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 | ||
다섯 황제의 해 | 소 페르티낙스 | |||
세베루스 왕조 |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 |||
군인 황제 시대 |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 발레리아누스 2세 | 살로니누스 | 소 빅토리누스 | 테트리쿠스 2세 | |||
사두정치 | 크리스푸스 | 리키니우스 2세 | |||
콘스탄티누스 왕조 | 달마티우스 | 한니발리아누스 | 마그누스 데켄티우스 |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 |||
서로마 제국 | 팔라디우스 | |||
레오 왕조 | 파트리키우스 | |||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 게르마누스 | |||
이라클리오스 왕조 | 마르티노스 | 테르벨 | |||
이사브리아 왕조 | 니키포로스 | 흐리스토포로스 | |||
아모리아 왕조 | 알렉시오스 모셀레 | 바르다스 | |||
마케도니아 왕조 | 대 바르다스 포카스 | |||
두카스 왕조 | 요안니스 두카스 | 기오르기 2세 | |||
콤니노스 왕조 |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 | 소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 요안니스 로게리오스 달라시노스 | 벨러 3세 | 몬페라토의 레니에르 | |||
앙겔로스 왕조 |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 콘라드 1세 | 마누일 마우로조미스 | |||
라스카리스 왕조 | 레온 가브라스 | |||
팔레올로고스 왕조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스트라티고폴로스 | 루지에로 데 플로르 |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 흐렐야 | |||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
}}}}}}}}}}}}}}} |
<colbgcolor=#8b0000> 로마 제국 카이사르 Valerian II | 발레리아누스 2세 |
|
제호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 (Publius Licinius Cornelius Valerianus Caesar) |
생몰 년도 | 미상 - 258년 |
카이사르 재위 기간 | 256년 ~ 258년 |
부모 |
발레리아누스(조부) 갈리에누스(아버지) 코르넬리아 살로니나(어머니) |
형제 |
살로니누스(동생) 마리니아누스(동생)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 256년 조부 발레리아누스와 아버지 갈리에누스에 의해 카이사르에 지명되어 도나우 전선으로 보내졌으나 258년 의문사했다.2. 행적
갈리에누스와 코르넬리아 살로니나의 장남으로, 전체 이름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아누스(Publius Licinius Cornelius Valerianus)다. 보통은 발레리아누스 2세라고 하지만, 일부는 할아버지, 숙부 소 발레리아누스와 구분코자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아누스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전형적인 로마 귀족 가문의 후계자로 나고 자란 사람이다. 태어난 뒤, 가문의 수장인 할아버지 발레리아누스의 전체 이름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는데, 이 이름 중 발레리아누스라는 이름은 할아버지 발레리아누스 1세가 손수 붙여준 이름이었다. 즉, 태어날 때부터 리키니우스 가문의 후계자로 선포된 셈이다. 다만, 그는 외가 성씨를 함께 붙여 사용하지 않은 할아버지와 달리 성씨에 해당된 노멘 '리키니우스' 뒤에는 외가의 성씨인 코르넬리우스가 덧붙여졌다. 그의 외가는 로마 건국과 함께 시작된 로마 최고 명문 귀족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일족이 아니라, 그리스 혈통의 폰투스 일대 귀족 집안으로 노멘으로 코르넬리우스를 사용한 그리스계 로마 귀족 집안이다. 남동생으로 살로니누스와 마리니아누스가 있었다.
255년 8월, 발레리아누스는 라인 전선 방면 로마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해 아이밀리아누스를 꺾고 황위에 오른 뒤 장남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이때 발레리아누스는 장남 갈리에누스의 큰아들로 장손인 발레리아누스 2세를 홍보하면서, 새로운 왕조를 강화하고 홍보함과 함께 군대의 충성심을 보장할 목적으로 아버지, 삼촌과 함께 일찌감치 후원을 받았다.
발레리아누스는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 동방을 맡았고,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이탈리아, 아프리카 등 서방을 맡았는데, 이때 어린 발레리아누스 2세는 조부, 아버지의 결정으로 256년 정식으로 카이사르에 지명된 직후, 15~16세의 어린 나이에 다누비우스 전선 전체의 관리자이자 형식상의 다누비우스 전체 사령관이 됐다. 고고학자들은 발칸 반도에서 그가 도로와 교량 재건 작업을 진두지휘한 사실을 밝힌 비문을 여러 개 발견했는데, 이 비문에는 그가 프린캡스 유벤투티스(Princeps iuventutis)라고 명시됐고, 리키니우스 왕조의 영속을 기원하고자 그의 초상화를 실은 주화가 다량 발견되었다. 따라서 3세기의 위기와 최근 리키니우스 왕조로 명명된 이 시기를 연구한 학자들은 발레리아누스 1세가 아들 갈리에누스, 장손 발레리아누스 2세에게 각자의 영역을 공동 황제이자 협동황제 개념에서 세분화하면서 각자의 영향 아래 제국을 방어했을 것이라고 추정 중이다.
258년을 끝으로 발레리아누스 2세의 주화 생산이 돌연 중단되었는데, 아마도 이때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사료에서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명시하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258~260년 사이에 발칸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잉게누우스가 그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그가 잉게누우스에게 살해됐다고 해석하는 것은 과대해석이라는 지적이 많다. 발레리아누스 2세는 사후 신격화됐고, 그 직위를 동생 살로니누스가 승계 형태로 평화롭게 이어 받은 것이 확인된다. 또한 이집트에서 발굴된 2개의 파피루스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 2세는 258년 여름에 사망했고, 8월에 조부 발레리아누스, 아버지 갈리에누스와 함께 카이사르 발레리아누스라고 언급된 것을 끝으로 나오지 않아, 그가 병으로 요절했을 확률이 높다. 또 다른 파피루스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258년 2월 15일 당시를 적은 이 파피루스에는 그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위엄있다는 찬사가 적혀 있다. 역사가 데이비드 포터는 발레리아누스 2세와 잉게누우스의 반란은 큰 관련이 없으며, 260년 발레리아누스가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를 상대로 에데사 전투를 치르다가 사로잡히면서 로마 세계가 대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