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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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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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州 宋氏 청주 송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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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충청북도 청주시 | |||
시조 | 송유충(宋有忠)[1] | |||
파조 |
참판공파(參判公派)
송빈(宋賓) 주부공파(主簿公派) 송밀(宋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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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 |||
인구 | 8,171명(2015년)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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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雪裡孤松尙保春
嵐寒貞節不染塵 눈 속에서도 외솔은 오히려 봄을 지키려 드는데 차디찬 산바람이라도 어찌 곧은 절개 세속에 물 들일 수 있겠으리오 |
2. 역사
2.1. 기원 및 유래
시조 청주군 휘 유충(淸州君 諱 有忠)은 여산 송씨 밀직공(密直公) 송방영(宋邦英)의 세 아들 완(琓), 표(標), 군보(君輔) 중 대광첨의(大匡僉議)를 지낸 송표(宋標)의 맏아들로 고려 말 충숙왕때 태어나 조선 초 나라에 공훈을 세워 태조로 부터 유경(有敬)이란 이름 대신 유충(有忠)이라는 사명(賜名)과 함께 1392년 청원군(淸原君)에 훈봉(勳封)되었다. 유충의 아들 2세 훤(暄)은 1405년 서원군(西原君)으로 습봉(襲封)되었으며, 청백편(淸白篇)에 올랐다. 청원과 서원은 모두 지금 청주(淸州)의 옛 이름이었기에 선조들은 본관을 청주로 하고 유충(有忠)을 시조로 모셔왔다.2.2. 입향
훤(暄)의 아들 3세 승은(承殷)은 단종때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고 계유정난때 정국이 혼란해지자 외직을 자청, 칠원현감(漆原縣監)이 되어 빙부 대재학 최연(崔淵)과 함께 가족과 남하하던 중 김해의 산수가 아름다움을 보고 김해의 하계면 대종리에 자리를 잡고 은거한 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김해에 정착하였다. 입향조(入鄕祖) 승은을 이후로 청주 송씨 가문은 김해에 사림 세력으로 자리잡아 세거한다. 승은(承殷)의 아들 4세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한 숙형(叔亨)은 탁영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김해 향약(鄕約)을 제정하였으며 학식과 덕망이 높아 <김해부 오원(金海府五員)>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5세 유호(由浩)는 성균관 생원을, 6세(六世) 경(經), 7세 창(昌) 두분 모두 절제사를 지냈다.2.3. 중시조
창(昌)의 장남 종(宗)은 무과에 급제했으며, 차남 빈(賓)은 임진왜란때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장으로 김해성 중군도총(中軍都摠)으로 김해성을 지키다 순절하였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후에 통정대부 공조참의(通政大夫 工曹參議)로 증직되었고, 그후에 다시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 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同知義禁府事 五衛都總府 副總管)으로 추증되었다. 셋째 밀(密)은 선무랑예빈시주부(宣務郞禮賓寺主簿)를 지냈으며 빈(賓)과 밀(密)형제는 각각 참판공파(參判公派)와 주부공파(主簿公派)를 이뤘다. 넷째 관(寬), 다섯째 우(宇), 여섯째 주(宙)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창녕성에서 분전하다 순절하였다. 빈(賓)의 맏아들 정백(廷伯)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곽재우와 더불어 창녕 화왕산에서 많은 왜적을 진압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이는 망우당의 동고록(同苦錄)에 수록되었으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벼슬을 멀리하여 영의정 정인홍의 출사 요구를 3번이나 거절하고 김해에서 오우당 김근 등과 교류하였다. 빈(賓)의 차남 정남(廷男)은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왜란에 소실된 남명 조식(曺植)의 신산서원을 중수하고 성찰하였다. 이후 정백(廷伯)은 청암공파(晴庵公派)로, 정남(廷男)은 사천공파(絲川公派)로 각각 분파되었다. 그 뒤 정백(廷伯)의 아들인 제현(齊賢)과 제문(齊文), 제원(齊元)은 청암공파(晴庵公派)를 잇고, 정남(廷男)의 아들 제성(齊聖)[3]은 사천공파(絲川公派)를 이었다. 밀(密)의 아들인 민영(敏英)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만호(萬戶)을 지내고, 정영(廷英)은 통정대부절위장군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折衛將軍僉知中樞府事)를 지내 각각 만호공파(萬戶公派)와 부사공파(府事公派)로 분파되었다.3. 분파
참판공파(參判公派) 송빈(宋賓)
청암공파(晴庵公派) 송정백(宋廷伯)
- 청암공파 담안문중(晴庵公派 淡安門中) 송제현(宋齊賢)
- 청암공파 당리문중(晴庵公派 塘里門中) 송제문(宋齊文)
- 청암공파 점현문중(晴庵公派 店峴門中) 송제원(宋齊元)
- 청암공파 율리문중(晴庵公派 栗里門中) 송제룡(宋齊龍)[4]
- 청암공파 담안문중(晴庵公派 淡安門中) 송제현(宋齊賢)
- 청암공파 당리문중(晴庵公派 塘里門中) 송제문(宋齊文)
- 청암공파 점현문중(晴庵公派 店峴門中) 송제원(宋齊元)
- 청암공파 율리문중(晴庵公派 栗里門中) 송제룡(宋齊龍)[4]
사천공파(絲川公派) 송정남(宋廷男)
- 사천공파 송정문중(絲川公派 松亭門中) 송제성(宋齊聖)[5]
- 사천공파 송정문중(絲川公派 松亭門中) 송제성(宋齊聖)[5]
주부공파(主簿公派) 송밀(宋密)[6]
만호공파(萬戶公派) 송민영(宋敏英)
- 만호공파 오동문중(萬戶公派 午洞門中) 송제렴(宋齊廉)
- 만호공파 오동문중(萬戶公派 午洞門中) 송제렴(宋齊廉)
부사공파(府事公派) 송정영(宋廷英)
- 부사공파 오척문중(府事公派 烏尺門中) 송제충(宋齊忠)
- 부사공파 시산문중(府事公派 匙山門中) 송제신(宋齊信)
- 부사공파 하계문중(府事公派 荷溪門中) 송제인(宋齊仁)
- 부사공파 오척문중(府事公派 烏尺門中) 송제충(宋齊忠)
- 부사공파 시산문중(府事公派 匙山門中) 송제신(宋齊信)
- 부사공파 하계문중(府事公派 荷溪門中) 송제인(宋齊仁)
4. 집성촌
경남 김해시 진례면을 중심한 김해 일원.부산, 경남, 수도권 순으로 전국에 거주
5. 항렬표
5.1. 분파 이전
5세 | ○호(浩) |
6세 | 실사변(糹) |
7세 | |
8세 | 갓머리부수(宀) |
5.2. 참판공파
9세 | 정(廷)○ |
10세 | 제(齊)○ |
11세 | 삼수변(氵) |
12세 | 나무목부수(木), 도(道)○ |
13세 | 상(商)○ |
14세 | ○증(增) |
15세 | 구슬옥변(𤣩) |
16세 | 재(在)○ |
17세 | 기(祺)○, 은(殷)○ |
18세 | ○학(學) |
19세 | 세(世)○ |
20세 | ○복(復), ○연(衍) |
21세 | 유(裕)○, 상(祥)○, 우(祐)○ |
22세 | ○성(盛), ○성(成), ○용(容) |
23세 | 현(鉉)○, 수(銖)○, 석(錫)○ |
24세 | ○옥(沃), ○락(洛), ○해(海) |
5.2.1. 율리문중
19세 | 시(是)○ |
20세 | ○복(復) |
21세 | 우(雨)○ |
22세 | 수(秀)○ |
23세 | ○환(煥) |
5.3. 주부공파
9세 | ○영(英) |
10세 | 제(齊)○ |
11세 | 삼수변(氵) |
12세 | 세(世)○ |
13세 | 두(斗)○ |
14세 | 이(以)○ |
15세 | ○은(殷) |
16세 | 진(振)○ |
17세 | ○국(國) |
18세 | 태(泰)○ |
19세 | ○수(壽) |
20세 | 흥(興)○ |
21세 | 홍(弘)○ |
22세 | ○병(炳) |
6. 세계도
- 위 세계도는 몇몇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6세 융(隆)은 5세 유호(由浩)의 아들이 아닌 5세 적훈부위(迪訓副尉) 의호(宜浩)의 아들이다. 또한 정백(廷伯)의 아들 제룡(齊龍)은 분가 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표기를 삼갔으므로 위의 계도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민영(敏英)의 아들이 제렴(齊廉), 제충(齊忠), 제신(齊信), 제인(齊仁)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제렴(齊廉)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정영(廷英)의 아들이다.
7. 역대 세보
• 경인보(庚寅譜) : 1831년 • 병인보(丙寅譜) : 1926년 • 신축보(辛丑譜) : 1961년 • 임인보(壬寅譜) : 1962년 • 신유보(辛酉譜) : 1981년 • 을유보(乙酉譜) : 2005년 |
8. 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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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파 이전
-
송유충(宋有忠)/송유경(宋有敬) : 청주 송씨의 시조로
조선
개국에 참여한 공이 인정되어 태조로 부터 유충(有忠)이라는 사명(賜名)과 함께
청원군(淸原君)에 훈봉(勳封)되었다.
(시조)
-
송훤(宋暄) : 유충(有忠)의 아들로 1405년
서원군(西原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청백편(淸白篇)에 올랐다.
(2세)
-
송승은(宋承殷) : 훤(暄)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단종때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냈으며
계유정난때 척외 보임되어 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김해에 정착하여 세거하며 청주 송씨의
김해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3세)
-
송숙형(宋叔亨) : 승은(承殷)의 아들로 자(字)는 길보(吉甫)이다. 권지훈련원참군(權知訓鍊院參軍)을 지냈으며 학식과 덕망이 높아 김해부오원(金海府五員)중 하나로 꼽혔다. 탁영
김일손과 근거하며 함께
김해 향약을 지었다.
(4세)
-
송유호(宋由浩) : 숙형(叔亨)의 아들로
성균관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계공량 강서훈도(啓功郞 江西訓導)를 지냈다.
(5세)
-
송경(宋經) : 유호(由浩)의 아들로 자(字)는 이굉(以宏)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와 사량포만호(蛇梁浦萬戶)를 지냈다.
(6세)
-
송창(宋昌) : 경(經)의 아들로 자(字)는 성휴(誠休)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지냈다.
(7세)
- 8세
- 송종(宋宗) : 창(昌)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
송빈(宋賓) : 창(昌)의 아들로 자(字)는 사신(士信) 호는 송담(松潭)이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장으로
사충신이라 불리며 김해성 중군도총(中軍都摠)으로 김해성을 지키다 순절하였으며 충신편(忠臣篇)에 올랐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후에 통정대부
공조참의(通政大夫 工曹參議)로 증직되었고, 그후에 다시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 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同知義禁府事 五衛都總府 副總管)으로 추증되었다.
(참판공파)
-
송밀(宋密) : 창(昌)의 아들로 자(字)는 사성(士成)이다. 형제들이
임진왜란때 김해성에서 순의(殉義)하거나 가문의 책임을 실행하여 진주, 창녕성으로 들어가자 가솔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다. 난이 끝난 뒤 다시 김해로 돌아와 향안(鄕案)을 수찬하고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중건하였다. 선무랑예빈시주부(宣務郞禮賓寺主簿)를 지냈으며 음사편(蔭仕篇)에 올랐다.
(주부공파)
- 송우(宋宇) : 창(昌)의 아들로 내금위(內禁衛)를 지냈다. 임진왜란때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다.
- 9세
-
송정백(宋廷伯) :
빈(賓)의 아들로 자(字)는 공보(公輔)이며 호는 청암(晴庵)이다. 망우당
곽재우선생과 창녕 화왕산성에서 함께 싸웠으며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신지제(신오봉)과 신적도(신호계), 오우당
김근과 도의로 사귐을 맺었다.
광해군 때 대북당
정인홍[7]이 3번이나 출사(出仕)를 요구하였으나 불응하고 벼슬을 멀리 하므로써 출처관을 지켰다. 그가 죽자 동계 정온은 그의 높은 정신을 기리기 위해 北風心不變 南國一人存 (대북의 바람에 마음이 변치 아니한이, 남쪽에 한 사람 있었네)라는 만사(挽辭)를 보냈다.
(청암공파)
-
송정남(宋廷男) :
빈(賓)의 아들로 자(字)는 명보(明輔)이며 호는 사천(絲川)이다.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왜란에 소실된 남명
조식(曺植)의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중수하고 성찰하였다.
(사천공파)
-
송민영(宋敏英) : 밀(密)의 아들로 자(字)는 수이(秀而)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선전관(宣傳官)과 만호(萬戶)를 지냈다.
(만호공파)
-
송정영(宋廷英) : 밀(密)의 아들로 자(字)는 탁이(卓而)이다. 통정대부절위장군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折衛將軍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부사공파)
- 10세
-
송제현(宋齊賢) : 정백(廷伯)의 아들로 자(字)는 군현(君現)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효행이 깊어 읍지에 실렸다.
(청암공파 담안문중)
-
송제성(宋齊聖) : 정백(廷伯)의 아들이자 정남(廷男)의 계자(系子)로 자(字)는 군망(君望)이며 호는 일신당(日新堂)이다. 문예로 원근(遠近)에 올랐으며 경서(經書)와 역사(歷史)에 밝아
김해 사람들에게 강론(講論)하였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송제문(宋齊文) : 정백(廷伯)의 아들로 자(字)는 여장(汝章)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청암공파 당리문중)
-
송제원(宋齊元) : 정백(廷伯)의 아들로 자(字)는 순경(舜卿)이며 호는 우민당(愚民堂)이다. 의리를 행하여
사림의 추중(推重)을 받았고 고을의 가난한 이를 구휼하였으며 읍지에 실렸다.
(청암공파 점현문중)
-
송제룡(宋齊龍) : 정백(廷伯)의 아들로 초명은 택룡(澤龍)이며 자(字)는 치운(致雲)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과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청암공파 율리문중)
-
송제신(宋齊信) : 정영(廷英)의 아들로 자(字)는 군실(君實)이다. 장사랑(將仕郞)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를 지냈다.
(부사공파 시산문중)
- 11세
-
송수(宋洙) : 제성(齊聖)의 아들로 자(字)는 인서(麟瑞)이며 호는 벽송당(碧松堂)이다. 효우가 지극하고 행의(行誼)가 뛰어나 향촌
사림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남명 조식의 유고집을 엮었다. 불행이 41세에 조세(早世)하여 사림에서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송하(宋河) : 제문(齊文)의 아들로 자(字)는 구서(龜瑞)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용양위 부사과(行龍驤衛 副司果)를 지냈다.
(청암공파 당리문중)
-
송전(宋沺) : 제룡(齊龍)의 아들로 자(字)는 원지(遠之)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장사랑(將仕郞)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을 지냈다.
(청암공파 율리문중)
- 12세
-
송세무(宋世武) : 담(潭)의 아들로 자(字)는 여강(汝剛)이다.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만호공파 오동문중)
- 13세
-
송상지(宋商智) : 도삼(道三)의 아들로 자(字)는 명경(明卿)이며 호는 율와(栗窩)이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청암공파 당리문중)
-
송상희(宋商熺) : 휘(彙)의 아들로 자(字)는 이징(伊徵)이다. 통정대부 사복시정(通政大夫 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14세
-
송처증(宋處增) : 상윤(商允)의 아들로 자(字)는 필지(弼之)이다. 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 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청암공파 점현문중)
-
송억증(宋億增) : 상희(商熺)의 아들로 자(字)는 일겸(一兼)이며 호는 정암(貞庵)이다.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叅贊官)에 추증되었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15세
-
송강(宋𤣩+康) : 억증(億增)의 아들로 자(字)는 공윤(共玧)이다.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 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송철(宋𤣩+喆) : 처증(處增)의 아들로 자(字)는 선여(善汝)이다. 관직이 정삼품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청암공파 점현문중)
- 16세
-
송재식(宋在植) : 강(𤣩+康)의 아들로 자(字)는 군실(君實)이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공(公)으로 인하여 3대가 추증되었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송재찬(宋在贊) : 원(瑗)의 아들로 자(字)는 군서(君瑞)이다. 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通政大夫 龍驤衛副護軍)에 추증되었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송재응(宋在應) : 은(𤣩+殷)의 아들로 자(字)는 성여(誠汝)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청암공파 담안문중)
-
송재호(宋在昊) : 전(琠)의 아들로 자(字)는 응천(應天)이며 호는 해관당(海觀堂)이다. 기장현감(機長縣監)과 동래진관병마절제도위(東萊鎮管兵馬節制都尉)를 지냈으며 명관편(名官篇)에 올랐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송재경(宋在景) : 강(𤣩+康)의 아들로 자(字)는 학로(學老)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송재식(宋在軾) : 완(玩)의 아들로 초명은 재흥(在興)이며 자(字)는 서운(瑞雲)이다.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청암공파 율리문중)
-
송재관(宋在爟) : 추(𤣩+秋)의 아들로 자(字)는 의원(意源)이며 호는 만우(萬愚)이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청암공파 율리문중)
- 17세
-
송은홍(宋殷洪) : 재범(在範)의 아들로 자(字)는 덕민(德民)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송은성(宋殷成) : 재선(在譱)의 아들로 자(字)는 원백(元伯)이며 호는 백하(白下)이다. 성균
진사에 급제하였다.
(청암공파 담안문중)
-
송은숙(宋殷淑) : 재록(在祿)의 아들로 자(字)는 경백(敬伯)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청암공파 당리문중)
-
송기덕(宋祺德) : 재명(在命)의 아들로 자(字)는 덕재(德哉)이며 호는 취죽(醉竹)이다. 경북관찰부 주사(慶北觀察府 主事)를 지냈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송은붕(宋殷鵬) : 재범(在範)의 아들로 일명은 수붕(守鵬)이며 자(字)는 수익(壽益, 守益)이다. 수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18세
-
송한영(宋漢榮) : 은성(殷成)의 아들로 자(字)는 정여(貞汝)이다. 성균
진사에 급제하였다.
(청암공파 담안문중)
-
송한준(宋漢駿) : 은성(殷成)의 아들로 자(字)는 주팔(周八)이며 호는 소강(小岡)이다. 성균
진사에 급제하였다.
(청암공파 담안문중)
-
송준학(宋駿學) : 기석(祺奭)의 아들로 자(字)는 성국(聲國)이다. 궁내부 주사(宮內部 主事)를 지냈다.
(사천공파 송정문중)
-
송유충(宋有忠)/송유경(宋有敬) : 청주 송씨의 시조로
조선
개국에 참여한 공이 인정되어 태조로 부터 유충(有忠)이라는 사명(賜名)과 함께
청원군(淸原君)에 훈봉(勳封)되었다.
9. 인물
이름 | 생몰년도 | 파 | 비고 |
19세 이전 | |||
송빈(賓) | 1542 ~ 1592 | 참판공파(參判公派)-파조(派祖) | 의병장 |
20세 | |||
송복(復) | 1937 ~ | 청암공파(晴庵公派)-담안문중(淡安門中) | 교수 |
송은복(銀復) | 1943 ~ | 사천공파(絲川公派)-송정문중(松亭門中) | 시장 |
송승헌(承憲) | 1976 ~ | 사천공파(絲川公派)-송정문중(松亭門中) | 배우, 개명 전 승복(承復) |
21세 | |||
송유걸(裕傑) | 1985 ~ | 사천공파(絲川公派)-송정문중(松亭門中) | 축구선수, 축구코치 |
송유인(裕寅) | 1972 ~ | 사천공파(絲川公派)-송정문중(松亭門中) | 정치인 |
10. 청풍군사계(知淸風郡事系)
<colbgcolor=#0d98ba><colcolor=#ece5b6>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ce5b6> 淸州 宋氏 청주 송씨 |
}}} | |
관향 | 충청북도 청주시 | ||
시조 | 송신의(宋臣義)[8] | ||
인구 | 0명 |
10.1. 개요
고려 말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를 지낸 송신의(宋臣義)를 시조로 하는 본관으로 원래는 이 본관을 청주 송씨(淸州 宋氏)라 칭하였으며, 청원군(淸原君) 송유충(宋有忠)을 시조로 하는 본관을 청주 송씨 청원군 일파(淸州 宋氏 淸原君 一派)라 칭하였다. 3세 송처공(宋處恭) 송처관(宋處寬) 송처검(宋處儉) 형제를 마지막으로 조선 초에 후사(後嗣)가 끊겨 현재 후손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멸성된 본관이다.10.2. 역사적 인물
- 송신의(宋臣義) : 송신의계 청주 송씨 시조로 고려 말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를 지냈다.
- 송구(宋俱) : 신의(臣義)의 아들로 의령감무(宜寧監務)를 지냈다.
- 송처관(宋處寬) : 구(俱)의 아들로 자(字)는 율보(栗甫)이며 시호는 평양(平煬)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집현전부제학(集賢殿副提學), 이조참의중추원첨지사(吏曹參議中樞院僉知事)등을 지냈다.
- 송처검(宋處儉) : 구(俱)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과 중추원첨지사를 지냈다.
11. 여담
- 관향은 청주이지만 청주에서의 청주 송씨의 세거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시조 송유충의 딸은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배위인데 묘소가 청주시 서원구 분평동에 있다는 것 말고는 없을 정도이다.
- 송춘(宋椿)이라는 인물을 시조라고 주장하는 주부공파와 송유충(宋有忠)을 시조로 주장하는 참판공파 간에 시조 정립에 관한 분쟁이 있었는데 여러 고전 문헌에 관한 고증에 의하여 창원지법에서 송춘은 가공 인물이며 송유충이 시조라고 판결났다.
[1]
초휘는 송유경(宋有敬)이며 청원군(淸原君)으로 훈봉되었다.
[2]
초휘는 송유경(宋有敬)이다.
[3]
생부는 정백(廷伯)으로 정남(廷男)은 숙부이자 양부이다.
[4]
말골파(淸谷派)로 불리며 송제룡은 송정백의 두 부인 광주 안씨와 안동 권씨중 안동 권씨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분가해서 살았다.
[5]
송제성의 생부는 송정백으로 숙부인 송정남에게 계자로 입적하여 사천공파를 잇게 되었다.
[6]
하계파(荷溪派)로 불린다.
[7]
영의정
[8]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이다
[9]
청주 경씨가 13000명인데 이보다 더 희귀한 성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