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랑스의 작위 요구자를 다루는 문서.2. 등재 기준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작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현재 프랑스의 작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해당 국가가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해당 작위를 주장한 사례가 있었던 경우.
-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왕위나 작위와 같이 만약 해당 정권이 존속했다면 해당 정권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등재하며, 계승권을 실제로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작위 이외에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
- 작위 소유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작위를 포기, 또는 해체한 경우.
- 식민국가나 피정복국가가 독립하고, 상대국이 해당국가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면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 합의
토론 합의에 따라,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가 직위를 자손에게 계승했거나 계승하려 시도한 경우는 등재하지 않는다. 단 근대 이후 공화국의 독재자라도 '몽골의 칸' 등 세습 군주의 칭호를 자칭한 경우는 등재한다.
3. 현재 작위 요구자 목록
3.1. 국가
3.1.1. 프랑스 국왕
관련 칭호 |
프랑스 국왕 나바르 국왕[루이스] 바이에른 국왕[프란츠] 프랑스 공작[장] 앙주 공작[루이스] 스코틀랜드 국왕[프란츠] 파리 백작[장] 부르봉 공작[루이스] 잉글랜드 국왕[프란츠][사이먼] 아일랜드 국왕[프란츠] 요크 공작[사이먼] 칼레 영주[프란츠][사이먼] 아일랜드 영주[사이먼] 아키텐 공작[루이스][프란츠][사이먼] |
|||
작위 요구자 |
(오를레앙파) 장 도를레앙[18] |
(정통주의자)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C] |
(
자코바이트파) 프란츠 폰 바이에른[A] |
(
잉글랜드 왕국
요크 왕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
전임자 | 앙리 7세 | 알퐁스 2세[21][22][23] |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
후임자 | 가스통 도를레앙 |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 막스 폰 바이에른 | 마커스 애브니헤이스팅스 |
계승 실패 원인 |
1328년 왕조 단절 및 교체(
카페 왕조) 1453년 프랑스 왕위 상실( 랭커스터 왕조) 1830년 왕조 교체( 부르봉 왕조) 1848년 왕국 멸망( 오를레앙 왕조) |
장은 루이 13세의 아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후손이다. 프랑스 마지막 왕 루이필리프 1세가 쫓겨나고 그 손자인 파리 백작 필리프 7세(1894년 사망), 그 아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8세(1926년 사망)로 이어졌다. 필리프 8세는 후사가 없어서 다음 왕위 계승자는 루이 필리프 1세의 증손자인 기즈 공작 장 3세[25](1940년 사망), 그 아들 파리 백작 앙리 6세(1999년 사망) 그 아들인 파리 백작 앙리 7세(2019년 1월 21일 별세)로 이어졌다. 장은 이 파리 백작 앙리 7세의 아들이다. 장 4세라고도 불린다.
루이스 알폰소는 샤를 10세 다음의 '명목상의 왕' 루이 19세에서 내려오는 직계 부르봉 왕위 요구자이고, 본인은 알폰소 13세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의 손자이다. 1989년 부친 앙주와 카디스 공작 알폰소 2세와 형 부르봉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들이 죽은 후 부르봉 공작과 앙주 공작을 계승하고, 루이 20세(Louis XX)라 불리며 프랑스와 나바르 왕위를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루이스 알폰소는 스페인 왕 펠리페 6세의 육촌이다.
한편 부르봉의 일부 왕족들의 조사 결과 인도 보팔에 사는 발타자르[26]라는 인물이 앙리 4세의 조카 장 필리프 드 부르봉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밝혔다. 가설이 사실이라면 발타자르가 스페인 보르본, 프랑스 부르봉 왕가보다 계승 순위가 앞선다. # 발타자르는 본인이 정말 왕실 후손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유전자 검사에 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근거라는 것이 부르봉 가문의 일원이 1560년에 인도에서 자식을 낳아 그 후손이 이어졌다는 이야기 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도 19세기 말의 작가에 의해 기록된 것이 전부인지라 위의 두 후보들과는 달리 가십 수준이고, 왕위 요구자도 아니다.
자코바이트파가 지지하는 바이에른 공작 프란츠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현 수장이다. 이건 자코바이트파의 잉글랜드 왕국 왕위 요구에 백년전쟁 때부터 조지 3세 이전까지 잉글랜드의 프랑스 왕위 요구가 덤으로 따라온 것(...). 명목상의 프랑스 왕위 요구 포기는 상술하듯 하노버 왕가가 한 것이므로 자코바이트는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여담이지만 자코바이트 프랑스 왕위 요구자는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영국 왕위 계승법을 따르므로 부르봉 왕조(부르봉 왕조 본가와 부르봉-오를레앙 왕조 모두)의 왕위 요구자들과 달리 살리카법을 따르지 않는다. 애초에 잉글랜드 왕실이 백년전쟁 때부터 조지 3세 때까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한 것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카페 왕조의 마지막 국왕 샤를 4세의 조카(샤를 4세의 여동생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살리카법[27] 탓에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잉글랜드 왕국 요크 왕조 또한 장미 전쟁으로 요크 왕조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명목상의 프랑스 국왕 칭호가 계속 이어졌으므로, 요크 왕조의 왕위 요구자인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도 프랑스 왕위 요구자라고 볼 수 있다. 이쪽은 잉글랜드 요크 왕조 역대 국왕들 중 그 누구도 실제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적이 없는 관계로 본가인 플랜태저넷 왕가의 카페 왕조 왕위 요구를 이어나간 것에 가깝다. 랭커스터 왕조가 프랑스 국왕을 딱 한 명이나마 배출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3.1.2. 프랑스 황제
관련 칭호 |
프랑스
황제 베스트팔렌 국왕 |
|
작위 요구자 | 샤를 나폴레옹[28] |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29] |
전임자 | 나폴레옹 6세(루이 나폴레옹) | |
후임자 |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30] | 루이 나폴레옹[31][32] |
계승 실패 원인 | 1870년 제국 멸망 |
루이 외젠의 죽음으로 그와 가장 가까운 친족이자 오촌 조제프 샤를 보나파르트가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이 되어야 했다. 조제프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와 카타리나의 차남으로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자 나폴레옹 3세의 사촌이었다. 하지만 평소 그를 싫어한 루이 외젠은 유언장에 자신의 후계자로 조제프 대신 조제프의 장남 빅토르 보나파르트를 지명하였다. 따라서 황실의 수장은 루이 외젠의 육촌 빅토르 보나파르트가 되었으며 그는 지지자들에게 나폴레옹 5세로 불린다. 하지만 나폴레옹 5세는 아버지 조제프가 살아 있었고 한 대를 건너 수장이 되었기 때문에 부자 간에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조제프는 베스트팔렌 왕위 요구자였으므로 조제프 사후 빅토르는 아버지의 베스트팔렌 왕위도 계승한다. 나폴레옹 5세는 1926년 죽었고 그 아들 루이(나폴레옹 6세)가 뒤를 이었다. 그런데 루이는 1997년 죽기 전에 다음 왕위 요구자이자 황실 수장으로 아들 샤를이 아닌 손자 장크리스토프를 지목했다. 이는 아들 샤를이 본인의 허락 없이 아내[34]와 이혼하고 다른 여성과 재혼했다는 것이 이유였으며 때문에 샤를과 장크리스토프는 둘 다 서로 다른 집단에 의해 나폴레옹 7세로 불린다. 물론 샤를의 후계자는 그의 장남인 장크리스토프이며 샤를 역시 자신이 사망할 경우 자신의 지위는 장크리스토프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공언하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이 완전한 가문의 수장이 될 예정이다. 장크리스토프는 2019년에 결혼하여 2022년 루이 나폴레옹이란 아들을 얻었다.
장크리스토프는 1986년생으로 뉴욕에서 모건스탠리 투자은행 애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엄친아이다.
3.2. 그랑테스트
3.2.1. 로렌 공작
관련 칭호 | 로렌 공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B]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계승 실패 원인 |
1737년 공작령 반납 1766년 프랑스에 합병 |
3.3. 노르망디
3.3.1. 노르망디 공작
관련 칭호 |
노르망디 공작 영연방의 원수[찰스]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찰스]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에른스트] 잉글랜드 국왕[프란츠][사이먼] 스코틀랜드 국왕[프란츠] 아일랜드 국왕[프란츠] 아일랜드 영주[사이먼] 인도 황제[에른스트] 하노버 국왕[에른스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른스트] 프랑스 국왕[프란츠][사이먼] 칼레 영주[프란츠][사이먼] 아키텐 공작[프란츠][사이먼] |
|||
작위 요구자 |
(현직 영국 국왕) 찰스 3세 |
(
하노버 왕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 |
(
자코바이트파) 프란츠 폰 바이에른[A] |
(
요크 왕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
전임자 | 엘리자베스 2세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 |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
후임자 |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55] | 막스 폰 바이에른 | 마커스 애브니헤이스팅스 |
계승 실패 원인 |
1259년 노르망디 공작 작위 폐지 1453년 노르망디 공국 부활 최종 무산 1558년 육지 영토 완전 상실 |
윈저 왕조 이전의 하노버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 그리고 요크 왕조 또한 노르망디 공위 요구자를 매출하고 있다. 하노버 왕국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왕위 요구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는 영국 하노버 왕조의 왕위 요구자도 겸하므로 하노버 왕조의 노르망디 공작 칭호도 요구하는 셈이며, 자코바이트파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장 프란츠 폰 바이에른을 명목상의 영국 국왕 겸 노르망디 공작으로 내세우고 있다. 요크 왕조의 왕위 요구자인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또한 요크 왕조에서 쓰던 노르망디 공작 칭호를 명목상 이어나가고 있다. 다만 영국의 현 국왕인 찰스 3세가 현직 군주인 데다가 옛 노르망디 공국의 영토였던 채널 제도를 왕실 직할령으로 통치하는 반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와 프란츠 폰 바이에른은 독일의 군주제가 폐지된 것 때문에 그저 명목상의 군주에 불과하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또한 장미 전쟁의 결과로 요크 왕조가 멸망하여 요크 공국 또한 자치권을 잃고 잉글랜드 왕국의 직할령이 되어버린 것 때문에 마찬가지로 그저 명목상의 군주에 불과하다.
노르망디 본토와 채널 제도의 노르만족 주민들은 비록 국적은 각각 프랑스와 영국으로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서로 인접한 지역에 사는 같은 노르만족으로서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양쪽 지역의 노르만족 주민들은 비공식적으로 농담 삼아 영국 국왕을 공작 전하라고 부른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2세가 1967년에 노르망디를 방문했을 때 노르망디 주민들이 자신들이 프랑스 국적임에도 불구하고 "여공 만세!(Vive la Duchess)"[57]라고 외치며 환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과 별개로 백년전쟁으로 인한 영국와 프랑스의 역사적 악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노르망디 공국이 재건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3.4. 누벨아키텐
3.4.1. 가스코뉴 공작
관련 칭호 |
잉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노르망디 공작 가스코뉴 공작 |
|
작위 요구자 |
(
자코바이트파) 프란츠 폰 바이에른[A] |
(
잉글랜드 왕국
요크 왕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
전임자 |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
후임자 | 막스 폰 바이에른 | 마커스 애브헤이스팅스 |
계승 실패 원인 | 1453년 공국 멸망 |
3.4.2. 아키텐 공작
관련 칭호 | 아키텐 공작 | ||
작위 요구자 |
(
부르봉 왕조)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C] |
(
자코바이트파) 프란츠 폰 바이에른[A] |
(
잉글랜드 왕국
요크 왕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
전임자 | 곤살로 데 보르본 이 당피에르 |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
후임자 |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 막스 폰 바이에른 | |
계승 실패 원인 |
1399년 공가 교체(
플랑타주네 왕조) 1453년 공국 멸망( 랭커스터 왕조) 1830년 프랑스 왕조 교체(프랑스 부르봉 왕조) |
3.5. 부르고뉴프랑슈콩테
3.5.1. 부르고뉴 공작
관련 칭호 |
부르고뉴 공작 신성 로마 황제(임페라토르) 오스트리아 황제( 카이저)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 (생략) |
|||
스페인 국왕 | ||||
프랑스 국왕 나바르 국왕 앙주 공작 부르봉 공작 |
||||
작위 요구자 |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B] |
(스페인
보르본 왕조) 펠리페 6세 |
(스페인
보르본 왕조&
프랑스 부르봉 왕조)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C] |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안 카를로스 1세 | 펠리페 5세 | 루이[63]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레오노르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 |
계승 실패 원인 |
1477년 공국 해체 1713년 부르고뉴 공위 포기(스페인 보르본 왕조) 1830년 프랑스 왕조 교체(프랑스 부르봉 왕조)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
3.6. 브르타뉴
3.6.1. 브르타뉴 공작
관련 칭호 |
프랑스 국왕 브르타뉴 공작 |
작위 요구자 |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C] |
전임자 |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
후임자 |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
계승 실패 원인 |
1547년 프랑스에 합병 1792년 자치권 상실 |
3.7. 오드프랑스
3.7.1. 칼레 영주
관련 칭호 |
잉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노르망디 공작 칼레 영주 |
|
작위 요구자 |
(
자코바이트파) 프란츠 폰 바이에른[A] |
(
요크 왕조) 사이먼 애브니-헤이스팅스 |
전임자 | 알브레히트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 마이클 에드워드 애브니헤이스팅스 |
후임자 | 막스 폰 바이에른 | 마커스 애브니헤이스팅스 |
계승 실패 원인 |
1485년 영주 가문 교체(요크 왕조) 1558년 프랑스에 합병( 튜더 왕조) |
3.7.2. 아르투아 백작
관련 칭호 | 아르투아 백작 |
작위 요구자 |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B] |
전임자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후임자 |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
계승 실패 원인 | 1659년 프랑스에 합병 |
3.8.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3.8.1. 오랑주 공작
관련 칭호 |
오랑주 공작 네덜란드 공화국 총독( 스타트허우더) |
|
작위 요구자 | 빌럼알렉산더르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전임자 | 베아트릭스 |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
후임자 | 카타리나아말리아 | 칼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계승 실패 원인 | 1713년 공국 멸망 |
3.9. 코르시카
3.9.1. 코르시카 영주
관련 칭호 | 코르시카 영주 |
작위 요구자 | 펠리페 6세 |
전임자 | 후안 카를로스 1세 |
후임자 | 레오노르 데 토도스 로스 산토스 데 보르본 오르티스 |
계승 실패 원인 | 1830년 프랑스 왕조 교체 |
3.10. 기타
3.10.1. 부르봉 공작
관련 칭호 |
부르봉 공작 부르고뉴 공작 브르타뉴 공작 아키텐 공작 프랑스 국왕 나바라 국왕 |
||||
작위 요구자 |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C] | ||||
전임자 |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70] | ||||
후임자 | 루이스 데 보르본 이 바르가스 | ||||
계승 실패 원인 |
1531년 프랑스에 합병 1830년 콩데 가문 단절 |
3.10.2. 브로이 공작
브로이 공가 문장 | |
관련 칭호 |
브로이 공작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국왕 |
작위 요구자 | 필리프모리스 빅토르 아메데 세자르 |
전임자 | 빅토르프랑수아 마리 레옹 |
계승 실패 원인 |
1870년 작위 폐지 1975년 공식 석상에서의 작위 호칭 금지 |
[루이스]
[프란츠]
바이에른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국왕
[장]
프랑스 공작, 파리 백작.
[루이스]
[프란츠]
[장]
[루이스]
[프란츠]
[사이먼]
[프란츠]
[사이먼]
[프란츠]
[사이먼]
[사이먼]
[루이스]
[프란츠]
[사이먼]
[18]
장 샤를 피에르 마리 도를레앙
[C]
루이스 알폰소 곤살로 빅토르 마누엘 마르코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A]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
[21]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당피에르
[22]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의 아버지, 앙주와 카디스 공작
[23]
사족으로 알퐁스 1세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이다.
[24]
할머니가 프랑스 귀족이라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25]
필리프 7세의 남동생 로베르 도를레앙의 아들이자 필리프 8세의 사촌이다. 필리프 7세의 3녀 이자벨과 결혼했으므로, 필리프 7세의 사위이기도 하다.
[26]
발타자르 나폴레옹 드 부르봉
[27]
정확히는
필리프 6세가
필리프 5세의 살리카법 확대해석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본래 오리지널 살리카법에서는 외손자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여 프랑스 플랑타주네 왕조가 들어서는 게 정상이었다. 게다가 필리프 5세가 프랑스에서 살리카법이 사문화되고 본인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살리카법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확대해석하여 여성인
후아나 2세와 카페 왕조의 남계 후손이 아닌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박탈된 거라, 어찌보면 필리프 5세의 즉위는 일종의 무혈 쿠데타였으며 필리프 6세의 즉위는 그러한 쿠데타 덕분에 가능했던 셈이다.
[28]
샤를 마리 제롬 빅토르 나폴레옹
[29]
장크리스토프 루이 페르디낭 알베릭 나폴레옹
[30]
샤를 나폴레옹의 장남. 위의 샤를 나폴레옹의 대립 왕위 요구자와 동일인이다.
[31]
루이 샤를 리프란드 빅토르 제롬 마리 나폴레옹
[32]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의 장남
[33]
참고로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가 전사하는 과정이 참으로 비참하다. 당시 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장병들은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일국의 황태자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멀뚱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해서
영국으로 귀국하자마자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근데 이 와중에 루이 외젠이 전사한 후에 남겨진 시신은 어찌됐느냐면,
줄루족 장병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내세관에 따라 이승에 미련을 갖지않게 하려고 현장에서 마구 난도질을 해서 훼손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 측에 그의 시신을 반환할 때는 사람 시체인지 뭔지 알아볼 수도 없게 너덜너덜해졌다고. 줄루족들이야 나름대로 죽은 자에 대한 예우를 갖춘 셈이지만, 이런 이들의 장례법을 잘 모르는
영국인들과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공깽 그 자체였다.
[34]
즉, 장크리스토프의 어머니.
[B]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남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36]
이 사람은
마리아 테레지아
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찰스]
[찰스]
[에른스트]
[프란츠]
[사이먼]
[프란츠]
[프란츠]
[사이먼]
[에른스트]
[에른스트]
[에른스트]
[프란츠]
[사이먼]
[프란츠]
[사이먼]
[프란츠]
[사이먼]
[A]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
[55]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5세의 아들.
[56]
윌리엄 1세 사후 노르만 왕가는 잉글랜드 왕국의 노르만 왕가와 노르망디 공국의 노르망 공가로 분리되었다가 헨리 1세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를 폐위하고 아버지인 윌리엄 1세처럼 잉글랜드 국왕 겸 노르망디 공작이 됨에 따라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는 다시
동군연합이 되었다.
[57]
노르망디의 주민들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보고 "여공 만세! (Vive la Duchesse!)"를 외치자 엘리자베스 2세가 "글쎄요, 나는 노르망디 공작(Duke)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Duchesse는 공작부인이라고 해석도 되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그냥 공작(Duke)이라 칭한다.
[A]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
[C]
루이스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세고비아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A]
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
[B]
[C]
루이스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63]
루이 16세와
루이 18세의 형.
[64]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은 오스트리아 황제위, 헝가리 왕위, 보헤미아 왕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위, 크라인 공작위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주의 여러 작위들을 요구하고 있다. 펠리페 6세는 스페인의 왕정 복고에 의해 아버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즉위로 스페인 왕위와 동시에 부활한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아버지의 생전 퇴위로 이어받았다.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은 스페인 왕실의 일원일 뿐더러 프랑스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명목상 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부르고뉴 공작 칭호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모두 이어받은 셈이다.
[C]
루이스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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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루이 15세의 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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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보나벤투라 아달베르토 마리아 헤츠호그 폰 바이에른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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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알폰소 하이메 마르셀리노 마누엘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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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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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유가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의 어머니가 부르봉 공작 샤를 1세의 딸 마르그리트였는데 당시 부르봉 가문의 피를 이은 친인척 중에선 루이사가 제일 가까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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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데 친왕가, 부르봉콩데 가문으로 불린다.
[73]
사족으로, 제7대 브로이 공작이 바로
물질파의 개념을 처음 주창하여 초기
양자역학 연구에 크나큰 기여를 한
물리학자인
루이 드 브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