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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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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33333><tablebgcolor=#ffffff,#191919><bgcolor=#000000>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
||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
(개구리 소년 사건)
* 해결된 사건

화성 연쇄살인 사건 화성 연쇄살인 외 사건
화성 연쇄살인 사건 (사건 내용) 화성군 태안읍 일대 연쇄 강간 사건 ·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 ·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 · 청주 처제 살인사건 ·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colbgcolor=#000><colcolor=#fff> 이춘재
李春在 | Lee Choonjae
{{{#!wiki style="margin: -16px -11px; word-break: keep-all; font-size: 0.8rem" 1983년 2019년
파일:이춘재 졸업사진.jpg 파일:이춘재.png }}}
출생 1963년 1월 31일 ([age(1963-01-31)]세)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1]
(現 경기도 화성시 진안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청룡국민학교 (1976년 졸업, 27회)
안용중학교 (1980년 졸업)[2]
삼일고등학교 (1983년 졸업)
신체 173.1cm, 71.2kg, 265mm, O형[3]
병역 대한민국 육군 제1기갑여단 병장 만기전역
종교 불교
가족 모친(1943년생), 남동생
아내, 슬하 1남(1991년생)
범죄 및 형량 연쇄살인, 강간살인[4], 연쇄강간, 강도예비
무기징역
범행 기간 1986년 2월 ~ 1994년 1월[5]
인명피해 15명 살해
수감 부산광역시 강서구 부산교도소

1. 개요2. 생애
2.1. 내력과 초기2.2. 군 복무 시기2.3. 전역 이후
3. 범행
3.1. 사건 목록3.2. 연쇄강간 사건3.3. 화성 연쇄살인 사건3.4. 처제 살인3.5. 이춘재의 행적과 비교해 본 사건 시간표
4. 교도소 생활5. 근황6. 영화 살인의 추억이 범인을 맞혔다?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연쇄살인범이자 연쇄강간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다. 이 사건들을 비롯한 살인 행각으로 총 15명을 살해한 그가 검거된 후 이 사건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세계적으로 한국판 조디악 킬러, 잭 더 리퍼로 불렸던 인물로, DNA 분석기술 발달에 힘입어 2019년에 용의자로 특정되었다. 그동안 총 10차에 걸쳐 일어났다고 알려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10차의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못했고 8차 사건은 모방범으로 부정확하게 수사가 종결 나는 등 당시 대한민국 과학 수사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미제사건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9년 10월 1일 이춘재는 모방범으로 확정되었던 8차 사건을 포함해 10건의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그 외 4건의 살인 사건을 합쳐 총 14건[6] 연쇄살인과 30여 건의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강호순, 유영철, 정남규 등 그동안 붙잡힌 연쇄살인범과 비교할 때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은 아니나[7] 가장 범행 기간이 긴 범죄자이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10건 중 이춘재의 DNA가 발견된 사건은 5건(3차, 4차, 5차, 7차, 9차)다. 그 외 검사했으나 발견되지 않은 사건은 2건(2차, 10차), 증거물 부족 등의 이유로 검사가 불가능한 사건은 2건(1차, 6차), 유일하게 용의자가 잡힌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본인이 자백하여 재심이 이루어졌고 기존의 무고한 사람도 무죄 판결이 나왔으며 8차 사건 수사 당시 증거 조작,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이춘재의 상세한 자백(범인만이 알 수 있는 사실 등 자백) 등으로 결국 8차 사건 모방범죄가 아닌 이춘재가 저지른 것으로 결론났다.

2020년 12월 28일 이춘재가 저지른 사건 중 처벌받지 않은 살인 14건과 성범죄·강도 등 9건에 대한 혐의가 모두 인정되었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되었다. 사실상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확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 셈이었다.

2. 생애

2.1. 내력과 초기

파일:1572740169799090.jpg
중학생 시절의 이춘재
파일:춘재.png
고등학생 시절의 이춘재
1963년 1월 31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8]에서 태어나 30년간 근방에서 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착하고 조용한 아이로 기억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춘재를 착하고 대답도 잘 하고 성품도 좋은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동창들 역시 이춘재를 매우 착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싹싹하고 인사성도 밝은 아이였다고 기억했다. 부모와 남동생 역시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였으며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가족들은 이춘재가 저지른 처제 살인사건도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

꽤나 암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원래는 아버지가 가부장적인 성격이였으나 국민학교 시절 동생이 물에 빠져 익사한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으며 이 사건 이후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그를 강압적인 방식으로 교육했던 탓에 이때부터 이춘재는 성질을 죽이고 살았었다. 이춘재의 주장에 따르면 어릴적 동네 누나에게 성폭행을 당한적이 있었다고 한다.[9] 만약 사실이라면 이런 성경험으로 인해 왜곡된 성욕 생긴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부모가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알았는지는 미지수다. 수원시에 있는 삼일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해 1983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0]

2.2. 군 복무 시기

파일:2019100720273640228.png
파일:201910151603236608_t.jpg
군 복무 시절의 이춘재
이춘재는 본디 내성적인 성격이였는데 1983년 중순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해 군대에서 제1기갑여단에서 조종수로 복무하면서 전차를 몰며 성취감을 얻으면서 성격이 변한걸로 보인다. 이춘재는 전차 조종 실력이 뛰어나서 중대장이 직접 탑승하는 전차의 조종수로 선발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전차가 같은 중대의 전차들을 선도하게 되었는데 이때 자기가 모는 전차가 선도하면서 뒤로 다른 전차와 보병들이 따라오는걸 보고 희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평생 자신의 인생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가 군에서 처음으로 성취감과 주체적인 역할을 경험하게 된걸로 분석이 됐다. 심지어 전차 정비 등 검열을 위해 휴가를 반납할 정도였다고. # 1986년 1월 23일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을 했다. 그리고 전역 이후 단조로운 생활에 무료함을 느꼈다고 한다.

2.3. 전역 이후

전역 후 화성군의 전기부품회사에 근무했다. 이후 행적 추적에 따르면 전역 직후 1986년 초부터 화성에서 무차별 강간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고 1986년 하반기에 처음 살인을 했다. 이후 화성 연쇄살인 사건 및 추가 범행들을 저질렀다. 범행기간은 1986년 9월부터 1994년 1월까지다. 1986년에만 4건을 저질렀고 1991년까지는 범행을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피해자의 나이는 9살 어린이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

어린 시절 억눌렸던 자아가 군 복무 시절 기갑부대에서 전차를 운전하는 등 성취감을 느낀걸 계기로 풀리면서 그동안 채워놨던 마음의 ‘걸쇠’를 풀어버렸다는게 경찰의 분석이다. 이후 성적 욕구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범행을 시작했고 점차 잔혹하고 가학적 사이코패스형 범죄자가 됐다. 처음부터 살인을 목적으로 한게 아니라 성욕 해소를 위해 범행에 착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저항해 첫 살인을 저지른 이후부터 성폭행을 하고 늘 살인을 하는 연쇄살인자로 돌변했다. #

1990년 초여름경에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 본사를 두고 있는 모 건설주식회사(건설하도급업체)에 들어가 굴착기 기사를 따라다니다가 운전을 배워 면허 없이 굴착기 기사로서 공사현장을 따라다녔다.[11]

1991년 전후에는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12]의 한 골재회사에서 굴착기 기사로 근무를 했으며 그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던 아내를 만나 1992년 4월에 결혼을 했다. 결혼 이후 다니던 회사가 망하자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책임을 졌다고 한다. 처제 살인 사건으로 조사를 받을때의 경찰 조서에는 " 1993년 3월 말에 청원군 부용면에 있는 부강농공단지현장에서 일하다가 그만 두고 현재까지 놀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3. 범행

3.1. 사건 목록

이춘재가 저지른 것으로 확인된 사건 목록.

이미 알려져 있던 청주 처제 살인사건과 강도 예비 사건을 포함해 뒤늦게 자백한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 및 강도 사건 중 확실하게 혐의가 인정된 25건의 사건이다.[13]
<rowcolor=#eee,#111> 구분 일시 피해자 및 정황 기타
화성 연쇄강간
1차 사건
1986년 2월 8일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에서 회사원 최모씨(20) 강간 후 현금 1만원 갈취 흉기로 위협하고 찌름. 장갑 착용. 상의 폴라로 재갈, 하의 단으로 결박 후 강간.
화성 연쇄강간
2차 사건
1986년 3월 20일 태안읍 황계리에서 정모씨(22) 강간 흉기로 위협하고 찌름. 논 아래로 끌고 가 스타킹으로 결박 후 강간.
화성 연쇄강간
3차 사건
1986년 4월 3일 황계리 인근 농로 길을 걷던 이모씨(27) 현금 12만원 갈취 후 강간 흉기로 위협하고 70m가량 끌고감. 기저귀 천으로 결박 후 강간. 장갑 착용.
화성 연쇄강간
4차 사건
1986년 4월 25일 개천둑 병점 느티미 다리를 지나가던 중 식당 종업원 하모씨(39) 강간 후 현금 10,500원 갈취 흉기로 위협하고 찌름. 스타킹으로 결박하고 양말로 재갈,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씌움.
화성 연쇄강간
5차 사건
1986년 5월 8일 태안읍 진안리 입구 쌍무덤 묘소 앞을 지나던 가정주부 박모씨 (43) 2회 강간 흉기로 위협, 치마 안단을 찢어 결박 후 강간. 1회 강간 후 돈이 없자 욕설을 하며 재차 강간.
화성 연쇄강간
6차 사건
1986년 5월 14일 병점리 산업도로둑 비상활주로를 걷던 피해자(48) 현금 20만원 갈취 후 강간 흉기로 위협하고 찌름. 옷을 벗기고 치마 내피를 찢어 결박 후 강간. 장갑 착용
화성 연쇄강간
7차 사건
1986년 7월 황계리 경부철도 부근을 지나던 피해자(19) 강간 흉기로 위협하고 찌름. 파란 천으로 입을 막고 스타킹으로 결박 후 강간.
화성 연쇄살인
1차 사건
1986년 9월 15일
06:20 (추정)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이완임 할머니(72)가 귀가하다 피살[14] 딸의 집에서 자고 나와 귀가하다 피살, 날씨 맑음. 액살 (손으로 목이 졸림). 정액 반응 음성
화성 연쇄살인
2차 사건
1986년 10월 20일
22:00 (추정)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15]에서 박현숙 씨(26)가 집으로 돌아가려 버스를 타러 가다 피살 맞선 보고 송탄 집으로 돌아가던 중, 버스를 타러 가다 피살. 흐림. 액살. 정액(혈액형 판정 불능).
화성 연쇄살인
3차 사건
1986년 12월 12일
23:00 (추정)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140[16]에서 권정분 씨(25)가 귀가 중에 집 앞에서 피살 귀가 중 집 앞에서 피살, 날씨 맑음. 교살(스타킹 으로 목이 졸림). 스타킹으로 재갈. 팬티를 얼굴에 씌움. 정액(혈액형 판정 불능).
화성 연쇄살인
4차 사건
1986년 12월 14일
23:00 (추정)
화성군 정남면 관항리 논둑[17]에서 이계숙 씨(22)가 버스에서 내린 뒤 피살 맞선 보고 귀가하던 중 버스에서 내린 뒤 피살. 날씨 비. 두 손 결박. 교살. 우산으로 난행. 거들을 얼굴에 씌움. 정액(혈액형 판정 불능).
화성 연쇄살인
5차 사건
1987년 1월 10일
20:50 (추정)
화성군 태안읍 황계리[18]에서 홍진영 양(18)이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날씨 맑음. 두 손 결박. 양말로 재갈. 교살. 정액(혈액형 판정 불능).
화성 연쇄살인
6차 사건
1987년 5월 2일
23:00 (추정)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박은주 씨(29)가 남편의 (우산 소지)마중 가다 피살 남편 우산 마중 가다 피살, 날씨 비. 교살. 정액(혈액형 판정 불능).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 1987년 12월 24일 수원시 화서동 383[19]에서 김모 양(18)이 피살 스타킹으로 결박, 팬티로 재갈. 교살.
화성 연쇄살인
7차 사건
1988년 9월 7일
21:30 (추정)
화성군 팔탄면 가재3리 292 농수로에서 안기순 씨(54)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날씨 흐림. 두 손 결박. 양말, 손수건으로 재갈. 교살. 복숭아 조각. 정액(혈액형 판정 불능).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1988년 9월 16일
02:00 (추정)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 424[20] 주택에서 박상희 양(13)이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다 피살 1989년 7월25일 윤성여 씨(당시 22세)가 검거되었으나 이춘재의 자백 이후 재심에서 무죄 판결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1989년 7월 7일 화성군 태안읍 병점5리 원바리고개에서 김모 양(9)이 실종[21] 초등학생 김양을 숲속으로 끌고 가 줄넘기용 줄로 결박함. 김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그 장소로부터 50m 떨어져 있는 풀이 우거진 곳에 유기.[22]
수원 강도 예비 사건 1989년 9월 26일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의 한 주택에 흉기를 들고 침입함 이춘재는 강도예비로 체포, 수감된지 201일만인 1990년 4월 19일 집행유예로 풀려남.
화성 연쇄살인
9차 사건
1990년 11월 15일
18:30 (추정)
화성군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김미정 양(14)이 귀가 중 피살[23] 학교 마치고 귀가 중 피살. 날씨 안개. 손과 발 결박. 교살, 브래지어로 재갈. 볼펜·포크•수저•면도칼로 난행. 정액(B형).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 1991년 1월 16일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납치되어 길가에서 100m 떨어진 공사현장 피살.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피살, 정액 발견. 같은 날 납치된 또다른 여성은 극적으로 탈출.
청주 남주동 주부 살인사건[24] 1991년 3월 7일 오후 8시쯤 청주시 남주동의 한 셋방에서 주부 김모(29세, 여) 씨가 피살. 공업용 테이프로 눈이 가려져 있었고 스타킹이 입에 물려져 있었으며 양쪽 가슴에는 흉기에 찔린 상처.
화성 연쇄살인
10차 사건
1991년 4월 3일
21:00 (추정)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599[25]에서 권순상 씨(69)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날씨 맑음. 교살. 족적 2점(감정 불능). 정액(B형)
청주 처제 살인사건 1994년 1월 13일 처제에게 수면제 먹인 뒤 성폭행, 살해 및 유기. 이후 체포, 수감

3.2. 연쇄강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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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월 군 전역 이후, 본격적으로 강간 및 살인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3.3. 화성 연쇄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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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유치원생까지 강간, 살해하는 자라. 아무리 살인에 미친 사람이지만 저 같은 살인마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아니더라구요. 그 범인이 안 잡히는 건 아마 그가 사형수가 아닌 중형을 받아 교도소에 숨어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쇄 살인범 유영철의 화성 연쇄살인범에 대한 평가 #
2019년 9월 18일 경찰은 청주시에서 1994년에 처제를 강간하고 살해해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라고 발표했다. 조사 결과 5차( 1987년), 7차( 1988년), 9차( 1990년)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가 이춘재의 DNA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1일 자백을 하면서 무려 30년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밝혀졌다. 그가 자백을 했던 시점에는 이미 공소시효 만료가 됐기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춘재를 처벌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그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건이 밝혀지기 전에 이미 다른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에 처해졌으므로 사실상 가석방을 평생 불허함으로써 죄값을 받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춘재의 사건 당시 거주지는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현 화성시 진안동)로 직장 생활과 결혼도 화성에서 했으며 주소를 몇 차례 옮긴 적은 있으나 모두 당시 화성군 내였고 1993년 4월 청주로 이사하기 전까지는 계속 화성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시 이춘재가 다니던 공장은 집에서 5km 거리에 있었으며[26] 단순 공장 업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확인 결과 1차, 2차, 3차, 6차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모두 당시 이춘재의 통근길로 추정되는 경로와 일치한다고 한다. # 이춘재의 DNA가 확인된 5차, 7차, 9차 범행 장소와도 멀지 않으며 특히 9차 장소는 당시 이춘재의 집에서 불과 2km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

마지막 사건인 1991년 4월 3일부터 처제를 살인한 1994년 1월 13일 사이인 약 3년간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이유는 1991년 7월경에 이춘재가 결혼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JTBC가 이춘재의 당시 인척을 만나 취재한 결과를 통해서도 이춘재가 1991년 7월에 화성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게 확인되었다. 이후 1992년에 아들을 출산했고 1993년 청주로 이사했으며 1994년 1월에 처제를 강간하고 살해했다. # 아내와 아직 갓난아기였던 아들을 상습 폭행한 것도 살인을 일시적으로 멈췄으나 폭력적인 성향을 억누르지 못해 가족에게 그 화를 풀었으며 결국 처제 살인사건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3.4. 처제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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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아들 출생 등의 일을 거치며 한동안 '냉각기' 즉 범행을 저지르지 않던[27] 그는 1994년 1월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처제를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른 후 살해했다. 이후 경찰이 각고의 노력 끝에 이춘재의 집 세탁기 받침대에서 혈흔을 발견했고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DNA 분석/대조 기술을 근거로 그것이 피해자의 혈흔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검거 후 혐의 부인, 사건의 잔인성을 근거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처가와도 평소 원만한 관계였으며 처가가 있는 청주시로 버스를 타고 가 농사를 하는 장인어른의 일손을 거들고 처제들이 이춘재의 집에 반찬을 들고 찾아가는 등 친족 간의 교류도 원활했다고 한다. #

하지만 재판 기록에서 보인 그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청주 처제 살인사건 당시 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춘재는 2살짜리 아들을 피멍이 들 정도로 두들겨 패고 아내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아내가 하혈할 정도로 마구 폭행했다고 한다. 당시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이춘재에게 심한 성도착증도 있었으며 아내에게 강간을 해서 아내가 훗날 울면서 형사에게 알렸을 정도였다. #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는 1993년 12월 집을 나갔으며 이춘재는 아내에게 협박 전화를 걸고 동서에게 "아내와 이혼은 하겠지만 다른 남자와 재혼도 할 수 없게 문신을 새기겠다."[28]는 말도 했다고 한다. 처제 살인사건 당시 판결을 보면 '한 번 화나면 부모가 말리지 못할 정도로 포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면 친가족들에게는 잘 해준 것으로 보이며 과거 동네 주민들의 평판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악질 범죄자라고 해도 자기 가족이나 친구, 이웃에게는 친절하거나 성격이 좋은 인간인 사례는 특이한 일이 아니며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들도 각자의 환경이나 성격에 따라서 가족이나 친구,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한다거나 의외로 소탈한 면모를 보인다거나 하는 일도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미국에서 42년 만에 경찰에 붙잡힌 ‘ 골든스테이트 킬러'나 30년 만에 붙잡힌 ' B.T.K. 킬러' 역시 가정과 이웃에게는 무척 평범하고 좋은 사람이었으며 직업도 각각 경찰과 공무원이었다. 특히 'B.T.K. 킬러'의 경우 체포 당시 한 교회의 목사로 활동 중이었다. 중국판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불린 바이인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 가오청융도 부모가 죽을 때까지 정성을 다해 효도했고 아들 둘을 명문 대학에 보낼 만큼 모범적인 가장이었기에 범인으로 밝혀지기 이전까지는 마을에서 평판이 매우 좋았다. 악의 평범성이 보여주는 사례다.

동생은 형이 조용한 성격이었으며 포악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했다고 밝혔으며[29] 친어머니 역시 처제 살인사건은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며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서 이춘재의 DNA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큰 충격을 받고 인터뷰 도중에 가슴을 계속 치며 흐느끼고 피해자들에게 사과의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30] 이춘재 부모형제가 거주했던 진안동 주민들도 부모형제들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는데 주민들 대부분이 믿기지 않아했다고 한다. #

당시 경찰 관계자들이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지목한 점은 이춘재는 범행 이후에도 반성이 없었으며 잡힐 때마다 끝까지 혐의를 부인만 해댔다는 점이다. 처제의 시체를 유기한 다음 날 장인어른을 찾아가 "도와드릴 일 없냐"는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실종 신고를 냈으며 조사 과정에서도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다 혈액이 발견되고 범행을 자백했으나 이후에 다시 "경찰관들이 고문해서 어쩔수 없이 한 허위 자백"이라고 말을 바꿔 재판을 3심까지 끌고 갔다. 강도 혐의로 체포가 됐을 당시에도 이춘재는 흉기와 목장갑을 들고 집 안에 침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남자가 나에게 갑자기 폭행을 했고 이 때문에 집에 우연히 들어갔지 강도질을 하려고 들어가지 않았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는 이춘재가 초범이였고 실제 피해자의 피해는 미미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여 이춘재를 집행유예로 석방을 시켰다. 성폭행 또는 성폭행 결합 살인을 저질러 왔던 이춘재에게 단순 강도는 이질적 범행이기에 이것도 원래는 성폭행 목적의 주거침입이였던걸로 보는 견해도 있다.

3.5. 이춘재의 행적과 비교해 본 사건 시간표

||<tablebgcolor=#f5f5f5,#1a1a1a><rowbgcolor=#333,#ddd><rowcolor=#eee,#111><width=90> 날짜 ||<-2> 사건 ||<width=45%> 이춘재 행적 및 관련성 ||
<colbgcolor=#fff,#000> 1983년 중순 - 군 입대. 20세
1986년
1월 - 군 전역. 23세
2월 8일 화성군 태안읍 일대 연쇄 강간 사건 1차 이춘재 진안리 거주
3월 20일 2차 -
4월 3일 3차 -
4월 25일 4차 -
5월 8일 5차 -
5월 14일 6차 -
7월 7차 -
9월 15일 1차 살인
피해자가 저항한 흔적이 있음.[31]
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출퇴근길 근처
10월 20일 2차 살인 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출퇴근 길 근처
11월 20일 진안리 범행 미수 생존자 발생. 당시 피해자가 거름통에 빠지자 범인이 더럽다며 도망감.[32] 이춘재 진안리 거주
11월 30일 범행 미수 생존자 발생. 피해자가 극적으로 도망치면서 생존함.[33]
12월 12일 3차 살인 피해자가 다니던 회사가 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옆이었음.
이춘재 DNA 확인.
12월 14일 4차 살인 피해자가 다니던 섬유회사가 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옆이었음. 이춘재 DNA 확인.
1987년
1월 10일 5차 살인[34] 이춘재 DNA 확인.
5월 2일 6차 살인 이춘재 집 근처
8월 - 인근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가 이춘재라는 주민의 첩보를 받아 이춘재 조사받음.
12월 24일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발생.
[35]
이춘재는 수원 소재 고등학교를 졸업했음.
1988년
9월 7일 7차 살인
용의자가 수원행 막차 버스를 탐. [36]
25세 정도로 추정.
이춘재 DNA 확인.
과거 수원 S고등학교를 다녔음.
9월 16일 8차 살인
진안리 피해자 집안.
정액과 음모 등을 분석한 결과 용의자를 B형으로 추정.
사건 발생 장소인 진안리에 이춘재 거주.
10월 - 8차 사건과 관련해 이춘재의 음모를 뽑아 국과수에 감정의뢰 했으나, 현장 음모와 혈액형 등이 다르다고 확인.
1989년
7월 3일 수원시 권선구 오목천동 여고생 살인사건. 오목천동 601번지 농수로에서 발견. # 이춘재 집에서 약 6km 거리
7월 25일 -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주민 윤 씨가 체포됨.[37]
9월 26일 - 이춘재가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에서 강도예비 및 폭력 사건으로 구금됨
1990년
1월 - 연쇄살인과 관련해 이춘재를 수사했으나 6차 사건에서 발견된 족적과 이춘재의 족적이 불일치해 용의선상에서 배제.
4월 19일 - 이춘재가 강도예비로 수감된지 201일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남.
11월 15일 9차 살인[38]
피해자 김모(14)
이춘재 DNA 확인.
1991년
1월 26일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
가경동 택지공사 현장에서 발견.
이춘재는 이 시기부터 직장 문제로 청주를 자주 오갔다. # 이춘재의 자백 이후 그의 범행임이 밝혀짐.
1월 26일 청주 부녀자 납치사건
가경동 택지공사 현장으로 납치 된 피해자가 탈출
납치 피해자가 자신 외에 이미 납치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했고 위의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의 피해자로 추정.
3월 7일 청주 남주동 주부 살인사건[39] 이춘재의 자백 이후 그의 범행으로 밝혀짐.
4월 3일 10차 살인 -
7월 - 이춘재는 청원군 부용면[40]에 있는 골재회사에 포크레인 기사로 취직한 후 그 회사의 경리와 결혼함.
1992년 이후
1992년 초반 청주 강내면 공사장 살인사건[41] 이춘재는 포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1992년 4월 18일 청주 봉명동 여종업원 살인사건[42] 청주 장기 미제사건이다.
1992년 6월 24일 청주 복대동 주부 살인사건
[43]
청주 장기 미제사건이다.
1992년 - 이춘재 아들 태어남
1993년 4월 - 서류상 주소지를 화성에서 청주로 옮김. #
1994년 1월 13일 - 처제 살인사건 발생.이후 체포, 수감

4. 교도소 생활

이춘재가 저지른 연쇄 살인사건들은 매우 잔혹하고 무시무시하다. 사건들만 놓고 보면 이춘재는 흉악범 그 자체다. 하지만 교도소 내에서 그의 모습은 달랐다.

이춘재는 수감된 이후 24년간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징벌이나 조사를 단 한 차례도 받지 않았으며, 4등급으로 이뤄진 수감자 등급에서 1급(S1)에 해당하는 모범수로 분류됐다. S1급은 수감자 사이에서 어렵다고 소문 난 경비처우다. 꾸준히 작업장에 출역하면서 가구제작기능사 자격을 땄고 특히 손재주가 좋아 도자기 전시회 입상 경력도 있었다. 게다가 그는 1급 모범수라는 이유로 냉•난방에 냉장고까지 갖춰진 넓은 방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춘재는 광복절 특사와 성탄절 특사에 심사 대상자로 오른 적도 있었다. 이후 이춘재는 특사로 선정되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특별 사면 대상자에 떨어진 후 자신의 지인들에게 “앞으로 5년 정도는 그냥 계속 기다려본다”라는 취지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교도소 관계자들이 "조용하고 말없는 대표적인 모범수였다."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지 않았더라면 이미 가석방이 됐을 것"이라고 전했다. #1, #2, #3 2009년과 2010년에는 교도관을 보조해 다른 수형자들을 관리하는 반장직까지 맡았을 정도였다고. 다만 오히려 사회보다 교도소에 더 잘 적응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철저히 동성끼리만 생활하니 연쇄살인에서 드러나는 이성에 대한 가학성이 발현될 리 없고 폭력적인 위계 질서에 익숙한 성격이기 때문에 위계가 확실한 교도소에서 모범수가 되었으리란 분석이다.

이춘재와 교도소에 함께 있었던 지인들은 " 신창원 정도 됐으면 인정을 하는데 걔는 전혀 그런게 없는 친구다", "착한 형, 모범적인. 남들과 융화 잘 되고 교도관들한테도 잘 했다. 생각조차 못 한 이름이 튀어나와 놀랐다"고 말했다.

2016년부터 2년간 이춘재와 부산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한 한 동료 수감자는 이춘재를 '교도소 리더'라고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이춘재는 매주 종교 모임에 참석할 정도로 종교 활동[44]을 열심히 했으며, 종교 활동으로 생긴 빵 수십 개를 수감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춘재는 모든 수감자와 거리낌 없이 잘 어울리는 등 친화력이 강한 편이었으나, 정작 본인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춘재에게 개인사를 물으면 화제를 돌리기가 일쑤여서 화성 연쇄 살인사건 범인 몽타주를 봤던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범인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보통 수감자들 사이에서 무리가 나뉘기 마련인데, 이춘재는 친화력이 좋아 모든 수감자에게 호감을 샀다. 이춘재의 부탁이라면 돈 많은 경제사범이 솔선수범해 뭐든 들어줄 만큼 교도소 내에서 이춘재의 입지가 튼튼했다. 이춘재는 손재주가 좋은 데다 굉장히 철두철미하고 깔끔한 성격이었다. 교도관들 옷보다도 깨끗한 주름이 잡혀있는 옷을 매일 입고 다녔다"고 말했다. 이춘재가 친절한 성격과 깔끔함에 수감자는 물론 교도관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

또한 "이춘재가 여성 사진 10여 장을 본인의 사물함에 몰래 넣어두고 보관해왔다. 사진 대부분이 음란물이었다"고 설명했다. 수감자가 자동차 관련 잡지를 보여 주자 갑자기 이춘재가 여성이 나와 있는 페이지를 뜯어가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한 교도소 지인은 "딱 한번 이춘재가 화내는 것을 본적이 있다. 사진에 민감했다. 장난으로 '3장 보다 이게 좋네요'라고 했는데 화냈다. 평소에 베풀고 그러는데 사진에만 그러니까 좀 예민하네 생각했다"고 이춘재와 얽힌 일화를 말했다.

이춘재의 의외의 모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춘재는 수감자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처지인 적도 있었다. 1994년, 청주 처제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춘재와 50일가량 같은 방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한 수감자는 '이춘재가 괴롭힘을 당한 뒤엔 자주 이상행동을 보이며 ‘여러 건의 살인사건을 저질렀다’는 말을 들릴 듯 말 듯하게 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이춘재를 자주 폭행하고 괴롭혔다. 그때마다 이춘재는 반복적인 이상행동을 보였다. 혼자 벽을 쳐다본다거나 아니면 땅을 쳐다본다거나 했다.”라고 했으며,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이춘재는 "지난 몇 년 동안 살인사건을 여러 번 저질렀는데 경찰이 증거를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혼자 중얼중얼댔다"고 말했다. 그는 "이춘재가 십몇차례? 이정도는 혼잣말을 했던 걸 정확히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

그러나 교도소 동기들이 이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물으면 이춘재는 입을 닫았고, 당시엔 이춘재가 화성사건의 용의자인 줄도 몰랐기 때문에 같은 방 사람들은 이춘재의 헛소리쯤으로 여겼다고 회상했다.

표창원은 이춘재가 교도소에서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모습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춘재는 교도소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 중얼거렸는데, 그 의도는) '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냐. 사실 난 여러 명을 죽였고 이 부분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라며 "실제 자기가 한 행위의 분위기를 남들이 느끼기를, 그래서 자기를 괴롭히지 말고 두려워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중얼거림을 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분석했다.

5. 근황

2020년 7월 2일 경찰의 재수사가 종료되었고 #, 이춘재는 7월 5일 수원구치소에서 부산교도소로 옮겨와 독거실에서 지내게 되었다.[45]

부산교도소 측에 따르면 이춘재는 재수사 후 특별히 변화되거나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으며 건강 상태는 양호하고 운동·취침 등 통상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주로 TV 시청[46]으로 하루를 보내는데 뉴스는 거의 보지 않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주로 시청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만 교도소 측은 그의 심적 변화를 우려하여 재수사 결과가 발표될 때는 운동 시간을 편성하는 식으로 TV 시청을 제한했다. 관련 기사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피해자의 오빠가 이춘재와의 접견을 신청했고 이춘재가 이를 수락해서 최초로 유족과의 접견이 이루어졌다. 이춘재는 의외로 유순하고 협조적인 태도였다고 한다. 피해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모르겠으며 그 날 자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며 안타깝다고 말했다고 한다.

2020년 11월 2일 8차 사건 재심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영화 살인의 추억을 교도소에서 봤다고 밝혔다.[47] 보고 특별히 느낀 점은 없었고 일반적인 영화라고 생각했으며 비가 오면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한다는 부분 등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아 신경 써서 보지 않았다고 한다. # 또 자신을 대신해 누명을 쓰고 20년간 옥살이 후 출소한 윤모씨에게도 사과했다.

이춘재는 2006년부터 면회가 가능해졌는데 매년 2~3차례 남동생과 어머니가 자주 면회를 오거나 영치금을 넣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2019년 자백 이후 가족과 연락이 끊겼으며, 단 한차례의 전화나 면회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 이춘재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넓은 농지들이 화성시 재개발로 인해 땅값이 엄청 올라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판 것들을 모두 합치면 현재 가치로 최소 100억 원 정도 됐을 거라고. #

6. 영화 살인의 추억이 범인을 맞혔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2003년 영화 《 살인의 추억》에서 작중 용의자로 지목된 박현규( 박해일 분)의 신상이 전부 상상에 기반했음에도 실제 이춘재와 비슷한 점이 많아 주목을 받았다. 닮은 점들은 다음과 같다.
다만 진범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만든 영화다 보니 영화에서 묘사한 박현규와 실제 이춘재와의 차이점도 당연히 상당수 있다. 차이점에 대해서는 문서 참조.

그러나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 의하면 박현규의 실제 모델이 된 사람은 이춘재가 아닌 다른 용의자였고 1997년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 살인의 추억 문서의 해당 단락 참조. 영화에서도 박현규가 처음 수사를 받을 때 "당신들이 죄 없는 사람들 족치고 다니는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 난 절대로 그렇게 안 당해" 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용의선상에 오른다는 것은 추정되는 범인의 특징과 유사점이 있는 인물이므로 상당 부분 일치하는 내용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참고로 이춘재는 본인도 교도소에서 이 영화를 시청한 바 있으며,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고 밝혔다.


[1]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된 건 2001년이며, 태안읍이 동으로 승격 및 분동된 건 2006년이다. 출처 [2]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8차, 9차 사건의 피해자들이 이 학교를 다녔으며 9차 사건의 피해자인 김 양은 당시 나이가 만 13세, 중1로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피해자 나이 만 8세, 초2)을 제외하면 8차 사건 피해자인 박 양과 같은 나이로 피해자들 중 가장 어리다. [3] 이춘재 <2019년 9월 26일 부산교도소 보안과 조사실> "유일하게 술을 먹고서 한 사건입니다. 대문이 열려있어 들어갔습니다. 방안에 새 속옷이 있어 피해자에게 입혔습니다. 담을 넘어 들어갔고, 혈액형이 B형이었다는 당시 경찰의 수사내용 전부,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진범의 혈액형이 O형이었음에도 애꿎은 B형 용의자들만 4만 명 넘게 조사했던 겁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건 윤성여 씨 뿐이 아닙니다. 9차 살인 용의자로 잡힌 당시 19살 윤동일 씨. 윤 씨는 3개월간 조사 끝에 허위 자백을 했지만 유전자 검사에서 범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기사 [4] # [5]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일으킨 기간은 1986년 9월 ~ 1991년 4월 [6] 처제 살해까지 포함하면 그에게 살해된 희생자는 총 15명이다. [7] 유영철이 20명을 살해해 5명 더 많다. [8] 화성시 진안동. 대체로 '병점'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9] 이춘재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10] 유급한걸로 보인다. 본래 빠른 1963년생이면 1981년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11] 그것이 알고싶다 1185회에 등장한 이춘재의 경찰조서 내용 [12]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13] 청주 처제 살인사건과 강도 예비 사건을 제외한 23건의 사건은 모두 공소시효가 지나 검찰에서 ‘공소권 없음’ 처분되었다. [14] 전문가들은 이것이 연쇄 강간만 저지르던 이춘재가 저지른 첫 살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15] 현재 화성시 진안동 북부(논밭 일대). [16] 현재 화성시 안녕동 140-5 성우교차로 일대. [17] 현재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 관항교차로 인근 논밭 일대. [18] 현재 화성시 황계동 수원 공군기지 남측 논밭 일대. [19] 화서역 1번 출구 인근으로 추정. [20] 현재의 진안동 다람마을월드메르디앙1차아파트 일대. [21] 현재 화성시 병점동 - 능동 구봉산 일대 [22] 김 양의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춘재의 자백에 근거한다. [23] 강도 미수사건의 대한 화풀이+ 등화관제로 인한 목격자 부재+ 피해자가 범인인 자신이 제압하기 쉬운 여중생이라는 시너지로 인해 가장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24] 오후 8시쯤 청주시 남주동의 한 셋방에서 주부 김모(29세, 여) 씨가 살해당한 것을 남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김모 씨는 공업용 테이프로 눈이 가려져 있었고 스타킹이 입에 물려져 있었으며 양쪽 가슴에는 흉기에 찔린 상처도 있었다. 경찰은 금품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점과 김씨의 방어흔이 없는 점, 범행에 사용된 도구 일체가 집 안에 남아 있는 점 등을 볼 때 면식범의 소행으로 추점하고 범인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몇몇이 명확한 알리바이를 제시한 데다가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면서 오랜시간 미제로 남아있었다. [25] 현재 동탄국제고등학교 후문 인근. [26]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시골에 거주했던 학생들은 걸어서 1시간을 통학할 정도였으니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이춘재 입장에서 5km내 도보로 배회하면서 범행을 저지르는 것은 큰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27] 해외에서도 연쇄살인범들이 여자를 사귀는 기간에는 범행을 중단한 사례들이 꽤 있다. 결혼과 출산이 범죄를 중단할 이유가 될수 있다는 것. [28] 배우자나 연인에게 심한 폭력을 가하는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소유욕이나 지배욕을 채우려는 방식 중 하나다. 이영학은 아내의 몸 전체에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문신으로 새기라고 했다. 일본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마츠나가 후토시도 비슷했다. [29] 인터뷰 기사 이게 화성 연쇄살인범으로 지목된 것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처제 살인사건으로 체포됐을 당시 심정을 말하는 것인지는 불명이다. [30] 이춘재의 어머니는 사건 전에 입은 골절상으로 입원 중이었는데 이후 언론을 피해 21일 병원을 옮겼다. 경찰은 모친이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인 있는 데다 주변 사람들에게 협박성 피해를 입었다는 제보까지 들어와 신변 보호 후 상담까지 고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 [31] 프로파일러 펫 브라운 박사는 현장 자료를 보고 "이 사건은 살인 경험이 없던 강간범이 벌인 첫 살인 사건이다"라고 분석했다. [32] 피해자는 정 아무개 씨이며 당시 38세 정도로 추정됨. [33] 범인이 피해자를 강간 후 돈을 뺏기 위해 피해자의 가방을 찾으러 간 사이 반대 방향으로 질주해 도망쳤다. 이 사건 이후 벌어지는 3차 연쇄살인사건에서 여성의 음부 훼손이 시작되고 있는데 피해자를 놓치는 실수를 한 이후 피해자에 대한 분노가 반영 된 심리가 이러한 행동으로 연결 된 것으로 추정된다. [34] 5차 사건 이후 언론의 보도로 국민적 주목을 받고 대대적인 수사진이 꾸려졌다. [35] 입에 재갈이 물리고 손이 결박된 채로 발견되었기에 화성 사건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기도 했으나, 이 사건이 발생한 화서역은 연쇄살인이 벌어진 화성시 태안읍과 상당히 떨어져 있기에 해당 사건의 범인은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 이춘재가 6차 사건 이후 경찰 조사를 받은 뒤 불안감을 느껴 장소를 옮겨 범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36] 버스 기사였던 강원식씨는 범인의 얼굴에 대해 "눈은 옆을 쪽 째지고 눈썹은 범 눈썹으로 해서 진했고 얼굴은 좀 길고 코가 좀 크고"라고 증언. 몽타주 참고파일:external/cfs12.blog.daum.net/4815ab2b6ef07&filename=wh65.jpg [37] 모발에서 티타늄이 나왔다는 것이 증거였다. 이후 이춘재는 이 사건 또한 본인이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 끝에 재심을 거쳐 윤 씨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38]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강도예비 폭력 사건에 대한 분노 + 목격자 부재 + 대상자가 20대 남성인 자신이 제압하기 쉬운 여중생이라는 3가지가 시너지를 일으켜서 제일 참혹한 비극이 되었다"고 추측했다. [39] 오후 8시쯤 청주시 남주동의 한 셋방에서 주부 김모(29세, 여) 씨가 살해당한 것을 남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김모 씨는 공업용 테이프로 눈이 가려져 있었고 스타킹이 입에 물려져 있었으며 양쪽 가슴에는 흉기에 찔린 상처도 있었다. 경찰은 금품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점과 김씨의 방어흔이 없는 점, 범행에 사용된 도구 일체가 집 안에 남아 있는 점 등을 볼 때 면식범의 소행으로 추점하고 범인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몇몇이 명확한 알리바이를 제시한 데다가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면서 오랜시간 미제로 남아있었다. [40]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41] 4월 23일 오전 8시 20분쯤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옛 청원군) 학천교 경부고속도로 확장 공사장에서 20~30대로 보이는 여성이 숨져 있는 것을 한 포크레인 기사가 신고했다. 30~40㎝ 깊이 땅속에서 발견된 여성은 알몸이었고 양손에는 스타킹이 묶여 뒤로 결박되어 있었으며 얼굴 곳곳에 둔기에 맞은 상처가 있었다. 폐의 상태로 봤을 때 하루 담배 1갑 이상을 피워 온 것으로 추정되었고 유흥업소 종사자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면서 수사에 나섰지만 피해자의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했고 결국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42] 4월 18일 오전 8시 30분쯤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의 한 음식점 주차장에서 이모(34세, 여) 씨가 숨져 있는 것을 지나가던 시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모 씨는 머리에는 둔기에 가격당한 상처가 있었고 머리 옆에는 벗겨진 하의가 놓여 있었다. 당시 시체를 검안한 의사는 두개골 파열을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했고, 사망 시간은 4월 18일 오전 12시로 추정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신발 한 짝과 핸드백 등을 증거물로 확보하고 이 여성이 일하던 유흥업소 단골손님 중 1명이 범인일 것으로 추정했으나 수사에 진전을 보이지 못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43] 6월 25일 오후 5시 30분쯤 청주시 복대동 건물 안방에서 가정주부 이모(28세, 여) 씨가 숨져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모 씨는 전화줄에 목이 졸려 있었고, 머리에는 4㎝ 정도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하의는 벗겨져 있었지만 성폭행 흔적은 없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경찰은 이를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당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사건 현장에서 나갔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해 피해자와 남편 등 주변인을 중심으로 수사했지만 끝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 [44] 이춘재는 독실한 불교신자이다. [45] 이춘재 본인이 수사 마무리 시점에 원래 있었던 부산교도소로 돌아가기 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46] 스마트폰은커녕 피쳐폰도 없었던 시절부터 옥살이를 했고, 어차피 교도소에서 바깥 세계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수단은 신문 아니면 TV뿐이다. [47] 과거 동료 재소자였다고 주장한 사람이 이춘재가 살인의 추억을 본 적이 있다고 언급한 적은 있다. [48] 몸싸움한 흔적 등 계획적으로 살의를 품고 한 행동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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