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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르담 (영어: Kardam, 불가리아어: Кардам) |
출생 | 미상 |
사망 | 803년 이전 |
직위 | 불가리아 제1제국 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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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1제국 13대 칸.2. 생애
777년 텔레리그 칸이 동로마 제국에 망명한 뒤 칸의 직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791년이다. 그해 4월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는 스트루마 강에 침입하여 동로마군을 섬멸한 불가리아군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하지만 사전에 적이 쳐들어올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카르담은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 프로바트 마을에서 군대를 사열하였고, 적군이 근방에 이르자 역공을 가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패퇴하였고, 불가리아군은 적의 기지를 점령했다. 하지만 더 밀고 들어가지는 않고 본국으로 귀환했다.792년 7월 콘스탄티노스 6세는 앞선 패배를 보복하고자 또다시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동로마 제국 국경 근처에 도착했다. 그는 마르켈라 요새(현재 카르노바트 인근)를 건설하여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다. 카르담은 7월 20일 그의 군대와 함께 인근 고지를 점거한 후 동로마군의 상황을 정찰하였다. 이때 점성술사 판크라티우스가 별자리를 보니 불가리아군을 섬멸하는 미래가 보였다고 주장하자, 황제는 이에 고무되어 주둔지를 떠나 불가리아군이 점거한 고지로 진격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은 역공을 가해 동로마군을 격파하였고, 판크라티우스를 포함한 많은 장군들이 전사했다. 카르담은 황제의 천막과 수많은 물자를 점거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황제는 불가리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796년, 콘스탄티노스 6세가 공물을 버티지 않자, 카르담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서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트라키아 전역을 파괴하고 금문으로 가겠다."라고 위협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6세는 금 대신 똥물을 보내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공물을 보낸다. 당신은 늙었지만, 나는 당신이 평안히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르켈라에 가서 당신을 만나겠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그 후 콘스탄티노스 6세는 불가리아로 출정했지만, 아드리아노폴리스 북쪽 숲에 불가리아군과 대면하자 주둔지를 세워둔 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카르담이 17일 동안 어서 회전을 벌이자고 촉구했지만, 황제는 주둔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동안 양측은 평화 협상을 이어갔고, 792년의 조약을 갱신하기로 합의했다. 불가리아에 대한 거듭된 원정 실패는 콘스탄티노스 6세의 위상을 실추시켰고, 결국 797년 어머니 이리니가 정변을 일으켜 아들을 붙잡아 실명형에 처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796년 이후로는 기록상에 전혀 등장하지 않으나, 크룸이 등장하는 803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