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90년대 이전 학원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1.1. 삼국시대~조선시대
학원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국립학교인 국학, 태학, 주자감 등이 존재하였으나 그밖의 대다수의 교육은 사학, 즉 학원 형태의 교육으로 이루어졌다. 경당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에서는 교육열이 상당했으며, 국내 교육에 머무르지 않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학생만 매년 수백명에 달했다. 관직에 오르지 않아도 학식만으로 존경받는 인물들이 다수 있을 정도로, 이미 고학력자와 지식인에 대한 우대가 확실했던 사회였다. 특히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하는 목표로 많은 사람들이 열공했으며, 그 결과 신라 학생들은 빈공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고려시대에는 과거제도가 도입되었고, 비록 음서제가 흥하여 한계가 있었지만 과거 합격은 큰 영광이었기에 과거 시험을 위한 사학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시대 서원과 서당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공교육 기관인 성균관, 향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육은 서당과 서원 등 사설 학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말 성균관 박사로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치던 길재는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으로 내려가 학원을 차려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이는 훗날 사림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퇴계 이황 등이 설립한 도산서원 등은 엘리트 기숙학원 형태였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해야 양반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던 만큼 과거 시험을 위한 사교육이 성행했다. 소과, 대과, 초시, 복시, 전시 단계별의 학원이 존재하였으며, 상위로 올라갈수록 소수 정예 고액 과외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전시까지 합격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지만, 소과만 합격해도 O생원, O진사로 불리며 지역 사회에서는 꽤나 위세를 떨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위한 학원과 사교육은 전국적으로 성행했다.
1.2. 근대 및 일제강점기
근대 시대에 이르러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기존 과거 시험 중심의 서당 교육을 대체하는 신식교육이 생겨났는데,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학당, 그리고 민족신각자들에 의해 설립된 강습소(講習所) 등이 있다. 이 중 일부는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 형태로 공교육 체계에 흡수되기도 했지만, 강습소의 대다수는 사설 교육기관으로 남았다.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높아지는 교육열에 비해 학교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각 학교는 입시를 통해 학생을 선발했다. 20~30년대 보통학교 경쟁률은 2대 1, 고등보통학교 입시 경쟁률은 10대 1, 전문학교와 대학은 3대 1에서 2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특히 고등보통학교 시험의 경쟁률이 엄청났기 때문에 입시가 대단히 치열했다고 한다.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자 경성제대를 졸업하면 고등문관시험 1차가 면제되거나 학교 교원으로 임용될 수 있는 등 출세의 지름길이 되었고, 엄청난 경쟁률을 보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입시를 위한 사설 학원들이 을지로 일대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재산이 있는 집안들에서는 입시를 위한 과외도 성행하게 되었다.
1.3. 해방 후~1950년대
해방 후 미군정기에는 일제강점기 동안 정식 대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 명문 전문학교들이 미국식 학제를 따른 4년제 종합대학으로 잇따라 인가되면서 대입의 문이 대폭 확대되었다.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각 대학들은 대학별고사(본고사)를 시행했다. 이에 따라 대입학원이 설립되기 시작했다.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꾸준히 증설되었으나, 여전히 중고등학교의 수는 부족했고, 명문중고교에 입학하기 위한 입시 경쟁도 치열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오던 강습소와 입시학원들도 이어졌으며, 특히 학교가 증설되고 교육열이 높아짐에 따라 학원의 숫자 또한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1950년대초에는 일본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안현필이 한국에서 일본의 대형 입시학원에서 영향을 받은 E.M.I 학원이라는 대형 학원을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대형 단과학원이 시작되게 되었다. 인기 강사들을 내세워 수백명에 이르는 대형 강의실에서 강의하는 시스템이 E.M.I 학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편 중학교,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종합반 형식의 학원들도 성행했다.
1.4. 1960년대
1960년대는 본고사 중심의 대입도 대입이지만, 중학교 입시 전쟁이 치열했다. 60년대에는 중학교 입시가 과열되었고,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과 과외가 성업했다. 60년대 당시 중학교 입시는 체감으로는 고교 입시나 대입보다 더 치열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왜냐면 당시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면 거의 명문대로 진학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기중학교에 합격하면 거기서 낙오되지 않는 이상 대부분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했고, 경기고 졸업생 중 절반 이상이 서울대학교에, 나머지 절반도 대부분 연세대학교ㆍ 고려대학교에 합격했다. 따라서 명문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명문대 입학까지 이어지는 구조였기에 중학교 입시가 엄청나게 치열했다.명문중학교에 입시하기 위해 재수하는 13살 재수생들이 급증했는데,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기 직전인 1968년 13살 재수생이 서울시에만도 6천여명이나 존재했던 것으로 추산되었다. 당시 서울과 부산 등을 중심으로 명문 중학교에 합격하기 위해 초등학생 시절부터 밤늦게까지 공부시키는 열성 부모들이 많았다. 고등학생은 물론이고 경제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입주 과외를 구해 과외 교사를 상주시키며 자녀를 공부시켰다. 심지어 현직 교사, 교수들의 과외도 이시절에는 크게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 중 하나가, 학교 교사들이 불법 비밀 과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 교사 연봉이 상당히 박봉이었던 탓도 있어서, 교사들이 몰래 과외를 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명문 중고교가 몰려 있던 서울 종로2가를 중심으로 학원가가 크게 형성되었다. 당시에는 중고생 대상 학원들이 고르게 발달했으며, 종합반 형태, 단과 등 여러 형태의 학원이 존재했다. 특히 1950년대 성문종합영어 이전 우리나라 최고의 영어학습서였던 영어실력기초의 저자인 안현필이 설립한 E.M.I 학원은 50년대 국내 최초의 대형학원이 되었으며, 이후 제일학원, 대일학원, 경복학원, 상록학원, 세종학원 등 많은 유명 대형학원들이 생겼다. 당시 서울의 학원가였던 종로2가 학원가에는 대입학원 못지 않게 중학생 학원이 성업했으며, 당시 서울의 잘나가는 대형학원은 대입학원보다 중학교 입시학원이 더 많았다.
하지만 과도한 교육열로 인해 어린 국민학생들을 지나치게 혹사시킨다는 여론이 높아졌고, 1968년 7월 15일 정부는 서울시를 시작으로 중학교 입시를 폐지한다는 교육개혁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1969년 서울특별시에서 중학교 입시가 폐지된 것을 시작으로 1970년에는 부산직할시· 대구시· 광주시· 대전시 ·인천시 ·전주시로 확대되었고, 1971년에는 중학교 입시가 대한민국 모든 지역에서 폐지되었다.
중학교 입시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중학교 입시 대비 초등학생 학원들은 모두 망했다.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학원들은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으로 전환했다.
1.5. 1970년대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자 고등학교 입시가 과열되었다. 경기고등학교를 비롯한 명문고의 명문대 합격율은 해가 지날수록 높아졌다.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초 경기고 학생들의 절반 이상인 300명 이상이 서울대에 합격했으며, 서울고등학교와 경복고등학교에서 200명 이상, 경남고등학교, 부산고등학교에서 150명 이상, 경북고등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등이 100명 이상의 서울대 합격자를 내면서 명문고에서 서울대 합격자 수의 대부분을 배출하였고, 고교 입시가 갈수록 치열해졌다.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 사교육이 과열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문교부)는 1970년 야간자율학습 전면 실시 지침을 각 고등학교에 내렸다. 이미 60년대부터 명문고를 중심으로 상당수의 고등학교에 실시해오던 야간자율학습이, 이때부터는 사실상 모든 고등학교에서 강제되기 시작했다.
야간자율학습의 전면화로 인해 고등학교 재학생 대상 학원들은 타격을 받았다. 그러자 이때부터 고등학교 학원들의 새벽반, 심야반 운영이 활성화되었다. 새벽 6시부터 강의가 시작되었다. 송성문, 정경진 등 60~70년대 유명한 스타 강사들의 일화를 보면 새벽반 강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서울에는 이미 60년대부터 야간자율학습이 많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60년대부터 새벽반 규모가 컸는데, 70년대에는 더욱 성황을 이루게 된 것. 이런 분위기 때문에 당시 학원가였던 종로는 새벽에 고교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여고생들이 더 많았던 모양. 하지만 당시 새벽반 수업을 들어가서 조는 학생들도 많았던 모양이다. 새벽반 수업은 고교 과정뿐만 아니라 중학생 과정도 많이 개설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새벽 시간에 중학생들이 수강하기도 했지만, 기초가 부족한 고교생들도 중학생 과정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새벽 6시 강의는 교사들도 강의 스킬을 배우기 위해 수강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1974년 결국 서울과 부산에서 고교 평준화 정책이 전면 실시되었고, 이어 다른 대도시로 평준화가 확대 실시되었다. 고교 평준화가 실시되면서 고교 입시 즉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던 학원들은 위축되었고 대입 입시학원은 더욱 대형화되었다.
당시 서울 종로2가의 대형 학원 중에서 고교 입시 즉 중학생을 대상으로 유명했던 상록학원 등이 쇠퇴하였고, 제일학원, 대일학원, 경복학원, 서울학원, 상아탑학원 등 대학 입시, 즉 고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단과 학원들이 크게 성장했다. 또한 재수생을 위한 학원인 종로학원, 대성학원, 정일학원이 엄청나게 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시기였다. 강의 교재는 송성문의 성문종합영어와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최용준의 해법수학이 가장 인기가 높았고, 50~60년대에 대세였던 안현필의 오력일체, 삼위일체는 유행이 지났으나 수요는 있었다고 한다.
한편 1979년 정부는 도심분산 정책의 일환으로 도심에 몰려있는 명문고를 강남으로 이전함과 동시에 도심에 있는 학원들을 4대문 밖으로 이전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종로학원(중림동), 서울학원(서대문), 대일학원(서울역), 제일학원(제기동), 정일학원(용산), 대성학원(노량진) 등이 1호선을 따라 이전했고, 서울 종로2가 학원가는 해체되었다.
1.6. 1980년대
1980년 7월 30일 "7·30교육개혁조치"가 발표되어 재학생의 과외 교습 및 입시 목적의 재학생 학원 수강을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학생의 학교 외 수업이 금지되었다. 다만 재수학원은 학원 금지 조치에 해당하지 않았다. 또한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경감한다는 이유로 일선 학교들의 보충수업 및 야간자율학습도 전면폐지되었다. 물론 일선 학교 현장에서는 특히 사립학교에서는 계속 시행되고 있었던 경우도 많았다.1980년 7·30 조치 발표 직후 재수학원과 미술, 피아노, 태권도 등 예체능 학원외 나머지는 모두 문을 닫았다.[1] 7·30 조치 발표 이후 학원은 재학생들의 환불로 쇄도를 이뤘다. 과외단속 전담반이 운영되었고, 과외단속반에 적발된 학생, 과외교사, 학부모, 해당 학교 등에게는 강력한 제재가 취해졌다. 1980년대 당시 학원 수강이 적발된 재학생은 무기 정학 내지는 퇴학이라는 중징계를 당했고, 그 부모가 공무원인 경우에는 면직을, 교사나 교수인 경우 교직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여기에 명단 공개는 덤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를 경험한 세대들은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었던 것과 엮어 농담삼아 " 전두환 정부 때가 청소년들이 가장 자유를 누렸던 시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조로 말하는 것이기는 하며, 이 당시의 실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단 특수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교복이 폐지되어서 이전에 비해 복장제한은 풀어졌고, 두발규제도 완화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비해 다양한 머리모양을 하고 다닐 수 있었지만[2], 여전히 인권개념이나 청소년들의 문화활동 권장같은 것은 여전히 없었기 때문에 체벌은 여전해서,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을 패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탈선 방지라는 명목으로 롤러장이나 당구장, 오락실, 만화방 , 다방 등 청소년 유해업소 취급을 받은 업소를 급습해서 단속했다. 하술하듯이 야간자율학습에 강제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에, 밤늦어서도 학교에 있어야 했다. 다만 제도적인 민주화가 진행된 후에도 학생들에 대한 처우개선과 여가시간 보장은 교육열에 가로 막혔고, 이 때문에 구습과 악습이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당대 사회문제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당시로써는[3] 진일보 한걸로 받아들여졌을수도 있다
1962년~ 1976년생[4]이 여기에 걸렸으며, 1967년~ 1971년생들은 중고교 6년 동안, 1964년~1971년생은 고등학교 3년 동안 학원을 못 다닌 셈.[5] 특히 여기서 1967년~ 1971년생은 정중앙에 걸렸다. 현재 586세대의 상당수와 90년대 초반 학번들은 최소 고등학교 1년은 학원 없이 공부해야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1962~1976년생인 사람들 가운데는 "과외를 한 적은 있어도 과외를 받은 적은 없었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정부에서 학원을 대대적으로 때려잡을 것을 선언하고 나섰지만 덩치 큰 종합 학원 원장들은- 교육청 관계자들과 사이좋게 술 마시고[6], 서로 형님 아우 하면서 유착되어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탄압 대상은 돈이 없는, 그냥 삼시세끼 밥 겨우 먹는 학원들. 한마디로 영세학원만 죽어났다.
하지만 당시 정부가 뇌물먹고 재수학원만 풀어 준 것이 아니라, 재수학원은 규제하고 싶어도 규제할 수가 없었기에 풀어준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모든 사교육과 학원을 다 때려잡고자 했으나 재수학원만은 규제할 수 없었는데, 왜냐면 재수학원은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고등학교까지 졸업했고, 투표권도 있는 성인에 대해 정부가 규제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80년대에는 재수학원만 허용되었던 것이다. 뇌물을 먹었다면 차라리 재수학원을 때려잡고 재학생 학원을 풀어줬을 것이다. 왜냐면 70년대말 대한민국 최대의 입시학원들은 고등학생 대상의 대일학원, 서울학원 등 단과학원이었고, 재학생 학원 숫자가 재수학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종로학원, 대성학원 등 재수학원은 단과 학원보다 규모가 작았다.
1980년 전면 금지되었던 학교 보충수업 및 야간자율학습은 이후 학습 부진 학생들을 구제한다는 이유로 1982년부터 허용되었다.[7] 이후 대부분의 학교들이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을 부활했는데, 1986년 이미 전국 고교 74.9%가 보충수업을 실시하며, 87.3%가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한다는 통계가 나왔다. 학교들은 과외 금지 조치 때문에 보충수업 실시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1988년 보충수업은 완전히 자율화되어 각 학교가 교육청의 감독 없이 자율적으로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일선 고교들이 앞다투어 보충학습과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했던 것은 아래 나오듯 교사들의 주요 부수입이었기 때문이고, 또한 입시 성과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당시 보충수업과 야자를 억제하려 했던 정부 정책과 달리, 일선에서 보충수업과 야자가 사실상 강제화되자 이는 많은 학생들의 불만과 반발을 불러왔다. 이렇게 현실과 이상이 엇박자가 났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게 전부 전두환 군사정부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며 정권에 불만을 품었다.
1980년 모든 학원과 과외가 금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초기를 제외하면 과외 단속은 차차 느슨해져 할 사람들은 다 알아서 암암리에 과외를 했다. 80년대 재학생 대상 입시 학원은 불법이었지만, 대신 80년대 유행했던 학원이 '주산학원'이었다. 상업고등학교 등 실업계 고등학교들을 위한 실용학원이었기 때문에 입시학원 금지 대상에 적용되지 않았다. 이렇게 실업계를 위한 학원인 주산학원이지만 80년대에 동네에 지금의 보습학원처럼 흔했던 것이 주산학원이었고, 그 대상도 실업계 고등학생이 아니라 초중고교생, 그중에서도 특히 초등학생들이었다. 주산을 통해 암산 능력을 키울 수 있어 수학 실력이 는다고 홍보했고, 학부모들도 수학 실력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자녀들을 주산학원에 보냈다. 실제로 80년대 국딩의 다수가 주산학원에 다녔다. 80년대 초반 서울시내에만 주산학원이 7,000여곳이었다고 한다. 주산학원에서는 형식적으로 주판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산수/수학을 가르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이 경우 단속에 걸리기도 했지만 80년대 후반[8] 규제가 느슨해지면서 생겨난 것이 속셈학원이었다. 주산학원의 진화, 업그레이드판인데, 속셈학원은 주산학원보다 노골적으로 수학을 가르쳤다.[9] 하지만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암산 기술만 가르친다 하여 역시 규제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속셈학원이 보습학원의[10] 전신이기도 한 경우도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소득 수준이 급격히 높아짐에 따라 피아노, 미술, 태권도 등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예체능 학원이 크게 성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주산학원과 마찬가지로 입시학원이 아니었던 웅변학원이 국어학원을 대신하여 인기를 끌었고, 또 80년대말 퍼스널 컴퓨터(PC)가 서울 중산층 가정에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컴퓨터학원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렇게 학교 교과와 직결되지 않은 여러 형태의 학원들이 생겨나 성행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학원이 금지된 상황에서 초등학생들이 가정에서 예습, 복습 등 자율학습을 돕는 가정 학습지가 유행했다. 점차 가정학습지의 방문교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외가 금지된 상황이었기에 처음에 방문교사들은 학습지를 배부하고 가져가는 역할을 했으나, 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채점을 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했다.
또한 학원과 과외가 금지되면서 주로 집이나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자습(자기주도학습)을 해야했기 때문에, 자습을 위한 자습서와 전과류의 참고서가 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까지는 학원 강의를 전제로 하여 설명이 불친절한 성문영어시리즈가 독보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1980년대에는 학원과 과외가 금지되어 자습으로 공부해야 했기에 아주 상세한 설명이 더해진 맨투맨영어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또 사회, 과학 과목의 상식 보충을 위한 백과사전류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80년대 중후반 예체능 학원과 주산학원이 늘면서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는 속셈학원의 간판을 한 산수 등의 교과목 학원까지 성행하면서 초등학생의 학원 순례의 문제가 80년대 중후반에도 있었기도 했다.
[1]
이 때문에
맨투맨영어가 생기게 되었다.
[2]
하지만 이 당시에도 학교장 재량으로 두발 길이를 규정할수 있었기 때문에 남학생은 짧은 스포츠머리, 여학생은 귀밑 5cm같은 길이규제가 있었던 경우가 많았고, 길이규제를 완화한다 해도 학교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이전에는 1cm 이하 반삭이나 양갈레나 땋은 머리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이유 때문에 3cm로 정해도 이전보다 자유롭다는 마인드인 경우가 많았던것이다.
[3]
교복이 폐지된 1983년 경
[4]
여기에는
1977년 1~2월생 및 조기입학한
1977년생도 들어가며, 간혹가다가
1961년 혹은 그 이전 출생자가 끼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들은 대학교 학번으로 치면 81~95학번이었다.
대학입학 학력고사 세대들은 모두 여기에 들어갔고,
대학수학능력시험 세대도 극 초반이라면 여기에 들어가며,
교복 자율화 세대와도 완전히 겹친다. 이들은 대부분
음력으로
생일을 지냈다고 한다.
유재석 (1972년 8월 14일생)과
신현준 (1968년 10월 28일생),
최태성 (1971년 7월 16일생),
전한길 (1970년 8월 21일생) 등이 이런 케이스에 걸렸다.
[5]
가끔
1963년생이 포함되기도 한다.
[6]
심지어 전국 10위권 안의 대형 학원장이
시장인 곳도 있다!
[7]
많은 학교가 사실상으로는 1980년 1981년에도 시행하고 있었긴 했다.
[8]
대략 87년 88년 경
[9]
국어나 영어 사회 자연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10]
1995년 5월 보습학원이 인가가 나기 전에는 속셈학원 간판으로 보습학원식으로 운영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