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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포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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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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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멸실   ‡ : 멸실 위기   ¶ : 왜성으로 구전 / 개축 기록 불확실   § : 일본 측 자료에만 수록 / 상세 확인 불가}}}
파일:정부상징.svg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3호
장문포왜성
[ruby(長, ruby=チャン)][ruby(門, ruby=ムン)][ruby(浦, ruby=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Jangmunpo Japanese Fortress
파일:110081_164466_1652.jpg
<colbgcolor=#01454F> 국가유산
명칭
거제 장문포 왜성(巨濟長門逋倭城)
이칭 군항포왜성(軍港浦倭城)
장문포진(場門浦陳)
장문적굴(長門賊窟)
장목왜성(長木倭城)
개산왜성(凱山倭城)
형태 연곽식 산성
독립적인 부곽군을 연계한 산성
건설 1593년 (선조 26년)
하치스카 이에마사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추정)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1,1636㎡
지정연도 1998년 11월 13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소재지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130-43

1. 개요2. 역사3. 위치 및 구조4. 현황5. 교통6. 여담7. 외부 링크8.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3호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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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에 있는 일본식 산성.

2. 역사

[ 조선왕조실록 / 난중일기 보기 · 닫기 ]
> 지난 6월 27일 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치보(馳報)에 ' 부산 · 김해의 적선이 웅천으로 옮겨 모였는데 그 수가 7 ~ 8백 척은 족히 된다.'고 했던 것을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웅천 등지에 옮겨와서 정박해 있던 그 적선들이 금년 6월 23일 야음을 틈타 몰래 도해하여 거제 경계에서부터 영등포 · 송진포 · 하청가이(河淸加耳)까지 가득 정박하고 있는데 선박의 수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염(閭閻)을 분탕(焚蕩)하는 것은 전년에 비해 더욱 심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7월 20일 기사
이제 경상도에 적이 있는 곳으로는 울산의 서생포 동래 · 부산과 양산의 상용당(上龍堂) · 하용당(下龍堂)과 김해 · 창원이며, 바다 안은 가덕 · 천성(天城)과 거제와 거제의 영등포와 장문포(場門浦)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윤11월 14일 기사
경상우수사 원균의 장계에,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장문포에 둔거(屯據)한 적세(賊勢)와 접전한 절차에 대해서는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2일 평명(平明) 에 다시 장문포에 진격하였는데, 전보다 약간 많아 무려 백여 명이나 된 것이 필시 둔처(屯處)한 왜병을 청원(請援)한 것이었습니다. 세 곳의 높은 봉우리에 모여 있으면서 많은 깃대를 세워놓고 무수히 총을 쏘아댔는데, 우리 병사들이 강개(慷慨)하여 진퇴(進退)하면서 종일토록 접전하다가 어둠을 이용하여 조금 물러나 외질포(外叱浦)에 진을 쳤습니다. 3일 진시에 주사(舟師) 를 동원하여 적진이 있는 장문포의 강 어귀에 줄지어 세워 놓고 먼저 선봉을 시켜 성(城)에 육박하여 도전하게 하니 적의 무리가 시석(矢石)을 피하여 성안에 숨기도 하고, 혹은 성밖에 땅을 파고서 몸을 숨기기도 하였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적이 총을 쏘고 대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가 주먹만 하였고 3백여 보나 멀리 날아왔으며, 화력이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설비(設備)는 매우 흉험(兇險)하였습니다. 적진 근처에 마초(馬草)가 무수히 쌓여 있었으므로 신은 정예병을 선발하여 수직(守直)하는 왜병을 쏘아 쫓고 불을 질렀는데 타는 불꽃이 밤새도록 하늘에 닿았습니다. 문제는 육병(陸兵)이 아니기 때문에 육지에 있는 적을 주사(舟師)로서는 다시 어떻게 끌어 낼 방법이 없어 매우 통분스러웠습니다. (...) 4일 묘시에 여러 배로 적진에 돌진해 들어가면서 명화비전(明火飛箭)을 쏘기도 하고 혹은 현 · 승자총통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선을 영등의 적 소굴에 나누어 보내 서로 들락날락하면서 이쪽저쪽을 공격할 기세를 보여 서로 지원하는 길을 끊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섬멸할 길이 없어 분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10월 8일 기사
적병이 현재 영등 · 장문 등에 둔거하고 있으면서 책루(柵壘)를 굳게 하고 해안에 임하여 수비를 하며 기계를 많이 설치해서 느긋한 자세로 지친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으니,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 대체로 거제도는, 북변(北邊)의 영등 · 장문에 현재 적의 방비가 삼엄하니 육군으로 선공(先攻)하기는 불가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기사
상이 이르기를, "형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던가?" 하니, 상준이 아뢰기를, " 한산도로부터 곧 바로 거제로 들어가기는 형세상 매우 어렵기 때문에 고성(固城) 앞 바다로 돌아 나와 거제의 남쪽으로 돌아와 정박하였는데, 거제 삼포(三浦)의 적이 모두 성 위에 모여 있으면서 깃발을 많이 세워 놓았으며, 배 40여 척을 장문포에다 붙들어 매놓고 항거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
조선왕조실록』 1594년 10월 15일 기사
각 진영의 왜장 성명을 알리기 위해 모두 그 나라의 향담(鄕談)에 따라 글자를 맞추어 적겠습니다. (...) 거제에는 아원로가미(阿元老可未)[1], 또 거제 표간곤로가미(豹干昆老加未)[2], 영등포(永登浦)에는 사야모은로다유우(沙也毛隱老多有雨)[3], (...)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기사
각 진영의 왜병 수목(數目)은, (...) 거제도 3영(營) 의홍(義弘) 1만, 사주태수(士州太守)[4] 8천, 일정(一正)[5] 6천, (...) 이것이 일본에서 원래 들어온 수목입니다. 그 뒤에 줄거나 늘어난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행장의 한 영을 보면 그 밖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갖추어 아룁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6월 8일 기사
한밤 자정에 거제현령이 와서 말하기를, "장문포의 왜적 소굴이 이미 텅텅 비어 버렸으며, 다만 서른 명 남짓 뿐입니다."라고 했다.
난중일기』 1595년 7월 18일
오늘 아침 장만록(張萬祿)이 들어왔기에 남호정(南好正) 등을 시켜 왜영(倭營)에서 보고 들은 정확한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호정이 장만록과 왜영의 지도를 내놓고 가리키며 물어보자, 만록이 말하기를 "(...) 거제의 3영 중 영등포 · 장문포(場門浦) 두 진영은 이미 철거하여 모두 비었으나 불태우지는 않았으며, 소진포(所津浦)에 있는 의홍(義弘)의 진영은 현재 철거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눈으로 본 일이다. (...)"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7월 24일 기사
거제에 이르러 탐심해 보았더니 영등포 · 장문포 · 소진포 등 3진(陣)이 다 불타서 텅 비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11월 2일 기사
적세가 다시 움직이면 우리로서는 책응할 방도가 없으니, 다른 기이한 방책이 없습니다. 육지에서는 요해지를 웅거하고 성벽을 굳게 하여 지켜서 그 예봉(銳鋒)을 꺾고 청야(淸野)하여 양도(糧道)를 끊어야 하며, 수로에서는 주사(舟師)로 출몰하여 부산 이남에서 적세를 막아 다행히 이길 수 있다면, 적은 반드시 뒤를 돌아보는 근심이 있어서 감히 뜻대로 깊이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이러할 뿐이니, 요해지를 차지하고 청야 하는 일을 육지의 장수들에게 일러야 하고, 주사는 거제의 장문포에 나아가서 적이 쌓은 보루 아래에 배를 매어 두고 높은 곳에 올라 적의 배가 오가는 것을 망보아야 할 것이니, 그러면 혹 바다 가운데에서 한번 싸울 만한 형세가 되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6년 11월 9일 기사
윤두수가 아뢰기를, "왜를 막는 데에는 주사(舟師)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저들의 배는 본디 얄팍한데 장왜선(將倭船)은 더욱 가볍고 빠르니, 한번 포를 쏘고 나서 주사를 장문포에 들어가게 하고 원균으로 하여금 영등포를 지키면서 적선이 왔을 때에 포로 맞서 치게 하면, 아마도 편리할 듯합니다." 하고,
조선왕조실록』 1596년 11월 13일 기사
전일에 권율이 소신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보니, 행장이 바야흐로 강화(講和)를 말하는데 고성 · 곤양 근처에 적도들이 쳐들어왔으므로 이것을 행장에게 말했더니, 행장은 '그 적은 나의 무리가 아니다. 조선에서 비록 그들을 죽이더라도 내가 가서 구할 리가 없다.'고 했다 했습니다. 신이 선거이(宣居怡) · 이순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영등포에 진을 치고 있는 적과 싸우도록 했더니 장문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원하고, 장문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싸우면 영등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할 뿐 행장의 군사들은 관망만 하고 있으면서 후원할 만한데도 끝내 와서 구하지 않았으니, 역시 오는 대로 격파해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월 27일 기사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에 있는 일본식 산성. 임진왜란 당시 파죽지세던 일본군의 공세가 한풀 꺾이고 조선 수군에게 오히려 역으로 연패하는 일이 벌어지자 경상도의 해안가에 수성 거점으로 왜성을 여러 곳 쌓아 농성했다. 특히 여러 번의 유효타를 날린 조선 수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경상도로 들어오는 해로의 유일한 길목인 진해만에 왜성을 집중적으로 배치시켰는데, 이중 가장 최전방으로 나가 있는 성들이 웅천왜성 부속된 성채들과 거제도의 성채들이었다. 장문포왜성도 최전방의 거제3진 중 하나로, 남아있는 유적 규모로는 셋 중 가장 큰 성이다.

거제도의 성들은 도서지역이라는 입지상 조선 수군이 아니고서는 접촉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여타 왜성들보다 소략하다. 그나마 장문포왜성은 장문포 해전이 벌어진 곳이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등장하는 편이다. 임진왜란 시기의 왜성들이 으레 그렇듯 1593년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축성을 주도한 왜장은 제5군의 하치스카 이에마사라고 전하며, 제7군의 이코마 치카마사 및 그의 아들 이코마 카즈마사(生駒一正)와 교대하며 7,420명 정도의 일본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거제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 토다 카츠타카(戶田勝降), 쵸소카베 모토치카 시코쿠 출신의 왜장들과 시마즈 요시히로와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화 회담이 진행되며 일본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던 1595년 7월에는 이미 성을 비운 것으로 나오고, 그 해 11월에는 아예 성을 소각해 버렸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군이 주둔하면서 잠시 재활용하다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완전 철수하면서 폐성된 것으로 본다.

3. 위치 및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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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포왜성 위치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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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포왜성 항공사진 (1967)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산 130-10, 산 130-11, 산 130-12, 산 130-15, 산 130-17, 산 130-2, 산 130-23, 산 130-3, 산 130-4, 산 130-43, 산 130-5, 산 130-6, 산 130-71, 130-97, 산 130-98, 산 130-100, 산 130-136, 산 130-137
發船突入長門浦前洋 賊徒據險不出 高設樓閣 築壘兩峯 略不出抗 先鋒賊船兩隻勦擊 則下陸逃遁 空船撞焚
출항해 장문포 앞바다로 마구 쳐들어 가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를 않는다. 누각을 높이 양쪽 봉우리에는 진지를 쌓고서 항전하러 나오지 않는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무찔렀더니, 뭍으로 내려가 도망가버렸다. 빈 배들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난중일기』, 1594년 9월 29일

장문포(長門浦)는 현재 장목포(長木浦) 혹은 장목만이라 불리는 거제도 북부의 포구로, 칠천도 뒤편으로 불쑥 들어와 있어 외해(外海)에서 보이지 않으면서 진출하기는 쉬운 요충지에 위치한다. 북측으로는 송진포(松眞浦)와 연결되어 있고 서측으로 군항포(軍港浦)가 있으며 남측으로는 칠천량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배후지인 부산포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견내량으로 들어와 진해만을 가로질러 가야 했는데, 장문포와 송진포는 칠천도 뒤에 숨어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위치에 있었고 이곳을 타격하려면 좁은 칠천량 해협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일본군 입장에서는 최전방 요새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입지였다. 장문포를 날개처럼 감싸는 양측의 산줄기에 각각 장문포왜성과 송진포왜성을 쌍성(雙城)으로 두어 서로 마주보면서 장문포 입구를 틀어막도록 설계했다. 영등포왜성과도 연계되어 있어 한쪽이 타격을 받으면 서로 지원군을 보냈다고 한다.

장문포왜성은 장목만 서북측으로 길게 돌출된 제석산의 줄기가 이룬 반도 지형 끝자락의 구릉지에 위치한다. 해발 약 100m의 구릉지 정상에 남성이 있고, 그보다 약간 북측의 해발 약 70m의 중봉우리에 북성이 있는데 두 부곽군의 규모가 거의 대등하여 모습이 특이하다. 안골포왜성의 경우와 같이 두 성을 각각 하치스카 이에마사 이코마 치카마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현재로서는 고도도 더 높고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남성을 주곽부로 구분하는 추세다.

남측의 주곽부는 중심부인 제1곽을 중심으로 Γ자 모양의 부지에 남측과 서측으로 부곽(副郭)을 잇달아 배치시킨 전형적인 연곽식 산성으로, 그 형태가 임랑포왜성과 매우 닮았다. 제1곽의 서북측을 향해 천수 기단을 돌출시키고 남측과 서측에 어긋문(喰違い虎口)을 냈으며, 남측의 제2곽은 동남측으로 마스가타 고구치(桝形虎口)가 나 있어 외부와 통하고, 서측의 제3곽은 긴 장방형으로 이어지다가 동측에 평문(平入り虎口)을 터 오각형의 제4곽과 통한다.

제3곽의 남측과 북측에는 각각 사카코구치(坂虎口)[6]로 판별하는 출입구가 나 있고, 제4곽은 어긋문처럼 출입로를 꺾어 낸 마스가타 고구치를 통해 동측의 제5곽과 이었다. 제5곽 역시 동측에 마스가타 고구치를 텄고, 그 바깥으로 완만한 경사면이 쭉 이어지다가 3단 정도의 부곽이 추가로 배치되어 있으며 석축이 일부 남아있다. 그보다 북측의 해안가로 튀어나간 능선에도 산허리를 깎아 만든 부곽군이 일부 존재하고 석축도 정말 짧은 구간이지만 남아있다.

주곽부의 주변으로는 수직 토루(竪土塁)[7]를 3줄 배치했는데 각각의 토루 중간에 현대로 오면서 함몰된 부분 이외에 별다른 출입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능선과 능선 사이를 아예 격리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토루는 천수 기단의 서북측, 제4곽의 동북측으로 나 있어 그 사이에 난 사다리꼴 모양의 산지 사이로 길을 내 북측의 외곽부와 통하게 했다.[8] 나머지 한 곳은 제5곽 동측 마스가타 고구치의 동남측으로 뻗어 있어 남측의 내륙 산줄기에서 외곽부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 것으로 보인다. 세 수직 토루 모두 현재는 가운데로 임도(林道)가 지나고 있어 중간에 끊긴 구간이 있다.

외곽부는 굴곡이 있는 방형의 제1곽을 중심으로 남북축으로 길게 뻗은 일자형이다. 제1곽의 서측으로 돌출된 천수 기단이 있고, 남측에 마스가타 고구치를 내 제2곽[9]과 통하게 했으며 그 바깥에 어긋문이 있어 주곽부 방면으로 통한다. 제1곽의 북측에는 복잡하게 ㄹ자로 동선을 계속 꺾어 출입구를 연속적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다소 협소한 제3곽을 두었다. 북측으로는 살짝 경사가 있는 제4곽이 있고, 그 바깥으로 좁고 긴 능선이 이어지는데 동서 양측에 일부 석축을 포함한 계단 모양의 지형이 연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이곳이 왜성의 시설인지, 후대에 농경지로 사용하면서 변형된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다. 능선의 끄트머리에는 모서리가 함몰된 형태의 방형 부곽을 배치했고, 이곳으로부터 북측으로 내려가는 경사면에 고시쿠루와(腰曲輪)가 연이어 관찰된다. 곶의 북단이자 경사면의 가장 아래에는 최전방으로 돌출되어 있는 부곽의 석축이 잔존한다.

구전에 의하면 장목만 건너편의 송진포왜성까지 약 500m 거리의 해협 사이에 다리를 놓고 건너다녔다는 전설이 있고, 약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이 지역에 삼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했다고 전하지만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4. 현황

파일:7124366839_317114636e_o.jpg
주곽부의 모서리 축조 상태
파일:6978277548_44c7b2fe3f_o.jpg
주곽부 제1곽 동측 석축
파일:스크린샷 2025-01-15 080603.png
주곽부 제1곽 서측 석축
파일:스크린샷 2025-01-15 080746.png
주곽부 천수 기단 서북측 모서리
파일:스크린샷 2025-01-15 081752.png
거의 무너져 토축의 윤곽만 남은 주곽부 제3곽
파일:스크린샷 2025-01-15 081145.png
주곽부 제4곽 남측 석축
파일:스크린샷 2025-01-15 081343.png
주곽부 제5곽 남측 돌출부 모서리
파일:스크린샷 2025-01-15 081453.png
주곽부 제5곽 북측 석축
파일:64030_57749_5753.jpg
외곽부 제2곽 전경
파일:스크린샷 2025-01-15 082225.png
외곽부 제1곽 남측 석축
파일:스크린샷 2025-01-15 082419.png
외곽부 천수 기단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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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부 천수 기단 정면 축조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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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부 제1곽 서측 돌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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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부 제1곽 북측 ㄹ자형 출입구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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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부 제3곽과 제1곽의 서측 석축

5. 교통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군항포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되지만, 자차를 끌고 가면 외곽부 바로 앞까지 임도를 따라 차가 들어갈 수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표지판도 잘 되어 있어서 그저 지시를 따라가다 보면 쉽게 도착하기 때문에 접근성도 매우 뛰어난 편이다. 다만 임도의 길이 좁고, 간혹 가다 고라니와 같은 야생동물이 튀어나와 길을 막는 일이 발생하니 전방주시를 충실히 하면서 천천히 진입해야 한다.

6. 여담

7. 외부 링크

8.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3호

경상남도 거제시 북쪽 장목만 입구 언덕 정상에 있는 이 성은 일본이 쌓은 왜성으로, 맞은편에도 송진포 왜성이 있다.

성의 둘레는 710m이며, 성벽의 높이는 3.5m이다. 성벽은 대부분 훼손되었고, 성곽의 주변에는 나무와 수풀이 우거져 있어, 확실한 구조와 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지금은 겨우 성벽의 기단부만 남아 있으며, 근처에는 기와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다.

남아있는 부분을 보면 언덕 정상 가운데에 본성을 두고, 그 양 옆으로 제2성과 제3성을 배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길게 흙으로 쌓아 구부러지게 연결된 북쪽 끝에 다시 총구를 두었다. 이 장문포는 나중에 장목진을 설치하여 왜구 침략에 대비하였다.

9. 관련 문서


[1] 아와노카미(阿波守)의 음차이다. [2] 효고노카미(兵庫守)의 음차이다. 간(干)은 우(于)의 오기이다. [3] 사에몬노다유(左衛門大夫)의 음차이다. [4] 사주(士州)는 토주(土州)의 오기이다. 모토치카는 토사노쿠니(土佐国)의 영주였다. [5] 제7군의 이코마 카즈마사(生駒一正)로 추정된다. [6] 출입구 앞의 진입로를 석축에 절벽길처럼 붙여 통행로를 제한하는 방식의 출입구이다. [7] 노보리이시가키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토축으로 되어 있으면 수직 토루(타테도루이), 석축으로 되어 있으면 노보리이시가키라고 부른다. [8] 즉 제3곽 북측의 사카코구치로 나가서 쭉 능선을 타고 가면 외곽부가 나온다. [9] 이 구역은 평평하게 삭평한 것이 아니라 완만한 경사를 따라 내려오는 널찍한 공간이므로, 곽(郭)으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해당 공간 양측을 둘러싸는 석축 노보리이시가키로 칭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