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2px -0px" |
<tablebordercolor=#01454F>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30%; color: #fff; min-height: 1em; word-break: keep-all;" {{{#!folding [ 임진왜란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
<rowcolor=#888> 울산광역시 울주군 | 부산광역시 기장군 | ||||
<rowcolor=#aaa>
서생포왜성 西生浦倭城
|
‡ 임랑포왜성 林浪浦倭城
|
기장왜성 | 죽성리왜성 機張倭城 | 竹城里倭城
|
||||
<rowcolor=#888> 부산광역시 동구 | 부산광역시 동구 | |||||
<rowcolor=#aaa>
‡ 동래왜성 |
동래읍성 東萊倭城 | 東萊邑城
|
부산포왜성 | 증산왜성 釜山浦倭城 | 甑山倭城
|
자성대왜성 |
부산진성 子城臺倭城 | 釜山鎭城
|
||||
부산광역시 영도 | 부산광역시 중구 | 부산광역시 북구 | ||||
<rowcolor=#aaa>
‡ 추목도왜성 | 동삼동왜성 椎木島倭城 | 東三洞倭城
|
† 박문구왜성 | 중앙동왜성 迫門口倭城 | 中央洞倭城
|
구포왜성 龜浦倭城
|
||||
<rowcolor=#888> 부산광역시 강서구 | 경상남도 창원시 | |||||
<rowcolor=#aaa>
죽도왜성 | 김해왜성 竹島倭城 | 金海倭城
|
‡ 눌차도왜성 | 가덕도왜성 訥次島倭城 | 加德島倭城
|
안골포왜성 安骨浦倭城
|
||||
<rowcolor=#888> 경상남도 창원시 | 경상남도 거제시 | |||||
<rowcolor=#aaa>
웅천왜성 熊川倭城
|
‡ 명동왜성 | 삼포진 明洞倭城 | 森浦陳
|
영등포왜성 | 구영등성 永登浦倭城 | 舊永登城
|
||||
<rowcolor=#888> 경상남도 거제시 | <#01454F> | |||||
<rowcolor=#aaa>
송진포왜성 松眞浦倭城
|
장문포왜성 長門浦倭城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color: #fff; min-width: 30%; min-height: 2em; word-break: keep-all;" {{{#!folding [ 정유재란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
울산광역시 중구 | 경상남도 양산시 | 경상남도 창원시 | |
<rowcolor=#aaa>
울산왜성 蔚山倭城
|
양산왜성 | 증산리왜성 梁山倭城 | 甑山里倭城
|
‡ 합포왜성 | 마산왜성 合浦倭城 | 馬山倭城
|
||||
경상남도 거제시 | 경상남도 고성군 | 경상남도 진주시 | ||||
<rowcolor=#aaa>
‡ 견내량왜성 | 광리왜성 見乃梁倭城 | 廣里倭城
|
‡ 고성왜성 | 고성읍성 固城倭城 | 固城邑城
|
† 망진산왜성 望晉山倭城
|
||||
경상남도 사천시 | 경상남도 남해군 | 전라남도 순천시 | ||||
<rowcolor=#aaa>
사천왜성 | 선진리성 泗川倭城 | 船津里城
|
남해왜성 | 선소리왜성 南海倭城 | 船所里倭城
|
순천왜성 順天倭城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color: #fff; min-width: 30%; min-height: 2em; word-break: keep-all;" {{{#!folding [ 산성개축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
부산광역시 강서구 | 경상남도 거제시 | |
<rowcolor=#aaa>
‡ 갈마봉산성 | 성북왜성 渴馬峰山城 | 城北倭城
|
‡ 율포산성 栗浦山城
|
‡ 탑포산성 塔浦山城
|
||||
경상남도 창원시 | ||||||
<rowcolor=#aaa>
‡ 자마산성 子馬山城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color: #fff; min-width: 30%; min-height: 2em" {{{#!folding [ 시기불명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
경상남도 양산시 | 경상남도 김해시 | |||
<rowcolor=#aaa>
† 호포왜성 弧浦倭城
|
‡ 마사리왜성 馬沙里倭城
|
‡ 농소리왜성 農所里倭城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color: #fff; min-width: 30%; min-height: 2em" {{{#!folding [ 위치불명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
경상남도 고성군? | 경상남도 사천시? | 전라남도 광양시? |
<rowcolor=#aaa>
§ 영춘왜채 永春倭寨
|
§ 곤양왜채 昆陽倭寨
|
§ 광양왜채 光陽倭寨
|
||||
전라남도 구례군? | ||||||
<rowcolor=#aaa>
§ 구례왜채 求禮倭寨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color: #fff; min-width: 30%; min-height: 1em; word-break: keep-all;" {{{#!folding [ 실체불명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
부산광역시 사하구 | 경상남도 거제시 | |||
<rowcolor=#aaa>
† ¶ 서평포진성 西平浦鎭城
|
‡ ¶ 다대포진성 多大浦鎭城
|
¶ 지세포진성 知世浦鎭城
|
||||
경기도 용인시 | 경기도 ??? | 경기도 평택시 | ||||
<rowcolor=#aaa>
‡ ¶ 임진산성 | 풍덕천진 壬辰山城 | 豊德川陳
|
§ 백련봉진 白蓮峰陳
|
¶ 농성 農城
|
||||
서울특별시 중구 | 평안남도 ??? | <#01454F> | ||||
<rowcolor=#aaa>
† ¶ 왜성대 倭城臺
|
§ 마상산왜성 馬上山倭城
|
}}}}}}}}} † : 멸실 ‡ : 멸실 위기 ¶ : 왜성으로 구전 / 개축 기록 불확실 § : 일본 측 자료에만 수록 / 상세 확인 불가}}} |
<colbgcolor=#01454F><colcolor=#fff> 합포왜성 [ruby(合浦, ruby=ハッ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Happo Japanese Fortress |
|
이칭 |
마산산호동용마성지(馬山山湖洞龍馬城址) 마산일본성(馬山日本城) 마산왜성(馬山倭城) 창원왜성(昌原倭城) 용마산성(龍馬山城) |
형태 | 제곽식 산성 |
면적 | 미상 |
건설 |
1593년 (선조 26년)[미완성] 1597년 (선조 30년) |
다테 마사무네[미완성]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2인 |
|
폐성 | 미상 |
위치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531-2 |
[clearfix]
1. 개요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 · 함창 · 상주 · 선산 · 김해 · 창원 · 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 조선왕조실록』 1593년 5월 22일
『 조선왕조실록』 1593년 5월 22일
22일 새벽에
행장(行長)이 병사의 숙소로 사람을 보내와 문안하였고 병사가 새벽에 약속 장소로 갔는데,
행장 등도 창원의 마산포에서 자고서 조신(調信)[1] ·
현소(玄蘇) · 죽계(竹溪)가 먼저 당도하고
행장 ·
의지(義智)가 뒤따라 이르렀으며, 행장의 아우와 다른 왜장 3명도 들어와 참석하였답니다. 그들의 각 장수가 거느린 군사는 거의 3천여 명이나 되었고 또 진해 · 마산포 등처에 진을 쳤으며, 병사가 거느린 병졸은 다만 1백여 명뿐이었답니다.
『 조선왕조실록』 1594년 12월 7일
『 조선왕조실록』 1594년 12월 7일
지금 경상우도의 해변으로 논한다면,
김해와
웅천은 현재 적의 소굴이 되었으니 집단 생활을 계획할 일에 대해 말할 것이 없고, 창원은 적의 소굴에서 매우 가깝기 때문에 역시 공허한 지대가 되었고,
『 조선왕조실록』 1595년 1월 26일
『 조선왕조실록』 1595년 1월 26일
제장을 모아놓고
관백이 약속하기를 「조선이 매번 이처럼 나를 속이고 있으니 내가 분함을 참지 못하겠다. (...)
행장은
고성,
의지는
거제,
죽도(竹島)의 왜는 창원과
죽도와
부산, 다른 왜장은
기장,
안골포의 왜는
가덕도,
가덕도의 왜와
청정(淸正)은
서생포, 이런 식으로 8개 지역에 나누어 둔거하고, 그 나머지는 다시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라. (...) 너희는 죽을 힘을 다하라.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 처자를 모두 죽이겠다. 」고 하였다. (...)
평행장이 나 요시라에게 말하기를 「(...) 근일에 신병(新兵)이 나오면 나는 마산포로 진을 옮길 것이다. (...) 」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97년 6월 14일
『 조선왕조실록』 1597년 6월 14일
다만 경상좌도의
울산 ·
양산 ·
동래와 경상우도의
김해 · 창원 ·
웅천 ·
고성 ·
거제 ·
진주 ·
사천 · 곤양(昆陽) ·
남해와 전라좌도의
순천 등 주(州) · 부(府) · 군(郡) · 현(縣)이 아직 함락당하여 있습니다. 현재
3로(路)로 일제히 진격하면 거의 옛강토를 회복할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1598년 9월 28일
『 조선왕조실록』 1598년 9월 28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도 병영(兵營)을 옮겨 설치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작년 겨울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장계에 의하여 우병영(右兵營)을 그 근처에서 형편이 좋은 곳을 골라 설치하도록 이미 계하하셨었습니다. 지금 창원 · 마산 등지의 적의 소굴이었던 곳이 형세가 험한 것을 의거할 만하면 병영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과연 마땅합니다. 체찰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살펴본 다음 치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601년 1월 28일
1597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일대의 용마산에 일본군이 쌓은
연곽식
산성. 기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아 상세한 것을 알기 힘들지만, 일본군 측 기록에 창원성(昌原城)으로 등장하는 장소가 이곳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593년경
다테 마사무네가 쌓다가 중단한 것을
1597년
정유재란 때
죽도왜성을 쌓은
나베시마 나오시게 와 그 아들 나베시마 가쓰시게(鍋島勝茂)가 다시 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축성자는
다테 마사무네가 아니라 사노 료하쿠(佐野了伯)[2]라는 설도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1601년 1월 28일
일본에서는 죽도왜성의 전진기지(出城)로 보고 있다. 축성자가 같은 사람인 점도 그렇고, 정유재란 당시에는 웅천왜성 및 휘하 전진기지들이 쓰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므로 합리적인 추론이다. 죽도왜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나, 그 규모가 독립적인 성으로 보기에는 작아 죽도왜성과 장문포왜성, 고성왜성 사이를 잇는 연결성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이를 그대로 답습하여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6호로 지정되었으나, 보존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1969년 8월 1일 문화재 지정을 해제한 뒤 재지정하지 않고 있다. 1965년 5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주곽부 자리에 충혼탑과 위령각을 세웠으며 1994년 산호공원이 되어 지금에 이른다.
2. 위치 및 구조
|
합포왜성 위치관계도 |
|
합포왜성 항공사진 (1950) |
바다로 보면, 마산만은 구산반도 앞으로 나가 견내량에서 부산포 방면으로 들어오려는 조선 수군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영등포왜성 및 안골포왜성과 연계하여 진해만을 가로질러 오는 동선을 끊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때문에 조선 수군에 대응하기 위해 수군 전력을 확충한 정유재란 시점의 일본군이 진해만에서의 해상 기동을 지원하기 위해 건설한 중계 거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이 위치한 용마산은 마산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곳으로 추정하는데, 정확한 명명 과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길게 ㄴ자로 뻗은 산지로 주변의 평평한 포구 지형 한가운데에 독립적인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어 위에 올라서면 주변을 조망하기가 좋다. 서북측에 솟은 반월산 위에는 삼국시대의 테뫼식 산성인 이산성지(鯉山城址)가, 북측에는 경상우도병영성이, 남측 바다 쪽에는 합포 바다가, 서남측 구릉지에는 회원현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다.[3] 특히, 지금은 모두 매립되어 옛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지만 50년대까지만 해도 용마산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정박하기도 쉬웠다. 다만 합포왜성은 용마산의 동측에 치우쳐 쌓았는데, 그 이유는 현재 제1곽이 위치한 곳보다 서측에 성을 쌓으면 반월산에 가려 경상우도병영성과 창원 방면을 조망할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서로 길게 뻗은 용마산의 산마루 한가운데를 능선절단형 해자(堀切り)로 끊어내고, 서측에 데쿠루와(出郭)를, 동측에 제1곽을 두었다. 현재는 이 해자 한가운데를 수직으로 메우고 석축을 쌓아올려 충혼탑으로 통하는 도로 겸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해자가 있는지조차 알아보기 쉽지 않다. 이곳에서 정동측을 바라보고 서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세운 충혼탑과 위령공간의 푸른 기와지붕 건물이 보이는데, 그 아래로 현대의 석축과 왜성의 석축이 뒤섞여 남아있다. 이곳이 위령공간으로 개조된 제1곽으로 대체로 합포왜성의 석축으로 소개하는 것은 좌측(북측) 통로의 석축이나, 이 부분은 일부 현대식으로 개조가 되어버려 왜성임을 한눈에 알아보기는 어렵다. 대신 그 반대편에 왜성의 축조 방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남측 돌출부가 남아있지만, 높은 현대식 축대로 막힌 야산 능선부에 있어 관찰이 쉽지 않다.
제1곽의 동측에는 한 단 낮은 평탄한 대지가 있어 제2곽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 동측에는 사다리꼴의 경사면이 산 아래까지 펼쳐지는데 여기를 따라 토축으로 된 계단형의 부곽(副郭)들이 배치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아주 낮은 석축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 사다리꼴 지형 동북측으로 뻗은 능선의 경계에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와 수직 해자(竪堀)가 나란히 뻗어 지형을 차단한다. 노보리이시가키의 가운데에는 북측으로 튀어나온 방형의 돌출부가 있어 망루 기단(櫓台)으로 추정한다.
제2곽의 동남측 능선의 경계에도 몇 단으로 된 석축이 경사를 타고 내려오지만 반대편의 노보리이시가키에 비해서는 짧다. 사다리꼴 지형의 최하단부인 동측 끝에는 비교적 평탄하고 길쭉한 부곽이 있어 제3곽으로 상정하는데, 동남측을 향해 돌출부가 1곳 있다. 이곳이 바로 앞에 있었을 선착장(舟入り)과 통하는 곳이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전체적인 평면구조가 서생포왜성과 대단히 닮아서, 서생포왜성의 축소판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다만 원형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고 충혼탑과 공원을 만들면서 훼손이 심해져 현재는 그 모습을 잘 볼 수 없는 상태다.
3. 과거 모습 및 현황
|
마산 왜성 원경[4] (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유리건판 사진 동일) |
|
마산 왜성 성벽 일부[5] |
|
마산 왜성 성벽 일부[6] |
|
제1곽 서북측 모서리[7] |
|
제1곽 북측 석축 축조 상태 |
|
제1곽 남측 석축 축조 상태 |
|
제1곽 서남측 돌출부 |
|
제2곽 동남측 계단형 석축 일부 |
|
남측 노보리이시가키 잔존 상태 |
|
북측 노보리이시가키의 돌출부 모서리 |
|
북측 노보리이시가키 |
|
제3곽 돌출부 석축 축조 상태 |
4. 교통
- 창원 버스 100
- 창원 버스 160
- 창원 버스 106
- 창원 버스 53
- 창원 버스 102
- 창원 버스 107
- 창원 버스 108
- 창원 버스 109
- 창원 버스 114
- 창원 버스 163
- 창원 버스 164
- 창원 버스 250
- 창원 버스 259
- 창원 버스 260
- 창원 버스 20
- 창원 버스 21
- 창원 버스 22
- 창원 버스 40
- 창원 버스 41
- 창원 버스 50
5. 여담
- 한동안 마산합포구청 홈페이지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측에서 1572년에 쌓은 성곽으로 잘못 등재되어 있었다. 정작 이렇게 볼 만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전혀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한겨레신문에서 취재한 후에야 바로잡았다고 하는데, 당시 구청의 담당 부서 관계자는 아예 이곳에 왜성이 있었다는 말 자체를 처음 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때 조선총독부가 88,945㎡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이 사적으로 등록해 관리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광복 후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완전히 잊혀진 것이다. 왜성에 대해 국내의 관심도가 매우 저조하다는 방증이다.
- 합포왜성이 있는 용마산 서북측으로 불과 1.2km 정도 떨어진 근거리에 이산성(鯉山城)이 있었다. 현재 반월산 근린공원과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어 매우 훼손이 심하고,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표면적인 지표조사만을 진행한 상태여서 그 성격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다. 다만 출토된 유물을 통해 가야시대의 보루였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곳에서 보면 경상우도병영성이 있는, 창원 분지로 통하는 협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합포왜성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두 성곽 모두 창원 방향에서 들어오는 적을 감시할 수 있는 동일한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외부 링크
7. 관련 문서
[1]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2]
본명은 사노 후타츠나(佐野房綱)이다.
[3]
물론 지금은 공원을 조성하면서 나무가 우거져, 바깥을 내려다볼 수가 없어졌다.
[4]
용마산 정상의 좌측에 깊게 파인 능선절단형 해자와 우측의 제1곽 석축이 보인다.
[5]
능선절단형 해자에서 제1곽을 올려다본 모습으로 추측된다.
[6]
제1곽 동북측 모서리에 있었던 방형의 기단. 이곳이 합포왜성의 천수 기단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7]
위령공간의 시멘트 축대 좌측으로 살짝 나온 왜성의 석축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