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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2 14:35:52

일리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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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로마군3.2. 카르타고군
4. 전투 경과5. 전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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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06년 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하스드루발 기스코- 마고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이베리아의 일리파(오늘날 스페인 세비야)에서 맞붙은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 이베리아 전선의 승패를 판가름한 결정적인 전투이다.

2. 배경

기원전 209년 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 카르타고 식민지를 지키던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군대가 각 전선에서 이베리아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적의 본거지인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해 이틀만에 공략했다.(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그는 무수한 전리품을 수집하는 한편, 도시 주민들을 온화하게 대하고 이베리아 인질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 부족들의 호감을 샀다. 이베리아 부족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인질을 돌려주자 무척 기뻐했고, 카르타고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했다. 스키피오는 뒤이어 주변 도시들을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했다.

한편, 로마군이 카르타고 노바를 이틀만에 공략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가 더 이상 세력을 뻗치지 못하게 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로 향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주변 도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이 곧 오니 이탈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마고 바르카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와 함께 용병을 소집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하지만 섣불리 로마군과 맞붙지 못하고 전열을 가다듬기만 했다. 스피키오 역시 병력을 증강하는 데 공을 들이면서, 기원전 209년은 더 이상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채 지나갔다.

기원전 208년 초, 스키피오는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3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타라코나에서 남쪽으로 진군했다. 여기에 6,000에서 12,000명의 이베리아 부족민도 합세하면서, 그의 병력은 40,000~44,000명으로 늘어났다. 스키피오는 해안가를 따라 카르타고 노바로 빠르게 이동해 수많은 부족들의 복종을 받아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가 이대로 남하하는 걸 방관했다간, 가뜩이나 카르타고 노바 함락 후 동요하는 자기 부대 내 이베리아인들이 대거 이탈하리라 여겼다. 그는 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이쿨라 언덕에 진영을 세워서 스키피오와 대적하면서,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가 원군을 이끌고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바이쿨라는 카르타고 노바 주변의 은광이 공략된 뒤 카르타고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내에 가지고 있는 마지막 은광이 위치한 곳이었기에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바이쿨라 전투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에게 패배했고,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전투 며칠 후에 도착했으나 적군이 이미 바이쿨라 언덕을 장악한 걸 확인한 뒤 철수했다.

이후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그리고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 회의에서 자신이 3만 장병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한니발과 합세할 테니, 두 사람은 히스파니아에 남아서 스키피오와 전투를 지속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 모두 동의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로마군이 점거한 피레네 산맥의 동쪽 고개를 피해 서쪽 고개를 건너 크게 우회하여 알프스로 진격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베티스 계곡으로 이동했고, 마고는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발레아레스 제도로 향했다. 한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여름 내내 바이쿨라에 머물면서 부족민들을 온화하게 대접하다가 타라코나로 되돌아가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기원전 207년, 스키피오는 재차 이베리아 반도 남쪽으로 진군했다. 마고 바르카가 아프리카에서 파견된 한노와 함께 켈테베리아에 들어와서 용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키피오는 부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에게 1만 병력을 줘서 이들을 몰아내게 했다. 실라누스는 극비리에 오롱기에 주둔한 적에게 접근해, 두 진영 중 켈테베리아인들이 몰려 있는 진영 하나를 습격하여 대부분의 적군을 섬멸했으며, 다른 진영에 있던 카르타고군도 마저 물리쳤다. 한노는 사로잡혔고, 마고 바르카는 간신히 탈출하여 카디스에 있는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합세했다. 스키피오는 여세를 몰아 베티스 남부를 정복하려 했지만, 각 도시에 강력한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어서 일일이 공략하기엔 희생이 많이 따를 거라는 걸 파악하고 타라고나로 철수했다.

한편,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는 거듭된 패배로 이베리아 부족들의 이반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최후의 한판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206년 봄, 그들은 각지의 도시에 흩어져 있던 병력을 끌어모아 일리파에 집결했다. 그들은 언덕에 올라가서 진영을 치고, 스키피오가 오기를 기다렸다. 스키피오 역시 한판 승부로 카르타고군을 이베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내길 희망했기에, 그들의 도전장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 이베리아 전선의 운명이 걸린 최후의 대규모 전투가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로마군

폴리비우스 주장: 보병 45,000명, 기병 3,000명
리비우스 주장: 55,000명

3.2. 카르타고군

4. 전투 경과

로마군이 일리파 평원에 도착한 뒤 진영을 건설하느라 분주하자, 마고 바르카와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는 기병대를 이끌고 이들을 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이를 사전에 예상하고 근처 언덕 뒤에 이탈리아 기병대를 숨겨뒀다. 적 기병대가 몰려들 때, 숨어있던 이탈리아 기병대가 갑자기 뛰쳐나와 그들을 덮쳤다. 격전 끝에 카르타고 기병대가 물러섰다. 그들은 처음에는 전열을 유지한 채 후퇴했지만, 거듭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패주했다. 이후 양측은 며칠간 평원에 전투 대형을 치고 소규모 접전을 벌이면서 상대방을 살폈다. 이때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적군이 항상 중앙에 군단병을 배치하고 양측면에 이베리아 부족민들을 배치하는 걸 확인하고,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때도 그렇게 배치할 거라 판단하고 이에 따른 대응을 준비했다.

한편,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항상 아침 늦게 군대를 전장에 내보내는 걸 확인했다. 그는 새벽에 병사들에게 아침 식사를 제공하도록 한 뒤, 식사를 마치자마자 평원으로 진군해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그리고는 기병과 경보병들을 보내 적의 전초 기지에 접근해 투창과 돌멩이를 던지라고 지시했다. 적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깜짝 놀란 카르타고군은 급히 진지에서 뛰쳐나와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중앙의 로마 군단병에 대응하고자 리비아 중보병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용병으로 고용한 이베리아 부족민들은 전투 코끼리와 함께 양측면에 배치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이날만큼은 딴판으로 배치했다. 즉, 이베리아 동맹군을 중앙에 배치하고, 로마 군단병을 양측면에 배치한 것이다. 이 로마 군단병은 각각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지휘했다.

이윽고 적과 1km도 채 남지 않을 만큼 가까이 접근했을 때, 스키피오는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군단병들은 이베리아 동맹군과 격돌하여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했고, 전투 코끼리들은 벨리테스의 투창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패주하면서 카르타고군 대열을 혼란에 빠뜨렸다. 한편 리비아 중보병대는 팔랑크스 전열을 갖춘 채 천천히 진군했고, 로마군의 중앙 대열에 선 이베리아 병사들은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양익이 격파당하자, 중앙의 리비아 병사들은 포위섬멸될 위기에 몰렸다. 그들은 처음에는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식사도 안하고 뛰쳐나와 힘겨운 격전을 치르느라 체력이 바닥나자 무거운 갑옷과 무기, 방패를 죄다 내팽개치고 진지로 도주했다. 스키피오는 이들을 추격하여 완전 섬멸하려 했으나, 폭우가 갑작스럽게 내리는 바람에 더 이상 추격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다음날 새벽, 카르타고의 생존자들은 몰래 진영을 떠나 베티스 강으로 이동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스키피오는 즉각 추격했고, 알자라페 언덕에서 적을 따라잡았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요새화된 도시에서 농성했다고 한다. 반면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언덕에 임시 진영을 세웠다고 한다. 그들은 며칠간 포위되어 맞섰지만 끝내 섬멸되었고, 6,000명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전장을 이탈했다. 이리하여 일리파 전투는 스키피오의 완승으로 종결되었다.

5. 전투 이후

일리파 전투에서 참패한 뒤,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는 소수의 측근만 거느린 채 카디스 인근 해안에 배를 타고 하데스로 도주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곧 모든 걸 포기하고 카르타고로 돌아갔지만, 마고는 이베리아를 탈환하기 위해 카르타고 원로원에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베리아 상실을 기정사실로 보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가능한 한 많은 갈리아인을 모집하여 한니발 바르카와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마고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돈을 받았고, 하데스에서 찾은 모든 금과 은을 몰수했다. 이후 카르타고 노바를 기습 공격해봤지만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하데스로 귀환했을 때 도시에 들어가는 게 허용되지 않자, 도시의 최고 관리들을 유인하여 십자가형에 처한 뒤 이베리아를 완전히 떠났다. 이리하여 카르타고는 이베리아를 영원히 상실했다.

한편,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마고 바르카가 이베리아를 떠난 걸 확인한 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에게 정복한 이베리아 영토를 11,000명의 병력으로 지키게 한 뒤, 자신은 타라코나로 돌아가 전후처리를 했다. 그러나 수크로에 주둔한 로마군이 밀린 급료 즉시 지급과 제대를 요구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수크로 반란) 스키피오는 곧바로 수크로로 가서 반란을 평정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식시킬 아프리카 원정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