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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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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문명
सिंधु घाटी सभ्यता
Indus Civilization
파일:Indus_Valley_Civilization,_Mature_Phase_(2600-1900_BCE).png
인더스 문명의 영향권
기원전 3300년 ~ 기원전 1300년
위치 파키스탄, 인도( 인더스강 일대)
언어별 명칭
우르두어 وادیٔ سندھ کی تہذیب
힌디어 सिंधु घाटी सभ्यता
신디어 سنڌو تھذيبَ
영어 Indus valley civilization

1. 개요2. 연표3. 유적4. 사회5. 환경6. 이들은 누굴까?7. 아리아인8. 미디어에서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기원전 2500년~기원전 1500년 무렵에 지금의 파키스탄, 인도 펀자브 지방,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달한 인도 최초의 문명이다. 인더스 문자를 사용했다. 다만 역사기록이 부재하기 때문에 타 문명과 달리 존재감은 적다.

2. 연표

시간 시대 시대구분
기원전 7000 - 기원전 5500 선하라파 문화 초기 식량 생산 시대
기원전 5500 - 기원전 3300 선하라파/초기 하라파 문화 지역화 시대
기원전 3300 - 기원전 2600 초기 하라파 문화 지역화 시대
기원전 2600 - 기원전 1900 성숙기 하라파 문화 통합 시대
기원전 1900 - 기원전 1300 후기 하라파 문화 현지화 시대
기원전 1300 - 기원전 300 철기 시대 지역화 시대

3. 유적

인더스 문명의 도시 유적은 250여 개에 이르는데, 이 시기 어떤 문명보다 넓은 땅에 걸쳐 발달했다. 그중 유달리 크기가 큰 곳만 6개로, 이 도시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구라트, 이집트 문명 피라미드 같은 신전이나 왕의 무덤을 짓지는 않았지만, 이들 문명보다 훨씬 깨끗하고 잘 정돈된 도시를 구축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하라파, 모헨조다로, 돌라비라이다. 이 도시 유적들은 가로 1km 세로 1.2km의 웅장한 규모가 남아있다. 전성기에 이 도시 인구는 4만~ 8만명 가량이었으리라 추정한다.[1]

파일:9830EBEF-9C90-4465-8542-BA75669A0959.png

4. 사회

인더스 문명의 도시에는 전문적인 수공업 기술자인 장인들이 살았는데, 이들 가운데 청동제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 옷감을 만드는 직조공과 염색공, 토기를 만드는 도공, 장신구를 제작하는 보석공도 존재했다. 물건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장인들도 자연히 늘어갔고 시간이 갈수록 물건들의 질 또한 향상되었다.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외부로의 교역도 활발해졌다. 상인들은 배에 짐을 가득 싣고서 인더스 문명의 다른 도시들은 물론, 멀리 서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도 교역했다. 모헨조다로 가까이에는 큰 항구도 있었는데, , 여러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신구와 토기, 무명, 양모, 비단 등이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 활발한 무역을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유물은 인더스 인장이다. 3~4cm 내외의 정사각형 도장으로, 상거래의 과정에서 소유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발견한 것만으로도 2000여 개가 넘는데, 비슷한 모양의 도장이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인장에는 글자나 기호 외에 여신이나 동물 등의 다양한 모습이 새겨져 있어서 이것이 도장 이외에 부적처럼 사용되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그림마저도 문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아직 그 내용이 해독되지 않아 정확히 쓰임새를 알 수는 없다.

인더스 문명의 사람들은 땅과 물 등을 섬겼다. 이 시기는 브라만 체계가 확립되기 훨씬 이전이므로 후대 인도처럼 힌두교적 요소는 별로 없었다. 수공업과 상업도 발달했으나,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기에 농경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인 자연물을 소중한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특히 땅을 어머니의 모습으로 한 신으로 받들었다. 씨앗을 품었다가 곡식을 내 주는 모습이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배고 낳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은 농사에 꼭 필요했던 동시에 홍수를 일으키는 등 두려운 존재로서 숭배되었다. 또한 물에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이에 이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전에 반드시 물로 몸을 씻는 의식을 치렀다. 이러한 물 숭배는 현재까지 이어져 갠지스강에는 이러한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5. 환경

인더스 문명이 꽃피운 지역은 현재 연간 강수량 250mm 이하인 매우 건조한 사막 기후이다. 그래서 인더스 강 주변의 관개 수로에 의해 간신히 농업이 유지되고 있는 형편인데, 인더스 문명이 융성한 시기에는 지금보다 강수량이 훨씬 많고 습한 기후였다. 라자스탄 사막의 마른 호수 바닥에서 사바나에서 자라는 식물의 포자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인더스 문명이 발원했던 지역의 기후가 지금보다 사람이 살기 훨씬 적합한 기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빙하기 시기에는 지금보다 더 황량한 사막이었지만, 빙하기가 물러가고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어떤 이유로 기원전 8500년부터 강수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600mm 정도가 되었다가, 지구의 기온이 정점을 찍은 기원전 5500~기원전 2000년까지 연평균 700~800mm 이상을 기록했다. 이 시기는 인더스 문명이 시작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빙하기가 물러가고 급격히 따뜻해지면서 강수량이 늘어나 농사에 필요한 물을 구하기 쉬워지고, 그에 따라 인구가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몰리면서 문화가 시작되고 문명으로 발전한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실제 이 지역에서 공식적으로 문명의 발원이 인정받은 시기는 5,300년 전이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수로, 공예품, 목욕탕과 같은 유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기에 이러한 환경의 변화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실제로 기후의 변화가 문명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데, 이 자료를 보면 인더스 문명이 급격히 쇠퇴한 기원전 1900년경 연평균 700mm가 넘던 강수량이 200mm 이하로 급격히 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로마 시대까지 이어진 Dry Period 때에는 지금보다 더 건조한 기후가 지속되었음이 고고학 연구 결과로 확인되었기에, 지금껏 알려진 바와 다르게 인더스 문명 몰락에 강한 영향을 끼친 요인이 급격히 건조해진 기후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6. 이들은 누굴까?

토양을 이용한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고도의 도시문명이 성립되었다. 도시 중 모헨조다로는 도로와 집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급수/하수, 쓰레기 처리시설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토기와 청동기가 사용된 흔적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교역한 흔적도 발견된다. 서쪽과의 무역은 이후에도 이어져 유럽인들이 '2000년 동안' 인도 가는 길 찾겠다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계기가 되었다. 인장류의 인더스 문자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인더스 문명을 영위한 집단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2], 현재 어느 인적 집단과 이어지는지 확정짓기는 어렵다. 최근 인더스 문명 시대에 묻힌 고인골 유전체의 분석 결과 이란-북인도에 걸쳐 생활하던 수렵-채집민이 메소포타미아의 농경문화를 받아들여 인더스 문명을 세우는 농경민으로 발전해 나간 것으로 생각된다.[3] 그 과정에서 인도의 수렵-채집민의 혈통 역시 일부 혼혈이 이루어졌으나 13% 정도에 지나지 않아 인도 수렵-채집민의 혈통을 강하게 이은 드라비다인과 혈연적인 연결성은 크지 않다. 다만 인더스 문명 쇠퇴 후 인더스 문명인들이 남하하여 인도 수렵-채집민과 추가로 뒤섞여 고대 남인도인을 형성한다. 드라비다인이 이란고원과 인더스 문명의 농부들에게서 기원했을 경우 인더스 문명이 고대 드라비다어를 사용했다면 이 시기에 남인도에 드라비다어를 전파하게 되었을 것이다. # 반면 드라비다인이 남부에서 기원했다면 인더스 문명인이 드라비다어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을 개연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한편 남하하지 않은 일련의 인더스 문명인은 북쪽에서 이주한 유목계 인도-아리아어 사용자 집단과 뒤섞여 고대 북인도인을 형성한다. 현재의 인도인은 고대 북인도인과 고대 남인도인이 지역에 따라 제각기 다른 비율로 혼혈이 되는 가운데 오스트로아시아어족 집단이 양념으로 혼혈된 사람들로 분석되고 있다.[4]

인더스 문명은 아리아인의 남하 이전 모종의 이유로 쇠퇴하였다. 위에도 언급되었듯이 기후 혹은 인더스 강의 변화가 이유로 지목되고 있지만, 명확한 이유는 아직도 미지의 상태이다. 게다가 현재 해당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파키스탄은 아리아인 계열 국가[5]이면서 이슬람 국가로서, 지반침식 등의 구실로 인더스 문명 유적지의 접근을 막고 있기 때문에[6], 현장 연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물론 현대 파키스탄에서도 인더스 문명을 자랑스러운 자국 문명으로 가르치기는 하며, 파키스탄 루피에도 인더스 문명 시대의 유적인 모헨조다로가 새겨져있다.

7. 아리아인

이후 인도는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인도아리아인의 진출이 시작된 기원전 약 18세기경부터 수천 년간 통일, 분열, 재통일을 반복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이 때문에 인도 남부와 북부 사람들의 외모가 꽤 다르다. 아리아인 세력이 들어온 인도 북서부, 파키스탄에 가까울수록 피부가 밝으며, 반대쪽인 남인도와 현재의 방글라데시로 갈수록 점차 어두워진다.[7] 흔히 아리아인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드라비다인을 전쟁으로 몰아내고 이들을 부렸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으나,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점진적인 정착과 확장과 이합집산으로 수정되는 추세이다.

이들은 언어적, 종교적으로 조로아스터교의 발흥 이전의 고대 이란 신화를 믿었던 이란계와 가장 가까운 편이었다. 다만 종교적으로 차이도 있어서 인도로 남하한 베다 시대 때 인드라라는 신앙이 발생했으며[8] 아수라 신앙이 주류였던 이란과 달리 데바 신앙이 주류였다.

아리아인은 정착 과정에서 베다를 중심으로 브라만교 제단을 구성하였으며,[9] 엄격한 신분제인 바르나 제도를 만들어냈다. 바르나는 피부색이라는 뜻으로, 앞의 각주에서 언급했듯 아리아인과 드라비다인은 피부색이 다르다. 하지만 실제로 여러 역사를 거치면서 지역별로 아리아인과 드라비다인이라도 차이가 크며 구분이 의미없는 곳이 많다. 이 제도는 후대에 직업적인 성향이 강한 자띠의 구분과 함께 카스트 제도로 불리게 된다. 보다 자세한 내용들은 베다 시대 문서에 나와있다.

8. 미디어에서

2016년 인도에서 상영된 영화 <모헨조다로>는 인더스 문명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9. 관련 문서



[1] 현재 기준으로는 도시라고 보기도 애매한 수준이지만, 5천년 전 고대에 이 정도 규모는 정말 엄청나다. 당장 인더스 문명으로부터 수천 년이나 지난 뒤 중세 유럽에서 인구 최대였다는 도시 베네치아가 20만, 그 다음인 파리가 15만 남짓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2] 인더스 문명의 언어는 현재 4대 문명 중 유일무이하게 해독 불가인 상태이다. 이집트 문명 상형문자 로제타 석이 나타나면서 그 문자가 해독되었는데, 인더스는 아예 그런 것도 없이 인장 같은 단편만 남아 있다. 위에 나온 인장들의 글씨만으로는, 저게 단어인지 줄임말인지도 불명확한 상태이다. [3] Shinde et al., Cell, 2019 [4] Narasimhan et al., 2019, Science [5] 물론 현대 파키스탄인들에게 인더스 문명인 혈통이 아예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같은 파키스탄인이라도 인도인과 마찬가지로 피부색이 밝은 사람과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들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파키스탄인들이 생물학적으로나마 인더스 문명의 후예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6] 민족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보다도 파키스탄 전체가 탈레반을 포함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준동으로 인해 치안이 엄청 불안정해서 그런 것도 있다. 탈레반의 세력권과 제법 떨어져있다고 여겨지던 히말라야산맥 낭가파르바트 산에서도 탈레반들이 중국인 파키스탄인, 체코인 등으로 구성된 다국적 등반대가 묵고있던 베이스캠프에 총기난사를 해서 파키스탄 전체가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 그래서 파키스탄 정부의 입장에서는 섣불리 현장 연구를 허용해줬다가, 이 광신도들이 알라의 뜻에 반하는 망령된 유적을 조사했다면서 유적을 연구하던 학자들을 살해하거나 유적 자체를 폭파시킬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어서, 연구를 허용해주지 않는 것이다. [7] 유럽의 백인과 같지는 않다. 정확히 따지자면 아리아 민족의 발상지는 오늘날의 동 우크라이나 또는 동 아나톨리아 일대이며, 이들 중 일부가 동진하여 이란과 인도, 파키스탄 등 남아시아 지역에 정착하여 선주민과 혼혈을 이루었다. 다른 일부가 서쪽으로 나아가서 유럽계 백인이 되었다. [8] 이전에는 페르시아처럼 바루나, 미트라가 주신이었고 이는 베다 시대 때도 잔재가 남아있었다. [9] 최근에는 아리아인들이 원주민들의 종교를 받아들여 브라만교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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