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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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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고등학교 교장 | ||||||||||||||||||||||||||||||||||||||||||||||||||||||||||||||||||||||||||||||||||||||||||||||||||||||||||||||||||||||||||||||||||||||||||||||||||||||||
제8대 류 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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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김성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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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송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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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박용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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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김성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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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현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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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1년 10월 11일 | ||
전라도
흥덕현
부안면 인촌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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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5년 2월 18일 (향년 63세)[3] |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33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길 8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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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산 8-1[4] | ||
재임기간 | 제2대 부통령 | ||
1951년 5월 16일 ~ 1952년 6월 2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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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 울산 김씨[5] | |
부모 |
아버지 김경중(생부), 김기중(양부) 어머니 제주 고씨(생모), 전주 이씨(양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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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남동생
김연수 여동생 김점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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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고광석(사별) 이아주(재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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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장남
김상만 장녀 김상옥 차남 김상기 삼남 김상선 사남 김상흠 차녀 김상숙 오남 김상오 삼녀 김상현 육남 김상종 칠남 김남 팔남 김상석 구남 김상겸 사녀 김순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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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영학숙 (졸업)[6] 세이소쿠영어학교[7] (수료 / 4학년) 긴조중학교 (졸업)[8]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경제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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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유교 (
성리학) →
개신교 (
장로회) → 천주교 (세례명: 바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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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판석(判錫) | ||
호 | 인촌(仁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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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창간 시절[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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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2대 부통령.2. 경력
- 1906. 창흥의숙 수학
- 1910.3. 긴조중등학교 졸업
- 1910.4. 와세다대학 입학
- 1911. 와세다대학 예과 수료
- 1914.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 1915.4. 중앙고등보통학교 인수 및 제9대 교장 취임 (1915.4. ~ 1918.3.)
- 1919.10. 경성방직주식회사 취체역 이사
- 1920.7. 동아일보 제2대 사장 (1920.7.1. ~ 1921.9.15.)
- 1921.7.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총회 위원
- 1923.3.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금보관위원
- 1924.10. 제5대 동아일보 사장 (1924.10. ~ 1927.10.)
- 1929.2. 재단법인 중앙학원 초대 주무이사 (1929.2.19~1955.2.18.)[10]
- 1929.3.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 (1929.3. ~ 1939.9.)
- 1931.9. 중앙고등보통학교 제15대 교장
- 1932.3. 보성전문학교 주무이사
- 1932.6.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 (1932.6. ~ 1935.5.)
- 1935.3. 조선기념도서출판관 관장 및 이사
- 1937.5. 제12대 보성전문학교 교장 (1937.5.26. ~ 1946.2.19.)
- 1935.11. 소도회(昭道會) 이사
- 1938.6.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 1941. 조선방송협회 평의원
- 1945.9. 미군정청 한국교육위회 위원
- 1945.10. 미군정청 한국인고문단 의장
- 1945.12. 제9대 동아일보 사장 (1945.12.31. ~ 1947.2.24.)
- 1946.1. 한국민주당 제3대 수석총무
- 1946.2.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
- 1947.9.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의회 국무위원
- 1949.2.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 1949.7. 동아일보 고문
- 1951.5.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 1955.2. 사망
-
1962.
건국공로훈장 복장[11] 추서[12]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김성수(1891)/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4. 행적에 관한 의견과 사후 영향력
인촌 김성수 선생 동상 건립문:
민족자립의 대본이 첫째 교육에 있음을 깨닫고 일제의 억압과 싸워가며 이 사업을 완수한 이는 곧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 선생의 사업이 허다하지만 특히 교육은 그가 지상사명으로 삼아 물심을 기울여 일생을 여기에 바쳤던 것이다. 선생은 본시 고창출생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마치고 돌아오자 단기 4248년 1915년 중앙학교를 맡아 일익확장, 다시 그 경영을 반석위에 놓고자 4262년 1929년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창설하였다. 그후 2년에 걸친 구미유람에서 또 깊이 느낀 바 있어 4265년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이어받아 전기 재단 경영 밑에 두고
안암동 넓은 지역을 택하여 괄목할 시설을 이룩하니 영재육성과 아울러 민족문화배양의 일대요람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갈망의 해방을 맞이하자 익 4279년 1946년 드디어 보성전문학교를 개편하여 고려대학교로 승격시키고 한층 더 내용을 확충하니 그의 포부는 실로 원대하였다. 아! 선생은 4288년 1955년 아깝게도 65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애국애족의 발로에서 교육사업에 진췌한 그 숭고한 정신, 치밀한 경영, 거룩한 공헌은 길이 후세의 사표가 되고 남음이 있으리라. 고대교우가 중심이 되어 본교관계유지들과 함께 선생의 높은 덕행을 추모기념하고자 모교 교정에 이 동상을 모신 것이다.
- 단기 4292년 1959년 5월 5일 건립 고려대학교 교우회[13]
- 단기 4292년 1959년 5월 5일 건립 고려대학교 교우회[13]
- 1942년 징병제도실시감사축하대회에 참석하고, 1943-1944년 『매일신보』, 『춘추』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 「인고단련의 기백」, 「대의에 죽을 때 황민 됨의 책무는 크다」, 「충용무쌍의 황병 되라」 등의 글을 기고하여 징병을 선전, 선동함. 1943년 「학도출진좌담회」에 참여하고 『매일신보』, 『경성일보』에 「빛나는 전통을 살리라」, 「일각도 주저치 말자」, 「우리 완승을 목표로 더욱 연락과 격려를」, 「이 시대 최고의 광영!」 등의 글을 기고하여 학병의 취지를 고취시켜 학병 동원을 독려함.
- 1941년 '황국정신의 앙양' 등을 목표로 내건 흥아보국단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의회를 통합하여 조직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전쟁협력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서 발기인과 감사로 활동함. 1937년 중일전쟁기에 라디오와 강연회를 통하여 시국인식의 철저와 '총후봉공'을 역설하고, 군용기 경기호 건조비로 3백원을 헌납하였으며, 1943년과 1944년 『매일신보』에 「절대로 협력」, 「징병이 닥쳐온다」 라는 글을 기고하여 출정 군인 유가족에 대한 원호사업의 철저와 협력을 주장함.
- 1938년부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이사, 참사로,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로 재직하면서 『매일신보』에 「만전 준비 다할 뿐」, 「각 전문교 과거와 현재」, 「새 결의로 총궐기」라는 글을 기고하여 일제의 침략전쟁 승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을 역설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p.1909-1910
- 1941년 '황국정신의 앙양' 등을 목표로 내건 흥아보국단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의회를 통합하여 조직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전쟁협력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서 발기인과 감사로 활동함. 1937년 중일전쟁기에 라디오와 강연회를 통하여 시국인식의 철저와 '총후봉공'을 역설하고, 군용기 경기호 건조비로 3백원을 헌납하였으며, 1943년과 1944년 『매일신보』에 「절대로 협력」, 「징병이 닥쳐온다」 라는 글을 기고하여 출정 군인 유가족에 대한 원호사업의 철저와 협력을 주장함.
- 1938년부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이사, 참사로,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로 재직하면서 『매일신보』에 「만전 준비 다할 뿐」, 「각 전문교 과거와 현재」, 「새 결의로 총궐기」라는 글을 기고하여 일제의 침략전쟁 승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을 역설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p.1909-1910
-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년 보고서에 포함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이유는 일제강점기 말[14] 친일 기고문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과 활동했다는 점, 총독부 어용기관지 < 매일신보>, <경성일보>, 잡지 <춘추> 등에 학병 권유문을 수 차례 기고했을 뿐만 아니라 담화문 및 연설 등을 수 백 차례 했다는 점, 국방 헌금을 여러 차례 납부했던 점 등이다.
- 2009년 11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인촌의 행적 중 일부가 친일반민족행위라고 한 결정에 대해 인촌기념회 등은 이에 대해 불복해 2010년 1월 소송을 내 1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으나 2010년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 20명'이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 취소 결정이 내려지고 2011년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을 때 김성수만이 보류 결정되었는데 인촌기념사업회가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것을 취소해 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심과 2심을 거치면서 김성수 친일 행적이 대부분 인정되었다. 2017년 4월 13일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김성수의 친일 행적을 인정했다. #[15] 대법원 확정 판결에 따라 2018년 2월 13일 국무회의 의결로 건국훈장의 서훈이 취소되었다. # 이에 대해 유족들이 서훈 취소에 불복해 또 소송을 걸었으나 1,2심 모두 패소하였다. 2024년 4월 12일 대법원에서 김성수의 서훈 취소를 확정하였다. #
- 주로 일제 말 전시 국가총동원 체제에서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김성수 명의의 기고문, 담화문과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친일단체 임원명단이 그를 친일인사로 판단하는 근거인데, 이것이 과연 김성수의 진의에 의한 것이었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고 해방 직후 친일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일생에 걸쳐 애국적 삶을 살아온 그를 단순히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반론이 있다.[16]
- 공식적 결정과는 별개로[17] 이 논쟁이 좌우 갈등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심심하면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객관적 사실보다는 좌우가 서로 정치적으로 따지다보니 문제가 꼬일 때가 많다. 특히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극우 세력에서는 '같은 친일 기고문 떡밥이 있는 여운형은 안 오르고 김성수는 오르냐.'는 이유로 민족문제연구소를 공격하기도 한다. 다만 여운형이 친일인명사전 문제에서 빠진 이유는 일제 말에 국내에서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중국 옌안의 조선의용군,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고 광복에 대비하는 등 구체적인 독립운동이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졌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말기 국내에서 독립운동 단체는 조선건국동맹 이외에 거의 전무했었으며 아이러니한건 살아 생전 김성수와 여운형이 사상적으로는 정반대 관계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친분이 두터웠다는 점이다. 김성수는 여운형 계열 인사인 조봉암을 많이 밀어주기도 했다.
- 어느 시사 카툰은 여운형을 번번이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 심사에서 탈락시키면서 일제 말기 징병을 옹호한 전적이 있는 김성수에게 진작에 건국훈장을 추서한 국가보훈처의 행동에 대해 비판했던 적이 있다. # 후에 김성수는 대통령장(2등급) 서훈이 취소되고 여운형은 대통령장에다 대한민국장(1등급)까지 받게 되었다. 친일인명사전 문제 이후로 사상에 따른 훈장 수여 문제가 불거져 나와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극우 측에서는 여운형에게 수여한 1급 훈장을 치탈하라고 주장하고 있고 진보 측과 역사학계에서는 김성수를 포함하여 친일 경력이 있는 자의 훈장을 치탈하라 주장하며 서로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
- 반론 측에서는 전시 체제 기간(1943~1945) 동안 집중적으로 쓴 여러 편의 글이 있긴 하지만 강압이나 조작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고 김성수는 적어도 그 전까지 실력양성운동 등 항일 활동을 실천으로 보여준 지식인 가운데 1명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 같이 대놓고 친일파라고 분류하는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주요 근거로 내세우는 가장 대표적인 반론이 < 매일신보> 기자인 김병규라는 자가 인촌 김성수의 명의를 함부로 도용해서 자기 멋대로 실었다는 주장[18]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를 놓고 실제 재판까지 가기도 했다. 2005년 재판 당시 재판부에서는 '실제로는 김병규라는 매일신보 기자가 친일 논설들을 게재하기에 앞서 김성수에게 글의 내용을 보이고 김성수가 그 내용을 충분히 검토한 이후에 이를 <매일신보>에 게재하였다는 것인바 그런 경위로 게재된 글은 김성수 자신의 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겨지므로 위 보도는 진실에 부합하거나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라고 결정을 내렸다. #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 요구를 끝내 거부했다는 점[19]에서 신문, 회사, 학교를 살리기 위한 '소극적인 친일'을 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20] 물론 법원에서는 대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용을 해야 하는 법원의 입장에서는 행위의 동기, 당시의 정황과 상관없이 외부적으로 표시된 사실만 갖고 판단할 수밖에 없으므로 정상참작 등의 정책적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 각종 독립운동 가담 제의를 표면상으로는 대차게 거절하면서 뒤로 몰래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러 증언 내용을 보면 독립운동가를 방에 남겨둔 상황에서 금고를 열어놓고 밖에 나가는 일을 자주 했다고 한다.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사라진 돈이 <동아일보>를 통해서 한국독립군 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강훈은 김성수가 송진우를 통하여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4차례나 보내줬다고도 증언했다. # 또한 인촌은 도산 안창호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자 안창호의 치료비를 그가 죽을 때까지 지원했다.
- 다른 관점에서 보면 김성수로서는 자신의 행보에 학교, 언론, 기업과 거기 속한 사람들의 생사가 걸린 만큼 친일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정상 참작을 해줘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한 세대를 넘는 35년의 시간 동안 조선 인민 절대 다수는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적어도 일제의 행정 기관과 군사 기관 앞에서 겉으로는 이를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항일 무장 투쟁이 말이야 쉽지, 현실적으로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체제 자체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학교, 언론, 기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21] 그나마 김성수는 태평양 전쟁 전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 시도했던 사람 중의 1명이었으나 일본의 통치가 비이성적으로 폭주하게 된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르러서부터 생존을 위해서라도 일제에 협력하는 척을 했던 것으로 봐줄 여지가 있다.[22]
- 민문연이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3]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물산장려운동, 실력양성운동을 주도하였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는 등 친일보다 항일의 공이 더 큰 인물이라는 견해가 있고, 반면에 선항일 후친일의 변절자라는 견해도 있다. 나아가 김성수의 친일혐의는 누명이라며 더 적극적으로 김성수를 변론하는 입장도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중요한 근거는 김성수의 행적에 대한 생생한 증거와 생존한 증인들이 산적해 있을 광복 전후 당대에 김성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진영을 불문하고 그를 민족지도자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민문연과 정부에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시키는 발표를 할 때마다 각계각층에서 큰 진통이 벌어졌다.
- 실제 김성수는 창씨개명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도 활발하게 교육 사업을 펼쳐 사회적 명망이 있었으며, 심지어 명목상이기는 하나 194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환국 이후 만든 국민의회 국무위원에 취임하기도 했다.[24] 나아가 각계의 신망을 얻어 제2대 대한민국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만 장기집권에 실망하여 부통령직을 내던지고 성재 이시영, 심산 김창숙 등 독립운동가 원로들과 합심해 성명서를 발표하고 장기집권 반대투쟁에 나서는 등의 업적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김성수가 타계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말년에 그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례를 국민장(葬)으로 치러주었다.
- 1991년 경기 과천 서울대공원 한마당광장에 그의 동상이 제막됐으나,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그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적극 철거운동을 벌임으로써 2019년에 안내판을 세웠다. 고려대 김성수 동상과 전북 고창의 생가 및 동상, 서울 계동의 인촌 숙소 터 등의 현충시설 등록이 취소되기도 했다. 또 서울 성북구 인촌로가 ' 고려대로'로 변경되기도 했으며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로도 도로명 개칭을 놓고 논란을 빚은 바 있다.
- 그의 뜻을 기리는 재단으로는 인촌기념회가 있다.
- 현 동아일보 및 채널A 대표이사 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재호의 증조부이다.[25] 김재호와 형제인 김재열 삼성글로벌리서치 사장의 증조부이기도 하며,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의 시증조부이기도 하다.
5. 평가
자세한 내용은 김성수(1891)/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동아일보/오너 일가 문서 참고하십시오.7.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1 | 제2대 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
78 (51.32%)[26] | 당선 (1위) | 초선[27][28][29][30] |
8.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
|
1938 - 1940 | 정계 입문 |
국민총력조선연맹
|
1940 - 1945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5 | 정당 해산 |
[[한국국민당| 한국국민당 ]]
|
1945 | 창당 |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
1945 - 1949 | 합당[31] |
|
1949 - 1955 |
합당[32] 사망 |
9. 관련 문서
- 동아일보
- 경방
- 고려중앙학원
- 고려대학교
- 중앙고등학교
- 중앙중학교
- 삼양사
- 고려대로
-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민주당계 정당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 송진우
- 대한민국 부통령
- 제2대 부통령 선거
- 이승만
- 장덕수
10. 창작물에서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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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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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f8184,#ddd> 일생 | 일생 · 평가 | |
가족 | 남동생 김연수 · 아들 김상만 · 아들 김상기 · 아들 김상흠 · 아들 김남 | ||
역대 선거 | 제2대 부통령 선거 | ||
설립 기관 | 동아일보( 오너 일가) · 고려대학교 | ||
관련 단체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 국민총력조선연맹 · 한국국민당 ·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1]
인촌안길 32-1.
[2]
정운천 의원은 여기에 태어나기도 했다.
[3]
심근염, 위장병, 뇌일혈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
[4]
원래 묘소는 그가 세운
고려대학교 경내에 있었으나, 묘가 있던 자리에 인촌기념관을 세우고 묘소는
1987년
남양주시로 이장하였다.
[5]
35세손 ○수(洙) 항렬.
[6]
전라남도
창평군에 만들어진 호남 최초의 신학문 학교로, 장인인 고정주가 운영하였다.
[7]
現 세이소쿠가쿠엔고등학교
[8]
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5학년 때 전학
[9]
당시 사진가는
황실의 사진가로
황제와
대통령,
부통령,
총리만을 촬영했다.
[10]
당시 법인명은 재단법인 중앙학원, 직함명은 주무이사였으나 후임인 이활 주무이사 때 주무이사의 명칭이 이사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현재는 김성수를 초대 이사장으로 소급 적용한다.
[11]
지금의 건국훈장 대통령장.
[12]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18년 2월 서훈 취소.
[13]
연도 표기는
고려대학교/서울캠퍼스의 건립문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한자는 국문화 및 생략
[14]
특히
중일전쟁 시기부터. 아무리 좋게 넘어간다 해도
태평양 전쟁 말기 1943년 말 이후.
[15]
다만, 김성수의 일부 행적을 친일 행위로 판단한 정부의 잘못은 부당하다고 판결하였다.
[16]
관련 자료(
모바일버전,
PC버전), 증언 동영상(
모바일버전,
PC버전), 관련 논문(
#1,
#2,
#3,
#4), 관련 서적(
#1,
#2,
#3,
#4,
#5)
[17]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보다
대한민국 정부 대통령 직속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에서의 내용이 훨씬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민간
연구 단체에서 발간한 것보다 정부에서 발간한 보고서가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는 얘기다.
[18]
고려대학교 총장, 초대 법제처장 등을 역임한 헌법학자
유진오의 <양호기>를 기초로 나온 내용.
[19]
일본은 창씨개명이 자발적인 것이라고 선전하기 위해 친체제 인사들 중 일부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더라도 별 말 하지 않았다.
[20]
실제로 이를 근거로 들만한 것이 김승학의 보고서인데 김승학의 보고서에 '친일 기준'에 따르면 '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변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다닌 자'로 김성수는
유억겸과 같은 분류로 기술되어 있다. 유억겸은 1920~1930년대까지만해도 나름 '합법적 공간'에서
신간회라든가
변호사 활동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유억겸 역시 1938년 중일전쟁 발발 시점 무렵에 터진
흥업구락부 사건을 전후로
변절한 친일파다.
[21]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은데
무어인의 지배를 받던
이베리아반도의
가톨릭 신자들이 표면상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모습을 보였던게 대표적이다.
[22]
백산
안희제 선생이나 경주 최부자
최준 선생 같은 경우는 뭐냐는 반론이 있는데 이들은 김성수가 그런 식으로 불복종 운동을 했었다면 그의 식솔들 수천 명의 생계는 사실상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라 본다.
[23]
2005년
5월 31일 대통령 소속으로 출범한 기구이다. 4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2009년
11월 30일 해산하였다.
[24]
당시 경향신문 기사
[25]
장증손이다. 김성수의 장남 김상만의 장손.
[26]
결선 투표에서의 결과
[27]
전임자
이시영 1951.5.9 부통령직 사퇴
[28]
2대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
[29]
1차 투표 65표 43.05%로 1위
[30]
2차 투표 68표 45.03%로 1위
[31]
조선민족당과 신설 합당
[32]
대한국민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