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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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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1946년생 전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이석원(194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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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MAlogoblack1.jpg
올해의 음반
이적
<나무로 만든 노래>
(2008년)
언니네 이발관
<가장 보통의 존재>
(2009년)
서울전자음악단
<Life is Strange>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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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언니네 로고.png
이석원 이능룡 전대정
이석원
파일:빛석원.jpg
<colbgcolor=#333366><colcolor=#fff> 이름 이석원
생년월일 1971년 8월 31일 ([age(1971-08-31)]세)
신체 173cm
포지션 보컬, 기타리스트
활동 년도 음악인 1994년 ~ 2017년
문학인 2009년 ~
종교 무종교[1]
링크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별명 야간분만

1. 소개
1.1. 음악 활동
1.1.1. 데뷔 이전1.1.2. 언니네 이발관 활동1.1.3. 은퇴1.1.4. 이석원의 음악
1.1.4.1. 완벽주의자적 면모
1.1.5. 다른 뮤지션들과의 관계
1.1.5.1. 신해철과의 관계
1.1.6. 복귀 가능성
1.2. 문학 활동
2. 여담3. 작품 목록
3.1. 음반
3.1.1. 언니네 이발관3.1.2. 개인 발표
3.2. 저서

[clearfix]

1. 소개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전 리더이자, 문학인이다. 음악계와 문학계에서 모두 베스트셀러를 남긴 능력자.

1.1. 음악 활동

이석원의 개인적인 활동과 언니네 이발관 밴드 활동을 동시에 서술하며, 밴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언니네 이발관 문서를 참조.

1.1.1. 데뷔 이전

그의 데뷔 이전의 삶은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이석원은 1971년 8월 31일 서울시 성북동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책에 아버지가 하급 공무원이었던 덕에 어린 시절에 간접적으로 로얄 라이프를 즐겼다는 묘사가 있다. 하지만 집이 부자였던 건 아니라고.[2] 이후 스무살이 넘어 백수로 살던 그에게 어머니가 레코드 가게를 차려주면서, 그는 레코드 가게 사장이 된다. 그의 학력이나 군필 여부 역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며, 팬들은 보통 고졸에 병역 면제자로 생각하고 있다.[3]

그런 이석원의 인생이 레코드 가게에서 윤병주를 만나면서 달라진다. 이석원은 당시 PC 통신에서 각종 뮤지션들에게 악플(...)을 달며 유명해졌는데[4], 그는 후에 언니네 이발관의 1집 멤버가 되는 류기덕과 함께 활동하던 메탈 음악 동호회에서 모던 록 소모임(일명 모소모)이라는 소모임을 함께 만들었다. 당시 '모소모'에는 후 스웨터의 보컬이 되는 이아립, 델리스파이스의 윤준호와 김민규, 윤병주 등이 속해있었는데 이석원은 여기서 꿀리지 않기 위해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의 리더라고 구라를 쳤다. 실제 뮤지션들도 있는 곳에서 이런 구라가 먹혀든 이유는 진짜 뮤지션들과의 친분도 있으며 레코드 가게를 하고 있었기에 음악을 들은 경험은 풍부하였기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 #

처음에는 단순한 구라였지만 그는 친구 윤병주가 속한 노이즈가든이 제1회 톰보이 록 콘테스트에서 <Rain Of Compromise (타협의 비)>으로 우승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지하게 음악인이 될 것을 결심했고, 라디오 프로그램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나가서도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라고 소개하는 등 구라도 꾸준히 치면서 자신이 정말로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일단 지르고 만든다. 사실 PC통신의 키배 시절과 레코드 가게를 했다는 이력을 봐도 알겠지만, 악기 연주만 못할 뿐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자주 접했었고, 그러다 보니 음악에 대한 눈은 꽤나 높은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석원은 윤병주의 권유로 진짜 음악을 시작했고[5], 이내 급조한 멤버들과 함께 윤병주, 그리고 같은 노이즈가든의 멤버였던 이상문에게 기타를 배워 1995년 2월 15일 저녁 홍대의 클럽 < 드럭>에서 첫 무대를 가졌다.

1.1.2. 언니네 이발관 활동

1996년에 영국까지 날아가서 녹음한 정규 1집 < 비둘기는 하늘의 쥐>를 발매해 성공을 거뒀지만, 1998년 작 정규 2집 < 후일담>이 평단에서나 상업적으로나 큰 실패를 거두며 밴드는 잠시 휴식기에 들어간다. 이석원은 비슷한 시기에 잡지사의 사장이 되지만 창간호를 내자마자 IMF가 터져 이것마저 망해버려 취업을 택하고, 음악 활동을 반 쯤 접게 된다.

이후 이석원은 키우던 강아지의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언니네 이발관으로 돌아온다. 마침 음악계와 대중들 사이에서 <후일담>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었고, 언니네 이발관은 엄청난 기대 속에 정규 3집 < 꿈의 팝송>을 내놓고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석원은 아내와 이혼을 하였고, 그의 음악적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이상문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는다. 이에 이석원은 2004년 이혼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인 <꿈의 팝송> [6]과 이상문에게 바치는 노래 <천국의 나날들>을 실은 정규 4집 < 순간을 믿어요>를 발매한다.

이석원은 4집 발매 후 인사동에 카페 <살롱 드 언니네 이발관> [7]을 개업하고 또 사장님이 되지만, 사업에 집중하면서 언니네 이발관이 불화를 맞는 큰 위기가 일어난다. 이로 인해 정규 5집 준비는 중지되고, 언니네 이발관과 이석원은 또 다시 한 번 휴식기에 들어간다.

어느 날, 이석원에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섬뜩한 자각'의 모티브가 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아마 이석원의 희귀 역류성 되새김질 장애 발병이 원인으로 추측) 언니네 이발관은 다시 한 번 뭉쳐 정규 5집 < 가장 보통의 존재> 작업에 돌입한다. 이 음반은 크게 성공했으며, 이후 이석원은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도 시작한다. 다만, 첫 책을 출간하기 이전에 부유했던 부모님의 재정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가족이 좁은 방으로 이사를 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원래 정규 6집은 빠른 시일내에 가볍게 만들 예정이었으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계획을 뒤집고 9년만인 2017년 6월 1일에 마지막 정규 앨범 < 홀로 있는 사람들>을 내놓는다. 그 전에 선공개 격으로 2015년에 싱글 <혼자 추는 춤>을 발매했다.

1.1.3. 은퇴

소식이 늦었습니다.
어려운 말씀을 드려야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서야 예전에 써 둔 편지를 올립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미안해요.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일을 그만 두길 바래왔어요.
하지만 어딘가에 내 음악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털어놓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번 한번만
이번 한장만 하다가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네요.
그간 실천하지 못한 계획들도 있고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서 인사드리고 떠나면 좋겠지만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음악이 일이 되어버린 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항상 벗어나고 싶어했기에
음악을 할때면
늘 나 자신과 팬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습니다.

더이상은 그런 기분으로 무대에 서고 싶지 않음을..
이렇게밖에 맺음을 할 수 없는
제 사정을..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

이제 저는 음악을 그만 두고
더이상 뮤지션으로 살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23년동안 음악을 했던 기억이
모두 다
즐겁고 행복했었다고는 말하지 못해도
여러분에 대한 고마운 기억만은
잊지 않고 간직하겠습니다.

훗날 언젠가
세월이 정말 오래 흘러서
내가 더이상 이 일이 고통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죄를 짓는 기분으로
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다시 찾아 뵐게요.

감사합니다.

23년동안 지지하고 응원해 주신것
잊지 못할 순간들을 만들어 주신것
모두 감사합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2017년 8월 6일 저녁 이석원 올림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정규 음반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부터 나오고 있었다. 이후에 취소되었으나, 6집 <서울의 달>과 7집 <너의 몸을 흔들어 너의 마음을 움직여>는 발매 날짜까지 잡혀있었다. 이석원은 일기를 통해 정규 7집이 마지막 '정규 음반'이 될 거라고 알렸지만, 공연 등 음악활동의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있었다.

하지만 음악 활동에 지친 이석원은 6집 <홀로 있는 사람들>을 마지막 음반으로 변경했고, 2017년 8월 7일 공식 홈페이지의 일기를 통해 은퇴를 선언하면서 25년간의 뮤지션 인생을 마감했다.[8]
당시 이석원은 앨범 발매 전 '참 고맙다 나 이십년 동안 먹여 살려준 사람들 아니 때만 되면 어디서들 숨어 있다가 그렇게들 나타나서 시디를 사주는 거야?'라는 일기를 남기고 두 달이 넘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팬들은 말없이 사라져버린 줄로 알고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의 마지막 일기가 올라온 후 이석원의 명문에 눈물을 훔쳤다.

1.1.4. 이석원의 음악

난 아무것도 아냐, 원래. 그래서 뭐, 난 행복해.
근데 미치겠어 너흰 왜 그런 썩은 눈으로 사람을 쳐다보는 거니?
― 「 혼자 추는 춤
'언니네이발관의 멜로디는 절대 돌려 말하지 않을 거여요. 첫곡 첫음부터 확실히 찔러드릴 거여요. 당신의 머리에 사이다를 부어드리고 가슴엔 예리한 칼날을 꼽아드릴께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알았죠? 우린 절대 돌려 말하지 않아요.
― 2002년 9월 17일 일기
그의 음악적 특징은 시적이지만 우울하고 비관적인 가사와 어쩌면 그에 상반된다고 볼 수 있는 대중적이고 댄서블한 멜로디다.(단 5집부터는 댄서블한 멜로디뿐만 아니라 진짜로 슬픈 멜로디도 주로 넣는다.) 때문에 혹자는 그의 음악을 댄스 음악이 취향인 정신병자의 음악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보컬리스트로서의 이석원은 크게 가창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적절한 감정선을 유지하는 능력과 자신의 곡을 소화하는 능력은 탁월하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이석원의 음악은 천재적인 감각과 완벽주의자 특유의 집착이 겹친 결과물로, 수많은 명곡들이 이 덕분에 탄생했다.
1.1.4.1. 완벽주의자적 면모
작업에 있어서는 광적인 완벽주의자다.[9][10] 2집까지는 든든한 후원이 있어 자유롭게 제작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3 4집은 만드는 동안 소속사와 계속 갈등을 겪었으며, 5집은 마음에 드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수 차례 지연된 후에 발매될 수 있었다.[11] 심지어 그 5집조차도 내고 나서 다시 만지고 싶은 곳이 수없이 많다고 얘기하는 인간이다. 6집은 9년만에 나왔고, 수많은 재녹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9년 내내 작업에 매달린 것은 아니다. 5집에서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은 커다란 스트레스로 이어져 이석원의 건강을 크게 해치고 말았다. 부작용으로 이석원이 달고 살면서 스트레스 해소제로 삼던 빵과 같은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게 되어, 빵을 먹고 지금 죽어버릴까 하고 오밤중에 빵집 근처를 서성거리던 나날이 많을 정도로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5집의 피로와 후유증을 덜고 6집 작업에 착수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앨범 작업은 건강 생각을 하면서 타협해서 했다.

1.1.5. 다른 뮤지션들과의 관계

1.1.5.1. 신해철과의 관계
한때 이석원과 신해철은 원수 관계였다. 진짜 현피를 떴는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 이석원은 당시 90년대 초반 한국이 메탈 강세였던 것에 반발감을 가졌다라고 밝혔지만, 다른 인터뷰에서는 백화점식 앨범 구성과 아티스트 의식 부족 때문이라고 비판했다.[12] 오직 메탈만이 이유였던 건 아니다. 메탈을 싫어하진 않지만, 메탈만 추종하는 당시 한국 음악 배경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13]

정확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PC통신 활동시절(이 시절에 활동하던 사람 중에 김진표 이적, 이한철같이 나중에 음악가가 된 사람도 많고, 당시에도 이름 날리던 정석원, 신해철같은 아티스트도 있었다)에 여러 밴드의 비평글을 썼는데, 넥스트의 음악을 해외음악에 비해 구성이 구리다는 이유로 따라잡기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석원은 앨범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유기적인 구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넥스트 앨범은 백화점식 구성이라며 비판했고 신해철이 이 글에 반박글을 썼다. 그 이후로 '서로 만나서 풀었다' 등의 말을 했는데 여기에서 현피 떴다는 말이 나온 듯.[14] 메탈리카 이야기는 신해철이 아니라 다른 회원들과의 열띤 논쟁을 끌어냈다. 재미있게도 신해철은 이러한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어딜가나 언니네 이발관과 이석원을 칭찬하고 다녔다. 사이가 좋아진 이후로는 서로 이런저런 도움도 많이 줬다.

이 두 사람은 당시에도 "말빨"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달변가였다. 이후 잘 풀려서 언니네 이발관 꿈의 팝송을 발매할 때, 신해철이 진행하는 고스트네이션[15] 인디온스포트라이트에 언니네 이발관이 출연하기도 했고 위의 사건을 언급했다. 심지어 라디오에서 앨범 광고의 나레이션을 신해철이 맡았다. "언니네 이발관, 꿈의 팝송" ...이라고. 느끼하게.

이석원의 일기 2014년 10월 23일 @, 10월 24일 @, 10월 26일 @, 10월 29일 @의 일기를 보면 신해철이 심정지로 쓰러지고 난 후의 심정을 적어 놓았는데, 신해철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자주 연락을 못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언니네 이발관의 전 베이시스트 이상문을 떠나보낼 때만큼 안타까워하는 것이 느껴진다. 차후 팟캐스트 '진중권의 문화다방'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신해철과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신해철이 고인이 된지 몇 달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1.1.6. 복귀 가능성

블로그에 다시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글을 올린 적 있다.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라도 날까 두렵다고 삭제하였지만 @ 음악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이며 관심이 식지 않길 바란다고. 사실 언니네 이발관 해체 당시에도 덜 고통스러워지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겨, 복귀 가능성을 어느정도 열어두기도 했었다.

글의 내용대로라면 예전의 노래인 언니네 이발관 노래를 부르는 것에는 흥미가 없고, 얼마가 걸리던 새로운 노래를 자신이 만들고 부를 수 있는가에만 흥미가 있다고 한다.

1.2. 문학 활동

'살면서 말 한마디 해본 적 없이 그저 먼발치서 본 인상만 가지고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고 단정 지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말이다. 그렇게 성급히 내려진 결론들은 실제 그 사람과 접해보고 나면 늘 수정되기 일쑤였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찰나의 이미지만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짓는 우를 범할 때가 많다. 그리고 나야말로 그런 방식의 오랜 희생자였다.'
<보통의 존재> '두 얼굴의 사나이 중에서'
2009년 11월 4일에 산문집 보통의 존재를 발간하며 등단했다. 뮤지션이라는 배경과 첫 작품을 바로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올린 덕에 그는 문학계에서도 큰 기대를 받는 인물이 되었으며, 아직까지 대형서점의 스테디셀러 칸에 '보통의 존재'가 있을 정도로,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하게 읽히고 있다.

또한 2013년에는 소설인 '실내인간'을 발간하였다. 이 책의 평은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었지만, 이후 2015년에 낸 '언제 들어도 좋은 말', 그리고 2018년에 발간한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은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를만큼, 작가로서의 이석원 역시 인기가 대단하다. 작가로서의 이석원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석원의 출간기념 사인회인데, 사인회에 가보면 이석원이 대중적으로 그리 유명하지 않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긴 줄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게다가 이석원이 독자 한 명 한 명 정성스럽게 캘리그라피까지 해주기 때문에 사인회 시간이 3시간 이상이 될 정도로 상당히 길다. 특히 2018년 11월 18일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린 사인회에서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는데, 이석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싶었으나 서점 마감시간으로 인해 절반이상의 사람들이 사인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석원의 문체의 특징이라면 담담함과 솔직함을 드러낼 수 있다. 딱히 화려한 미사여구나 비유적인 표현들은 잘 안보이지만, 그는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러한 이석원의 스토리텔링은 독자로 하여금 뜨끔뜨끔하게 하는 공감을 일으킨다. 실제로 래퍼 빈지노의 곡 Always Awake는 빈지노가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 를 읽고서 화려하지 않지만 솔직하고 담담한 어투에서도 상황이 잘 그려지는 가사를 쓰려고 마음먹고 썼다고 한다.

또한 이석원은 뮤지션으로서의 이석원과 작가 이석원을 분리하려 한다. 음악인 이석원을 배제시키고 오직 문학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 그래서 이석원의 책에는 '언니네 이발관'의 약력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으며, 블로그에서도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반평생을 음악인으로 살아온지라, 그의 삶을 쓴 책에는 음악인으로서의 이석원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2. 여담

3. 작품 목록

3.1. 음반

3.1.1. 언니네 이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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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개인 발표

3.2. 저서


[1] 보통의 존재에서 밝혔다. 집안은 불교라고 한다. [2] 다만 이적은 방송에 나와 이석원이 부잣집 도련님 출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본인 말과 상충되니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정황상 아예 못 사는 수준은 아니었던 모양. [3] 정신병동에 입원한 적이 있다는 글이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에 실려 있다. 사유는 경계선 성격장애. 20대 중반부터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시기적으로 대학 및 군대에 갈 시간은 없었을 것이며, 그 사유가 아마 정신병동 입원 이력인 것으로 본다. 그 외 언니네 이발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일기를 보면 종종 '군대에 갔다 오지 않았다'라고 언급한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다. [4] 펫 샵 보이즈의 팬이었던 이석원의 아이디는 mypsb였다. [5] 처음에는 음정도 몰라서 대충 지옥의 소리라고 할 정도로 젬병이었다고 하지만, 윤병주의 합숙 훈련으로 능숙하게 보컬과 작곡 능력을 배웠다고 한다. [6] 2집 <후일담>에 실린 노래를 리메이크하였다. [7] 2015년에 폐업 [8] 다만 완전한 은퇴는 아니고 때에 따라 복귀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본인이 말하길 언젠가 복귀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한다. [9] 사람이 까칠하고 예민한 편이다. 실제로 이석원은 본인의 책 <보통의 존재>에서 자신이 경계선 성격장애를 앓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특히 온도에 민감해서 여름이나 겨울 땐 에어컨(히터)를 5분마다 껐다 켰다 해서 처제에게 욕까지 얻어먹을 정도였다. [10] 오죽하면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이석원이 우연히 어머니가 남긴 일기를 보았는데 '오늘도 석원이의 기분을 맞춰주지 못했다'라고 자책하는 일기였다더라. 그 얘기를 합주 연습 후 멤버들에게 얘기했더니 이능룡이 "씨X 그 기분은 아무도 못 맞춰" 라고 일갈했다고(…). [11] 그의 광기를 보여주는 일기들 참고로 07년 12월이 5집 발매 예정이었다 링크1 링크2 링크3 링크4 링크5 [12]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에 이석원이 음악을 해보니까 이럴수도 있구나 라고 납득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시간이 지나니 신해철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13] 일례로 모 웹진과 인터뷰에서 5집 이후 메탈리카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메탈리카 팬들도 그렇다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5집 이전의 메탈리카는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14] 만나서 푼 에피소드도 압권인데 신해철은 당시에 이석원을 만나면 죽여버리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제대로 화가 났지만, 시간이 지나 이석원이 음악을 시작하고 앨범을 내자 홍보를 해야겠고.. 홍보를 제안한 매체가 신해철의 라디오(…)였다. 신해철은 이석원의 이런 화끈함이 맘에 들었는지 그간의 화는 다 잊고 술자리를 마련해 많은 이야길 나눴다고 한다. 이석원이 말하길 옛 이야기 갖고 뭐라 하는 일 없이 오로지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고. [15] MBC에서 진행했던 고스트스테이션의 후속 프로그램격이나 사실 이름만 조금 다르고 같은 방송 [16] 이런 개인적인 성격을 소설 <실내인간>의 유명 작가 김용휘에게 쓴 모양. 김용휘의 캐릭터성을 뜯어보면 작가 자신을 적잖이 투영하고 있다. [17] 본인의 일기에서 여러 번 썼는데 애정이 상당한 듯하다... 흥궈신 예능감에 빠진 사람이 한둘이겠냐만... 무가지에 손대던 시절 김흥국과 전화 인터뷰를 한 적도 있고 하얏트호텔에서 우연히 김흥국을 발견해 숨죽여 보았다는 글로 보아 거의 확정적이다. 음악이나 정치적 성향을 떠나 예능에서의 김흥국 스타일을 상당히 좋아하는 듯. [18] 현재 궤양성 대장염은 완치는 불가능하지만 약만 꾸준히 먹으면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게이머 박진성 역시 같은 병을 앓고 있으나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고. [19] 해피로봇 레코드가 MPMG의 자회사이다. [20] 이석원 명의로 발표된 곡이다. 키우던 강아지가 거북이처럼 오래 살길 바라는 마음에 지었다고 한다. [21] 2022년 6월부터 7월까지 총 세 차례에 걸쳐서 이석원이 진행한 강연의 내용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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