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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정치가, 문인인 정철의 평가를 서술한 문서.2. 정치인으로서의 평가
한마디로 전형적인 아부꾼인데 능력은 곽도(郭圖)보다 못하다고 요약할 수 있다. 뛰어난 창작 능력으로 문학사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일반적으로 문학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우선 알콜중독으로 업무에 소흘한 기록이 자주 보이며 매우 아집이 강하고 속이 좁아 주변에 사람들이 다가서지 않는 괴팍한 성격이었다. 이렇듯 대인관계가 개판이었던 그에게도 온건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인배가 더러 있다. 율곡 이이와 서애 류성룡이 바로 그 대인들이다.[1]정철도 이이에 대해서는 고마워했는지 이이가 죽자 "나하고 친해 봐야 좋은 거 없었을 텐데 율곡 그 친구는 30년간 관대히 대해주었다. 내 안 좋은 성격 때문에 골치 꽤 앓았으니 절교할 만도 했을 텐데."라고 추모하기도 했다. 사실 이이는 정철을 "지조 있는 선비"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율곡이 정철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게, 그 당시에 고독했던 율곡의 가치를 인정해 주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과 같은 서인 계열에 속한 백인걸, 박순, 성혼, 정철 정도였다. 실제로 정철은 귀양을 가면서도 이이를 걱정하기도 했다.
류성룡은 당파가 남인이었는데도 정철과 무난한 관계였으니, 류성룡이야말로 진정한 대인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남인이 온건파라지만, 정철이 남북을 망라한 범동인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인식됐는지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남인 내부에서도 정철과 관계를 끊지 않는 류성룡을 원망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북인은 아예 대놓고 류성룡을 깔보고 씹어댔다. 또한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노련한 정치가들은 반대 당파와의 관계에도 신경을 많이 쓰거나, 현대에도 정당이 달라서 국회에서 서로 언성을 높이거나 으르렁거려도 사적으로는 매우 친밀하게 지내는 정치인들도 있는 것을 생각하면, 류성룡이 정철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나름대로의 정치적 안배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밑에 후술하듯 정철의 술버릇만큼은 류성룡이 못 넘겼다.
그 외에 노선이 일치하여 친밀했던 인물로는 같이 서인을 이끌어갔으며 정철과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정적들을 제거해 욕을 먹은 성혼도 존재한다. ' 재 너머 성권농 집에 술 익었다는 말 어제 듣고' 로 시작하는 정철의 시조에 등장하는 성권농이 바로 당시 권농관의 직책에 있었던 성혼이다.
한때 정철의 부관이자 현대에 와서는 의병장으로 유명한 중봉 조헌 역시 특기할 만한데 조헌은 그 다혈질에 성깔 더럽기로 악명 높은 정철이 자신의 상관으로 부임하자 사퇴를 청원했으나 정철은 "그럼 잠깐만이라도 같이 일해보고 그래도 싫으면 가라"며 조헌의 스승인 이이를 통해 극구 말린다.
결국 그렇게 시작된 이후 둘은 나름대로 원만한 관계가 된다. 조헌 또한 기축옥사 당시 앞장서서 정여립의 측근들과 동인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과격파였기 때문에 친해졌다는 주장이 있는데 완전한 거짓이다. 조헌은 기축옥사 당시에 유배된 상태였고 기축옥사로 서인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선조는 조헌이 경솔하단 이유로 기용하지 않았다.
이 때의 조헌은 유배에서 돌아오면서 상소를 올렸는데, 선조는 조헌의 상소를 접하고는 그를 '간귀'라 평하며 "앞으로도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다."(즉 또 허튼 짓 하면 마천령 너머 함경도로 유배보내겠다) 는 말로 경고했으며 조헌이 재차 상소를 올리자, 정말 간귀라 부르며 비난했다. 따라서 조헌은 기축옥사로 동인계 인사들을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조헌은 동인의 영수 이발과 본래 친한 사이였지만 이발이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면서 절교했는데 기축옥사로 이발의 집안이 화를 입자 조헌이 이발의 노모인 윤씨를 찾아가 뵙고 이발의 첩에게 옷 한벌을 주기도 했다 기축옥사 이후 이발의 집안이 언급되는 일이 있으면 조헌이 매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정철과 조헌은 정치적 노선이 비슷했음에도 으르렁댔다니 이건 아무래도 일종의 동족혐오인 듯 싶다. 또한 같은 서인으로 정여립을 혐오해 정여립을 중용하면 사림 전체의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한 이경중하고도 사이가 안좋았다. 심지어 이경중은 병사할 정도.
참고로 선조실록에서는 그를 아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卒)하였다. 【철은 논박을 받고
강화(江華)에 가 있다가 졸하였다. 】
사신은 논한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남의 손을 빌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에 대응하는 재간도 모자라 처사(處事)가 소루하였기 때문에 양호(兩湖)의 체찰사(體察使)로 있을 때에는 인심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전대(專對)에 잘못을 저지르는 등 죄려(罪戾)가 잇따랐으므로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26년 전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사신은 논한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남의 손을 빌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에 대응하는 재간도 모자라 처사(處事)가 소루하였기 때문에 양호(兩湖)의 체찰사(體察使)로 있을 때에는 인심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전대(專對)에 잘못을 저지르는 등 죄려(罪戾)가 잇따랐으므로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26년 전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선조실록이 쓰일 당시는 정철이 이미 몰락한 시점임을 염두에 둬야겠지만, 정철이 선조에게 그토록 충성을 바친 결과가 이 모양이다. 다만 선조실록은 철저하게 동인, 그것도 강경파인 북인의 시각에서 쓰였으며 심지어 평생 동서인의 화합에 힘썼던 율곡 이이마저도 매우 심하게 매도하고 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참고로 정철에 대한 (서인의 시각에서 쓰인) 선조수정실록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전(前)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하였다. 과거에 정철이 부사(副使) 유근(柳根)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경사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동로군문(東路軍門)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왜적이 이미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다.’고 속여 말했으므로, 본국의 주문(奏文)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정철(鄭澈) 등이 돌아온 뒤에 병부(兵部)가 주문(奏文)하기를,
"전에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역시 ‘왜적이 이미 철수해 돌아갔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유근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것은 실로 병부에서 속임수로 꾸며낸 말입니다. 사신 일행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이미 변하여 먼저 정철을 제거하려고 하여 대간(臺諫)이 이를 인해 정철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상은 다만 체직시키고 추고하도록 명하였는데, 유근 및 서장관(書狀官) 이민각(李民覺)과 역관(譯官) 등은 모두 연루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유언 비어가 비등하여,
"정철이 북경에 가서 오로지 성궁(聖躬)의 과실만을 은밀히 중국 조정에 전파시켰다. 그러므로 황제 칙서 속의 추사(醜詞)들은 모두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였다.
정철은 강화(江華)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 향년은 59세였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다.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에게 종학(從學)하였는데, 기대승은 자주 그의 결백한 지조를 칭찬하였다. 그의 누나는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되고, 누이동생은 계림군(桂林君)의 아내가 되었다. 을사년의 화에 부형(父兄)이 관여되었으나 정철은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어린아이 때 동궁(東宮)을 드나들었는데, 명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 정철과 유희(遊戲)하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정철이 장원에 등제한 방목(榜目)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액문(掖門) 안에서 특별히 주찬(酒饌)을 내리라고 명하니, 정철이 사양하기를,
"이미 출신(出身)한 이상 남의 신하된 입장에서 감히 이런 사례(私禮)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명종(明宗)이 주찬을 내릴 것을 중지시키고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나가도록 명한 뒤 누대 위에서 그가 가는 것을 바라보았으니, 은권(恩眷)이 특별하였다. 얼마 후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대중(臺中)에서는 바야흐로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사건을 논하면서 법대로 처벌할 것을 청하고 있었다. 명종(明宗)이 친속으로 하여금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정지하도록 하였는데, 정철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정철은 파면되어 광주(光州)에 돌아가 있게 되었는데, 여러 번 청망(淸望)에 주의(注擬)되었으나 3년 동안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
선조 초년에 전랑(銓郞)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당론이 갈라지자 그는 한쪽만을 극력 주장하다가 시론(時論)에 원수시되었는데, 상의 권애(眷愛)를 힙입어 구제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신묘년에 이르러서는 상의 권애도 식어서 거의 죽음을 당할 뻔했는데 이덕형(李德馨)이 구제해 준 덕분에 조금 완화되었다. 그 뒤 변란을 인하여 폐고(廢錮) 중에서 기용되었으나 또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는 처신을 너무나도 모가 나게 하였으므로 유성룡(柳成龍)이 평소에 그를 미워하였다. 정유년에 유성룡이 탄핵을 받았는데, 논자(論者)들이 뇌물을 탐했다고 무고하면서 미오(郿塢)에 비유하자, 유성룡이 탄식하기를,
"지난번에 논자들이 계함(季涵)을 가차없이 공격하면서도 탐비(貪鄙)로는 지목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의 처신이 저 계함에 미치지 못했단 말인가." 하였다.
언젠가 정철이 최영경(崔永慶)을 죽인 일에 대해 말하자 종사관(從事官) 서성(徐渻)이 그렇지 않다고 극력 변론하니, 유성룡이 말하기를,
"계함이 항상 떳떳하게 스스로 이 일을 해명하였으나, 나는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이었다고 마음속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귀로 그 말을 듣고도 답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그 사람은 입이 곧아 자기가 한 일은 반드시 숨기지 않았을 인물이다. 그러니 그대의 말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흠(申欽)은 논하기를,
"정철은 평소 지닌 풍조(風調)가 쇄락(灑落)하고 자성(資性)이 청랑(淸朗)하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였다.
한때 정철을 논한 자가 간적(奸賊)으로 칭하자, 풍문이 퍼져 모든 사람이 뇌동하여 정철을 정말 소인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평소 정철을 아는 자들도 여론에 현혹되어 그가 정말 소인인가 하고 의심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자고로 소인이라 칭할 때에는 3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고총(固寵)이요, 둘째는 첨미(諂媚)요, 셋째는 부회(附會)인 것이다.
정철이 적소(謫所)로부터 소환되어 언젠가 빈청(賓廳)에 앉아 있을 때 참판(參判) 구사맹(具思孟)과 지중추(知中樞) 신잡(申磼)이 동좌했었는데, 별감(別監) 한 사람이 안에서 주찬(酒饌)을 가지고 나와 말을 꾸며 이야기하기를,
"안에서 모든 재상들이 함께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기실은 구사맹과 신잡이 모두 궁금(宮禁)과 인척관계에 있기 때문에 귀인(貴人)이 다른 손님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사로이 보내온 것이었다. 이성중(李誠中)이 그 자리에 있다가 소반과 젓가락을 가져와 음식을 정승 앞에 나눠 드리도록 하자, 정철이 말하기를,
"이 음식은 구 참판과 신 지사가 먹어야 마땅하니, 대신이 참여해선 안 된다." 하고는 곧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말이 대내에 들리자 정철이 그 이튿날 체찰사(體察使)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첨미·고총을 하지 않았다는 밝은 증거라 하겠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발(李潑)과 이산해(李山海)는 한때 권세를 장악했던 자들로서 정철은 그들의 친구였으니, 정철의 재주로서 조금만 비위를 맞추었더라면 어찌 낭패를 당하여 곤고하게 되어 종신토록 굶주린 신세가 되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기꺼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부회(附會)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
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三司)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사(貪邪)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았다.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그러나 권간(權奸)과 적신(賊臣)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철은 조정에서 앉은 자리가 미처 따스해질 겨를도 없이 정승이 된 지는 겨우 1년 남짓하였다. 밝은 임금이 스스로 팔병(八柄)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산해·유성룡과 세 사람이 아울러 정승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해가 특히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었으니, 정철이 어떻게 권세를 부릴 여지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변론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선조26년 전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전에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역시 ‘왜적이 이미 철수해 돌아갔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유근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것은 실로 병부에서 속임수로 꾸며낸 말입니다. 사신 일행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이미 변하여 먼저 정철을 제거하려고 하여 대간(臺諫)이 이를 인해 정철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상은 다만 체직시키고 추고하도록 명하였는데, 유근 및 서장관(書狀官) 이민각(李民覺)과 역관(譯官) 등은 모두 연루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유언 비어가 비등하여,
"정철이 북경에 가서 오로지 성궁(聖躬)의 과실만을 은밀히 중국 조정에 전파시켰다. 그러므로 황제 칙서 속의 추사(醜詞)들은 모두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였다.
정철은 강화(江華)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 향년은 59세였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다.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에게 종학(從學)하였는데, 기대승은 자주 그의 결백한 지조를 칭찬하였다. 그의 누나는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되고, 누이동생은 계림군(桂林君)의 아내가 되었다. 을사년의 화에 부형(父兄)이 관여되었으나 정철은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어린아이 때 동궁(東宮)을 드나들었는데, 명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 정철과 유희(遊戲)하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정철이 장원에 등제한 방목(榜目)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액문(掖門) 안에서 특별히 주찬(酒饌)을 내리라고 명하니, 정철이 사양하기를,
"이미 출신(出身)한 이상 남의 신하된 입장에서 감히 이런 사례(私禮)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명종(明宗)이 주찬을 내릴 것을 중지시키고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나가도록 명한 뒤 누대 위에서 그가 가는 것을 바라보았으니, 은권(恩眷)이 특별하였다. 얼마 후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대중(臺中)에서는 바야흐로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사건을 논하면서 법대로 처벌할 것을 청하고 있었다. 명종(明宗)이 친속으로 하여금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정지하도록 하였는데, 정철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정철은 파면되어 광주(光州)에 돌아가 있게 되었는데, 여러 번 청망(淸望)에 주의(注擬)되었으나 3년 동안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
선조 초년에 전랑(銓郞)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당론이 갈라지자 그는 한쪽만을 극력 주장하다가 시론(時論)에 원수시되었는데, 상의 권애(眷愛)를 힙입어 구제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신묘년에 이르러서는 상의 권애도 식어서 거의 죽음을 당할 뻔했는데 이덕형(李德馨)이 구제해 준 덕분에 조금 완화되었다. 그 뒤 변란을 인하여 폐고(廢錮) 중에서 기용되었으나 또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는 처신을 너무나도 모가 나게 하였으므로 유성룡(柳成龍)이 평소에 그를 미워하였다. 정유년에 유성룡이 탄핵을 받았는데, 논자(論者)들이 뇌물을 탐했다고 무고하면서 미오(郿塢)에 비유하자, 유성룡이 탄식하기를,
"지난번에 논자들이 계함(季涵)을 가차없이 공격하면서도 탐비(貪鄙)로는 지목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의 처신이 저 계함에 미치지 못했단 말인가." 하였다.
언젠가 정철이 최영경(崔永慶)을 죽인 일에 대해 말하자 종사관(從事官) 서성(徐渻)이 그렇지 않다고 극력 변론하니, 유성룡이 말하기를,
"계함이 항상 떳떳하게 스스로 이 일을 해명하였으나, 나는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이었다고 마음속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귀로 그 말을 듣고도 답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그 사람은 입이 곧아 자기가 한 일은 반드시 숨기지 않았을 인물이다. 그러니 그대의 말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흠(申欽)은 논하기를,
"정철은 평소 지닌 풍조(風調)가 쇄락(灑落)하고 자성(資性)이 청랑(淸朗)하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였다.
한때 정철을 논한 자가 간적(奸賊)으로 칭하자, 풍문이 퍼져 모든 사람이 뇌동하여 정철을 정말 소인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평소 정철을 아는 자들도 여론에 현혹되어 그가 정말 소인인가 하고 의심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자고로 소인이라 칭할 때에는 3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고총(固寵)이요, 둘째는 첨미(諂媚)요, 셋째는 부회(附會)인 것이다.
정철이 적소(謫所)로부터 소환되어 언젠가 빈청(賓廳)에 앉아 있을 때 참판(參判) 구사맹(具思孟)과 지중추(知中樞) 신잡(申磼)이 동좌했었는데, 별감(別監) 한 사람이 안에서 주찬(酒饌)을 가지고 나와 말을 꾸며 이야기하기를,
"안에서 모든 재상들이 함께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기실은 구사맹과 신잡이 모두 궁금(宮禁)과 인척관계에 있기 때문에 귀인(貴人)이 다른 손님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사로이 보내온 것이었다. 이성중(李誠中)이 그 자리에 있다가 소반과 젓가락을 가져와 음식을 정승 앞에 나눠 드리도록 하자, 정철이 말하기를,
"이 음식은 구 참판과 신 지사가 먹어야 마땅하니, 대신이 참여해선 안 된다." 하고는 곧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말이 대내에 들리자 정철이 그 이튿날 체찰사(體察使)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첨미·고총을 하지 않았다는 밝은 증거라 하겠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발(李潑)과 이산해(李山海)는 한때 권세를 장악했던 자들로서 정철은 그들의 친구였으니, 정철의 재주로서 조금만 비위를 맞추었더라면 어찌 낭패를 당하여 곤고하게 되어 종신토록 굶주린 신세가 되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기꺼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부회(附會)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
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三司)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사(貪邪)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았다.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그러나 권간(權奸)과 적신(賊臣)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철은 조정에서 앉은 자리가 미처 따스해질 겨를도 없이 정승이 된 지는 겨우 1년 남짓하였다. 밝은 임금이 스스로 팔병(八柄)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산해·유성룡과 세 사람이 아울러 정승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해가 특히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었으니, 정철이 어떻게 권세를 부릴 여지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변론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선조26년 전 인성부원군 정철의 졸기
참고로 수정실록이 편찬되었다면 양쪽 다 봐야 한다. 어차피 시선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건 똑같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은 동인 강경파인 북인 중에서도 대북의 주도로 작성되어서 심지어 남인들마저 비판하고 있고, 반대로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이후에 작성되어서 이쪽은 이쪽대로 자기들 편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반대당파인 동인 일부인 남인도 호평해 준 수정실록이 괜찮아보이는데 이건 남인들과 손을 잡지 않으면 정국운영이 어려웠던 인조 시기 정세를 무시한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남인은 서인을 더 높이기 위한 장치로 동원된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단적으로 수정실록은 유성룡이 정철을 싫어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런 유성룡이 정철이 청렴한 처신에 있어서는 자기보다 더 낫다고 하는 장면이나 역시 정철을 높이 평가하는 장면을 넣어서 정철을 높이고 유성룡을 낮추고 있다. 이 때문에 양측이 모두 똑같은 평가를 했다면 양측 모두에게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위치가 아닌 경우 한정으로 명백한 사실인 것이고, 만일 특정 부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면 어느 쪽이 사실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 된다.
다만 수정실록 내에서 정철이 권신과 악독한 정치인이 아니라고 한 근거들은 전부 정철의 개인적인 일화나 사관의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검증이 불가능한 일화만으로 정철이 악독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거기에 실록에는 소인배의 요소로 고총(固寵 : 변하지 않는 총애를 받음), 둘째는 첨미(諂媚 : 아첨함), 셋째는 부회(附會 : 억지로 끌어대어 이치에 맞게 하는 것)을 들면서 정철은 이에 해당하지 않으니 소인배가 아니라고 평가하는데, 사실 정철은 이 요소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행적을 보여준다. 자신의 관람 때문에 벌어진 직무유기, 행정력 낭비를 자연에 대한 찬양과 조화로 합리화하고 있다. 같은 시대 같은 파벌의 조헌은 왕에게 지부상소를[2] 올릴 정도로 강직했고, 좀 먼 뒷날이지만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이렇게 관람 다니면서 직무유기나 백성들 방해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정철의 행동은 선비로서도 지방관으로서도 완벽히 실격점이다.
그리고 이런 행보와 (비록 논란은 많지만)[3] 기축옥사를 공식적으로 주도하고 진행한 인물은 정철 자신이었고 그 과정에서 10살짜리 어린애나 80대 노파가 고문사하는 등,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악독한 정치가라고 볼 수밖에 없는 사건들과 행보들이 즐비했다. 때문에 수정실록에서도 "정철은 세간에서 악독한 신하로 평가받는다"는 점은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수정실록의 기록 중 명종과 경양군의 기록은 명종실록에는 당시 정철은 별 역할을 하지 못했고, 경양군 처벌 뒤에도 정철은 승진해서 홍문관 부교리라는 요직까지 승진한 점등 모순되는 기록이 너무나도 많다. 다른 것은 몰라도 승진 내역은 조작이 힘든 점을 생각해 보면 수정실록의 신빙성은 더 떨어진다. 거기에 원래 수정실록은 당파적 왜곡이 심각한 실록이고, 그중에서도 정철 기록은 너무나도 왜곡과 은폐가 많아 평가도 믿기 힘든게 현실이다.다만 김장생이 인조반정 이전인 광해군 13년에 쓴 정철의 행장에 정철이 경양군을 처벌했다고 나오는데 비록 행장이 행당 인물을 미화하는데다가 같은 서인 계열인 김장생의 기록이기는 하나 정철이 경양군을 처벌한 사건은 진실일 수도 있다..
결국 정철의 평가를 모아보면, 유능한 문인이자 술주정이 심했던 무능한 관료이고 고집이 강했던 인물이라는 부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양쪽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쪽의 차이는 "정철이 권신이자 악독한 정치가였는가?"라는 부분으로 모아진다. 선조실록은 정철의 처신을 정치적 권력욕으로 규정하고 비난하고, 수정실록은 정철의 행동을 결벽증에 가까운 곧은 인사로 묘사하면서 실드를 친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건으로 따지면 기축옥사는 배후가 있긴 했지만 표면적인 주도자는 분명 정철이었고, 전쟁으로 한참 몽진하던 중에 술을 마시고 업무에 불참했던 행보나 본인이 쓴 시조들의 내용과 전후사정을 따져보면 악독한 정치가로 평가받을 만한 행보를 자주 보여주었고, 때문에 정철을 옹호하는 수정실록에서도 이런 세간의 평가는 인정하고 있다.[4][5]
선조는 정철에 대해서 총애할 때는 "한 마리 매와 같은 사람"이라고 칭찬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한 뭉치 독기로 사람을 해쳤다"고 평가했다.
임진왜란 직전 서인 중신들을 살펴보면 행정, 외교 등 실무관료로서 두각을 보인 쪽은 윤두수, 윤근수 형제고 정철과 성혼은 (정철의 문인, 성혼의 학자로서의 위상은 별도로 치고) 목소리 높여 동인과 정치싸움하는 행동대장에 가까웠다. 정여립 일파와 정적인 동인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탄압과 견제를 가하여 동인 내 남북분당, 차후에는 서인 내 노소분당 에도 한몫을 한 사람, 정치적인 업적은 별로 없지만 정치사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기묘한 위치에 있다. 또한 성격이 극단적이고 독선적이며 알콜 중독자이기까지 했다. 실제로 그가 틈만 나면 탄핵당한 이유는 정적의 모함 이상으로 그가 민심을 못 샀기 때문이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정철이 젊은 시절에는 나름 강직한 면모를 보여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수정실록에 따르면 정철이 젊은 시절이던 명종 21년(1566년)에 왕족인 경양군[6]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왕 명종은 자신의 친척이 관여된 일이므로 정철을 설득시켜 조용히 넘어가려 했으나, 정철이 명종의 요청을 거부하고 만다. 이로 인해 명종의 눈 밖에 나서 파면되고 한직을 전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이 기록은 선조수정실록 정철졸기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정작 명종실록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당시 경양군 처벌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당시 우부승지였던 윤두수이고 정철은 일말의 기록도 없다. 그리고 수정실록에는 정철이 이일로 파면당했다고 말하는데 정작 명종실록에서 정철은 몇달 만에 빠르게 승진하고 병조참의로 함경도에 경차관으로 임명되는 등 나름 승승장구하다가 명종이 죽은 뒤에는 홍문관 부교리로 실록 편수관까지 담당한다. 선조수정실록의 정철 옹호 기록들이 신빙성이 극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그래도 선조에게 "아무리 청천벽력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분노한 선조에 의해 삭탈관직당한 적이 있기는 하다. (참고) 선조수정실록 3권, 선조 2년 6월 1일 계유 3번째 기사 후궁이 낭비가 심한걸 간언하다가 선조의 분노를 산 적도 있고, 세자 선정을 하라는 간언을 하다가 분노를 사기도 했다. 진짜 간신들은 왕이 듣기에 달콤한 말만 하는데, 정철은 왕이 듣기 싫어할게 뻔한 간언도 꽤 한 편이라 그런 부분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 하다. 또한 서인 쪽의 변호에 따르면 정철이 자기 관리를 못해 망가진 것은 사실이나 간적이라 할 정도로 무슨 세도를 부릴만한 위상은 아니었다고 한다.[7]
3. 문인으로서의 평가
문인으로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정철의 아부와 탐관오리 행보를 아는 사람들은, 정철의 시조를 교과서와 수능시험에 올리는 것을 두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일단 문학 자체는 사람의 인성과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13] 정철의 시조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정철의 아부와 직무 유기를 단순한 충성심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포장하는 교육과정과 시험 때문에 이런 인간을 포장해서 가르쳐야하는지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대표작들 모두 정철이 비판받는 아부와 직무 유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시조라 더 논란이 크다.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심각한 직무 유기와 무능력 때문에 잔혹함과는 별개로 관료로서의 평판도 좋지 못한 인물인데 차라리 관료가 아니라 일반 선비였으면 후대에도 예술가로 칭송받았을 것.
다만 선조를 지나치게 아첨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당대 사대부들의 유학적 세계관에서는 상소나 조정 회의에서 신나게 왕을 까는 것과는 별개로 사대부들은 왕을 찬미하는 시나 문학을 많이 지었다. 정철은 선조 즉위 기간 내내 자기가 옳다고 여길 땐 선조의 뜻에 어긋나도 절대 굽히지 않고 간언을 질러대는 성격이었다.[14] 당대의 평가에서도 정철을 가리켜 숙일 줄 모른다고 하였다 저런 배경을 모르고 정철이 그저 선조에게 아첨만 했다고 여기는 것은 당대 조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몰라 생긴 오해이다. 무엇보다 게다가 저 시들은 임진왜란 전, 즉 선조가 추태를 보이기 전이다.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온갖 추태를 보인 뒤에 정철이 선조를 예찬하는 일따위는 없었다.
고등학생 시기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는 정철을 떠올릴 때 국사 과목에 묘사되는 선조 대 서인을 대표한 권력 투쟁의 화신[15]이라는 기억보다는 국어 과목을 통해 외계어에 가까운 문장으로 한층 더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악독한 이미지로 각인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 학교대사전>[16]에서는 그가 쓴 시가의 극악의 난이도와 오글거림으로 인해 수험생을 괴롭히는 사천왕으로 꼽기도 했다.
가사 문학의 정석으로 알려졌지만 원래 시조에 능했다. 흔히 배우는 조선 문학은 크게 한시, 시조, 가사, 고전 소설인데 한시나 고전소설은 현대 국어 해석을 중심으로 나오지만 시조와 가사는 토 나오는 원문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가사의 달인 박인로나 시조의 달인 윤선도와 달리 정철은 두 분야 모두 정점이라 답이 없다. 또한 조선 후기 유행했던 사설시조의 시조 격인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 국문학의 작가들이 그렇듯 현실에서의 인물상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서정적인 인간. 시조, 가사, 사설시조까지 중시조 겸 시조를 맡고 있다.
[1]
그래서 서인들 가운데서도 정철 안티가 상당히 많았다.
[2]
도끼를 들고가서 상소를 올리는 것으로 진짜 사형당할 각오를 하는 행동이다.
[3]
사실 선조가 주도해 동인을 숙청했고 정철은 바지사장이라는 논란이 많다.
[4]
창작물식으로 표현하자면, "신념형 빌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게 방향성이 잘 맞을 때는 상대가 누구든, 심지어 왕인 선조라도 그 잘못을 지적하고 가차없이 비판하지만, 기축옥사 때처럼 자신이 악이라고 판단한 상대에는 집요하게 잔인해지고 스스로도 멈출 수 없다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5]
관동별곡 문서에서 언급한 강원도 관찰사의 행적도 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일단 본인이 관찰사로서 일을 열심할 생각이었고 이 때문에 이전 관찰사과는 달린 강원도의 모든 지방을 방문했다. 문제는 방문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에 시야가 좁아져서, 정작 중요 업무는 처리하지 못한 것.
[6]
성종의 손자로, 성종의 서자인
이성군 이관의 아들이다.
[7]
당시에는 정철과는 반대 계파에도
이산해,
류성룡 등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보기에도 정철은 그냥 선조에게 놀아난 수준으로밖에 안 보이고.
[8]
2024년 기준
평가원 기출에만 무려 17번(…)이나 등장하였다.
[9]
1993년부터 시행된 제법 연식있는 시험인 수능에서 꽤 자주 평가원 시험에 작품이 출제되는 작가라도 4번, 5번 정도 출제된 게 대다수인데
한 작품으로만 4번을 출제하게 만든 사람이다. 실로 엄청난 빈도다..
[10]
김만중의 증조부인
김장생과 조부인 김반은 모두 정철의 친구인 송익필의 문인이었다.
[11]
김만중이 정쟁 중에
유배가서 쓴 <서포만필>에서는 <성산별곡>을 제외한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세 작품이 우리말로 아름답게 표현한 점을 높게 평가하였으며 우리의 참 문장은 이 3개 작품뿐이라고 하였는데 좌해진문장(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이라며 극찬하였다. 그 중에서도 김만중이 가장 고평가한 작품은 <속미인곡>인데 우리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가사와 소설로 이어지는 문학
장르적 성향도 그렇고 결국 '풀어주세요'로 대표되는
작가의 마음 등 김만중이
공감할 여지는 엄청나게 많았다.
[12]
이소는
초나라의 현실을 개탄하여 멱라수에 몸을 던졌던
굴원이 쓴 시다.
[13]
젊었을 적에는
친일 활동에 앞장서고
광복 후에는
독재 정권에 아부하여 후세에 갖은 비난을 받고 있는
서정주의 시가 문학 교과서나 수능 지문에 버젓이 나오고 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는 역적의 대명사인 망탁조의의 한 사람인 조조와 그 두 아들이 시문학의 대부로 칭송 받는 것 또한 그러하다.
[14]
실제로 선조의 심기를 거스르는 상소와 직언도 상당히 많이 했다. 옳은 직언을 하다 선조의 심기를 건드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세자건저 문제에선 실각의 위험을 알고 이산해와 류성룡이 발을 빼는 와중에도 건해서 결국 유배까지 갔다.
[15]
요즘은 거의 문인으로 언급되지만, 사실
선조 중기 당시에는
정적들에게 자비없는 잔혹하고 비열한
정치인으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로,
조선 정치사에 가장 잔혹한
피바람을 불러왔던
기축옥사를 주도했다. 물론 기축옥사는 무엇보다도 선조의 의중이 더 크게 작용했지만 실제 이를 진행한 사람은 정철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에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16]
<학교대사전>은 6차에서 7차로 교육과정이 개편되기 시작한 시기에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