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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01:20:26

현지임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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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군의 임관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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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실제 사례
3.1. 창작물

1. 개요

現地任官 / battlefield commission 장교 임관 제도 중 하나. 전시상황과 같은 비상시에 장교 자원이 부족해졌을 경우 시행한다. 실전경험이 충분한 선임 병사 부사관 등을 초임장교인 소위로 임관시켜 긴급히 해당 편제의 지휘관으로 운용하는 제도이다.

2. 설명

"연대의 중소위급이 열흘간 20여 명이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자 상사 중에 30여명을 현지임관시켜 줄 것을 건의하여 일주일이 지난 후에 육군본부에서 임관명령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건의된 소대장 후보들이 전사하고 난 뒤였다. 다급히 중사를 또 임관 시켰으나 그 후에도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아야 했다."
-1950년 9월 안강-기계 전투에 중대장으로 참전한 차규헌 증언(<전투> 136페이지)
기계·안강 지구에서 전투 중인 수도 사단과 제 3사단으로 보충되는 장교는 손톱과 머리카락 등 유품 봉투를 만들어 가지고 부임하게 했다고 한다. 고참 하사관 중에서 선발되어 임관된 현지 임관 장교들은 한결같이 소대장이 될것이 두려웠다고[1] 술회하니 소대장의 소모가 얼마나 심하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모품 소대장'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18연대 11중대장 김종민(<대전쟁> 125페이지)
시대를 불문하고 2차 대전과 같이 장기간 전쟁이 이어지거나,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대규모 전투가 잇달아 벌어지면 필연적으로 장교 자원이 부족해지기 마련이었다. 이때 소모된 병사층은 징병으로 충원이 가능했지만, 병사들을 통솔할 리더십과 전황을 판단하는 뛰어난 눈썰미, 교전시 적들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전술 능력을 갖춘 인력을 소모분만큼 빠르게 보충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결국 긴급히 장교 자원을 수급하기 위해 야전에서 이미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한 뛰어난 하사관이나 선임 병사를 지휘관으로 임관시켜 운용하는 것이 바로 현지임관 제도이다.

사관학교 체제가 잡힌 근대 이후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는데, 유닛 단위로 작전을 수행하는 테러와의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전시에는 장교들도 대개 갈려나갔고, 사관생도 한명을 엘리트 초임 장교로 선발하는데 4년이나 걸리는 사관학교 체제로서는 빈 편제를 채우는 것이 어불성설이었다.[2] 결국 한창 전쟁중인데 그 4년을 손가락 빨며 기다릴수 없기에 조기임관과 더불어 현지임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의 경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수많은 영관급 장교와 중위 이상 장교들이 사망하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소위 장교들이 빠르게 진급했으며 공백이 생긴 소위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하사관들을 현지임관 시켰다. 연합군도 사정은 똑같았는데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독일에 가까워 질수록 나치 독일 국방군의 처절한 저항으로 인해 적잖은 초임장교들이 사망, 이에 미군도 장교단을 채우기 위해 선임하사를 비롯한 하사관들을 현지임관 시켰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6.25 전쟁 당시 운용된 제도였다. 개전 초기 사관 후보생들이 소총병으로 소모된 데 이어 일선 중대에서도 장교들이 사상당했다고 후임 장교가 와서 지휘해주길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기 때문에 1950년 8월 29일 '육군보충장교령'에 의해 주로 노련한 하사관들을 대상으로 시행해 일선의 혼란을 최소화 하려 했다.

이런 식으로 하사관에서 장교로 임관된 사람이 4935명이었는데, 이는 한국전쟁 3년간의 신임장교의 약 1/7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참고자료 전사자는 484명으로 9.4%였으며, 전쟁기간 중 장교 전체 전사자 3672명의 13.2%에 달한다. 2016년 1월 기준 생존자가 60명 가량이라고 한다. 장교가 극심하게 소모된 1950년 하반기에만 2,836명이 현지임관 했고, 이후 1951년 1,119명, 1952년 156명, 1953년 824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병과별로는 보병이 3,134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헌병이 208명이고 나머지는 병참 196명 등 100명대 이하. 하지만 진급과 함께 솔선수범의 부담도 늘어 점차 '전선의 불쏘시개', '소모품 장교', '수명은 1주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선 하사관들 사이에서 기피되게 되었다.

1961년 제정된 군인사법 제11조 제1항 제5호(2011년 5월 24일 제11조 전문개정으로 인하여 '제6호'로 변경)에는 전시에 탁월한 통솔력을 발휘한 준사관(즉, 준위) 및 하사관으로서 장성급 지휘관( 준장 이상)으로부터 현지임관(現地任官)의 추천을 받은 사람은 장교로 임관될 수 있다고 정하여,( 군인사법 참조) 현지임관에 대한 법적 근거를 유지하고있다. 다만 미군정체제와 더불어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시작하며 한반도 일대의 정세는 전례없이 안정된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 조항으로 임관된 장교는 없다.

3. 실제 사례

1187년에 벌어진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수성 측은 병력 6000명 중 기사는 오직 14명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 처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벨린의 발리앙은 병사와 시종 중 60명을 임의로 뽑아 그 자리에서 기사로 서임하였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일반 병사나 부관을 소위로 현지임관한 것과 유사한데, 엄격했던 신분제를 생각해보면 임시로나마 귀족과 동격으로 인정한다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주위의 병사와 시종을 전부 기사로 서임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대주교가 세상을 바꿀 것이냐는 말을 하여 당시 신분제의 관점으로 생각하기 힘든 일임을 보여준다.

1955년 10월 육사 11기가 소위로 임관했을 때 현지임관 출신 장교들은 대부분 소령과 중령으로서 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정책상 육사 11기는 빠르게 승진 했고, 5.16 이후에는 육사 11기 출신 정치 군인들이 고속 승진 하였다.[3] 이런 편중된 내 권력구도 때문에 20년 정도 지난 후인 1973년에 육사 11기가 먼저 장군으로 승진하는 일이 벌어져 현지임관 출신 장교들의 상실감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현지임관된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미군정기에 편성된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하사관을 거치고, 6.25 전쟁 당시 현지임관으로 장교가 되어 이등병 부터 일등상사를 거쳐 소장 계급 까지 전 계급을 거친 사람은 최갑석 소장과 정수암 소장이 있다. 소장으로는 김영동 20사단장, 김용근 헌병감, 한상권 국방부차관보, 김병주 보안사 참모장, 이명구 38사단장, 이규식 52사단장, 이영구 합참 정보국 차장, 최갑석 2군 부사령관, 정수암 수송감이 있다. 준장은 유기화 화학감, 황종우 부관감, 김일만 부관감, 서기원 모 부대 참모장, 안도열 주월사령부 부관참모이다.[4] 유기화 준장의 경우 육군특별지원병 출신으로 일본군에서 조장(상사)로 제대하여 1948년 10월 한국군 입대 일주일만에 특무조장(상사)로 진급하였다. 1953년 10월에 현지 임관후 1974년 육본 화학감 역임 후 준장으로 예편한다.

또한 베티고지 전투[5]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김만술 소위도 특무상사에서 현지임관한 사례였고, 425고지 전투의 주역인 8연대 1중대장 김한준 대위 역시 현지임관한 사례다.

이들은 1만명에 가까운 장교 숫자로 보나 전공 내용으로 보나 장군 14명은 너무 적은데, 결정적으로 5.16과 12.12에 참가하지 않아 정치 군인들에게 밀린 여파가 크다. 이들의 최대 진급 한계는 소장이었다고 한다. 사병 출신 장성 가운데 현지임관으로 장성급 장교까지 진급한 인물은 14명이며 5명이 준장, 9명이 소장이었다. 바꿔서 말하면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다 보니 원래 군대의 존재 목적대로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면 된다는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가진 장교들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정치군인 같은 게 될 여지가 매우 적었다. 또한 각자 자기 부대에서 현지임관이 되다 보니 횡적 종적 연대감이 약해 밀어주고 끌어줄 사람이 없다는 점도 문제였다.

미군의 경우 10대 합참의장을 지낸 존 베시 대장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상사로 근무중에 현지임관해 소위가 되었다. 이 외에도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나오는데 바스토뉴 전투 이후 이지중대에 장교의 부족으로 립튼 선임상사가 소위로 현지임관을 한 내용도 있다. 베트남 전쟁당시 공수부대원으로 구성된 특수임무대인 타이거 포스의 지휘관 데이비드 해크워스도 6.25전쟁당시 공을 세워 현지임관으로 소위가 되었다.

3.1. 창작물

요지경으로 돌아가는 긴박한 전선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물 작품에서 단골 소재로 쓰인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선 주 소비자의 연령대를 노리고 아예 군인조차 아니었으나 어린 나이의 민간인인 주인공이 천재적인 재능 때문에 지나가던 지휘관으로부터 "친구들을 지키고 싶지? 그럼 지금 적과의 전투를 해결하는데 협조해라"식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발탁되고, 그러다 피치 못할 사정이 겹치며 말뚝 박고(...) 소위부터 시작하는 즐거운 군대 생활로 전개되는 작품이 많다. 이는 어느 나라나 다 그렇지만 사관학교를 경험한 창작자보단 그렇지 않은 미필자나 병출들이 더 많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상의 사관학도 생활을 묘사하려 머리를 싸매쥐고 사료를 조사하는 것 대신 현지 임관으로 적당히 때우는 것이 창작자에겐 더 편하고 더 극적이며, 정규 과정을 밟고 올라온 이른바 모범생형 라이벌 캐릭터와 대비시키는 에피소드로 써먹기에도 좋다는 이점이 있기도 하다.

[1] 즉, 하사관 시절엔 아무리 소대장이라도 장교 밑에 적당히 묻어갈 여지라도 있는데 소위로 소대장이 되면 어쨌든 장교라는 무게 때문에 솔선수범으로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 [2] 이는 귀족 가문 생도들 위주로 장교단을 꾸린 WW1 시절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학사장교 간부사관 같은 장교 인력 수급의 보조 수단들이 확립된 WW2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3] 1973년에 육사 11기에서 가장 먼저 별을 단 사람은 비 육사, 즉 갑종을 멸시하고 육사 순혈주의가 대단했던 전두환이었다. [4] 준장 진급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69년 11월 베트남에서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전사. [5] 국군 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가 중공군 1개 연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전투. [6] TVA판에선 상사. [7] 그럼에도 나중에 가서는 친구들도 마음을 다잡고 군에 투신했으며, 키라 또한 반 네츄럴 진영을 때려잡는데 앞장섰다. 특히 키라는 끝까지 군에 남아 삼척동맹을 거쳐 오브군과 자프트군 양국의 군에서 동시에 장성까지 오르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달성하며 겸사겸사 예쁜 아내도 친구한테서 빼앗고아무로의 여러 후신격 캐릭터들 중엔 가장 성공한 군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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