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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까지 살아남은 멤버들과 가족 단체 사진
중국어: 二十八个半布尔什维克
영어: 28 Bolsheviks
1. 개요
1920년대 말에서 1935년까지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에 유학한 중국 유학생 집단. '돌아온 유학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집단은 자신들을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자칭하며 중국 현지 공산당원들을 '반동분자',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또한 그들은 소련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노동자 중심의 공산 정부 수립을 추구했으며 마오쩌둥의 게릴라 전술을 배격하고 정면 대결 전술을 선호했다. 그러나 1935년 국민혁명군에게 대패해 대장정을 초래한 뒤 쭌이 회의에서 실각했다.2. 구성원 목록
- 왕밍(王明, 1904~1974): 중국 공산당 초기 지도자. 1925년 모스크바 손중산 대학에 입학한 뒤 파벨 미프의 후원을 받으며 28인의 볼셰비키를 구성하고 리리싼, 마오쩌둥과 당권 다툼을 벌였다.
- 멍칭수(孟慶樹,1911~1983): 왕밍의 부인. 남편과 함께 손중산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중국 중앙위원회 법률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 보구(博古, 1907~1946): 왕밍과 함께 손중산 대학에서 트로츠키주의자로 분류된 중국인 학생 숙청을 지휘했고 중국 공산당에서 중앙위원회 사무총장을 맡았다.
- 장원톈(张闻天, 1900~1976): 1926년 손중산 대학에 입학해 1930년까지 공부했으며 1931년 상하이로 돌아와 정치국원, 중앙위원회 조직국장이 되었다.
- 왕자샹(王稼祥, 1906~1974): 1925년 손중산 대학 입학 후 지파 파벌을 결성하여 학권 투쟁을 벌이다가 28인의 볼셰비키 멤버가 되어 중국 공산군 정치부장에 부임했다.
- 양상쿤(楊尚昆, 1907~1998): 192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뒤 손중산 대학에 유학가서 몇년간 공부하다가 1931년 귀국해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천창하오(陈昌浩, 1906~1967): 1927년 손중산 대학 입학 후 28인의 볼셰비키에 가담하였고, 1931년 11월 중국 공산군 제4군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 두쭤상(杜作祥, 1907~1997): 천창하오의 두번째 부인. 남편과 함께 손중산 대학 입학 후 28인의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그러나 1934년 9월 상하이 프랑스 거류지에서 국민당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36년 9월까지 2년간 옥살이를 했다.
- 신쩌민(沈澤民, 1900~1933): 1926년 손중산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930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1931년 1월 중국 공산당 제6차 중앙위원회 제4기 본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4월에는 허베이, 허난성의 지방위원회 장관을 맡았다. 그러나 1933년 11월 20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 장진추(張琴秋, 1904~1968): 선쩌민의 아내. 1924년 11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1925년 11월 선쩌민과 결혼한 뒤 손중산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왕밍과 친구가 되어 28인의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이후 1931년에 귀국하여 공산군 7군의 정치부장에 선임되었다.
- 왕성룽(王盛榮, 1907~2006): 1927년 11월 손중산 대학에서 공부하고 1930년 10월 중국으로 돌아와 1931년 11월에 중앙 집행위원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 1월 제2차 중국 소비에트 대회에서 74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 쉬이신(徐以新, 1911~1994): 1927년 손중산 대학에 입학하여 28인의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1930년 중국으로 돌아와 호북, 허난, 안후이 성의 공산군 제4군 본부의 정치국원으로 활동했다.
- 카이펭(凱豐, 1906~1955): 1927년 손중산 대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한 후 1930년에 귀국하여 중앙 선전국 장관을 역임했다. 1931년에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구출되었고 1933년에 공산군 제9군의 정치국 대표를 맡았다.
- 허쯔수(何子述, 1901~1931): 1927년 손중산 대학에서 공부하며 28인의 볼셰비키에 가담한 뒤 1930년 중국에 귀국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국 북부 노동운동 대표를 맡았다. 1931년 천진에서 동료의 밀고로 국민당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31년 6월 감옥에서 사망했다.
- 쑹판민 (宋潘民, 1909~1933): 1929년 손중산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931년 귀국한 후 호남과 호북 중앙위원회 위원 및 비서관을 지냈으며 공산군 제9군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1933년 12월 29일 군 지휘관 샤시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공개처형되었다.
- 청위안다오(陳原道, 1902~1933): 1925년 손중산 대학에 입학하여 28인의 볼셰피키에 가담한 후 1929년 공산당 지방위원회 선전부서의 사무총장을 맡았으며 이듬해에 허난성 당위원회 조직 위원장을 맡았다. 1931년 체포되었다가 1932년에 탈출했고 1933년에 다시 체포되어 난징 헌병 사령부에 구금되어 4월 10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 인젠(殷鑑, 1904~1937): 1926년 손중산 대학에서 공부하고 1930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상하이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1931년 4월에 하북성 당 위원회를 재건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가 6월에 체포되었고 14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석방되었으나 이듬해 4월 병사했다.
- 리주성(李竹聲, 1903~1973): 1926년 손중산 대학에 입학하여 몇년간 공부한 후 1931년 1월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된 후 전향했다.
성쭝량과 부인 진만원
- 성쭝량 (盛忠亮, 1907~2007): 1926년 손중산대학교에 입학하여 몇년간 공부하다가 1933년 1월 귀국해 상하이 부처 선전장관으로 부임했다. 1934년 8월 리주성이 체포된 후 상하이 중앙관리국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 위안자융(袁家鏞, 1905~1991): 초기에 손중산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귀국 후 장쑤성 당위원회 비서관을 맡았다. 1934년 6월 리주성과 함께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되었다가 11월에 석방되었고 이름을 얀영(嚴英)으로 바꿔 상하이에서 숨어지냈다.
- 왕원청 (王云程, 1905~1969): 초기에 순중산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31년 중국으로 돌아와 중앙 군사위원회의 일원으로 일했으며 1932년엔 중국 전국노조 연맹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33년 체포되었다가 공산당에서 탈퇴하는 조건하에 석방된 후 이름을 바꿔 숨어지냈다.
- 쑨지민: (孫濟民, 1908~?): 손중산 대학에서 왕밍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으로서 28인의 볼셰비키의 멤버로 활동했다. 1932년에 중국 공산당 청년연맹 상하이국 관리조직 부서장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국민당 비밀 경찰에게 체포된 후 전향하여 중국 국민당 담당 기자가 되었다.
- 샤시(夏曦, 1901~1936): 1927년 손중산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28인의 볼셰비키 멤버가 되었다. 1930년 귀국하여 허베이성 공산군 정치위원을 맡았고 1931년 1월에 중앙위원회 교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 4월 반혁명 분자들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27명의 간부 및 민중 수천명을 처형했으며 그후에도 2년간 반동분자 색출을 명분삼아 공산군과 간부, 그리고 민중 수만 명을 처형했다.
- 주아건 (朱阿根, 1904~?): 1927년 손중산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31년 6월 중국 공산당 장쑤성 지방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33년 중국 공산당 강소성 위원회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그후 1934년 1월 중국 공산당 제6차 중앙위원회 제5차 회의에 참석했으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35년 국민혁명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행적은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 왕성디(汪盛荻, 1899~1950): 초창기 소련에서 공부했으며 중국으로 돌아온 후 강소성 위원회 선전부 장관을 역임했다. 1932년 5월 국민당 비밀경찰에게 체포된 후 전향하여 창사 시 시장에 부임했다.
- 리위안제(李元傑, ?~?): 쓰촨성 출신이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신원 확인 불가.
- 왕바오리(王保禮, 1905~?): 쑤어주 출신의 노동자였으며 손중산 대학에서 부교장을 맡았다. 1931년 국민당에게 체포된 뒤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소실되어 알 수 없다.
- 주쯔순(朱自舜, ?~?): 멍칭수의 절친한 여자친구였지만 공산당원은 아니었고 청년단체의 일원이었다. 중국에 돌아간 후 평범하게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 샤오터푸(蕭特甫, 1903~?): 모스크바로 가기 전 프랑스에서 유학했고, 1920년대 말에 손중산 대학에서 왕밍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으로 귀국한 뒤 그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이상의 목록은 멤버 중 한 사람이었던 성쭝량의 회고록에 기술되어 있지만, 일각에서는 52명의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주장하며 '28인' 구성원에 대해서도 여러 이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3. 역사
3.1. 배경
1925년 가을, 손중산은 소련 당국의 협력을 받으며 손중산 대학을 설립했다. 이 대학은 중국을 공산화시키기 위해 최대한 많은 중국 지식인들을 공산주의 투사로 만들려는 소련의 야망과 소련의 지원을 최대한 얻어내어 중국 내 입지를 확고히 다지려는 중국 공산당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었다. 다만 손중산 대학은 단지 공산당만 국한되지 않고 국민당을 포함한 중국 학생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가령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도 이 대학에 입학해 몇년 간 공부했다.중국 학생들은 1925년에서 1929년까지 해마다 바다를 건너 모스크바로 가서 손중산 대학에 입학했다. 그 몇년 동안, 모스크바는 중국 공산혁명 엘리트의 집합장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 7월26일 중국 국민당 집행위원회가 손중산 대학에 학생들을 보내는 걸 금지하면서, 손중산 대학은 중국 공산당 출신 학생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 후 손중산 대학은 1930년 여름에 문을 닫았지만 그 사이에 많은 중국 엘리트들이 이 대학을 졸업했다.
이러한 손중산 대학 출신 엘리트 중에 중국 공산당을 소련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는 뜻을 품은 이들이 있었다. 1929년 여름, 손중산 대학에서 '10일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일반적으로 28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28인의 볼셰비키를 결성한 것으로 알려진 왕밍은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1929년 3월에 중국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들과 뜻을 함께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28인 중 상당수가 그의 추종자였던 것도 사실이기에, 왕밍은 28인의 볼셰비키의 거두로 간주되었다.
3.2. 중국 공산당의 당권을 장악하다
1930년대 초, 28인의 볼셰비키는 중국으로 귀환해 중국 공산당에서 중요한 직위를 맡았다. 특히 왕밍은 후원자 파벨 미프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공산당 제6차 정국총회 4차 총회에서 리리싼을 실각시키고 공산당 정치국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여기에 보구와 장원톈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당권을 확고히 장악했다. 이후 28인의 볼셰비키가 장악한 중앙위원회와 장강산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세우고 국민혁명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던 마오쩌둥간의 갈등이 극심해졌다. 왕밍은 모스크바로 돌아갔지만 보구와 장원톈은 차례로 중앙당 사무총장을 맡아 급진적인 방식으로 공산혁명을 이끌었다.소련유학파, 국제파가 주도한 상하이 임시 당중앙은 마오쩌둥을 우경 군사기회주의자라며 괄시했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혁명을 위해 일본의 침략을 이용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을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또한 마오쩌둥은 농민 중심의 공산혁명을 주장했지만, 당중앙은 소련처럼 노동자 중심의 혁명을 일으켜야 하며, 그러려면 상하이, 광저우 등 대도시로 진공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혁명군의 탄압이 가해지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쩌둥이 있는 루이진으로 이전했다. 이후 28인의 볼셰비키가 이끄는 당 지도부는 마오쩌둥이 적군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마오쩌둥을 명목상 주석으로 내세우면서 당권을 박탈하고 군대 지휘권 마저도 빼앗았다. 또한 저우언라이를 총정치위원,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을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제4차 초공작전을 감행한 국민혁명군의 광창 진입을 저지하면서 자신들의 노선이 옳다고 자화자찬했지만, 실제로는 열하사변이 발생해 국민혁명군이 더이상 공산당을 몰아세우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3.3. 대실패와 몰락
1934년,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의 조언을 받아들여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으로 섣불리 진격하는 걸 자제하고 요처마다 콘크리트 토치카 진지를 건설하고 민간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소금을 비롯한 필수 물자의 유통을 차단하는 전술을 체택했다. 그리고 장시성 내부에만 3만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는 등 보급망을 대대적으로 구축했고 공산군을 회유하기 위해 선전용 포로수용소도 지어졌다. 국민혁명군은 몇달간 공산군의 거점을 차례차레 점령하며 여러 소비에트를 분쇄했다. 결국 1934년 4월 공산 세력의 수도 루이진의 관문인 광창까지 국민당 토치카가 건설되었다.이에 당중앙은 전면 공격으로 국민당으로부터 거점을 탈환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공산군은 국민혁명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완패당했다. 이로 인해 루이진의 함락이 임박하자, 당중앙은 어쩔 수 없이 10월 15일 루이진을 탈출해 대장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피해가 극심해 전력의 90%가 사실상 와해되었다.
1935년 1월 9일, 당 지도부는 쭌이에 입성했다. 이후 열린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좌경 모험주의로 인해 군사적으로 대실패했다."고 주장하면서 보구 등 소련 유학파와 오토 브라운의 사퇴를 주장했다. 이에 유학파와 오토 브라운은 "역량 차이가 너무 심해서 졌을 뿐, 우리의 전략을 옳았다."고 주장하며 맞섰으나,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 지지로 돌아섰고 대다수의 간부들도 마오쩌둥을 지지하면서 마오쩌둥은 다시 당 지도부로 올라섰으며 보구 등 28인의 볼셰비키는 사실상 실각했다.
1937년, 왕밍은 중국 공산당이 일본과 적극적으로 항쟁하기를 희망하는 스탈린의 뜻을 받들어 옌안으로 향했다. 그는 당에 남아있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모스크바에서 함께해온 캉성 등 동지들과 함께 세력을 규합하고 일본군과 소극적인 항쟁으로 일관하면서 국민당을 훼방 놓으며 세력 확장에 골몰하고 있던 마오쩌둥과 대립했다. 그러나 이미 당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마오쩌둥은 왕밍을 명목상 잘 대접해주는 척하며 실권을 주지 않았고 캉성은 대세가 마오쩌둥에게 기울였음을 눈치채자 곧바로 마오쩌둥에게 붙은 뒤 왕밍을 마구 비난했다. 거기에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 곤경에 처한 소련이 왕밍의 지지 기반이었던 코민테른을 해체하면서, 왕밍의 세력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왕밍은 1942년 캉성 등이 마오쩌둥의 뜻을 받들어 벌인 정풍운동으로 몰락했으며 당에 남아있던 소련 유학파들도 대거 숙청되었다.
4. 구성원들의 뒷이야기
- 왕밍은 정풍운동으로 완전히 실각했지만 소련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이 당원 직은 계속 유지하도록 허용해줘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그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 법률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중화인민공화국 결혼법' 등 여러 법 초안 작성에 동참했지만 실권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1956년 병환을 이유로 모스크바로 간 뒤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을 비난하는 회고록과 논설을 작성하다가 1974년 3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아내 멍칭수는 남편이 사망한 후 '왕밍 전집'과 '왕밍 시집 선정 작품'을 편집 및 출판했고 1983년 9월 5일 72세의 나이로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 보구는 실각된 뒤에도 공산당에서 여러 직임을 맡았으며 1936년 시안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저우언라이 등과 함께 시안으로 가서 장제스와협상하여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는 데 기여했다. 1937년에는 당의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당의 인사업무를 맡았다. 1942년 정풍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지만 마오쩌둥으로부터 지나치게 온화하고 관대한 성격을 비판받았으며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남긴 했지만 서열은 최하위였다. 1946년 충칭에서 국민당과의 평화협상을 마치고 옌안으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 장원톈은 본래 보구와 뜻을 함께하는 소련유학파였지만 대장정 시기 마오쩌둥 지지자로 변모해 보구의 실각에 기여했다. 1935년부터 1943년까지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맡았고 정치국에서 서열 12위 또는 13위를 차지했다. 그는 1954년부터 1960년 11월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외무부 차관을 맡았으며 1951년부터 195년까지 소련 대사를 맡았다. 그러나 1959년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해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가 마오쩌둥의 눈밖에 나 문화대혁명 때 가택연금을 당해 탄압당하다가 1976년 7월 1일 장쑤성 우시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 왕자샹은 쭌이 회의에서 장원톈, 양상쿤과 함께 마오쩌둥에게 가담해 보구를 비판했다. 그후 공산군 지휘관을 맡았고 1937년 중국 코민테른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으며 중일전쟁 시기엔 정치국 국장을 맡았다. 그후 정풍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마오쩌둥주의를 홍보했으며 국공내전 동안 린뱌오와 함께 하북 지역 장악 임무를 수행하고 공산당 중앙위원회 북동부 선전국장 직임을 맡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엔 최초의 소련 주재 중국 대사가 되었으며 뒤이어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 캉성의 공격 대상이 되어 온갖 탄압을 받았고 저우언라이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연명하다가 1974년 1월 2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양상쿤은 마오쩌둥을 대신해 군의 지휘를 맡았으나 국명혁명군에게 대패한 뒤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하고 보구를 실각시키는 데 기여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주임을 맡았다. 그러나 1965년 기밀누설죄를 뒤집어쓰고 주임 직에서 해임되었고 문화대혁명 시기 반혁명분자로 몰려 마오쩌둥으로부터 '현대판 위연'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온갖 탄압을 받았다. 그러다가 1978년 복권되어 1982년 당 관료에 재임명되었고 1988년 중화인민공화국 제4대 주석에 올랐다.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강경진압을 지지한 보수파로서 입지를 다졌으나 군부 지지세력이 많은 그를 경계한 덩샤오핑이 1992년 남순강화 이후 실각시켰다. 1998년 9월 14일 91세에 사망했다.
- 천창하오는 1935년 공산군 제4군을 이끌고 대장정을 수행했으나 도중에 행군로를 둘러싸고 지도부와 갈등을 빛다가 국민혁명군에게 완패당하고 목숨을 간신히 건져 1937년 3월 16일 옌안에 도착했다. 그는 1939년 8월 치료 명목으로 소련으로 갔으며 1941년 모스크바 전투에 가담해 도시 재건에 기여했다. 1952년 중국으로 돌아와 마크르스-레닌주의 중앙 연구소의 부학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 숱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1967년 7월 자살했다.
- 두쭤상은 1936년 9월 석방되었으나 천창하오에게 이혼당한 채 절강성 공산당 조직에 가담했고 1938년 우한이 일본군에게 함락당하자 공산당의 반일 선전 그룹에 참여했다. 그후 그녀는 충칭, 난징, 항저우 및 다른 지역으로 잇다라 이주하여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반일 운동을 수행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항주 산업학교, 러시아어 및 비즈니스 학교 교수로 일했고 1965년 항주 화학학교 교수로 일했다. 그러나 1967년 베이징 감옥에 수감된 뒤 온갖 비인간적인 고문을 받아야 했으며 전 남편의 자살을 목도했다. 1982년 11월 복권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가 1997년 2월 11일 항저우에서 사망했다.
- 장진추는 남편 신쩌민의 사망 후 천창하오와 결혼했다. 그녀는 비록 공식적으로 군사 계급을 수여받진 않았지만, 중국 공산군의 유일한 "여성 장군"으로 간주되어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섬유 산업부 차관을 맡았으나 문화대혁명 시기 비인간적인 탄압을 받고 남편의 자살을 목도하자 절망에 빠져 1968년 4월 22일 자살했다.
- 왕성룽은 중국 소비에트 공화국 최초의 중앙 군사위원회 멤버로서 전쟁과 정풍운동,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난세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2006년 9월 1일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쉬이신은 1942년 5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풍 개혁위원회 총무장관을 맡았으며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중앙위원회와 중앙 행정부 정치국장 직속 당서기를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외교부에 배속되어 1950년 5월부터 1951년 1월까지 소련 및 동유럽 외교부 부국장을 역임했다. 1951년 1월에서 1954년까지 소련 및 동유렵 국장을 맡았으며 1954년 9월 이후로 알바니아의 첫 중화인민공화국 대사를 지냈다. 그리고 1958년 노르웨이 왕국 중국 대사를 역임했으며 1962년엔 시리아 주재 중국 대사를 맡았다. 그는 1966년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차관으로 승진했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외교통으로서 무사히 화를 모면했다. 1979년 파키스탄 주재 중국 대사를 지냈으며 은퇴 후 여생을 평안히 보내다가 1994년 12월 30일 83세에 사망했다.
- 카이 펭은 대장정 시기 공산군 제9군의 중앙 대표를 맡았으나 쭌이 회의에서 보구를 지지했으나 패하자 마오쩌둥 지지로 선회했다. 1937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장관이 되었고 연말에 정치국장에 선출되었다. 1940년 후 정풍운동에 가담해 많은 인사들을 숙청하는 데 기여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심양시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52년, 그는 중앙 선전부에 배속되어 마오쩌둥주의를 선전하는 문건 초안 집필에 참여하다가 1955년 3월 23일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 리주성은 국민당으로 전향한 뒤 1935년 1월 국민대 중산문화교육센터 비서관, 국제 연구원 비서관, 특별위원회 위원장, 국민당 외무성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1951년 3월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베이징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1973년 1월 감옥에서 사망했다.
- 성쭝량은 리주성이 전향한 뒤 공산당 상하이국의 수석 리더를 맡았다. 그는 중일전쟁 당시 란저우에서 소련과의 연락을 담당했고 1943년에 인도와 버마 전장에 투입된 중공군의 사무총장이 되어 항일 전쟁을 지원했다. 1945년에 외무부에 배속된 그는 1950년부터 1954년까지 이라크 주재 중국 대사 비서직을 맡았으며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중국 외무부장관을 지냈으며 1960년에서 1964년까지 우루과이 주재 중화인민공화국 대사를 지냈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정책에 회의를 느낀 그는 1964년 아내와 세 자녀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고 28인의 볼셰비키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한 후 2007년 3월 29일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위안자융은 1936년 11월 "세계문화"와 "중국-소비에트 문화"잡지를 출간했고 1947년 8월 상하이 법대 교수가 되었다. 1958년 길림성 장춘시로 가서 길림 대학 재정경제학 교수, 과학연구 국장, 역사 및 교육부 국장을 역임했다. 1978년 이후 길림 재무 및 무역 경제학교 이사, 경제연구소 명예 이사, 국립 재정 경제연구소 자본 컨설턴트를 재직했다. 1986년, 길림성 위원회는 그의 중국 공산당 재가입을 승인했다. 그후 수년간 공산당원으로서 길림성 회의에 참석했던 그는 1991년 1월 16일에 사망했다.
- 왕원청은 국밍당 비밀 경찰에게 체포된 후 리주성과 협력하다가 국공내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승리하여 전 중국을 통일하자 숨어지냈다. 그러다가 1969년 11월 체포되어 공산당 중앙조직 선전선동소조 책임자 캉성과 공안부장 셰푸즈에 의해 처형되었다.
- 쑨지민은 국민당으로 전향한 뒤 국민당 담당 기자로 활동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통일하자 잠적했다. 이후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 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 샤시는 허난성에서 4만 명 이상의 공산군 병사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처형하는 '정화 운동'을 단행해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샀다. 대장정 시기인 1936년 2월 28일, 그는 비제 강을 건너는 중에 피로 때문에 물에 빠졌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구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익사했다.
- 왕성디는 국민당 치하에서 창사시 시장에 부임했고 1948년 1월 호남 대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49년에는 대세가 공산군에게 기울자 호남에서 봉기를 일으켜 공산군에게 가담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를 배신자로 간주해 1950년 처형했다.
5. 참고 문헌
- 중문 위키피디아 28인의 볼셰비키 문서
- 영문 위키피디아 28인의 볼셰비키 문서
- 바이두백과 28인의 볼셰비키 문서
- 소련 볼셰비키 혁명 이식 몰두했지만 중국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