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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그 비케르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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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fff> 바르그 비케르네스
Varg Vikernes
파일:BURZU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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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 크리스티안 비케르네스
Kristian Vikernes[1]
본명 루이 카셰
Louis Cachet[2]
출생 1973년 2월 11일([age(1973-02-11)]세)
노르웨이 베르겐
국적
[[노르웨이|]][[틀:국기|]][[틀:국기|]]
장르 앳모스피릭 블랙, 앰비언트 뮤직
종교 신이교주의( 북유럽 신화)[3]
사상 네오 나치즘, 반기독교주의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2. 생애3. 출소 이후4. 총평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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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의 뮤지션이자 매드 아티스트.

메이헴의 前 베이시스트이자 원맨 밴드 버줌의 창시자이다. 버줌은 1991년에 활동을 시작했고 2018년에 활동을 종료했다. 음악적으로는 좋은 평들이 많지만 그의 정치 성향이나 종교적 취향으로 인해 여러번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교회 방화 및 살인죄로 감옥살이를 한 적도 있다.

2. 생애

파일:external/www.burzum.org/photo11.jpg
1994년 유로니무스 살인사건과 교회 방화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바르그 비케르네스(당시에는 '카운트 그리쉬나크'라는 이름으로 활동)의 모습.
당시 선고 영상
파일:external/www.norge.ru/VargV.jpg
1997년, 감옥에서 인터뷰하는 바르그의 모습.
파일:Varg Vikernes.jpg
현재 모습

본명은 상술했듯 크리스티안 비케르네스(Kristian Vikernes)로 노르웨이 베르겐(Bergen)에서 1973년 2월 11일 21시 58분에 출생했다.

6살이 돤 바르그는 부모님을 따라서 이라크로 이주했고 당시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전기기사로 일하고 있었던 바르그의 아버지는 바르그와 그의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했다. 바르그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부모님은 그를 이라크 현지 학교에 입학시켰다. 바르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과 갈등이 발생하자 그 선생을 "원숭이"라고 불렀지만 백인이었기 때문에 체벌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의 경험이 바르그가 백인 우월주의 사상에 빠지게 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1985년, 부모가 이혼하고 노르웨이의 베르겐으로 돌아온 바르그는 재혼한 어머니와 살면서 노르웨이의 학교에 입학했지만 급우들을 아무 이유없이 괴롭혀서 학교에서 양아치로 찍히고, 1987년부터 접한 네오 나치 사상과 일렉트릭 기타에 푹 빠지게 되자 학교는 자신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1989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학교에서 자퇴했다. 이후 바르그는 집에 틀어박혀서 나치즘에 관련된 책들이나 반지의 제왕을 읽거나 기타 연습을 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임모탈 버줌이라는 두 밴드의 전신이 된 노르웨이 베르겐 출신의 밴드, Old Funeral의 라이브 영상. 가운데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청년이 바르그이다.

1990년, 바르그는 학창시절 사귀었던 친구의 소개로 Old Funeral이라는 데스 메탈 밴드에 기타리스트로 가입하여 뮤지션으로서 데뷔했다. 같은 해, 바르그는 Old Funeral의 앨범 발매 건으로 오슬로로 건너가서 메이헴의 리더이자 자신보다 5살 연상인 기타리스트 유로니무스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톨키니스트에다 메탈 기타리스트라는 점에서 공감대를 얻으며 친해지게 되었고 바르그는 유로니무스의 사상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유로니무스 또한 어린 바르그를 마음에 들어했으며 특히, 바르그의 기타 연주 실력을 높게 샀다고 한다. 바르그가 오슬로에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그와 Old Funeral 멤버들과의 사이는 멀어졌고 결국 1991년, 드럼과 보컬 포지션을 맡고 있던 리더 Padden과의 싸움 끝에 바르그는 밴드에서 해고된다. Old Funeral에서 해고당한 직후, 바르그는 Immortal의 멤버로 유명한 Abbath와 함께 Satanel이라는 밴드를 결성했으나 결성 직후,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겨서 밴드는 별다른 활동을 해보기도 전에 해체했다.

이후 바르그는 당시 유로니무스가 막 개장한 블랙 메탈 전용 레코드점 Helvete에 정기적으로 드나들면서 자신의 닉네임을 카운트 그리쉬니크[4]로 정하고 유로니무스가 이끄는 사타닉 서클에 가입하여 각종 테러 활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사타닉 서클에는 일종의 계급제도가 있어서 범죄 행위를 많이 저지를수록 계급이 올라갔는데 행동대장 역할을 맡았던 바르그는 곧, 유로니무스에 이은 2인자가 되었으며 네오 나치였던 바르그는 블랙 메탈 씬에 나치즘을 도입시킨다.[5] 유로니무스는 바르그의 영향을 받아 네오 나치가 되었고 바르그를 아예 자신의 오른팔로 키울려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한다.

사타닉 서클은 1992년, 홀멘콜렌 교회와 판토프트 목조교회에 불을 지르고 잿더미로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교회 방화를 시작했으며 1992년 한해에만 무려 8건의 교회 방화를 저질렀다. 이러한 방화 사건의 중심에는 유로니무스와 바르그가 있었다. 한편, 1992년 유로니무스의 후원으로 바르그의 원맨 밴드 버줌의 앨범들이 녹음되었고 (버줌 1집에 수록된 <War>의 후반부 기타 솔로는 유로니무스의 연주이다.) 바르그는 1992년 6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진행된 메이헴의 데뷔 앨범인 De Mysteriis Dom Sathanas의 레코딩에 베이시스트로 참여하였다.[6]

1993년 1월 말, 바르그는 블랙 메탈과 앞으로 발매될 메이헴의 데뷔 앨범을 홍보하러 Bergens Tidende지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되는데 인터뷰 도중, "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회 방화 사건의 용의자 중 한명이며 1993년 4월에 메이헴의 데뷔 앨범을 발표한 뒤, 사타닉 서클이 앨범 표지처럼 노르웨이의 국보인 니다로스 대성당(Nidaros Cathedral)을 폭파시킬 것"이라 경고했고 이 내용을 들은 기자가 깜짝 놀라서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경찰에 바르그를 신고하였다. 결국 바르그는 경찰에 잡혀서 구치소에 수감되게 된다. 바르그가 잡히자 유로니무스는 편지나 전화 등을 통해 "경찰에게 바르그에 대한 것이나 교회 방화 등에 대해 진술을 한다면 사타닉 서클로부터 피의 복수가 있을 것"이라고 동료 뮤지션들을 협박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7px-Fantoft01.jpg

바르그가 방화했었던 판토프트 목조교회(Fantoft Stavkirke). 12세기 노르웨이 건축물로 세계대전의 화염구덩이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교회였지만 바르그가 불을 질렀다. 다행히도 1997년에 복원되어서 사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n9a5vfg4311su17npo2_1280.jpg

1993년 3월 증거불충분으로 바르그가 석방되자 유로니무스는 바르그의 원 맨 밴드 버줌의 새 EP인 Aske를 발매하면서 바르그가 전에 방화한 판토프트 목조 교회[7]가 불에 탄 사진을 앨범 자켓으로 썼다. 게다가 이 앨범을 발매하면서 CD와 함께 케이스에 라이터를 동봉했다. 그 라이터로 교회 불태우라고.

그러나 바르그는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유로니무스는 단지 입으로만 블랙 메탈의 정신을 떠들 뿐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전혀 없는 사이비"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구치소에서 나온 후 유로니무스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잠적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자신이 새로운 리더가 되어 노르웨이 블랙 메탈 씬을 다시 부흥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바르그는 자신의 본명을 크리스티안에서 Varg Qisling Larssøn Vikernes[8]로 개명한 뒤, 새로운 레이블 Cymophane Productions을 창설하고 "나는 범죄행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기는 두려워하고 동료 뮤지션들에게 이념을 주입시키기만 했던 겁쟁이 유로니무스와는 다르다. 나는 감옥까지 다녀온 행동파다."라고 자신을 홍보하면서 노르웨이의 블랙 메탈 밴드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바르그의 행동을 전해 들은 유로니무스는 주변 동료들에게 "바르그를 납치해서 전기 고문하여 죽여버리고 바르그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어서 퍼트릴 것"이라는 등 바르그에 대한 분노를 표했고 노르웨이 내에서 바르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나자 스웨덴의 블랙 메탈 밴드 Dissection이나 일본의 블랙 메탈 밴드 Sigh 등 노르웨이 밖에서 활동 중인 블랙 메탈 뮤지션들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며 바르그에게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9] 그러자 바르그는 자신과 같이 메이헴의 데뷔 앨범 작곡에 참여했던 Blackthorn라는 기타리스트에게 부탁하여 유로니무스가 살고있는 Tøyen가(街)에 위치한 공동주택을 알아낸 후 1993년 8월 10일, 그곳에 찾아가 유로니무스를 무참히 살해했다.[10]

유로니무스를 살해한 바르그는 도망쳤으나 일주일 후 노르웨이 경찰에게 붙잡혔고 살인, 방화, 강도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노르웨이 사법부는 범행의 잔혹성을 고려하여 징역 21년을 선고했는데 21년은 노르웨이 법정 유기징역 최고형량이며 훗날 노르웨이 연쇄 테러의 범인 브레이빅 또한 징역 21년을 선고받았다. 다만 바르그가 잡혔을 당시에는 무기징역이 있었기 때문에 예방적 구금 처분은 받지 않았다.

이렇게해서 잘못된 사상에 빠진데다가 각종 범죄 행위를 실천할 만큼 호전적인 인성을 지닌 바르그는 20세라는 어린 나이에 살인자로 전락하여 사회에서 영구 추방당하게 되었다.

극우주의자이기 때문에 유로니무스를 살해한 것 외에도 노르웨이의 아나키즘 단체인 'Blitz'의 본부에다 폭탄 테러를 시도하려던 적도 있었다.[11] 탈옥을 하려고 그의 어머니가 극우단체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출소일을 하루 남겨두고 탈옥을 하다가 결국 잡히기도 했다.

3. 출소 이후

2009년 가석방된 바르그는 2010년 새 앨범인 belus를 발매했는데, 나치즘을 버렸다고 주장했다.[12] 바르그는 블랙 메탈씬에서 Graveland와 함께 유명한 극우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였다. 새 앨범의 컨셉은 북유럽의 주신 오딘의 부활.

북유럽, 정확히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종교와 신화에 관심이 많았는지 수감 생활 동안 모은 자료를 토대로 2011년 Sorcery And Religion In Ancient Scandinavia(고대 스칸디나비아의 마법과 종교)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책을 보면 여전히 기독교 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유럽 세계가 마음에 안 드는 듯.

2012년에 발매되는 Umskiptar 앨범은 모든 가사를 노르웨이 시집인 Völuspá에서 따 왔으며, 새로운 빙하기에 의해 대격변을 맞이하는 유럽의 모습이 컨셉이라고 한다.

출소 후 음악의 분위기가 다소 바뀌었다. 블랙 메탈보다 앰비언트에 더 가까운 느낌. 버줌의 팬들 중에서는 '기타가 자글거리지 않아서 버줌같지 않다'라든지, '감옥에 다녀오더니 음악이 변했다'라든지 수감 생활 이후 발매된 앨범에 대해 혹평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르그도 이런 평이 짜증났는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나는 단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내 옛날 음악을 답습하고 재생산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던 적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며 쿨하게 씹는 모습을 보였다. 애초에 블랙 메탈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돈이 아쉬워서 음악을 하는 양반은 아니다. 물론 이쪽을 더 선호하는 쪽도 많다.

2012년 인터뷰에서 그의 아내는 Marie Cachet라는 이름의 프랑스인 조각가이며 프랑스야 말로 사상과 자유가 보장된 나라라며 극찬하면서 자신도 그녀와 같이 프랑스로 이민가고 싶으나 범죄자라는 신분 때문에 해외로 나갈 수 없으며[13] 다른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운둔 중이라고 자신의 근황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가문에 먹칠을 하지 않게 명예로운 방법으로 자결하여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게다가 요즘은 음악 작업보다 자신이 만든 세계관으로 TRPG를 만드는데 빠져있다고 한다. 결국 2015년 8월 MYFAROG라는 TRPG를 출시했다. 근데 바르그 답게 내용이 상당히 병맛이다. 묘하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심히 연상시키는 적들이 나온다.

2013년 3월, 아내와 함께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유적을 탐사하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편집 작업은 프랑스에 위치한 아내의 작업실에서 행해졌으며 다큐멘터리의 음악은 버줌이 담당했다.

2013년 7월 16일에는 프랑스에서 아내가 총기 4정을 산 이후 테러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 버렸다. 실제로 테러를 한 건 아니고 바르그의 과거 행적 등을 보아서 총기 구매 직후 잡힌 것이라고 한다.[14] # 그리고 풀려났다. 이 때 바르그가 출소 후 Louis Cachet 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프랑스에서 아내와 살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4년부터 신이교주의, 생존주의, 인종주의 등 자기 사상과 일상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고 2018년 6월에는 버줌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였다.

2018년 8월에 올린 영상에 의하면 의외로 2차대전 당시의 일본의 위안부 문제 등, 일제의 아시아인에 대한 학살행위와 현대의 이상성도착증 성향이 포함된 일본 애니메이션-망가 등을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은 반기독교주의- 신이교주의[15]에 대한 이상적 롤모델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현재까지도 2차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 나치즘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있다.

2019년 5월 경 남유럽인[16]들을 갈색(brown) 종족의 피가 섞인 인종이지 백인이 아니라는 인종차별성 발언을 했다가 헤이트 스피치와 인종차별을 이유로 결국 유튜브 측에서 공식적인 유튜브 채널 강제 폐쇄를 당했다. 여전히 극우주의성향과 인종차별주의, 백인우월주의 사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극단적인 정치적, 사회적 성향 내지는 사상을 버리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는 예상과는 다르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마스크 착용에 대해서도 오히려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서 미착용자에 대한 비난의 트윗을 남겼다.

2022년 현재 바르그는 자신이 직접 기획, 개발한 TRPG MYFAROG과 관련된 업무를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Bandcamp에서 서비스 하던 버줌 음원을 목록에서 내리기 이전 트위터에서 "앞으로는 Youtube 버줌을 들으면 됩니다."라고 발표한 바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 바르그는 기본적으로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미국과 자유주의가 최악이라는 이유로 러시아에 더 호감이 있어 보인다.

4. 총평

음악가들 중 재능과 인격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극단적인 사례이다.[17] 노르웨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사적 제재를 그닥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재까지 피살자인 유로니무스의 유가족들에게 딱히 보복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은 듯. 이 인간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인 죗값을 다 받은 상태이기에 보복을 당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대신 사회적으로는 살인마로 낙인찍혀 반쯤 매장당했다.

4chan에서는 트인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며 한때 컬트적으로 인기를 끌었는데[18] 시간이 흘러 현재는 그냥 음악만 잘 만드는 인간 말종 취급을 받는다.

다만 이토록 인간성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많음에도 바르그의 음악만큼은 누구도 그 창의성과 예술적 깊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바르그가 겨우 10대 시절에 블랙 메탈 씬을 홀로 개척하다시피 했던 것[19]도 사실인 걸 보면 그의 천재성이 얼마나 대단한 수준인지를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바르그 본인은 자신의 음악들이 블랙 메탈이라고 불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왜냐하면 '블랙 메탈'이라는 장르명을 주창하고 널리 퍼트린 사람이 다름아닌 자신이 죽인 유로니무스였기 때문이다.

5. 기타




[1] 자신의 이름이 너무 순둥이처럼 들린다며 지금의 바르그 비케르네스로 개명했다. 실제로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서양인들 중에는 기독교식 이름을 버리고 이렇게 바꾸는 경우가 많다. [2] 프랑스인인 부인의 성을 따온 것이므로 카셰가 원래 발음에 가깝다. 출처 [3] 트위터에 보면 특히 오딘을 존경하는 듯. [4]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오크 이름. 그는 책에 나오는 수많은 종족들 중에서 오크를 가장 좋아했다. [5] 1987년부터 스킨헤드 패션과 네오 나치 활동을 시작한 카운트는 블랙 메탈씬에 나치즘을 제대로 도입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1992년 발행된 네오 나치 단체 블러드 앤 호너(Blood & Honour)의 정규 잡지에서는 바르그가 존 88(Zorn's 88) 소속의 네오 나치이며 화이트 아리안 레지스탕스(White Aryan Resistance)애도 소속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6] 이후 유로니무스는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헝가리의 메탈 밴드 Tormentor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했던 아틸라를 노르웨이로 초빙하여 곡들의 보컬 멜로디를 최종적으로 완성했고 1993년 4월 26일에 아틸라를 다시 초빙하여 앨범의 보컬을 녹음했다. [7] 해당 교회는 무려 12세기에 건축된 교회로 12세기 교회 자체로서 의미도 있었던 건물이지만 세계대전의 화염 속에서 살아남은 건축물로도 의미가 있으며 목조 건축 양식을 찾아볼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노르웨이 건축물이었다.(다른 목조교회들은 세계대전 중 많은 수가 전소, 파괴되었다.) 우리나라에 비교하자면 반불교 세력들이 부석사 무량수전에 불을 지른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 뒤 해당 교회는 1997년에 복원되었다. [8] 참고로 Varg(바르그)는 노르드어로 늑대(Wolf), 그 중에서도 특히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펜리르 스콜, 하티와 같은 마수에 가까운 괴물 늑대를 말하며(일반적인 늑대는 ulfr라고 한다) Qisling은 비드쿤 크비슬링의 이름을 본 딴 것이다. 참고로 바드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 판 이완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마디로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매국노. [9] 당시 바르그는 블랙 메탈 씬이 노르웨이에 거주하는 아리아인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나라에서 블랙 메탈 장르로 활동하는 밴드들을 혐오하고 배척했다. [10]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유로니무스의 시체에는 칼로 찌른 자국이 23군데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바르그의 증언에 따르면 살려달라며 도망치는 유로니무스를 계속 찌르고 또 찔렀다고도 한다. [11] 'Dagbladet' 2007년 7월 9일자 [12] 어디까지나 나치즘 사상만 버렸을 뿐 기본적인 정치 성향은 여전히 극우쪽에 가깝다. [13]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어떤 나라도 엄연한 살인범의 입국을 허가할 일은 없다. [14] 아직 유럽 전역에서 노르웨이 연쇄 테러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노르웨이 연쇄 테러의 가해자가 자신의 사상이 담긴 성명서를 바르그 비케르네스가 복역하고 있는 감옥으로 보낸 사실도 있다고 한다. 용의자인 브레이빅이 평소 버줌의 팬이었다고. 정작 바르그 본인은 브레이빅을 멍청한 놈이라고 깠다. [15] 일본 국가신토가 정립될 때 신토비종교론에 일부가 혹하는 것을 지칭하는 듯하다. [16] 아랍, 마그레브, 유대인 계통 [17] 음악적 재능과 별개로 인간성이 별로인 인물들은 로저 워터스 에릭 클랩튼 등 다수 존재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살인까지 가거나 최소 살해 협박이라도 한 사람은 없다시피하다. [18] 정작 진심으로 찬양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19] 바르그의 원맨 밴드 버줌은 블랙 메탈 밴드들 중 음악성으로는 탑으로 인정받으며 바르그가 직간접적으로 음악적 방향성에 영향을 준 밴드들 중 굵직굵직한 밴드들만 훑어도 메이헴, 다크쓰론 등 블랙 메탈 씬 내에서 전설적인 뮤지션들이다. 또한, DSBM, 즉 자살 블랙 메탈의 방법론은 하나같이 버줌 4집 Filosofem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도 모자라 최근 블랙 메탈이 사악함이 아닌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도 버줌이 시도한 다크 앰비언트의 영향력 하에 있으니 블랙 메탈이라는 장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사람의 숨결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20] 참고로 영국은 성공회 국가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왕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면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할 정도로 가톨릭 신자에 대한 은근한 차별이 존재했고, 톨킨이 살던 시대에는 아예 대놓고 차별이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장기간 받아온 박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가톨릭이 주류인 국가의 신자들보다 더 독실한 소수정예로 이름높았다. 톨킨은 더할나위 없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오죽하면 성공회 신자인 아내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하여 부부 사이가 틀어진 적도 있을 정도였다. [21] 사실 유럽에는 이러한 사례들이 많다. 그 유명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정교회 성당으로 활용되던 적이 있었을 정도. [22] 유로니무스를 어떻게 죽였는지 시연하는 바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