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남북통일코리아 | |||||||
윤설미 | 신은하 | 김수영 | 한수애 | 류희진 | 박성진 | 김소연 | 김서아 |
통일 메아리 악단 | ||||||
이순실 | 유현주 | 윤설미 | 신은하 | 정유나 | 강은정 | 한수애 |
<colbgcolor=#000000><colcolor=#EBF97D> 옥토끼한수애 oks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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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북한이탈주민) |
출생 | 1991년 1월 13일 (33세) |
평안남도 대동군[1] | |
활동 개시 | 2020년 12월 9일[2] |
방송 장르 | 일상 및 낚시 |
방송 시간 | 랜덤 |
구독자 수 | 12.9만 명[3] |
링크 | |
종교 | 개신교 ( 장로회) |
신체 | 163cm |
가족 | 아버지, 어머니, 남편[4], 딸(2017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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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양 만경대구역 출신 북한이탈주민, 방송인, 유튜버.세계적으로 유명한 앙코르 와트 사원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의 북한 식당 평양랭면관[5]에서 근무하다가 그곳에서 손님으로 만난 남편과 사랑에 빠져 탈북한 현실판 사랑의 불시착을 찍은 장본인이다.[6] 그래서 유튜브를 검색하면 캄보디아 북한 식당에 근무하던 당시의 앳된 한수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아울러 그 당시 근무했던 북한 식당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전하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2. 생애
2.1. 유년기 시절
1991년 평양시의 만경대구역[7] 출신으로 북한군 군인 아버지와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들만 있는 친가 쪽에서 딸을 바라던 친할아버지의 귀여움과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다만, 동생을 낳은 어머니가 동생을 키우느라 외가쪽 조부모들과 이모 밑에서 키워졌다고 한다. 이후 남녀공학이었던 학교에 입학하였고 군사동원부에서[8] 통일전선부 문화교류국 대남연락소[9] 서기를 맡았는데 필체가 좋아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그러던 중, 만경대의 고위 간부들이 김정일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한수애의 남자 동기들이 북한군 1군단과 5군단으로 배치시키는 '집단 탄원'의 대상으로 징집되어 순식간에 남녀공학이던 학교가 얼떨결에 여학교로 탈바꿈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 한수애는 횃불행진과 같은 행사에 동원되어 훈련을 받았고 지금처럼 다부진 체격과 몸매를 갖게 되었다.[10] 이후 교사들에게 이끌려서 정치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2007년 노무현 대통령 방북 당시에 공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무지였던 군사동원부에 방문한 시군사동원부 5과 과장의 눈에 띄면서 조선로동당 5과 준비생으로 뽑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탈락하면서 다시 원위치됐는데, 상사였던 간부의 배려로 조선로동당 연락소로 발령받게 된다. 하지만, 방광염에 걸려서 소화기 내과로 입원한 와중에 김정일의 지시로 청년동맹 편제 해체를 당하면서 졸지에 해고된 상태가 된다.
2.2. 캄보디아 북한 식당으로 가다
결국 다시 집에 돌아온 한수애에게 아버지가 대외봉사원 양성소를 권유했는데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아버지의 간청과 어머니의 견책에 못 이겨서 가게 된다. 한수애의 증언에 따르면, 대외봉사원은 한국의 연예 기획사와 흡사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당시 한수애의 아버지는 딸이 선머슴같이 행동하는 게 아쉬워서 좀 더 여성스럽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비쳤고, 어머니는 "니가 뭔데 아버지가 시키는 것을 안 하냐?" 같은 식의 팩트폭격으로 딸을 설득했다고 한다.다만, 당시 동행을 했던 어머니에게는 그렇게 기대하지 말라고 반신반의하면서 심사를 받으러 들어갔고 내심 합격 못할 것 같다 단언하고 귀가했는데 일주일 후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연락을 받은 어머니는 기뻐했던 반면에, 한수애는 불합격을 바라던 와중에 합격 '당하면서' 낙담(?)했다고 한다. 아마도 한수애가 불합격을 바랐던 이유는, 양성소에 모인 여성들의 미모와 재력이 있는 소위 '금수저' 집안의 딸들이다 보니 자격지심이 생긴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성소에 있는 연습생들이 각지 파견될 나라의 조를 나눠서 파벌들끼리 모여 다니는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 모 연습생을 통해서 '꿈의 조'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으나[11] 정작 한수애 본인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고 그런 가운데 자신의 특기인 베이스 기타를 배우게 된다.
이후 그 언급된 그 '꿈의 조'의 사장이 조 선발을 위해서 평양으로 들어왔고 (놀랍게도 사장이 여자였다고 한다.) 다음날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 모든 양성소 연습생과 후보생들이 철저한 준비와 열정적인 모습으로 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혹독한 평가가 내려진 상황 중에서 한수애가 뽑혀서 금방 외국으로 파견된 줄 알았으나, 2년 6개월 의무 연수 방침에 걸려서 다시 북한에 남아 연수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개고생하는 우여곡절 끝에 캄보디아로 파견된다.
캄보디아에서 일을 시작한 신참 시절에, 선배들이 사소한 것으로 트집을 잡아서 군기를 잡으려고 너무 괴롭히는 바람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었고 가혹행위와 폭행까지 당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짐을 싸서 평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달러를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힘들어도 참았다고 한다. #
2.3. 남편을 만나다
그리고 여기서 손님으로 찾아온 대한민국 출신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남편의 직업은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캄보디아로 파견을 왔다고 한다. # 처음에는 남편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었지만[12] 상냥한 태도로 배려를 해주는 모습과 북한 사람들에게 들을 수 없는 간드러지고 부드러운 말투로 점점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13]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에게 과거 학창시절의 이야기를 해줬는데 점점 호기심이 들면서 대한민국으로 가보고 싶다는 동경을 더욱 굳혀나갔다. 이 때 남편이 대놓고 대한민국의 좋은 점을 일장연설하면서 자랑하는 태도였다면 별로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몰랐지만, 슬쩍슬쩍 재미있는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는 태도라서 더욱 솔깃해지고 궁금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이 멋진 바다가 보이는 풍경의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직접 보여줬는데 농담조로 "어? 나중에 저기로 가봐야 되는 거 아냐?" 같은 이야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이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한 이후 남편과 신혼여행을 갔을 때 정말로 그 사진에서 봤던 바다를 같이 갔고 자유를 얻었다는 생각에 눈물도 흘렸다고 한다.
그렇게 남편이 북한 식당으로 1년 내내 매일같이 찾아왔고, 남편을 만나서 서빙하는 시간은 사실상 연애하는 시간이나 다름없게 되었다.[14] 특히 남편의 누나, 현 시누이가 한수애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예 첫 만남부터 시누이로 여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시누이가 자기 남동생과 그녀의 연애에 많은 응원을 해줬다. 시누이 역시 남편과 같이 식당에 오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전담 봉사원으로 한수애를 선택했다고 한다. 심지어 매일같이 찾아오다가 어쩌다 식당에 안 오는 날이면 왜 안 오는지 기다리면서 혹시 다쳐서 못 오는 게 아닐지 걱정까지 했을 정도로 보고 싶어서 초조한 마음마저 들었다고 한다.
며칠 뒤 남편이 북한 식당을 찾아오자 왜 이제서야 왔냐고 화를 내면서 "왜 못 왔어요?" 라고 자신도 모르게 성질을 내기도 했는데[15] 어느덧 여자친구가 데이트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 남자친구에게 타박하는 모습처럼 남편에게 점점 빠져들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감시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몰래 손을 잡거나 선물까지 건네주면서 금단의 연애를 즐겼다고 한다. 심지어 북한에서 교육을 받을 때, "남한 사람이 주는 약은 무조건 독약이니까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 라고 했는데도 천식으로 몸이 아플 때 남편이 직접 약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렇게 아프다가도 남편이 약을 줘서 먹었더니 다음 날 몸이 싹 나았다고 한다.[16] 정작 자신의 사수들은 몸이 아파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하고 약 쪼가리 하나 제대로 챙겨주는 것도 없었고, 심지어 남편이 사다주는 약을 먹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시도했으니 더더욱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수애는 남편의 자상한 마음에 이끌리게 되었다.
한수애의 증언에 의하면, 대한민국 남성 손님과 북한 식당 봉사원 간의 연애가 암암리에 이뤄진다고 한다. 같은 민족이어서 말이 통하는 데다 금단의 연애(?)라는 점 때문에 더 애틋하다고 한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기 눈으로 봤을 때 '저 둘은 진짜로 사귀고 있다'라는 커플만 해도 무려 6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사실, 남편이 보기와는 다르게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생각보다 얌전한 편인 데다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소극적이었다고...
게다가, 북한 식당에서는 보위부 요원의 눈치를 보기도 하고 생활총화를 하면서 서로에게 잘못한 것을 고발하고 감시를 하는지라 매사에 말 한마디도 조심해서 해야 되고 군대처럼 선후배 관계도 딱딱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당연히 남자관계 같은 비밀 이야기나 힘들어도 고충을 털어놓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절대로 동료들과 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남한 손님과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일하면서 자신의 힘든 일이나 고민거리 같은 비밀 이야기를 모두 들어줬고 매사에 답답한 마음의 스트레스를 모두 풀어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처음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던 남편이 어느샌가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왔고 "아. 나 이 사람 좋아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수애의 사수와[17] 한수애를 감시했던 선배도 자신들이 하고 싶은 비밀 이야기를 남편이 몰래 잘 들어줬고 어려운 고민 상담도 잘 해줘서 남편에게 호감을 느끼고 좋아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절대로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랑을 쟁취해 낸 사람은 정작 남편에게 별로 관심도 없었던 한수애였으니 세상 일은 정말 모르는 것이다.
2.4. 탈북을 결심하다
북한식당에 파견되는 사람이라면 그러하듯 한수애도 역시 남한[18]과 자본주의를 적대시하는 세뇌로 인해[19] 사상의 정신 무장이 잘 되어있었고 김씨조선의 골수 충성파였던지라 소위 북한에서 말하는 '빨간 물'이 잘 들어있었고 남한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마음을 되새기고 다짐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북한식당으로 파견되어 근무하면서 고객인 남한 손님들이 자신이나 동료들을 북한 사람이라고 무조건 적대시하거나 경계하지 않는데다 아무런 사심도 없고 거리낌도 없이 자유롭고 친근하게 잘 어울리거나 친절하게 잘 대해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놀랐다고 한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이 남한식 치킨이나 짜장면이나 한국 라면 등을 직접 사다주기도 했고 아이스크림도 사주기도 하는 등, 굉장히 따뜻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심지어, 북한식당에서 홍수가 났을 때 우왕좌왕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힘들게 양동이로 물을 퍼다가 나르고 있을 때, 남편과 남편 친구들이 양수기를 가져와 물을 빼주면서 도와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북한식당 좌우로 있던 상가들이 모두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이었고, 이분들이 모래주머니를 쌓는 데 도움을 주셨다. 그리고 남편이 도착했다.
심지어 패키지 여행을 왔던 한국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님들이 "아이고? 북한 아가씨가 여기 왔네? 한 번 안아보자!" 라고 한수애를 따뜻하게 안아줬는데, 그동안 북한에서 적국이라고 세뇌교육으로 배웠던 남한의 손님들이 자신을 적대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환대를 해주는 것에 크게 감동을 하였고 가슴이 울컥해지면서 뭉클해졌다고 한다. 결국, 한수애는 시간이 흘러갈 수록 남한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마음이 점점 풀어지기 시작했고 "잠깐만? 저 남한 사람들은 적이라면서? 그런데 왜 우리들한테 저렇게 친절하지? 그리고, 남한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고 좋은 동지들인데 왜 우리들은 남한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적대시해야하는 것이지? 뭔가 이상한데?" 라면서 자신이 그동안 북한 사람으로서 살아왔던 정체성이 햇갈리고 마음에서는 강한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점차 "아. 내가 그동안 남한 사회에 대해서 뭔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에 점점 경계심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
자신은 21년 동안 살아오면서 평생동안 남한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경계해야 된다고 사상교육을 강하게 받아왔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도 우리 북한 사람들을 싫어하고 적대시하도록 사상교육을 받아왔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북한에서 자라왔다면 거의 세뇌교육 수준까지 적대하도록 교육을 받아왔을테니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고 만나는 남한 사람들이 따뜻하게 대해줬기 때문이다.[20] 그리고, 윗선에서는 "남한 손님들은 돈줄이니까 친절하게 잘 대접해 줘라." 라고는 말은 하지만, 막상 일이 끝나고 뒤에 가서는 "왜 남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냐?" 라면서 성질이나 내고 생활총화나 하고 있었으니, 북한에서는 왜 저러는지 어리둥절했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안 그래도 같은 북한 사람들은 직원에게 힘들게 일을 시키고 가혹행위까지 하면서 괴롭히기 바쁜데 정작 남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모습만 보여주고 전혀 적대시하는 모습도 안 보여줬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
그리고 남한 손님들은 "우리들은 부자가 아니라 서민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고, 월급이 1만 달러가 (대략 1천 3백만 원 정도) 훨씬 넘는 직종에서 일하는 예도 있었고[21] 아무렇지도 않게 고급 호텔의 비즈니스석을 예약하고 비싼 음식들을 주문하고 먹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남조선 사람들이 못 사는 국가라고 배웠다. 그런데, 남조선에서는 서민들도 저렇게까지 사치를 부리면서 많은 돈을 쓰는데 정말로 못 사는 국가가 맞는 건가?" 같은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한수애 본인으로서는 남한 사람들이 고급 호텔도 예약하고 비싼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사치스러운 부자처럼 보이는데도 전혀 아닌 척하는 태도처럼 보였으니 뭔가 이상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일하고 손님들을 지켜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 남조선에서는 평범한 서민들이라도 고급 호텔 정도는 쉽게 예약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력도 좋고 잘 사는 국가가 맞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반대로, 자신은 30달러도 안 되는 돈을 받고 착취를 당하고 있었고 "내가 3년 이상 일해도 1만 달러를 벌 수 있을까?" 를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남한 사람들은 연봉이 아니라 월급으로 1만 달러 정도는 우습게 벌고 있으니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북한 사회에서는 1만 달러를 갖고 집으로 돌아오면 소위 말하는 "민족의 영웅" 대접을 받는다고 하는데, 남한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1만 달러 이상은 기본으로 쉽게 돈을 쓰는 것을 보고 있으니 "나는 여기서 힘들게 일해도 쉽게 돈을 못 버는데 남한 사람들은 여행까지 와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세상이 참 불공평하고 이상하다." 라고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캄보디아에서 일하는 교민들이 찾아와서 자신에게 "너는 외국까지 나와서 일하고 있는데 월급은 1천만 원 정도 받지 않니?" 라고 물어봤으니 서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북한에서 자신을 부당하게 착취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무려 1년 이상이나 걸렸다고 한다. 남조선 사람들은 북한식당 직원들이 엘리트 대접을 받으며 돈을 많이 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서로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한 손님들은 경제적으로 잘 사는 사람들이라서 사회에 전혀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 직장 생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분이 어땠는지 자유롭게 대화하고, 정치 이야기도 하면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도 욕하고 자유롭게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북한과 다르게 남한은 정치적, 사회적으로나 자유가 있는 나라가 분명하다." 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다른 분위기를 발견했다. 그래서 한수애는 "미쳤다! 남한에서는 저렇게 마음대로 대통령을 욕한다고?" 처럼 자유로운 태도를 발견하자 머리를 한 대 크게 맞은 것처럼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반대로 자신들은 항상 군대처럼 억압당하고 통제되는 분위기에서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보위부 요원들의 눈치를 보면서 평소에 동료들과 말 한마디 자유롭게 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처해있는 작업환경에 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 그래서 "남한 손님들은 매사가 항상 자유로운데 왜 우리들은 항상 통제당하고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걸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수애의 입장에서는 남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일상이 기적처럼 보였다. 그래서 스스로 통제되고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캄보디아에 있던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캄보디아의 유명한 관광지를 여행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보위부에서 북한식당 직원을 24시간 감시를 하는 카메라의 개수를 늘렸는데 "남한 사람들은 위험하고 너희를 납치하는 등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북한식당 직원들이 도망갈까 봐 감시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를 이렇게 못 믿다니, 이게 무슨 치사한 짓인가?" 라고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부조리한 작업환경과 답답하고 통제된 북한 사회에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고 한다.[22] 한국 식당이나 백화점 같은 건물에서는 철조망이 하나도 없는데 북한식당에서만 마치 감옥처럼 철조망까지 쳐져 있으니 안 그래도 답답한 환경이 더더욱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감시카메라가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지켜본다는 생각에 불만이 많았고 짜증이 났다고 한다.
그리고, 남한 사람은 직장의 작업 환경도 대부분 북한식당보다 훨씬 좋아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더울 때는 에어컨도 시원하게 쐬고 전기도 잘 들어오는 좋은 곳에서 일하고 있는데, 반대로 북한식당 직원들은 전기도 잘 안 들어오고 정전도 쉽게 되는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더울 때는 에어컨도 한 번 제대로 못 쐬고 뜨거운 물로 샤워도 못 하는 등 기본적인 일상도 누리지 못하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전기를 쓸 수는 있는데, 북한식당 직원에게만 잘 못 쓰게 하는 것이다.) 어쩌다가 에어컨이라도 한 번 켜면 지배인이 잔소리하면서 성질까지 냈다. 캄보디아는 안 그래도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운 동네라서 그런지 더더욱 괴로웠다고 한다.
반대로, 남한 손님들은 북한식당 직원들보다 월급도 수십 배는 더 많이 벌고 작업 환경도 더 좋다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듣자 대놓고 차별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공평하고 억울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탈북해서 남편의 집으로 찾아가면 하루 종일 에어컨도 틀 수 있고 뜨거운 물로 샤워도 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고 한다. 물론, 탈북에 성공하고 대한민국으로 들어온 이후에는 에어컨도 매일 틀 수 있고 뜨거운 물로 샤워도 매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자신을 찾아와서 남편이 갖다주는 선물과 최고급 한우 소고기, 삼계탕, 참치회 같은 북한에서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던 비싸고 맛있는 한국 요리의 별미를 즐기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북한의 사회와 사상교육으로 알고 있었던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잘못된 편견도 완전히 깨지면서, 엄청난 현실의 괴리감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지금까지 자신이 배워왔던 것과 전혀 다르게 대한민국은 뭔가 여유로워 보이면서 풍요가 차고 넘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유로운 삶' 에 대한 갈망으로 점점 머리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소고기를 먹으면 보위부에서 처벌받아서 일반 주민은 절대로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23] 그래서 북한에서 단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한우 살치살을 처음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한우가 비싼 가격인 것도 모르고 "한우 먹고 싶으니까 사줘요!!" 라고, 철없이 조르기도 했었다. 탈북을 하고 대한민국에 정착한 지금도 한우를 3~4인분 정도는 그냥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본인이 말하길, 이 때부터 소위 말하는 '공산주의 빨간 물' 세뇌가 완전히 빠져버렸고 '달달한 대한민국 자본주의' 에 맛 들였다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남편은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선물도 잘 챙겨주고 맛있는 한국 음식들을 챙겨준 가격을 계산해 보면 우스갯소리로 "남편은 나한테 아파트 한 채 값 정도로 엄청나게 큰 돈을 썼을 것이 분명하다." 라고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이야기한 적도 있고, 남편이 자신 때문에 캄보디아에서 번 돈도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게다가, 한수애 본인은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이 탈북했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탈북할 때 짐도 거의 챙기지 못했고 4년 동안 힘들게 모아뒀던 8천 불을 놔두고 오는 바람에 땡전 한 푼도 없는 상태였다. 물론, 탈북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짐을 싸서 들고 나가지 않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북한 김씨 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세뇌가 완전히 풀리게 되었고 21년 동안 살아오면서 배워왔던 '자유롭고 평등한 북한의 사회주의 세상' 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북한식당 직원들은 군대처럼 분위기가 항상 답답한 데다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서 항상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는데, 남한 사람들은 매사가 풍요로운 것처럼 보여도 끊임없이 만족하지 않은 채 진취적으로 발전하는 모습과 뭐든지 자연스럽게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이 일상적인 상황처럼 매사에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을 부러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여자 손님들이 머리 염색도 자유롭게 하고 예쁜 옷도 잘 입고 명품 가방도 구입해서 들고 다니고 자신처럼 힘든 일도 안 하고 살고 외모도 자유롭게 꾸미면서 일상을 자유롭게 즐기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고 한다.
물론, 탈북하고 싶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누가 뭐래도 사랑하는 남편의 옆에 있고 싶어서였고, "이렇게까지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도와주고 있다. 내가 남편을 따라가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도 내 인생이 망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하루빨리 북한을 빠져나가야겠다고 결심한다.
북한식당에서 저임금으로 착취당하고 선배들로부터 괴롭힘까지 당하면서 힘들게 일을 하고 있던 당시, 현재의 남편이 "나랑 같이 한국으로 갈래?" 라고 탈북을 권유했지만, 북한식당 직원들의 삼엄한 감시망에 겁이 나고,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보위부에 끌려갈까 봐 걱정돼서 거절했다고 한다. 몇 번의 설득에도 거절하자 남편이 결국 포기하였고 며칠 뒤에 "나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라고 통보하였고 정말로 며칠 뒤에 남편이 한국으로 귀국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남편이 한국으로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자,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일이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상사병이 걸렸고 매일 눈물까지 흘리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마실 정도의 괴로운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다. 다른 동료들이 말하길, "일주일쯤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괜찮아진다." 라고 했다는데 자신은 일주일이 지나도 정신이 미쳐버리고 자다가 깨서 눈물도 흘리고 환각까지 봤을 정도로 죽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 윗선에서는 "쟤가 지금 고향으로 가고 싶어서 저러는 것인가?" 처럼 향수병이 걸렸다고 생각해서 몸이 아파서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판단하자 다시 평양으로 귀국하는 것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는 북한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영원히 이별하게 되어버리는 데다, 미래에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도 해야 하고 항상 굶주림을 걱정하면서 아이를 키워야 하고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를 하며 고생하는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결국, 한수애의 입장에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뒤 남아있는 자신의 미래의 삶은 사랑하는 남편을 영원히 만날 수 없는데다 미래에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도 해야 하고 시댁과 자식들에게 영원히 평생동안 희생당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유롭고 주도적인 자신의 삶과 인생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꿈을 실현할 수도 없어지고 영원히 자유를 박탈당하는 등, 북한식당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 이상으로 희망이 없어지는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삶과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미래가 너무나도 무섭고 싫어져서 더더욱 탈북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고 한다. 심지어 잠을 자다가도 악몽을 꾸고 깨어나서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했고, "내가 여기서 탈북을 시도하다가 보위부에게 잡혀서 죽더라도 무조건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처럼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날이 갈수록 한국으로 떠난 남편이 너무 보고 싶어서 상사병도 악화되었고, 평양으로 다시 돌아갈 상황까지 치달으면서 몸과 마음이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는 상태가 되었다. 친한 손님에게 핸드폰을 빌려서 남편이 평소에 자신에게 꼭 외우라고 알려준 전화번호를 눌러서 통화를 시도했고, 다행히 곧바로 남편이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수애는 남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고 "저에요. 평양 돌아가요." 라고 하자, "그럼 내가 갈게."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게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이제는 한국으로 같이 가고 싶어요." 라고 울면서 말하자 그 다음 날 곧바로 남편이 캄보디아로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한다.[24]
그리고 이때부터 한수애는 남편과 같이 캄보디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탈북을 계획하였다. 북한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가 오직 평생에 지금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이 기회를 놓친다면 영원히 후회할 것 같았다고 한다. "여기서 북한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평생 다시는 탈북할 수 있는 기회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고... 어차피 탈북에 실패하고 보위부에 잡히면 오직 죽음뿐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게다가, 2023년을 기준으로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남북 관계가 점점 최악으로 악화되는 상황으로 변한 데다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국경경비가 더더욱 삼엄해지면서 날이 갈수록 탈북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정말로 탈북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없을 절호의 상황이긴 했다.
2.5. 남편을 따라 대한민국으로 정착하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남편의 도움으로 캄보디아 현지 심부름센터의 사람들을 고용하여 납치를 빙자한 탈출극으로 무사히 북한 식당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뒤 밀입국으로 태국을 거쳐서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는 데 성공한다. 그 당시 캄보디아 국민의 평균 일당이 5달러 정도면 되는데도 무려 100달러 이상을 보수로 줬다고 한다. 그리고 탈북을 시도하다가 잡힌다면 죽을 각오는 이미 했었던 상태라서 은신처에서 머물고 있던 시점에 실패를 대비해 자살할 수 있는 쥐약을 구하려고 했지만, 심부름센터 직원들의 만류로 쥐약을 얻지는 못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치밀하게 준비를 한 것을 생각해보고 "혹시 남편이 국정원 직원이 아닌가?" 라고 의심까지 했다고 한다.하지만, 첫 번째 시도는 탈출할 만한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실패했고 두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첫 번째 탈북 시도에 실패한 이유는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사건이 터져서 갑작스럽게 경비가 삼엄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두 번째 시도 끝에 캄보디아를 빠져나와 태국을 거쳐서 대한민국으로 정착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탈북의 계기를 만들어줬던 남편과 결혼했고 딸을 낳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중이다. 탈북에 성공한 뒤에는 "왜 캄보디아에서 4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 걸까? 더 일찍 나올걸..." 이라고 생각을 했고 무의미하게 20대의 젊음을 낭비했다면서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후회를 했다.
한편, 한수애의 탈북으로 인해 평양에서 특권층이었던 부모님이[25] 황해도로 추방되어서 모진 고생을 하는 것을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수애는 탈북 당시에도 납치로 가장하고 한국에 와서도 되도록 노출을 꺼렸는데, 북한에 남겨진 부모들이 걱정되어서 그랬다고 한다 #. 하지만,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부모님이 평양에서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만나러 갑니다와 같은 방송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한수애가 탈북했을 당시의 베트남 북한 대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한진명(2015년 탈북)이 당시의 대사관 상황을 일부 언급했다. 그러나, 정작 한진명은 들려오는 탈북 소식들에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본인 증언에 따르면, 자신도 비교적 젊은 외교관에 속해서 생각이 이전 세대의 외교관들과 달랐는데, 자기 생각하기에는 개인이 "개인 의지로 탈북하는데 가서 잘 살았으면 그만인거지, 굳이 그에 대해서 분노하지도 동정하지도 않고 무관심에 가까운 편이었다" 라고. 다만, 평양의 가족에게 탈북 사실을 알리려고 방문한 국가안전보위성 인원들이 외국에 나가있던 딸의 소식을 가져온 줄 알고 있는 가족들에게 성대히 대접을 받는 바람에 딸이 탈북했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는 소식이 대사관에 들려왔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한수애의 가족이 추방당하는 일련의 사태를 예상하면서 안쓰러웠다고 말했다. #
그 후 이만갑 출연을 결정하였고, 방송 활동을 하던 중 22년에 북한에 있던 어머니와 전화 통화가 성사됐다. 마침 평양이 고향이셨던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온 가족이 모여 있었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밝혔다. 이때 시어머니, 남편, 본인, 딸까지 모두 잠깐 통화를 하였다. 아마도, 보위부에서 목적을 가지고 연결한 통화였던 듯 한데 어머니는 거의 듣기만 하셨다고... 그리고 보위부도 목적을 밝히지 않았는데 본인만 있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인 듯하다.
3. 여담
- 현재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에 출연 중이며, '옥토끼한수애'라는 유튜브도 운영하고 있다.[26] 옥토끼란 별명은 한수애가 학창 시절 장기 자랑 때 당시 북한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토끼와 자라'의 주제가를 불렀는데 그 가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27]
- 북한 식당 직원으로서 공연한 경험이 있어서 입담도 매우 좋은 편이고, 진행 능력도 뛰어나다. 특히 현 남편을 만나게 된 계기와 탈출 과정을 얘기하다가 절정에 이를 때쯤에 끝맺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평양에서 살 때 ' 꽃보다 남자'를 몰래 보고, 다니던 학교에 가서 급우들에게 얘기를 해줬다고 했을 만큼 실력이 좋다. 탈북민 선배인 신은하와 공동으로 방송하는 일도 있는데, 자신의 컨셉인 '허당' 기믹을 이용한 진행을 한다. 또한, 탈북민들로 이뤄진 공연 및 자선단체인 '통일코리아' 창립 구성원으로 기타 연주 및 공연 활동도 하고 있다.
- 탈북하고 대한민국에 정착한 지금도 간혹 직업병이 있다고도 하는데, 한번은 남편과 같이 식당에 가서 식사 중에 식당 사장이 음식을 서빙 중인 알바에게 갖고 내가라고 외치니 그 자리에서 "네!" 하고 일어서서 남편이 빵 터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한국으로 탈북했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전기도 마음대로 쓰고 뜨거운 물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기본적으로 불편하지 않은 삶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캄보디아 북한 식당[28]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일도 너무 힘들었지만 전기도 거의 못 쓰게 했었다.[29] 북한으로 돌아가면 전기도 잘 안 들어오고 뜨거운 물도 잘 못 쓰고 모든 것이 불편해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에서는 해산물도 쉽게 먹어볼 수 없는데[30] 한국에서 질리도록 생선을 먹을 수가 있어서 너무 좋다고 한다.
- 국정원에서 처음 조사를 받았을 때, 배가 고파서 조사를 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자, 국정원 조사요원이 북한에서 쉽게 먹어볼 수 없는 김밥을 건네주면서 먹으라고 했는데 정작 한수애 본인은 "저걸 먹으면 독같은 게 들어있어서 죽는 거 아냐?" 라면서 의심을 했고 겁이 나서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경계를 했는데, 그러자 국정원 조사요원은 "에이, 이걸 왜 안 먹어요?" 라고 웃으면서 김밥 꼬다리 한 개를 집어먹으면서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생각하세요." 라고 대답하자, 독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안심하고 김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 김밥은 참기름도 듬뿍 발라져 있었고 계란 지단, 우엉, 채소, 고기도 가득 들어있어서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너무나도 맛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엉도 북한에서는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구경도 못 했었고 대한민국에서 처음 먹어봤다고 이야기하였다.
- 참고로 북한에서 한국산 김은 장마당에서도 밀수로 들어오는 경우도 거의 없을 만큼 엄청나게 귀하고 비싼 음식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한수애의 집안은 나름대로 평양에서 살았던 특권층이었는데도 김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 그래서, 한국에서는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서민들의 국민 음식이 김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매우 놀랐다고 한다.[31]
- 국정원 조사요원이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자 질문에 "왜요?" 라고 놀라면서 물어봤었다. "여러분들은 북한에 억류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북한에서 태어난 것이 너무나도 억울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국정원에서 조사받는 동안에 부모님에게[32] 피해가 갈까 봐 조사의 협조 여부를 갈등하였다. 이때 국정원 조사요원이 지금의 남편과 통화를 허락하는 조건을 내걸자 '순순히' 협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의 전화를 받자마자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엉엉 울면서 대화했는데 남편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
- 남편이 국정원에서 조사하는 기간은 겨우 15분이면 된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오랫동안 조사를 받는다고 이야기를 해줬으면, 보나마나 탈북을 거부할 것이 뻔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훗날 한수애 본인이 국정원 직원에게 "아니, 15분이면 된다는데 이런 법이 어디있어요?" 라고 물어봤었는데, 국정원 직원은 그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라고 대답해주면서 "그럼 90일 동안 한국에서 조사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정말로 한국으로 왔을거 같아요?" 라고 묻자,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편의 심정이 어땠을지 납득했다. 결국, 90일 동안 TV도 있고,조사실도 포함된 독방에서 특별조사를 받았다. 남편이 위험을 무릅쓰고 같이 탈북한 것과 신분 등 복합적인 영향을 받아서 태국 구치소와 국정원 등에서 찾아왔고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제공하였다.[33]
- 마침 한수애가 탈북한 시기에는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북한식당에 대한 여러가지 증언을 국정원에 제공하여 그에 따른 보로금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다름 아닌 그 보로금의 가격이 북한 식당에서 4년간 착취당하면서 받았던 월급보다 수십 배는 더 많았다고 한다. (월급이 한 달에 30달러도 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북한 정권에서 얼마나 북한 주민을 악랄하게 착취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북한식당 종업원 시절에 한국인들에게 1만 달러 그림을 판매한 적이 있다. 포상으로 선풍기를 받았고, 후에 지배인에게 뒷돈 100달러를 받았다. 여기서 다른 현지 식당과 현지 가이드의 커미션 관계가 있는 것처럼 북한 식당과도 커미션이 있다는 내용이 간접적으로 언급되었다.
- 하나원을 졸업한 뒤 정착금을 통장으로 받았을 때, 통장으로 돈을 보관해 주는 은행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았는데 굉장히 낯설고 신기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부터 북한의 화폐개혁 이후 북한 원 화폐가 워낙에 개판인데다 은행이라는 것을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북한 은행은 예금은 가능하지만 자유롭게 출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어느정도 모이면 윗선에서 '혁명을 위한 자금으로 조국에 쾌척하라'는 명분으로 가져가 버린다. 말이 은행이지 사실상 날강도나 다름 없는 수준이다. 그래서, 북한 원을 안 쓰고 미국 달러를 쓰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생을 장마당에서 현금거래만 하면서 살다 보니 통장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고, "이렇게 종이로 만든 수첩같은 것에 (통장 안에) 정말로 돈이 들어있다고?" 라면서 의아하게 생각했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져서 믿기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은행이 하는 일에 대한 개념과 돈을 조심해서 써야한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을 해 줬고,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용 거래의 중요성으로 살아간다" 라는 것에 강한 책임감을 배웠다고 한다. 이렇다보니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오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애로사항 중 하나가 정착금을 인출하려 할 때이다. 은행에 대한 불신이 워낙에 높다 보니 은행에 직접 입금된 정착금을 빼앗긴다고 여겨서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다행히 한국의 은행과 북한의 은행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북한이탈주민은 은행에 대한 불신을 누그러뜨리기도 하지만 아직도 북한에서의 생활상을 벗지 못한 일부 탈북민들은 잔여금액까지 모조리 뽑아다 집에다 보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은행에서 이자까지 준다는 사실에는 기절초풍을 한다. '내 돈을 맡겼는데 오히려 돈을 준다고!?' 라며 되려 놀란다.
- 하나원 퇴소 이후 한국 돈의 가치가 많이 익숙하지 않아 백화점에서 무려 200만원짜리 커튼을 구입한 뒤에 남편의 신용카드로 긁는 바람에 결국 잔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시어머니도 사고 싶은 것을 산다고 하니까 뭐라고 말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남편이 한국 돈으로 200만원이 2,000달러인 것을 알려줘서 평생동안 버리지 못하고 사용하는 커튼이 되었다고...
- 처음 대한민국으로 왔을 때는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었고 운전면허를 땄을 때도 좌우 구별을 힘들어했다. 남편에게 운전 실습을 받을 때도 좌우를 잘 구분 못해서 고생하고 애를 먹기도 했다. 그래서 의외로 '허당'끼가 많다고 한다.
- 본인이 말하길, "북한 사람들이 김씨 왕조에 쉽게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사회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운 삶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고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회로 찾아가 직접 자유로운 삶을 체험하고 만끽해야만 점점 세뇌에서 풀리면서 김씨 왕조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눈으로 직접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몸으로 체험하면서 겪어보지 못하면 절대로 북한의 부조리함을 모른다고 한다.
- 사실, 위의 서술은 다른 탈북자들도 공통으로 증언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탈북자 중에서도 교사, 언론인, 대학교수, 정치지도원, 과학자, 고위급 관료, 군인, 당 비서처럼 이른바 골수 김씨 왕조 충성파 엘리트층도 풍요로운 한국 사회를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한 뒤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제공하는 서민들의 임대주택을 비롯한 대한민국 국민의 생활 수준을 바라보고 이구동성으로 많이 하는 발언이 "조선노동당 고위 간부들도 이 정도 수준으로는 못 산다.", " 김씨 왕조는 인민들을 굶겨 죽이는 인간쓰레기다." 같은 인생의 허무함과 배신감을 하루아침에 크게 느낀다고 한다. 심지어, 소위 말하는 '김씨 왕조에 충성하는 빨갱이 분자' 들도 '빨간 물'이 얼마 못 가서 완전히 다 빠져버릴 정도로 북한 정권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고 한다. 노동신문 기자 출신의 김길선이 대표적인데, 북한 정권에서 기자까지 했던 인텔리 출신이었으나 탈북 이후 전향하여 그 누구보다도 북한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 같은 식당에서 같은 조의 사수, 부사수로 함께 일을 하던 봉사원 후배 김서아[34] 역시 한수애처럼 직원과 손님으로 알게 된 남한 남성을 만나서 같이 식당을 탈출했고[35]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이다. 그리고, 김서아는 한수애가 탈북을 한 이후부터 북한 식당에서는 어떤 상황이 되었는지 직접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실제로, 김서아가 도망가자 연차가 되어 단골을 갖고 있던 봉사원은 모두 평양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현재 대북제재에 따라 캄보디아 북한식당은 모두 철수했고, 일부 종업원은 중국에 있는 식당으로 옮겨졌다.
- 참고로 김서아가 전한 백광숙의 후일담에 의하면, 북한 당국이 한수애의 선배이자 동료였던 백광숙을 다시 파견하기로 정하고 집으로 찾아갔는데 만나자마자 경악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그 잘나가던 미모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북한 김태희'로 불리던 그 미모는 온데간데 없고 '괴악한' (북한식 표현이다) 모습으로 있는 그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백광숙이 "보내주시면 잘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얜 반드시 탈북할 아이같다." 라고 느껴져서 단념했다고 한다.
- 탈북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현재의 남편과 같이 살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더욱 확고하게 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대북제재였다고 증언했다. (이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라고 한다.) 북한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상당히 많은 실적을 쌓았고 전기밥솥과 같은 상품을 북한으로 보내는 와중에 대북제재의 대상이 되면서 중국 세관에 의해 반입이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 "난 왜 이렇게 약한 나라에서 태어난걸까?" 처럼 북한 정권에 대한 좌절감과 실망감을 뼈저리게 체감하게 된다. 여기에 목함지뢰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긴장상태에서 미군이 B-1을 급파하자 이를 식당에 단골로 오는 한인 고객에게 자세히 알게 된 종업원들이 고객들을 붙잡고 "저 비행기 띄우게 하지 말라", "우리 부모님들 살려달라" 라고 애원하는 모습에 "나도 강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 같은 생각에 탈북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
- 탈북 전에 북한 부모님에게 보낸 소포 11박스는[36] 같은 식당에서 일했던 후배인 김서아가 탈북전 휴가를 받아서 평양에 들어갔을 때 회사창고에 쌓여 있었던 장면을 목격했다고 말해줬다.[37] 결국 부모님께 1개도 전달되지 못했다.
- 2023년 2월 20일, 캄보디아 북한 식당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이자 본인의 자서전인 '壽愛(수애) 목숨 건 사랑'을 출간하였다. #
[1]
북한 행정구역 기준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구역의 관할 구역은 대동군 고평면과 용산면에 해당한다.
[2]
유튜브
첫 영상 기준
[3]
2024년 12월 22일 기준이다.
[4]
한수애 본인은 남편이 '반달곰같은 이미지' 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주인공에서 이름을 따온 '곰현빈' 이라는 애칭이 있다.
[5]
200~300석 규모로 캄보디아 내 최대 규모의
북한식당이었으며, 근처에 이보다 규모가 작은 북한 식당 평양친선관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2019년 12월 UN의 대북경제제재로 인해 캄보디아 내 북한 식당 다른 5곳과 함께 모두 문을 닫았다.
https://news.kbs.co.kr/news/mobile/view/view.do?ncd=4338653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근무했던 북한 식당은 주 고객이 현지 한인들과 대한민국 관광객들이었다. 그래서, '꿈의 직장'과 같았다고 한다. 지배인이 평양에 와서 직원들을 선발한다고 하면 평양의 여성들은 물론이고, 이미 타 지역으로 배정받은 직원들 조차 이곳으로 재배치를 받고 싶어서 경쟁률이 엄청나게 치열했다고 전했다.
[6]
'옥토끼 한수애' 유튜브 채널에서 상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7]
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
평안남도
대동군, 읍면 및 리 단위까지 파악하려면 추가 정보가 필요하다.
[8]
대한민국의 병무청에 해당된다.
[9]
평양에 위치한 123연락소로 위장 명칭은 조선인민군 1010부대이다.
[10]
같은 이만갑 출연자인
신은하의 증언에 의하면 상당히 균형적인 몸매를 소유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11]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들이 소위 '대한민국 고객'이 찾는 북한 식당에서 근무하는 봉사원들이었다. 많은 북한 식당 가운데 특히 대한민국 손님을 주로 하는 북한 식당은 선호도는 물론이고 경쟁률도 치열하다고 한다.
[12]
마치 반달곰같은 이미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수애의 남편의 애칭이 사랑의 불시착 주인공의 이름을 따온 '곰현빈' 이다.
[13]
사실,
경기 방언이 쓰이는 개성 근처 출신이 아닌, 평양이 속한 평안도 지방이나 함경도 쪽의 고향 사투리는 구수하거나 억센 편이라서 서울말로 대변되는 한국 남자들의 말투가 부드럽다고 이야기를 많이 한다. 더군다나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가 알게 모르게 유행해서 그런지,
"한국 남자들은 말할 때 부드럽고 달달하게 들린다" 같은 태도라서 금방 친근감을 느낀다고 하는데, 한수애의 남편도 그랬던 모양이다.
[14]
한수애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 식당 내에서 종업원들과 남한 고객, 특히 남성 고객간의 연애는 은밀하게 암암리에 이뤄진다고 한다. 타향에서 일하는데다 같은 한국말을 하는 같은 한민족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진짜 사귄다'고 공인(?)받는 커플들도 있다고 할 정도. 여기에 남북관계의 특성상 '금단의 사랑'이나 마찬가지라 비극적인 요소까지 더해져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상황도 일어난다고 한다고 한다.
[15]
그 당시 남편이 못 온 이유는 욕조에 물을 받고 들어가 있다가 너무 피곤해서 잠이 들어서 결국 감기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못 와서 미안하다고 직접 사과도 했다. 실제로 목욕탕에서 "목욕탕 안에서 잠들지 마세요"라는 경고 문구를 써놓는 이유도 입욕 수면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16]
아마도 북한에서 살면서 약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었으니, 약에 대한 내성이 없어서 효과가 너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17]
한수애의 사수는 근무 기간이 끝나서 북한으로 다시 되돌아갔다고 한다.
[18]
엄밀히 따지면,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북한에서 한반도가 같은 민족의 땅이라는 교육은 한국보다 훨씬 철저하며 역사나 지리에서 검열은 하지만 남한에 대해서 꽤 상세히 가르치는 편이다. 그래서 외국에 나간 남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교육했을 터인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남한 사람을 싫어하라는 교육을 받았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겠다.
[19]
북한 전체로 치면 나이 (어릴수록 세뇌를 잘 안 따른다), 사는 지역, 정치적 신분에 따라서 차이가 꽤 크다.
[20]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김씨 왕조같은 북한의 수뇌부들을 싫어하는 것이고 일반 주민들은 일부 극단적인 종북주의자, 극우파, 북한에서 보낸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이상 적대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탈북자들도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모두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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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정도의 월급을 받으려면 삼성, 현대, LG, GS 등 대기업의 간부쯤 되어야 한다. 물가가 높은 일본의 임직원도 이 정도는 못 받으며 물가가 비싼 스위스 정도 되어야 한다. 실제로 스위스는 물가가 세계에서 탑급으로 비싼 나라여서 월급이 평균 500만 원 정도를 (4천 프랑, 4460 미국 달러) 받는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아르바이트는 근무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1000-1500 미국 달러쯤 된다. 하지만,
캄보디아에서 외국 여행객을 상대로 장사하는 자영업을 운영하거나 여행사에서 고급 패키지로 호텔, 골프장 코스가 포함되어 비싼 가격을 책정하는 등, 그럭저럭 현금을 많이 굴리는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전혀 불가능한 매출은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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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들이 캄보디아에서 외출을 하게 되면 밖으로 나가서 음식 재료, 생필품, 화장품 같은 것을 사 오는 목적이고 자유롭게 여행을 하러가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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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프로그램
한식대첩에 출연한 북한이탈주민 출신 요리사 안영자 씨도 "소(牛) 하면 쓰라린 생각과 한(恨)이 있다. 소고기는 북한에서 일반인은 못 먹는 음식인데, 남한에서는 흔하게 먹을 수 있지 않느냐?" 라고 소고기를 쉽게 먹지 못하는 것에 울분을 토한 적이 있었다. 다만, 이렇게 고기가 극히 귀했을 때는
고난의 행군이 있었던 1990년대의 일이었다.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걸쳐 부업으로 돼지 사육 두수가 크게 늘어나서 중류층 정도 된다면 특식으로 돼지고기를 먹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2010년대 말에 돼지열병이 북한에도 번지는 바람에 고기가 다시 크게 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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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한국 손님의 핸드폰을 빌려 쓰는 것도 환상적인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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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이 장성급 군인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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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을 부르는 애칭은 '햇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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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검색어로 강화군에 위치한 옥토끼우주센터가 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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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없으면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북한 식당에 방문했는데 에어컨이 틀어져 있지 않다면, 요청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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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윗선에서 전기를 제대로 안 틀어줘서 그런거고 아예 못 쓰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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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전기가 없어서 냉장 유통이 어려운 이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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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2010년대 후반 기준으로는 북한 주민도 자본주의를 더욱 추구하여 그들 스스로 좋은 운송수단을 도입하는 등 상황이 많이 바뀌었는지
개마고원의 국경도시인
혜산시의 시장에서도 김밥을 파는 모습도 보인다.
김밥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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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 자작극까지 벌이고 조용히 살고 있었지만, 가족들이 평양에서 추방되어서 배신감이 들었고, 방송에 출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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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태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도 일반적인 탈북민보다 더 빨리 들어왔다. 남편이 사비로 한국행 항공권을 구매했고, 동남아에 북한 공작원이 깔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같이 들어올 예정이었던 기수들은 평소 일정보다 1-2일 더 빨리 한국에 도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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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탈출, 2020년 입국. 현재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김서아가 북한 식당에 근무하게 된 동기는 '북한 김태희'로 유명했던 백광숙의 부친이 김서아의 부친과 친한 사이라서 해외 식당 근무를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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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수애는 농담조로 "사수한테 좋은 것을 배워야지, 못된 것만(?) 배웠다"라고 웃으면서 타박했다고 한다. 물론 자기 후배를 영원히 죽을 때까지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다시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뻐하고 반가웠다고 한다. 그러나, 한수애가 선택한 탈북 루트인 태국 대신 라오스로 월경하고 현 남편과 함께 체류하게 된다. 굳이 한국에 들어올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라오스와 태국에서 체류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사기와 협박을 당하는 남편을 보고, 결심을 굳혀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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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용 소포, 드라이기, 밥솥, 옷 등 여러가지 물건이 포함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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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아는 종업원 중 거의 유일하게 2주 휴가를 받아서 북한 평양에 들어갔다 왔다. 그때 평양에 부모님 명의로 집을 샀으며, 현재 남편이 당시 일종의 예물로 구입한 부모님 시계(수천불 상당)를 전달했다. 김서아는 엄마가 이 시계를 50불에 판매할까봐 걱정했다. 엄마는 이전에 24k 금반지를 50불에 판매한 전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