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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0:34:51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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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 로마 제국 카이사르
Gaius Julius Verus Maximus |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파일: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jpg
제호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Verus Maximus Caesar)
생몰 년도 217년 - 238년
카이사르 재위 기간 236년 ~ 238년
부모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아버지)
카이킬리아 파울리나(어머니)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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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카이사르. 종종 막시무스 카이사르(Maximus Caesar)라고 부른다. 236년 아버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에게 카이사르로 지명되었지만 238년 아버지와 함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2. 행적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카이킬리아 파울리나의 아들로, 217년 태어났다. 속주 자유민에서 보조병, 로마군 경력으로 로마 시민권자가 된 아버지와 달리,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고, 어머니는 날 때부터 대대로 로마 시민권자였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신체가 강건하고 크면서도 외모가 무척 준수했다. 신체 조건이 좋고, 키가 컸음에도 몸의 비율이 좋고 얼굴이 아름답게 잘 생긴 까닭에, 귀부인과 귀족 여성들이 음탕한 감정을 품으면서 그와 관계를 맺고 아이를 갖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의 아버지와는 달리 성품이 온화하고 다정해 주변인들을 잘 대했다고 한다. 또 잘생기고, 귀족 가문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 많은 추파를 받음에도 겸손하고 올곧았다. 옷을 잘 입고, 몸의 비율이 좋아, 이 점에서도 평가가 좋았다. 따라서 이 고대기록에서는 이때 로마인 사이에서 이런 평까지 나올 정도로 젊은 막시무스의 평가가 좋았다고 한다.
"젊은 막시무스는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써서 세상의 그 어떤 여성도 그보다 더 우아하지 않았다."

막시무스 카이사르는 아버지가 잔인하고 특정 계급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반대로 앉아 오만한 자존심을 내보인 것과 달리, 그들에게 확실히 존경의 표시를 내보였다. 물론, 그 역시 원로원 귀족들 앞에서 존경의 표시를 내보이며, 연장자를 우대하고 일어섦에도 그들과 반대로 앉아 오만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대체로 이런 평가는 아버지 막시미누스의 평가가 최악인 까닭에 나온 이야기였다.

그는 이런 모습과 함께, 조용했고, 떠들썩하게 사생활을 보내는 것 대신 평온한 삶을 매우 좋아했다. 술은 마시지 않았고, 술을 입에 대더라도 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활동적이었고, 사냥을 확실히 좋아해 멧돼지, 오리, 두루미 사냥을 즐겼고, 자신이 잡은 사냥감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절제력이 있었다. 라틴어 그리스어에 숙달했고, 그 수준이 높았는데, 어릴 적부터 웅변, 문법, 수사학에 관해 적절한 교육을 받아 높은 수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게 아버지보다 교육도 잘 받고, 로마 지배층 출신다운 좋은 삶을 위한 훈련이 몸에 배어 있다고 평가받았다. 따라서 이 점을 높이 평가한 원로원 귀족들과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는 그에게 늘 좋은 감정을 품었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역시 235년 암살당하기 전까지 막시무스를 좋게 생각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복직할 때 막시미누스 일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어린 막시무스에게 호의를 표하면서 손수 귀족 연회에 걸맞는 좋은 옷을 선물로 제공했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고대 기록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는 여동생 테오클리아와 그를 결혼시키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결혼 계획은 당사자 테오클리아가 만족했음에도,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에게 "막시미누스는 너무 멍청하며 우리와 격이 다른데, 왜 그런 인간의 아들에게 시집 보내느냐"라고 설득해 취소됐고, 실제 결혼 과정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는 막시미누스 쪽에게 양해를 구한 뒤, 테오클리아의 혼처를 다시 구해 오래된 로마 귀족의 자제로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학에 능통한 메살라와 결혼시켰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테오클리아가 알렉산데르의 이복누이로 마마이아의 의붓딸이었던 점에서 근대 이후부터는 야사로 취급받고 있다.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236년 아들을 카이사르에 지명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이때 막시미누스는 자신과 달리 좋은 교육을 받았고, 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자이며 로마 지배층이었던 아들 막시무스를 자랑스러워 했기 때문에, 이 점을 원로원에게 호소했다. 이때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에게 아들 막시무스가 잘 생기고, 젊고, 좋은 교육을 받았음을 밝혔는데, 원로원 역시 막시무스 카이사르가 황제가 된다면 이전의 어떤 황제들보다 매력 넘치고 잘생긴 황제가 될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236년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증오함에도, 막시무스가 아버지와 달리 교양 있고, 원로원 기준으로 좋은 배경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며, 막시무스에게 카이사르 칭호와 함께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지위까지 내려줬다.

카이사르,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칭호를 모두 받게 됐지만, 막시무스 카이사르는 실질적인 권력은 거의 갖지 못했고, 아버지 막시미누스는 그를 공동황제나 황태자에 어울린 어떤 경력도 내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막시미누스는 확실히 아들 막시무스를 자랑스러워 했고, 원로원에게 아들의 인기가 있음을 인지해, 모든 사람에게 아들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강조하고자, 금과 은으로 만든 흉갑, 방패, 칼,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 투구를 내려 착용하게 하고, 로마 중심 거리를 행진하도록 했다. 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예에 따라 금과 은을 입혀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닌 전례 그대로 막시무스 카이사르가 행동하도록 명했다.

이런 모습은 막시무스 카이사르의 인지도를 끌어올리고, 그가 아버지 막시미누스와 달리 확실히 교양 있고, 로마 엘리트다운 면모가 많았다는 개인적 매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막시무스 카이사르를 귀족적이고, 아버지와 달리 야만족이 아니라는 확실한 인식을 심어 줬을 뿐, 그가 공동황제의 위엄 아래 권좌를 공유할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신병 교육 대대장 출신의 전형적인 군인 황제였고, 인기가 군대 외에는 최악인 까닭에, 일반 장병들에게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런 군사적 능력이 없던 막시무스 카이사르는 프라이토리아니 외의 일반 장병에게는 인기가 높지 않았다.

238년 아프리카 총독 고르디아누스 1세와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가 황제를 자칭하며 막시미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원로원이 이를 지지하면서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다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누미디아 방면군 사령관 카펠리아누스에게 피살되자, 푸피에누스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세우고 고르디아누스 1세의 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를 카이사르로 세워 막시미누스에 대항했다.

당시 도나우 전선에 있던 막시미누스는 이 소식에 격분해 군대를 동원하여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러던 중 아퀼레이아가 성문을 걸고 저항하자, 막시미누스는 아퀼레이아를 포위한 뒤 4주 동안 공성전을 벌였지만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그에게 식량과 전쟁 물자를 보내주는 도시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보급품이 바닥나면서 병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막시미누스가 아퀼레이아에 얶매인 채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못하자, 그를 따라왔던 병사들은 반감을 품었다. 그들은 아퀼레이아와 북이탈리아 로마인들이 푸피에누스와 그를 따른 근위대, 투항한 막시미누스 진영 병사들에게 떡갈나무와 올리브 나무 잎사귀와 나뭇가지를 선물하고, 꽃잎을 행군하는 곳에 뿌리고, 응원을 해주고 격려하면서, 자신들을 야만족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고 저주를 퍼붓고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보고 깊은 절망과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238년 4월, 제2 파르티카 군단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막시미누스와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근위대장 아눌리누스 등을 살해했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전투가 중단된 정오에 병사들이 황제의 천막에 접근하자 막시미누스가 그들과 이야기하려 했지만 병사들이 입을 열지 않고 즉시 그 자리에서 막시미누스와 아들을 죽였다고 한다. 막시미누스 부자와 근위대장 아눌리누스의 수급은 라벤나에서 푸피에누스 편 장병들에게 전달되었다. 아퀼레이아 시민들은 수급들을 확인한 뒤 성문을 활짝 열어 칼을 맞댄 옛 막시미누스 병사들을 위로한 뒤 굶주린 병사들에게 식량을 나눠줬다. 이후, 두 사람의 머리는 로마로 보내져, 포로 로마노 광장에 전시됐다가, 온갖 저주를 받고,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것은 잔인한 아버지에게 합당하지만 선한 아들에게는 부당했던 막시미누스들의 최후였다. 그들의 죽음은 속주민들에게 큰 기쁨을, 야만인들 사이에 깊은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생전 아버지와 달리 인기가 형편없었음에도 증오를 받지 않았고, 원로원에게 막시미누스가 국가의 적으로 공인된 상황에서도 미움은 받지 않아, 교육을 받고 사교적인 청년이며, 그를 로마로 보냈다면 원로원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합했다는 의견도 있어, 그래도 동정은 받았다. 따라서 저주 가득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주장에서도, 해석에 따라서는 마치 두 사람 모두 개들에게 시신이 먹이가 된 것 같아도, 막시무스 카이사르는 아버지와 싸잡아 욕을 먹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의 육신은 최악의 수모는 면했다. 아버지 막시미누스는 사후 동상, 흉상이 파괴되고, 머리는 강에 던져지고, 머리 잘린 시신은 절단난 뒤 개들에게 먹이로 던져진 다음 저주 가득한 비문이 내려졌는데, 그는 아버지와 나란히 머리가 로마 시내 한 가운데에 잠시 전시될 뿐 이후 머리와 시신은 머리와 시신이 강에 던져질 뿐 최악의 수모는 겪지 않았다. 최악의 범죄자, 폭군으로 찍혀 온갖 수모를 겪은 아버지와 비교해, 동상이 철거되고, 그래도 시신이 수습될 기회라도 제공된 점을 보면 직접적인 기록말살형이나 탄핵은 받지 않고, 조용히 잊혀지는 선에서 마무리된 셈이다.

후일 외조부, 외삼촌이자 양부[1]의 일에 원한을 품은 고르디아누스 3세가 즉위한 뒤, 보복 차원에서 아버지 막시미누스와 함께 두 명의 막시미누스로 묶여 저주 가득한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1]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적은 저자들과 덱스토르 등의 황실 사가들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여동생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사생아로 몰래 낳은 아들이 고르디아누스 3세이며, 진실일 확률이 높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