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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03:03:45

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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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인물의 이름
1.1. 실존 인물1.2. 가상 인물
2. 眞我

1. 인물의 이름

대한민국의 이름. 지나와 발음이 같고 진하, 진화[1]와 발음이 비슷하다.

1.1. 실존 인물

1.2. 가상 인물

2. 眞我

무아에 반대되는 개념. 일부 불교도 및 종교인들이 참 나, 참 본성의 의미라고 주장하는 개념이며, 쉽게 말해서 수행을 하다 보면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으며, 비록 육신이 사라져도 그 안에는 진정한 나 자신을 의미하는 에너지가 남아있다고 하는 가설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대다수 불교계에서는 이를 잘못된 불교 개념이라 여겨 부정하고 있는다. 애초에 진아는 불교가 생겨나기 전에 인도에서 존재했던 '아트만'의 개념. 즉 브라만교의 교리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변의 법칙이 없다는 불교의 교리인 무아설과 크게 충돌하기에 이런 진아를 주장하는 불교도들에 대해 불교가 아닌 브라만교를 전파하고 있다라며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다만 팔리어로 된 니까야 원문에서 붓다가 설한 anattā 개념은 단순히 '무아'로 번역되기보다는 '비아(非我)', 즉 '자아가 아님(non-Self)'에 가깝다. 붓다는 니까야 중 " 아난다의 경"에서, '자아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왓차곳따의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즉, 붓다는 적어도 초기불교에서는 '비아'를 설했을지언정 '무아'를 설한 적은 없었으나, 이후 니까야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anattā가 '무아'로 이해되었을 가능성을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를 비롯한 여러 불교학자가 지적해 왔다.

'진아'라는 개념의 등장은 '자아'의 원어인 attā가 지닌, 번역하기 어려운 심오한 뉘앙스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해당 단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거나 감각하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나타낸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해당 정의 외에도 '자아'의 범위를 '완전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있으며, 이 통제력이 발휘되는 대상이나 특성은 attā, 그렇지 않은 대상이나 특성은 anattā라고 한다. anattā의 속성은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해당하며,[2] 불교에서는 니까야 곳곳에 걸쳐서 이를 통해 범부가 자아 혹은 자아의 구성요소라고 여기던 것들이 사실은 '자아가 아님'을 논증하고 있다. 또한 삼법인에서 보듯이, 통제되지 않아 자아가 아닌 것은 모두 불만족(고, dukkha)을 내포하며, 불만족스러운 것은 무상(anicca)하다.[3]

문제는 열반의 경우에도 anattā라고 일컬을 수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 의외로 장로(테로) 및 비구(빅쿠)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열반은 불만족스러운(dukkha) 것에 해당하지 않고, 비영구적인(anicca)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데, 이를 anattā로 볼 수 있느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이다. 미국 상좌부불교 승려인 타닛사로(Thanissaro) 빅쿠는 "무아 개념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해탈을 방해할 수 있다"고 보며, 태국에서 큰 교세를 얻은 담마까야(Dhammakaya) 운동에서도 "붓다의 법신, 혹은 열반은 현상계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안식처이며, 따라서 현상계의 특성인 anattā를 특성으로 갖지 않는다"고 본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담마까야 운동 측은 "법신(담마까야)이 곧 attā"라고 논증함으로써 진아설을 옹호하고 있다. 반면 쁘라윳 빠윳또 상좌는 이러한 견해를 모두 그릇되다고 보아 부정하고 있으며, 상좌부불교 다수의 의견도 열반(nibbana)은 anattā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진아 개념은 불교가 무아 윤회의 원리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도입된 것이다. 유식학파의 사상적 기반이 된 능가경에서는 수행자가 해탈할 때, 여태껏 '나의 것'으로 삼은 대상에 대해 이런저런 망상을 일으키고 경계를 취하며 윤회를 일으키던 상속식이 멸할 뿐이요, 무시 이래로 여여하게 존재해 온 전식과 장식은 멸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업상(業相)은 멸하지만 진상(眞相)은 멸하지 않는다. 만약 진상이 멸한다고 하면, 이는 외도의 단멸론과 차이가 없다.



[1] 다만 진하, 진화의 경우 남성도 다소 사용하여 중성적 이름이다. [2] 신체야 그렇다쳐도, 불교의 관점에서는 사람의 의식이나 생각, 의도 등도 모두 anattā에 해당한다고 본다. 예컨대,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의식에 대해 주도권이 없다. 또한 중독성이 있는 노래에 꽂힌 사람은 이어웜(earworm)을 자기 의지대로 쉽게 생각에서 떨쳐내지 못한다. 음식 맛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스마트폰을 보면서 식사를 하더라도, 강렬한 매운맛이나 쓴맛을 느끼는 순간 의도는 저절로 미각으로 이동한다. 즉, 이 3가지 모두에 대해 인간은 완전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다. [3] 이 anicca에 대해서도, 팔리어 원어에서는 '바라는 상태 그대로 머물러있지 않는다', 즉 비영구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이러한 뉘앙스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무상'으로만 번역되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스리랑카의 와하라까 장로의 견해가 대표적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