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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여요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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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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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고려 초 거란과의 관계2.2. 전쟁 직전 상황
3. 전개4. 결과
4.1. 강동 6주 획득
5. 대중매체6. 관련 문서

1. 개요

제1차 여요전쟁, 第一次 麗遼戰爭, First Goryeo-Khitan Wars

거란 고려를 침공한 세 차례의 대규모 침공인 여요전쟁 중 첫번째 전쟁으로 993년에 일어났다. 고려 북쪽이 초반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큰 국지전없이 반년만에 끝났다.

2. 배경

2.1. 고려 초 거란과의 관계

고려(高麗)와 요(遼) 왕조와의 외교 관계는 915년에 궁예(弓裔)의 태봉(泰封) 정권이 요 왕조에 보검을 선물로 보낸 것이 시초이다. 궁예의 외교 관계 관련 기록이 요사(遼史)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거란(契丹)과의 외교 관계를 꽤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궁예를 몰아낸 왕건(王建)은 재위 초반부터 한반도 밖의 국가들과의 외교에 신경 써서 후량(後梁), 오월(吳越), 후당(後唐), 후진(後晉) 등에 사신을 자주 파견해 이들로부터 책봉을 받고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요 왕조는 918년에 사신을 파견하고, 922년에는 고려에 낙타와 융단을 선물했으며 이에 왕건도 거란에 사신을 보냈다. 이 당시는 아직 후삼국이 갈라져 있고 내부 상황도 불안했기에 왕건은 거란을 적대하지 않고 관계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발해(渤海)가 멸망한 뒤부터 왕건은 후당 · 후진과 협력해 거란을 견제하려 했다. 왕건은 후진의 사신에게 "발해는 나와 결혼했다."는 말을 하며 발해와 고려와의 관계를 강조했으며 거란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로 표현하는 등 기존과는 다른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1]

942년에 요 왕조에서 사신이 와 낙타 50필을 선물로 바치자, 왕건은 사신들을 전부 섬에 유배 보내고 낙타는 모두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묶어 굶어 죽게 만들었다. 이른바 만부교 사건이다. 이로 인해 고려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고, 고려에서는 계속 거란에 대한 적대 노선을 계속 유지해나갔다.

이러한 외교적 모욕을 받았음에도 요 왕조는 고려보다는 후진을 치는 문제가 훨씬 중요했기에 즉각적으로 고려에 압박을 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후진을 멸망시킨 뒤에 잘못된 현지 정책을 실시하고 후진 절도사들의 총반격에 압박을 받아 하남에서 철퇴한 뒤에는 황위 계승 문제와 권력 투쟁 문제로 내부 분열이 극심해 고려에 개입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동부에서는 정안국(定安國) 같은 발해 부흥 세력들이 거란을 상대로 저항하고 있었고 여진족(女眞)들이 국경을 침탈하고 있었다. 반면 고려는 멸망한 발해의 난민들을 계속해서 흡수해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었고, 요 왕조의 팽창을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과의 외교 관계를 재설정하기가 어려웠다.

2.2. 전쟁 직전 상황

고려는 북진 정책과 왕건의 훈요 10조(訓要十條)를 충실히 따라 거란을 배척하는, 한편 송( 북송)과의 친선을 도모했고 광종대인 960년에 본격적으로 송나라와 통교하기 시작했다. 이 때 송(宋)은 북벌을 추진하는 한편, 고려와 협력하려 했고 발해 유민들이 세운 국가인 정안국 송나라와 연대해 거란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는 요와의 전면전이 부담스러워 송의 북벌 제안에 대해 행동으로 나서지 않았고 송은 2차에 걸친 북벌이 실패했다.

게다가 송은 서하왕 이계천(李繼遷)과의 관계가 파탄나서 하서 전선에 대군을 투입해야 했다. 국제적 고립에 빠질 뻔했던 요 왕조는 여유가 생겨 대송 전선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서하왕 이계천을 하국왕(夏國王)에 책봉해 서하(西夏)와 우호 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986년에는 정안국을 무너뜨리고 요동과 한반도 북부 지역의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는 한편, 고려에 사대를 요구해 왔다.

3. 전개

3.1. 침략 예고와 거란의 침공 시작

993년, 여름 5월, 서북의 여진이 거란이 군사를 동원해 침략을 계획한다고 알렸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여진이 속이려는 것으로 여기고 방비 태세를 갖추지 않았으나, 8월에 여진이 다시 알리자 고려 조정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각 도에 병마제정사(兵馬齊正使)를 나누어 보냈다.

10월 요나라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고, 박양유, 서희, 최량에게 북계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거란을 막도록 했으며, 성종이 서경으로 가서 안북부까지 나아가 머무르기로 한다.

3.2. 봉산의 패배로 동요한 고려 조정

소손녕은 봉산군(蓬山郡)[2]에서 윤서안이 이끄는 고려군을 무너뜨리고는 윤서안을 포로로 잡고 봉산을 점령했다. 그 다음엔 거란의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면서 빨리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향해 윽박질렀다. 물론 80만 대군은 소손녕의 허풍이었고 실제로는 많아봐야 10만 이하 병력만 동원했다는 게 통설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러한 요군의 침입에 고려는 매우 동요했으며, 신료들은 "항복하자"(항복론)와 "항복만 하면 받아주겠냐, 땅도 같이 떼줘야지."(할지론)로 나뉘었다. 이때 오로지 서희만이 소손녕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고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다.

3.3. 사기를 되찾은 고려 조정

이어진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이 소손녕의 요군을 격퇴하자 조정은 강화론으로 돌아섰다.

3.4. 서희의 외교 담판

파일:고려_거란_전쟁_자비령_이북_할지론_역사스폐셜.png
자북령 이북 할지론에 의거한 고려 영토

이때 소손녕이 다시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서희는 단신으로 요나라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다만 서희가 파견된 것은 고려 내부의 청야 전술(어차피 요군에 의해 수탈 될 바에 서경(평양)의 곡창을 열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것은 태워버리라는 명령)에 반발해 "그 곡식으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데 버리면 안 됩니다." 라고 하자 ' 그럼 말 꺼낸 네가 가서 협상을 해봐'라며 파견된 것이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939925_STD.jpg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회담은 처음부터 서희와 소손녕의 기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의전 분쟁이다.[5] 소손녕과 서희는 회담의 성격을 결정하기 전에 누가 더 높은 지위인가에 대해 의전 싸움을 벌였으며 결국 서희가 주장한 동등 의전을 관철함으로써 의전 분쟁에서 승리했다.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며 서희에게 절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라고 당당히 되받아쳤다. 이 과정을 두세 번 반복해도 소손녕이 계속 이를 고집하자, 서희도 숙소로 철수하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결국 소손녕이 한발 물러나서, 서로 맞절을 하고 동서로 마주 앉았다. 사실 협상은 현대 국가에서도 협상 전의 기싸움이 적어도 결과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기싸움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오해하기 쉽지만, 이것은 서희가 무턱대고 소손녕에게 강하게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소손녕의 진짜 목적인 '회담 타결'과 실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요군의 약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사실 서희는 이 시점에서 '요군이 진심으로 침략하겠다는 의지가 없다. 더 강하게 응수해도 되겠다!'고 내심 상황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요나라의 주적은 고려가 아닌 연운 16주를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이던 송나라였고, 고려 침공은 요 왕조가 송의 북벌을 막아내고 송 - 서하 전쟁으로 여유가 생긴 상황에서 동 - 서로 영토를 확장하던 요 왕조가 송과 고려와의 연계를 끊기 위해 시행한 일이었다. 이미 송과는 몇 차례에 걸쳐 사투를 벌였고, 1차 여요 전쟁 시기에도 송과 요는 전쟁 중이었으며 994년에 송의 사신이 화친을 청했다 거부당하는 일도 있었다. [6]

회담은 고려가 어느 나라를 계승했으며(역사적 연고권), 왜 고려가 가까운 요나라가 아니라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느냐(외교 문제)는 이야기를 주된 화두로 삼았다.
서희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거란의 군영으로 갔는데, 소손녕과 더불어 동등한 예로 대하면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소손녕이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기면서 서희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新羅)의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의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범하여 갉아먹고 있다. 또 우리와 더불어 영토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宋)을 섬기고 있으니, 우리 대국(大國)이 이 때문에 토벌을 하러 온 것이다. 이제 영토를 나누어 바치고 조빙(朝聘)의 예를 취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렇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하고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토지의 경계를 논하자고 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7]도 모두 우리의 영역에 있는 것이 되는데, 어찌 침식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역시 우리의 영역 안쪽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도적질하여 기거하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변덕을 부리므로 길이 막혀 통하지 못함이 바다를 건너는 것 보다 더 심하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주어 성(城)과 보(堡)를 쌓고 길이 통하게 하여 준다면 감히 조빙의 예를 갖추지 않겠는가. 장군이 나의 말을 가지고 가서 천자께 전달한다면, 어찌 불쌍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말의 기운이 강개하므로 소손녕도 억지로 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마침내 그대로 갖추어서 아뢰니, 거란의 황제가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강화를 요청하였으니, 마땅히 군사들을 철수시키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서희가 거란의 군영에 7일간 머무르다가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강나루로 나와 맞이하고, 곧 시중 박양유로 하여금 예폐사(禮幣使)가 되어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뵙게 하였다.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평정하여 옛 땅을 수복한 후에야 조정에 들어가 뵙고 통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8] 지금은 겨우 강 안쪽만을 수복하였으니, 강 바깥쪽까지 점령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의 예를 취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게 될까 두렵다.”
라고 하고는 마침내 보내었다.
- 고려사절요 권2, 성종 12년 10월

4. 결과

4.1. 강동 6주 획득

이 회담으로 요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북도 서부 일대인 '안북부로부터 압록강 동쪽까지 280리(從安北府 至鴨江東 計二百八十里)' 영토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는 새로 얻은 영토에 6개 주를 설치하니 이곳이 바로 강동 6주[9]이다. 위의 대화는 꽤나 간략하지만 서희가 거란 진영에 머무른 시간은 7일이었다. 다만 실제 담판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0]
파일:강동6주.png

일부 도서에서 서희의 '명분론의 승리'라고 칭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쪽이 아니라, 거란이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속셈과 고려에 대한 걱정, 변경에서 활개치는 여진족이라는 국제정세를 잘 파악한 서희의 정세 파악과 협상 능력을 중점에 두어야 한다.

국내 위인전이나 교양 역사서, 교과서에선 소손녕이 멍청해서 서희에게 설복당했다거나, 혹은 고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에 무턱대고 일리가 있다며 물러났다는 내용을 싣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 몇 마디에 자기 나라 영토를 떼어주고 좋아서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소손녕이 자기 마음대로 자국 영토를 고려한테 넘겨줬다면 당장 요 성종부터 소손녕을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의 반박에 소손녕이 순순히 물러났던 것은 거란의 진짜 목표가 고려의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방증한다.

당시 요나라 송나라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배후의 고려가 송을 돕는답시고 뒤에서 치고 들어오면 골치가 아팠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고려와 친교를 맺거나, 적어도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게 만들어야 했다. 즉, 요나라는 고려와 협상을 해 배후를 안정시키고 송 - 고려 양국 간의 연계를 끊으려 했던 것일 뿐, 고려에서 국력을 소모할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이 계획의 일환이었으며 소규모 전투만을 반복하다가 안융진 전투 이후로 거란 쪽에서 지속적으로 협상을 요구했다. 소손녕은 당시 거란의 의도를 충실히 대변했던 것뿐이다. 그 뒤 고려는 잠시나마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쓰면서 거란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서희는 이걸 간파하여 이 부분에서만큼은 고려가 갑질을 해도 괜찮으리라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애당초 강동 6주는 거란의 영토도 아니었다. 본래 6주는 발해의 영토였으나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한 후, 발해인 지배층 대부분은 거란으로 끌려가거나 고려에 귀부했다. 게다가 요 태종이 요서로 철수하고 동란국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6주 지역은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래서 강동 6주는 여진(말갈) 세력이 뚜렷한 정치적 구심점도 없이 살고 있었다.

요는 초창기에 영토가 너무 커져서 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에 발해 지역도 동란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통제했고, 통치의 편리를 추구하고 발해인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요양 지역으로 발해인들을 이주시켜서 요동에 대한 통제력은 매우 떨어지는 상태였다. 애초에 압록강과 백두산 인근의 여진족을 정벌해 복속시키고 요동 일대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한 게 성종 초의 일이었다.

서희는 요나라와 고려가 힘을 합쳐 여진족을 몰아내고 통상로를 만들면 거란에 사대할 것이라 말했는데, 거란 영토를 할양받은 것이 아니라 거란이 고려가 압록강 이남의 여진 세력을 밀어내고 강동 6주를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고 이를 거란 황제가 하사하는 식으로 형식만 갖추겠다는 뜻이다.[11]

앞뒤로 적을 만들 순 없었던 요의 입장에서 이 정도면 충분했다. 또한 거란 역시 고려가 사신을 통교하기 위해 압록강 동쪽에 사는 여진족을 축출하는 동안, 역시나 사신을 통교하기 위해 압록강 서쪽에 사는 여진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결과적으로 고려와 거란 모두 이득이 된 외교 담판이 되었다.

이때 요나라는 고려가 그렇게 쉽게 강동 6주를 평정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요충지인 6주의 방위를 단단하게 해두어 수차에 걸친 전쟁에서 요군이 큰 고생을 하게 만들었다. [12][13]
갑오 13년(994)송 순화 5년, 거란 통화 12년
봄 2월. 소손녕(蕭遜寧)이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근래에 황제의 명[宣命]을 받들기를,
‘다만 고려 신의와 호의로써 일찍부터 통교(通交)하였을 뿐 아니라 국토도 서로 맞닿아있다. 비록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데에 반드시 규범과 의례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시작을 잘 궁구하여 마지막을 잘 맺는[原始要終] 길은 모름지기 〈우호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데에 있다. 만약 미리 대비책을 세워두지 않는다면 사신의 왕래가 도중에 막히게 될까 염려되니, 이에 저 나라와 더불어 상의하여 요충지가 되는 길목에 성(城)과 해자(垓子)를 조성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의 명에 따라서 스스로 헤아려보니 압록강(鴨綠江) 서쪽 마을에 5개의 성을 축조하면 좋을 듯하여,[14] 3월 초에 성을 쌓을 곳에 가서 축성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왕께서 먼저 〈신하들을〉 거느리고 안북부(安北府)에서부터 압록강 동쪽에 이르는 280리 사이에 적당한 곳을 답행(踏行)하여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시고, 아울러 성을 쌓도록 명하여 역부(役夫)들을 징발해 보내어 동시에 시작하게 하시며, 쌓아야 할 성의 총 수를 빨리 회신하여 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일은 수레와 말이 오가게 하여 멀리 조공을 위한 길을 열고 영구히 조정을 받들어 편안하게 할 계책에 스스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2, 성종 13년 2월

이후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전연의 맹을 맺은 요나라는 고려와의 관계도 재설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요의 목표는 강동 6주의 병탄이나 고려의 완전한 복속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침공의 명분을 찾던 요 왕조는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고 요를 사대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와, 고려 국왕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명분으로 하여 2차 침략을 감행했다.[15]

한편 고려는 강동 6주를 얻음으로써 압록강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고 이 지역은 북방 방어의 중심지로서 여요 전쟁 때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요 왕조가 멸망한 뒤, 보주를 얻게 되면서 압록강 이남이 완전히 고려의 영토에 편입된다. 그런데 서희의 원래 구상은 강동 6주를 되찾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압록강 너머까지도 염두에 둔 듯한데, 《 고려사절요》에는 소손녕과 협상하고 돌아온 뒤, 요나라에 사신을 보내려는 성종에게 "제가 소손녕과 이야기하기로는 압록강 안팎으로 우리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을 몰아내고 옛 땅을 수복한 뒤에 거란과 국교를 맺겠다고 약속하고 왔습니다만,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의 땅만 되찾았을 뿐입니다. 압록강 바깥의 땅까지 마저 회수하고 나서 요나라과 국교를 맺어도 늦지 않을 겁니다."라고 아뢰었지만, 성종은 "그럴 때까지 거란이 기다려주지 않을 텐데? 괜히 시간 끈다고 트집 잡혀서 전쟁 나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다."라며 거란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예폐사(禮弊使)로 보내 국교를 맺었다고 한다. # 서희가 여러 모로 보통 인물이 아니었던 셈이었다.

한국고대전쟁사 시리즈의 저자 임용한 박사에 의하면, 청천강 이북 지역이 여요전쟁 및 대몽항쟁에서 제대로 된 방어전을 펼 수 있었던 곳이라며 서희의 담판에 대해 꽤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지역의 흥화진(지금의 의주), 귀주 등의 지명은 이후 여진과의 전쟁, 대몽 항쟁, 홍건적과의 전쟁 등 고려의 대외 항쟁사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름이 등장한다. 가히 고려 국방 전략 상 최중요 지역이라 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1차 침입 당시 변변한 전투는 없었지만 고려는 외교관 한 명으로 가히 나라를 구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의미있는 전략적 승리를 거뒀다. 물론 그 외교관의 뒷배가 되어줄 만큼 고려군이 버텨주고 있었고, 외교관도 자기 뒷배를 믿고 당당하게 나갔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5. 대중매체

6. 관련 문서



[1] 이는 태조 왕건 개인의 인식 뿐만이 아니라, 발해 멸망 후 유입된 유민들과 발해 지도층에 대한 회유를 위해 취한 태도이기도 했다. 실제로 유훈인 훈요십조에도 거란을 배격하는 뉘앙스의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2] 현재 북한의 황해북도 봉산군이 아닌 평안북도 구성과 태천 사이에 있었다. [3] 여요전쟁 시기를 다룬 대하드라마이자 역사왜곡이 상당한 천추태후에서도 이 부분은 제대로 고증하여 소손녕이 80만 대군이라고 허풍을 떨었지만 실제 데려온 군사의 숫자는 6만 정도였고, 안융진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지속적으로 협상을 요구하는 것까지 고증했다. [4] 안융진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까지도 불명인데 주류 사학계는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의거해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 내동리 안융산에 위치한 토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지리적 이유로 광종이 개척한 평안북도 박천군 덕안면의 송성(松城)으로 비정하는 이들도 있다. 후자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경상국립대학교 사학과 교수 윤경진이 있다. [5] 의전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의전이라는 것은 유럽이든 아시아든 어디에서든 간에 존재했으며, 의전 싸움으로 인해 회담 자체를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 [6] 이 상황은 나중에 조선- 청나라- 명나라 사이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광해군 인조도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고려와 유사하였다. 즉 친화(華)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요령껏 오랑캐(夷) 자극을 자제하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 역시 정묘호란 때는, 납득할 수 있는 조건으로 후금의 병력을 되돌리는 데 성공한다. 병자호란때는 선전포고도 없이 청나라가 처들어왔고 당시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압록강이 얼어붙어서 말을 타고 쉽게 건널 수 있었으며 상인과 사신으로 위장하고 들어온 청군들과 비정상적으로 빨랐던 진격 속도, 청군의 평안도 방어시설들을 무시한 채 빠르게 한양으로 진격하는 기동 작전,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히면서 근왕군들이 보급과 병력 소집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 남한산성으로 근왕하러 진군하자 각개격파, 인조 정권의 판단미스로 진 것이다. 고려는 강조가 대군을 끌고 야전을 벌일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었고, 강조가 패배해서 야전군이 소멸한 뒤에도 강동 6주의 요새들과 서경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양규를 비롯한 맹장들이 요군의 후방을 미친 듯이 두들기고 있어서 더 이상 버티면 황제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요 왕조도 항복 대신 친조 약속만 받고 순순히 물러갔다. 거기에 고려는 3차 여요전쟁에서 이전의 굴욕을 복수할 수 있었다. [7] 현재의 랴오양시로 고구려 시절의 요동성. [8] 이것이 서희 자신이 임금에게 보고한, 외교담판의 핵심이다. 여진족 축출에 대한 요나라의 묵인을 얻어낸 게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9] 흥화진( 의주군), 용주( 용천군), 통주( 선천군), 철주( 철산군), 귀주( 귀성군), 곽주( 곽산군)이다. 여기의 귀주는 귀주대첩의 그 귀주. [10] 예를 들어서 현대의 외교 협상에서도 5일(월요일~금요일)짜리 협상을 한다 했을 때, 협상 수석대표들이 실제 담판을 하면서 협상의 큰 틀을 짜는 시간은 1일 중 길어야 2~3시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본국과 연락하며 협상 조건이 본국 방침에서 수용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는 작업과, 수정 제안을 위해 회담 실무진과 수석대표 간 사전조율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내용은 요약된 것일지언정 그리 많이 축소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기록에 남은 공식회담 외에 치열한 막후협상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과거나 현대나 외교전에서 변함이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현대의 외교협상은 실시간 통신으로 바로바로 피드백이 가능한 반면, 전근대의 협상은 기마 전령이 죽어라 달려도 최소 며칠이나 몇 주씩은 걸려야 하니 현장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왕이 하나하나 허가하려면 협상에 몇 년씩 걸릴 테니 말이다. [11] 요나라에게서 강동 6주의 점령을 인정받은건 매우 큰 의미가 있는데 강동 6주의 지역은 본래 발해의 영토였고 요나라는 발해의 왕에게서 항복을 받아낸 나라다. 그러므로 현재엔 행정권이 미치지 못하지만 이러한 인정을 받아내지 못했다면 요나라 또한 강동 6주에 대한 강력한 명분을 계속 가지고 있고 고려가 요나라를 무시하고 차지하기도 어려운 상태가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까지 강동 6주 지역을 먹을 생각을 못했던 이유 중 하나였기도 했다. 실제로 요나라가 이것을 이용해 고려에게 계속해서 강동 6주를 뱉어내라고 요구했다. [12] 애초에 이 지역은 고구려가 대중국 1차 방어선인 요동에 이어 수도 평양을 방어하기 위한 2차 방어선으로 설정한 지역이다. 통일 중국 왕조의 공세를 수십년 동안 막아낸 고구려가 방어선으로 설정한 곳이니 방어력은 입증된 셈이다. 물론 이때는 1차 방어선으로 강동 6주 지역과 연계되어야 할 요동을 잃었기 때문에 방어력은 고구려 시절에 비해 다소 떨어졌다. [13] 강동 6주 전체가 무적의 철벽이었던 것은 아니어서 몇 번씩 함락당한 적도 있다. 특히 다른 곳보다 곽주가 많이 침공당하고 빼앗겼는데 한번은 곽주성이 함락당했다가 양규가 재탈환하였고, 2차와 3차 여요전쟁이 일어나기 전 야율세량과 소굴렬이 이끄는 거란군에 빼앗긴 적이 있다. 단 귀주 대첩 이후로 강동 6주가 다시 넘어가지 않은걸 보면 이후 되찾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4] 해석하자면, 사신을 통교한다는 명분으로 압록강 서쪽 여진족에 대한 요나라의 통제력을 강화하겠다는 말이다. [15] 고려가 친조도 거부하고, 요를 거스를거면 강동 6주나 토해내라는 요나라의 요구도 거부하며 요와 고려 사이에 조금씩 갈등과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6] 후에 현종의 세 번째 황후가 되면서 현종 뒤를 잇는 9대 덕종과 10대 정종의 모후가 되는 원성황후가 된다. [17] 이 발언은 한참 후인 29회에서 현종이 유진과 강감찬 앞에서 서경에 남아 군사들을 다독거릴 때 다시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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