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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4:32:18

카지미에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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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스트 왕조 프르셰미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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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 국왕
카지미에시 3세 비엘키
Kazimierz III Wielki
파일:Leopold_Loeffler_-_Portret_Kazimierza_Wielkiego_1864.jpg
별칭 대왕 (Wielki), 농민왕
출생 1310년 4월 30일
폴란드 왕국 코발(Kowal)
사망 1370년 11월 5일 (향년 60세)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재위 폴란드 왕국의 왕
1333년 3월 2일 ~ 1370년 11월 5일
배우자 리투아니아의 알도나 (1325년 결혼 / 1339년 사망)
헤센의 아델하이트 (1341년 결혼 / 1356년 무효화)
크리스티나 로키자나 (1356년 결혼 / 136?년 무효화)
야드비가 자간스카 (1365년 결혼)
자녀 엘주비에타, 쿠네군다, 안나, 쿠네군다, 야드비가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
어머니 야드비가 볼레스와부브나
형제 쿠네군다, 엘주비에타[1]
1. 개요2. 생애
2.1. 국왕이 되기 이전의 행적2.2. 카지미에시 대왕
2.2.1. 집권 당시의 상황2.2.2. 외치
2.2.2.1. 보헤미아 왕국과의 타협2.2.2.2. 튜튼 기사단과의 타협2.2.2.3.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의 동맹2.2.2.4. 동방 원정2.2.2.5. 마조프셰 귀속
2.2.3. 내치
2.2.3.1. 왕권 강화 정책2.2.3.2. 군사 개혁2.2.3.3. 경제 진흥2.2.3.4. 문화 진흥2.2.3.5. 유대인 우대 정책
2.3. 최후
3. 가족
3.1. 왕비와 자녀3.2. 내연녀와 사생아
4. 여담5. 현대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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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는 나무로 만들어진 폴란드를 발견하고, 그것을 벽돌로 남겨두었다.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유명한 폴란드 왕국의 연대기>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국왕. 폴란드 역사상 유일하게 "Wielki"(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최고의 군주로 일컬어지는 명군이다.

2. 생애

2.1. 국왕이 되기 이전의 행적

1310년 4월 30일 폴란드 왕국의 코발에서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와 대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의 딸인 칼리시의 야드비가 사이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그보다 먼저 태어난 두 형 스테판과 브와디스와프는 긱긱 1306년과 1312년에 요절했기에, 그는 2살 때부터 브와디스와프 1세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누이로 쿠네군다, 엘즈비에타, 야드비가가 있었다. 카지미에시 왕자는 바벨에서 폴란드 외교관 스피시미르 렐리비타(Spycimir Leliwita), 뛰어난 지식인이자 그니에즈노 대주교인 보고리아의 야로스와프,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10살 때 누이 엘즈비에타가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결혼한 뒤, 그는 헝가리의 장치, 문화 중심지였던 부더 궁정에 자주 방문하여 헝가리의 고위급 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315년, 카지미에시는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 유타와 약혼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이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써 폴란드 왕위를 노리는 얀을 달래려 애썼다. 그러나 얀은 폴란드 왕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유지하기로 마음먹고, 1318년 또는 1319년에 딸의 약혼을 파기했다. 그후 카지미에시는 1331년 또는 1322년에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3세[2]의 딸 아나와 약혼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가 1322년 9월 28일 독일왕 루트비히 4세를 상대로 제위를 쟁취하려 했다가 묄도르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세력이 약해지자, 이 약혼 역시 파기되었다. 1325년, 브와디스와프 1세는 튜튼 기사단 보헤미아 왕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동방의 강대국인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해 10월 28일,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의 딸인 알도나와 결혼했다. 알도나는 그와 결혼한 뒤 세례를 받고 이름을 안나로 개명했다.

1329년, 브와디스와프 1세는 보헤미아 왕국과 튜튼 기사단의 침략에 맞서려면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고 아들 카지미에시를 헝가리로 파견했다. 카지미에시는 군사적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는 카로이 로베르트 국왕의 궁정에 머무는 동안 카로이의 아내인 폴란드의 엘즈비에타의 시녀 클라라 자(Clara Záh)에게 외설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클라라 자의 아버지 펠리키안 자(Felician Záh)는 딸이 모욕당하는 와중에 왕족들이 만류하지 않는 것에 격분했고,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1330년 4월 17일, 펠리키안 자는 왕궁 식당에 칼을 들고 난입하여 카로이와 왕비의 오른손에 상처를 입힌 뒤 카로이의 두 아들 러요시와 언드라시를 죽이려 했다가 왕실 근위대에게 사살되었다. 클라라를 제외한 펠리키안 자의 아이들은 고문을 당해 죽었고, 클라라는 입술과 손가락 여덟 개가 잘린 뒤 말에 묶인 채 여러 마을에서 조리돌림 당했다.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자 가문 인사들은 폴란드로 망명했다고 전해진다.

1331년 5월 26일, 브와디스와프 1세는 대폴란드, 시에라츠, 쿠야이의 총독으로 아들 카지미에시를 선임했다. 이에 대폴란드 행정관이자 쿠야비의 스타로스타 게네랄니(Starosta generalny, 특정 카운티에서 사법권과 군사권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관리)을 맡고 있던 사모툴리의 빈센티는 브와디스와프 1세가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카지미에시 왕자를 그 자리에 앉혔다고 여기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과 접촉해 자신이 왕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폴란드와 브란덴부르크간의 전쟁이 터졌을 때 브란덴부르크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일설에 따르면, 그해 7월에 튜튼 기사단에게 대폴란드 공국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카지미에시가 피즈드리에서 소수의 경비병과 함께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튜튼 기사단은 7월 27일 피즈드리를 기습 공격했고, 카지미에시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1331년 중순, 디트리히 폰 알텐부르크가 지휘하는 튜튼 기사단은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와 함께 폴란드를 협공해 칼리슈 성벽 아래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해 중반기에 원정을 개시한 튜튼 기사단은 피즈드리 마을 인근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그니에즈노 일대를 약탈했다. 그러나 당초 합의했던 것과는 달리, 얀 루쳄부르스키는 시비드니차 공작 볼코 2세의 저항에 부딪쳐 전진하지 못하다가 그워구프 공작 프셰미수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워구프로 방향을 돌려 그해 10월 2일에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홀로 폴란드군과 대적하게 된 튜튼 기사단은 칼리슈를 한동안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이 쉽지 않자 쿠야비 정복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카지미에시는 1331년 9월 23~24일 칼리슈의 코난으로 진군한 튜튼 기사단을 상대로 대적하는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와 함께 했다. 전투는 결판이 나지 않았지만, 브와디스와프는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 후 튜튼 기사단이 브제시치 쿠야프스키로 진격하자, 브와디스와프와 카지미에시 부자는 5,000명의 폴란드군을 이끌고 튜튼 기사단의 후방 경비대를 라지예우프에서 급습해 격파하고 디트리히 폰 알텐부르크를 생포했다. 1331년 9월 27일, 후방 경비대가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튜튼 기사단 주력 부대가 아군을 구하기 위해 방향을 돌려 진군하던 중 프워프체 마을 인근에서 브와디스와프, 카지미에시 부자가 이끄는 폴란드군과 격돌했다.

처음에는 폴란드 군대가 우위를 점해 고위급 기사들을 사살하거나 포획했고, 튜튼 기사 일부는 달아났다. 그러나 황혼 직전에 플라우엔의 하인리히 로이스가 이끄는 튜튼 선봉 부대가 전장에 도착해 반격을 가하면서, 폴란드군은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고 디트리히 폰 알텐부르크를 비롯한 기사단 포로 대부분이 구출되었다. 이후 어둠이 깔리자, 브와디스와프는 전장에서 철수했고, 튜튼 기사단은 가장 귀중한 폴란드 포로 56명만 살려주고 나머지는 처형했다. 튜튼 기사단의 독일 전령이자 연대기 작가인 마르쿠브르크의 비간트에 따르면, 전투 후 사망자 수를 헤아린 결과 양측에서 4,187명이 전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1332년 봄, 비스와 강 너머로 철수했던 튜튼 기사단이 전력을 재정비한 뒤 오토 폰 루터베르크의 지휘하에 재차 쿠야비로 진격해 현지군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고 4월 20일에 쿠야비의 수도인 브레스트를 함락했다. 뒤이어 이노브로츠아프 마저 튜튼 기사단에게 넘어가자, 그니에프코프 공작 카지미에시 3세는 적에게 넘어가기 전에 그니에프코프 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시켰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이에 보복하기 위해 튜튼 기사단의 거점인 헤움노로 군대를 파견했다. 일부 기록은 카지미에시가 원정군을 직접 이끌었다고 하며, 다른 기록에는 그저 동행하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정은 튜튼 기사단과 화해하라는 교황청의 압력에 따라 중단되었고, 양자간의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후 폴란드군은 그워구프 공국을 공격해 코스시안을 공략했다. 15세기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에 따르면, 그는 외아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쟁을 이끌지 말라는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코스시안 원정을 직접 이끌었으며, 기습 공격을 통해 공략한 뒤 100명에 달하는 포로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1333년 3월 2일, 폴란드 왕국과 튜튼 기사단은 그해 성신 강림 축일(5월 23일)까지 이어지는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날 브와디스와프 1세는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브와디스와프는 죽기 전에 아들에게 튜튼 기사단에게 빼앗긴 그단스크 포메제, 도브진, 쿠야이를 어떻게든 되찾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카지미에시는 폴란드 기사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대관식 날짜가 정해졌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 야드비가가 뜻밖에도 반발했다. 그녀는 며느리인 안나가 폴란드 왕비로서 대관식을 치르는 것을 반대했다. 폴란드에서는 왕비가 오직 한 명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지미에시가 간절히 설득하자, 야드비가는 마음을 바꿔 대관식 거행을 받아들이고 스타리송치에 있는 성 클라라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1333년 4월 25일 크라쿠프에서 그니에즈노의 야니스와프 대주교의 주관하에 카지미에시와 안나 부부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카지미에시 3세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2.2. 카지미에시 대왕

2.2.1. 집권 당시의 상황

1333년 카지미에시가 2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때, 폴란드 왕국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 폴란드는 대폴란드와 소폴란드로 구성되었고, 시에라츠와 웽치차는 카지미에시의 두 조카인 프셰미수와 블라디슬라프가 왕의 가신으로서 각각 맡아서 별도로 통치하고 있었다. 두 조카는 카지미에시에게 충실했지만, 카지미에시의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순종할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았다. 여기에 본래 폴란드 왕국의 영토었던 쿠야비, 도브진, 그단스크 포모제는 튜튼 기사단에게 점령되었고, 실롱스크와 마조프셰의 공작들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역시 폴란드 왕국에 적대적이었다. 게다가 튜튼 기사단과의 휴전은 1333년 5월 23일에 만료되기 때문에, 그들이 더욱 치고 들어가서 폴란드의 영토를 갉아 먹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튜튼 기사단, 보헤미아 왕국에 맞서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어서 폴란드가 그나마 이 정도라도 유지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로부터 "이교도들과 손잡고 기독교도들을 해치는 사악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브와디스와프 1세 통치 말기에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와 개인적인 불화가 발생하는 바람에 동맹이 끊어졌다.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은 신실한 가톨릭 왕국이었고 카지미에시 3세의 여동생 엘즈비에타가 카로이 로베르트의 왕비이자 러요시 1세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피아스트 왕조에 지극히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헝가리-크로아티아는 폴란드 외에도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던 반면에, 동맹 세력이 없는 폴란드는 헝가리-크로아티아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다른 나라들은 1300년 바츨라프 2세 그니에즈노에서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거행한 이래로 보헤미아 국왕이 폴란드 국왕을 겸하는 것을 대체로 받아들였고, 크라쿠프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브와디스와프 1세와 카지미에시를 '크라쿠프의 왕'으로 취급했다.

내부 상황 역시 매우 좋지 않았다.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의 유언에 따라 폴란드가 볼레스와프 3세의 자식들에게 분할된 이래 200여 년간 폴란드 전체의 대공 및 국왕 직위를 놓고 피아스트 왕조간의 내전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대공과 국왕이 피살당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 폴란드 귀족과 성직자들은 자기들 잇속에 맞는 이를 추종하고 내전을 부추기면서 세력을 키웠다. 폴란드 군주의 명령은 크라쿠프와 주변 지역에서만 받아들여졌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대귀족들이 자기들 뜻대로 통치를 행사했다. 폴란드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영주의 가혹한 착취에 시달리며 매일 피폐하게 살아갔다. 여기에 신성 로마 제국, 몽골 제국, 킵차크 칸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튜튼 기사단, 보헤미아 왕국 등 외세의 침략이 빈번하게 이어지면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경제 활동은 거의 마비되었고 당시의 폴란드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파탄국가였다.

2.2.2. 외치

2.2.2.1. 보헤미아 왕국과의 타협
카지미에시는 왕위에 오른 직후 튜튼 기사단과 보헤미아 왕국을 상대하는 전쟁을 조속히 끝내고 화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튜튼 기사단과 맺었던 휴전 협약을 최대한 갱신해 시간을 벌면서, 보헤미아 왕국과의 평화 협상에 중점을 두었다.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는 1332년 8월 26일 튜튼 기사단에게 "크라쿠프의 왕과 어떠한 협정도 체결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하는 문서를 발행한 바 있었기 때문에,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보헤미아 국왕이 협상에 응하게 만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고 있던 비텔스바흐 가문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1333년 7월 31일, 카지미에시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자 황제의 아들인 루트비히 5세와 약탈을 일삼는 무법자들에 맞서 국경지대에서 양군이 2년간 긴밀한 협력을 하자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1335년 4월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자, 그의 영지를 놓고 보헤미아 왕국을 거머쥐고 있던 룩셈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거머쥐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간의 경쟁이 벌어졌다. 카지미에시는 이 기회를 틈타 비텔스바흐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에 사절단을 꾸준히 보내서 룩셈부르크 가문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1335년 5월 16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대폴란드 귀족으로 구성된 폴란드 대표단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루트비히 5세와 예비 동맹을 체결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가문도 폴란드와 손잡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얀 루쳄부르스키는 협상의 뜻을 내비치며 아들 카렐을 폴란드로 파견하였다. 카지미에시는 산도미에시에서 카렐과 만나 협상한 끝에 1335년 5월 28일에 1336년 7월 24일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양자가 휴전을 위반할 경우 칼리슈와 브로츠와프에 특별히 설립된 법원에 의해 처벌받기로 했다. 튜튼 기사단은 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보헤미아 왕국과 그들간의 협력 관계에 금이 갔다. 이렇게 룩셈부르크 가문과 휴전 합의를 맺은 후, 카지미에시는 포즈난 총독 미코와이, 포즈난 영주 이브노 야로스와프, 대폴란드 재상 오토 등을 호이나로 보내 비텔스바흐 대표단과 협상하게 했다. 그 결과 1335년 6월 20일에 카지미에시의 딸인 쿠네군다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루트비히를 결혼시키고 양자가 상호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 비준 및 문서 교환 날짜와 장소는 9월 8일 비엘렌 또는 도비에그니에보로 정해졌다.

하지만 카지미에시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협약 비준 날짜를 계속 미뤘고, 확실한 약속을 하는 것도 피했다. 당시 비텔스바흐 가문은 폴란드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교황령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협약을 체결했다가 교황령이 폴란드를 적대시하게 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얀 루쳄부르스키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는 용도로 활용할 뿐이었다. 얀 루쳄부르스키는 여기에 넘어갔다. 1335년 8월, 카지미에시는 대표단에게 양보의 한계를 설정하는 서면 위임장을 주고 트렌첸으로 파견했다. 얀 루쳄부르스키는 아들 카렐을 대표로 내세우고 협상에 진지하게 응했다. 며칠간의 협상 끝에, 8월 24일에 얀 루쳄부르스키와 카렐은 폴란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준비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문서가 발행되었다. 카지미에시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이런 선언을 이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세기 역사가들은 카지미에시가 실롱스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했다고 추정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실롱스크와 마조프셰에 대한 보헤미아 왕국의 소유권을 침해하지 않으며, 해당 지역 공작들에게 폴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하라고 강요하지 않기로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335년 11월 19일 비셰그라드 회의에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가 참석한 가운데 폴란드와 보헤미아 왕국간의 종전 협상이 시작되었다.[3] 이때 카지미에시는 트렌첸에서 설정된 조건은 지나치다며, 자신의 대리인이 권한을 초과했다고 밝혔다. 이에 카로이 로베르트는 새로운 협상을 중재했고, 카지미에시는 트렌첸 협약 때보다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냈다. 그는 20,000 프라하 그로셴을 지불하고 폴란드 왕관에 대한 얀 루쳄부르스키의 권리를 구입했고, 볼레스와비에츠 성채를 비롯한 루다 일대의 일부 영토를 되찾았다. 게다가 이 협약에는 실롱스크에 대한 카지미에시의 의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룩셈부르크 왕조 피아스트 왕조간의 결혼 동맹을 맺기로 약속했다. 이후 카지미에시는 얀 루쳄부르스키의 초대에 응해 프라하로 찾아와서 며칠간 머물렀다.

이후 카지미에시는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협상을 완전히 끝내고 룩셈부르크 가문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336년 6월, 그는 수백 명의 기사단과 함께 모라바로 가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국왕들에 가세했다. 1338년 3월 1일 룩셈부르크 가문과 카페앙주 가문이 폴란드가 실롱스크를 침공할 경우 헝가리-크로아티아에서 보헤미아를 돕기로 합의하자, 카지미에시는 1339년 2월 9일에 룩셈부르크 가문에 보헤미아의 영토를 절대로 침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발송했다. 이렇게 룩셈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굳건히 해, 그들이 튜튼 기사단과의 협력을 영구적으로 끊도록 유도했다.

1341년 7월, 그는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인 룩셈부르크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함으로써 폴란드-보헤미아 동맹을 확고히 굳히려 했다. 그러나 그가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 마르가레테는 이미 병사했다. 하지만 그는 동맹 협상을 이어갔고, 7월 13일에 공식적으로 폴란드-보헤미아 협정을 체결시켰다. 카지미에시는 시비드니차 공국과 헝가리 왕국을 제외한 국가들이 보헤미아를 침공할 때 보헤미아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보헤미아의 의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한편 룩셈부르크 가문은 카지미에시에게 헤센 방백 하인리히 2세의 딸인 헤센의 아델하이트와 재혼하라고 권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9월 29일에 포즈난에서 아델하이트와 결혼했다.

이후 카지미에시는 보헤미아 왕국과의 약속을 굳건히 지켰다. 1343년 자간 공작 헨리크 5세가 보헤미아 왕실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전쟁을 단행해 그워구프를 탈취하자, 카지미에시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올레시니차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이 헨리크 5세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보헤미아-폴란드 연합군은 시치나와를 점령하고 황폐화시켰고, 뒤이어 자간 공작령을 약탈했다. 이후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고, 카지미에시는 보헤미아를 도와준 대가로 워쇼와 일대를 받아냈다. 헨리크 5세는 1344년 보헤미아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때부터 보헤미아 국왕의 충실한 가신이 되었다.
2.2.2.2. 튜튼 기사단과의 타협
카지미에시 3세는 즉위 직후부터 튜튼 기사단과 지속적으로 사절단을 보내 협상을 이어갔고, 1133년 5월 23일로 설정된 휴전 만료일을 1336년 6월 24일까지 여러 차례 연장했다. 그러면서 비셰그라드에서 중재를 맡은 교황측 사절단에게 튜튼 기사단이 점유하고 있는 영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를 제출했고, 튜튼 기사단 대표단 역시 자신들의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사절단은 양측의 주장을 들은 뒤 11월 26일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르면, 쿠야비와 드브진 일대는 카지미에시가 조건을 충족할 때까지 바르샤바 공작 시에모비트 2세 또는 쿠야비 주교에 의해 임시로 관리되고, 이후에는 폴란드에 반환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단스크 포모제는 튜튼 기사단의 소유로 남게 했으며, 카지미에시는 자신의 조상이 부여한 권리에 따라 기사단이 헤움노를 계속 소유하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양자는 모든 전쟁 보상을 포기하고 지난 전쟁 중에 적의 영토로 도망친 신민들에게 사면을 제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카지미에시와 튜튼 기사단 모두 중재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판결을 완전히 이행하기를 열망하지 않았다. 카지미에시는 그단스크 포모제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문서를 발행하지 않았고, 튜튼 기사단은 쿠야비와 도브진을 반환하지 않았고 시에모비트 2세 또는 쿠야비 주교의 통치를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휴전 종료일이 가까워지자, 카지미에시는 1136년 5월 26일 중재인의 판결을 수락하며 6월 24일부터 1년 이내에 해당 조항을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기사단을 앞으로는 공격하지 않겠으며, 기사단의 신민들에 대한 습격으로 인한 피해도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튜튼 기사단 역시 비슷한 문서를 발행했고, 양측은 1337년 6월 24일까지 유효한 새로운 휴전을 맺었다. 이렇듯 시간을 끄는 동안, 카지미에시는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튜튼 기사단의 두 가지 만행을 고발했다. 하나는 튜튼 기사단이 그니에즈노 대주교가 관할하던 교회 재산을 약탈하고 교회를 파괴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폴란드 왕국에 속한 땅을 무단으로 점령했다는 것이었다.

1337년 3월 초, 카지미에시는 도브진 공작 브와디스와프와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브와디스와프는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속한 도브진을 왕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웽치차를 수여받기로 했다. 이후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중재하에 이노브로츠와프에서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간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양자는 다음과 같은 합의를 맺었다.
1. 카지미에시 왕은 튜튼 기사단이 그단스크 포모제를 영구적으로 '임대'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2. 카지미에시 왕은 그의 조상에 헤움노 일대를 튜튼 기사단에게 부여한 계약을 존중한다.
3. 카지미에시 왕은 이교도인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동맹을 맺지 않는다고 약속한다.
4. 카지미에시 왕은 튜튼 기사단 편에서 전쟁에 참여한 폴란드 귀족들과 튜튼 기사단에 항복했던 도시들을 사면하며, 폴란드 왕국에 억류된 모든 튜튼 기사단 포로들을 석방하고, 전쟁 보상을 포기한다.
5. 튜튼 기사단은 쿠야비와 도브진을 폴란드에 조속히 반환하며, 그 동안 얀 루쳄부르스키가 대리 통치한다.
6.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는 얀 루쳄부르스키 다음의 두번째 평화 중재자로서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 양자간의 평화를 보증한다.

이렇게 합의가 맺어진 뒤, 튜튼 기사단은 쿠야비와 도브진에서 즉시 철수했고, 얀 루쳄부르스키는 곧바로 이 땅을 폴란드에 넘겼다. 하지만 카지미에시는 협약의 최종 비준을 미루면서 교황청의 통보가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1338년 5월 4일,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폴란드의 튜튼 기사단에 대한 고발에 관한 교회법 절차의 시작을 명령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는 프란츠 출신의 교황 특사이며 폴란드에서 사목을 했던 갈하르 드 카르세리부스를 판사로 선임했고, 심리 날짜를 10월 27일로 정했다. 법원은 1339년 2월 4일에 시작되었으며, 중립 지역인 바르샤바에서 진행되었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분개해 교황에게 항의서를 보내고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 재판에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126명의 증인이 참석해, 튜튼 기사단이 차지한 영토는 전부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땅이었는데 기사단이 무력으로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재판이 진행 중이던 1339년 3월, 갈하르는 토룬에 있던 기사단 대표들에게 카지미에시의 제안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카지미에시는 소송을 철회하고 이전의 중재안을 이행하겠지만, 14,000 그지브나(grzywna)를 제공받겠다고 밝혔다. 튜튼 기사단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카지미에시는 1만 5천 그지브나를 아비뇽에 바침으로써 교황을 자신의 편에 확고히 만들고자 했다.

1338년 9월 15일, 바르샤바 재판정은 튜튼 기사단에게 그단스크 포모제, 쿠야비, 헤움노, 도브진 및 미하우프를 폴란드로 반환하고 194,500 그지브나를 보상금으로 지불하며, 1,600 그지브나에 달하는 재판 비용을 부담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여기에 튜튼 기사단장 디트리크 폰 알텐부르크와 휘하 장성들, 튜튼 기사단국의 시장들은 파문을 선고받았다. 튜튼 기사단은 즉시 사도좌에 항소했고, 튜튼 기사단과 완전히 척지기를 원하지 않은 베네딕토 12세는 절차상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판결을 승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르샤바 재판 과정에서 제공된 증거와 판결 내용이 유럽 각지에 전파되면서, 튜튼 기사단이 점거한 영토가 사실 폴란드 왕국에 속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폴란드 왕국은 이를 토대로 튜튼 기사단으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그들과 대결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교황 특사의 중재하에 양자간의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이 여러 차례 이뤄지고 중재안이 수 차례 도출되었지만, 양자 모두 자신들의 의사를 고집하면서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카지미에시는 루테니아 등 동방으로의 원정에 전념했기에 튜튼 기사단이 점거한 영토를 건드리지 않았고, 튜튼 기사단 역시 갈수록 강해져가는 폴란드를 괜히 건드리는 대신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관심을 돌리면서, 양자간의 충돌은 오랫동안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1356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평화 협약이 맺어지자, 튜튼 기사단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강하게 반발했다.

1360년, 카지미에시가 튜튼 기사단의 영지와 인접한 라지그로드에 성채를 건설하자, 튜튼 기사단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카지미에시가 결정을 바꾸지 않자, 그들은 라지그로드를 전격 침공했다. 이로 인해 양자간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지만, 카지미에시가 한 발 물러서서 성채 건설을 취소하면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카지미에시는 1365년, 1366년 또는 1368년에 튜튼 기사단장 빈리히 폰 크니프로데의 초대를 받아들여 튜튼 기사단의 본거지인 마리엔부르크에 3일간 방문했다. 그는 아마도 튜튼 기사단의 상황을 살펴보고 폴란드가 튜튼 기사단을 무너뜨릴 만큼 충분한 병력을 보유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튜튼 기사단을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이들과의 전쟁을 위한 어떤 준비도 취하지 않았다.
2.2.2.3.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의 동맹
카지미에시는 카로이 로베르트와 그의 아들 러요시 1세 치세에 갈수록 강성해지는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이 폴란드와 동맹을 이어가게 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이 죽고 피아스트 왕조가 단절된다면, 카로이 로베르트와 러요시 1세의 카페앙주 왕조에서 폴란드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을 여러 번 반복했다. 1339년 7월, 그는 비셰그라드에 도착한 뒤 러요시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했다. 카로이 로베르트는 이에 대한 대가로 갈리치아와 브워지미에시보윈스키[4]에 대한 헝가리-크로아티아의 권리를 카지미에시에게 양도하고, 카지미에시의 동방 원정 및 튜튼 기사단에 대한 무장 재판 때 군사 지원을 충실히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350년에는 카지미에시가 만약 남자 아이를 낳는다면, 앙주 가문은 갈리치아와 브워지미에시보윈스키를 10만 플로린을 지불하고 가져간다는 내용의 추가 합의가 맺어졌다.

1351년, 러요시 1세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합동 원정을 시작하기 위해 그의 군대와 함께 폴란드로 찾아왔다. 양군이 통합된 직후, 카지미에시는 중병에 걸렸다. 이에 러요시 1세는 폴란드 왕국의 고관들로부터 카지미에시가 죽으면 자신을 통치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다만 러요시 1세는 독일인을 폴란드 궁정의 요직에 앉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폴란드인들은 러요시 1세에 대한 충성을 거둘 수 있었다. 또한 러요시 1세는 자신을 위해 복무하는 폴란드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불하기로 했다. 이 협약은 카지미에시가 회복되면서 이행되지 않았다. 1355년, 폴란드 대표단이 부더에 도착한 뒤 폴란드 왕국의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카페앙주 왕조의 폴란드 왕위 계승을 수락하는 조건을 확립했다. 그해 1월 14일, 러요시 1세는 이를 확정하고 해당 조건을 명시한 문서를 발행했다. 이리하여 러요시 1세는 카지미에시의 잠정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은 폴란드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다.
2.2.2.4. 동방 원정
카지미에시는 즉위 직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주요 인사들 및 루테니아 공작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루테니아의 할리치나[5]-볼히니아 공작 유리 2세 볼레슬라프와 비셰그라드에서 협상해, 유리가 자녀 없이 죽을 경우 할리치나를 자신에게 넘기며, 카지미에시는 유리에게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던 1340년 4월 7일, 당시 30살이었던 유리가 중독사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카지미에시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루테니아로 진격해, 르부프에 입성한 뒤 그곳에서 유리의 보물 등 여러 전리품을 탈취하고 마을을 불태운 뒤 가톨릭교도들과 상인들을 데리고 폴란드로 돌아갔다. 그 해 5월에는 헝가리군과 힘을 합쳐 루테니아로의 원정을 수행했지만, 원정의 경과 및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1340년 6월 말, 카지미에시는 훨씬 더 큰 군대를 동원하여 루테니아로 진군해 할리치나 등지를 폴란드에 종속시켰다. 여기에 그곳의 보야르인 디미트르 데트코는 폴란드로서 루테니아의 나머지 부분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디미트르는 폴란드의 지배를 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킵차크 칸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1341년 초, 킵차크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군이 소폴란드를 침공해 비스와 강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은 카지미에시가 친히 이끄는 폴란드군에 격퇴되었고, 귀환하던 중 루블린을 점령하려 했으나 역시 패퇴했다. 이에 디미트르는 카지미에시에게 재차 복종했고, 총독으로서 광범위한 권한을 받았다.

1349년,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최근에 튜튼 기사단에게 패배하면서 위세가 꺾인 틈을 타 리투아니아의 영토로 귀속된 루테니아의 브워지미에시보윈스키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해 9월에 군대를 일으켜 블라디미르를 기습 공격해 그 일대를 순식간에 평정했다. 1350년 5월, 켕스투티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인들이 마조프셰를 침공해 바르샤바와 체르스크를 파괴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양산하고 웽치차까지 진격했다. 이에 카지미에시는 군대를 일으켰고, 약탈을 마친 뒤 철수 중이던 그들을 추격해 주코프 전투에서 격파했다. 그러나 그해 8월, 리투아니아인들은 재차 군대를 일으켜 루테니아를 침공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많은 포로를 잡았으며, 브워지미에시, 벨츠, 브레스트 및 여러 마을을 점령한 뒤 우쿠프, 산도미에시, 라돔으로 쳐들어가 많은 폴란드인을 납치했다. 카지미에시는 이들을 완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르부프 땅을 제외한 갈리치아 전역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돌려주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51년, 카지미에시는 교황으로부터 4년 동안 내는 십일조의 절반을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와의 전쟁에 쓰는 것을 승낙받은 뒤 원정을 준비했다. 그해 6월, 러요시 1세가 헝가리군을 이끌고 폴란드군과 함께 리투아니아를 침공할 준비를 갖췄다. 양군은 루블린에서 합류했는데, 카지미에시는 도중에 중병에 걸려 본국으로 귀환했고 러요시 1세가 그를 대신해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을 이끌었다. 1351년 7월, 러요시는 리투아니아 대공 켕스투티스를 공격했다. 이에 켕스투티스는 8월 15일 러요시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국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형제들과 함께 부더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켕스투티스는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이 철수한 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러요시 1세는 켕스투티스를 징벌하기 위해 재차 공세를 개시했지만, 그의 원정에 참여한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3세가 리투아니아군의 습격으로 전사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부더로 철수했다.

1352년, 병이 나은 카지미에시는 다시 리투아니아 원정을 개시해 벨츠를 포위했다. 그해 3월, 러요시 1세가 카지미에시 3세와 합류한 뒤 벨츠를 성공적으로 함락시켰다.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가 타타르 용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해 포돌레로 쳐들어오자, 러요시 1세는 본국이 침탈당할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귀환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그해 5월에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러요시 1세가 향후 4년간 헝가리 교회 수입에서 십일조를 징수할 권리를 승인했다. 그러면서 헝가리에 인접한 이교도들과 교회 분열주의자들의 땅을 점령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에 고무된 러요시 1세는 1354년 4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킵차크 칸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헝가리군이 킵차크 칸국에 밀려와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하자, 자니베크 칸은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는 리투아니아인들을 돕지 않고 헝가리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러요시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킵차크 칸국은 헝가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카지미에시는 추가 군사 작전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니에즈노 대성당의 귀중품을 기부하도록 강요했다. 여기에 브와디스와프가 사망한 폴란드 왕국에 통합된 도브진을 튜튼 기사단에게 저당잡히고 그 대가로 상당한 돈을 받아냈으며, 프워츠크 땅을 바르샤바 공작 카지미에시 1세에게 저당잡히고 역시 돈을 받아냈다. 이후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에 이르렀다가, 리투아니아 사절단과 협상한 끝에 양자가 서로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고 지금까지 확보한 영토를 그대로 가지는 것이 허용되며, 양측은 휴전 기간 동안 요새를 건설하거나 재건하지 않고, 리투아니아인들은 타타르족이 폴란드 본토를 침공할 경우 폴란드를 도와야 하지만 루테니아를 침공할 때는 그럴 필요가 없고, 카지미에시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 리투아니아를 공격하면 리투아니아인을 지원해야 하지만 루테니아를 침공할 때는 돕지 않는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또한 리투아니아 공작 중 누군가가 휴전을 위반하면 대공이 그를 심판해야 하며, 양자는 서로에게 도망자들을 인도해야 했다.

카지미에시가 협정에 만족하며 돌아간 뒤, 리투아니아인들은 협정을 재빨리 깨뜨렸다. 1353년, 그들은 르부프를 침공해 파괴했으며, 7월 7일 갈리치아를 공략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후 소폴란드로 진군해 자비코스트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이에 분노한 카지미에시는 그해 10월 보복 원정을 단행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354년 11월 10일, 교황청은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크로아티아에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족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요청했고, 폴란드가 십일조를 군자금으로 쓰는 것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교서를 반포했다. 1355년, 카지미에시는 러요시 1세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뒤 브워지미에시보윈스키 일대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성채를 공략했다. 1356년 타타르인들이 이 요새를 빼앗자, 카지미에시는 스타니스와프 치올레크에게 병력을 맡겨 브워지미에시보윈스키 탈환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했고, 스타니스와프는 전사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1356년 9월 17일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인과의 전쟁을 치르는 카지미에시를 돕지 않는 것을 질책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튜튼 기사단은 끝내 폴란드를 돕기를 거부했다. 1356년 여름 말 또는 초가을,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대한 내용은 알려진 바 없지만, 1357년 1월 24일에 발행된 교황 교령에서 이를 언급했다. 인노첸시오 6세는 이 문서에서 카지미에시가 이교도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것을 비난했다. 1357년 12월 17일, 카지미에시는 아비뇽에 사절을 보내 리투아니아 교회를 폴란드 교회 관구에 종속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카지미에시를 견제하기 위해 1358년 4월 18일에 리투아니아 공작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보호 아래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을 호소했다. 그해 7월, 리투아니아 대공 중 한 명이 뉘른베르크에 있던 카를 4세에게 리투아니아가 기독교화를 원하므로 대공이 크리스마스에 세례성사를 받으러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황제는 몹시 기뻐하며 브로츠와프에서 세례 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대공은 정해진 날짜에 오지 않았고, 그 대신 사절을 보내 튜튼 기사단이 리투아니아에게서 빼앗은 땅을 반환할 때까지 세례성사를 받지 않겠다고 알렸다.

1358년, 카지미에시의 외손자인 스웁스크 공작 카지미에시 4세와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의 딸 케나(Kenna)간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여기에 마조프셰 공작과 리투아니아 사이에 국경 협약도 체결되었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간의 평화는 1366년까지 이어졌다가 1367년 카지미에시가 루테니아 원정을 단행하면서 깨졌다. 카지미에시는 리투아니아령에 속한 루테니아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그 땅의 주군인 류바트로부터 브워지미에시보윈스키와 루츠크를 계속 다스리는 대가로 모든 적에 맞서 자신을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368년 리투아니아인들은 마조프셰를 침공해 프워츠크, 체르빈스크, 비쇼그로드, 풀투스크를 파괴했지만, 폴란드 본토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후 카지미에시가 1370년에 사망할 때까지, 양측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2.2.2.5. 마조프셰 귀속
마조프셰는 본래 폴란드의 영토였지만 브와디스와프 1세 치세 때 보헤미아 왕국에 복종했다. 하지만 보헤미아 왕국은 너무 멀리 떨어진 마조프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고, 카지미에시가 폴란드 왕국의 국력을 급속도로 회복시키고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마조프셰 공작들은 카지미에시에게 의존해야만 리투아니아인들의 침략으로부터 버틸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1343년, 바르샤바의 카지미에시 1세를 제외한 모든 마조프셰 공작들은 칼리슈에 대표단을 파견해 카지미에시와 동맹을 맺었다.

1351년 9월 18일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3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카지미에시는 보헤미아 왕국이 가신의 영지를 자기들 것으로 삼으려 들기 전에 즉시 프워츠크 공국을 점령했다. 이후 바르샤바 공작 시에모비트 3세 및 카지미에시 1세와 협의해 프워츠크, 비스카 등지의 지배권을 유지하고, 소하체프를 두 사람에게 영지로 주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가신이 되도록 하되, 피아스트 왕가가 단절되면 가신으로서의 의무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프워츠크, 비스카 등지를 물려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보헤미아 국왕이었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카를 4세는 프워츠크 공국을 자간 공작 헨리크 5세에게 봉토로 넘기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카지미에시는 황제의 이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1355년 11월 26일 바르샤바 공작 카지미에시 1세가 자녀 없이 사망했다. 그는 주군으로서 자녀를 두지 못한 가신의 땅을 인수할 권리가 있었지만, 그 대신 카지미에시 1세의 형제인 시에모비트 3세에게 넘기기로 했다. 이에 감격한 시에모비트 3세는 카지미에시가 일전에 리투아니아인들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자신에게 빌렸던 돈을 탕감해줬고, 충성을 재차 서약했다. 이후 1356년 5월 1일 프라하에서 폴란드-보헤미아 동맹이 체결되었고 카를 4세가 프워츠크 공국 등 마조프셰에 대한 일련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마조프셰는 폴란드의 영역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2.2.3. 내치

2.2.3.1. 왕권 강화 정책
카지미에시는 폴란드 각지에서 대귀족이 할거하고 왕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상황을 개선하고자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귀족과 주교의 경제력을 제한하고 교회를 왕권에 종속시키고자 했다. 크라쿠프 주교 얀 그로트는 왕이 교구가 보관하던 자금을 전쟁 비용으로 쓰기를 반복하자 격렬하게 반발한 끝에 1334년 파문을 선고하고 크라쿠프 교구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카지미에시는 그가 국가 기밀을 폭로하고 반란을 조장했으며, 백성들을 학대했다고 비난했다. 1338년에는 왕이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바벨 대성당에 들어오자 얀 그로트가 미사를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선정을 베푸는 왕을 지지하는 여론이 갈수록 거세지자, 얀 그로트는 결국 1343년에 파문을 취소하고 카지미에시와 화해했다.

카지미에시는 각지에 스타로스타 게네랄니를 둬서 자신을 대신해서 왕명을 집행하고 귀족들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무제한적인 자치권을 누리던 대귀족들은 자기들의 권익이 침해되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1352년 9월, 마코 보르코비치를 비롯한 귀족들이 포즈난에서 연합을 설립하고 왕의 대표자들과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이에 대폴란드가 내전에 휘말릴 위기에 몰리자, 그는 1353년에 중재를 위해 포즈난에 찾아와서 자렘바, 레슈치크 가문을 회유해 연합에서 탈퇴하게 했다. 그러나 연합은 브란덴부르크군의 지원을 받아가며 저항을 이어갔고, 한때는 차른쿠프를 포위하기도 했다. 카지미에시는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런 반란군을 침착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궁지에 몰린 연합 지도자 마코 브로코비치는 1358년 2월 16일 시에라츠에서 연합을 해산하고 카지미에시에게 항복했다. 카지미에시는 일단 마코를 용서하는 척했다가 나중에 긴급 체포해 감옥에 가둔 후 굶겨죽였다.

이리하여 대귀족들을 제압한 뒤, 카지미에시는 각지에 고관들을 임명했고, 크라쿠프에서 왕실 의회를 주기적으로 개최해 고위 인사와 토지 관리, 귀족 및 도시 대표가 참석하도록 했다. 또한 형사 사건을 처리하는 법원과 민사 분쟁을 전담하는 법원을 별도로 설립했으며, 지방 법원의 판결에 승복하지 못할 경우 크라쿠프에 설립된 고등 법원에 항소하도록 했다. 그 결과, 그동안 왕을 무시하던 귀족들은 더이상 자기들 멋대로 영주민들을 학대할 수 없게 되었고, 국왕은 통치력을 각지에 널리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카지미에시는 법률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는 폴란드 내 지역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폴란드 전역에 통일된 법을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폴란드와 소폴란드에 별도의 법을 두기로 했다. 소폴란드에서는 1362년에 비실리카에서 제정된 법이 적용되었고, 대폴란드에서는 1356년부터 1362년까지 피오트르에서 제정된 법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카지미에시 법령은 비실리카-피오트르 법령으로도 일컬어진다. 이 문서들은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며, 폴란드 관습법에 기초를 두었다. 법령의 원본은 소실되었지만, 얀 드우고시 등 여러 연대기에서 일부 내용이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진다.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농민들을 지켜주기 위한 조치가 여럿 있었고 불법행위를 저지른 귀족과 성직자들을 단속하는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법령의 약 2/3가 형법에 관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민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2.2.3.2. 군사 개혁
카지미에시는 군대 조직에도 개혁을 단행했다. 투석기, 공성추, 공성탑 등 전투 기계들이 대거 개발되었고, 사슬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로 구성된 기병대가 폴란드군의 주력이 되었다. 여기에 검병, 도끼병, 창병, 궁수병, 석궁병도 전투에 투입되었고, 모든 주민은 자기가 사는 도시에 공격이 가해지면 즉시 방어하며, 농민들도 민병대를 자체적으로 갖추고 적의 침략에 대항해야 했다. 그는 이에 더해 깃발 체계도 도입했다. 각 군대는 군기에서 이름을 따온 부대로 구성되었고, 군기에는 각 부대 지휘관이 속한 가문이나 영지의 문장이 새겨졌다.

카지미에시는 폴란드군이 자국의 영역을 행진할 때 도시나 마을이 아닌 공터에 숙영지를 세우게 했고, 주변 주민들에게 보급품을 받아낼 때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또한 농작물을 빼앗고 농장을 파괴하거나 소와 돼지를 빼앗을 경우, 엄중한 처벌을 부과했다. 그는 방어 시설 건설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시대에 53개의 성이 요새화되었고, 27개의 도시 요새가 강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요새 건설에 쓰이는 벽돌 등 재료를 생산하는 공장이 곳곳에 설립되었고, 지역 경제는 자연히 발전했다.
2.2.3.3. 경제 진흥
카지미에시는 경제 분야에서도 힘을 기울였다. 먼저 폴란드 전역을 뒤덮고 있던 숲을 농지로 바꾸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또한 크라쿠프에 무역 특권을 부여했으며, 바라누프 산도미에르스키, 란코로나, 르부프, 필즈노, 프로조비체, 롭치체, 르제슈프, 슬롬니키, 타일리츠, 티친 등 여러 도시를 설립했다.[6] 이때 설립된 도시들에는 독일법이 적용되었고, 독일에서 살던 은행가, 상인, 장인들을 대거 초빙했다.

국고는 광범위한 왕실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기반으로 했다. 새 도시 건설과 오래된 도시의 개선 사업은 수익성을 크게 늘렸다. 여기에 지방 귀족들이 자체적으로 지불하던 세금을 각지에 파견된 관료들이 매년 거둬들이는 연간세로 변경하면서, 국고 수입이 크게 증대했다. 또한 보흐니아와 비엘리치카의 광산과 양조장도 국고에 크게 기여했다. 카지미에시는 1368년 4월 21일에 소금 광산 법령을 공포해 소금 광산 관리를 재조직함으로써 소금을 통한 세수입을 체게적으로 관리했으며, 크라쿠프에 제염소를 설치해 소금의 질을 관리하게 했다. 크라쿠프 제염소는 14세기에 세수입의 1/3을 국고에 제공한 대표적인 왕실 기업이었다. 한편, 카지미에시는 그로스 크라코프스키(Gross Krakowski) 동전을 주조한 최초의 폴란드 통치자이기도 했다.

폴란드는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과 내란에 시달리면서 인구가 희소했지만, 그가 37년간 선정을 베풀면서 인구가 크게 늘었다. 학자들은 그의 치세 말년에 1,800,000명에서 1,900,000명의 주민이 폴란드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유럽 전역에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2.2.3.4. 문화 진흥
1364년 5월 12일, 카지미에시는 크라쿠프 대학교의 설립을 선포했다. 그는 칙령에서 대학을 세우는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인류의 모든 유익한 것과 모든 번영이 증가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의무를 다하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주의 성직자와 신민들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 대학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모든 과학에 대한 보편적인 연구가 발전할 수 있는 도시 크라쿠프에 자리잡았다. 이곳이 압도적인 지식의 진주가 되어 사람들에게 탁월한 조언의 성숙함, 미덕의 장식, 다양한 지식 방향으로 가득 찬 것을 제공하기를 바란다. 과학적으로 계몽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이 끌어낼 수 있는 유익한 과학의 원천이 있도록 하라.

크라쿠프 대학교는 볼로냐 대학교 파도바 대학교를 모델로 삼았으며, 대학교에 재학하는 학생들은 관세 및 수수료 면제 등 많은 특권을 누렸다. 이 대학은 훗날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에 의해 한층 더 발전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의 가문 이름인 야기에우워 왕조에서 따서 '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로 개명되었다. 현재 이곳은 중부 유럽에서 프라하 카를로바 대학교에 이어 2번째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대학으로서, 폴란드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손꼽히고 있다.

카지미에시의 통치 기간 동안 소폴란드에는 많은 고딕 양식의 건물과 예술 작품이 세워졌다. 그는 바츠와프의 성 베드로 대성당 확장에 대한 후원을 맡아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를 위한 기념비를 건립했으며, 포즈난 대성당에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의 묘비를 세우게 했다. 또한 바벨 성도 고딕 양식에 맞춰 확장했고, 2개의 큰 교회, 즉 코퍼스 크리스티 교회와 성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와 성 마르가레테 교회를 설립했다. 이외에도 니에포워미체, 비실리카, 산도미에츠, 카르구프, 시드우프 등지에 수도원을 잇따라 건립했다.

카지미에시는 성해함과 성작 등 기독교와 관련된 수많은 예술적 장인 작품에 자금을 지원했다. 여기에 왕의 위엄과 권력을 상징하는 정교한 문장이 담긴 예술 작품도 여럿 제작되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폴란드의 왕, 크라쿠프, 산도미에시, 시에라츠, 웽치차, 쿠야비 및 포모제의 영주이자 상속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동방 원정에서 성과를 거둔 뒤에는 "루스의 군주이자 상속자", "폴란드와 루테니아의 왕"을 칭하기도 했다.
2.2.3.5. 유대인 우대 정책
카지미에시는 독일어권 국가들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던 유대인을 "왕의 백성"으로 보호하겠다고 선언하고 폴란드로 이주하도록 권장했다. 그는 유대인 어린이들에게 세례성사를 주기 위해 납치하는 행위를 금지했으며, 폴란드 교회 종교재판의 반유대주의 경향과 빈번한 폭동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독일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왕실 법원의 직접적인 판결을 받음으로써 그들의 권리를 특별히 보장받았다. 그는 유대인 대금업자가 부과하는 이자율을 8과 1/3 %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너무 많은 이자를 받으면 현지인들의 분노를 살 것을 고려해 내린 것이었다. 그가 유대인들을 이렇듯 우대한 결과, 상공업에 능한 유대인들이 폴란드에 대거 유입되면서 폴란드 왕국의 빈약했던 상공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2.3. 최후

1370년, 카지미에시는 룩셈부르크 왕조의 손아귀에 들어갔던 실롱스크를 탈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실롱스크-폴란드 국경 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라는 칙령을 내린 뒤, 그해 9월 프셰드보르츠 성에 머물면서 대규모 사슴 사냥을 벌였다. 그런데 사냥 둘째 날인 9월 9일, 그는 사슴을 쫓다가 낙마하는 바람에 왼쪽 정강이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크라쿠프로 옮겨진 뒤 2개월간 상처에 세균이 감염되면서 고열에 시달리다가 1370년 11월 5일에 사망했다. 당시 카지미에시 3세가 낙마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에는 오늘날에도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는 생전에 4번이나 결혼했지만 후계자로 삼을 아들을 끝내 두지 못했고, 이로 인해 피아스트 왕조는 단절되었다. 이후 폴란드 왕위는 그가 생전에 여러 번 약속한 대로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인 조카 러요시 1세에게 계승되었고, 러요시 1세의 3녀 야드비가 여왕 때에 이르러 리투아니아의 대공과 모든 리투아니아인 발트 신화를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결혼하고 연합하여 쓸만한 영토가 유럽에서 가장 거대하게 되고 폴란드의 리즈 시절 야기에우워 왕조가 시작되었다.

3. 가족

3.1. 왕비와 자녀

3.2. 내연녀와 사생아

카지미에시는 폴란드 왕국의 전성기를 연 탁월한 통치자였지만, 호색한으로도 유명했다. 왕자 시절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의 아내인 자신의 여동생 엘즈비에타의 시녀 클라라 자(Clara Záh)에게 외설스러운 농담을 던졌다가 클라라 자의 아버지 펠리키안 자(Felician Záh)가 격분한 나머지 불미스러운 일을 벌이기도 했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수많은 내연녀와 사귀면서 여러 사생아를 낳았다. 이 때문에 폴란드 성직자들과 자주 심각한 갈등을 벌였고 두 번째 아내 아델하이트와도 불화를 겪었지만, 그는 생애 내내 불륜을 거리낌없이 일삼았다. 연대기 작가 비치나의 피오토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그 시대에 세속정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신중한 사람이었으며, 평화를 사랑하고 폴란드 왕국을 좋은 상태로 만들었다. 그는 기꺼이 교회를 세웠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왕국 국경에 위치한 마을을 재건했으며, 매우 강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절제하고 음탕한 사람이었고, 남자 상속자를 남기지 못했다.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카지미에시는 내연녀로 두었다가 중혼을 감행하기까지 한 크리스티나 로키자나와 헤어진 뒤에도 아름다운 유대인 여성인 에스테르카를 내연녀로 두고 세 아들 니미에르자와 페우카, 얀을 낳았다고 한다. 이들 중 페우카는 요절했고, 니미에우카와 얀은 카지미에시의 유언장에서 쿠토프, 유르즈노, 드루그니아 등 여러 마을을 영지로 부여받았다. 그러나 카지미에시의 뒤를 이어 폴란드 왕이 된 러요시 1세는 그니에즈노 대주교, 크라쿠프 주교를 비롯한 크라쿠프 고위 인사들에게 유언장의 타당성을 조사하도록 지시했고, 논의 끝에 이들에게 영지를 물려주지 않기로 했다. 그 후 얀은 더이상 언급되지 않았고, 니미에우카는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기용되어 토지 조사 사업을 수행하다가 코프르지브니차 주민들과 마찰을 벌인 끝에 피살되었다고 한다.

4. 여담

5. 현대 매체에서



[1] 나중의 그의 뒤를 이어 폴란드 국왕 루드비크로 즉위하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1세의 어머니. [2]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차남으로 대립왕 선출 문제로 인하여 선제후 제도가 들어서게 된 원인 제공자 중 하나이다. [3] 이때의 협상이 오늘날 비셰그라드 그룹의 기원이 되었다. [4] 현 우크라이나 볼로디미르볼린스키. [5] 갈리치아 우크라이나어. [6] 일설에 따르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거의 100개의 신도시가 설립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7] 아델하이트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수치심과 굴욕에서 구하고 집으로 데려가달라고 애원하는 서신을 여러 편 보내기도 했다. [8] 적어도 1380년대 중반까지는 생존하며 의술이 높은 도시에 체류하면 1400년대까지도 산다. 이 게임에서 왕족은 8세에 성년 취급이라서 아이만 일찍 본다면 후계가 끊겨 게임오버 되는 일은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