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국내에서 이른바 '인디 음악'은 보통 1990년대 이후 홍대 앞을 중심지로 하는 록 관련 음악들을[1] 지칭하는 용도로 많이 쓰이고 있다.[2] 한국 인디 음악의 시작은 서구와 비슷하게 90년대 얼터너티브 록, 펑크를 구사하던 뮤지션들이 주도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70~1980년대 신촌을 중심으로 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도 있지만, 본격적인 '유통 방식'으로서 인디 음악은 전술했듯 1990년대 중후반 홍대 뮤지션들을 시초로 본다.2. 역사
2.1. 태동과 형성 과정
시초에 여러 설이 많은 해외와는 다르게 국내는 인디의 태동 과정이 명확한 편이다.본래 독재 치하의 역사가 유구하던 대한민국으로선 자유로운 분위기의 인디 음악을 통한 표현의 자유를 허가할리가 만무했고 공윤을 통한 '사전심의제도'가 인디의 태동을 한동안 유린하던 과거가 있었다. 통신 매체상 한계가 많던 당시로선 TV나 라디오 같은 대중 매체를 거치지 않고선 대중적으로 전파되는데 한계가 심했고 실제 신중현의 대마초 파동 등 부당한 억압을 받던 사례도 수두룩했다. 허가를 받지 않는 음악은 미풍양속 침해을 이유로 전파는 물론 자체 판매로서도 단속에 걸리기 일쑤였으며 이는 인디의 성격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요소들이었다.
그나마 80년대까지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의 대학가요제와 언더 그라운드를 위주로 뮤지션을 발굴하던 동아기획 등 레이블들이 인디의 전신격으로 취급되는 의견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은 TV같은 대중 매체와 국가 차원의 검문을 통과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회사 차원의 거대 자본 투자로서 데뷔를 성사시키는, 인디의 정의에 부합하진 못해 전신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1995년 족쇄였던 사전심의제도가 위헌 판결을 받으며 철폐되어 인디가 자라날 토양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구시대적 관례와 지속적으로 투쟁을 벌이던 정태춘과 사전심의의 부당함을 대중에게 공론화시킨 서태지의 활약으로 비로소 표현의 자유를 옥죄던 악법이 철폐되었고, 일련의 과정들은 사전심의 철폐의 효시로 평가받는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 문서에 자세히 서술되어있다.
인디의 인큐베이터나 다름없는 최초의 인디 라이브 클럽은 드럭으로서 1994년 홍대 극동방송 근처에서 최초로 개점되었다. 본래부터 미술과 디자인 면에서 첨병을 자처하던 홍익대학교 근처였기에 음악 또한 배제될 순 없는 노릇이었던 터라 홍대 거리가 인디 음악의 성지로 우뚝 선 계기가 이 때문.[3] 본래는 펑쓰들의 음악 감상실같은 아지트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상호였지만, 1995년 커트코베인 서거 1주기 추모 공연을 계기로 인디 공연이 상설화되기 시작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때부터 드럭은 본격적인 라이브 클럽으로 전환되었고 탄력을 받아 클럽 빵의 라이브 클럽 전환, 블루데블, 프리버드, 신촌 롤링스톤스, 푸른 굴 양식장, 피드백, 플레이하우스, 슬러거, 재머스 등 무수한 공연장이 피어나는 수순으로 이어지게 된다. 각 클럽마다도 추구하는 장르와 방향성도 각양각색이라 이들로 하여금 인디의 다양성은 보다 풍성해진다.
국내 최초의 인디 음반은 1996년에 발매된 크라잉 넛과 옐로우키친의 스플릿 앨범 <Our Nation 1>을 그 시초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날짜상으론 배드 테이스트의 <Bad Taste> 앨범이 1996년 1월 발매로 더 빠르긴 하다. 다만 <Our Nation Vol.1>이 상업성이나 저명도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높다보니 이쪽을 홍대 인디 음악 활성화의 시초로 보는 것. 참고로 이때 앨범은 홍대 라이브 클럽의 시초격인 드럭의 사장이 크라잉 넛의 가능성을 보고 본인 전세 자금 빼서 만들어줬다고 한다. 1500만원의 예산으로 CD 5천장, 카세트 테이프 15000개를 손수 제작해 판매했는데 이게 대박이 나서 당시 드럭 앞에 대기줄이 쭉 늘어섰다고 한다. 이때부터 홍대 라이브 클럽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것.
2.2. 1세대 : 조선 펑크와 모던 록
그렇게 1990년대 말부터 태동한 한국 인디 1세대 음악은 크라잉 넛과 노브레인으로 대표되는 조선 펑크와 델리스파이스나 언니네 이발관으로 대표되는 모던 록 2가지로 큰 줄기를 형성하여 진행되었다. 조선 펑크는 드럭과 슬러거를 중심으로, 모던 록은 블루 데블과 클럽 빵 등을 중심으로 구축하던 편으로서[4]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으로 획일화된 대중 가요계와 기성 헤비 메탈과는 차별화된 록 사운드로 X세대 당시 학생들을 매료시키긴 충분했다.그 외 노이즈가든, 레이니 썬, 어어부밴드, 네미시스, 이브[5]처럼 위의 두 분류에 넣기 어려운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한 밴드들도 여럿 있었다. 이 시점의 뮤지션 및 인디 밴드들을 '인디 1세대'라 불렀으며 이후 크라잉 넛, 노브레인,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자우림, 체리필터, 롤러코스터,[6] 주주클럽 등이 메이저 시장에서도 인지도와 호응을 얻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DIY 활동에 입각하여 다양한 양지화를 꾀하며 다양한 게릴라 공연과 음악 방송 진출로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된다. 자우림의 데뷔곡 Hey Hey Hey는 1997년 대중영화 '꽃을 든 남자' ost로 채택되어[7] 대중가요간의 연결고리를 창출해냈고 이듬해 음악 방송 1위는 노브레인의 '바다 사나이'라는 곡으로 인디 최초의 1등을 거머쥐기도 한다. 이들의 고취된 성공으로 후속 계보들도 탄력을 받아 조류는 더더욱 견고해지게 된다.
라이브 역시 지하 클럽에서 차차 벗어나며 대규모 길거리 공연으로 첫 선을 보인건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이었다. 이는 록 페스티벌의 포문을 열었던 인디의 총망라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고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전신인 트라이포트도 동시기 시도를 거치면서 페스티벌은 점차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다.
넬, 못, 피아, 피터팬 컴플렉스와 같이 라디오헤드의 영향을 받은 얼터너티브 밴드들의 도래도 이 때. 이는 같은 시기 영국에서 콜드플레이, 뮤즈가 등장한 것과 유사한 패턴이다. 조선 펑크 역시 레이지 본, 럭스, 껌엑스 등 후발 주자들도 여럿 등장하였고 이들도 활약상을 새천년까지 연장시키기도 했다.
이에 당시 정치권도 법 개정을 해주며 홍대 인디 음악 붐에 호응했다. 1970년대 제정된 식품 위생법 때문에 당시만 해도 유흥업소가 아닌 라이브 클럽에선 2인 이상 공연이 불가했는데(때문에 초기엔 걸리면 벌금 물고 공연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홍대 인디 밴드들을 중심으로 법 개정 운동이 일어나 1999년 라이브 클럽 공연이 합법화된다. 참고로 이때만 해도 홍대 인디 뮤지션들은 돈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고, 받아도 소액이거나 식당 술 무료 등 다른 서비스를 제공받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다만 연습실 대용이라 그 돈 굳는 것 + 홍보 효과 + 청중들한테 노래할 수 있다는 만족감 때문에 다른 일로 돈 벌면서 앨범 준비하는 등 계속 했다고 한다. 걔중엔 크라잉넛처럼 진짜 사장이 자기 돈 투자해서 앨범 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애초에 사장님들도 임대 받아서 가게 하는 처지가 많았던걸 감안하면 많진 않았을듯. 이후 이런 홍대 인디 뮤지션들의 성장 루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성공했을 시 평일 클럽 공연->주말 클럽 공연->각종 음악 페스티벌 오프닝-5시-7시-9시 헤드라이너 순으로 점점 발전했다고 한다.
이들이 보여준 네오 펑크와 얼터너티브 록, 쟁글 팝 등은 이미 서방권에서 80년대부터 가요계 중심을 꿰뚫고 있었고 바다 건너 일본 역시 서방과 큰 갭없이 문물을 빠르게 합류시키던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은 90년대말 심의제도 폐지에 들어서야 이 문물을 뒤늦게 들여 가능성을 보인 정도였으니, 구시대적 규제와 관념이 한국 가요의 진척을 그간 얼마나 틀어막았고 세계 흐름에서 갈라파고스화를 초래했는지 시사하는 부분이다. 특히 펑크 록 계열은 70년대 서방권에서 태동되었음에도 산울림 외엔 전멸하다시피 90년대 초반까지도 개념조차 수입되지 못했고, 빌보드에 들어 라디오에서 간헐적으로 소개되던 헤비 메탈 정도가 공윤을 거슬리게 만들지 않는 소재거리로 '록밴드'로서 수입되던게 전부였다. 때문에 '록 밴드 = 헤비 메탈'이란 고정관념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실정이고, 일련의 장르 계보의 생성 과정을 모조리 생략한채 물밀듯 들여오는 쟁글 팝과 얼터너티브 등 메탈과 차별화되는 장르들이 '모던 록'이라 싸잡아 통칭되는 배경이 된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이 되면서 기존 인디 1세대 밴드들이 점차 인기를 잃기 시작했고 후발 주자로서 대중의 인기를 끌만한 신인들도 좀처럼 등장하질 않게 된다. 음반 시장 자체가 음원 시장으로 교체되면서 죽어가던 시기라 여러모로 힘든 시기였고, 한국 인디 밴드의 원류가 되는 영미권 록 음악 시장에선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붐이 일었지만 90년대 얼터너티브 록 붐에 비하면 규모가 작아[8] 서서히 록 음악이 주류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것도 한 원인이였다. 이들이 융성시켜놓은 홍대 거리마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치솟는 땅값과 임대료로 하여금 수입이 풍성치 않던 클럽들이 점차 설곳을 잃어가며[9] 인디의 토양조차 사라져가는 뉴스도 인디에겐 큰 악재였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2005년 발생한 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은 당시 인디 음악을 향한 대중의 시선을 부정적으로 바꿔버린 치명타가 되고 만다.[10] 직접적으로 연관된 조선 펑크씬은 이때 대거 몰락해 계보로선 명맥이 끊길 지경이었으며,[11] 2000년대에 등장하던 다른 장르의 인디 밴드들 역시 공중파에 자신들을 홍보하고 인기를 얻을 기회를 대거 박탈 당한다.
그렇게 2005~2007년경은 본격적인 터널기로 돌입하며 소몰이 창법과 후크송으로 바뀌어가는 대중 음악의 독주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실제 이 시기동안 회자되는 작품과 평단의 픽업 면에서도 인디 음악은 수량이 압도적으로 적은 편. 그래도 몽구스, 할로우 잰, 타바코 쥬스, 밤섬해적단, 킹스턴 루디스카 등 변주를 틀던 작품들 정도가 이 시기 호응을 얻었고 고스트스테이션을 대표적으로 신해철의 비호 속에 유지되는 각계의 노력을 보인 끝에 이 시기 갈고닦은 밴드 일련은 아래 2세대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된다.
2.3. 2세대 : 화양연화의 2008년
이후 숨죽여오던 인디의 혜성은 삼사년의 세월을 묵힌 뒤 쏟아져 나오게 된다. 대표적으로 모던 록을 건립하던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역작으로 화려한 귀환을 알렸고, 신윤철이란 스페셜리스트를 주축으로 결성된 서울전자음악단의 활약, 그리고 각종 클럽 활동으로 내공을 쌓아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장기하와 얼굴들, 검정치마, 국카스텐, 브로콜리 너마저, 갤럭시 익스프레스, 술탄 오브 더 디스코, 쏜애플, 옥상달빛, 로로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12], 9와 숫자들 등의 등장도 이 2000년대 후반이었고 대다수는 2008년 약속했다는듯 한번에 등장하곤 했다. 이런 인디의 부활로 2세대의 세대 교체를 고하게 된다.한편, 2004년을 기점으로 기존 이대 거리에서 홍대 거리로 이전한 클럽 빵은 모던 록과 포크의 산실로서 활약을 보여주기도 한다. 위 문단 모던 록 계열 대다수가 빵에서 성장한 뮤지션들이었고[13] 이외 이장혁, 조정치, 김목인, 윤영배, 김사월 등 포크계 거물들도 이곳에서 대거 성장하곤 했다.
그리고 2004년 클럽 거리에서 FF라는 이름의 라이브 클럽 또한 새로운 인디의 주축으로 자리잡기도 한다. 홍대 클럽거리 주재답게 클럽으로서 세일즈 모델도 겸하여 라이브 클럽이 유지하는 방법을 제시하던 바 있었다. 이곳 출신으로서도 갤럭시 익스프레스, 로맨틱 펀치, 잔나비, 실리카겔 등 인디씬의 거물 또한 주축으로 활동하던 바 있었다.
이 외에도 포스트 록과 슈게이징 계열도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여 로로스, 비둘기 우유, 꿈에 카메라를 가져올걸, 불싸조 등의 도래도 이 시기였다. 세계 흐름에 맞게도 일레트로닉 뮤직도 개화하기 시작하여 이디오테잎, KIRARA의 황약도 이 시기.
물론 이때도 인디 음악 시장의 양적인 규모는 1세대 시절에 비해 많이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해외 록 음악이 몰락하기 시작한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 모순되게도 국내에선 다양한 인디 음악이 대중과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슈퍼스타K가 국내 가창 오디션 붐을 일으키면서, 번외격으로 TOP밴드 시리즈와 밴드의 시대 등 밴드 관련 경연 방송도 제법 나왔고, 온스테이지처럼 인디 음악을 중심으로 한 미디어도 생겼으며, 국카스텐의 나는 가수다 2 출연 10CM, 장미여관, 장기하와 얼굴들 등 여러 인디 밴드들이 지상파 방송에 출연하며 인디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록 페스티벌의 전성시대로 밸리 록 페스티벌,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성황리도 이끌어내었다.
여기에 한국대중음악상을 비롯한 평단에서도 호평을 받는 인디 음악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러한 흐름에 외국에서도 'K-ROCK', 'K-INDIE' 란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다양한 밴드가 미국 음악 페스티벌인 <SXSW>에 참가하면서 한국 인디 음악은 제2의 도약기를 맞았다고 평가받았다.
2010년대 중반 모던 록의 주인공이라면 단연 혁오를 들 수 있었고, 그들이 보여준 색다른 비주얼과 진일보한 이펙터 활용법은 당시 밴드들에게 수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인디를 넘어 대중음악 차트도 점령하던 장본인으로서 인디계의 새로운 국면을 불어넣었다 평가받는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신인 부재, 기성 인디 음악가의 부진 혹은 잠적[14], 주무대였던 홍대 인근의 상업화 문제와 인디 음악을 향한 대중의 관심이 감소하면서 다시 부진에 빠지게 된다. 이 외에도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대마초 사건, 인디계 성추문 미투 운동 등이 일어나며 다시금 인디 음악의 이미지가 악화되어 한국 힙합에게 밥그릇을 고스란히 내어주게 된다,
하지만 위기론 속에서도 볼빨간 사춘기와 신현희와김루트, 문문, 멜로망스는 2010년대 후반 차트인을 성사시키는 건재함을 과시하였고 검정치마 또한 여전히 역작을 생성하면서 모던 록의 귀감으로서 지위를 이어나가곤 했다. 특히 잔나비는 모던 록의 상업적 포텐셜을 십분 터뜨리며 대중 차트는 물론 방송 출현까지 2010년 후반의 인디 아이콘으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2020년을 강타한 코로나19 판데믹은 수많은 공연장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며 대거 폐업한 뉴스는 수차례 기사화될 정도였다. 이러는 중에도 이날치는 화려한 영상미와 퓨전 국악 사운드로 컬트 최고봉 급으로 인기를 이끌었으며, 이 코로나 시기를 색다르게 활용여 살아남은 당사자들은 아래 3세대의 주역으로 자리잡기도 한다.
2.4. 3세대 : 코로나를 딛고 재도약
2020년대 초, 실리카겔, LUCY, wave to earth, 새소년, 터치드, 유다빈밴드, SURL, 나상현씨밴드 등의 음악가들이 출연하며 3세대 인디 음악계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특히 이 시점부터 포스트락 마이너 갤러리, 힙합엘이 등 여러 인터넷 음악 커뮤니티 출신 인디 음악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포스트락 마이너 갤러리 등지에서는 슈게이징, IDM, 포스트락 등 기존의 주류 음악 계층과는 달리 보다 다양한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이 활동하면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파란노을의 2집이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자 갤러리 내부에서는 파란노을에게 영향을 받아 창작 활동을 더욱 활발히 이어나가고 있으며 몇몇은 자신의 앨범을 무료배포하거나 자체적으로 모여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드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해당 갤러리에서 활동하던 파란노을, 아시안 글로우와 같은 음악가들이 입소문을 타고 해외의 힙스터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알려지기 시작하며 피치포크 등지에서 고평가를 받는 등, 기존의 한국 음악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1]
장르적으로는
록 음악 중에서도
모던 록이 가장 주류고, 그 외
포크 록이나
사이키델릭 록, 홍대 인디 초창기를 수놓은
조선 펑크 등이 있다.
[2]
물론
힙합과 같은 다른 장르의 인디 신 역시 엄연히 존재하나 한국에서는 첫 시작이 이 장르였다보니 보통 '인디'하면 록 음악부터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3]
펑크 패션의 일환으로 치장하던
모히칸 등 요란한 스타일은 90년대 한국 정서로선 길거리 활보가 납득받을 순 없었지만, 홍대 거리만큼은 그저 예술하는 사람이겠거니 용인하는 분위기였다는 펑쓰들의 회고록도 존재한다.
[4]
그렇다고 두 업계간의 장벽이 커다랐던건 아니었다. 모던 록의 첨병이라는 언니네 이발관과
잠 데뷔 무대는 드럭이었고,
삐삐 밴드의 주 무대는 블루 데블,
타바코 쥬스의 클럽 빵 활동 등 예외 사례도 얼마든 많았다.
[5]
이브와 네미시스는 일본 영향을 받은
글램 록과
비주얼계 시초로 불리기도 한다.
[6]
이 밴드는
홈레코딩 개척가로서도 큰 족적을 남긴 바 있다.
[7]
당시 평일 공연을 전전하던 자우림이 유앤미블루 일정 취소를 계기로 빈 일정인 주말 무대로 콜업되었고, 때마침 해당 무대를 직관하러 온 방송국 관계자의 눈에 띄어 캐스팅 받아 성사시킨 데뷔였다고 한다. 이미 상업적 가능성을 캐치해내던 방송국의 시선을 시사하는 일화.
[8]
영향이 전혀 없는건 아니었고
검정치마 같은 개러지,
포스트 펑크 색채를 띄는 밴드도 등장했다.
[9]
블루 데블, 푸른 굴 양식장, 스컹크, 슬러거 등의 라이브 클럽이 그렇게 폐업하였다.(스컹크는 훗날 문래와 신당 등지로 이전)
[10]
이 당시 따가운 눈빛은 조선 펑크 장본인 크라잉넛도 수차례 증언했을 정도. 추가로 이 당시
서울특별시장이던
이명박이 '불도저'라는 별명따라 뉴스를 접하고 홍대 거리를 퇴폐거리로 낙인찍어 밀어버릴 것이란 피바람도 예고되었지만,
유인촌의 설득으로 겨우 무산되었다는 뉴스도 보도되기도 했을 정도로 살벌했다.
# 후일 이명박이 오!부라더스 공연을 몸소 관람하여 화해한 것으로 소동은 일단락.
[11]
물론 후대
타바코 쥬스,
초록불꽃소년단,
극동아시아타이거즈 등 계보가 없는건 아니지만, 주류로서 취급될 정도는 아니었다.
[12]
달빛요정은 엄연히는 2003년 데뷔였지만 그가 선보였던 세일즈 모범은 2000년대 후반들어 완성되어 수많은 인디의 귀감으로 자리잡게 된다.
[13]
장르에 큰 제약은 없는 터라
게이트 플라워즈도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력도 있었다.
[14]
대표적인 1세대 인디 록 밴드인
언니네 이발관은 2010년대 중반 해체되었고 리더
이석원은 음악을 그만두었으며,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사망, 2세대 록 밴드의 얼굴마담 격인
장기하와 얼굴들 역시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