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배(성씨)
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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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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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 신라 6부 | 성씨 | 시조 |
알천 양산촌 | 급량부 | 이씨 | 알평 | |
돌산 고허촌 | 사량부 | 최씨 | 소벌도리 | |
취산 진지촌 | 본피부 | 정씨 | 지백호 | |
무산 대수촌 | 점량부 | 손씨 | 구례마 | |
금산 가리촌 | 한기부 | 배씨 | 지타 | |
명활산 고야촌 | 습비부 | 설씨 | 호진 | |
삼국사기 기준. #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 }}}}}}}}} |
興海 裵氏 흥해 배씨 (興海 裵氏 배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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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colbgcolor=#fff,#000>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
비조 | 지타(祗陀) |
도시조 | 배현경(裴玄慶) |
시조 | 배경분(裵景分) |
중시조 | 배전(裵詮) |
집성촌 |
경북 안동시 풍산읍 경북 봉화군 황해도 은율군 황해도 신천군 황해도 재령군 대구 달성군 |
인구 | 34,259명(20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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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흥해 배씨(곡강 배씨)는 배경분을 시조로 하고 배상지를 입향조로 하는 한국의 배씨이다.흥해배씨는 입향조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1351~1413)의 아들 4형제가 모두 출사한 이래로 6백여 년을 세거해 온 가문이다.2. 유래
흥해(興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군(迎日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퇴화군(退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의창군(義昌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초에 흥해(興海)로 고쳐 현종(顯宗) 때 경주(慶州)에 속하였다가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지주사(知州事)로 승격하였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도 그대로 내려왔고, 1914년 영일군(迎日郡)에 병합되어 그 일부지방은 1973년 이후 의창읍으로 내려오다가 1983년 흥해읍으로 개칭되었다.흥해배씨(興海裵氏)는 고려조에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오른 배경분(景分)을 일세조(一世祖)로 계대(繼代)하며, 그의 6세손 배전(詮: 전리판서 영지의 아들)이 충혜왕(忠惠王) 때 호군(護軍)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조적(曺頔)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좌명공신(一等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으며 흥해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1764년(영조 40)에 편찬된「갑신합보(甲申合譜)」에는 배씨의 중시조(中始祖)인 배현경(玄慶 : 고려 개국공신)의 6세손 배오룡(五龍 : 시중 배사우의 아들)을 파조(派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계대 소목(昭穆)이 미상(未詳)하고 각파의 이론(異論)이 있어「곡강세첩(曲江世牒)」에 밝혀진 바에 따라 배경분(景分)을 파조로 상고(詳考)한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人脈)을 살펴보면 흥해군(興海君) 배전(詮)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배상도(尙度)와 셋째 배상지(尙志)의 후대에서 가문이 크게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일찌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한 배상도(尙度)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배둔(屯)이 조선 태조(太祖) 때 등과(登科)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했고 슬하에 아들 배처눌(處訥 : 맹산 현감을 역임)과 배지눌(止訥)을 두어 대(代)를 이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형 배상도와 함께 목은(牧隱)에게서 글을 배웠던 배상지(尙志)는 고려 말에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동(杜門洞) 두류산(頭流山)에 둔거하다가 안동 금계촌(安東金溪村)으로 내려가 은거하면서 잣나무(栢)와 대나무(竹)을 심고 호(號)를 백죽당(栢竹堂)이라 하였다. 그후 조선조에서 수차례에 걸쳐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의 아들 배권(權)은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과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봉화(奉化)․횡성(橫城) 등지의 현감을 역임한 후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올라, 세종 때 진주 목사(晋州牧使)로 치사(致仕)한 아우 배환(桓)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그외 여흥 부사(驪興府使)를 지내고 원종공신에 올랐던 배효숭(孝崇: 관찰사 배환의 아들)과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지낸 배효건(孝騫), 세조 때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한 배효사(孝思) 3형제가 뛰어났으며,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 배천석(天錫)의 맏아들 배삼익(三益)은 선조(宣祖) 때 풍기 현감(豊基縣監)과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가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 전력하여, 이퇴계(李退溪)의 고제(高弟)로 학문이 숙성했던 아우 배삼근(三近)과 함께 대(代)를 이어 가문(家門)을 빛냈다.
관찰사 배삼익의 아들로 임진왜란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배용길(龍吉)은 김성일(金誠一)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여 천문(天文)․지리(地理)․율력(律曆)․병전(兵典)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
효성(孝誠)으로 이름난 배경(經)은 임진왜란 때 연로(年老)한 어머니를 업고 산중(山中)으로 피난가다가 돌연 적병을 만나자 어머니를 껴안고 구명(求命)을 애걸하니 그의 효성(孝誠)에 감동한 적의 무리가 안전(安全)한 길을 알려주어 모자(母子)가 생명을 보전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배인길(寅吉)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용궁(龍宮)으로 가던 도중 적의 대 부대(部隊)를 맞아 격전 끝에 공수백인(空手白刃)으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는데, 부인 월성 이씨(月城李氏)도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순조(純祖) 때 쌍절각(雙節閣)이 세워졌으며, 헌종(憲宗) 때 문과에 급제한 배상현(象鉉)은 전적(典籍)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전통을 지켰다.
흥해배씨는 고려후기에 검교장군을 지낸 배경분(分)공을 1세로하며, 6세손 배전(裵佺)이 충숙왕(1321년) 때 '조적의 난'에 큰 공을 세워 흥해군(興海君)으로 봉해져 본관을 흥해로 사용하게 되었다.
흥해(興海)는 경상북도 포항시(浦項市) 흥해읍 일대의 옛 지명이다. 삼한시대에 다벌국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 때에는 퇴화군(退火郡)이라 불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의창군(義昌郡)으로 개칭하였고 신라 말기에는 남북미질부성(南北彌秩夫城) 이라고도 불렸다. 930년(고려 태조 13)에 남북미질부성을 다시 합쳐 흥해군(興海郡)으로 고쳤다.
안동 입향시조(入鄕始祖) 백죽당(栢竹堂) 배상지(尙志)공은, 1351년(충정왕 3년) 흥해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조에 통훈대부 판사복시사(정3품)로 재임하던 중, 고려가 패망의 위기에 처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정을 떠났다. 그리하여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죽당은 고려의 절의파(節義派) 충신을 일컫는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 가운데 한 분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백죽당은 동생 공조전서(工曹典書) 배상공(尙恭)과 함께 외향이자 처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셨다. 백죽당은 안동 서후 금계 마을에 정착하여 집주변에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고려 충신의 기상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호를 백죽당이라 하고, 금오산에 은거해 있던 야은 길재(吉再) 선생과 교유하였다. 오늘날 안동 일원에 거주하는 흥해배씨는 모두 백죽당의 자손이다. 동생 공조전서 배상공은 하회마을에 정착하셨으나, 아쉽게도 손자 대에 무후하여 풍산 류씨 문중에서 외외손 봉사를하고 있다.
풍산 류씨 류종혜(柳從惠)는 원래 풍산 상리리에 살고 있었는데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경관에 이끌려 옮겨 살게 되었다. 당시 류종혜와 허물없이 지내던 흥해배씨 배상공(裵尙恭)도 함께 옮겨 왔다고 한다. 배씨와 류씨는 예로부터 안동 지방의 죽마고우, 선비집안으로 서로가 친했다고. |
백죽당의 아들 4형제 가운데 맏아들 배권(權)이 사헌부 지평, 둘째배환(桓)이 삼도관찰사, 셋째 배남(楠)이 사헌부 감찰, 넷째 배강(紅)이 이조정랑을 지냈다. 모두 문학으로 이름을 날려 당시 사람들이 배문(文)이라 하였다.백죽당이 안동에 입향한 이래 조선 중기까지는 현달한 조상이 참으로 많았다.
고려조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손홍량의 외손자이고 또 안동 권씨 권희정(權希正)의 사위인 흥해배씨 백죽당 배상지는 고려가 쇠퇴하자 외가와 처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와 서후에 자리잡는다. 그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벼슬길에 나아갔고 차자 배환(裵桓)은 전라감사를 역임했다.
안동 사람들은 자녀 다섯이 모두 무과에 급제한
영양 남씨 남민생 가문과 배상지 가문을 합하여 배문남무(裵文南武)라고 말하며, 가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남휘주의 아들 남민생(南敏生, 1348~1403)은 호조참의를 지내고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5형제는 모두 무과에 급제해 그 위상이 하늘을 치솟았다고 전해진다.그러니 남민생 가문과 쌍벽을 이룰만큼 배상지 가문에서도 문과로 뜻을 이루니, 그 위세가 끝이 없었다 전해진다. |
배상지의 장자 배권(裵權)의 후손으로 봉화에 이거해 살던 배천석(裵天錫)은 조선 명종 조에 다시 선향인 금계로 돌아왔다가 예안면 도목촌으로 이거했는데 그 아들 배삼익(裵三益)은 퇴계의 제자로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고 그 아들 배용길(裵龍吉) 임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후에 벼슬에 나아가 충청도사를 역임했다.
3. 시조 배경분(裵景分)
-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배사혁(裵斯革)의 넷째 아들 배오룡(裵五龍)의 아들이며, 고려시대에 검교장군(檢校將軍)을 역임했다. 그의 6세손 배전(裵詮)이 고려 충혜왕 때 호군(護軍)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조적(曺頔)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삼중대광첨의평리(三重大匡僉議評理)에 책록되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다.
4. 주요 인물
- 배상도(裵尙度):일찍이 목은(牧隱) 이색(李 穡)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한 상도(尙度)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 배둔(裵屯):배상도의 아들 배둔(屯)이 조선 태조(太祖) 때 등과(登科)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을 역임했고 슬하게 아들 처눌(處訥:맹산 현감을 역임)과 배지눌(止訥)을 두어 대를 이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 배상지(裵尙志):배상도와 함께 목은(牧隱)에게서 글을 배웠던 배상지(尙志)는 고려 말에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동(杜門洞) 두류산(頭流山)에 둔거하다가 안동 금계촌(金溪村)으로 내려가 은거하면서 잣나무(栢)와 대나무(竹)를 심고 호(號)를 백죽당(栢竹堂)이라 하였다.그 후 조선조에서 수차례에 걸쳐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다.
어느 날 2, 3, 4째 아들을 죽림사(竹林寺)라는 절에 글공부하라고 보냈다. 얼마간 아무 기별이 없자 백죽당은 궁금한 나머지 절을 찾았다. 이 때 세 자제들은 여가를 보아 기생까지 불러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얼른 기생을 이불에 감싸 방구석에 밀쳐두고 부친을 맞았다. 이 때 백죽당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고 잠시 앉았다가 시 한 수를 벽에 남기고 자리를 떴다.
一裵一裵復一裵(일배일배복일배)
三裵會處春風廻(삼배회처춘풍회)
名是竹林非但竹(명시죽림비단죽)
竹林深處桃花開(죽림심처도화개)
배가 하나 배가 하나 또 배가 하나.
배가 셋이 모인 곳에 봄바람이 감도니
이름만 竹林(죽림)이니 대나무만 있지 않고
대나무 깊은 곳에 복사꽃도 피어 있네.
첫 구절은 세 아들을 마치 ‘한잔 먹고 또 한잔 먹세(一杯一杯復一杯)’에서 따온 느낌이다.
두 번째는 세 사람의 배씨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에 춘풍, 즉 술기운이 만연하다는 말이다.
선비들이 있는 곳이라면 ‘서권기(書卷氣)’ 즉 책들이 가득하며, 그래서 문자향(文字香)이 있어야 했다. 더구나 세 아들은 기생까지 불러들여 술판까지 벌이고 있었다.
매우 실망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셋째와 넷째 구절은 이 시의 압권이라 할만하다. 공부하고 있는 절 이름이 죽림사다.
대나무(竹)의 이미지는 곧다. 그래서 선비가 즐겨 이와 벗했다. 부친인 자신 역시 이 대나무에서 따 아호를 백죽당이라 했다.
마지막 구절의 ‘대나무 숲 깊은 곳에 복숭아꽃이 피었네(竹林深處桃花開)’는 갑작스럽게 수습해 방구석으로 밀쳐둔 기생을 풍자한 것이다. 이 일화를 보면서 교육이란 강함과 유함을 조화롭게 써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일 이 세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그래서 이로부터 안동 지방에서는 ‘배문남무(裵文南武, 배씨들은 문과, 남씨들은 무과가 많이 났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 ||
- 배권(裵權):배상지의 아들 배권(權)은 사헌부(司憲府)의 감찰(監察)과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봉화(奉化), 횡성(橫城) 등지의 현감을 역임한 후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올랐다.
- 배환(裵桓):세종 때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치사(致仕).
- 배효숭(裵孝崇):여흥 부사(驪興部事)를 지내고 원종공신에 올랐다.
- 배효건(裵孝騫):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지냄.
- 배효사(裵孝思):세조 때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
- 배삼익(裵三益):1534(중종 29)∼1588(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흥해 ( 興海 ).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 좌통례 ( 左通禮 ) 배이순(以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배헌(獻)이고, 아버지는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 배천석(天錫)이다. 어머니는 연일 정씨(延日鄭氏)로 정세호(世豪)의 딸이다.안동에서 세거했으며,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이 되고,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 ( 學諭 )·학록(學錄)· 학정 ( 學正 )·박사를 거쳐 호조좌랑이 되었다. 1575년(선조 8)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형조정랑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그 뒤 외직인 풍기군수와 양양부사를 지내고, 1583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다. 뒤에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헌납 겸 춘추관기주관(司憲府獻納兼春秋館記注官) 등을 역임하였다.1585년 겨울,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이래 상호군 ( 上護軍 )이 되었다. 1587년 진사사(陳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 해 황해도에 흉년이 들자,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해도관찰사로 구황에 힘쓰다 병이 깊어 사직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대성 ( 臺省 )에 있으면서 같은 성씨끼리의 혼인을 금할 것을 주청해 조정에서 한때 찬반론이 격렬해지기도 하였다. 황해도관찰사 시절에는 병든 몸을 위해 올리는 쇠고기를 금육(禁肉)이라 하여 끝내 사양하는 강직함을 보이기도 하였다.외직에 있으면서 특히 석채(釋菜 :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석전제) 등의 제사를 지내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는데, 그가 지내는 기우제에 곧잘 효험이 나타났었다. 장서가로 후세까지 이름을 남겼으며, 필법이 힘찼다. 저서로 시문집인 ≪임연재선생문집 臨淵齋先生文集≫ 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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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재선생문집(臨淵齋先生文集) |
배삼익은 과거에 응시를 했는데 시험을치렀는데도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 외로 낙방하여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가 과거에 떨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스승인 퇴계 선생을 뵈올 낯이 없어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한양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여봐라! 이리 오너라.> 꽤나 점잖은 분의 목소리다
.<예이, 누구시옵니까?> 하인이 대문을 열어주었다.
< 안에 너의 주인이 계시느냐?>
< 예, 그러하옵니다만…….>하인은 누가 어디서 왔느냐? 라고 묻는 시늉을 했다.
< 냉큼 주인 방으로 안내 하렸다.> 조금 큰소리다.
< 네, 네, 네, 알겠습니다요.> 하인은 그제야 보통 분은 아닌 줄 알아 차렸다.
밖에서 이러쿵저러쿵 소란을 떠는 바람에 주인 배삼익이 사랑방 문을 열고 내다보니 한양에서 온 관원(官員)이었다. 정중히 방으로 모시고 수인사를 마쳤다.
< 선생께서는 과거에 합격 하셨습니다.>
< 무슨 말씀입니까! 지난번 과거에 분명히 떨어졌는데……?>
배삼익 선생은 농담하지 말라고 하였다.
< 그런 것이 아니 오라 선생의 이름을 착각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 그 무슨 말씀을…….> 삼익 선생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사연인 즉 裵三益 선생이 시험 답안지를 제출할 때 자기의 이름을 너무 흘려 썼기 때문에 착오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裵)자를 쇠(衰)자로 보았고 삼(三)자를 지(之)자로, 익(益)자를 개(蓋)자로 잘못 알고 쇠지개(衰之蓋)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배삼익의 필법이 워낙 흘려쓰는 필법이라 알아보지 못했다는 관원의 말아다.
< 이제 알겠소이까?>
< 참 그러네요. 어쩐지 그날[시험 발표] 쇠지개, 쇠지개 하는 소리가 났던겄 갔구먼요.>
< 에이! 선생도 자기 성명 석자만은 바른 글로 써야죠.><미안 하외다.> 그리고는 서로가 마주 보면서 하하하 하하하……박장대소(拍掌大笑)를 했다.
이렇게 하여 뒤늦게나마 등과(登科) 사실이 밝혀져 배삼익은 관직에 나가게 되었고 조정(朝廷)의 요직을 두루 두루 거치다가 황해도 관찰사를 거치게 되었다고 한다. }}} ||
- 배용길(裵龍吉):1556(명종 11) ∼ 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흥해 ( 興海 ).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 또는 장육당(藏六堂). 생원 배헌( 姸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배천석(天錫)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배삼익(三益)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남신신(藎臣)의 딸이다.1575년(선조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85년(선조 18)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594년 세마 (洗馬)의 직을 받고 이어 시직(侍直) · 부솔(副率)을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화의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16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과 대교 ( 待敎 ), 1606년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한 뒤 1608년 충청도도사를 지냈다. 김성일 ( 金誠一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어 유성룡 ( 柳成龍 ) · 조목 ( 趙穆 ) · 남치리(南致利) 등을 사사하였다. 천문 · 지리 · 율력(律曆) · 병전(兵典) · 의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고 한다. 저서에 금역당집 이 있다.
- 배경(裵經):효성으로 이름난 배경(經)은 임진왜란 때 연로한 어머니를 업고 산중으로 피난가다가 돌연 적병을 만나자 어머니를 껴안고 구명(求命)을 애걸하니 그의 효성에 감동한 적의 무리가 안전한 길을 알려주어 모자가 생명을 보전하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 배인길(裵寅吉):배인길(寅吉)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용궁(龍宮)으로 가던 도중 적의 대부대를 맞아 격전 끝에 공수 백인으로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는데, 부인 월성 이씨(月城李氏)도 남편을 따라 자결하여 순조(純祖) 때 쌍절각(雙節閣)이 세워졌다.
- 배상현(裵象鉉):헌종(憲宗) 때 문과에 급제한 배상현(象鉉)은 전적(典籍)과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여 가문의 전통을 지켰다.
- 배상규(裵相奎) - 문과(文科) 헌종9년(1843) 식년시 병과(丙科)
- 배남(裵 楠) - 문과(文科) 태종11년(1411)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 배소(裵 素) - 문과(文科) 태종8년(1408)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 배윤명(裵胤命 ) - 문과(文科) 경종3년(1723) 증광시 병과(丙科)
- 배덕문(裵德文) - 문과(文科) 명종8년(1553) 별시 병과(丙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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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강 - 문과(文科) 세종8년(1426)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 배지눌 - 조선 예종 때 한성 판관을 지냈다.
- 배삼근(裵三近) 이퇴계(李退溪)의 고제(高弟)로 학문이 숙성했다.
- 배광우(裵光祐) 고려조(高麗朝)에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을 지냈다.
- 배약경(裵若卿) 고려 때 위위승 동정(衛尉丞同正)을 역임하였다.
- 배유손(裵裕孫) 고려(高麗) 때 보승 별장(保勝別將)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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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지(裵榮至) 고려조(高麗朝)에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 배영진 - 독립운동가로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상실된 뒤 만주로 망명하여 한족회의 일원으로 동포들의 정착을 돕고 영춘학교, 협창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 배희직 - 청송 의병부대의 취지에 공감하여 1896년 4월 2일 군자금 50금을 지원하였다.
- 배천희(裵千熙) 호(號)는 설산(雪山), 시호(諡號)는 진각국사(眞覺國師). 13세 때 화엄반룡사(華嚴盤龍寺)에 들어가 삭발하고 일비대사(一非大師) 밑에서 수도(修道), 19세 때 상품신(上品身)에 올라 여러 사찰(寺刹)을 역주(歷住)하였고, 1367년(공민왕 16) 국사(國師)로 대화엄종사(大華嚴宗師) 선교도총섭(宣敎都摠攝)에 봉(封)해졌으며, 1370년(공민왕 19) 인장(印章)과 법의(法衣)를 하사(下賜)받았고, 그의 출신지(出身地) 흥해현(興海縣)이 군(郡)으로 승격(昇格)되었다.국사(國師)의 유덕(遺德)을 추모(追慕)하는 탑비(塔碑)를 수원 광교산(水原光敎山) 창성사(彰聖寺)에 세울 때 우왕(禑王)의 명(命)으로 이색(李穡)이 찬(撰)하고, 통조대사(通照大師) 충술(沖述)이 입석(立石)하고, 비구혜잠(比丘惠岑)이 각명(刻銘)하였다. 보물(寶物) 12호로 지정(指定)되었다.
- 배상도(裵尙度) 고려(高麗) 때 이색(李穡)의 문하(門下)에서 수업(修業)하였고, 벼슬이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다. 정국(政局)이 혼란(混亂)해지자 치사(致仕)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조선(朝鮮) 때 누차(累次) 징빙(徵聘)이 있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청백(淸白)하기로 유명(有名)하였다.
- 배상지(裵尙志) 호(號)는 백죽당(栢竹堂). 고려 말에 벼슬하여 관직(官職)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이르렀는데 정국(政局)이 혼란(混亂)해지고 불원(不遠)에 변혁(變革)이 있을 것을 깨닫고 치사(致仕), 귀향(歸鄕)하여 영가군(永嘉郡) 금계촌(金溪村)에 은거(隱居)하면서 백 죽(栢竹)을 심으니 호(號)를 백죽당(栢竹堂)이라 하였다. 그후 조선(朝鮮)에서 누차(累次) 징명(徵命)이 있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숙종(肅宗) 때 사림(士林)의 소청(疏請)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안동(安東)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배둔(裵屯) 1393년(태조 2)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 배권(裵權) 1419년(세종 1) 음보(蔭補)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기용되어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으며, 1425년(세종 7) 전농판관(典農判官)을 역임하였고, 봉화(奉化)․횡성(橫城) 등지의 현감(縣監)을 거쳐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이르렀다.
- 배환(裵桓) 1378 (우왕 4) ~ ?판사(判事) 배상지(尙志)의 아들. 조용(趙庸)의 문인. 1401년(태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호군(護軍) 벼슬을 거쳐 1423년(세종 5) 의주(義州)․삭주도 경차관(朔州道敬差官)으로 나갔다.1432년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선위사(宣慰使)를 겸직, 광주(廣州)에서 일본 사신을 접견했고 2년 후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1435년 병조 참의(兵曹參議)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이듬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공조 참의(工曹參議), 1442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역임, 1448년(세종 30) 판진주목사(判晋州牧使)로 치사(致仕)했다.
- 배남(裵楠) 1411년(태종 1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 배강(裵杠) 1426년(세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문장(文章)이 고상(高尙)했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났다.
- 배소(裵 素) 1408년(태종 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 배효숭(裵孝崇) 호(號)는 조곡(조谷). 1438년(세종 2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447년(세종 29)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좌․우사간(左右司諫)을 지내고, 부승지(副承旨)․여흥 부사(驪興府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서훈(叙勳)되었다.
- 배정(裵禎) 자(字)는 원길(元吉). 어머니 밑에서 수학(修學)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창원 교수(昌原敎授)가 되었다. 천성(天性)이 온아인후(溫雅仁厚)하고 사친(事親)에 효성을 다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 배순훈 - 前 제4대 정보통신부
- 배재성 - 스포츠 기자
- 배인기(裵寅基)
5. 분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1764년(영조 40)에 편찬(編纂)된 《갑신합보(甲申合譜)》에는 배현경(裵玄慶)의 6세손(世孫) 배오룡(裵五龍)이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뒤 흥해(興海)로 분적(分籍)하여 시조(始祖)로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계대(繼代)의 내력(來歷)이 자세(仔細)하지 않고 각파(各派)의 이론(異論)이 있다. 《곡강세첩(曲江世牒)》에 밝혀진 대로 배경분(裵景分)을 시조(始祖)로 보는 쪽이 지배적(支配的)이다. |
6. 역사
- 흥해(興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포항시(浦項市) 흥해읍(興海邑) 일대(一帶)의 옛 지명(地名)이다.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다벌국(多伐國)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때에는 퇴화군이라 불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의창군으로 개칭하였고 신라말기에는 남북미질부성(南北彌秩夫城) 이라고도 불렸다. 930년(고려 태조 13)에 남북미질부성을 다시 합(合)쳐 흥해군(興海郡)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에 경주부에 속하였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었다. 1367년(공민왕 16)에 지군사로 승격하였고 곡강(曲江)·오산(鰲山)이라는 별호(別號)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흥해군(興海郡)으로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개정으로 동래부 흥해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흥해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으로 흥해군(興海郡)이 6개 면으로 분면되어 폐지되고 영일군(迎日郡)에 병합되었다. 1956년 흥해면(興海面)과 곡강면(曲江面)을 의창면(義昌面)으로 통합하고 1973년 의창면이 읍(邑)으로 승격하였다가 1983년 의창읍이 다시 흥해읍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95년 영일군(迎日郡)이 포항시에 병합되었고 북구(北區)로 신설되어 통합되었다
7. 관련 유적지
- 흥해배씨가수천재사(興海裵氏嘉水川齋舍)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에 있다. 2009년 1월 21일 안동시의 문화유산 제12호로 지정되었다.
- 鏡光書院(경광서원)은 安東市(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행지 위에 있다. 1569년 기미년에 서당이 세워졌고 1662년 壬寅년에 精舍(정사)로 개명했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조선후기 배상지·이종준·장흥효 등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1686년(숙종 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배상지(裵尙志)·이종준(李宗準)·장흥효(張興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 裵尙志(배상지)공의 묘소는 안동시 가수천 위에 있다. 묘 앞에 短碣이 있는데 판독 가능한 부분은 「유명 영락 12년 갑오 정월 22일 정유 통훈대부 판가복시사 흥해 배공 尙志(상지)지 묘, 일남 權(권)은 이천감무, 이남 桓(환)은 벙조좌랑, 삼남 楠(남)은 성균학론, 여식은 이천감무 杠(강)의 처이다.」로 즉 태종 14년(1414)에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하방상원(下方上圓)의 봉분과 1414년에 세운 비석이보존되어있는 배상지의 묘-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 정자 낙암정(洛巖亭) -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
- 낙은재(청송)- 낙은재(樂隱齋)는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감연리에 있다. 1897년에 낙은(樂隱) 배학순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4] 낙은이란 산을 베개하고 문을 닫고 숨는 즐거움에 자적(自適)한다는 뜻으로, 재실사 내에 있는 낙은재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한 것을 목판한 것이라 한다. 청송군 향토문화유산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 배점리 배점 동제-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배점마을의 흥해 배씨 배순(裵純)[1534~1614]의 정려비이다.
- 문소김씨 표열각(聞韶金氏表烈閣)은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에 있는 흥해배씨 배재형(裵在衡, 1894~1919)의 부인 문소김씨의 효열(孝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 배두녀정려각(裵斗女旌閭閣)-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성리 118-1번지에 있는 정려각이다.배두녀(裵斗女)는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평해황씨(平海黃氏) 가문에 시집간 후에도 시부모를 극진하게 모셔 효부로 이름이 났다.현재 평해황씨 문중에서 정려각을 보존하고 있다.
[1]
흥해배씨 문중에서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
[2]
배삼익은 자신의 호를 따서 임연재선생문집(臨淵齋先生文集)을 펴내었는데 임금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 10가지를 제시하고, 조세·혼인·해운 등 백성들의 삶과 관련된 폐해와 장려책 등을 기록하였다.동성동본금지를 주장한 글과 5개월동안 명나라에 다녀온후 느낀점을 일기형식으로 짧게 적어놓은글도 있다.
[3]
배용길이 쓴 금역당집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시급히 개정하거나 시행해야 될 시무 8조를 적어놓았고 유학이 발전해야한다 저술하였다.지리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풍수변(風水辨)」 등이 적혀있다.
[4]
배학순은 고종 연간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옥동도사(玉洞都事)를 지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