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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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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3. 고대 말4. 중세5. 근세6. 근대7. 현대

1. 개요

시리아는 토질이 비옥한데다 서쪽으로는 바로 지중해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중동과 바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라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강국들이 1순위로 노리는 타겟이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시리아-팔레스티나(일명 레반트)를 통과해야 했다.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좁은 통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사막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시리아 일대는 로마 때 부터 제국의 재정과 세입을 책임지는 젖줄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치적 독립과는 별개로,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같은 수많은 고대 도시들이 발달했고, 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안티오키아 학파'가 신학계에서 명성을 얻기도 했다. 특히 다마스쿠스는 BC 1100년경에는 이미 아람인들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명성을 날렸다. 또한 우가리트 역시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시리아 내전의 주격전지로 완전 황폐화 된 알레포도 고대로 부터 유럽과 아나톨리아, 나머지 중동을 연결하는 무역 핵심지로서 상업이 번영했으며, 오스만 제국 시절만 하더라도 16~17세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테살로니키, 이즈미르 다음가는 제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로서 오스만령 중동 영토에서 가장 핵심지역이었다. 다른 아랍권과 따로 노는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이 깊은 이집트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아랍권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물리적인 정치적, 경제적 핵심지로서 가장 알토란 같은 땅이 현대 시리아 일대이다.[1]

2. 고대

파일:Ancient Syrians in Egyptian Painting.jpg
고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로 고대부터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으로서 인근의 이집트 문명의 영향도 받아왔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중간 지점이었던 것. 시리아 동부를 중심으로 한 미탄니 왕국 등의 독립국가들이 있었으나, 오랜 기간 정치권 패권과는 거리가 있는 땅이었고, 이집트 신왕국, 히타이트, 아시리아 제국, 신바빌로니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바알과 하다드를 숭배했으며,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신아시리아 제국에서 피지배 민족의 언어였던 아람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면서 아람어 사용 지역은 시리아 일대를 넘어 페니키아, 이스라엘 왕국 및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란을 평정한 이후 알렉산드로스 제국- 셀레우코스 제국 시대를 거치며 안티오크가 건설되고,[2] 그리스인들이 이주해오면서 이 지역은 급속히 헬레니즘화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심지로서 중동과 인접함과 동시에 중동에서 지중해로 진출하는 통로 역할을 하면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로마 공화국에게 정복당하고 이 지역은 로마의 영토로 편입된다. 로마에 편입된 시점부터 로마가 물러간 중세 초 까지 이르는 기간 이 지역은 상술한 지리적 요인으로 로마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이기도 했다. 로마 황제 중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모계가 시리아의 에메사( 홈스)의 유력자 가문 출신이기도 했다. 서기 3세기 군인 황제 시대에는 팔미라 제국이 들어서기도 했다.

3. 고대 말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전에는 기독교가 가장 번창한 지역이기도 했는데 로마 제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번영한 지역에서 기독교가 유행한 것은 이후 로마 제국의 급속한 기독교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그리스계 주민과 아람어를 쓰는 현지인들 사이의 반목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지역의 아람어권 주민들은 로마 제국의 많은 세금을 지불하며 3~5세기 당시 야만인들의 로마 제국 침공이 거듭되던 당시에도 로마 제국의 영토가 보존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지만, 기여도에 걸맞은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단순히 로마인들과 아람어 사용자들간의 문화적 차이와 알력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네스토리우스파가 갈라져나가고 탄압받기 시작하면서 이라크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이 서로 다른 종파로 분리되었으며, 이후 단성론이 시리아에서 유행하면서 로마인들은 정통 칼케톤 교리를, 시리아의 아람어 사용자들은 야코부스파 교리(오늘날 시리아 정교회로 이어진다.)로 분열되었다.

한편 로마 제국은 서방영토를 상실한 이후 게르만족들에게 군사력을 지나치게 의존하는 정책을 탈피하는데 이 과정에서 시리아와 터키 사이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이사우리아인들을 군인으로 애용하였다. 고대 당시에도 이사우리아인들은 인근 지역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러한 경향은 타우루스 산맥 지역 주민들이 이사우리아인에서 쿠르드족으로 변화한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4. 중세


로마 제국 사산 왕조의 이란 제국 간에 전쟁이 장기화되며 양국 모두 약화된 이후 이슬람 제국이 이 지역을 손쉽게 정복한다. 아랍 무슬림 군대는 야르무크 전투에서 로마 군대를 궤멸시키고 레반트의 패권을 장악한다.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이 지역은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가 되고, 아람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주민들은 행정 및 통상에서 아람어 대신 아랍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는 우마이야 왕조로 체계적으로 흡수되었다. 우마이야 왕조가 전복되고 압바스 왕조가 시작하면서 그리스어를 아랍어로 번역하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지원되었는데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은 헬레니즘 문화에 밝았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된 고대 의학, 과학 및 철학 서적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스어를 아랍어로 번역하는 국가적 사업이 진척을 이룸과 동시에 아람어, 기독교의 입지는 점차 약화되었고, 하룬 알 라시드, 알 마문의 시대 이후 지방 군벌왕조들이 이슬람 제국 각지에 들어선다.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시절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던 관료제가 약화되면서 무슬림 통치자들은 비무슬림 신민들에 대한 지즈야를 늘리는 일이 많았고 이 과정에서 시리아 주민 상당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9세기와 10세기를 기준으로 남부를 중심으로 툴룬 왕조, 이크시드 왕조, 북부의 알레포를 중심으로 한 함단 왕조 군벌 정권이 존재했으나 이렇게 분열된 군벌정권들은 외부의 침략에 취약한 편이었다. 하마단 왕조는 10세기 로마 제국의 침공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서기 996년에는 로마 제국이 한때나마 시리아 전역을 석권하기에 이른다. 시리아 남부에는 북아프리카에서 발흥한 이스마일파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서 이크시드 왕조를 전복하였다.

로마 제국이 다시 장악했던 시리아 영토는 셀주크 제국이 다시 재정복한다. 셀주크인들이 시리아로 유입된 계기는 아바스 왕조의 부침과 관련이 있다. 압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의 옛 수도 다마스쿠스 대신 이라크의 중세 신도시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다. 압바스 왕조의 행정력이 약화된 이후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 시아파 부와이흐 왕조 군벌들의 통제를 받는 상황이 되자, 수니파들은 위기의식을 느꼈고 이 기회를 노리고 셀주크 제국이 바그다드에서 부와이흐 왕조를 몰아낸다. 바그다드의 칼리파를 등에 업은 튀르크인들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동로마 제국을 밀어부치고 이 과정에서 시리아에는 셀주크계 소국들이 들어섰다.

튀르크인들의 거듭된 공격에 로마 제국은 십자군을 초청하는데 이를 계기로 시리아 일대는 십자군 전쟁의 전장터가 되었다. 한 때는 시리아 각지에 여러 십자군 공국들이 세워졌으나 백여년 간의 지속적인 전쟁 끝에 결국 이집트를 근거지로 맘루크 왕조가 레반트 일대의 십자군 세력을 전멸시키고 시리아는 다시 이슬람권의 영토가 되었다. 맘루크 왕조는 몽골 제국의 침략마저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저지하면서 시리아에서 수니파 무슬림들의 영향력을 확고하게 다진다.

본래 이슬람권에서 신학이 가장 발달한 지역은 중앙아시아 트란스옥시아나와 호라산 지역과 바그다드였다. 해당 지역들이 몽골 제국 군대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이후 이슬람 신학의 중심지는 샴 지역(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일대)으로 옮겨간다. 시리아의 이슬람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아랍인으로 당시 아랍인들을 지배하던 튀르크계 군벌들이 수피 이슬람을 공격하고, 아랍어 이외에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진정한 무슬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며 중세 아랍 민족주의의 기틀을 다졌다.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시절 아랍인이라는 개념은 그저 단순하게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페르시아인과 반대되는 개념이었다면 이븐 타이미야 이후 아랍인이라는 개념은 순수 이슬람 신앙과 가까이 접근한, 이슬람권에서 아랍어의 우월성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순니파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타프시르( 꾸란 주해본)로 평가받는 주해서를 서술한 사람이자, 이슬람권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 중 한 명인 이븐 카시르가 바로 이븐 타이미야의 제자였다.

5. 근세

오스만 제국 셀림 1세는 1516년 맘루크 왕조의 병력을 알레포 근처에서 벌어진 마르즈 다비끄 전투에서 격파하고 시리아를 점령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까지 내려가서 맘루크 왕조의 신종을 받아냈다. 이후 시리아 일대는 오스만 제국과 이란의 사파비 왕조 사이의 격전지가 되었다. 맘루크들이 아랍인들을 2등 시민으로 차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인들은 아랍인들을 2등 신민으로 차별하였는데, 오스만 제국의 정치와 군사는 엄연히 튀르크인들이나 데브시르메 제도를 통해 징집되고 교육받은 발칸반도계들이, 행정 용어로는 페르시아어가, 경제는 아르메니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 장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느끼던 불만은 이후 와하브파 운동 등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시리아 일대는 바그다드가 파괴된 이후 이슬람 신학의 중심지였으며 동시에 무슬림들이 메카로 성지순례를 가는 중요한 길목에 해당했다. 이 지역에서 불거진 반튀르크 감정은 오늘날 아랍권 전반의 반 터키 감정으로도 이어졌다. 다만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는게 해당 지역은 엄연히 아랍어권 지역이었고 지역 토후들은 일부 쿠르드계를 제외하면 상당수가 아랍인이었다. 튀르크인들이 일방적으로 폭정을 휘둘렀다는 식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주제로 아랍 민족주의 입장에서 확대해석된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오스만 제국은 실리주의적 입장에서 아랍인 순니파 무슬림들만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고 무슬림들 외에도 지역 내 그리스 정교회 및 마론파, 아르메니아인들과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밀레트 제도를 통해 자치권을 주며 통제하였다. 레반트 지역에서 무역을 하던 베네치아인 상인들은 무슬림들보다는 아랍계 기독교인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의 교류를 선호하였다. 종종 예니체리들이 시리아-레바논의 부유한 기독교인 상인들을 구타하고 재산을 강탈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살인과 강도강간을 동반하는 전시 약탈보다는 조폭들의 보호비 갈취에 가까웠다. 대신 예니체리들은 이 지역의 상업망이 베두인들의 파괴적인 약탈을 막는 역할도 해냈다.

6. 근대

이슬람 모더니즘 학자 무함마드 압두의 제자 라시드 리다 와하브파 신학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살라프파 신학의 시조가 되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이슬람 모더니즘이 와하브파 신학과 상극이지만 19세기 당시에는 이슬람 모더니즘과 와하브파가 힘을 합쳐서 수피즘에 대항하는 형세였기 때문에 이러한 조화가 순조롭게 가능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아랍 무슬림 지식인들은 서구의 우월성을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는데, 이를 계기로 이집트에서는 이슬람 개혁과 서구 문물의 도입을 주장하는 새로운 신학 사조가 등장했다. 시리아의 경우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리아와 인접한 팔레스티나 예루살렘 일대에는 유대인들과 러시아인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유럽계 이민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오스만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이 시리아에서 직접 개신교와 가톨릭을 공개적으로 선교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이러한 선교가 레바논, 시리아 내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19세기 들어서는 기독교 선교 대상이 무슬림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위기의식을 느낀 시리아의 이슬람 신학자들은 라시드 리다를 중심으로 뭉쳐서 이슬람 잡지를 출간하고 서구 기독교 선교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라시드 리다는 와하브파 신학에 호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와하브파 신학을 맹신하지는 않았고, 대신 기독교인들과 친교관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아랍인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힘을 합쳐서 서구에 대항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은 한편으로는 20세기 미셸 아플라크 아랍 민족주의, 아랍 사회주의로도 이어졌다. 정교회 신도였던 아플라크는 무함마드는 무슬림들만 존경해서는 안되며 아랍계 기독교인들도 아랍 민족들을 각성시킨 위대한 인물로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동의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을 아우르는 민족 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바트당 이념의 창설자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라시드 리다의 이슬람 신학은 반서구주의 성향 및 와하브파에서 영향을 받은 신학 체계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 창설자 하산 알 반나 이슬람주의 신학으로도 연결되었다. 하산 알 반나가 창립한 무슬림 형제단은 시리아에도 지부가 생겼다. 후술된 바와 같이 바트당과 무슬림 형제단 사이의 갈등은 오늘날 시리아 내전의 기원이 되었다.

7. 현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1920년에 시리아 아랍 왕국을 선언하였으나 불과 몇 개월 뒤 마이살룬 전투 패배로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프랑스는 시리아 내 다수 무슬림들을 통제할 전략으로 순니파 무슬림들과 사이가 나빴던 소수파 알라위파들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시리아의 정치 지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레바논과 더불어 프랑스 위임통치령 레반트 지역으로 삼고 군정통치를 하였으며 시리아는 1936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프랑스는 승인을 거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비시 프랑스 치하에 들어갔다. 1941년 6월, 자유 프랑스- 영국 연합군이 시리아와 레바논으로 쳐들어가 1941년 7월 시리아를 점령한다. 그해 다시 시리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무시했다. 그러다 1944년에 프랑스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하였고, 1946년 프랑스는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공식적으로 독립이 승인된다.
한편 프랑스에서 갓 독립한 시기인 1947년,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즉 바트당이 다마스쿠스에서 창설되었으나 독립 이후에도 중심 권력을 잡지는 못하였고 수많은 정치세력들 중 하나로 머물렀다. 이후 약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요사태나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가 이어지다가 1958년 이집트와 통합하여 아랍 연합 공화국을 결성하였지만 시리아 측과 이집트 측의 견해차가 계속 커져 1961년 인민당의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도로 분리하였다. 이후 1963년 바트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드디어 권력을 장악하였고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1958년에는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대농장을 해체하고 토지소유 상한을 설정했다. 1961년에는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재분배했다. 1966년에는 사회주의 농업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집단농장을 구성하는 한편 목화 생산을 국가가 독점했다. 1970년 바트당 내 알라위파 출신의 하페즈 알 아사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시리아에서는 바트당 일당체제와 알라위파 중심의 공고한 군사독재 체제가 자리 잡았으며, 이를 기반으로 2000년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를 이어 시리아의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바트당 정권의 주요 지지자들은 상당수가 종교적 소수자에 속하는 알라위파, 이스마일파 및 현지 아랍계 기독교인이었다. 바트당 간부들은 종교적 소수자집단을 통합하여 새로운 파벌을 형성함으로써 종래 시리아의 기득권층이던 순니파 율법학자 계급을 몰아냈으며, 바트당 간부들은 군장교, 정부 관리, 집단 농장 등의 요직을 독점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순니파 상당수가 이집트에서 기원한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하여 정부와 갈등이 커졌고, 1980년대 말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타격을 받자 무슬림 형제단의 세력이 급팽창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2011년3월 아랍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받은 시민 저항이 격화되어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다. 시리아의 내전 상태는 발발 이후 10년이 넘었는데도 계속 진행중이다.

7.1. 시리아 내전

2011년 아랍권을 뒤엎은 민중혁명 여파가 시리아에도 들이닥쳤다. 3월 15일 일부 도시에서 시작된 시민 저항은 3월 24일까지 몇몇 시위가 추가로 벌어져 진압 과정에 5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때만 해도 시리아 민주화 운동은 아랍의 봄 가운데서 아주 작은 일이라서 이집트 튀니지처럼 될 가능성은 여전히 적어보였다.

튀니지에서 벤 알리가 축출될 때 이집트에서 호스니 무바라크가 내쫓기고, 이집트나 튀니지에 비해 독재자의 지지율이 높던 리비아조차 뒤집힐 것으로 여겼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시리아는 세 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 시리아의 알라위파나 기독교 세력 등 소수 종파들이 아사드를 지지한다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3] 때문에 시리아 같은 경우에 세 나라처럼 될 지, 어찌 될 지 전망하기 어려웠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이런 문제에 부채질하며 시리아의 고민으로 떠오른 게 이라크 난민을 받아주면서 겪는 사회적 문제였다. 이미 100만에 가까운 엄청난 난민을 받아주었더니만 이들이 저임금으로 일하면서 자국민의 실업률 증가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먹는 것 하나는 그리 걱정 없던 튀니지도 이런 실업 문제가 시발점이 되어 폭발했다. 리비아조차도 자원의 힘 덕분이긴 해도 일단 국민들이 굶주리진 않았었다. 그러니 시리아의 이라크 난민 문제 역시 그 이상으로 심각했다.

게다가 굶주림과 실업은 종교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시리아 내 기독교인들은 아사드가 무너지면 이라크와 같은 참혹한 신세가 될 게 뻔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렵다 해도 아사드를 지지하는 점은 여전하다. 2012년 7월 18일자 한국어판 및 영어판 뉴스위크 지를 보면 다마스쿠스를 가서 취재했는데, 알라위파 신도 및 기독교 신도들은 정말로 아사드를 굳게 지지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들은 반군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으면 가게를 불태우고 약탈한다면서 폭도라고 이를 갈고, '민병대를 조직해서라도 아사드를 지키겠다. 시리아에서 쫓겨나면 우린 파멸' 이라고 강조했다. 반군에게 공격받아 팔과 다리를 잃은 기독교 군인이 '이 상태라도 반군이 온다면 자폭해서라도 그들을 죽이고 아사드를 지키겠다'고 당당하게 인터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2013년 이후 다에시의 출현으로 뒤바뀐다.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면서 시리아가 100만여 명의 이라크 난민들을 걱정하던 게 되려 주변 나라들 전부가 1000만 명의 시리아 난민들을 걱정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4]

파일:external/l.yimg.com/04432918cbdc961f200f6a7067005c15.jpg [5]

2012년에 들어서도 사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 결국 7월 19일에는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반군과 교전이 벌여지고 국가보안기구 건물에 폭탄 테러가 발생, 국방장관이 살해되는 등 소말리아 못지않은 헬게이트가 열렸다. 정부는 반군의 공격을 격퇴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수천 명이 죽고 반군의 공격으로 국방장관이 살해되는 상황은 확실히 정부군이 수세에 몰렸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 10월 들어서도 상황은 여전하다. 이미 리비아나 다름없는, 아니 오히려 리비아보다 더한 상황이지만 러시아 중국의 거부권 행사로 리비아와 같은 국제 사회라고 쓰고 서방이라 읽는다의 군사 개입 가능성은 요원한 상태.

현실적으로는 세력 균형이 존재하기에 이대로 느슨한 영역으로 분리된 채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리비아처럼 서방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리비아 전쟁 이후 리비아 제2도시 벵가지에서 반(反) 서방, 반 미국 테러가 발생해 미국 대사가 사망하는 사건과 같이 미국이 우려하는 사태가 현실화되었기에 서방과 미국이 몸을 사릴 수밖에 없고, 시리아의 정치 지형상 패하면 종파의 멸망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라 리비아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리비아의 경우 카다피의 부족인 카다파 부족은 카다피가 없어도 생존 가능할 정도의 세력 있는 부족이지만,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는 알라위파와 기독교도 등 친아사드 정파의 경우 정권이 붕괴되면 시리아를 탈출하지 않는 한 생존을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리고 세속주의적인 온건 수니파들 역시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으로부터 코란에서 말하는 ' 위선자'라는 이름으로 학살될 게 뻔하다. 그러니 아무리 싫어도 부족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지지하는 것이다.

결국 아사드 지지 세력, 특히 알라위파 정교회는 살기 위해서 수니파 무슬림 집단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며, 그 절박함은 외계인의 침략을 받은 인류와 같은 급일 정도다. 그 결과 사망자만 무려 14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게다가 시리아 정부군(아사드측)에서 생화학무기를 사용하여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내전 초기에는 티토 대통령 사후 연방구성국가들간 내전과 종교, 민족 집단간 폭력, 학살 등으로 인해 6개의 슬라브인 소국들로 공중분해된 동유럽의 유고슬라비아처럼 종교와 종파, 민족별로 사분오열될 가능성도 높다고 전망되었다. 실질적으로 이스라엘 등 서방측에서는 이미 2002년 무렵부터 시리아가 붕괴될 경우, 아사드 일족을 중심으로 한 알라위파 및 소수 종파들 vs 수니파로 국가가 분열될 가능성이 있고, 그 경우 알라위파를 도와서 시리아 내부의 분리 독립을 막고 영토 통합과 안정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들도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불과 10여 년만에 현실화 될 것이라고는 당사자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한때 미국은 '플랜B'로 시리아를 3개 국가로 분리하는 방안도 고려했으나, 2015년 들어 러시아의 적극적 지원으로 시리아 정부군이 승기를 잡아가면서 시리아 분할론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2015년 현재, 시리아는 정부군, 반군, 극단주의자들이 난립하면서 20만 명이 넘게 사망하고 인구의 절반이 난민이 되는 등, 그야말로 옆나라 이라크와 아래 먼나라 예멘, 팔레스타인과 더불어서 중동의 헬게이트가 되고 말았다.[6]

다만 시리아도 리비아 이라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에시 토벌과 축출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 또한 심해서 반군 vs 정부군의 상황은 어떻게 해결될 지 알 수 없는 상황.[7]

그런데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어오던 것이 2016년 말이 되면서 알레포를 시리아군이 완전 장악하며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시리아 내전도 좀 더 종전에 가까워졌다. 현재처럼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양상에서는 전쟁이 끝나기 힘들지만, 강대국들이 한쪽만 지원한다면 결국 전쟁은 한쪽의 화력 우세로 끝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7년 1월 들어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에서 정부군과 반군 간 평화회담이 개최 중이다. 러시아는 쿠르드족 연방제 자치, 7년 단임제, 양원제, '대통령은 무슬림이어야 한다'는 조항 삭제( #)를 골자로 한 헌법 초안을 제시했으나 터키와 반군은 반대.

9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시리아 내전 종식을 논의하기 위한 시리아 헌법위원회가 2019년 10월 30일에 발족했다. # 그리고 시리아 헌법위원회는 11월 1일에 위원회의 행동 강령 및 헌법 기안을 위한 소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

2020년 7월 19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아사드 대통령이 이끄는 바트당이 반군 세력을 제외한 총선에서 압승했다. #

터키군이 통제하는 시리아 북동부에서 차량 폭탄 테러로 10여명이 사망했다고 시리아 내전 감시단체가 전했다. #

8월 24일 시리아 헌법위원회의 소위원회가 회의를 재개했다. #

내전으로 인해 경제도 어려워지면서 쓰레기 매립장에서 음식을 찾거나 생필품을 찾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


[1] 바그다드가 있는 이라크일대는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철저히 황폐화 된 다음 이후 14~19세기란 긴 세월을 맘루크 왕조,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같은 인근 열강들의 각축장 변경 지대에 있었기에 중세 시절의 그 영화가 시리아 일대 만큼 안정적으로 근세와 근대로 연결되지 못했다 [2] 고대 당시에는 안티오크가 시리아의 중심지였지만 오늘날 안타키야는 터키 영토에 해당한다. [3] 튀니지와 리비아는 애초에 인구 거의 전체가 수니파 무슬림이고, 이집트의 경우 콥트교도들이 꽤 많이 있었지만 특별히 정부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4] 게다가 지금 이라크 역시 이라크 내전으로 난민이 80~300만이 생겨서... 다만 2017년 이후에는 이라크군이 IS들을 박멸하고 내전이 종식되면서 어느 정도 정국 상황이 안정화된 상태다. [5] 사진에 보이는 노란 택시는 기아 프라이드 베타다. 중동 지역에서 인기가 많아 흔히 볼 수 있는 한국 차 중 하나다. 오죽하면 Grand Theft Auto IV 차 패치 파일 중 오래된 기아차가 보인다면 90% 확률로 번호판이 페르시아어다. 또한 차량 제작자가 이란인인 것으로 보인다. 이란에서는 아예 생산을 지금까지도(!) 하기 때문. [6] 그래도 이라크는 시리아나 예멘, 팔레스타인보다는 조금 낫다. 오랜 종파 간 갈등과 혼란으로 극단주의에 대한 배척도 이뤄지고 있고, 최근 IS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는 데다 집권층인 다수 시아파가 소수 수니파에 대한 차별 정책을 줄여나가는 등, 어느 정도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라크 내전 당시 IS가 점령한 수니파 밀집 지대에서 IS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수니파 이라크인들이 이라크군이 IS들을 무찌르고 들어오자 이라크군의 진주를 지지한 일도 있었다. [7] 물론 다에시가 2015년에 설쳤을 때는 잠시 반군과 정부군이 손을 잡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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