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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6:06:18

유선(삼국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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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비판론
2.1. 통치의 문제2.2. 인사 실책의 문제2.3. 북벌 정책의 문제2.4. 안일한 통치의 문제2.5. 멸망 직전의 막장 행태
3. 옹호론
3.1. 잘한 건 없지만 잘못한 것도 드물다3.2. 무능했지만 권력 장악은 뛰어난 군주였다3.3. 인선 문제에 대한 변호3.4. 항복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3.4.1. 반론
3.5. 소결
4. 관련 논쟁

1. 개요

회제의 치세는 장장 40년이나 될 정도로 길며 촉한의 역사 대부분이 회제의 치세였다.[1] 이후 중국사에서 40년이 넘어가는 치세를 이룬 군주는 혼란과 광기로 가득한 위진남북조 시대를 포함해서 수백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2] 사실 470여 년간의 한나라 치세 전체를 봐도 회제보다 오래 재위한 군주는 한무제 뿐이다. 이는 소열제 제갈량한실 부흥 이데올로기 하에 촉한 정국을 잘 안정시켜 승계시킨 것도 있지만 회제 또한 자신이 누리는 권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어느 정도 평가가 정착됐듯, 회제가 난세의 전제 군주 차원에선 무능한 인물일지 몰라도, 적어도 인성은 모나지 않아 인심이나 신하들의 마음을 떠나가게 할 만큼 악정을 펼치진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유지하거나 개인의 보신을 위해 살아남을만큼 유능한 자였기에 40여 년이라는 치세를 유지 가능했다. 즉위 기간 대부분은 무난했지만 말년의 행적이 비판받는 군주라는 점에서 촉빠 가운데서도 그에 대한 옹호론과 비판론이 존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예의 낙불사촉 일화만 해도 양측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일화 중 하나라는 점도 그렇다.

회제에게 촉한 멸망의 책임을 모조리 돌릴 수는 없어도 결국 군주인 그에게 가장 큰 책임이 돌아가기에 사람들은 그의 행적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대해 숱한 가설을 제기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연의에도 나오는 얘기로 조운이 장판파에서 기를 쓰고 구해왔을 때 소열제가 땅에 내리치는 삽질을 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아둔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는 없다. 위략에서는 소열제가 여기저기 떠돌아 다닐 때 헤어져 노예로 팔려갔다가 입촉 후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른바 유선 벤허설. 촉과 에 대한 위략의 기록을 믿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조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던 장판파에서는 미션 목표로 당당히 활약(?)했다. 사실 이 부분은 정사엔 없는 부분이라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이 망한 촉나라에 이유라도 달아주기 위해 회제를 의도적으로 더 얼간이로 바꾸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있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아래에 나온 긍정론이나 부정론이나 모두 동의하는 회제 말년의 인선 실책에 대해선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단 것이다. 결국 이 떡밥 역시 말년의 행적에 대한 것으로 연결이 되는 사안이기도 하고.

확실한 건 회제는 보필하는 신하의 재량에 따라서 그 행적이 매우 달라지는 타입의 군주라는 것이다. 촉한사영으로 대표되는 명신들이 옆에서 보좌해 줬을때는 그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기회를 줘서 좋은 치세를 이끌은 큰 공이 있지만 이들 전원이 고인이 되자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괜히《 진서(晉書)》에서 제환공의 다음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다. 제 환공 역시 관중 생전에는 매우매우 훌륭한 군주였지만, 관중, 포숙아 사후 폭망했다.[3]

결국 진수 말마따나 아주 얼간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총명한 군주도 아니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누리며 권력을 부여한 신하가 잘났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은 군주였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는 난세의 군주로서는 실패한 삶을 살았던 황제라고 할 수 있다.

2. 비판론

회제의 권력 기반이 공고하여 그 권위를 이용하여 제갈량 사후에도 장완, 비의 등 능력있는 신하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내치에서 멸망 직전까지 딱히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 회제의 권력 장악과 유지 능력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소열제 사후 촉의 실질적 1인자였던 제갈량은 얼마든지 어리고 국정 경험 능력이 전무한 회제를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출사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항상 황제를 깍듯이 군주로 대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사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제갈량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제갈량은 촉한의 재정을 익주 한 지역에서 나올 수 있는 극한까지 풍족하게 할 수 있는 체계를 확보해놨다. 장완과 비의 역시 제갈량이 생전에 안배해 둔 후계자들이며 그들이 자신들을 발탁해 준 장본인이자 롤 모델, 촉한인들의 우상인 제갈량의 행보를 따라 회제를 존중하고 떠받드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회제는 제갈량이 뼈빠지게 이룩해 놓은 체계의 결과물을 취했을 뿐이다.

애당초 제갈량이 기획한 건 제갈량 사단의 충심과 선정 + 회제의 덕(德)이었다. 때문에 회제의 권위를 짓누르려 하지 않았고 회제가 정사에서 관심을 떼게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최종 결재는 반드시 회제가 했으며 회제가 지금 당장 정사를 주도하지 않는다 해서 사치 + 향락에 빠지지도 못하게 했다. 즉, 회제가 정사를 주도하지는 않지만 국정에 관한 대부분의 일을 체득할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리 표면적으로 신권 > 왕권의 구도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정치싸움이나 권신이 국정을 농단하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수준이다. 위, 오와 비교할 때 말이다. 회제의 황권 장악도 기실 따지고 보면 회제가 뭔가 엄청나게 영악했다기보다는 장성한 황제가 권력을 먹어가는 순리였을 확률이 크다. 회제가 장성했으니 친정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황제가 친정을 하니까 기존 재상의 권력이 줄어드는 것 또한 당연하다.

충분히 잘 했다고 봤건 아니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딱히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더라도 주변 환경에 의해 물들기 쉬운 인간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정사 후주전》에서의 평에도 나오는 것으로, 현명한 재상이 있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으나 환관에게 물들어 우매한 군주가 되었다고 나온다. 장완, 동윤,[4] 비의 등이 보필할 당시에는 촉한의 국정이 크게 문제 없이 잘 돌아갔으나, 비의가 죽고 그나마 재주는 있던 진지가 죽으니 촉한이 재깍 막장 테크를 타는 것을 보면, 결국 1차적 책임은 황호를 총애한 회제가 질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촉의 중앙집권화나 황제의 권위는 위, 오와 비교해 높은 수준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황호를 제어할 수 없었다. 회제는 대사령을 남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또한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국가의 기강을 문란케 하였다. 친동생인 유영이 황호를 비판하자, 회제는 유영을 멀리하였고 진지 이후 황호가 득세하여 세도를 떨치자 촉한 사람들은 다들 동윤을 그리워 했다.

2.1. 통치의 문제

회제의 치세는 41년에 이른다. 이는 삼국 시대는 물론, 위진남북조 시대까지 망라해도 군주로서는 독보적으로 긴 치세이다. 연의에서 제갈량 사후 스토리가 대폭적으로 축소됨에 따라 제갈량 원맨쇼로 다 먹여살렸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회제는 제갈량 사후에도 29년을 통치했다. 물론 이걸 다 회제의 능력으로 평가하긴 어렵고, 제갈량이 자신의 사후를 대비해 그만큼 건실한 국력과 정치 시스템을 잘 확립해둔 공이 크다. 또한 제갈량이 후계로 지목한 장완-비의는 제갈량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한 능력과 현실적인 안목을 갖춘 재상이라, 근본적인 국력이 부족한 촉을 긴 시간 안정시켰다. 하지만 비의의 죽음 이후 10년 만에 촉한은 인격도 능력도 안 되는 환관 황호가 권력을 독점해 국정을 농단함으로써 종막을 고한다.

촉한이 멸망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진지의 대두를 들긴 하지만 적어도 진지는 국가를 어느 정도 책임질 능력은 있었다. 진지의 문제는 역량 부족이 아닌 황호가 회제에게 다가가게 만들어 권력에 참여할 물꼬를 터준 것이 핵심이다. 진지가 죽자 회제는 크게 비통해하고 즉시 시호를 내릴 정도였으니 그렇게 총애한 진지와 친했던 황호에게 그 감정이 옮겨간 건 인간적인 측면에선 얼마간 자연스러웠을지도... 결론적으로 촉한의 본격적인 막장화는 진지 사후 회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황호의 독주를 더 이상 견제할 방법이 없어졌을 때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고작 환관에 불과한 황호를 총애해 국가를 붕괴시킨 건 어디까지나 회제의 선택이니 촉한의 멸망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은 당연히 회제라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내용에 있어서는 좀 더 세심한 고찰이 필요하다. 회제의 죄목은 한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리더로서의 역량 부족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 즉 말년으로 갈수록 영민한 재상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회제 본인에게로 권력이 전폭적으로 이양됐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권력의 주도권이 자신에게로 넘어오자 이를 다뤄 국정을 주도할 리더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즉, 권력 장악을 아무리 잘했다 한들 제대로 써먹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맞물려 권력 분점의 파트너를 잘못 선택해 이들의 전횡을 방치함으로써 국가기강의 해이를 유발하고 국가를 붕괴시킨 게 최대 문책 사유다. 그래서 여러 인재들을 소외시키고 국가 기강을 재정비할 뚜렷한 국가 비전을 제시하는데도 별 관심이 없이 유유자적 안분지족으로 일관, 회제가 초래한 정치적 아노미에 빠져 초점을 잃은 신하들이 자기 보신에만 급급한 각자도생의 상태로 전락하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촉한의 멸망을 야기한 정치적인 차원의 자질 부족이 두드러진다.

2.2. 인사 실책의 문제

흔히들 회제의 촉한은 아버지 소열제가 이릉대전에서 다 말아먹은 관계로 어쩔 수 없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이릉대전 80,000명 vs 65,000명 ~ 70,000명 정도 규모의 전투로, 촉은 북벌을 위해 조련한 병마를 오로 돌려 아직 완전히 오에 복속되지 않은 형주를 탈환하기 위한 것이고 오는 국가의 존망을 걸고서 겨룬 대전이었다. 촉한은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으나 결국 육손에게 대패하고 이후 1세대 장수들을 대신하여 군부를 이끌 수많은 인재와 병력을 잃어 국력이 파탄날 지경은 아니었지만 큰 피해를 입었다. 이릉 대전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듯이 이릉대전 직전에도 관우, 장비, 마초, 황충 등의 촉한 군부의 기둥들이 연이어서 죽고 그 외의 여러 인재들도 죽었는데, 그 뒤를 책임질 인재들은 이릉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후 당시 명성을 천하에 떨치던 소열제의 죽음으로 국내외가 혼란하기는 하였지만 제갈량을 비롯하여 이엄, 이회, 장억 등에 의해 진압되고 몇 년 동안 제갈량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국력을 회복하여 소열제 시절보다 더욱 발전하게 된다. 거기에 제갈량은 이후 장완, 동윤, 비의를 비롯하여 자신의 북벌을 대신 수행할 강유라는 인재까지 포섭해서 자신이 죽은 이후까지 잘 대비했다. 거기에 제갈량이 죽고 나서는 하후패라는 인재까지 강유의 휘하인 거기장군으로 들어와 힘을 합쳤다.[5]

이렇듯 촉한이 무조건 인재가 척박한 땅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고 그렇게 인재가 없었다면 서진 시기에 촉땅의 인재들이 천거 받아 중앙 정계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지만 막상 강유 시대의 고군분투를 보면 인재 부족의 열악함은 심각한 수준이다. 여기에 서진 시기 중용되었던 촉한 출신 인사들 상당수가 황호에 의해 중앙 권력에서 배제된 인사들이나 그에 반대한 인사들이 꽤 있었다는 부분까진 부정하긴 어렵다. 또, 촉한의 가장 큰 문제인 군부의 고령화 원인이 제갈량부터 잘못된것인지는 쉽게 판단 할 수 없고 제갈량, 장완, 비의, 강유의 군부 인재 발탁 시스템이 어떠했는지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회제의 친정 이후부터 하나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다. 비의 암살 전후로 정계와 군부를 분리시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정계와 군부 이원화 핵심은 황제 = 정계 > 군부였고, 군부 1인자에게 인사 권한을 삭탈했기 때문에 촉 후반기 군부 인선 문제는 황제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어쨌거나 인재가 부족했든 아니면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든, 문제는 그렇게해서 잘했으면 당연히 욕을 먹을 일이 없고 친정(親政)도 인재 선정도 적절한 판단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부분일 것이다. 집권 말기에 회제의 큰 실책이라고 평가받는 부분이 제갈첨, 동궐, 강유가 국정의 문란을 초래하는 황호의 계파에 속하는 인물들을 제거하라고 해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는 점인데 재위 기간 동안 큰 숙청 없이 국정을 운영했던 회제 입장에선 이전에 해오던 대로 자기가 믿음직하다고 생각한 인물들을 중용한 것이겠지만 문제는 이 시기 회제가 총애한 인물들이 국정에 믿음직한 인물들이 못 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오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설후도 촉한 국정의 문란함을 회제와 대신들의 문제라고 판단했는데 분명 회제 말기의 인재 중용에서 그의 방식이 어긋난 부분이나 인재를 고르는 안목의 문제는 어쩔 수가 없다고 본다. 아무리 이전의 영명한 재상 가운데 한 사람 추천한 인재 그와 같이 일한 인물을 신뢰했다고 해도 분명 그 인물은 다른 영명한 재상이 엄하게 질책하고 가까이 두지 않길 권했던 인물이었는데 회제는 후일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 사람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인재가 어떤 인물인지 판단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의 문제는 군주 자신의 판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당장 촉한 멸망 당시 "적국이 공격한다는데 신하들 가운데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고 따를 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단순히 총신의 말을 따르고 다른 신하들에겐 알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에까지 이르면 회제의 판단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스스로도 촉한이 망하고 끌려갈 때 극정을 보고서야 이런 신하를 진작에 못 알아본 것을 후회했다고 하니 결국 통치 기간 말기 회제의 선택은 스스로를 망친 선택이 되었던 것이다. 극정의 말을 그대로 따라주고, 극정을 일찌기 중용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 인재 부족에 대해서 그도 늘 안타깝게 여기며, 아버지만큼 적극적이진 않았으나 현자를 찾는 군주의 미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런 인재를 찾는 데 있어서 그의 판단이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부분이고 회제의 실책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뿐이다. 극정은 몇십여년간 군주 밑에서 봉사하던 인물이었는데 그 능력을 일을 그르치고 나서야 알고 중용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부분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특히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황호시대에 그나마 있던 인재들마저 황호의 눈 밖에 나면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하는 상황까진 옹호하기가 어렵다.

2.3. 북벌 정책의 문제

강유를 훼방놓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 역시, 정사 강유전에 엄연히 "암살의 위험을 느끼고 농서의 답중으로 도망하여 기회를 노렸다."는 내용이 뚜렷이 있다. 강유의 북벌이 성과가 지지부진했다는 점을 들어서 회제를 옹호하는 의견도 있는데, 강유의 북벌이 이전 시대 제갈량의 북벌보다 규모가 작았다는 점은 일단 둘째치고 설령 그 규모가 커서 촉한에 경제적으로 부담을 준다면, 강유를 질책한 다음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제갈량 시대처럼 국가적인 재정비를 통해 소모적인 북벌을 유도하기보다 한번에 성공 가능성을 높이도록 북벌군에 충분한 지원을 해 준다든가, 그것도 별로라고 생각한다면 아예 비의처럼 군사 1만 정도만 주고 위나라에 대해서 견제만 하도록 하든가... 하여튼 " 강유의 북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많았고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서 문제를 수정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회제는 그럴 만한 권위가 있다. 그러나 회제는 우유부단하고, 국가의 위기에 나태하고 태만한 태도를 취할 뿐. 적극적으로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결단하는 지도력, 리더십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강유의 북벌을 막지 않은 것은 강유의 능력을 믿어주고 활용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촉한의 국가 이념과도 직결된 문제이다. 북벌을 포기하면 장안과 낙양 등 한나라의 수도들이 있던 고토 수복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한(漢)의 정체성을 잃은 것이므로 안 그래도 조위에 비해 국력에서 밀리는 데 국가 존재 이념조차 흐릿해진다면 그냥 멸망하겠다는 소리밖에는 안 된다. 북벌에 가장 소극적인 신권 1인자였던 비의도 암살 직전 동오와 연계하여 북벌을 하려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 문제에서 회제가 지닌 문제는 북벌을 지속하는 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의사를 결정하는 정치 차원의 문제다. 염우 같은 장군이 회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 황호와 결탁하여 정쟁을 도모하거나, 강유 같은 인물이 암살 위험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회제가 주도하는 정치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는 방증이다. 이는 회제가 황호를 중심으로 한 비선 라인에 필요 이상의 힘을 실어주었고, 그 결과 과거에는 정상적으로 진행되던 정책 논의 활동이 마비되어버렸다는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거기다가 동윤이 죽은 이후 회제의 사치 기록이 늘어나는 등 그의 자제력을 통제할 인물이 없어지면서 회제 자신도 갈수록 방종해졌다는 것 자체도 문제였다. 황제의 권위가 확고할수록 그만큼 정치적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모자랄 판인데 회제는 이 부분에서의 자제력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에 남은 암군 중 상당수는 신하가 똑똑하면 훼방을 놓았던 것과 비교해 보면 제갈량, 장완, 동윤, 비의 대에는 재상들에게 권력을 맡기고 그들의 조언에 따라 정치를 했으니 그 점은 인정해 줄 만하지만[6] 강유의 시대에는 훼방을 했다. 삼국지연의에서 강유를 제갈량의 후계자로 묘사해 오해를 사는 요지가 많은데, 강유는 위 셋과 같은 재상의 위치가 아니라 동오의 대도독과 비스무리한 장군의 위치였다. 비의의 뒤를 이은 것은 진지였고, 진지를 거쳐 황호가 중용되었기 때문에 강유는 발목을 잡히게 된다.

2.4. 안일한 통치의 문제

황호와 회제의 삽질 때문에 촉한은 위의 침공에 제 때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방어 체계가 무너져 멸망하고 만다.

회제는 '안락공'이라는 칭호대로 국가의 안녕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더 생각하는 행위를 보여줬다. 주도면밀하게 국가의 안위를 위해 노력한 제갈량과는 달리, 회제는 지나치게 안일했고 자신의 권력 강화에 더 몰두한다. 그 말인 즉슨, 위나라의 움직임이 회제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에서 촉으로는 공격은커녕, 촉으로 오는 길 자체가 험하다. 따라서 위나라의 공격 시도 자체가 촉과 싸우기도 전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위가 침공하는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굳이 방비를 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설사 오더라도,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 위의 침공이 확실시 되는 시점에서 비로소 위에 대한 방비를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위나라에서는 촉 공격 얘기가 나올 때마다 '거긴 사람이 갈만한 곳이 절대 아니니, 제발 촉을 공격하지 말자'는 반대가 주류를 이룬다. 물론 회제가 위나라의 여론까지 고려했을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촉에 대한 공격이 엄청난 고난도임을 몰랐을 리는 없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회제는 안일한 생각을 갖고 황호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촉한 멸망...태평성대에는 회제의 정치술이 효과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회제가 살았던 시대는 난세였다. 더욱이 회제의 통치는 국론의 분열을 초래해 국가 행정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따러서 회제를 "사람은 좋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아무것도 안하는 상사는 때때로 대하기 편한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고 회제는 정확히 여기에 부합하는 사람이다. 애초에 회제가 강유를 진심으로 아꼈다면 강유가 조정 세력의 견제를 부담스러워해서 대장군씩이나 달고 최전방인 답중에 처박혀 있었을까. 회제를 옹호하는 발언 대다수는 "신하를 옭아매지 않았다" 가 섞이는 경우가 많은데, 실상은 제갈량 - 장완 - 비의 레벨으로 자기관리 철저한 원리원칙 주의자들이 재상을 맡지 않으면 제대로 보좌할 수도 없는 작자라는 게 다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는 상태이다.

촉한이 멸망하는 과정을 보면 회제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중침공 징후를 포착했음에도 점쟁이 말이나 들으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한중이 뚫려 검각에서 방어전에 벌어지는 시점에서 지원군이든 유격군이든 후방편성을 해야 할 테고, 실제로 지방에서 지원을 가겠다는 요청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인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갑자기 산악왕 등애가 뙇하고 등장해서 급히 편성한 요격군까지 갈아버리는 시점에서 성도성 농성을 하고 버티면 또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여기서도 농성 같은 거 "안 하고" 넙죽 항복. 심지어 항복한 이후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지혼자 잘먹고 잘살다 죽는다. 상사가 "아무것도 안 하고" 점잔만 빼는 인간이면 최소한도의 책임감이란 게 살아있는 부하한테는 직장이 그냥 지옥이다.[7]

따라서 회제의 행위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 권력을 추구하는 행위는 정치 과정에서 필연적 행위이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하는 행위가 적절한 선에서 이뤄져야지, 지나친 권력 추구는 도리어 국가에 해를 입힌다.

2.5. 멸망 직전의 막장 행태

멸망 직전인 260년에서 263년 정도까지의 행보를 보면 머저리도 이런 머저리가 없다. 당장 이 시기 회제에 대한 평가는 적군, 아군을 통틀어서 좋지 않다. 사마소는 회제를 검각만 뚫리면 지레 겁먹고 항복할 인물로 평가했으며 막상 정말 사천 평원에 적이 나타나자 항복론자 초주의 말만 듣고 항복해 버렸는데 이 조치는 당대 촉한 인사들을 비롯해 서진, 동진의 학자들에게까지 그 상황이면 근왕군이나 오의 지원군도 있는데 그냥 지레 항복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오의 사신 설후의 경우엔 대놓고 촉한이 쇠퇴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회제 탓이라고 했으며 또 중신들은 바른말을 하지 않고 백성들의 안색은 채소빛이었다고 한다. 육개는 익주의 지세는 위험하고 험난하며 병사들은 대부분 정예이고 강하였으므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 만대를 보존할 수 있었겠지만, 촉한은 주는 것과 빼앗는 것이 어그러졌고, 상벌(賞罰)은 마땅함을 잃었으며 군주는 마음대로 사치스럽게 하고, 백성들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서 고갈시켰다고 비판했다. 오나라의 장제는 ' 촉한은 환관들이 전횡하여 나라에서는 정령을 내리지 못하고 무력을 남용해 백성들은 피곤하고 병사들은 지쳤다는데 밖에 있는 이익을 다투어, 지킬 준비를 못하였소' 라고 했다. 서진에 등용한 촉한 인사들 역시 이 당시 회제의 통치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당시 원자에서 원준도 당시 위나라도 앞에 수춘전투가 있고 뒤에 촉을 멸하는 공로가 있으니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창고가 비었다고 했으며. 오나라 인물들도 사마씨가 국정을 다스린 이래로, 큰 재난이 자주 이르러, 지력이 비록 넉넉해도, 백성은 아직 복종하지 않고 있다. 지금 다시 그들의 자력을 다하여, 파촉을 원정하며, 병사는 힘들고 백성은 피곤하나 가엾게 여김을 모르니, 무엇을 할 겨를도 없이 패할 것인데,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했을 지경이니 위나라 역시 군사를 동원하는데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촉한도 나라 사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촉한이 이기면 오히려 역전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항복한 것이다.

회제가 농부 같은 일반 직업을 가진 일반인이었으면 문제가 없지만, 그는 한 나라의 군주였다. 어찌되었거나 결국 촉한 멸망에 대해서는 그가 가장 큰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두고 서양적 사고관이라며 동양적 군주론에 의하면 회제보다는 보필할 인재 등의 부족이 문제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견 역시 존재한다. 제갈량 생전에도 커다란 계획을 잡고 전투 중이었던 제갈량에게 이엄의 거짓말을 듣고 다시 돌아오게 해서 큰 작전을 망친 적이 있었고 보필했던 인재 나중에 아첨을 듣자마자 이를 갈면서 원망하고, 나중에 중용한다는 자가 아첨밖에 모르는 환관밖에 없는데, 이 자에게 나라의 권세가 집중되니 이쯤되면 인재가 모자랐다기보다는[8] 간신들에게 모든 힘이 돌아갔다고 밖엔 볼 수 없다. 강유를 고립시켜 이름뿐인 대장군을 시켰으며 그외에 다른 장수들도 방해가 심했으며 또 회제가 그들을 총애하여 이를 해결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었던 탓이 크다. 도리어 강유의 급박한 서신을 황호의 말을 듣고 무시하고 덮었는데[9], 이는 인재가 없었다는 이유로 커버되지 않는다.

군주가 인간적으로 제법 선량했거나 방탕하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를 지키려는 의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소한 부분이다. 회제는 촉한멸망전 당시 황호가 추천한 무당의 말을 믿고 최전방에서 강유가 올린 보고를 무시하다 한참 늦은 대응을 하였고, 마막 같은 인간을 강유관의 수장으로 있게 하였으며, 언제인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남반부에 있던 곽익이 성도로 지원을 가려 하자 거부했다. 이 셋 중 한 가지 일만 없었다면 등애가 성도를 위협하는 일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10] 설령 제갈첨이 이끄는 성도 방어군이 무너졌으며, 강유와 염우가 이끄는 촉군과 동오의 지원군이 오는 것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해도 절벽 타고 온 등애군이 공성 장비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회제가 백성들을 징발하고 최대한 병사들을 끌어모아 성도를 방어하거나 하다 못해 청야하고 피난이라도 했다면 험지를 넘느라 지치고 제갈첨군과 싸우다 상한 등애군이 회제를 잡는 것은 어려웠을 것인데, 회제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보다도 못한 국가 사수 의지를 보였다.[11] 인간성이 좋았다는 것은 아주 지엽적인 논쟁에 불과하며, (멸망에 처한 나라치고는)비교적 양호했던 촉한의 국가 상황은 오히려 회제가 암군이었다는 확실한 증거일 뿐이다.[12]

이렇게 자기가 통치를 잘못해 나라를 말아먹어 백성들이 외적의 침공에 공포에 떨게 되었는데 권력의 정점에서 가장 책임을 다해야 할 군주란 자가 외적을 물리치지 않고 한다는 짓이 (자기가 사지로 몰아넣은) 백성을 위해 항복하자는 웃기지도 않은 명분을 내세우곤 실제론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항복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후 회제의 이름은 사천 지방 사람들에겐 '어리석은 자가 천리강산을 소홀이 했다'는 한탄의 대상이 되었다. 회제는 한마디로 권력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는 알았지만 결국 그 정도 뿐의 인물이었다. 이때 황호에게 휘둘리는 회제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충고를 잘 들어야 하지만 아무나 당신에게 충고를 하게 해선 안 되며 최종 결정권자는 어디까지나 군주 자신이어야 한다."의 격언에 어울리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3. 옹호론

일단 긍정, 옹호라는 것은 이상과 같은 비판론의 평가가 다소 가혹하다는 뜻, 혹은 비판적으로만 다룰수 없는 긍정적인 점도 있다는 뜻이지, 그가 촉한 멸망을 자초한 암군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3.1. 잘한 건 없지만 잘못한 것도 드물다

회제는 민생과 내치에 있어서는 뚜렷한 치적을 남긴 게 아닐[13] 뿐, 정치적인 측면과 달리 두드러진 실정은 없다. 물론 치세 후반에 많은 문제가 생긴것은 사실이긴 하다.[14] 그런 의미에서 황호가 집권한 경요 연간(258~263)에 오나라의 사신으로 촉한에 갔던 설후는 촉의 정치가 막장이고 촌야를 지나가보니 백성들의 얼굴빛이 (잘 먹지 못해) 채소빛이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회제가 항복했을 때 항복 조서에 따르면 '백성들은 들에 널리 퍼져있고, 여분의 식량과 남은 곡식은 밭이랑에 가득히 쌓여 있으니 (풍년이 들었습니다.)'라고 쓰여있다.(百姓布野,餘糧棲畝)[15][16][17] 들에 농사짓는 백성들이 퍼져 있고 풍년이 들어 백성들에게 여분의 식량이 남았다는 얘기인데 자기의 통치가 부덕하고 암약하다며 까는 와중에 촉한의 통치 사정을 굳이 미화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또, 막상 촉을 정벌한 등애는 촉한에서 철과 소금을 굽고 배를 만들면 다음 해 가을 겨울에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했다. 오나라의 육개는 비록 군주는 사치스럽고 백성들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서 고갈시켰다고 까긴하나 촉한의 멸망 당시 병사들은 대부분 정예이고 강하였으므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 만대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화핵 역시 적이 서쪽으로 개미떼처럼 몰려들었을 때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했으며 촉나라는 토지가 험하고 견고하며, 게다가 소열제의 통치 방법을 이었으므로, 그들의 수비는 오랜 시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전복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평가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한때 촉한의 멸망의 핵심으로 전쟁광 강유가 북벌에 미쳐 나라를 거덜냈다는 시각이 유력시됐지만 이는 많은 반례의 등장에 힘입어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고대로부터 하루에 천금을 소비한다는 전쟁이 지속되었으니 촉한의 재정에 꽤 부담을 준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일 터인데 여기에 회제의 사치까지 도가 지나쳤다면 당연히 촉한의 재정은 거덜났을 것이다. 그러나 외려 후에 촉한을 점령한 등애가 촉한의 물산으로 능히 동오를 칠 수 있으니 신속히 공격하자고 주장하고 비단이 수십만 필씩 쌓여있는 촉한의 경제 사정은 여타의 망국과는 달리 꽤 건실했다는 것이 근래의 주된 평가다. 등애의 주장은 강유와 회제를 동시에 변호하는 논거로 쓸 수 있다.

삼국지연의가 너무 히트를 치는 바람에 회제는 암군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같은 망국의 군주인 동오의 말제 마냥 딱히 폭정이나 학정을 저질러 애꿎은 신하들을 도살하고 백성을 괴롭히진 않았다. 즉 암군일지언정 폭군은 아니었다는 것. 치세 동안 쓰레기짓만 일삼다 나라를 거덜내고 서진에 잡혀가서 의연한 태도 좀 보인 걸 근거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같은 일부 2차 창작물에선 회제보다 훨씬 더 대접이 좋은 게 말제인데 회제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할 듯.[18] 또 본인과 비슷하게 환관을 권력 파트너로 삼아 국가를 말아먹은 후한의 환, 영제처럼 국정 운영에서 완전히 유리돼 황음무도를 달리다 국가 재정을 거덜내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것도 아니다. 물론 놀기 좋아했다는 평가나 동윤이 후궁의 수를 늘리고 싶어하는 회제의 요구를 이미 만석이니 증원할 수 없다고 일축한 것처럼 전제 군주의 스탠스에 입각해 적당한 선에서 향락과 여색을 즐겼으니 삼국 시대 검소의 아이콘 오 대제처럼 딱히 근검 절약[19]하는 군주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 위 명제마냥 무리한 토목 공사 등으로 국가 재정에 압박을 줘 백성을 괴롭히고, 심지어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장수들과 병사들의 봉록까지 깎았다는 기록을 남긴 것도 아니다.[20]

제갈량에 대한 신뢰와 권력 분배도 마찬가지로 잘못한 부분이 딱히 없다. 제갈량에 대한 신뢰는 그가 생존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굳건했으며 항상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존중했고 그에게 사실상 촉한의 전권을 부여했다. 그러면서도 아래의 권력 장악 항목에 나오듯이 황제로서의 기본적인 권력과 권위는 절대로 놓치지 않고 잘 유지했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에 대한 모함에 혹해서 그를 소환하는 사례가 있지만 이 것도 '제갈량 이 나쁜놈!'이란 식이 아니라 '승상이 그럴 리는 없지만 그래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정도의 의도였으며 실제로는 이런 의심조차도 없었다.

즉 회제는 적어도 사람은 확실히 착했고[21][22] 아버지 소열제가 남겨준 인재들을 신뢰하고 그들의 역량을 십분 잘 써먹은 군주이긴 하다. 제환공에게 비견된 것처럼 군주가 이렇게 신하들을 신뢰하고 권력을 맡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신하들이 자신의 아버지 유언에서 자신을 부탁한 신하와 그 신하가 후임자로 지목했던 들임을 생각하면 신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권력이 교체되면 전 왕의 수족이던 권신들을 몰아내고 새로이 본인의 사람들을 등용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며, 역사상으로도 자주 보이는 일이다. 헨리 8세가 그랬고 가경제 또한 그러했다.

제환공에게 비견된 이유는 제환공도 관중 포숙아가 살아있을 적에는 그들의 조언을 잘 따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나, 그들이 모두 죽자 관중이 그렇게 쓰지마라던 역아, 수초, 개방을 모두 중용하는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고, 회제도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살아있을 적엔 그의 조언을 잘 들었지만 제갈량 사망 후에는 출사표에서 소인배를 곁에 두지 말라고 했음에도 결국 황호를 곁에 두는 짓을 해버렸다. 이렇듯 둘의 행보는 비슷한 부분이 많았지만 결정적으로 제환공은 비참하게 사망했을지언정 제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어서 최초의 춘추오패로 인정받고 있으나 유선은 본인은 끝까지 호의호식하고 살았지만 나라가 망해서 암군 취급을 받게 되었다. 황호의 발호를 허용한 진지 역시 회제가 마지막 사영인 비의의 추천을 받아서 등용한 인재이고 적어도 진지는 아부를 잘하고 황호가 국정 운영에 참여시킨 것 외에는 큰 무리수를 두진 않았다.[23] 진지가 국정을 운영하던 당시엔 황호가 대놓고 전횡하는 일은 없었으며 초주와 협공으로 강유를 견제하긴 했지만 이는 성과를 내는 데 지속적으로 실패한 북벌이라는 정책의 지속 여부를 두고 벌어진 정상적인 정쟁이었지 후에 황호 시절 마냥 강유가 신변에 위험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즉 마지막 5년의 황호 시절을 제외하면 회제는 삼국 시대 군주들 가운데 그렇게 악평만 받을 군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쌓아올린 치적을 단 한순간에 적국인 위나라와 위나라의 권신 사마소, 당시 수도를 공격해오던 적군 총대장 등애에게 홀랑 넘겨줬다는 점일 것이다.

3.2. 무능했지만 권력 장악은 뛰어난 군주였다

국정의 상당 부분을 능력 있는 신하들에게 위임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회제는 동시기 위의 전폐제, 후폐제, 원제, 오의 폐제처럼 무력하게 군주의 권리를 놓친 적은 없었다. 회제의 재위 기간은 자그마치 40년이나 되는데, 이는 삼국시대 모든 황제들 중 가장 길고, 전한-후한-촉한의 모든 황제 중 전한 무제의 재위 다음으로 가장 길다. 즉 이러한 점은 회제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황실의 위상을 유지할 만한 능력은 갖춘 전제 군주임을 보여 준다. 갈수록 재평가되듯 회제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리더십과 역량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적어도 황권과 신권을 적절히 조율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는 제왕학적인 면모, 정치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고단수에 가까웠다.

실제로 회제의 권력 장악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 소열제의 유언을 받들어 탁고대신인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거의 전권을 위임하여 전한 초기의 제도를 따랐지만,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자 더 이상 후임 승상을 임명하지 않고 즉각 한무제 이후의, 황제가 직접 국정을 관장하는 제도로 권력 구도를 재편했다. 이는 상징적으로는 제갈량을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촉한의 신하로서 더 이상 올라설 곳이 없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추켜세우는 것으로 대개는 제갈량에게 간택받은 인물들 혹은 추종자들로 짜인 촉한의 인적 네트워크, 즉 신권에 존중을 보이는 표시임과 동시에 현실적으론 앞으론 그 누구도 제갈량과 같이 전권을 누리지 못하도록 만든 권력 의지의 표현이다.

애당초 제갈량 생전에도 회제의 권위와 권력, 권한이 결코 적지가 않았다. 비록 정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선제 회제에게 조언하는 수준의 위치였지만 그래도 조정의 원로이자 거기장군이었던 유염만 해도 회제를 간통으로 의심하고 아내를 폭행해 감히 황제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려하자 바로 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하는 것을 보면[24] 당시 촉한에서 회제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회제가 재판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재판하는 관리가 황제에게 감히 기군망상의 불경죄를 저지른것은 설령 거기장군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알아서 회제에게 기었다는 소리니까. 이건 제갈량이 아직 살아있고 한중에서 북벌군을 막 이끌고 출발하려 할 때 성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갈량이 서거하자 그를 욕한 이막을 바로 죽인 것도 그렇고 회제는 제갈량-장완 시절에도 촉한의 황제로서의 막강한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신하들의 생살여탈권을 쓰려면 얼마든지 바로 쓸 수 있었다. 단지 유능한 재상들에게 정사를 맡기는 게 더 편하고 굳이 심각한 일이 아니면 신하들을 해치지 않으려는 성품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그런 재상체제에 자신의 권력을 어느정도 이양하고 이걸 인내하면서도 필요하면 '내가 안 써서 그렇지 주어진 권력을 쓸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보통의 권력 감각을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제갈량 사후 그의 사당을 짓는 것을 불허하기도 했다. 물론 회제가 인간적으로 제갈량을 싫어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제갈량 사후에 이막이 제갈량을 비방하자 평소와 달리 크게 노하며 즉시 이막을 하옥하고 죽인다.[25] 이막은 익주 토박이 출신에 재능과 명망이 있었지만 너무 오만하고 방자해 스스로 명성을 실추시켜 형제들인 이조, 이소,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요절한 형제가 이씨 삼룡으로 세간의 칭송받을 때 여기서도 소외될 정도로 돌출된 성격의 인물이다.

이막은 이미 회제 이전에도 소열제와 갈등을 빚다[26] 그 재능을 아낀 제갈량의 변호로 겨우 화를 면한 인물인데, 그후 제갈량에게 중용받아 나름대로 출세 가도를 걷다 제갈량의 1차 북벌까지 종군했으나 신상 필벌의 원칙에 따라 마속을 처벌하려는 제갈량을 걸고 넘어져 결국 실각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자신을 구해주고 중용한 제갈량이 죽자 마속의 처벌 문제로 자신을 실각시킨 원한을 잊지 못하고 곧바로 제갈량을 비방하는 걸 보면 배은망덕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회제도 이를 잘 알기에 예외적으로 크게 화를 낸 걸지도 모를 일이다. 이막과 비슷하게 마속 문제로 실각한 상랑은 별 말이 없다.

여담으로 사사건건 촉한의 최고 권력들과 쓸데없는 대립각을 세우다 결국 화를 자초한 이막과는 달리 형제 이조와 이소는 촉한의 최고 권력들에게 총애를 받았다. 이조는 소열제의 총애를 받아 소열제의 한중왕 즉위에 논리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문서 작업을 담당했고 이릉 대전까지 종군했다가 패배하고 퇴각한 영안에서 사망한다. 이릉대전에서 부상을 입어 죽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 편. 이소는 제갈량의 총애를 받았다. 제갈량은 1차 북벌에 귀순해 온 강유를 두고 "양주 최고의 인물로 계상과 영남도 여기에 못 미친다"고 찬사를 보냈는데 여기서 영남이 바로 이소다. 계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량. 형주파를 대표하는 재능으로 일컬어지고 무엇보다 의동생으로까지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로 제갈량과 친분이 깊었던 마량과 같이 언급되는 걸 보면 재능도 뛰어나고 제갈량도 많이 총애한 듯.

어쨌거나 회제는 개인적으로는 몹시 신뢰하고 좋아한 제갈량이고 또 그 능력을 아주 요긴하게 잘 써먹었지만, 공적으론 제갈량 사후 백성들이 그의 사당을 세우는 걸 허락하지 않는 걸로 신권이 황권의 경계를 넘어서는 걸 적절히 견제했다는 뜻이다. 군주 입장에서 회제는 위대한 대신에 대한 추종이 지나친 것을 경계했을 공산[27]이 있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단순 재상 개인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그가 선택한 장완, 비의, 동윤, 강유 등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가 촉한의 인적풀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신권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따라서 적절한 수준에서 견제가 필요했을 것이다.[28]

또 회제의 치세는 황족들이나 외척의 간섭에서 자유로웠으며 신권과 황권이 갈려 권력투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신하들끼리 당파를 나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파벌 다툼도 없었다. 당장 위와 오가 이런 로 얼마나 피바람이 몰아쳤는지를 생각해 보면 말년을 제외한 회제의 전반적인 치세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만큼 소열제- 제갈량이 깔아놓은 촉한 특유의 정치 시스템인 한실 부흥의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유씨 황제의 확고한 권위하에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재상 중심 체제로서의 군신 관계를 제대로 이행하고 또 이용한 군주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안배한 인재들의 능력을 통한 것도 상당했겠지만 즉 회제의 치세 동안 오직 황제의 그림자 밑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인 환관 황호만이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다는 것은[29] 그만큼 촉한 황실의 위상이 동시대 타 국가에 비해 확고한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쩌면 말기의 회제는 내정의 황호, 외정의 강유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30] 막판에 강유 등을 견제한 것에 대해서는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라는 의견도 있다지만 회제의 헤게모니는 제갈량 사후 승상직을 공석으로 남겨놓은 것이 말해주듯 꾸준히 강화되고 있었고 회제는 끝까지 강유와 황호 둘 다 죽이거나 내치지 않고 안고 가려고 했다. 회제의 즉위 40여 년 동안 제갈량과 강유는 한실 부흥을 명분으로 30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북벌을 행[31]했는데, 정말 회제가 강유를 견제해 북벌을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옹, 양주를 아우른다는 목표 달성에 계속 실패한 강유의 북벌을 얼마든지 중단시킬 명분도 권위도 여론도 다 갖추고 있었지만 북벌 자체를 회제가 그만두라고 한 적도 없었다. 강유가 황호를 죽이려 한 것처럼 황호 역시 강유를 상당히 미워했을 텐데 회제는 둘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자 역할을 하려고 했을지도... 다만 황호를 강유보다도 더 신뢰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자세히 보면 회제는 장완 사후부터 친정을 시작하며 황제권을 계속 늘려갔으니 일하기 싫어서도 아니다. 황제 노릇 하기 싫고 그저 놀고만 싶다면 태자 유선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군림하면 그만이다. 당장 제갈량 시절에는 탁고대신 제갈량이 북벌 계획을 수립하고 황제에게 보고하는 방식이었다면 장완때부터는 황제 스스로가 신권 1인자에게 개부 명령을 내려 실질적으로 북벌 계획을 명령하는 모습을 보인다. 회제가 친정하기 전 부터 말이다. 촉한의 이념이 한실부흥이고 여기서부터 권력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제갈량 사후 북벌을 주도하는 권한이 실질적으로 회제에게 있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자치통감과 후주전에 보면 장완시기인 236년에 전(湔)현에 이르러 멀리까지 관람할 수 있는 조망대인 관판[32]에 올라 문수(汶水)의 강물을 구경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대목에서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의 주석에 따르면 제갈량이 죽은 후 회제가 (촉한 지역을) 유람하고 관람하는 걸(游觀) 아무도 감히 막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이미 장완 시절부터 회제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비의 때부터 회제는 본격적으로 친정했고 이 시기 강유의 북벌이 철저하게 회제가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강유의 입지상 강유 혼자 북벌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는 점도 이를 시사한다.

애당초 제갈량이 후계자로 지목한 장완과 비의 같은 경우도 그렇다. 장완의 경우 제갈량이 평소 성질이 나쁜 양의가 자신이 죽고 나서 대신하는 일이 없도록 장완을 추천한 것에 가깝고 비의는 회제가 제갈량 사후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상의하기 위해 직접 이복을 자신의 대리자로 오장원에 있던 제갈량에게 보냈을 때 장완과 같이 추가적으로 지목된 것으로 회제가 제갈량더러 사후 후임자를 정하라고 한 것에 가깝다. 또 비의는 진지를 중히 여겨 회제를 모시게 했고 회제 역시 진지를 총애했다. 이는 회제가 친정을 시작하던 비의 시기에 제갈량의 후계 세력이 회제와 잘 영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회제 말년에 강유, 진지- 황호- 염우, 제갈첨- 동궐- 번건 모두 어느 누구도 정국의 주도권을 못 갖고 서로 치고 박고 싸운다. 회제는 이 세 그룹들을 다 중용하며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권력을 나눠주었다. 동시기 조위와 손오에서 권력투쟁에서 밀린 정파와 인사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갈려나가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는지를 감안한다면 아무리 한실 부흥의 이데올로기하에 안정된 정치 시스템을 가져간 촉한 특유의 정치 생태계라지만 이건 황제의 결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어쨌든 이건 뒤집어 말하자면 어느 누구의 피도 흘리지 않고 최종 결정권자인 회제의 권력이 올라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파벌들이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회제 입장에선 꽤 효과적인 권력 분배였던 건 사실이다.

반면 위나라의 경우 조예 이후 이를 할 수 없는 황제들만 배출되었고 결국 사마씨가 나라를 삼켜버렸으며 오나라의 경우 손권을 시작으로 손준과 손침이 손화파를 싸그리 숙청해버렸다. 문제는 이 권력 분배의 한 축에 능력도 인성도 안 되는 간신 황호가 있었다는 점. 진지 같은 경우는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모를까 재상이라는 중책을 맡기에는 품성엔 문제가 있었지만 적어도 능력은 있어서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남겨준 신료들을 신뢰하고 중용하고 권력을 맡기면서도 황실의 위상을 유지하는덴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정작 그 인재들이 하나둘 사라지거나 노회하면서 자기의 능력으로 국정을 이끌어가고 또 함께 만들어나갈 인재를 선택해야 할 시기가 닥치자 자신에게 아부하고 좋은 말만 해주는 예스맨들만을 기용하여 중히 쓰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선 정말 회제가 진지나 황호 말고 다른 대안을 찾았더라면 촉한이 그 지경까지 가진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 전폐제와 오의 소제는 9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불과 1~2년 이내에 권력을 빼앗겼고, 위의 후폐제, 원제, 오의 경제는 허수아비로 즉위한 경우인데, 심지어 경제 손휴는 권력을 되찾아오기도 했다. 게다가 즉위당시 회제보다 입지가 좋았다고 보기 힘든 위 문제나 명제는 물론, 처형당한 죄인의 아들이자 막장군주였던 오 말제마저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왕조의 정통성을 내세운 촉한에서 17세의 나이에 충신들의 보좌를 받으며 즉위한 회제가 9살짜리 어린아이에 비해 나았다고 해서 '권력 장악에 뛰어났다'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위 문제, 명제, 오 말제 등은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사치를 부린 것에 반해, 회제는 동윤의 간언에 꼼짝도 못하고 두려워했고 그의 사후에 황호와 진지 등의 협조를 받고나서야 마음껏 사치를 부린 것을 보면, 촉한의 입장에서는 다행한 일이었겠지만 권력 장악 능력도 오히려 수준이하였던것으로 보인다. 라는 주장도 있지만, 권력 장악력이란 단순히 '쫒겨나지 않는 능력' 의 수준이 아니라 국정 전반에 대한 장악력까지 포함한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호족이나 문벌의 득세를 통제하지 못한 위, 오에 비해 회제의 촉한은 어쨌건 황제 개인에게 권위와 전권이 집중되는 체제였던 것. 물론 이것은 회제의 능력으로 인한 성과라기보다는 소열제가 기초를 닦고 제갈량이 완성한 권력 구조 위에 회제가 잘 올라타서 가능했던 일로 보이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보면 촉한이라는 나라 전체를 통제하는 권력의 '장악력'이 특히 명확했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3.3. 인선 문제에 대한 변호

이러한 인선 문제를 어느 정도 변호의 여지가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첫째로 자기 정치를 해보고 싶은 회제의 권력 의지를 든다. 본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평생을 아버지 소열제와 제갈량이 마련해 둔 인맥풀의 한복판에 있다 보니 전제 군주로서 어느 정도 염증을 느끼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냐는 이야기다. 즉, 본인 주도하에 자기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적 개편을 하고 싶어하는 '물갈이' 욕구가 드는 건 당연지사이지 않겠냐는 시각이다. 이는 현대 권력 정치에 있어서도 지도자가 바뀌면 흔히 일어나는 정치 스케줄이다. 이 때문에 진지와 황호를 총애하고 귀순한 하후패를 우대한 것은 본인 중심의 리더십을 형성하기 위한 권력의지의 발로로 이해하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진지는 회제가 발굴한 인물이 아니라 비의의 추천으로 임용된 인물이고 황호는 진지 사후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체재에 가까웠다. 기존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동떨어진 인물들이 아니었다는 얘기. 그리고 하후패 같은 경우는 강유와 장억과 금세 친해진 것이 말해주듯 기존의 군부 네트워크에 녹아든 인물이지 회제의 비호하에 새로운 그룹을 형성한 진지-황호와 가까웠다는 얘기는 없다. 게다가 하후패는 귀순 시점에 이미 환갑을 넘긴 노장 중의 노장(...)이다. 회제가 주도하는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하는 대임을 맡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둘째로 촉한의 인재난이다. 회제 말기 남아있던 소열제-제갈량 시대의 구신들은 강유, 요화, 장익, 종예, 호제, 동궐, 곽익 등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군부의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곽익 정도를 제외하면 다들 나이가 너무 많았다. 맹광이나 내민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이들은 초주처럼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적 정체성이 강한 인물이었고 이들 역시 나이가 너무 많았다. 황호를 총애한 게 아니라, 그나마 본인 시야 안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게 황호 뿐이었을 가능성도 크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낙양으로 끌려간 이후 그제서야 극정의 식견에 감탄하며 진작에 중용했다면 하고 한탄[33]한 것을 보아 걍 본인의 안목 부족 혹은 황호에 대한 총애가 지나쳤다고 봐야할 듯. 극정은 연의에서처럼 갑톡튀한 인물이 아니라 촉한에 30년 이상을 봉직한 인물이다. 즉, 촉한사영으로 대표되는 소열제와 제갈량이 남겨준 도덕성과 능력이 검증된 인재풀이 소멸되기 전에 선대처럼 황권강화를 뒷받침할 도덕성과 능력을 갖춘 친위세력 인재풀을 진작부터 육성해야 했는데 회제는 여기에 소홀했고, 결국 남은 대안이 없자 이전부터 총애하던 황호 같은 환관이 익숙하니까 국정을 맡기고야 만 것이 유선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강유의 황호 제거 간언 같은 사태가 발생할 지경으로 와도 사실상 황호의 전횡을 방치하고 아무것도 안 한 것도 큰 실책이었다. 황권을 위해서 환관을 이용하려면 적당한 수준에서 환관을 제어할 필요가 있는 것인데 회제는 황제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또, 북벌의 경우 전쟁을 준비하면서 문무에 능한 인재를 선발하고 이들을 황제의 친위세력으로 삼아 그들의 유능함과 공적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신하들이 불만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가지는데 말년의 회제는 북벌을 강유에게만 떠넘긴 채 강유가 성공하던 실패하던 그를 제대로 보좌할 인재를 새로 선발하거나 중용하지 않았다.[34] 결국 강유는 혼자서만 죽어라 분투했고[35] 혼자서 욕받이가 되었으며 북벌의 성공 가능성도 갈수록 낮아지게 된다. 즉, 본인이 국정 운영을 할 거면 본인의 인재풀을 만들어 쓰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소열제와 제갈량은 뭐 아무런 노력도 안하고 회제에게 남겨줄 그런 인재풀을 끌어 모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회제는 황제로서 국정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거기에 신경을 써야 했음에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로 촉한에 정무를 맡기고 황제에게 충성할만한 인물이 그렇게 없던 것도 아니다. 극정, 번건, 왕숭, 문립, 수량, 이밀, 두진, 진수, 이양, 두열 같은 촉한의 구신들은 서진 정권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고 꽤 출세한 인물들[36]이다. 따지고 보면 황호에 의해 소외된 나헌 같은 경우도 원래 문관에 가까웠던 인물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진지에 의해 소외되었던 방굉[37] 같은 인물도 있다.

3.4. 항복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건 근본적으로 회제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마막의 잘못이다. 마막이 지키고 있는 강유관이라는 곳은 현대 지도 기준 면양시와 거의 붙어있다시피 한데 이 '면양시'라는 도시는 성도의 위성도시이다. 삼국지 3에서는 '61. 부성'이 이 강유관에 해당되는 위치로 '41. 성도' 바로 위에 있다. 게다가 지형 상 강유관에서 면양시까지는 별로 가파르지 않은 산 내리막길이며 면양시 이후부터는 평지다. 그리고 마막 덕분에 기운을 차린 등애는 이후 제갈첨을 부숴버렸다.

한마디로 회제는 항전하기에는 수도와 너무 가까운 곳에 너무 갑자기 적이 나타나버린 것이다. 오직 마막 때문에. 전쟁에서 천자의 전사는 도성의 함락에 버금가는 악재이므로 이렇게까지 가까운 곳에서의 전투에서 행여 잘못되기라도 하면 촉한의 멸망과 더불어 엄청난 인명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 이 상황 자체가 회제가 직접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써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며 강유 등 제대로 된 전투지휘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회제가 등애 상대로 얼마나 잘 싸워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등애의 손에 다 죽을지도 모른다. 설령 버텨냈다 하더라도 적이 이 정도까지 진격했을 정도면 이젠 촉한 공격의 진격로를 확보한 셈이므로 이제부터는 방어하기가 훨씬 힘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설령 회제가 농성전으로 시간만 질질 끈다 하더라도 마막이 갖다 바친 강유관부터 재탈환해야만 하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 된다. 이 상황 자체가 한중이 촉한의 월경지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회제는 등애가 이렇게 가깝게 진격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마막이 수비를 할 줄 알았지 저렇게 허무하게 성문을 열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너무 갑자기 나타난 등애에 놀라서 항복한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마막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것은 삼국지연의에만 나타나는 서술이고, 정사에서는 엄연히 강유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되어있다. 즉, 마막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산을 넘어 올 것이라고 생각도 못한 촉군이 마막에게 너무 적은 군사를 준 것이 잘못이다.

또한 촉한의 상태부터 보자면 몇십년전 이릉 전투와 같은 이해불가의 전쟁이나 가정 전투, 진창성 전투 등 촉의 크고 작은 문제점을 도출한 전쟁을 보여주며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가정 전투와 진창성 전투 등은 유비 사후 제갈량을 비롯해 이엄 장완등이 소열제인 유비와 비교해 용인술이란가 인재의 등용 신하들과 통합 등에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며 항복을 하지 않고 위와 계속된 싸움을 펼치기에는 한계가 컸다. 특히 소열제인 유비의 용인술과 인재의 등용과 신하들간 통합은 그것에 매우 능하던 조조도 가장 두려워한 능력이었으나 소열제 본인이 이릉 전투와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전쟁으로 그러한 능력을 죄다 날려먹고 이후 얼마 못가 사망하게 된다.

또한 한나라의 뒤를 이어나가기란 이미 헌제 유협이 조비한테 황제 자리를 넘겨주고 정작 소열제와 회제가 헌제의 뒤를 이어나갈만한 이렇다할 인수인계조차 안된 안타까운 상태여서 원래는 유비는 소열제가 아니 선주였고 유선은 회제는 후주로 불렸다. 이미 위무제, 위문제인 조조 조비 부자가 한나라의 멸망도 모자라 촉한에 대한 타격까지 가하기 위해 왕에 오르고 황제에 오른 것도 이때문이다.

3.4.1. 반론

원준, 손성은 저항여력이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이 두명은 사마씨들의 왕조인 서진 동진에 소속된 사람들이다. 유선의 항복을 비판해야하는 이유가 없다.

흔히 간과되지만 중요한 것이 위군은 한중을 완전히 제압한 것이 아니라 촉의 주요 방어지점을 우회해서 검각으로 진격하고 등애의 별동대도 험준한 길을 지나서 우회기동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역사에서 자주 나오는데 성공한 예는 백제 멸망전[38] 과 병자호란 등이 있고 실패한 예는 살수 대첩[39]과 귀주 대첩 등이 있다. 이러한 전략은 성공하면 굉장히 인적, 물적 손실이 적지만 반대로 실패하면 그대로 대첩이 일어나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올인 전략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적군을 등 뒤에 두므로 안정적인 보급선을 포기하는 대신 한 국가의 머리, 다시 말해서 적국의 군주와 조정을 제압한다는 것인데 글자 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으로 아군이 보유한 군수물자가 다 떨어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하며 적국이 완벽한 청야 전술과 방어를 해내면 당연히 꼼짝없이 대패를 당하게 된다. 중요한 거점을 착실히 점령하지 않았기에 고구려-수 전쟁, 귀주 대첩처럼 모처럼 점령한 영토를 탈환당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유선에 대한 비판을 거둘 수 없는것이, 바로 곽익의 원군 파병 권유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곽익은 분명히 군재가 검증된 장수이고[40], 어찌 되었던 아군보다 많은 적군이 국토에 침입한 국가적 초비상 상황에서 하나의 힘이라도 더 보태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안일했다고 볼 수 밖에는 없다. 곽익이 성도 수비를 맡았으면 면죽에서 등애를 맞이하는건 군 경력이 전무했던 제갈첨이 아닌 그였을 확률이 높았으며, 그 제갈첨한테도 고전한 등애의 부대 입장에서는 더욱더 이기기 어려운 상대가 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게다가 지키지는 않더라도 도망가는 법도 있었다. 사마의가 말한 다섯가지 규칙 중에서 첫번째인 싸우는 것은 제갈첨의 패배로 실패했고 두번째가 지키기, 세번째가 달아나기인데 지키기를 실패하면 달아나면 되며, 실제로 정황 상 촉한 중신들의 여론은 남중 쪽으로 달아나는데 있었다는 추측이 우세하다.[41]

3.5. 소결

요컨대 촉한이 멸망하기 10년 전 정도에 죽었더라면 나쁘진 않은 군주로 남았을 여지가 있는 황제였다.[42][43] 촉한 멸망 10년 전이면 253년인데 비의가 그해에 회제 대신 암살당해 죽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조금 놀기 좋아하긴 했지만 황호도 권세를 누리지 못했고, 정사의 언급처럼 훌륭한 신하가 있을 때는 도의를 따르는 군주였기 때문에 암군까진 아닌 평범한 군주로 남을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삼국지가 2천년의 시간이 지나며 민간설화화, 소설화되면서 삼국지의 인물들은 역사를 떠나 많은 사람들 머리 속에서 이상적인 영웅화가 되었고, 이들 사이에선 "주인공"이나 다름없는데다 소열황제 유비와 제갈량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 안 그래도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던 소열제, 관우, 장비와 제갈량에 대한 미화가 이를 보여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 촉을 멸망시킨 회제는 아주 바보천치거나 인간쓰레기로 보는 폄훼가 많았다. 또한 이에 대한 반발로 회제를 명군의 자질은 있는 불운의 군주로 보는 미화도 있어왔다.

그러나 공정하게 보면 당시 촉한의 상황이 안 좋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안 좋은 상황을 타개할만큼 군주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즉 능력적으로 보면 회제가 훌륭했다고 보기는 무리지만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다고 보기도 힘든 평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황제인 회제가 쓰레기, 혹은 완전한 무능력자였다면 아무리 제갈량이 시스템을 잘 구축해놔도 고대국가가 40년이나 운영되는 건 무리다. 그렇다고 별다른 업적도 없는 회제의 능력을 고평가하는 것도 말도 안된다.

회제의 능력을 두고 뛰어났냐/무능했냐고 딱 잘라 말하는 건 무리인게, 역사적으로 둘 다 아닌 평범한 군주들이 훨씬 많다. 회제 역시 능력으로는 별로 튀지도 않으나 인품은 괜찮고,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그럭저럭 다스릴 평범한 군주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난세에 약소국가를 이끌어나갈 인물은 아니었기에 말년에 결과적으로 큰 실책을 여러번 저질렀고, 이에 따라 암군으로 기록되게 된 것이다.

위에 나온대로 10년 전에 죽었다면 암군까진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분명 말년에 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이와 같은 행적에 따라 암군이라고 불리는 것까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자기가 저지른 행동이니까 말이다. 다만 "회제가 암군이 된 이유가 오직 자신의 무능함과 부정부패 때문이었느냐?" 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제갈공명 사후에 촉한의 상황이 너무 안 좋았던 것도 컸다.

4. 관련 논쟁

회제의 통치가 실망스럽다보니 ' 회제에게 황제를 물려주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하는 떡밥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은 코에이 삼국지가 아니다. 소열제가 게임마냥 능력치 보고 "아, 유선은 능력치가 안되니 왕세자 시키면 안 되겠음."할 수 없다. 연의에 묘사된 내용은 이미 알려진 역사적 내용을 가지고 재구성했기에 '회제는 무능하니 이랬을 것이다.'라고 판단해 각색을 한 거지 정사에는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부터 제갈량 사후 이전까지는 능력에 대해 이렇다 할 검증된 것도 없었고 무능의 징조도 없었다. 물론 소열제가 회제의 아버지이므로, 게임 능력치가 없고 역사에 기록된 일화들이 없더라도 회제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판단을 할 수 있다. 다만 태자 책봉과 같은 중차대한 일에 있어서 소열제가 고려할 수 있는 모든 근거를 종합해서 판단했을 것이다. 여기서 소열제가 양자인 유봉이 더 뛰어남을 알았음에도 친자에게 더 애착이 가서 주관적으로 결정했을 수는 있다. 다만 후세 사람들과 같은 제3자는 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보지 못했고, 역사적 기록만이 남은 상황이기 때문에 기록에만 근거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고, 나머지는 그냥 상상의 영역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게 문제.

특히 "촉한"이라는 국가가 조위에 대항해 명분과 정통성을 갖기 위해서는 소열제의 혈육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위 문제는 역성혁명을 일으켰지만 헌제를 통해 "선양 받았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촉은 전한 고제가 일어섰던 한중을 토대로 한중왕에서 시작했고, 소열제가 칭제한 이후에 선택한 국호도 "한나라"였다. 그리고 본래있던 한나라를 무너뜨린 위 문제를 역적으로 규명한다. 따라서 그에 대립할 만한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는 한실의 핏줄이 닿아있는 소열제의 혈육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44]

일단 소열제의 한중왕 즉위 시점에서 보자면 회제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있냐에 대해서 의문점이 든다. 유봉의 경우 양아들인 탓에 서자이긴 해도 온전한 혈육인 회제에 비해 정통성 면에서 떨어지므로 국론 분열의 우려가 있다. 당장 위 명제가 양자인 전폐제를 후계로 삼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자. 능력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유봉은 군공을 세운 전적이 있지만 군주로서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천하는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45] 결과론적으로 봐도 유봉 역시 맹달과 불필요하게 반목하며 그의 군악대를 몰수한 탓에 맹달이 위로 투항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는 등 리더십 측면에서 유선과 비교해도 미덥지 못한 점이 많다.[46] 그렇다고 유영 유리의 경우 회제보다 낫다고 장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결정적으로 이 둘은 너무 어렸다.

그렇다고 소열제가 유언을 남긴 것처럼 제갈량이 회제의 제위를 찬탈하는 것[47]도 불가능하다. 아니 애시당초 위에서 설명했지만 소열제와 제갈량이 만들고 세운 시스템 자체가 황권의 권위 확립과 그를 바탕으로 한 신권의 원활한 통치인데 그걸 만든 사람이 뒤집을 리가 없다. 아무리 선제가 유언을 그리 남겼다고 해도 과연 따를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의문이고, 결정적으로 회제가 막 즉위했을 시점에도 정치적 경험이 없다 뿐이지 회제의 능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 괜히 소제를 폐위한 동탁 역적이라고 욕을 먹는 게 아니다. 물론 동탁이 게임 데이터[48]를 들고 와 "후소제가 이렇게 능력치가 부족해 무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으므로 폐위시켜야 함." 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49] 설령 그랬다 쳐도 욕을 먹을 판국이다. 또한 헌제 조씨 가문으로 예로 들면 더 심각해지는데, 이렇게 보면 조씨 집안이 했던 짓을 그대로 답습하는 격이 된다. 이러면 촉한정통론이고 나발이고 모든게 무너진다. 결론적으로 촉한은 그 국가구조 상 조위나 손오와는 달리 한 황실종친의 명맥을 잇는 국가라는 상징성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제갈량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그가 황실종친 유량(劉亮)이 아닌 이상 회제에 대한 제위를 건드리면 안 된다.

즉, 능력이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폐위를 운운하는 건 명분도 없을뿐더러 애당초 회제의 어머니 감씨를 소열황후로 높여서 회제의 권위를 확고부동하게 만든 것이 제갈량이다. 제갈량 입장에선 회제의 정통성을 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촉한이라는 나라 자체의 대의명분, 소열제-제갈량의 정치적 입장이 바로 소열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제3의 한실을 세우고 나라를 찬탈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간적 조씨를 멸하는 것(한적불양립)이라는 걸 생각해보자. 손성같은 경우엔 소열제의 저 발언을 그야말로 미친 짓이라며 디스했지만 오히려 소열제의 이 발언이야말로 한실 부흥 명분하에 확고부동한 황제의 권위가 세워진 상황에서 제갈량이 그럴리가 없기에 나올 수 있는 발언이고 그 시스템을 세우는 데 일조한 제갈량이 그걸 절대로 모를 리가 없다.[50][51]

거기에 소열제가 붕어한 223년 시점에서 소열제의 실질적인 정치적 후계자는 나이도 어리고 능력도 아직은 미숙한 혈육인 회제가 아니라 능력이 검증된[52] 제갈량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 발언 자체도 소열제가 자신의 사후 제갈량이 '선제가 무한한 권력을 넘겨 주겠다고 할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고 인증해 그의 위치를 촉한에서 실질적 1인자로서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기에 나온 발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소열제는 제갈량은 자신의 천하삼분지계 전략 다 짜주면서 그걸 실현까지 시켜준 최고의 브레인이자,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으며, 수어지교 타령하며 밤마다 손잡고 잠자기까지 한 자신이 제일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보고 뒷편에서 반란들을 진압한 이엄을 2인자로 삼을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열제는 제갈량에게 촉한을 맡길 수밖에 없었고, 제갈량이 소열제 사후 국정을 맡다보면 분명 회제의 권능을 넘어서 처리해야할 업무도 분명히 예측했다면, 제갈량에게 황제까지 갈아치울수 있는 권능을 부여함으로써[53] 제갈량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제갈량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역모'라는게 성립하지 않도록 모든 권력을 제갈량에게 몰빵시켜준 격을 만들었다. 황제마저 갈아치울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았다면 그보더 수위가 약한 모든 행위에 대해서 제갈량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능을 소열제로부터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54] 그게 소열제가 촉한을 위해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를 통해 삼국지 후반부 제갈량은 소열제의 유지이기도 한 원맨쇼 북벌[55]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만한 시스템 구축과 신뢰 관계가 있었기에 후세사람들이 '한 소열과 제갈무후'를 이상적인 군신의 관계라고 칭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인이 촉한 멸망의 원인이 되어 무능의 대명사로 찍혀 후대 창작물에서 백하팔인으로 취급되고 회제의 황제 즉위가 불행의 씨앗으로 여겨지는 것이지, 소열제가 한중왕에 오른 219년 시점에서는 아들들의 능력이 검증된 바 없기에 그나마 친장자라 정통성이 있는 회제의 치세는 당대로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물론 강유 대장군에 오르고 난 뒤 무능을 이유로 정변을 일으켜 교체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눈 앞의 강대한 적을 앞두고 내분을 일으키는 것만큼 나라를 좀먹는 일은 없으니[56] 논외로 하고 애당초 강유 자체도 군부 외에선 세력도 없거니와 나라가 망한 와중에 어떻게든 유씨 사직 한번 되살려보겠다고 종회한테 환갑이 넘은 나이에 눈물겨운 제비짓까지 하다가 죽은 인물이라 IF가 의미가 없다.

그 외에 " 곽순 비의가 아닌 회제를 죽였다면 촉한 구국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개드립도 있지만 그래봐야 회제의 장남인 태자 유선(劉璿)이 촉한의 3대 황제가 되는 것이니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오히려 곽순이 그럭저럭 나라를 잘 운용하고 있던 회제를 죽여 촉한을 어지럽혔다는 평가를 들을 가능성이 더 높다.


[1] 유비가 황제 자리에 있던 기간은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한중왕 시절까지 합쳐도 4년도 안 된다. [2] 유선 이후로 40년 이상 재위한 통일왕조의 군주는 당나라 현종인데, 752년에 가서야 재위 40년 차를 맞는다. 촉 멸망 시점이 263년이니 491년만에 40년 이상 재위 군주가 나온 셈이다. 물론 서하 인종이나 요나라 성종 등 통일왕조라는 조건을 제외하고 보면 50년이 넘는 치세를 자랑한 임금들도 있었다. [3] 아래에 유학 이지연의 말을 보면 알겠지만 비단 지금만이 아닌 옛날에도 둘을 비교하며 평가하였다. 두 사람의 궤적이 상당히 비슷했다는 의미. [4] 촉한의 간신배로 알려진 황호는 적어도 동윤이 살아있을 때는 동윤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회제에게 접근을 못했었다. 황호의 전횡은 동윤이 죽으면서 시작되었고, 진지가 죽으면서 브레이크가 풀린다. [5] 게다가 위로서는 정통성 측면에서 촉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는데(선양은 위 문제가 받았지만, 소열제도 황실의 후손으로서 국호를 한으로 선언했으므로), 40년이나 지나서야 촉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공격해 들어가기가 힘들고, 혹여 들어갔다가 깨지면 장안까지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년에 걸친 공작인 비의 암살과 준비 끝에 공격했던 것. 참고로 촉에는 위로부터의 투항 장수가 꽤 많았으며 장억이 이들을 중히 여기지 말라고 비의에게 충고한 내용도 엄연히 있다. [6] 애시당초 제갈량은 소열제의 탁고 대신이라는 입장에서 국사를 총괄하고 있어서 회제가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제갈량 이후의 회제의 행적을 보면 대체적으로 신하에게 의지하는 정치를 한 것은 분명하다. [7] 물론 제갈량이나 이순신 같은 충성도도 능력도 확실한 괴수같은 인재는 오히려 자기 입장 때문에 조언 무시하다 이릉대전 터트려서 나락 가거나 이상하게 견제하다 정유재란 터트리느니 아무것도 안하고 하고싶은 대로 하라고 프리패스 주는 게 가장 잘 써먹는 확실한 방법이긴 하다. 입헌군주국처럼 군림하면서 정통성이랑 권력이나 주고 직접 뭘 하지 않는 형태의 정치는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면 나쁜 게 아니다. 제갈량도 그런 시스템은 거의 다 완비해놓고 갔고. 사실 촉한 멸망 때도 결사항전이 중론이었으므로 유선이 알아서 하라고 했으면 됐을 걸 괜히 나서서 항복한 거다. 물론 이엄, 진지, 황호 같은 병신라인은 아니다 싶으면 유선 본인이 나서서 쳐냈어야 하는 일인데 아니라는걸 몰랐던건지 쳐낼 의지가 없었던 건지 어쨌든 안해서 망한 거 맞다. [8] 당시 촉한에 인재가 없었다고 하기에는 두각을 드러낸 인물들이 너무 많다. 강유는 말할것도 없고 극정, 곽익, 장익, 요화, 나헌 등까지. 거기다가 결국은 실패한 인재인 제갈첨도 나름의 가능성이 있었고 부장급인 유은, 장빈, 왕함 등도 분명히 할 일을 충실하게 한 인재들이며 촉한이 망하고 나서도 남중에서 나름 활약을 보여준 곽익 같은 경우도 있다. [9] 들여다 보지도 않았다. [10] 첫 번째에서 강유의 말대로 행동했다면 위군은 음평교랑 양평관에서 발이 묶였을 확률이 크고, 두 번째에서 강유관을 적임자에게 맡겼다면 등애군은 말그대로 전멸, 세 번째에서 곽익을 불렀다면 성도 방어군을 그와 제갈첨이 같이 맡았을 거를 생각하면 역시 등애군은 면죽에서, 종회군은 검각에서 전멸했을 확률이 크다. [11] 이 상황은 3차 여요전쟁 고려 현종이 처했던 상황이다. 현종은 거란군이 고려군의 방어진을 우회해오자 청야작전을 실시했고, 결국 항복할 여지가 없다는걸 느낀 소배압은 뭘 해보지도 못하고 퇴각하다가 강감찬의 부대에 전멸당했다. 물론 현종은 유선처럼 암군이 아닌 고려사 최고의 명군이기에 철저하게 준비를 해놓기는 했다는게 차이점이다. [12] 또한 촉한 멸망 이후 익주 지방은 서진이 동오를 멸망시킬 때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하게 되어 딱히 백성들은 편하지도 않았다는게 함정이다. 백성들을 위해 항복했다기보단 회제는 그냥 정신줄 놓고 있다가 멘붕 와서 항복한 게 다다. [13] 이 부분에 있어서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게 분명 회제가 국정 운영을 주도해서 별다른 치적을 올린 건 없지만, 제갈량을 위시한 촉한의 4영이 쌓은 여러 공적들은 얼마든지 회제의 치적으로 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회제의 허가 아래에서 진행돼 결실을 맺은 것들이다. [14] 물론 신하들이라고 손만 놓은 건 아니었다. 진지를 비판한 방굉부터 시작해 번건, 제갈첨, 동궐 등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이들은 이전 시대 촉한사영 만큼의 권위가 없었다. 그나마 제갈첨이 아버지의 정치적 후광을 받고 있었지만 제갈첨은 너무 늦은 시기에 정치에 참여한 데다가 경륜도 부족했다. 나중에는 정치에 신경을 쓰지 않던 강유까지도 이걸 수습해보려 했지만 심지어 녹상서사 직위임에도 정치적으로 황호에게 파워가 밀려 외지로 도망가는 신세만 되었을 정도다. [15] 세종실록을 보면 '布野'는 '人畜布野'의 뜻으로 쓰여 '사람과 짐승이 들에 펴졌으며'라고 써서 들에 널리 퍼짐을 뜻하는 말이다. 또, 여량(餘糧)은 먹고 쓰고 남은, 잉여의 식량을 뜻하고 '초학기(初學記)'에 따르면 ' 棲畝'의 뜻은 남은 곡식이 밭이랑이 있음을 뜻하며 풍년의 성세를 칭송하였다는 말이고 네이버 한자사전에 따르면 棲畝는 ' 남은 곡식이 밭이랑에 가득히 쌓여 있다는 뜻으로, 풍년이 들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해당 해석은 여분의 식량과 남은 곡식이 널려있어 풍년이 들었다는 관용어구로 봐야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성종 18년 8월 5일 기사에도 (풍년으로) '식량이 남아 돌아 밭이랑에 두었다(餘糧, 棲于畝)'라는 유사 표현이 등장하고 광해 11년 10월 13일 기사에도 요동과 광녕 지역에 해마다 풍년이 들어 '여분의 곡식이 밭고랑에 쌓여 있다(餘糧棲畝)'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16] 그냥 추수철이라서 곡식이 들에 남았다고 해석하기도 어렵다. 회제가 등애에게 항복하여 저 서찰을 보낸 때가 음력 11월 겨울이다. 즉, 이미 추수철은 끝났고 한겨울인데도 여분의 식량과 곡식들이 들판에 널려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그만큼 '추수철이 지나도 여분의 곡식이 들판에 남았다'='풍요롭다'는 해석을 해야한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추수철에 추수를 못 했다고 보기 어려운 게 자치통감에 따르면 등애가 평지로 들어올 때까지 촉한 인심은 동요되지 않았다. 삼국지집해에서도 등애가 평지에 들어오고 나서야 촉한 인심이 동요되었다고 해석하는 게 맞는다고 하고 있다. 또, 등애가 음평으로 들어간 때가 겨울 10월이다. 이미 그 시점에도 추수철은 다 끝나고 추수가 끝난 시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추수철인데 수확을 못해서 들에 곡식이 남았다라는 해석은 들어맞지 않는다. [17] 그리고 '중국전사 위진남북조경제사'에서도 '제갈량의 사후에 장완, 비의가 잇따라 집권하여, 제갈량의 기정 국책을 계속 집행하고, 내부 안정을 중시하여, 쉽사리 출병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촉중의 농업생산은 이 시기에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촉한 말기까지 여전히 칭하기를 '남녀(백성)들은 들에 퍼져있고 농사지은 곡식은 들판에 널려있다'고 할 정도로 농업에도 근본적인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诸葛亮死后,蒋琬、费祎相继执政,继续执行诸葛亮的既定国策,重视内部安定,没有轻易出兵攻魏。因此,蜀中农业生产在这一时期能持续稳定发展。直至蜀末,犹谓 男女布野,农谷栖亩,农业也未受到根本损伤。)'라고 하여 촉의 풍요로움이 유지되었다 보고 있다. [18] 손호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애초에 손호의 의연한 태도라는 것 자체가 정치인이나 군주로서 의미있는 행동이었다고 보기는 힘들고, 사마염의 입장에서 보면 알아서 기는 유선이든 바락바락 대드는 손호든 어차피 둘 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기에 손호가 개기는 것도 웃어넘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비꼬아 말한다면, 손호의 '의연한 태도'라는 것도 유선이 보여준 우스꽝스럽고 굴종적인 모습과는 조금 다른 방향의 광대짓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19] 사실 손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역대급으로 검소한 군주인 대제 역시 여색은 꽤 밝힌 인물이다. 물론 위 무제나 문제처럼 도덕적 지탄을 받을 만한 과정을 통해 여색을 밝힌 것도 아니고 자기 손자 말제의 5천 궁녀 컬렉션, 사마염의 1만 궁녀 컬렉션처럼 국가 재정에 심한 압박을 줬던 것도 아니니 고대 전제군주 레벨에선 흠잡을 구석은 아니다. 유선 같은 경우는 거느린 궁녀 수는 알려지지 않았고 후비를 12명 뒀는데 더 늘리고 싶다고 하자 동윤에게 저지당했던 기록이 있다. 참고로 대제는 노복+궁녀가 100명을 넘지 않아 당대에 매우 검소한 군주란 소릴 들었으니 놀기 좋아한다는 평을 들었던 회제가 거느린 궁녀의 수는 못해도 세 자리 수는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황제도 아니고 왕도 아니고 고작 형주라는 지방의 실세에 불과했던 채모가 첩 수백 명을 들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리고 당대 난세 대호족들이 보여준 인간 군상을 감안할 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채모 같은 케이스가 분명 더 있었을 것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대제는 정말 검소한 고대 중국의 전제 군주가 맞다. [20] 삼국전투기에서는 노는 거 좋아하는데 통금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녀석이라고 적절하게 비유했다. [21] 영민한 재상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회제의 친정 체제가 강화될수록 촉한은 사면령이 증가한다. 이는 제갈량 이래로 확립된 법치를 해친다는 부정적인 평을 받았지만, 회제 나름대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매력과 장점을 어필해 법치에 입각했던 기존의 권력과는 다른 변별적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백성의 호감을 사고 황권을 강화하려는 제스처였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론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신하들의 문란함을 야기해 촉한의 멸망을 앞당기는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는 혹평을 듣지만 의도 자체를 좋게 보자면 진나라의 가혹한 법치에 지쳐있던 백성들을 위무하고자 약법삼장을 내세운 선조 한 고제의 민심 유화책을 카피한 정책이었다. 다만 제갈량은 공명정대하여 원망하는 자가 없을 정도라고 극찬한 것으로 보았을 때 딱히 좋은 것은 아닐 지 모른다. [22] 연로하고 병에 걸린 장억이 회제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북벌에 꼭 종군하고 싶다고 밝히자 회제가 눈물을 쏟았다는 기록 역시 이에 대한 증좌일지도 모르며 결국 장억은 북벌에서 순사한다. 결론적으로 회제가 능력은 몰라도 인간적으론 꽤 선량하고 인정많은 인물이었다는 것은 사실에 근접할 것이다. [23] 제갈량의 출사표에는 소인배와 환관을 멀리하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회제는 이 것을 잊은듯이 환관을 곁에 둬버리는 짓을 해버리고 만다. 사실 환관 문제는 비단 한나라뿐만 아니라 당나라때는 변영성, 고력사 등의 환관을 감군으로 두었는데 이로 인해 명장 고선지가 모함으로 처형당하기도 했고 먼 훗날인 명나라때는 위충현이라는 환관의 끝판왕이 나올 정도로 중국사 내내 문제가 되는데, 외척과 권신들에 대한 대항마로 황제가 환관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전면에 내세우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국사를 보면 황제가 오늘 내일 하는 경우 환관들이 결탁하여 황제의 명을 사칭, 병문안을 위한 입조를 금지하고 후계자를 조작하는 등의 막장상황이 자주 벌어졌는데, 철처히 내시들을 권력과 떨어뜨려 놓았던 조선왕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4] 다만 제갈량에게 사죄하는 유염의 글을 보면 유염은 애당초 술에 취해 실수를 하는 일도 많았고 중대한 실수로 재판에 넘겨질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유염의 처형은 그런 것이 쌓이고 쌓이다가 이 일로 폭발한 것일 수도 있다. [25] 회제는 기록에서 화를 낸 적이 거의 없다. [26] 소열제에게 대놓고 난 유장의 신하지 니 신하가 아니야, 이 새끼야. 너를 힘이 없어서 섬기지 니가 좋아서 섬기는 줄 알아?라는, 엄청나게 불경한 발언을 한 것이다. 그리고 보면 유장이 유언을 세습한 것도 정당하게 세습한 게 아니라 유언이 죽자 조정에서 유언의 후임자를 파견했는데 유장이 이를 날치기로 유언의 후임자가 되고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를 추방했다. 그리고 그 관리를 유언의 후임자로 삼으려고 유장과 싸우다가 도망친 이가 다름아닌 감녕이다. [27] 부족한 군주 개인의 역량을 메꾸고자 신권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신하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되, 군주의 위엄과 황권의 위상을 격하시키지 않는 권력 분립의 균형 달성은 흔히 살얼음판을 걷는 것에 비유될 정도로 조금만 삐끗해도 황권을 망가뜨릴 수 있는 고도의 정치술이다. 물론 이걸 다 회제의 능력으로 보기는 어렵고 소열제- 제갈량 두 사람이 구축한 이래로 확립된 황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룩한 촉한의 정치 시스템을 잘 계승해서 잘 써먹었다고 봐야 할 듯. 당장 위 명제가 유능한 사마의에게 홀딱 빠져 권력을 무작정 강화시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다만 조예는 부모의 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사마의에게 인간적으로 집착한 거라서 비교 대상으로는 애매하다. [28] <그러나 제갈량은 유언에서까지 소열제의 은혜를 생각하고, 아버지가 자신을 맡긴 탁고대신이고 자신이 황제를 하기위한 기틀과 방향을 마련한 사람이다, 신권이 뭐고간에 이런 은혜를 받았는데도 사당을 세우는 것과 제갈량을 본받는 것을 장려하지 않고 오히려 사사로운 사당을 금지시키니 자신의 권위를 위한 일이라기에는 이상하다> 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전제군주정에서 '왕권'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일단 유교적 군주정의 논리대로라면 <군주가 신하에게 은혜를 받았다> 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전력을 다해 군주를 보필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은 신하의 의무이기 때문. 물론 이것은 원칙일 뿐이고 원칙이 언제나 지켜진다는 보장은 없으니 현실적으로 제갈량은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헌신적인 충성을 보여주었고, 이에 대해 회제 개인의 차원에서는 당연히 제갈량 개인에게 고마움을 느낄 만 하며, 실제로도 제갈량 사후 신하의 죽음에 황제가 사흘간 상복을 입고 애도하는 모습이라거나, 평소에는 사람 죽이기를 싫어했으면서도 이막이 제갈량을 비방하자 격노하여 바로 투옥하고 죽여버리는 모습까지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회제 개인의 감정 및 제갈량 개인의 품성과는 별개로 '공식적으로는' 아무리 위대한 재상 제갈량이라고 해도 그 권위가 황제의 권위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 게다가 사당을 (그것도 수도인 성도에) 세우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곧 그 사당이 모시는 대상(이 경우 제갈량)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숭상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제갈량과 같은 충신을 본받는 것을 널리 장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한다면 유선은 이미 제갈량의 죽음에 대해 상복을 입는다는, 당시 기준으로는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행동을 해보임으로써 자신이 충성스러운 재상의 죽음을 얼마나 비통하게 여기고 있는지 공공연히 드러내보였다. (물론 이는 제갈량의 위상을 크게 높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그를 본받으라고 장려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더해 사당을 지어 지속적인 추앙의 대상으로까지 삼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고 견제 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즉 본 문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설명하듯, 회제는 다른 통치역량은 어찌됐건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적 균형감각은 상당히 능동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신권이고 뭐고 제갈량을 본받는것을 장려하지 않고 사당을 금지시키는 것은 이상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권력과 정치의 논리나 당대 사회에서 정치적 행위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 문제를 그저 단순한 개인간의 관계와 똑같이 보는데서 나타난 오류인 것. [29] 당장 십상시를 보라. 그들의 가족과 친구조차 국정에 간섭했는 데 반해 황호는 그러지 못했다. [30] 제갈량이 올린 출사표에는 '후한이 망한 이유는 환관과 소인을 가까이 하였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도 회제는 황호를 가까이 한다. [31] 이론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제갈량조차 4차 북벌과 5차 북벌 사이엔 3년의 텀이 있었고 강유 자신이 계획을 수립한 북벌은 제갈량의 북벌 20여년 후이기 때문. [32] 수경주에 따르면 도안현에 도관이 있는데 촉의 태수였던 이빙이 여기에 큰 제방을 만들었고 이를 전붕, 혹은 전언이라고 하고 그 위에 관판이라고 조망대가 있었다. [33] 그래서 조선 시대 정조 같은 임금은 극정의 이 일화를 보고 그래도 회제가 군주고 말만 촉이 그립지 않다고 한거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했다. [34] 진북장군으로서 북쪽을 진수하며 강유를 뒷받침했어야 할 진지는 성도에서 대사면이나 매년 연속으로 내리고 있었다. 생전의 제갈량이 제일 싫어할 나라 운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35] 물론 유은이나 왕사 등과 같이 강유를 보필하는 인재들도 있었지만 이들도 나이가 매우 많았다. [36] 워낙에 촉한의 기록이 부실해서 쉽게 단정하기 어렵지만 사서에 남아있는 기록만으로 볼 때 촉한 인재풀의 문제점은 내정을 돌볼 만한 인재들이 없던 게 아니었다. 촉한 말기 인재풀을 살펴보면 문관 성향이 아닌 무관 성향의 인재들이 극히 부족해보인다. 오죽하면 60대 초반의 강유가 군부에선 어린 축에 들어갈 정도이다. 게다가 촉한 말기 고위급 장군직에 올랐던 인물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종예 동궐 같은 경우는 문관으로 봉직한 세월이 압도적으로 긴 인물들이었다. [37] 성씨로 유추할 수 있겠지만 바로 그 방통의 아들이다. [38] 나당연합군에게 행운이 따라주었는데 의자왕이 어쨌든 웅진성까지 파천하는데 성공했고 백제의 지방군이 건재했으며, 고구려와 일본이 백제에게 원군을 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웅진성주였던 예식진이 의자왕을 체포해서 나당연합군에 갖다 바치는 반역을 저지르는 바람에 백제가 멸망하게 된 것이다. [39] 살수에서 참패한 수나라군은 무려 30만이 넘는 대군을 상실해서 국가통제력이 약화되어 지방에서 반란이 들끊는등 내우외환에 직면하게 되었고 6년만에 수나라 몰락의 원인이 된다. [40] 그 이전에도 그가 남중으로 파견나가게 된 계기였던 요족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토벌했으며, 요족의 우두머리를 참했다. 그 이후에도 촉한이 망하자마자 조위의 장수로서 마침 여흥의 반란이 있었던 교주를 공격해 함락시키는 등 공적이 화려한 장수였다. 곽익이 대활약한 이 시기(촉한 멸망 이후 ~ 동오 멸망 이전 사이)가 삼국지에서 가장 관심이 적은 시대라 공적이 대중한테 많이 뭍힌 편이다. [41] 초주가 항복론을 설파하면서 반박했던 주 논지가 남중으로 몽진하자는 의견이였기 때문. [42] 촉한사영으로 대표되는 명재상들로 하여금 국정 운영을 잘했고, 무엇보다 인성이 좋았다는건 팩트다. [43] 다만 인성이 좋았기 때문에 성군이면 몰라도 명군은 무리인게 계속 강조되지만 특출난 업적이 없다는 것도 팩트다. 삼국시대에서 손꼽히는 영웅인 아버지, 삼국시대 최고의 행정가가 만들어놓은 시스템을, 수비하기 최적의 위치에서 단순히 유지만 한 군주에게 '명군'이라는 운운이 나올 정도로 당대 인물들이 허접하진 않았다. 수성능력으로만 따지면 시스템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권을 물려받아 당대 최고의 영웅들인 조조(적벽대전)와 유비(이릉대전)의 거대한 공세를 연달아 막아내고 오나라를 체계적인 국가로 설립, 황제까지 올린 손권의 능력이 더 대단했다.(물론 손권도 유선과 마찬가지로 말년의 실책이 결정적이었다) 무엇보다 명군은 단순히 명재상들을 기용하고 인품이 좋았다는 이유만으로 붙는 수식어가 아니다. [44] 또한 삼국시대 이후 1800여년 동안 구주 중 하나(라고 하긴 익주가 굉장히 크고 영향력이 큰 땅이긴 하지만)만을 차지한 촉한을 정통으로 취급하는 촉한정통론이 그토록 인기가 많았던 것도 어쨌거나 이 나라가 한 황실에 핏줄이 닿아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방계 중 방계고 희미한 줄이라곤 하나 어쨌든 분명한 유씨의 나라였으니까. 그런데 고작 2대도 채 못 가고 양자나, 제갈량에게 황제자리가 갔다면 그 명분이 송두리때 사라지는 셈이고, "걸출한 영웅들이 있던 지방국가" 이상으로 기억되진 못했을 것이다. 촉한 정도 국력을 지닌 국가는 중국 역사에 많았다. 그런데 이 작은 국가가 2천년이 지나는 동안 그 실제 국력 및 위상보다도 더욱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된 것에는 촉한정통론이 컸다. 만약 이 명분이 없었다면 당대에도 큰 문제였겠지만, 후대에 와서는 이 국가의 인물들이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45] 동시대 인물을 봐도 원소의 장남 원담이 있다. 사실 원담은 공손찬의 주요 부관인 전해가 맡아 공손찬 세력이 실지배하고 있던 청주를 점령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청주를 맡아 다스릴때 능력은 기록에 따르면 그야말로 폐급이었다. 물론 유봉이 원담처럼 극단적인 케이스일 것이란 보장은 없지만 포인트는 유봉의 능력(정치/행정)이 전혀 입증된게 없다는 것이다. 유봉과 맹달이 상용을 점령한 것은 219년으로, 이듬해 4월에 유봉이 문책당하고 처형당한 것을 생각하면 군주로서 능력에 전혀 참고가 되지 않는다. 물론 유봉이 군주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포인트는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없다는 것, 즉 유봉이 유선보다 잘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적자를 제치고 서자도 얼자도 아닌 양자를 후계로 내세우는 경우는 없다. [46] 일단 유선은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휘하 신하들과 절대로 반목하는 군주는 아니었다. [47] 제갈량 본인이 황제가 되거나 아니면 소열제의 다른 아들을 옹립하는 것을 말한다. [48] 삼국지에서 후한 황제들의 능력치는 보통 책정되지 않지만 일부 시리즈 한정으로 더미 데이터화 되어 있기는 하다. [49] 물론 후소제의 언행이 경박하다는 기록은 있으나 후소제와 헌제의 나이가 모두 어린 탓에 둘을 비교하며 자질론을 운운하는 건 시기상조다. 게다가 언제나 언급되는것이지만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 폐위시킨 황제에 대한 기록이 좋을 리가 없다. [50] 연의와 달리 실제로 유비는 굉장히 정치적 감각이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촉한은 제갈량이 아닌 유비의 인품과 능력을 보고 모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나라였고, 위연이나 조운은 물론 촉한사영 모두 유비가 직접 발탁한 인물들이었다.(물론 장완처럼 제갈량 휘하에서 빛을 발한 인물도 있다) 게다가 제갈량이 특출난 인재라곤 하지만 유비가 죽을 당시 다른 고위급 문인들을 압도하는 업적이나 경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실상 정치적으로 제갈량의 가장 큰 힘은 '소열제의 신뢰'였는데, 이 상황에서 그 아들을 쫓아내고 제위를 찬탈하면 이게 사라져버린다. 한마디로 유비의 사람들이 유비가 믿은 인물이니까 제갈량을 따른 것인데, 제갈량이 유비의 아들을 쫓아낸다는 건 정치적으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51] 유비의 정치적 감각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가 입촉 후 위연을 한중을 수비하는 독한중/한중태수로 삼은 것인데, 이 직위는 장비 본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장비가 임명될 것이라고 여겼기에 놀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실제로 유비의 오른팔인 관우가 가장 중요한 형주 사령관이었기에, 조조를 적대해야하는 유비 입장에선 왼팔인 장비에게 한중을 맡기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부곡 출신인 위연에게 이 중책을 맡기면서 파서태수인 장비에게 위연보다 훨씬 높은 벼슬과 후방이 된 익주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겼다. 이로서 다음 세대 장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위연의 충성심과 입지를 높이는 동시에, 자신의 형제같은 존재인 장비도 섭섭하지 않게 한 밸런스 좋은 인사였다.(장비는 당시 우장군, 이후 거기장군의 위치까지 올랐으니 당시 진원장군에 불과한 위연에게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재밌는 건 이때에도 사람들을 모아놓고 위연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고, 위연은 패기있는 대답을 하는 모습이 기록됐다는 것. 어찌보면 뒷배경이 빈약한 위연의 입지를 높이는 일종의 정치적 쇼라고 볼 수 있다. [52] 소열제 스스로가 탁고를 맡기기 전에 그대의 재능은 조비의 10배이니 충분히 대사를 이룰수 있다고 언급한 걸 기억해 보자. [53] 물론 절대 제갈량이 자신이 황제가 될 거란 생각을 안 하고 촉한에 충성을 바칠 거라고 소열제는 굳게 신뢰하고 있었을 공산이 높다. [54] 이 점에서 어린 회제 외에 제갈량보다 더 경력이 오래된 다른 공신들을 통제할 권리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조운같은 인물은 생년이 불명이지만 제갈량이 27세 나이로 임관할 당시 이미 오랜기간 유비를 모신 상태였다. 또한 이 시점에서 제갈량은 동오와 동맹을 성사시키고 유비의 익주평정을 돕는 등 공을 많이 세우고 승상에 자리에 올라있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서처럼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엄청난 존재감을 뿜는 정도는 아니었다. (박망파 전투는 제갈량이 유비에게 거둬지기 전에 일어났고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이나 화살 훔치기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조운이나 위연같은 사람들은 유비에게 감화되어, 혹은 그 명분에 끌려 온 사람들이고 제갈량을 포함한 촉한사영 모두 유비가 기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조운같은 이들은 충성하던 유비가 죽었는데 아무리 상관이라곤 하나 이력도 훨씬 적은 사람이 전권을 잡았으니 좀 찜찜할 수도 있는 것을, 유비가 이렇게 유언을 남김으로서 위계를 확실히 해준 것이다. 근데 만약 그렇게까지 소열제에게 은혜를 입은 제갈량이 역모를 했는데도 이들이 제갈량에게 충성할까? [55] 병권, 인사권, 정권을 모두 손에 쥐어야만 가능한, 사실 황제가 실질적으로 주도해야 하는 업무 [56] 실제로 손침 손량에게 그랬다가 정봉의 지원을 받은 손휴에게 죽었고, 사마씨가 황제를 폐위하자 나라 곳곳에서 들고 일어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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