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1.1. 데뷔 이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오락실에 자주 들락거리다 부모님께 잡혀 끌려오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게임을 즐겨했으며, 학창 시절 내내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당대에는 대학 진학률이 우수한 성보고등학교에 무사히 진학하면서 부모님의 기대를 이어나갔다고 한다.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나름 정신차리고 공부에 매진하려고 노력했으나, 고3 때 어느 친구의 집에서 접하게 된 스타크래프트로 인해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1] PC 게임으로서는 당대에 유례없을 정도로 화려한 그래픽에[2] 넋을 놓은 임요환은 스타크래프트에 푹 빠지게 되었고, 당연히 당해 수능 성적은 엉망이 되어 부모님의 강요로 재수학원에 끌려가게 된다.
재수학원에 들어간 그는 1년만 공부에 매진해 보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날 함께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던 친구들과 만나 한판만 해보겠다는 생각에 PC방에 들렀다 다시 스타크래프트에 빠지게 되었고, 부모님 역시 그의 의지를 꺾지 못해 결국 대학 입시를 완전히 포기하고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에만 매진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스타크래프트에 오래 매진한 임요환은 빠르게 실력이 올라 동네에서는 가히 최고라 할 수준에 이르렀고[3], 자신감을 가지고 참가한 국내 스타크래프트 대회에서 예선 통과 이후 본선에서 1차전에 탈락하는 고배를 마시기도 했지만 오히려 세상의 넓음을 깨닫고 연습에 매진,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실력이 성장하게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명성을 쌓아가던 어느날, 당시 "시나브로"라는 프로게이머 매니지먼트사를 운영하고 있던 김양중의 눈에 든 임요환은 그의 제안 하에 1999년 프로게이머로서 영입되고, 그렇게 꿈에 그리던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2. 데뷔와 전성기(1999~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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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당신을 알게 되었을 무렵에, 당신은 다른 그 누구보다 빛나는 별이었다.
황제를 위하여 中
그가 데뷔하던 시절은 아마추어와 프로게이머의 경계가 불분명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 그가 프로게이머로 데뷔했는지를 단정짓는 것은 어렵다. 그나마 방송 경기 데뷔는 1999년 SBS 멀티 게임 챔피언십이기에, 보통은 이 시점을 그의 데뷔일로 잡는 편이다.황제를 위하여 中
그가 데뷔할 때 테란은 하수와 고수의 격차가 극명한 시절이었다. 리플레이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테란은 암울하다는 이야기가 일반 유저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히 떠돌았고, 실제 배틀넷 종족 비율에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특히 1.07 패치 초중반까지는 테란이 완전 죽을 쑤던 시기였는데, 저그에게는 9드론 6저글링 이후 패스트 러커를 못 막아서 GG, 프로토스에게는 패스트 다크템플러를 못 막아서 GG 치던 동네북 신세였다. 이때 임요환은 프로토스 유저였으며, 셔틀, 리버 아케이드가 리버가 셔틀에서 내린 후 바로 스캐럽을 발사하던 것이 딜레이 후 발사되는 너프를 받고 테란이 대상향을 받자[4] 테란으로 종족을 갈아타고 SlayerS_'BoxeR'라는 아이디로 프로 데뷔하게 된다.
데뷔 리그인 SBS 멀티 게임 챔피언십에서부터 상대인 김일재를 잡고 우승했으며, 이듬해인 2000년에는 크고 작은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소규모 리그에서는 우승까지 거머쥐며 테란 중에서는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에는 워낙 많은 리그가 난립했다보니 프로게이머들도 몇몇 리그에 집중해서 경기를 준비하고 상금을 노릴 수밖에 없었는데, 임요환이 이 시기 두각을 나타낸 리그는 당대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게임큐 스타리그와 KIGL 스타리그였다. 게임큐에서는 터줏대감인 임성춘에게, KIGL에서는 김동우에게 밀려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2000 KIGL 왕중왕전에서 끝내 우승을 거머쥠으로서 이듬해 본좌 임요환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이미 이 시점에 임요환은 테란 프로게이머로서는 김정민과 함께 당대 최강자로 언급되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이듬해인 2001년이 곧 임요환의 전성기라 말할 수 있다. KIGL 왕중왕전 우승(2000), 게임큐 스타리그 우승(2001), 한빛소프트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우승(2001),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우승(2001), 2001 WCG 우승, KPGA 투어 1차리그 우승(2002) 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전년도인 2000년까지 소위 말하는 "자신의 리그"가 없던 임요환에게 다른 잡다한 리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사실상 스타판의 유일무이한 최고의 리그로 자리잡은 온게임넷 스타리그가 자신의 독무대가 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2001년 있었던 3번의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2회 우승, 1회 준우승을 차지하며 온게임넷의 스타 플레이어가 되었고, 온게임넷 해설진 특유의 포장 능력과 합쳐져 임요환은 "테란의 황제"[5]라는 별명을 굳히며 당대의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다.
이 시기 임요환은 저테전에 있어서 김정민류의 '한방 병력 괴멸 → 순회공연' 방식 대신 드랍십을 이용한 자원줄 타격과 빠른 압박, 뛰어난 소수 유닛 컨트롤로 경이로운 저그 학살자로 등극했으며, 테테전에서는 골리앗과 드랍십을 주력으로 동시대 테란 게이머들에게 우위를 점했다. 코카콜라 스타리그 당시에 그 유명한 1.08 패치가 이루어졌는데 드랍십 이동 속도가 상향되었다. 즉 '호랑이에게 날개를 단 격'이 되어버렸다. 테프전에서 그가 약점을 보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전성기의 그는 프로토스전에서 대단히 강력했다. 김대건의 메카닉, 임요환의 바이오닉 같은 이야기가 팬들 사이에서 떠돌아서 그렇지 임요환은 메카닉도 강했는데 이는 원팩 더블커맨드 빌드에 기인한 것이었다.[6] 앞마당 확장으로 패러다임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제시된 원팩 더블을 임요환은 기가 막히게 활용했고, 한때 프로토스전에서도 강력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한빛소프트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우승 직후 임요환은 각종 행사에 참석했다. 이 시절의 팀은 단순히 '연습 상대 구하기 쉬우라고 만든 클랜' 정도의 개념이었으며, 감독은 매니저 정도의 개념이었다. 임요환은 온게임넷 스타리그 우승 이전에도 게임계에서 어느 정도 유명 인사였지만, 대중들에게 본격으로 알려진 것은 온게임넷 스타리그 우승 이후다. 인지도가 급격히 오른 임요환은 PC방 행사를 포함해 여러 행사를 돌았다.
이후 코카콜라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홍진호를 3: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코카콜라배와 같은 시기 진행된 WCG 스타크래프트 국가대표 선발전을 10승 무패로 통과하여 2001 WCG를 10승 무패로 전승 우승하게 된다. 그후 2002 KPGA 투어 1차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최초의 양대 리그 우승자 기록을 세우고 이후 2002 WCG도 우승하며 WCG 스타크래프트 부문 유일한 2연속 우승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다만, 2002년에는 전년도 우승자 자격으로 국내 예선 없이 자동 본선 진출이었으며, 2003년부터 전년도 우승자 시드는 폐지됐다.)
2001 SKY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온게임넷 스타리그 3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하지만 김동수에게 2:3으로 분패하고, 준우승을 기록한다. 최강자 이미지는 다소 퇴색되고, 이윤열이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이 시점에서 임요환은 이미 올드, 좋게 봐줘도 중견급 게이머였다. 라이벌이 홍진호라는 것 때문에 다들 잊고 있는 사실이지만, 임요환은 홍진호, 이윤열보다 한 세대에서 반 세대 선배급으로, 오히려 강도경, 김동수와 더 가까운 세대이다. 하지만 임요환은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으며, 어느 정도 기량을 회복한 임요환은 적어도 2003년까지는 이윤열, 서지훈과 더불어 테란 강자의 위치를 지키며,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상위권 테란으로 군림했었다. 저그전, 테란전은 여전히 극강이어서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이윤열을 KTEC KPGA 위너스 챔피언십 4강에서 3:1로 꺾었으며 4대천왕전에서도 2:1로 꺾으며 아직 죽지않았음을 선언했다. 하지만 토스전에서 약점을 보였는데, 이는 임요환의 토스전 전술적 능력이 시대에 점점 뒤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2년 중반 양대 방송사에서 전승행진을 벌이며 다시 최강자로 군림하나 싶었으나.. 4강과 결승에서 모두 박정석에게 패하며 우승엔 실패한다. 또한 이 시기 자주 양대리그에서 만났던 강민은 거의 천적 수준으로 중요한 고비마다 임요환을 이겨서 임요환에게는 거의 저승 사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결국 시간이 흐르며 2003년 올림푸스 스타리그 4강 테테전에서 서지훈에게 0:3으로 충격의 스윕을 당하고, 스타우트 MSL 패자 4강 2차 테테전에서 이윤열에게 1:2로 패하며 빠른 APM을 앞세운 신세대 테란들에게 한 수 아래로 뒤쳐지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한빛소프트배 스타리그부터 마이큐브 스타리그가 시작되기 전까지 약 2년 8개월 동안 저그전 34승 9패, 승률 79.1%라는 독보적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최종 온게임넷 저그전 성적이 55승 21패(승률 72.4%)였다. 온게임넷 108승 중 절반에 가까운 55승 가량을 저그전으로 쌓은 것. 전성기 시절만 해도 박성준과 마재윤 이전까지는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저그 플레이어는 홍진호뿐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그를 학살하고 다녔었다.
1.3. 하락세와 재기(2004~2006)
2003년 말~2004년 여름 사이 본인의 성적이 정체기에 들어섰다. 2004년 4월 1일 진행된 듀얼 토너먼트에서 박성준에게 패해 Gillette 스타리그 2004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그의 온게임넷 스타리그 연속 진출 기록은 9연속 진출로 종료되었다. 또한 그전 해에는 심소명에게 TG삼보 MSL 예선에서 패하면서 2001 한빛소프트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본선 진출을 기점으로 최초로 메이저 대회 본선 무대 진출에 실패하고 이후 MSL에서는 당신은 골프왕 MSL까지 총 4시즌 연속 본선 무대에 진출하지 못했다. 게다가 Gillette 스타리그 2004- Spris MSL 시기는 양대리그 모두 본선 무대에 진출하지 못한 시기여서 임요환의 양대백수 시절이었다.본격 시작된 프로리그 및 팀리그에서는 에버배 프로리그와 투싼배 팀리그에서는 우승을 이끌고 스카이 프로리그 2004 1라운드에서 연승을 달리면서 준우승을 이끄는 등 활약도 많았으나, 네오위즈 피망배 프로리그와 스카이 프로리그 2004 2라운드에서 전패를 기록, 스카이 프로리그 2004 3라운드와 MBC무비스배 팀리그에서도 부진한 성적을 내는 등 리그에 따른 기복이 심했다. 그래도 제1차 KT-KTF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통합 준우승을 달성한다.
2003년 말 후원사였던 오리온이 후원을 포기하면서 은퇴설이 돌았지만, 정작 본인은 오히려 본인보다 팀을 살려내기 위해 가장 힘 쓰던 시기였다. 오리온이 개인 스폰 연장을 제의했으나 팀 전체를 후원해줄 것을 원한 임요환이 거절한 것. 한동안 4U라는 스폰서 없는 팀을 본인의 상금으로 운영하며 활동하던 임요환은 마침내 SK 텔레콤이라는 스폰서를 잡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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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챌린지 리그 우승을 해 시드를 따내 진출한 EVER 스타리그 2004에서 화려하게 부활해 4강까지 진출 임진록에 임했고, 팬들은 기대를 만발했으나 보여준 것은 삼연벙. 때문에 양 선수 모두 여론상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4강에서 홍진호를 3연속 초반 벙러 러시로 이기고 올라간 결승에서 최연성에게 패한 뒤, 임요환이 우는 모습을 보이자 정작 명경기를 치렀음에도 임까들의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 결승전은 2004년 센게임 MSL의 머머전과 같이 '사제 대결'이라 하여 테테전 명승부로 회자되고 있으며 특히 결승 4경기는 역대 테테전 명경기 중 하나이다.
"별로.. 별로 안좋아요"라는 명언을 남긴 최연성은 '요환이 형이 울었던 모습은 처음 봤다'며 자기는 '그 눈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며 임빠다운 모습을 보였다. 이후 최연성의 설명에 따르면 5세트에서 임요환이 진 이유는 실수로 탱크 하나를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은 실수 때문에 우승을 놓쳤다는 사실이 얼마나 뼈아프게 다가올지 프로인 최연성도 직감했던 것이다. 또한 최연성은 '내 우승을 축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마지막 결승전일지도 모르는 경기에서 모든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부분이 아쉬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유종의 미를 제대로 거두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렇게 2004년에도 온게임넷에서는 결승까지 진출하는 등 건재함을 과시한 임요환이었으나 반대쪽 리그였던 MSL에서는 한동안 본선은 커녕 마이너리그(前 서바이버리그)에만 머물렀는데 그 과정이 참 눈물겹다. 1차 마이너리그는 심소명에게 0:2로 탈락하며 예선행, 2차 마이너리그는 예선을 뚫지도 못했으며 3차 마이너리그는 본선에 진출해서 조별 리그에서는 재경기 끝에 한동욱과 안석열을 꺾고 조 1위를 차지했지만 토너먼트에서 전태규에게 0:2로 패배해서 또 예선으로 강등되었다. 4차 마이너리그는 예선 결승전인 마이너 결정전에서 정영주에게 0:2로 패배, 또 예선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5차 마이너리그에서 마재윤에게 패배했지만 장진수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조 2위로 진출했고 토너먼트에서 박경수를 2:1로 이기고 상위 라운드 진출, 거기서 안기효를 2:1로 이기고 또 상위 라운드 진출, 그리고 마지막 최종 라운드 상대인 전상욱을 2:1로 이기고 스타우트 MSL 이후 5시즌만에 MSL 복귀에 성공했다.
유난히 역전 승이 많았다. 815 패러독스 대첩이나, 2002년 WCG, 2005년 So1 4강전 등. 이는 임요환의 집요한 승부욕과도 관련이 있다. 본인이 회고하길 딱 스타리그 3회 우승만 달성하고 은퇴하려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3번째 시도가 계속 막힌 게 이스포츠 흥행에 크게 기여했다. 이 때문에 명경기도 많이 낳았지만 그의 GG 타이밍이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라는 이름으로 승부에 세계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은 절대로 놀림받을 일이 아니다! 그가 만든 명경기 중에는 이러한 승부욕으로 역전에 성공한 경우가 많다. 도진광의 프로토스를 상대로 기적과 같은 역전승을 거둬 지금도 회자되는 명경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에 다시 성적이 떨어지면서 빠와 까 개념이 옅어지고 '올드 게이머'로만 기억되었으나 So1 스타리그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특히 4강전 임요환 vs 박지호 전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E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역전승 중 하나다. 2006년 제1회 대한민국 e스포츠대상 최고 역전승 수상. 리마스터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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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요 4대 스타크래프트 포털(파이터포럼, 우주, 스갤, PGR)이 과다한 접속량으로 동시 마비되어, 길게는 몇 시간에 걸쳐 이어졌으며
네이버 검색 순위에는 10위권 내에 임요환, 온게임넷, 박지호, So1, 파이터포럼 등이 동시에 이름을 올렸다.
임요환의 팬 카페에는 3000여 개의 글이 새로 올라왔으며 360여 명의 신규 가입자, 그리고 3만 이상의 회원이 방문하여 왕의 귀환을 축하했다.
pgr 한니발님의 글
임요환의 팬 카페에는 3000여 개의 글이 새로 올라왔으며 360여 명의 신규 가입자, 그리고 3만 이상의 회원이 방문하여 왕의 귀환을 축하했다.
pgr 한니발님의 글
허나 오영종에게 2:3으로 아쉽게 패배하여 준우승한다. 그렇게 그의 인기 요소 중 하나였던 '끊임없는 부활'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이후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5에선 8강에서 최연성에게 1:2로 패해 탈락, 24강으로 확대된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 1에선 16강에서
2003 MYCUBE 스타리그 16강(임요환 vs 도진광) 하이라이트.
모든 스포츠가 다 그렇습니다. 포기하면 거기서 끝이고...
뭔가, 감동의 도가니탕을 만들려면 그 백 번 중에 한 번이 나올 때가 그때인 거니까.
뭔가, 감동의 도가니탕을 만들려면 그 백 번 중에 한 번이 나올 때가 그때인 거니까.
해서, 그 진광이랑 경기했을 때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거의, 저도 연습 때, 아비터를 써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 캐리어전만 연습하고 아니면 셔틀 뭉탱이로 가서 막 드랍해가지구 골리앗... 드랍십하고 이제 막 대등하게(비등하게?) 싸우거나 막 그래서 했던 건데, 아비터는 처음 당해봤어요. 그래서 아주 안 좋은 상황까지 갔었는데 그것도 끝까지 이 악물고 포기 안 하고 하다 보니까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된 거거든요. 그런 게 있어요. 저도 약간...상대가 엄청 강할 때, 아 이만 하면 내가 이겨야 되는데, 아 이 정도면 얘가 포기할 만한데, 포기를 이상하게 안 해. 잘하는 애가. 그러면은 되게 질려요. 막 질려가지고 내가 해야 할 플레이도 잘 못하게 되고.
아마 도진광이나 지호도 아마 그랬을 거예요.
아, 이 정도 했으면 당연히 이 정도 포기해야 하는데, 의외로 막... 더 이를 악물고 댐비는 거지.
그러면 자기가 하는 플레이가 주눅들어서 못해요.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데서 역전이 천천히 나오는 건데…
임요환, 아프리카 방송 중
한편 성적이 떨어진 이후에도 임요환은 팀에서 중요한 무게 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입대한 이후 오버 트리플 크라운을 찍고 있던 팀이 순식간에 몰락해버린 것은 임요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제대 이후 팀의 부활에도 임요환의 역할의 이야기는 꾸준히 나왔다.그래서, 다 캐리어전만 연습하고 아니면 셔틀 뭉탱이로 가서 막 드랍해가지구 골리앗... 드랍십하고 이제 막 대등하게(비등하게?) 싸우거나 막 그래서 했던 건데, 아비터는 처음 당해봤어요. 그래서 아주 안 좋은 상황까지 갔었는데 그것도 끝까지 이 악물고 포기 안 하고 하다 보니까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된 거거든요. 그런 게 있어요. 저도 약간...상대가 엄청 강할 때, 아 이만 하면 내가 이겨야 되는데, 아 이 정도면 얘가 포기할 만한데, 포기를 이상하게 안 해. 잘하는 애가. 그러면은 되게 질려요. 막 질려가지고 내가 해야 할 플레이도 잘 못하게 되고.
아마 도진광이나 지호도 아마 그랬을 거예요.
아, 이 정도 했으면 당연히 이 정도 포기해야 하는데, 의외로 막... 더 이를 악물고 댐비는 거지.
그러면 자기가 하는 플레이가 주눅들어서 못해요.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데서 역전이 천천히 나오는 건데…
임요환, 아프리카 방송 중
'프로게이머는 몰라도 임요환은 안다'라는 말처럼 이 시기는 파워 인터뷰, 공군 사관 학교 강연 등 게임 외 방송 활동이 활발했던 때였으며, '팬 클럽 60만 기록' 등의 언급과 함께 한때 수많은 프로게이머를 대체하는 대명사로도 자주 쓰였었다.
1.3.1. 전성기 시절의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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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 많은 전략을 선보였고, 스타크래프트 2로 전환할 당시까지도 허를 찌르는 전략을 주력으로 많이 들고 나왔다. 아래에도 후술되어 있지만, 200이 꽉 찬 상태에서 건설 로봇을 버리고 지게 로봇으로 땜빵하는 전술과 바이킹 뭉치기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바이킹 뭉치기는 블리자드의 빠른 패치(...)로 없어졌지만 지게 로봇은 그 이후 테란들의 장기전 기본 스킬이 된 정도로 영향을 끼쳤다. 그야말로 날빌의 선구자. 다만 임요환의 빌드는 이후 '날림 빌드'을 넘어서 '정석 초반 러시'로 편입되는 경우나, 기존에 버림받던 유닛들이 테란의 빛으로 대두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이러한 예로는 그의 마이크로 컨트롤을 통한 견제에 활용되었던 벌처(이건 임요환만의 공은 아니지만), 드랍십 등이 잘 알려져 있지만, 골리앗 등의 유닛도 그의 공을 입었다. 임요환이 골리앗을 활용하기 전까지 골리앗은 그저 걸어다니는 터렛이었다. 임요환이 골리앗을 사용한 후에 바로 패치된 탓도 있긴 하지만, 그는 골리앗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존재이다.
단지 한 경기[7]에만 써먹고 그 이상은 절대 쓸 수 없는 빌드, 임요환 선수는 굉장히 중요한 경기에서도 과감하게 쓰죠!
- 엄재경 해설(2005 신한은행 스타리그 16강 박성준과의 신 815 경기 中)[8]
- 엄재경 해설(2005 신한은행 스타리그 16강 박성준과의 신 815 경기 中)[8]
- The Pimpest Plays(Gamers Extreme and SCLegacy.com(2002~2007))
링크
또 빌드나 가격, 제대로 활약할 수 있는 타이밍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유닛이나 유닛 스펠도 고집스럽게 사용하여 이를 제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되는 것이
고스트의 락다운과
사이언스 베슬의 디펜시브 매트릭스. 고스트는 생산 조건이 몹시 까다롭고, 그런 까다로움을 감수하고 생산을 하더라도 크게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유닛이다. 그러나 이를 고집스럽게 뽑아 락다운의 긴 사거리를 이용해 적의 시즈 탱크를 무력화하거나, 리콜하러 오는 아비터에 대한 방어, 캐리어나 리버 등의 고급 기계 유닛을 묶어놓는 등. 스스로 고집스럽게 고스트를 잘 써먹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핵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사이언스 베슬의 EMP의 지원을 받고 넥서스를 한방에 깨버리는 임요환의 플레이는 단연 인상적 장면 중 하나였다.베슬의 디펜시브 매트릭스는 대 프로토스 전에서는 EMP의 중요성, 대 저그전에서는 이레디에잇이 가지는 저그 고급 유닛의 저격의 위상으로 인해 그렇게까지 선호되는 유닛 스펠은 아니었으나 임요환은 이것도 꽤 유용하게 써먹었다. 디펜시브 매트릭스를 사용한 마린 한 마리가 러커들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다른 마린들이 러커를 처리한다든가, 드랍가는 드랍십에 따라붙어 적진에 상륙한 병력에 디펜시브를 걸어 오랫동안 귀찮게 한다든지. 이레디에잇을 안 쓴 것도 아니었고 본인 역시 성동격서 식으로 베슬의 지우개를 밀어넣는 전략도 선호했으나, 디펜시브 매트릭스는 그의 미세한 단일 유닛 컨트롤과 맞물려 다른 프로게이머들보다 화려하게 사용되었다. 이는 이후 후대 게이머들이 한방 전투에서 집중 공격을 받는 탱크에 디펜시브를 걸어 화력 지원을 해주는 식으로 응용해서 제법 유용하게 써먹는 계기가 됐다.
또한 소수 유닛에 대한 마이크로 컨트롤이 2006년 이후의 택뱅리쌍 시대 이전까지 스타크래프트 역사상 최고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매우 뛰어났었다. 드랍십 컨트롤은 임요환의 드랍십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심지어 팬 카페의 이름도 '임요환님의 드랍십이닷-_-'이며 임요환이 운영하는 PC방 이름 역시 '임요환의 드랍십'이다. 이른바 '드랍동', 초기 게이머들의 팬 카페를 ~동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진호동', '정석동' 같이 이름이 아닌 별명으로 불린 팬 카페는 그의 것이 유일하다. 다만 이 컨트롤 조차도 독보적보다는 창의적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린다고 볼 수 있는데, 컨트롤 자체가 타인은 노력해도 흉내조차 못 낼 수준이었다기보다는, 당대 관점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컨트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요환식 컨트롤을 한번 보여주면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않아 임요환만큼, 오히려 임요환 이상으로 다듬어진 컨트롤 실력을 지닌 게이머가 나오곤했지만 '그런 컨트롤이 가능하다'라는 점을 가장 먼저 알아냈다는 점이 임요환만이 가지고 있는 의의라 볼 수 있겠다.
한때 배틀넷에는 '임요환 마린 컨트롤'이라는 유즈맵도 많이 돌았다. 물량보다 컨트롤 승부로 대표되는 게이머. 대신 ' 임즈모드'로 불리는 시즈탱크 컨트롤은 그의 토막 성향을 대변하는 유력한 근거다.
그의 또다른 무기로는 타이밍 러시가 있었다. 과거 임요환이 테란의 신성으로 발돋움하던 시절, 수비 위주로 휘둘리던 다른 테란과는 다르게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병력으로 적의 약점을 기막힌 타이밍에 찔러 승리하는 경기가 많았다. 주훈과 초시계를 들고 연습했다고 하며 2마린 1메딕 1파이어벳 타이밍에 뛰쳐나간 바이오닉 병력이 성큰이 채 지어지지 않은 저그를 우주로 보내는 경기가 자주 나왔다. 그가 그 나이에도 5할 승률을 유지하는 것은 전략과 이 기막힌 타이밍 감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단, 정전 배럭이라 불릴 정도로 후반 운영이나 생산 능력이 불안하다는 약점이 있다. 컨트롤을 얻는 대신 물량을 포기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임요환의 전성기로 평가받는 2001년까지는 물량에 대한 개념이 크게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전성기 당시에는 물량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별로 받지 않았다. 정확히는 물량의 폭발이라는 개념이 종족을 불문하고 도입된 시기는 임요환의 뒷세대라고 볼 수 있는 박정석, 이윤열 등의 전성기 이후 이들의 플레이가 보급화 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 물량은 오직 저그의 것이었으며, 테란은 수비와 병력의 조합의 김정민식 플레이나 컨트롤 위주의 임요환 플레이가, 프로토스는 소수 정예의 하드코어식 러시 아니면 병력의 비율을 맞춘 뒤 스톰을 가미한 올-인 한타식 임성춘의 플레이가 근원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박정석의 데뷔 리그인 코카콜라배에서 사람들이 본 시선[9]이나 이윤열의 등장에 대한 시선[10]을 보면 그 당시 테란이 물량이 달린다는 소리는 황당한 말에 가까웠다. 되려 그것을 두고 제2의 타이밍 ━컨트롤에 집중하느라 쌓인 자원으로 한타가 벌어진 이후 생각보다 빨리 병력이 다시 공격을 온다거나 자원줄이 거의 끊긴 상황에도 어느 정도 병력이 꾸역꾸역 나오는 것 등━ 이 존재한다는 말까지 듣기도 했다. 이는 그의 집요한 승부욕과 연관되어 기이한 역전승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임요환의 물량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게 되는 것은 임요환이 압박과 타이밍을 지향하는 게이머이기 때문이다. 이 압박이 잘 먹혀들면 경기가 수월하게 풀리지만, 실패하면 기회 비용 면에서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된다. 임요환은 초반 압박의 대가로 SCV 생산을 지불했고, 이것이 중후반 물량에서 약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임요환도 잘 째고, 별다른 난전 유도 없이 멀티태스킹이 없이 진행하는 상황에서는 200 빠르게 채우고 진출한다. 사실 밥 먹고 게임만 하는 프로게이머가 물량을 정말 그렇게 못 뽑아내겠는가? 토스전 약점으로 물량이 거론되는 경우가 많은데, 스1에서 임요환의 토스전의 문제는 일제시즈로 대표되는 전술 문제가 크다. 토스전은 저그전과는 달리 하나하나의 유닛의 체력이 아주 높기 때문에[11] 손 빠르기나 컨트롤보다도 자리 잡기가 훨씬 중요하다. 이영호나 최연성이 토스전에서 강력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임요환의 멀티 태스킹 부족으로 생산력의 약점을 드러내는 별명으로 '저축 테란'이 있다. 임요환의 전술적 우선 순위가 자원배분 및 생산의 매크로 컨트롤보다 교전시 병력 관리 등의 마이크로 컨트롤에 맞춰져 있기에, 중후반 난전 상황에서 정교한 컨트롤과 창의적 공격으로 승점을 따는 데에는 능하지만 반대 급부로 공방에 치중하는 순간 물량 확보에 약점을 보이는 특성을 지니며, 중후반 자원 관리가 되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임과 콩을 모두 까며 진행했던 tving 스타리그 2012 마지막 이벤트전 임진록 당시에도 불리한 전황 가운데 자원이 쌓이는 임요환을 두고 전용준 캐스터가 "임요환의 장점은 저축이에요! 항상 잔고가 빵빵해요 임요환은요!"라 외치며 스덕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다만 임요환을 '특이한 거 많이 했던 전략형 게이머'만으로 보는 것은 그가 클래식 테란의 발전에 기여한 것을 고려하지 못한 주장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임요환은 테테전에서의 골리앗, 드랍십을 통한 저그의 멀티 견제, 토스전의 원팩 더블커맨드, 러커에 대응하는 마이크로 컨트롤 등 다양한 측면에서 고전 테란을 완성시켰다. 물론 이 중의 일부는 다른 게이머들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임요환이 이 모든 것을 전반으로 종합해 완성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하지만, 전성기의 임요환은 특이한 것도 했지만 동시에 정석으로도 잘 이기는 게이머였다. 오히려 이후로 알려진 '전략가 임요환'은 임요환의 피지컬이 다른 게이머들을 압도하지 못하는 시점부터 더욱 부각된 측면이 있다.
1.4. 공군 ACE(2006~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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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9일 전산 특기병으로 공군에 입대하여 연예병사와 같은 홍보 목적의 공군 게임단인 공군 ACE에서 활동하다 2008년 12월 21일 전역하였다. 임요환공군전산소입단 공군에이스창단식 임요환의 군 입대를 앞두고 해외 사이트인 팀 리퀴드에서 응원과 귀환을 원하는 글들이 올라오기도 했다. 공군 에이스 입대 반응
사실 임요환의 입대로 공군 ACE가 탄생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12] 고참이 송병석과 아이들 사건을 비롯하여 딱히 사이가 좋다고는 말 못하는 강도경이라 임요환이 까일 것을 염려한 임빠들이 선물 드랍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는지 여러 매체의 인터뷰로 미루어 보았을 때 강도경에게 임요환이 많이 까인 것 같다.
예전에 김정민이 했던 프로게이머 토크쇼 스타7224 5회 1부 후반부와 2부 초반부를 보면 평소에는 비교적 차분하시던 그분께서 강도경 이야기만 나오면 분노에 사무친 어휘를 구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공군 시절 강도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평소 미디어 앞에 나왔을 때와 같은 인자한 모습이 아니라, 분노를 매우 솔직하게 드러냈다. 강도경이 임요환의 생일날에 생일빵을 했는데 임요환을 모포로 덮어 놓고 단순히 한 발로 밟는 것이 아닌, 점프 후에 두 발로 임요환을 내리찍는 아주 격렬한 생일빵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일날에는 생일빵을 없애버리는 주도면밀함을 보였고, 생일빵이 폐지된 강도경의 생일날이 공군 에이스의 분위기가 최고로 안 좋았던 날이라고 한다. 이로써 임요환은 강도경 생각만 하면 뒷골이 땡긴다는 말까지 하게 됐다.
그 상황 속에서 2007 프로리그 전기 리그에서 3.3혁명으로 급부상한 김택용에게 승리하여 팀을 승리로 이끌고,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마재윤을 이기고, 천적이라고 여겼던 강민과 슈퍼 루키 이영호에게 하루에 2승을 챙기며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심지어 병장이었던 2008 시즌에도 한빛 스타즈와의 에이스 결정전에 출전하여 윤용태를 압도적으로 관광태웠다. 초반부터 유리한 분위기를 잡더니 윤용태의 모든 노림수를 별 어려움없이 막아내며 자신은 윤용태의 본진을 제외한 온 맵을 점령한 뒤 윤용태를 본진에 가두고 GG를 받아냈다. 포인트는 윤용태의 최후의 노림수였던 본진 리콜을 고스트의 락다운 한 발로 막아낸 것. 고스트는 단 한 기만 생산되어 락다운을 장착한 후 무려 10분 동안 본진에서 대기하다가 리콜 온 아비터를 잡아내며 1킬을 기록, 임요환의 명장면 역사에 새로이 기록되었다. 당연하지만 공격력이 바닥인 데다 진동형인 고스트가 대형 유닛인 아비터를 잡으려면 한 세월이 걸린다. 미사일 터렛 2기와 같이 때린 결과 잡아낸 것. 하지만 막타는 고스트가 그 저열한 공격력으로 먹어 명장면을 더욱 명장면답게 만들었다.
이 시즌은 공군 에이스의 존폐 위기가 해결되었던 시기로 전용준 캐스터의 "대한민국 공군 에이스가 왜 필요한지, 임요환이 공군 에이스에서 어떤 인물인지, e스포츠에 어떠한 인물인지 제대로 보여줬어요"라는 포장 해설과 임요환의 세리머니가 유명하다. 또 이 경기를 통해 공군은 잠시나마 10위를 기록했다. 최종 순위는 11위로 공군 에이스 팀 역사상 유일하게 꼴등을 하지 않은 시즌이기도 하다.
1.5. 전역 후 스타크래프트 1 복귀(200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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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후 SKT T1으로 복귀하였으며, 코칭 스태프로 활동했다. SKT T1의 주훈 전 감독은 임요환이 제대해서 친정 팀에 복귀했을 때 선수로서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코칭 스태프를 거쳐 끝내는 감독직을 물려줄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는 감독이 박용운으로 바뀐 뒤에도 계속된 안이었지만, 결국 본인이 이를 포기해서 없던 일이 되었다.
2009년 01월 17일 제대 후 프로리그 첫 번째 출전에서 패배하였으며, 2009년 07월 12일의 두 번째 출전에서도 정ㅋ벅ㅋ자 박지수를 만나 패했다. 초반부터 중반까지 나쁘지 않게 운영하며 정ㅋ벅ㅋ자를 몰아세웠지만 후반에 나온 정ㅋ벅ㅋ자의 드랍십에 털리며 GG. 경기 후에 인터뷰에서도 9까지는 잘했는데 마지막 1에서 털렸다며 스스로도 '욕먹을 경기'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굴욕인 것은 자막의 이름이 임요'한'이라고 쓰여 있었던 것. 자막 담당 PD의 안위가 걱정된다.
2009년 07월 13일 e - 스타즈 헤리티지 매치 박정석과의 경기에서 물량전 끝에 제대 후 첫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로써 박정석과의 전적은 15:15가 되었다. 그칠 줄 모르는 5할 본능. 7월 14일에는 오영종을 격침시키며 토스전 2연승을 달리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저 둘은 군인 신분이고, 현역 프로 선수와의 승리는 아직 미지수인 상황.
대 박정석전에서는 얼굴이 붉어지고 이마에는 핏줄이 섰으며 땀까지 뻘뻘 흘리는, 한 마디로 긴장한 상태에서 아슬아슬하게 이겼기 때문에 과연 이것을 부활의 신호탄으로 보아야 할지는 미지수. 심지어 입도 닫았다! 시합에 집중해 만족스러운 플레이가 나올 때는 눈이 풀리고 입이 벌어지지만, 긴장하거나 경기가 불리하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눈이 또랑또랑해지고 입이 닫힌다...
오영종 전에서는 그냥 아무런 재미도 감동도 없이 완만하게 승리. 7월 24일에는 몸 담았던 팀 공군 ACE 홍진호와의 경기를 펼쳐 핵 2연발을 날려버렸다.
14일 '09-10 프로리그 맵 테스트'에서 임요환이 박명수를 잡아내고, 압도했다. 더군다나 사용된 '로드 러너'는 오프라인 맵 테스트에서 저그가 테란에게 15승 1패를 기록한 저그 맵이었다.
9월 26일 이벤트전 '돌아온 임진록'에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스타리그와 MSL에서 각각 열린 예선전에서는 탈락했다.
10월 25일, 신한 은행 프로리그 1라운드 SKT T1과 화승 OZ의 경기에서 임요환은 박준오를 상대로 2세트 경기에 출전한다. 상대가 아직 많은 경험을 쌓지 못한 신인 선수였고 워낙 T1의 엔트리가 팬심을 자극하도록 짜여 있었던 만큼 이벤트성 출전일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고, 일부 팬들은 퇴물 선수가 얼굴마담, 코치 노릇이나 하지 뭣 하러 출전했느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당일 양 팀의 엔트리는 1세트 박재혁 vs 이제동, 2세트 임요환 vs 박준오, 3세트 김택용 vs 김태균, 4세트 정명훈 vs 손주흥의 순서로 짜여 있었다. 초반 1·2세트를 내주더라도 후반 3·4세트에 포진한 에이스'급 선수들을 통해 차후를 도모하려는 의도였던 듯.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임요환의 경기력은 중간 이상이었고, 임요환이 따로 준비해온 듯한 독특한 빌드와 파이어 뱃 위주의 특이한 병력 구성, 입구에 홀드 상태의 메딕을 배치한 메딕 장판파 등 여러 볼거리가 많아 경기 내용은 상당히 재미있었다는 평가가 다수를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핵ㅋ관ㅋ광ㅋ. 경기 도중, 제2 멀티에서 뜬금없이 뉴클리어 사일로가 건설되기 시작하자 현장에서도 TV 앞에서도 스갤에서도 환호성이 들려왔다. 테란이 아직 완전한 승기를 잡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다른 선수가 그랬다면 이기든 지든 비판을 면치 못했겠으나 이번엔 임요환이 했기에 달랐던 듯. 실제로 그 핵은 아직 여력이 남아 있던 박준오를 정신상으로도, 자원상으로도 안드로메다에 보내버렸다.
'앞으로는 핵을 전략적으로 사용하겠다'라는 경기 후 인터뷰를 한 걸로 보아 뭔가 또다시 새로운 걸 준비하는 듯. 그리고 이것은 정명훈이 2연핵을 씀으로써 증명되었다. 관광용이긴 했지만.
10월 31일 IEF 2009 조별 리그에서 취미로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우크라이나 32세 직장인 등 외국 게이머들에게 패하고 광탈[13], 팬들은 임토 히로부미라는 별명을 지었다. 하지만 그 직전 김택용과 매정우가 중국 게이머들에 패하고 광탈했다는 충격적 소식 때문에 크게 까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반쯤은 얼굴 마담인 임요환과 코/매는 기대치가 달랐기 때문. 이런 난장판에서 살아남은 건 송순신과 의병장 이철민이었다. 11월 24일날 프로리그 경기에서 홍진호와 경기함으로써 임진록이 이루어졌는데 프로리그 공식 무대에선 첫 대결이다(이전 포스트시즌에서 한 번 있었긴 했다).
11월 24일 적절하게 병력을 모아서 한방 병력을 보내는 전형적 테저전을 보여줬지만, 하이브를 늦게 타면서 저글링과 러커를 모은 홍진호의 한방 '포... 포풍'으로 임요환의 병력이 잡아먹히면서 전세가 기울고, 핵을 홍진호의 멀티에 쐈지만 져버렸다. 경기 직전까지는 웃다가 지고 난 이후에는 울먹이는 표정이라 까였다.
사실 까이는 축으로 보이지만 은근히 까면서 옹호도 한다. 이래저래 임요환, 홍진호 등의 인물은 이미 스타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들이기도 하고...
2010년 2월 4일-5일 벌어진 양대 PSL에 참가했는데 특이하게도 경기에 집중하고 싶다며 자신의 경기가 방송되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결국 탈락. 그래도 양대 예선에서 모두 조 4강까지 찍었다.
그리고 2010년 설이 지난후 자신의 거취를 다시 생각해보겠다는 인터뷰를 했다.
일단 위치는 선수라기 보다는 최연성과 같은 플레잉 코치라고 하는 게 더 맞을 정도. 이에 여러 사람들이 벤치나 달구면서 억대 연봉 가로챈다고 말이 많지만 그건 섣부른 판단이다. 임요환이 T1에 있으면서 가지는 존재 가치와 그가 가지고 있는 올드 팬 숫자, 그리고 팀 내에서 임요환이 맡은 후배들의 멘토 역할 때문에 확실히 그는 적어도 돈 받은 것 만큼 착실히 일하는 존재이다. 물론 거기에 MSL이든 스타리그든 진출하여 16강에 들어주고, 더 나아가 우승까지 해서 SKT T1 최초 골든 마우스까지 타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임요환이 나와주길 바라나 티원이 팀 사정이 막장이라 나올 기회가 없는 실정. 하지만 만약 그가 자기를 그나마 써줄 팀을 찾아 간다면서 다른 팀으로 가버린다면, 일단 T1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올드 팬 감소의 위험이 있다. 임빠가 많이 줄었다곤 하나 아직 많다.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아 앞에서 날뛰질 못하는 것뿐. 또 팀 내 멘토를 잃는 일을 동시에 겪게 된 것이, 임요환이 공군 갔을 때의 티원이 어떻게 됐는지 보면 대강 짐작이 될 것이다. 물론 복합된 이유도 있었지만 당장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스캔들이 존경할 만한 멘토를 가지지 못한 팀에서 발생했다는 걸 생각해보자.
그러던 와중에 2010년 4월 13일, 뜬금없이 배우 김가연과 결혼설이 났다.(일단 '열애는 사실'이라고 했다.) 이전에도 김가연과의 열애설이 나긴 했지만 발표 타이밍이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스캔들이 터져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시기인지라 승부조작 사건을 덮기 위한 방패막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 실정. 덕분에 스타판의임벙커, 임논개, 살신성임, 황제의 타이밍, e스포츠의 수호자 등으로 불리며 반 농담으로 칭송 받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임빠와 임까들은 모두 한입을 모아서 '아무리 지금 그분 나이 30세라 하더라도 8살 차이 + 중3 딸내미를 가진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하다'며 팬들은 반발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토를 다는 사람도 거의 없는 데다가 그의 활동에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점이 높이 사면서 둘의 관계에 매우 긍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추세이다. 프로리그 경기 때도 그렇고 광안리 결승전에서도 커피와 과자, 빵등을 싸오는 등 임요환 개인만이 아니라 SK팀 전원에게 여러모로 보살펴 주는 모습이 보인다. 최연성과도 친분 관계가 두터우며 그를 매우 편하게 '연생'이라고 부르기도....
실제로 조작 관련 논란이 한동안 확실히 잠잠해졌다. 폭풍우와 같은 떡밥이 많이 차분해졌던 느낌. 그리고 그분의 유일한 라이벌도 연이어 '강민의 올드 보이'에서 떡밥을 터트려 처음 터졌을 때보단 희석된 분위기였다. 물론 5월 16일 승부 조작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는 논란이 눈덩이처럼 커졌으나, 이건 임요환 홍진호 할아버지가 와도 못막으니...
2010년 5월 8일에는 프랜차이즈 카페인 카페 베네의 성대 지점을 개업해 카페 점장이 됐다. 일단은 이름만 내건 점장이 될 것 같긴 하지만 은퇴 뒤를 준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덕들은 '카페에서 커피콩을 볶는다'며 카페 개업은 운명이 아니냐는 드립을 치기도...
컨디션 난조 및 실력 저하로 양대리그 예선에 불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덕들은 드디어 은퇴인가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하지만 2010년에 승부 조작 사건 중에 터진 열애설에 따른 후폭풍과 프로리그에 집중하여 다시금 재기를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스갤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임요환의 출전은 기대하긴 글렀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나오지 않으니 기대하지도 까지도 못하겠다며 떨어져나가는 팬들도 많다. 팀을 탈퇴하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스타 2로 전향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
한때 09-10 신한 은행 프로리그 결승전에서 나올지 나오지 않을지 꽤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2010년 8월 7일 광안리 결승전, 팀원이라서 나오기는 나왔으나 정작 경기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 결승전에는 애인인 김가연 그리고 자신의 부모까지 몸소 찾아왔었는데도 나가지 않았다. 그의 경기 출전을 기대하던 팬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고, 앞으로의 그의 프로게이머 생활에도 비관적 전망이 많았다. 이후 인터뷰를 통해 30대 프로게이머 선언이 빈말에 그쳐 팬들이 상심하게 만든 데에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2. 스타크래프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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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에 열린 프로게이머 정기 소양 교육에 장염을 이유로 불참했고, T1의 일본 워크샵에도 불참했다. 이미 9월부터 스타크래프트 2로 전향한다는 설이 파다했고, 그로 추정되는 배틀넷 ID까지 거론되는 등 상당히 신빙성이 높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거취를 밝히지 않아 속을 태우다가, 공식으로 10월 9일에, 진행 중인 GSL 시즌 2 예선에 참가한다는 공식발표가 나왔다. 10일, 예선전 2일차부터 참가.
사실 APM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올드 게이머들에게 스타 1보다는 스타 2가 유리한 면이 있었다. 인터페이스가 간단하고 일꾼 컨트롤이나 유닛생산 같은 것들이 획기적으로 편리해졌으며 부대 유닛 지정수는 '12 → 무제한'라 전략에만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게 되면서 외국 유저 참여 수도 늘었다. 임요환 본인도 온게임넷 드리머 인터뷰에서 자신의 초반 전략이 다 막혀버리고 손이 부대 지정 1~3 정도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에게 200 vs 200 싸움은 익숙하지 않아 조급해지면서 승률이 떨어졌다고 밝혔다.
"이번 GSL 시즌2를 통해 새로운 분야에 발을 내딛게 되는데 무궁 무진하게 발전될 '스타2'의 새로운 역사에 개척자 중의 한 명으로 남고 싶습니다.
또, 앞으로 '스타2'를 통해 팬들에게 좋은 경기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뿐이지만 때로는 성적이 좋지 않거나 실망스럽더라도 승패를 떠나 노력하는 마음을 봐줬으면 합니다. 저를 비롯해 전향 선언 후 새로운 출발선에 선 모든 이들을 응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 '새로운'이라는 단어는 제게 항상 열정을 불어넣어 줬습니다.
이 열정이 그대로 팬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것이 제가 20대 프로게이머일 때의 모습과 다른 30대 프로게이머로서의 나아가야 할 방향일 것입니다. 저는 '스타1'을 그만두고 '스타2'로 전향하는 것이지 결코 프로게이머에서 은퇴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동안 이윤열, 박성준 등을 비롯해 먼저 스타크래프트에서 스타크래프트 2로 전향하며 개척자를 자처한 후배들에게로 팬들의 응원을 정중하게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전향한 프로게이머들을 함부로 은퇴 처리하고 기록을 삭제하는 것도 모자라 '상금 사냥꾼', '후배와 e스포츠의 배신자' 등으로 모욕한
KeSPA와
UNN들까지 점잖게 꼬집는 뉘앙스의 발언이었다. 게다가 이 바닥에서 임요환이 가지는 무게감이라는 걸 생각하면 전향했다고 협회나 UNN들이 까는 건 부적절한 행위.또, 앞으로 '스타2'를 통해 팬들에게 좋은 경기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뿐이지만 때로는 성적이 좋지 않거나 실망스럽더라도 승패를 떠나 노력하는 마음을 봐줬으면 합니다. 저를 비롯해 전향 선언 후 새로운 출발선에 선 모든 이들을 응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 '새로운'이라는 단어는 제게 항상 열정을 불어넣어 줬습니다.
이 열정이 그대로 팬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것이 제가 20대 프로게이머일 때의 모습과 다른 30대 프로게이머로서의 나아가야 할 방향일 것입니다. 저는 '스타1'을 그만두고 '스타2'로 전향하는 것이지 결코 프로게이머에서 은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데일리e스포츠 등은 이벤트 리그 참여라고 임요환에게 디스를 했다. 이후 임요환을 비평하는 활동이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스타 1 e스포츠 대회와 프로 게임단을 버리고 이제 막 출시된 스타 2의 이벤트 대회를 선택했다", "공군 에이스 게임'단에서 병역 특례로 군 생활을 하는 등, 기존 브루드 워 e스포츠계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대우와 혜택을 받았으면서 위기에 직면한 현 브루드 워 e스포츠계를 외면하고 스타 2로 가버린 건 배신이다", "이영호, 이제동 같은 후배 선수들은 브루드 워 e스포츠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대선배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스타 2로 옮겨가는 모습이 씁쓸하다 등등의 구설수가 나왔다.
SKT T1 프런트 측에서는 임요환에게 지도자의 길을 권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감독 자리라는 편한 길이 있음에도 선수 생활을 계속해 나가길 원한 것이니 기득권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엄연히 계약 만료 후 다른 선택을 한 것인데 배신 운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건 회사로 치면 계약 끝난 사원이 "관리직으로 올려줄게, 몇 년만 더 있어라"라는 제안 거절하고 더 장래성 있는 회사에 취직했더니 배신했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거다.
2010년 11월 3일. 더 이상 한국e스포츠협회 소속 프로게이머가 아닌, 아마추어로서 자격이 전향되었고, 케스파는 당연히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반면 임요환은 그러거나 말거나, 발표 직후 인텔의 후원으로 개인 후원 2억 원을 포함한 5억 원 후원으로 새로운 게임단을 창단하기로 결정했다. #.
그리고 11월 9일. '슬레이어스' 클랜을 결성했다. 카페 주소 초기 가입 조건은 다이아몬드 리그 1800점 이상이었으며, 타 팀과 클랜에 가입된 경우엔 가입이 제한되었다. 넷카마 방지를 위해 여성 신청자는 직접 전화한다고 한다. Play XP에도 클랜 만든다고 글을 올렸으나, 이 글에 찌질이가 달라붙어 인증 드립을 치다가... 성지가 되어버렸다. #성지
2.1. 스타크래프트 2 진출(2010~2012)
선수로서 자세한 활동 기록은 임요환/스타크래프트 2 문서로.
[1]
해당 친구는 임요환이 프로게이머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20대 초반 시기에 안타깝게도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2]
90년대 초중반까지 게임은 컴퓨터가 아닌
게임기로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컴퓨터 게임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사양이나 그래픽 면에서 게임기에 한 수 접어줬다.
[3]
이 과정에서 처음 주종족으로 삼았던
프로토스를 1.04 패치로
슈팅 리버가 막히자 테란으로 주종족을 바꾸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4]
1.04 패치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브루드 워 출시 이후 이야기.
[5]
이는 약간의 검증이 필요한 대목으로써 임요환은 온게임넷 스타리그에 데뷔하기 전 이미 '태란의 황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 근거로 데뷔전이었던 정완수 선수와의 경기 당시 소개 내용에 이미 '테란의 황제'라는 별명이 있다고 소개가 된다. 아마 게임큐 시절 붙은 별명으로 추측된다. 물론 게임큐 스타크래프트 방송의 해설도 온게임넷 스타리그와 동일한 엄재경이었다.
[6]
사실 테란치고 메카닉에 약한 선수는 거의 없다. 토막 중의 토막으로 유명한
한동욱도 메카닉이 약하진 않았으며 테테전에는 강세를 보였다. 애초에 메카닉이 바이오닉보다 훨씬 운용이 쉽기 때문에 개념의 부족으로 토스전이 약할 수는 있어도 메카닉 자체를 못 쓰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7]
마이큐브 스타리그 도진광전 기준, 신규 맵 첫 경기 승률 10승 2패.
[8]
실제로 이 경기 이후
815는 III 버전에서 7시 지역의 입구를 윗입구 형태로 수정하면서 정말로 이 빌드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9]
토스인데 멀티 먹고 병력만 뽑으려고 하는 기이한 선수.
[10]
물론 현련한 컨트롤 또한 주목받았지만 가장 주목받은 건 그 컨트롤 뒤에 쌓이고 있는 어마어마한 물량이었다.
[11]
기본 유닛에 불과한 질럿이 실드 포함 160이다! 시즈 탱크보다도 체력이 높다.
[12]
애초에 공군 게임단의 창립 조건이 임요환의 입대였다.
[13]
이 게이머가 자유의 날개 시절 초창기 스타2 올드 팬들이면 알 만한
White-Ra, 사실 이 이전부터 브루드워 유럽 신에서는 네임드 게이머로 유명했지만 국내에선 스타2 시기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