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디 셰링엄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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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넘 홋스퍼 FC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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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캠벨 (1998~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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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셰링엄 (2001~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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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미 레드냅 (2003~2004) |
테디 셰링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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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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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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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셰링엄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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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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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셰링엄 Teddy Sheringh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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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드워드 폴 "테디" 셰링엄 Edward Paul "Teddy" Sheringh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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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6년
4월 2일 ([age(1966-04-02)]세) 런던 월섬포레스트 히검스파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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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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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85cm / 80kg | |
포지션 |
축구 선수 (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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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선수 |
레이턴스톤 & 일퍼드 (1982~1983 / 유스) 밀월 FC (1983~1991) → 올더숏 타운 FC (1985 / 임대) → 유르고덴스 IF 풋볼 (1985 / 임대) 노팅엄 포레스트 FC (1991~1992) 토트넘 홋스퍼 FC (1992~1997)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7~2001) 토트넘 홋스퍼 FC (2001~2003) 포츠머스 FC (2003~2004)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004~2007) 콜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7~2008) 베케넘 타운 FC (2009) |
감독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014 / 코치) 스티버니지 FC (2015~2016) 아틀레티코 데 콜카타 (2017~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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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51경기 11골 ( 잉글랜드 / 1993~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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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 특히 맨유팬들에게는 1999년 트레블의 영웅으로 기억된다.2. 클럽 경력
2.1. 밀월 FC
쉐링엄은 그당시 이스미언 리그에서 활동하던 레이턴스톤 & 일퍼드와 밀월 유소년팀과의 경기에서 밀월 스카우터의 눈에 들어, 16살에 밀월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하였다. 계약을 하고 난 후, 그는 처음엔 연습생으로 지내오다 1984년 6월에 본머스와의 경기에서 두 번째 출장 만에 골을 기록하였다. 1985년에 앨더샷과 스웨덴의 유르고덴스로 임대되어 갔다 온 뒤부터, 그는 밀월의 주요 선수가 되어 1980년대 후반을 팀 동료인 토니 캐스카리노(Tony Cascarino)와 함께 투톱을 이루었다. 그는 네 시즌 (1986-87, 1987-88, 1988-89, 1990-91)동안 클럽의 최다 득점 선수였다.1987-88 시즌에 2부 리그에서 우승을 하며 그 당시 잉글랜드 축구의 최상위 리그였던 풋볼 리그 1부로 최초로 승격하였다. 쉐링엄은 1988-89 시즌 1부리그에서의 첫 홈경기에서 첫 골을 넣었다. 밀월은 1988년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리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쉐링엄 (15골)과 캐스카리노 (15골)은 득점 순위 상위 10명 안에 들어있었다. 밀월은 1988-89 시즌을 10위로 끝마쳤다.
그러나 밀월의 마력은 다음 시즌까지 지속되지 못했다. 1989-90 시즌에 밀월은 최하위로 시즌을 끝마쳤다. 쉐링엄은 부상으로 10경기를 뛰지 못했지만, 12골로 또한번 밀월 내 최다 득점 선수가 되었다. 1990-91 시즌에 밀월은 리그 5위를 기록하며 풋볼 리그 1부로 올라가기 위한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준결승전에서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에 패하며 승격에는 실패하였다. 쉐링엄은 네번의 해트트릭을 포함하여 리그에서 33골, 총 37골을 득점하며 리그 최다 득점자가 되면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밀월이 1부 리그로의 승격에 실패하면서 쉐링엄의 이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2.2. 노팅엄 포레스트 FC
25살이던 쉐링엄은 1991년 7월에 이적료 2백만 파운드에 노팅엄 포레스트로 이적하였다. 그는 첫 시즌에 노팅엄 포레스트가 8위로 마칠 수 있게 도왔고, 풋볼 리그 컵 결승에 올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했지만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의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쉐링엄은 1992년 8월에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노팅엄 포레스트의 첫 번째 프리미어리그 득점을 기록하였다(이 골은 스카이 스포츠를 통해 라이브로 중계된 최초의 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 그는 210만 파운드에 토트넘 홋스퍼로 이적하였다. 노팅엄 포레스트는 공격에서의 쉐링엄의 빈자리를 메우는 데 실패하여 결국 1992-93 시즌을 최하위인 22위로 마치며 강등되었다.2.3. 토트넘 홋스퍼 FC
셰링엄이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시기로, 토트넘에서의 첫 시즌인 1992-93 시즌 22골로(포레스트 시절 1골 포함) EPL 원년 득점왕에 등극하기도 했다. 1994-95 시즌 토트넘에서 셰링엄의 파트너로 뛰던 위르겐 클린스만은 그와 함께 뛴 선수 중 가장 지능적인 선수로 셰링엄을 꼽기도 했다. 셰링엄은 1990년대 중반에 토트넘 팬들사이에서 매우 유명한 선수였고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훌륭한 공격수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1996-97 시즌이 끝났을 때의 쉐링엄은 31살의 나이로 축구 선수로 15년 동안 활약해 오면서 무관의 늪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이러한 갈증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는데 크게 작용하는 요인이 된다.허나, 케인 이전까지 클린스만과 함께 PL 출번 이후엔 토트넘 역사에서도 최고의 스트라이커들로 불리었고 이 시기에 셰링엄이 워낙 잘했다 보니 토트넘 팬들에게 이미지도 좋고 살아있는 전설 취급을 받는다. 때문에 후에 맨유에서의 공로가 워낙 커서 그렇지 토트넘 레전드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토트넘 팬들 다수가 셰링엄을 매우 좋아 한다.
2.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이후 199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여 에릭 칸토나가 은퇴한 빈자리를 메웠다. 1999년 캄프 누의 기적[1]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당시 교체로 투입되어 0-1로 끌려가던 후반전 추가시간에 라이언 긱스의 빗맞은 슛을 다이렉트로 때려넣어 천금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리고 2분만에 데이비드 베컴의 코너킥을 셰링엄이 헤더로 떨궜고, 이것이 올레 군나르 솔샤르의 결승골의 어시스트가 되면서 맨유의 트레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2]2.5. 토트넘 홋스퍼 FC 2기
2000-01 시즌이 끝나고 난 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4년 계약이 종료되었다. 2001년에 뤼트 판 니스텔로이가 영입되면서 쉐링엄은 더한 경쟁에 처하게 되었다. 셰링엄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1년 계약을 거절하고, 글렌 호들이 지휘봉을 맡은 토트넘 홋스퍼로 다시 돌아왔다.돌아온 첫 시즌에 토트넘은 최근 6년간 가장 높은 순위인 9위를 기록하였고, 풋볼 리그 컵에서는 결승전에서 블랙번 로버스에 패하여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2002-03 시즌 역시 중위권인 10위로 시즌을 마감하였고, 셰링엄은 두 시즌 동안 총 80경기를 토트넘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출전하였고, 26골을 기록하였다.
2.6. 포츠머스 FC
2002-03 시즌이 끝난 뒤, 토트넘은 쉐링엄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고, 프리미어리그에 처음 승격한 포츠머스로 이적하였다. 쉐링엄은 단 한 시즌만을 계약하였다. 쉐링엄은 38경기에 출장하여 10골을 득점하였다.2.7.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쉐링엄은 챔피언십으로 강등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고, 첫 시즌에 20골을 기록하면서 챔피언십의 리그 득점 순위 3위에 올랐다. 쉐링엄은 노장의 나이임에도 올해의 챔피언십 선수상을 받았고, 팀을 플레이오프 승리로 이끌면서 다시 프리미어리그로의 승격에 기여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쉐링엄의 1년 계약이 종료되고 난 뒤, 웨스트햄과 다시 계약을 연장하였고, 프리미어리그에서 또 다시 활동하게 되었다. 2006년 4월 2일, 찰튼 애슬레틱과의 후반전에 출장하면서 40대에 프리미어리그에서 활동한 선수 대열에 끼게 되었다. 2006년 5월 13일에는 40세 41일로 FA컵 결승전에 출장한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또한 FA컵 결승전에서 득점을 한 최고령 선수로도 등재되었다. 그리고 2006년 8월 19일에는 40세 139일로 리그 최고령 출장선수로 기록되었다. 2006년 12월 26일에 포츠머스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최고령 득점선수 기록을 경신하면서 2 대 1 승리를 이끌었다. 12월 30일에는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 출장하면서 40세 270일로 최고령 출장선수 기록을 경신하였다.
2.8. 콜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웨스트햄에서 방출된 후, 쉐링엄은 2007년 7월에 콜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계약하였고, 제이미 큐레튼의 8번을 배정받았다. 콜체스터에서의 첫 경기는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원정 경기였고, 1주 후에는 반즐리와의 홈 경기에서 첫 득점을 하였다. 코번트리 시티와의 경기에서의 퇴장으로 세 경기 출장 정지 이후에,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원정 경기에서 2:1 승리에 기여하는 득점을 하였다.콜체스터에 있는 동안, 쉐링엄은 풋볼 리그의 네 디비전을 통틀어 최고령 선수였고, 지금은 리그 700경기 이상을 뛴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2007-08 시즌이 종료되면서 콜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챔피언십에서 강등되면서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그의 18년 선수생활동안의 첫 강등경험이었다.
그리고 2007년 6월자 서훈명단(2007 Birthday Honours)에 올라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받았다. 관보링크
3. 국가대표 경력
소속팀과 달리 대표팀에서의 발자취는 그리 돋보이지 않았다. 경력 초기에는 주로 2부리그에서 뛰던 경력으로 인해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다가 1993년, 토트넘에서 수위급 공격수로 거듭나자 27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대표팀에 소집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중용 받기 시작하면서 앨런 시어러와 일명 'SAS('Shearer and Sheringham') 라인'을 결성, 자국에서 열린 UEFA 유로 1996에서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었다.이후, 글렌 호들이 새롭게 감독으로 부임한 뒤에도 계속해서 대표팀에 소집되었으나 신성 마이클 오언의 등장으로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고,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오언에 밀려 교체 자원으로 뛰었다.
2년 뒤 치러진 UEFA 유로 2000에는 참가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대표팀 은퇴가 예상되었지만, 시어러의 이른 은퇴 및 새 감독인 스벤 예란 에릭손이 그를 조커로 중용하면서 한일 월드컵 예선 기간동안 활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베컴의 라스트 미닛 프리킥 골로 유명한 그리스와의 예선 최종전에서 귀중한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앞서 말했던 베컴의 극장골에 묻혔지만.
그리고 2001-02 시즌, 토트넘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2002 한일 월드컵에 참가하여 조커로 활약한 뒤 대회가 끝나고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4.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공격 코치를 맡았다. 이후 2015년 5월 21일 풋볼 리그 2 소속 스티브니지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6년 2월 2일 성적부진으로 경질되었다.
2017년 인도리그 아틀레티코 데 콜카타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지만 다음 해에 바로 경질당했다.
5. 플레이 스타일
흔히 머리나 발만 쓰는 포처형 공격수였다는 인식이 많이 퍼져있지만 셰링엄은 실제론 연계와 득점 모두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전형적인 섀도우 스트라이커였으며, 앨런 시어러와 같은 전형적인 골게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오히려 메수트 외질처럼 10번 플레이메이커로도 분류될 정도. 맨유 이적 당시 에릭 칸토나의 창조적인 공격수 역할을 그대로 이어 받았고, 현대 축구를 기준으로는 같은 토트넘 핫스퍼 출신 후배인 해리 케인과 유사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92-93시즌 22골로 EPL 득점왕을 하는 등 득점도 능숙했지만 셰링엄의 장기는 공격수로선 탁월한 시야와 짧은 패스 능력이었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주로 2선 공격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위르겐 클린스만 등 골잡이 유형의 공격 파트너와 항상 좋은 조합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메수트 외질이나 후이 코스타같은 공격형 플레이메이커들과는 다르게 탄탄한 상체 힘을 바탕으로 한 몸싸움에도 일가견이 있어 주 플레이는 아래로 깊숙이 내려와 창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미드필드와 공격의 가교 역할을 하거나 박스안 등딱으로 어그로를 받아주며 원톱에게 공을 넘겨주는 등 현대 축구에 갖다놓아도 상당히 잘 통했을 플레이였다.주요 장기가 신체 능력이 아니라 이러한 축구 센스에 있었기 때문에 매우 긴 시간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으며, 99년 트레블에서 보였던 것처럼 벤치에서 출발해도 1인분을 해줄 수 있었다.
매우 늦은 나이까지도 계속 현역 생활을 하였고 이미 맨유로 이적할 당시 나이가 많은 상태였으나, 그만큼 자신이 경험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맨유를 떠나기 직전까지도 나오기만 하면 좋은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을 정도로 기복이 없었다.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 밀월 FC (1983~1991)
- 풋볼 리그 트로피: 1982-83
- 풋볼 리그 디비전 2: 1987-88
- 유르고덴스 IF 풋볼 (1985)
- 디비전 2: 1985
- 노팅엄 포레스트 FC (1991~1992)
- 풀 멤버스컵: 1991-92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7~2001)
- 프리미어 리그: 1998-99, 1999-00, 2000-01
- FA컵: 1998-99
- FA 채리티 실드: 1997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8-99
- 인터컨티넨탈컵: 1999
6.1.2. 개인 수상
-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1992-93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2000년 10월, 2003년 8월
- PFA 올해의 선수: 2000-01
- PFA 올해의 팀: 2000-01
- FWA 올해의 선수: 2000-01
- FA컵 결승전 MOTM: 1999
- 밀월 올해의 선수: 1990-91
- 토트넘 홋스퍼 올해의 선수: 1994-95
- 맷 버스비 올해의 선수: 2000-01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올해의 선수: 2004-05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9
6.1.3. 클럽 기록
<rowcolor=#0b1c56> 시즌 | 클럽 | 리그 | FA컵 | 리그 컵 | 대륙대회 | 기타 | 총합 | |||||||
<rowcolor=#fff> 부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83–84 | 밀월 | 디비전 3 | 7 | 1 | 0 | 0 | 0 | 0 | - | - | 3 | 1 | 10 | 2 |
1984–85 | 밀월 | 디비전 3 | 0 | 0 | 0 | 0 | 1 | 0 | - | - | - | - | 1 | 0 |
1984–85 | 앨더샷 (임대) | 디비전 4 | 5 | 0 | - | - | - | - | - | - | 1 | 0 | 6 | 0 |
1985 | 유르고덴스 (임대) | 디비전 2 노라 | 21 | 13 | - | - | - | - | - | - | - | - | 21 | 13 |
1985–86 | 밀월 | 디비전 2 | 18 | 4 | 0 | 0 | 0 | 0 | - | - | 0 | 0 | 18 | 4 |
1986–87 | 밀월 | 디비전 2 | 42 | 13 | 3 | 0 | 3 | 2 | - | - | 2 | 1 | 50 | 16 |
1987–88 | 밀월 | 디비전 2 | 43 | 22 | 1 | 0 | 4 | 0 | - | - | 3 | 2 | 51 | 24 |
1988–89 | 밀월 | 디비전 1 | 33 | 11 | 2 | 1 | 3 | 3 | - | - | 2 | 0 | 40 | 15 |
1989–90 | 밀월 | 디비전 1 | 31 | 9 | 3 | 2 | 3 | 1 | - | - | 0 | 0 | 37 | 12 |
1990–91 | 밀월 | 디비전 2 | 46 | 33 | 3 | 2 | 3 | 2 | - | - | 3 | 1 | 55 | 38 |
1991–92 | 노팅엄 포레스트 | 디비전 1 | 39 | 13 | 4 | 2 | 10 | 5 | - | - | 6 | 2 | 59 | 22 |
1992–93 | 노팅엄 포레스트 | 프리미어 리그 | 3 | 1 | - | - | - | - | - | - | - | - | 3 | 1 |
1992–93 | 토트넘 홋스퍼 | 프리미어 리그 | 38 | 21 | 5 | 4 | 4 | 3 | - | - | - | - | 47 | 28 |
1992–93 | 토트넘 홋스퍼 | 프리미어 리그 | 38 | 21 | 5 | 4 | 4 | 3 | - | - | - | - | 47 | 28 |
1993–94 | 토트넘 홋스퍼 | 프리미어 리그 | 19 | 13 | 0 | 0 | 2 | 2 | - | - | - | - | 21 | 15 |
1994–95 | 토트넘 홋스퍼 | 프리미어 리그 | 42 | 18 | 6 | 4 | 2 | 1 | - | - | - | - | 50 | 23 |
1995–96 | 토트넘 홋스퍼 | 프리미어 리그 | 38 | 16 | 6 | 5 | 3 | 3 | 0 | 0 | - | - | 47 | 24 |
1996–97 | 토트넘 홋스퍼 | 프리미어 리그 | 29 | 7 | 0 | 0 | 3 | 1 | - | - | - | - | 32 | 8 |
1997–98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31 | 9 | 3 | 3 | - | - | 7 | 2 | 1 | 0 | 42 | 14 |
1998–99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17 | 2 | 4 | 1 | 1 | 1 | 4 | 1 | 1 | 0 | 27 | 5 |
1999–2000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27 | 5 | - | - | 0 | 0 | 9 | 1 | 5 | 0 | 41 | 6 |
2000–01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29 | 15 | 2 | 1 | 0 | 0 | 11 | 5 | 1 | 0 | 43 | 21 |
2001–02 | 토트넘 홋스퍼 | 프리미어 리그 | 34 | 10 | 2 | 1 | 6 | 2 | - | - | - | - | 42 | 13 |
2002–03 | 토트넘 홋스퍼 | 프리미어 리그 | 36 | 12 | 1 | 0 | 1 | 1 | - | - | - | - | 38 | 13 |
2003–04 | 포츠머스 | 프리미어 리그 | 32 | 9 | 3 | 1 | 3 | 0 | - | - | - | - | 38 | 10 |
2004–05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 챔피언십 | 33 | 20 | 2 | 1 | 1 | 0 | - | 0 | 0 | 36 | 21 | |
2005–06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26 | 6 | 4 | 1 | 1 | 0 | - | - | - | - | 31 | 7 |
2006–07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 프리미어 리그 | 17 | 2 | 1 | 0 | 1 | 0 | 1 | 0 | - | - | 20 | 2 |
2007–08 | 콜체스터 유나이티드 | 챔피언십 | 19 | 3 | 1 | 1 | 0 | 0 | - | - | - | - | 20 | 4 |
6.1.4. 국가대표 기록
<rowcolor=#e31e31> 소속 대표팀 | 연도 | 경기 | 득점 |
잉글랜드 | 1993 | 2 | 0 |
1994 | 3 | 0 | |
1995 | 7 | 2 | |
1996 | 9 | 3 | |
1997 | 8 | 3 | |
1998 | 8 | 1 | |
1999 | 1 | 0 | |
2000 | 1 | 0 | |
2001 | 1 | 0 | |
2002 | 8 | 0 | |
<rowcolor=#000> 통산 | 51 | 11 |
6.2. 감독
6.2.1. 통산 기록
<rowcolor=#e31e31> 구단 | 연도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스티버니지 FC | 2015.05.21 ~ 2016.02.01 | 33 | 7 | 10 | 16 | 21.2% |
아틀레티코 데 콜카타 | 2017.07.14 ~ 2018.01.24 | 10 | 3 | 3 | 4 | 30.0% |
통산 | 43 | 10 | 13 | 20 | 23.3% |
6.3. 수훈
- 대영제국 훈장 5등급 (MBE): 2007
7. 여담
- 방송으로 중계되는 잉글랜드 리그 경기에서 최초로 득점한 선수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 PL 최고령 해트트릭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37세 146일이 되는 2003년 8월 26일 볼튼과의 홈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했다. 참고로 최고령 득점 기록도 본인의 40세 268일 기록이다.
- 그의 아들 찰리 셰링엄[3] 도 축구선수였다. 토트넘 유스 출신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하부 리그를 전전하며 아버지에 비해 큰 족적을 남기지 못 했다.
- 영국판 복면가왕에 출연했다. 나무분장을 하고 Westlife의 Evergreen을 열창했으나 탈락.
- 포커 경력을 가지고 있다.
- 국내 온라인 게임계에서는 참으로 얄궂은 운명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피파 온라인 3 시절에는 소위 ' 급식엄'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자본이 부족한 학생들과 서민들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저렴하면서 성능도 챙길 수 있는 최고의 월드레전드 공격수였기 때문. 하지만 후속작 피파 온라인 4로 넘어오며 실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낮은 능력치를 배정받아 역으로 아무도 쓰지 않는 공격수로 추락하며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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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 경기만을 한정하여 ‘캄프 누의 기적’으로 불려졌으나,
2016-17 시즌에 또 다른 캄프 누의 기적으로 유명한 경기가 생기게 되며 년도로 나눠 부르게 되었다.
[2]
FA컵 결승에서도 선제골,
스콜스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면서 두 대회의 결승에서 2골 2도움을 기록하였다.
[3]
1988년생
분류
- 1966년 출생
- 1983년 데뷔
- 2009년 은퇴
- 월섬포레스트 출신 인물
- 잉글랜드의 남자 축구 선수
- 토트넘 홋스퍼 FC 명예의 전당 헌액자
- 밀월 FC/은퇴, 이적
- 올더숏 타운 FC/은퇴, 이적
- 유르고덴스 IF/은퇴, 이적
- 노팅엄 포레스트 FC/은퇴, 이적
- 토트넘 홋스퍼 FC/은퇴, 이적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포츠머스 FC/은퇴, 이적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콜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잉글랜드의 남자 축구 코치
- 잉글랜드의 남자 축구 감독
- 스티버니지 FC/역대 감독
- 모훈 바간 슈퍼 자이언트/역대 감독
- 잉글랜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선수
- 토트넘 홋스퍼 FC/역대 주장
- 잉글랜드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6 참가 선수
- P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FW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 대영제국 훈장 5등급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