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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22:56:46

장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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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들의 모자
굴레 남바위 볼끼 너울 아얌
장옷 전모 조바위 족두리 화관

파일:20111018000785_0 (1).jpg
1. 개요2. 시대별 용도의 변화
2.1. 18세기 이전 (남성용)2.2. 18세기 이후 (여성용)
3. 기타

1. 개요

한복의 일종. 한자로는 ‘長衣’라고 한다. 19세기 전후에 쓰인 『송간이록松澗貳錄』과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는 ‘규의袿衣’라고도 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외출용 포였으며, 길이가 길고 품이 넉넉하게 만들었다. 모시로 만든 여름용 홑장옷부터 겹, 누비, 겨울용 솜장옷까지, 다양한 구성법으로 제작했다.

일반적으로 차도르와 비슷한 여성용 쓰개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18세기까지는 요즈음의 두루마기처럼 직접 몸에 착용하였던 옷이다. 아니, 쓰개 용도로 바뀐 18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남성 정장용으로도 입을 수 입게 만들었다. 즉 둘을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단 얘기. 조선시대판 유니섹스

실록에서는 세조 2년에 처음 등장한다.
세조 2년(1456년) 3월 28일

“복요(服妖)를 금하는 것입니다. 대개 의상(衣裳)의 제도는 남녀(男女)와 귀천(貴賤)을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하민(下民)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長衣) 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 하나, 그러나 장의를 의상(衣裳)의 사이에 입어 3층을 이루게 하고 점점 서로 본떠서 온 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의심컨대 이것은 곧 사문(史文)에 이른바 '복요(服妖)'라는 것입니다……”
(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3월 丁酉)

이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 초기에 조정에서 논의가 있을 정도로 이미 여자들의 복식에서 장옷이 유행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장옷은 남자 장옷과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이해영, 남선화 (2006), "장옷에 관한 연구(1)", '한복문화' 8, 69-78.)따라서 장옷은 원래 남성 복장에서 기원한 스타일이며, 점차 여성의 외부 나들이 출입 용도로 변해 갔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장옷은 일반적으로 여성용 쓰개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18세기까지는 요즈음의 두루마기처럼 직접 몸에 착용하였던 옷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부터 원래대로 입기도 하고 새롭게 머리에 쓰기도 하는 옷이 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소매가 달려있는 이유가 원래는 직접 몸에 착용하였던 옷이기 때문이었다.

2. 시대별 용도의 변화

2.1. 18세기 이전 (남성용)

파일:29ee6a71-07ff-4bb5-a828-4564cf11e5a01.jpg

남이흥 장군의 장옷.

고려시대에 가장 흔한 남성용 복식이었던 백저포의 직계 후손이다. 백저포는 형태 면에서 몇 가지 디테일을 제외하면 현재의 두루마기와 별 차이 없이 똑같이 생긴 옷이었고, 따라서 장옷도 사실상 현재의 두루마기와 거의 똑같은 복식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무의 존재와 트임이 없이 두루 막혔다는 점 등 현재의 두루마기와 거의 똑같은 형태이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는데, 좌우 비대칭의 직령깃 형태인 현재의 두루마기와는 달리 장옷은 좌우가 완전히 대칭이고 튀어나오지 않은 (즉 섶과 일자로 이어지는) 목판깃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옷은 전체적으로 고름의 위치[1]를 제외하고 완전히 좌우대칭이라는 특징이 있다. 실제로 양쪽 깃이 다 섶에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좌우대칭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그냥 보자기마냥 쓰고 다니기도 쉬웠을 것이다. 두루마기나 도포처럼 섶 좌우가 비대칭이고 깃이 튀어나와 있으면 썼을 때 뭔가 옷을 급하게 입다 만 느낌이 들기 때문. 즉 일반적인 남성용 한복이 고름을 풀어놔도 딱 봐도 입는 용도의 옷인 걸 알아차리기 쉬운 반면, 장옷은 고름을 풀고 그냥 뒤집어 써도 동정깃과 소매, 고름만 빼놓고 보면 그냥 거대한 보자기라 봐도 될 정도로 위화감이 없기 때문에 여성들의 쓰개가 되었단 얘기.

상술했듯 깃이 좌우 비대칭이기 때문에 입었을 때 나오는 실루엣도 일반적인 한복들과 비교해서 대단히 이질적이다. 일단 일반적인 한복은 고름을 여미면 (앞뒤 부분이 완전히 안 맞물려서) 흉부에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입으면 배흘림기둥마냥 상체 부분이 살짝 D라인을 그리며 떨어지게 되는데 반해, 장옷은 완전히 좌우 대칭이라서 입으면 ( 특공무술이나 전통 가라데 도복 상의를 띠 없이 입은 것마냥) 허리가 들어간 실루엣이 나오며 전체적으로 상체는 역삼각형, 하체는 (벨트 멘) 코트자락마냥 떨어지게 된다. 이건 비슷하게 좌우 대칭 형태인 철릭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점. 이런 특징이 남성미가 물씬 느껴졌기 때문인지 장옷은 무반, 도포는 문반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또한 장옷을 두루마기와 비교했을 때 소매 부분에도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현재의 두루마기 소매는 그냥 아무 특징 없이 몸통 부분과 똑같은 재질인 데에 반해, 장옷은 소매 끝에 '거들지'라는 굵은 흰색 장식이 부착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국시대 복식의 특징 중 하나인 (깃과 옷 끝자락, 소매에 달리는 검은색 장식인) '선'의 잔재로 추정되며 장옷의 전신인 백저포가 고려시대 의상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장옷의 색상으로는 토홍색, 담황색, 녹색 등 다양한 색상이 존재했으며 이 중에서 특히 토홍색이 유행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상술했듯 장옷은 원래 무반을 상징할 정도의 상남자 패션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무반들은 물론 심지어 서민들까지 너도나도 문반의 패션인 도포를 따라 입기 시작한 데다가 여자들이 너도나도 장옷을 뒤집어 쓰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기집애들이 입는 옷(?)이란 인식이 커지게 되고 이 탓에 무반들이 착용을 점점 꺼리게 되면서 장옷은 여성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리다시피했고 결국 무반들의 패션으로서의 장옷은 18세기 이후엔 장옷의 직계후손인 동다리의 형태로 남게 된다. 그나마 장옷은 군복이 아닌 평상복이었지만 구군복은 정식 군복이었으니 취급은 더 나아진 거려나... 또한 구한말이 되며 장옷의 후신뻘인 두루마기 복제가 부활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현재까지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성용 외출복이라 볼 수 있다.

파일:김해김씨장의.jpg

단 16세기에도 여성용 장옷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은 김해 김씨(1568~1598)의 장옷인데, 보다시피 고름이 한쪽에만 난 구조라 두루마기처럼 입을 수 없는 구조이다.

2.2. 18세기 이후 (여성용)

파일:경주이씨장의.jpg
파일:경주이씨장의2.png

경주 이씨(1684~1753)의 장옷. 위 김해 김씨 장옷과는 달리 두루마기같이 입을 수 있는 (즉 남녀공용의) 구조이다.

파일:db97bd6cf64e64129b26341bfc957d01.jpg

파일:쓰개2.png

실제 역사적인 고증에 의한 착용법. 얼굴에 완전히 붙인다.

파일:10-csn6110.jpg

현대 사극에서 나오는 장옷. 얼굴을 넉넉하게 드러내는 것이 포인트.

18세기 이전인 조선 초~전기까지의 장옷이 무반들을 상징하는 패션이었다면 18세기 이후인 조선 후~말기의 장옷의 기능은 너울처럼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 써서 얼굴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노비와 양민 이상 계급의 여성들 사이에서 폭넓게 쓰였다가 정조 시기에 평민층의 주요 쓰개가 되었는데, 장삼이 쓰개용으로 용도가 바뀐 것이 장옷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후~말기를 주로 묘사하는 거의 대부분의 현대 사극에서는 중전이나 비빈들이 장옷을, 궁녀나 계집종들이 쓰개치마를 사용하는 역차별이 많이 보이는데, 사실은 거꾸로다. 조선 후~말기에는 일반적으로 쓰개치마가 후궁을 비롯한 상류층의 옷, 장옷이 서민의 옷이었다. 물론 덕온공주가 입었던 유물을 보면 상류층들도 장옷을 안입었다고 보기엔 어렵다.

현재 남아있는 그 당시의 풍속화에서 상류층의 쓰개치마보다 서민들의 장옷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당연히 서민들이 밖으로 잘 쏘다녔기때문이다.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쓰개치마와 장옷에 대한 오해가 많은데, 쓰개치마는 말 그대로 치마 형식이고, 장옷 또한 옷(상의) 형식이다. 고증 좀 똑바로 하자 구분하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하여 소매가 있으면 장옷이고 없으면 쓰개치마다. 이렇게 기본 치마저고리 위에 장옷을 입고, 그 장옷 위에 저고리를 또 껴입었다.

조선 후기에는 유교적인 절약 정신과 경제 시스템의 붕괴로 인하여 본래 양반가 여성들만 입던 장옷이 양민 이상의 계급 여성들이 두루 쓰는 외출복이 되었다. 현대 매체에서는 알록달록한 장옷이 자주 나오지만, 갈색이나 흰색으로 만든 장옷도 있어서 가난한 계층도 쉽게 쓰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읍이나 멀리 외출 갈 때나 쓰지, 가까운 마을 안에서 지낼 때나 장에 갈 때는 이런 거 안 쓰고도 잘 돌아다녔다고 한다. 현대에도 구태여 정장을 갖춰 입고 다닐 상황과 아닌 상황이 따로 구분되어 있듯이. 하지만 양반댁 여성들은 유교적인 미덕들을 중요시하던 시대라 여성들이 함부로 얼굴을 드러내는 걸 좋게 여기지 않아서 자주 쓰고 다녔다. 예상 외로 비싼 물건이 아니기도 하고... 물론 양반가 여성들이 아닌 일반 평민 여성들은 잘 쓰지 않는 편이었다.

3. 기타

이슬람권에서 한국 사극 드라마에서 나오는 장옷 차림을 보고 "엉? 한국도 우리 여성들이 입는 차도르 같은 걸 입었네?!"라며 놀라워하는 경우도 많다. 이란을 여행한 한국인 여행자가 현지인들로부터 "너희 사극드라마를 보니 여성들이 외출할 때 얼굴과 몸을 가리는 옷도 나오던데, 우리와 비슷해서 놀라웠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경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온전히 여성용 의복이었던 이슬람권의 부르카[2]와는 달리 장옷은 남녀 모두 착용했고, 자율적으로 입었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다. 사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문화가 깊이 남은 경우에도 이슬람권 여성 복식들과 비슷하게 입고 다닌다.

반대로 일제강점기에는 히잡과 같은 이슬람권의 여성 복식이 국내에서 장옷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실제 사례[3]
[1] 장옷은 현재의 대부분의 한복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고름은 옆구리, 왼쪽 고름은 깃 끝에 달려있다. [2] 다만 장옷은 부르카와는 달리 얼굴을 안 가리므로 부르카보다는 히잡 혹은 차도르와 더 유사하다.히잡과 차도르 모두 얼굴은 안 가리거나 극히 일부만 가린다. [3] 해당 기사는 1933년에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10주년을 맞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개혁 정책을 소개한 동아일보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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