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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8 07:33:45

이홍(전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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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李洪
생몰연도 불명

전연의 인물. 자는 불명. 기주(冀州) 발해군(渤海郡) 수현(蓨縣) 출신.

2. 생애

영가 4년(310년) 12월, 기주에서 대량 발생한 유민 무리를 거느리고 정릉(定陵)으로 들어가 정착하니, 다른 지역의 유민 무리도 합류하면서 세력을 빠르게 확장해 정릉을 넘어 무양(舞陽)까지 보루가 수천 개에 이르렀다.

영가 5년(311년) 7월, 유기2주자사 왕준이 승제하여 백관을 두면서 이홍을 옹주(雍州)자사로 삼았다. 이후 왕준이 석륵의 공격을 받고 망하자, 이홍은 요동 일대에서 할거하던 모용부로 귀순해 요동공 모용황을 섬겼다.

함강 3년(337년) 9월, 요동공 모용황이 스스로 연왕을 칭하자, 이홍은 대리(大理)에 임명되었다가 우사마로 전임되었다.

함강 4년(338년) 5월, 후조의 천왕 석호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전연을 정벌하자, 전연의 36개의 성이 후조군에게 투항하고 낙랑(樂浪), 기양(冀陽) 등의 백성들도 전연의 지방관을 쫓아내거나 죽인 뒤 석호에게 호응하였다. 후조군이 금새 전연의 도읍인 극성(棘城)까지 밀고 들어와 공성을 개시할 때, 이홍의 동생 이보(李普)는 극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이라 여겨, 이홍에게 성을 탈출하여 화를 피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이홍이 거절하며 말했다.
"하늘의 도리란 심오하고도 아득하여 인사(人事)를 알기는 어려운 법이다. 또, 마땅히 위임받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가벼이 행동해버리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이보가 계속해서 수 차례 간곡히 간하자, 이홍이 다시 말했다.
"경의 뜻이 분명하니, 그리 생각한다면 알아서 행동하도록 하라. 나는 모용씨에게 큰 은혜를 입은 몸으로, 의로움을 위해 가지 않고 마땅히 이곳에서 죽겠다."
그러자 이보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형과 이별하고, 극성을 나와 후조에 투항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보는 극성 공략을 실패한 후조군과 동행하여 남쪽으로 퇴각하였다가 이내 상란(喪亂)에 휘말려 사망하니, 이로 인해 이홍의 충직함은 더욱 돋보여져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이후 연왕 모용황은 이홍을 전서령(典書令)으로 삼았다.

함강 7년(341년) 7월, 동진에서 모용황이 자칭한 연왕 작위를 정식으로 인정해주었다. 이때 이홍은 다시 우사마로 옮겨졌다가 내사(内史)에 제수받았다.

영화 6년(350년) 3월, 연왕 모용준의 친정에 종군하여 후조의 계(薊)를 함락시켰다. 연왕 모용준은 계를 도읍으로 하고, 이어서 후조의 정동장군 등항(鄧恒)이 수비하는 노구(魯口)를 향해 진군하였다. 전연군이 청량(淸梁)에 이르렀을 때, 등항의 장수 녹발조(鹿勃早)가 수천 명의 병력으로 전연군의 진영을 야습하였다가, 전봉도독 모용패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물러나 대치하였다. 이때 녹발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전연군 진영에 절반 가까이 들어왔었기에, 연왕 모용준은 이홍과 함께 인근의 높은 무덤 위에 따로 주둔하였다.

절충장군 모여근이 좌우에 정예병 수백 명을 이끌고 녹발조의 진영으로 돌격하자, 무덤 위에 주둔해있던 연왕 모용준도 이홍에게 기병을 주어 모여근을 원호하게 하였다. 이홍은 모여근과 함께 매우 많은 적군을 베어죽였고, 녹발조는 대패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40리 가량 도망쳐 추격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건희 원년(360년) 정월, 헌무제 모용위가 즉위하자 용양장군에 임명되었다.

건희 5년(364년) 2월, 태부 모용평과 더불어 하남(河南)을 공략해 그 땅을 빼앗았다.

건희 5년(364년) 4월, 이홍이 허창(許昌)과 여남(汝南)을 공격해 현호(懸瓠)에서 이끄는 동진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동진의 영천(潁川)태수 이복(李福)은 전사하였고, 여남태수 주빈(朱斌)은 수춘(壽春)으로 도주하였으며, 진군(陳郡)태수 주보(朱輔)는 팽성(彭城)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동진의 대사마 환온은 서중랑장 원진(袁真)을 파견해 이홍의 진군을 막게 하고, 자신은 합비(合肥)로 가 주둔하였다. 하지만 동진의 대처가 무색하게도 이홍은 허창, 여남, 진군을 전부 점령하고, 그곳의 백성 10,000여 호를 약취하여 유주와 기주로 이주시켰다. 이후 이홍은 광록대부로 옮겨졌다.

건희 8년(367년) 12월, 태위 양무가 죽자, 사공 황보진이 그를 대신하여 태위에 임명되었고, 이홍은 다시 황보진을 대신하여 사공에 임명되었다.

건희 11년(370년) 12월, 왕맹의 활약으로 업(鄴)이 함락되고 전연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이홍은 다른 전연 조정의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전진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끌려가, 천왕 부견에 의해 부마도위로 발탁되었고 봉조청(奉朝請)을 겸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