 발생했다. 간부들은 '교정 운동'에서 자신의 고백에 대해 글을 썼고 사람들은 그의 죄와 오류를 엄중히 꾸짖었다. 이러한 현상은 곧 인민재판으로 이어졌고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풍운동을 수행한 캉성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마오쩌둥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이들을 가차없이 탄압했다. 왕밍은 실수를 자백하도록 강요받았고 보구도 잘못된 좌익 노선을 추구받는 것에 대해 비난받았다.

특히 스탈린의 대숙청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바 있고 마오쩌둥에게 절대평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던 왕스웨이에 대한 탄압은 극심했다. 1943년 4월 1일, 캉성은 왕스웨이의 공식 체포를 명했다. 이후 왕스웨이는 수년간 심사를 받았고 마침내 1946년에 당으로부터 '숨겨진 트로츠키주의자이자 반혁명가'라는 판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1947년 7월 1일, 왕스웨이는 캉성이 극비리에 파견한 공안 요원들에 의해 은밀히 살해되어 어느 우물에 파묻혔다.

한편 정풍운동은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펑전은 중앙 정치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정류 운동을 실시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자아 비판하는 글을 당에 제출했다. 중앙 연구위원회는 이를 연구하고 트로츠키주의자이거나 반혁명사상을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이들에 대한 '교정'을 실시했다. 이리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 특히 국민당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온 신입 당원들은 정화, 구금, 검열, 고문을 당했고 그중 수백명이 왕스웨이처럼 처형되었다. 그들 뿐만아니라 가족과 친척들도 연좌제로 인해 함께 박해받았다. 이 박해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결코 저지르지 않았던 범죄에 대한 고백을 한 다음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1945년 4월 20일, 제6차 중앙위원회 제7기본회의는 여러번의 역사적인 쟁점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역사적 교훈을 체계적으로 요약한 뒤 옌안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확고히 자리잡았고 마오쩌둥의 사상이 당의 기본 이념으로 확정되었음을 선언했다. 이로서 옌안의 정풍운동은 막을 내렸다.

4. 결과

정풍운동은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에서의 절대적인 위치를 확고히 다지는 데 기여했다. 과거 마오쩌둥과 치열한 당권 다툼을 벌였던 왕밍, 보구 등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마오쩌둥에게 용서를 구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수천명의 당원들이 호된 탄압을 받고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마오쩌둥은 중국을 통일한 후에도 정풍 운동을 수차례 추진해 많은 지식인들을 트로츠키주의자, 반혁명분자, 분파주의자로 몰아세워 숙청했고, 나중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마저도 배격하고 마오이즘을 중국의 유일무의한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정풍운동은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마오쩌둥과 모택동 사상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전개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4월에 개최된 제6기 6중전회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게 되는데 영향을 줬다. 이것으로 천두슈와 이립삼, 구추백 그리고 강서시대의 소련유학파 노선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택동 노선을 강조되었으며, 「역사문제에 대한 결의」는 1945년 4월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7차 당대회에서 결과적으로 통과됐다. 이로써 중국 공산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더불어 모택동 사상으로 재정립 되기에 이른다.

5. 평가

마오쩌둥은 정풍운동에 대해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보편적인 교육운동'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 시기 류사오치 일파로 몰려 탄압받다가 1974년에 복권되어 사회과학원 원장을 맡았던 후차오무는 정풍운동이 당시 중국의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했으며, 결과적으로 당 체계를 정립하고 노선 및 이념의 혼란상을 극복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콘래드 브란트는 정풍운동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적 진리를 중국인들에게 확실히 정립하기 위한 사상적 훈련과정"으로 보며 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해 수준을 크게 끌어올려 항일전쟁과 중국 혁명의 성공을 이뤄냈다고 호평했다. 또한 그는 자아 비판과 교육을 통해 교화함으로써 당이 더욱 단결하고 공고해지도록 했으며, 당내 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는 모범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찰머스 존슨은 정풍운동이 중국의 공산주의가 소련 공산주의를 대신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항일시기의 민족주의 정서를 이용하여 민족신화와 이념에 대한 재정립을 통해 광범위한 '대중노선'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이는 결국 항일전쟁 이후 다시 발생한 내전에서 대규모 군중의 지지를 끌어냈고 정권창출로 연결됐다고 봤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정풍운동은 민족주의사상을 이용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로 보아야 하며, 중국공산당은 자신의 대중동원 방식의 혁명을 추구하면서 코민테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를 제공했다.

반면, 곽화륜(郭華倫)은 정풍운동의 성격을 공산당내 권력투쟁의 연속으로 파악했다. 표면상으로는 당내에 존재하는 사상적 오류와 혼란을 방지하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사상개조'의 형식을 빌린 권력투쟁으로, 그 대상은 바로 왕밍과 소련 유학파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왕밍 등이 주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오류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이념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라는 개념을 적용했다. 더불어 공산당 성립 이후 존재했던 여러 가지 노선에 대한 평가를 단행함으로써 자신의 '신민주주의 이론'을 정립하고 마오이즘을 체계화했다. 마오쩌둥은 정풍운동을 통해 중국공산당 내에서 정치․군사․사상․조직에 대한 일원화된 지도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항일전쟁 시기 옌안에 파견됐던 소련 기자 페트르 블라디미로프는 자신이 본 정풍운동을 일기 형식으로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정풍운동이 "초기에는 사상교육운동으로 시작했으나 이후 마오쩌둥과 그의 지지자들이 소련 지지파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고자 했던 잔혹한 정치운동"으로 규정했다.

6. 여담

"정풍(整風)"이라는 원래 한자문화권에서 그릇된 풍조를 바로잡는다는 의미로 자주 씌여왔고, 한국 정치권에서도 "정풍" 라는 말을 많이 써왔다. # 중국에서는 이 용어가 혁명운동에만 쓸 수 있는 말로 고정되어서 아무데나 갖다붙이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알려진 2021년 중국 연예계 정풍운동이 있는데, 실제로는 이는 한국에서 붙인 이름이고, 중국에서는 청랑(중국명 清朗:칭랑)운동이라고 지칭한다.

7. 참고 문헌



[1] 각 지역조직마다 공산당이 1/3의 의석을 차지하고 다른 당파 및 무소속이 1/3, 중간 세력에 속한 자는 1/3을 차지하도록 하는 조직 원칙 [2] 여기에서 팔고라는 단어의 유래는 명, 청 시대의 과거 시험 격식인 팔고문으로, 형식주의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