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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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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33333><tablebgcolor=#ffffff,#191919><bgcolor=#000000>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
||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
(개구리 소년 사건)
* 해결된 사건

화성 연쇄살인 사건 화성 연쇄살인 외 사건
사건 내용 ( 8차 사건)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 ·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 · 청주 처제 살인사건 ·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colbgcolor=#000><colcolor=#fff> 이춘재
李春在 | Lee Choonjae
{{{#!wiki style="margin:-16px -11px;word-break:keep-all;font-size:0.8rem;" 1983년 2019년
파일:이춘재 졸업사진.jpg
파일:이춘재.png
}}}
출생 1963년 1월 31일 ([age(1963-01-31)]세)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1][2]
(現 경기도 화성시 진안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청룡국민학교 (1976년 졸업, 27회)
안용중학교 (1980년 졸업)[3]
삼일실업고등학교 (1983년 졸업)[4]
신체 173.1cm, 71.2kg, O형[5]
병역 육군 제1기갑여단 병장 전역
종교 불교
가족 모친(1943년생), 남동생
아내, 슬하 1남(1991년생)
범죄 및 형량 연쇄살인, 강간살인[6], 연쇄강간, 강도예비
무기징역[7][8]
범행 기간 1986년 2월 ~ 1994년 1월[9]
인명피해 15명 살해
수감 부산광역시 강서구 부산교도소

1. 개요2. 생애3. 사건 목록4. 이춘재의 행적과 비교해 본 사건 시간표5. 영화 살인의 추억이 범인을 맞혔다?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연쇄살인범, 연쇄강간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다. 이 사건들을 비롯한 살인 행각으로 총 15명을 살해한 그가 검거된 후 이 사건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세계적으로 한국판 조디악 킬러, 잭 더 리퍼로 불렸던 인물로, DNA 분석기술 발달에 힘입어 2019년에 용의자로 특정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총 10차에 걸쳐 일어났다고 알려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은 10차의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못했고 8차 사건은 모방범으로 부정확하게 수사가 종결 나는 등 당시 대한민국 과학 수사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미제사건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2019년 10월 1일 모방범으로 확정되었던 8차 사건을 포함해 화성 연쇄살인 사건 10차 모두 이춘재 본인이 저질렀다고 자백하였으며 그 외 4건의 살인 사건을 합쳐 총 15건[10]의 연쇄 살인과 30여 건의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경찰에 자백했다. 강호순, 유영철, 정남규 등 그동안 붙잡힌 연쇄살인범과 비교할 때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은 아니나[11] 가장 범행 기간이 긴 범죄자이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10건 중 이춘재의 DNA가 발견된 사건은 5건(3차, 4차, 5차, 7차, 9차)다. 그 외 검사했으나 발견되지 않은 사건은 2건(2차, 10차), 증거물 부족 등의 이유로 검사가 불가능한 사건은 2건(1차, 6차), 유일하게 용의자가 잡힌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본인이 자백하여 재심이 이루어졌고 기존의 무고한 사람도 무죄 판결이 나왔으며 8차 사건 수사 당시 증거 조작,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이춘재의 상세한 자백(범인만이 알 수 있는 사실 등 자백) 등으로 결국 8차 사건도 모방 범죄가 아닌 이춘재가 저지른 것으로 결론났다.

2020년 12월 28일 이춘재가 저지른 사건 중 처벌받지 않은 살인 14건과 성범죄·강도 등 9건에 대한 혐의가 모두 인정되었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되었다. 사실상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확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 셈.

사이코패스 검사에서 상위 65~85%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았다. 경찰의 재수사 초기, 피해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등 반성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 모든 범행동기를 피해자에게 전가했다. 또 피해자가 겪었을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범행을 과시하고 그것으로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욕구해소와 그 욕구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가학적인 형태의 범행을 저질렀으면서, 자신의 교도소 생활과 건강만을 걱정하는 등 이중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모습을 보였다.

4번째 조사 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모든 범행을 자백했으나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수십차례에 걸친 프로파일러 면담 결과를 토대로 이춘재의 범행 동기를 ‘변태적 성욕 해소’로 판단했다.

2. 생애

2.1. 내력과 초기

파일:1572740169799090.jpg
중학생 시절의 이춘재
파일:춘재.png
고등학생 시절의 이춘재

이춘재는 1963년 1월 31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12]에서 태어나 30년간 근방에서 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착하고 조용한 아이로 기억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춘재를 착하고 대답도 잘 하고 성품도 좋은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동창들 역시 이춘재를 매우 착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싹싹하고 인사성도 밝은 아이였다고 기억했다. 부모와 남동생 역시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였으며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가족들은 이춘재가 저지른 처제 살인사건도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
이춘재는 꽤나 암울한 유년기를 보냈었다. 원래는 그의 아버지가 가부장적인 성격이였으나 국민학교 시절 동생이 물에 빠져 익사한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적이 있으며 이 사건 이후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그를 강압적인 방식으로 교육을 했던 탓에 이때부터 이춘재는 성질을 죽이고 살았었다. 이춘재의 주장에 따르면 어릴적 동네 누나에게 성폭행을 당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그가 동네를 지나가는데 동네 누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만약 사실이라면 이런 성경험으로 인해 왜곡된 성욕 생긴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부모가 이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알았는지는 미지수다. [13] 그리고 [14] 그의 부모가 사실을 알았더라도 아버지는 이미 가부장적인 이에게 강압적으로 바뀐지라 만약에 진짜 알았더라도 “네가 어떤 잘못을 했겠지”라며 일을 대충 떠넘겼을테고 그의 어머니 또한 이춘재와 성격이 비슷했던지라 그의 어머니도 방금 말했던 한 부모처럼 ”여자가 남자 성기를 만질수도 있지“ 라며 정신이 나간 망언을 뱉었을거라고 일부 네티즌들이 추측을 하고 있다. 수원시에 있는 삼일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해 1983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5]

2.2. 군 복무 시기

파일:2019100720273640228.png
파일:201910151603236608_t.jpg
군 복무 시절의 이춘재

이춘재는 본디 내성적인 성격이였는데 1983년 중순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해 군대에서 제1기갑여단에서 조종수로 복무하면서 전차를 몰며 성취감을 얻으면서 성격이 변한걸로 보인다. 자기가 모는 전차가 선도하면서 뒤로 다른 전차와 보병들이 따라오는걸 보고 희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평생 자신의 인생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가 군에서 처음으로 성취감과 주체적인 역할을 경험하게 된걸로 분석이 됐다. 심지어 전차 정비 등 검열을 위해 휴가를 반납할 정도였다고. 분명 말뚝 박으라는 제안도 있었을텐데.... # 1986년 1월 23일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을 했다. 그리고 전역 이후 단조로운 생활에 무료함을 느꼈다고 한다.

2.3. 전역 이후

전역 후 화성군의 전기부품회사에 근무했다. 이후 행적 추적에 따르면 전역 직후 1986년 초부터 화성에서 무차별 강간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고 1986년 하반기에 처음 살인을 했다. 이후 화성 연쇄살인 사건 및 추가 범행들을 저질렀다. 범행에 대해서는 아래 단락의 해당 문서들에 자세히 쓰였지만 요약을 하자면 범행기간은 1986년 9월부터 1994년 1월까지다. 1986년에만 4건을 저질렀고 1991년까지는 범행을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피해자의 나이는 9살 어린이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하다.

어린 시절 억눌렸던 자아가 군 복무 시절 기갑부대에서 탱크를 모는 등 성취감을 느낀걸 계기로 풀리면서 그동안 채워놨던 마음의 ‘걸쇠’를 풀어버렸다는게 경찰의 분석이다. 이후 성적 욕구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범행을 시작했고 점차 잔혹하고 가학적 사이코패스형 범죄자가 됐다. 처음부터 살인을 목적으로 한게 아니라 성욕 해소를 위해 범행에 착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저항해 첫 살인을 저지른 이후부터 성폭행을 하고 늘 살인을 하는 연쇄살인자로 돌변했다. #

1990년 초여름경에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 본사를 두고 있는 모 건설주식회사(건설하도급업체)에 들어가 포크레인 기사를 따라다니다가 운전을 배워 면허 없이 포크레인 기사로서 공사현장을 따라다녔다.[16]

1991년 전후에는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17]의 한 골재회사에서 포크레인 기사로 근무를 했으며 그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던 아내를 만나 1992년 4월에 결혼을 했다. 결혼 이후 다니던 회사가 망하자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책임을 졌다고 한다. 처제 살인 사건으로 조사를 받을때의 경찰 조서에는 " 1993년 3월 말에 청원군 부용면에 있는 부강농공단지현장에서 일하다가 그만 두고 현재까지 놀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2.4. 처제 살인

결혼과 아들 출생 등의 일을 거치며 한동안 '냉각기' 즉 범행을 저지르지 않던[18] 그는 1994년 1월 다시 재범을 저질렀다. 처제를 성폭행을 저지른후 살해를 저질렀다. 경찰이 각고의 노력 끝에 이춘재의 집 세탁기 받침대에서 혈흔을 발견했고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DNA 분석/대조 기술을 근거로 그것이 피해자의 혈흔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검거 후 혐의 부인, 사건의 잔인성을 근거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청주 처제 살인사건 항목 참고.

2.4.1. 상세

처가와도 평소 원만한 관계였으며 처가가 있는 청주시로 버스를 타고 가 농사를 하는 장인어른의 일손을 거들고 처제들이 이춘재의 집에 반찬을 들고 찾아가는 등 친족 간의 교류도 원활했다고 한다. #

하지만 재판 기록에서 보인 그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청주 처제 살인사건 당시 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춘재는 2살짜리 아들을 피멍이 들 정도로 두들겨 패고 아내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아내가 하혈할 정도로 마구 폭행했다고 한다. 당시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이춘재에게 심한 성도착증도 있었으며 아내에게 강간을 해서 아내가 훗날 울면서 형사에게 알렸을 정도였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는 1993년 12월 집을 나갔으며 이춘재는 아내에게 협박 전화를 걸고 동서에게 "아내와 이혼은 하겠지만 다른 남자와 재혼도 할수 없게 문신을 새기겠다."[19]는 말도 했다고 한다. 처제 살인사건 당시 판결을 보면 '한번 화나면 부모가 말리지 못할 정도로 포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가족들이나 지인들의 진술과는 상반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가 교도소에 수감이 된후 말썽 한번 안 부리고 모범수로 지냈다는걸 고려하면 위계질서에 철저히 순응하는 성격이였던걸로 보인다. 즉 자신보다 명백히 위거나 동등한 지위인 가족들과 지인, 경찰, 교도관들 앞에서는 얌전히 지냈지만 자신보다 명백히 아래로 규정된 사람에게는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게 대했다는것.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단순히 착한 사람이 화내면 무섭다 정도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경찰 관계자들이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지목한 점은 이춘재는 범행 이후에도 반성이 없었으며 잡힐때마다 끝까지 혐의를 부인만 해댔다는 점이다. 처제의 시체를 유기한 다음 날 장인어른을 찾아가 "도와드릴 일 없냐"는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실종 신고를 냈으며 조사 과정에서도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다 혈액이 발견되고 범행을 자백했으나 이후에 다시 "경찰관들이 고문해서 어쩔수 없이 한 허위 자백"이라고 말을 바꿔 재판을 3심까지 끌고 갔다. 강도 혐의로 체포가 됐을 당시에도 이춘재는 흉기와 목장갑을 들고 집안에 침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남자가 나에게 갑자기 폭행을 했고 이 때문에 집에 우연히 들어갔지 강도질을 하려고 들어가지 않았다."는 억지스런 주장을 했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는 이춘재가 초범이였고 실제 피해자의 피해는 미미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여 이춘재를 집행유예로 석방을 시켰다. 성폭행 또는 성폭행 결합 살인을 저질러 왔던 이춘재에게 단순 강도는 이질적 범행이기에 이것도 원래는 성폭행 목적의 주거침입이였던걸로 보는 견해도 있다.

2.5. 화성 연쇄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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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8일 경찰은 청주시에서 1994년에 처제를 강간하고 살해해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라고 발표했다. 조사 결과 5차( 1987년), 7차( 1988년), 9차( 1990년)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가 이춘재의 DNA와 같았기 때문이다.

경찰은 구체적인 신상 공개를 하지 않았지만 1994년 청주에서 위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1명뿐이라 언론을 통해 실명과 정보가 밝혀졌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범죄자의 신상공개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1일 자백을 하면서 무려 30년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밝혀졌다. 그가 자백을 했던 시점에는 이미 공소시효 만료가 됐기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춘재를 처벌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그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건이 밝혀지기 전에 이미 다른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에 처해졌으므로 사실상 가석방을 평생 불허함으로써 죄값을 받게 할수 있게 되었다.

2019년 10월 14일 기준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경찰이 입건을 검토했으며 정식 신상공개 검토를 한걸로 들어갔다.

2.6. 화성 연쇄살인 이외의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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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근황

2020년 7월 2일 경찰의 재수사가 종료되었고 #, 이춘재는 7월 5일 수원구치소에서 부산교도소로 옮겨와 독거실에서 지내게 되었다.[20]

부산교도소 측에 따르면 이춘재는 재수사 후 특별히 변화되거나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으며 건강 상태는 양호하고 운동·취침 등 통상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주로 TV 시청[21]으로 하루를 보내는데 뉴스는 거의 보지 않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주로 시청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만 교도소 측은 그의 심적 변화를 우려하여 재수사 결과가 발표될 때는 운동 시간을 편성하는 식으로 TV 시청을 제한했다. 관련 기사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피해자의 오빠가 이춘재와의 접견을 신청했고 이춘재가 이를 수락해서 최초로 유족과의 접견이 이루어졌다. 이춘재는 의외로 유순하고 협조적인 태도였다고 한다. 피해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모르겠으며 그 날 자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며 안타깝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어이없고 화가 나는 대답이지만 본인은 솔직한 대답을 한 것으로 보인다.

2020년 11월 2일 8차 사건 재심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영화 살인의 추억을 교도소에서 봤다고 밝혔다.[22] 보고 특별히 느낀 점은 없었고 일반적인 영화라고 생각했으며 비가 오면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한다는 부분 등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아 신경 써서 보지 않았다고 한다. # 또 자신을 대신해 누명을 쓰고 20년간 옥살이 후 출소한 윤모씨에게도 사과했다.

3. 사건 목록

<rowcolor=#eee,#111> 구분 일시 피해자 및 정황 죄목 기타
1 1986년 2월 8일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 성폭행 화성 연쇄강간
1차 사건
2 1986년 3월 20일 성폭행 화성 연쇄강간
2차 사건
3 1986년 4월 3일 성폭행 화성 연쇄강간
3차 사건
4 1986년 4월 25일 성폭행 화성 연쇄강간
4차 사건
5 1986년 5월 8일 성폭행 화성 연쇄강간
5차 사건
6 1986년 5월 14일 성폭행 화성 연쇄강간
6차 사건
7 1986년 7월 성폭행 화성 연쇄강간
7차 사건
8 1986년 9월 14일
21:00(추정)[23]
1986년 9월 15일
06:20(추정)[24]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이모 씨(72)가 귀가하다 피살 살인 화성 연쇄살인
1차 사건
9 1986년 10월 20일
22:00(추정)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에서 박모 씨(26)가 집으로 돌아가려 버스를 타러 가다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2차 사건
10 1986년 11월 30일
22:30(추정)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성당 인근에서 김장을 돕던 김모 씨(36)가 귀가 중 폭행당하고 논밭으로 끌려갔다가 탈출 폭행
납치
11 1986년 12월 12일
23:00(추정)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축대에서 권모 씨(25)가 귀가 중 집 앞에서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3차 사건
12 1986년 12월 14일
23:00(추정)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 논둑에서 이모 씨(22)가 버스에서 내린 뒤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4차 사건
13 1987년 1월 10일
20:50(추정)
화성시 태안읍 황계리 논에서 홍모 양(18)이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5차 사건
14 1987년 5월 2일
23:00(추정)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박모 씨(29)가 남편의 (우산 소지) 마중 가다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6차 사건
15 1987년 12월 24일 수원시 팔달구 화서역 인근에서 김모 양(18)이 피살 살인
성폭행
16 1988년 9월 7일
21:30(추정)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안모 씨(54)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7차 사건
17 1988년 9월 16일
02:00(추정)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 주택에서 박모 양(13)이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다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윤모 씨(당시 22세)가 검거되었으나 이춘재의 자백 후 윤성여 씨는 32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고 무죄 선고됨
18 1989년 7월 7일 화성시 태안읍에서 김모 양(9)이 실종 살인
성폭행[25]
19 1989년 9월 26일 이춘재가 수원시 권선구의 주택에 흉기를 소지하고 침입했다가 검거됨. 강도예비 구속되었다가 1990년 4월 19일 열린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 후 풀려남.
20 1990년 11월 15일
18:30(추정)
화성시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김모 양(14)이 귀가 중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9차 사건
21 1991년 1월 26일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공사 현장에서 박모 양(17)이 피살. 살인
성폭행
박모 군(19)이 용의자로 체포되었으나 증거부족으로 무죄판결.
22 1991년 1월 26일
20:30(추정)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공사 인근에서 약을 사서 귀가하던 김모 씨(32)가 배수로로 납치되어 결박당했다가 결박을 풀고 탈출. 납치 납치 당시 배수로에 이미 납치당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했고 그녀는 위의 사건의 박모 양으로 추정.
23 1991년 4월 3일
21:00(추정)
화성시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권모 씨(69)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살인
성폭행
화성 연쇄살인
10차 사건
24 1992년 6월 24일 청주시 복대동에서 가정주부 이모 씨(28)가 피살. 살인
성폭행
이 사건이 아닌 1991년 3월 7일에 일어난 청주 남주동 가정주부 피살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25 1994년 1월 13일 청주시 복대동에서 이춘재의 처제 이모 씨(19)가 피살 살인
성폭행
이춘재의 자택에서 피해자의 혈액이 발견되어 구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무기징역 선고받음.
{{{#!wiki style="margin: -10px 0 -6px; display: inline-flex"
 
}}}: 이춘재가 저지른 것이 확정된 사건 / {{{#!wiki style="margin: -10px 0 -6px; display: inline-flex"
 
}}}: DNA 등의 유력한 증거가 발견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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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춘재의 행적과 비교해 본 사건 시간표

||<tablebgcolor=#f5f5f5,#1a1a1a><rowbgcolor=#333,#ddd><rowcolor=#eee,#111><width=90> 날짜 ||<-2> 사건 ||<width=45%> 이춘재 행적 및 관련성 ||
<colbgcolor=#fff,#000> 1983년 중순 - 군 입대. 대략 20세
1986년
1월 - 군 전역. 대략 23세
2월 8일 화성군 태안읍 일대 연쇄 강간 사건 1차, 발생 장소: 진안리.[26] 이춘재 진안리 거주
3월 20일 2차 -
4월 3일 3차 -
4월 25일 4차 -
5월 8일 5차 -
5월 14일 6차 -
7월 7차 -
9월 15일 1차 살인
피해자가 저항한 흔적이 있음. 프로파일러 펫 브라운 박사는 현장 자료를 보고 "이 사건은 살인 경험이 없던 강간범이 벌인 첫 살인 사건이다"라고 분석했다.
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출퇴근길 근처
10월 20일 2차 살인 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출퇴근 길 근처
11월 30일 범행 미수 생존자 발생. 진안리. 이때 당시 피해자가 거름통에 빠지자 범인이 더럽다며 도망감.[27] 이춘재 진안리 거주
12월 12일 3차 살인 피해자가 다니던 회사가 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옆이었음.
이춘재 DNA 확인.
12월 14일 4차 살인 피해자가 다니던 섬유회사(지금은 레미콘 회사)가 이춘재가 다니던 전기부품회사 옆이었음. 이춘재 DNA 확인.
1987년
1월 10일 5차 살인 이춘재 DNA 확인.
5차 사건 이후 언론의 보도로 국민적 주목을 받고 대대적인 수사진이 꾸려짐.[28] -
5월 2일 6차 살인 이춘재 집 근처
7월 - 1986년 8월 발생한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가 이춘재라는 주민의 제보를 받아 이춘재 조사받음
12월 24일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
수원시 화서역 여고생 김모 피살.[29]
이춘재는 수원 소재 고등학교를 졸업했음.
1988년 이후
1988년 9월 7일 7차 살인
용의자가 수원행 막차 버스를 탐. 버스 기사였던 강원식은 범인의 얼굴에 대해 "눈은 옆을 쪽 째지고 눈썹은 범 눈썹으로 해서 진했고 얼굴은 좀 길고 코가 좀 크고"라고 증언.[30]
25세 정도로 추정.
이춘재 DNA 확인.
과거 수원 S고등학교를 다녔음.
1988년 9월 16일 8차 살인
진안리 피해자 집안.
현장에서 발견된 모발에서 티타늄 검출. 경찰은 모방 범죄라며 주민 윤 씨를 범인으로 체포[31], 윤 씨는 범행을 부인
티타늄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검출될 가능성이 있다. 이춘재도 전기부품회사 공장에서 일했다.
사건 발생 장소인 진안리에 이춘재 거주.
1989년 7월 3일 수원시 권선구 오목천동 여고생 살인사건. 오목천동 601번지 농수로에서 발견. # 이춘재 집에서 약 6km 거리
1989년 9월 26일 -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 강도예비 및 폭력 사건으로 구금
1990년 4월 19일 - 이춘재 풀려남
1990년 11월 15일 9차 살인[32]
피해자 김모(14)
이춘재 DNA 확인.
1991년 1월 26일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
가경동 택지공사 현장에서 발견.
이춘재는 정황상 이 시기에 이미 청주와 화성의 왕래가 잦았을 가능성이 있음. # 청주 장기 미제사건 중 1번째 사건이다.
1991년 1월 26일 청주 부녀자 납치사건
가경동 택지공사 현장으로 납치 된 피해자가 탈출
납치 피해자가 자신 외에 이미 납치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했고 위의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의 피해자로 추정.
1991년 3월 7일 3월 7일 오후 8시쯤 청주시 남주동의 한 셋방에서 주부 김모(29세, 여) 씨가 살해당한 것을 남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김모 씨는 공업용 테이프로 눈이 가려져 있었고 스타킹이 입에 물려져 있었으며 양쪽 가슴에는 흉기에 찔린 상처도 있었다. 경찰은 금품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점과 김씨의 방어흔이 없는 점, 범행에 사용된 도구 일체가 집 안에 남아 있는 점 등을 볼 때 면식범의 소행으로 추점하고 범인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몇몇이 명확한 알리바이를 제시한 데다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면서 이 사건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범행 시기와 수법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춘재가 말한 가정주부 사건을 이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청주 장기 미제사건 중 2번째 사건이다.
1991년 4월 3일 10차 살인 -
1991년 7월 - 이춘재 결혼. #
결혼 상대 여성은 청원군 부용면[33]에 있는 골재회사의 경리였음. 따라서 이춘재는 이전부터 청주에 왕래가 잦았던 것으로 보임. 이 시기를 전후로 이춘재는 그녀가 근무하는 골재회사에 포크레인 기사로 취직했는데 취직이 먼저인지 여성과의 교제가 먼저인지는 확인 필요.
1992년 초반 4월 23일 오전 8시 20분쯤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옛 청원군) 학천교 경부고속도로 확장 공사장에서 20~30대로 보이는 여성이 숨져 있는 것을 한 포크레인 기사가 신고했다. 30~40㎝ 깊이 땅속에서 발견된 여성은 알몸이었고 양손에는 스타킹이 묶여 뒤로 결박되어 있었으며 얼굴 곳곳에 둔기에 맞은 상처가 있었다. 폐의 상태로 봤을 때 하루 담배 1갑 이상을 피워 온 것으로 추정되었고 유흥업소 종사자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면서 수사에 나섰지만 피해자의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했고 결국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이춘재는 포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청주 장기 미제사건 중 3번째 사건이다.
1992년 4월 18일 4월 18일 오전 8시 30분쯤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의 한 음식점 주차장에서 이모(34세, 여) 씨가 숨져 있는 것을 지나가던 시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모 씨는 머리에는 둔기에 가격당한 상처가 있었고 머리 옆에는 벗겨진 하의가 놓여 있었다. 당시 시체를 검안한 의사는 두개골 파열을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했고, 사망 시간은 4월 18일 오전 12시로 추정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신발 한 짝과 핸드백 등을 증거물로 확보하고 이 여성이 일하던 유흥업소 단골손님 중 1명이 범인일 것으로 추정했으나 수사에 진전을 보이지 못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청주 장기 미제사건 중 4번째 사건이다.
1992년 6월 24일 6월 25일 오후 5시 30분쯤 청주시 복대동 건물 안방에서 가정주부 이모(28세, 여) 씨가 숨져 있는 것을 주민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모 씨는 전화줄에 목이 졸려 있었고, 머리에는 4㎝ 정도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하의는 벗겨져 있었지만 성폭행 흔적은 없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경찰은 이를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당시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사건 현장에서 나갔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해 피해자와 남편 등 주변인을 중심으로 수사했지만 끝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 청주 장기 미제사건 중 5번째 사건이다.
1992년 청주 일대 연쇄 살인 사건 언론 보도. 당시 언론에서 "3개월 동안 살인사건 4건, 해결 기미 감감"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이춘재는 청주에서 살고 있었다.
1992년 - 이춘재 아들 태어남
1993년 4월 - 서류상 주소지를 화성에서 청주로 옮김. 하지만 실제 청주에 거주한 시기는 1990년~ 1991년으로 추정된다. #
1994년 1월 - 처제 살인, 체포 수감

5. 영화 살인의 추억이 범인을 맞혔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2003년 영화 < 살인의 추억>에서 작중 용의자로 지목된 박현규( 박해일 분)의 신상이 전부 상상에 기반했음에도 실제 이춘재와 비슷한 점이 많아 주목을 받았다. 닮은 점들은 다음과 같다.
다만 진범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만든 영화다 보니 영화에서 묘사한 박현규와 실제 이춘재와의 차이점도 당연히 상당수 있다. 차이점에 대해서는 문서 참조.

그러나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 의하면 박현규의 실제 모델이 된 사람은 이춘재가 아닌 다른 용의자였고 1997년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 <살인의 추억> 문서의 해당 단락 참조. 영화에서도 박현규가 처음 수사를 받을 때 "당신들이 죄 없는 사람들 족치고 다니는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 난 절대로 그렇게 안 당해" 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용의선상에 오른다는 것은 추정되는 범인의 특징과 유사점이 있는 인물이므로 상당 부분 일치하는 내용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참고로 이춘재는 본인도 교도소에서 이 영화를 시청한 바 있다고 밝혔다.

[1]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된 건 2001년이며, 태안읍이 동으로 승격 및 분동된 건 2006년이다. [2] 출처 [3]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8차, 9차 사건의 피해자들이 이 학교를 다녔으며 9차 사건의 피해자인 김 양은 당시 나이가 만 13세로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피해자 나이 만 8세)을 제외하면 8차 사건 피해자인 박 양과 같은 나이로 피해자들 중 가장 어리다. [4] 이춘재는 빠른 1963년생으로 정상 졸업 시 1981년 졸업하여야 하나 유급으로 인해 2년 늦게 졸업한 것으로 보인다. [5] 이춘재 <2019년 9월 26일 부산교도소 보안과 조사실> "유일하게 술을 먹고서 한 사건입니다. 대문이 열려있어 들어갔습니다. 방안에 새 속옷이 있어 피해자에게 입혔습니다. 담을 넘어 들어갔고, 혈액형이 B형이었다는 당시 경찰의 수사내용 전부,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진범의 혈액형이 O형이었음에도 애꿎은 B형 용의자들만 4만명 넘게 조사했던 겁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건 윤성여 씨 뿐이 아닙니다. 9차 살인 용의자로 잡힌 당시 19살 윤동일 씨. 윤 씨는 3개월간 조사 끝에 허위 자백을 했지만 유전자 검사에서 범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기사 [6] # [7] 1994년 자신의 처제를 강간하고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원래 1,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계획 살인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며 파기환송했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8]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가석방될 가능성이 없어졌다. 이 자가 무기수로 수감 중이었다는 게 그나마 천운이라고 할 만한데 만약 이 자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면 당시 사회 분위기상 아마도 수년 안에 집행되었을 것이다. 이 자가 죄값을 치르고 죽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여죄는 끝내 미궁속에 빠졌을 것이며 윤성여씨의 억울함도 영원히 밝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만약 이 자가 유기징역을 선고받았다면 공소시효가 지나 버린 여죄의 처벌은 불가능하기에 형기 종료 후 석방되는 것을 막을 길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이 자가 무기수로 수감 중이었기에 추가 처벌은 불가능할지라도 적어도 여죄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고 가석방 불허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가중처벌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9]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일으킨 기간은 1986년 9월 ~ 1991년 4월 [10] 처제 살해까지 포함하면 그에게 살해된 희생자는 총 15명이다. [11] 유영철이 20명을 살해해 5명이나 더 많다. [12] 화성시 진안동. 대체로 '병점'이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13] 하지만 예전부터 문제가 있는데 남자가 여자를 성폭행할 경우 대다수의 부모가 대수롭게 여기고 곧장 112에 신고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가 남자를 성폭행 할 경우 이 과정 중 대다수의 부모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 사건을 그냥 떠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한 부모는 “여자가 남자 성기를 만질수도 있지 뭐 그렇게 대수롭게 여기냐” 라며 정신이 나간 망언을 뱉은적도 있다고 한다. 대체 한국의 부모는 왜 남자가 여자를 성폭행하면 성폭행을 당한 여자만 엄청 도와주고 여자가 남자를 성폭행하면 성폭행을 당한 남자만 나무라고 왜 이렇게 그냥 방관하고 넘어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14] 언제나 추측이지만 [15] 유급한걸로 보인다. 본래 빠른 1963년생이면 1981년 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16] 그것이 알고싶다 1185회에 등장한 이춘재의 경찰조서 내용 [17]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18] 해외에서도 연쇄살인범들이 여자를 사귀는 기간에는 범행을 중단한 사례들이 꽤 있다. 결혼과 출산이 범죄를 중단할 이유가 될수 있다는것. [19] 배우자나 연인에게 심한 폭력을 가하는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소유욕이나 지배욕을 채우려는 방식 중 하나다. 이영학은 아내의 몸 전체에 입에 담을수 없는 말들을 문신으로 새기라고 했다. 일본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마츠나가 후토시도 비슷했다. [20] 이춘재 본인이 수사 마무리 시점에 원래 있었던 부산교도소로 돌아가기 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21] 스마트폰은커녕 피쳐폰도 없었던 시절부터 옥살이를 했고, 어차피 교도소에서 바깥 세계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수단은 신문 아니면 TV뿐이다. [22] 과거 동료 재소자였다고 주장한 사람이 이춘재가 살인의 추억을 본 적이 있다고 언급한 적은 있다. [23] 이춘재 주장 [24] 피해자의 딸 주장 [25] 다만 경찰이 시신을 폐기했기 때문에 성폭행 사실은 이춘재의 자백에만 근거한다. [26] 범죄 프로파일러인 펫 브라운 박사는 연쇄 강간 사건과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은 동일범이라며 "저에게 범인이 어디 사는지 지목하라고 한다면 처음 강간당한 여자가 사는 곳 근처라고 말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실제 이춘재는 사건 발생 장소인 태안읍 진안리에 살고 있었다. [27] 피해자는 정 아무개 씨이며 당시 38세 정도로 추정됨. 발생 날짜가 11월 19일이라고도 한다. 이후 3차 사건부터 결박 + 재갈이 기본적으로 나온다는 걸 생각하면 당시 미수자가 도망간 후 그 다음부터 범행 대상자를 제압하기 위해서 결박 + 재갈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28] 만약 이춘재가 범인이라면 6차에서 시신에 결박이 안 된 것도 여기서 설명된다. 즉, 6차에서도 범행의 수법이 같으면 경찰들이 자신이 범인인 걸 확실시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수법으로 저질렀을 것. [29] 3, 4, 5차와 흡사하게 입엔 재갈이 물리고 손이 결박된 채로 발견되었기에 화성 사건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졌다. 물론 해당 사건의 범인은 다른 사람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형사도 있다. 관련 일요신문 기사 사실 화서역은 연쇄살인이 벌어진 화성시 태안읍과 상당히 떨어져 있기에 이 형사의 증언도 타당성이 있지만 이춘재가 수원시 소재 고교를 졸업했고 수원에 빈번하게 갔음을 감안하면 이춘재의 범행일 가능성도 더러 있다. 시신 발견 날짜는 1988년 1월 4일. 부검 결과 피살자가 가출한 1987년 12월 24일 밤부터 25일 새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30] 몽타주 참고 [31] 모발에서 티타늄이 나왔다는 것이 증거였다. 하지만 처음 범행을 자백한 윤 씨는 나중에 교도소에서 "나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춘재는 2019년 10월 4일 모방 범죄로 결론지어진 8차 사건 이춘재 본인이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 끝에 재심을 거쳐 윤 씨의 무죄가 확정되었고 국가배상금 25억 이상 지급이 결정되었다. [32]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강도예비 폭력 사건에 대한 분노 + 당시 등화관제로 목격자 부재 + 대상자가 20대 남성인 자신이 제압하기 쉬운 여중생이라는 3가지가 시너지를 일으켜서 제일 참혹한 비극이 되었다"고 추측했다. [33]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34] 몸싸움한 흔적 등 계획적으로 살의를 품고 한 행동이 아니라고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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