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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23:57:39

촉한정통론

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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蜀漢正統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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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옛날 문왕(文王 : 주나라의 문왕)은 덕행을 노래했고 무왕(武王)은 흥성함을 노래했다. 무릇 절대 군주는 몸을 세워 도의(道)를 행하는데, 오직 한 시대뿐만 아니라 또 다음 왕조의 기초를 세우는 단서를 열어 후세까지 빛을 발하는 자이다. 우리 중한[1] 말기부터 왕실은 권력을 잃고, 영웅호걸 함께 일어나 전쟁이 빈번하여 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도탄의 고통 속으로 빠졌다. 그 결과 선제(先主)께서는 이 일을 개탄하며 걱정하셨다. (燕)ㆍ(代) 땅에서 처음 일어났을 때에는 인의의 명성이 현저했고, (齊)ㆍ(魯)에 온 이후( 예주 자사가 되어 원소에게 몸을 기탁한 일)로는 풍모가 널리 퍼졌으며, 형주(荊)ㆍ영(郢) 땅에서 창업했을 때는 군주와 신하의 마음이 합쳐졌고, 머리를 돌려 (吳)와 (越) 땅을 원조했을 때는 현인이든 어리석은 자든 간에 모두 그의 명성을 우러렀으며, (巴)ㆍ(蜀)에서 위세를 떨쳤을 때 천하가 진동되었고, 용(庸)ㆍ한(漢)에서 병사를 일으켰을 때( 한중토벌을 가리킴)는 강대한 적군은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때문에 우리 군주는 고조(高祖)의 창업을 계속 이어 한 황실(皇漢)의 종묘 제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 서 -

촉한 한나라를 정통으로 계승한 국가라는 주장을 말한다.

유교가 주요한 통치이념이었던 중국의 왕조들은 어떤 왕조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왕조는 그렇지 않은가를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다. 보통 중원을 통일한 국가들은 그 정통성을 인정받아 왔으므로, 후한이 멸망한 후 송 왕조 초기까지는 당시 삼국을 통일하였던 서진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성리학적 도덕론이 대두하자 여러가지 주장들과 근거들이 얽혀 삼국시대에서 한나라의 정통을 어느 국가가 이었는지에 대하여 논쟁이 발생하였다. 촉한정통론은 삼국시대가 끝나고 북송에서 성리학이 대두한 이후의 왕조들이 채택한, 한나라와 서진 가운데 촉나라가 한나라의 정통을 이었다는 주장이다.

촉한정통론의 정통성은 전 왕조인 한나라를 기준으로 삼는다. 한황실의 후예였던 유비가 한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촉한을 건국했던만큼, 국가 조직의 이양보다 전 왕조와 이어지는 연결성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마찬가지로 동진과 바로 이어지는 남조 또한 북조에 비해 세력이 작고 마지막 왕조인 진이 북조에서 나온 에게 멸망당했음에도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논리가 있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 촉한정통론이 동진 시기부터 부각된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촉한의 정통성을 완전히 인정하는 역사가들은 아예 촉(익주, 現 사천성) 지방의 지방정권임을 너무 짙게 드러내는 '촉'한보다는 전한,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이라는 의미의 계한(季漢)[2]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촉한정통론에서 한나라 헌제 조비에게 선양한 시점인 220년에 멸망한 것을 부정하며 유선 사마소에게 항복한 263년에 멸망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

본디 중국은 전한 한고제 유방부터 정안공 유영까지 15대와 후한 광무제 유수부터 헌제 유협까지 14대를 합쳐 총 29대로 보고 있지만 촉한정통론에 의하면 여기에 촉한 소열제 유비 회제 유선이 추가되어 후한을 16대, 한 전체를 31대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촉한정통론은 한나라의 황제 조위정통론보다 2명(유비, 유선)이 더 재위한 것으로 여긴다.

2. 변천사

2.1. 당대의 맥락

역사적으로 촉한정통론은 후한말의 한실 부흥이라는 명분론에 맥이 닿아 있다. 이렇게 한실부흥에 집착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한나라의 독특한 역사적 위상 때문이다. 전설적인 상, 주를 제외하고 매우 잠깐 존재했던 통일 왕조 진나라를 제외하면, 한나라는 당시 역사상 중원 사람들이 경험한 실제적인 첫 번째 통일왕조였으며, 그 건국 과정도 꽤 흥미진진하고 상징적이었다. 현대에도 중원에 거주하던 민족을 ' 한족(漢族/汉族)'이라 하고 그들의 언어를 ' 한어(漢語/汉语)', 고유의 문자를 ' 한자(漢字/汉字)'라 할 정도로 한나라가 중국인들에게 미치는 권위는 21세기 현대까지도 이어져온다. 한황실은 전한과 후한을 모두 합쳐 426년간 지속되었으며, 초한대전으로 상징되는 건국신화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유씨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신념을 만들었다. 때문에 전한과 후한이 이어졌듯이, 촉한 역시 후한을 이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촉한은 유비 이래 한실 부흥, 정확히 말하면 전한이 멸망하고 후한이 태어났듯이, 후한 다음의 새로운 한의 탄생이 목적인 사상을 정치적 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비록 많은 이들이 한황실은 끝났다고 보고 있었으나, 4백여 년 이상의 통치로 인해 한실 그 자체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선비들이 다수 있었다. 유비를 따르던 무리는 바로 이 대의명분을 받들던 이들이었고, 심지어 조위에서도 순욱처럼 한실을 지지했던 세력이 존재했었다.

물론 위, 진과 병립하던 왕조는 손씨의 오나라도 있었으나, 오나라는 한나라와 연계되는 연결고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고작해야 남북조시대 왕조(오-동진-송-제-양-진, 소위 육조시대)의 정통으로 보는 일부 견해 외에는 대부분 조연급으로 취급된 데에 비해 조위는 헌제로부터 선양받았으며 양한의 수도였던 낙양과 장안을 비롯한 중원을 지배하고 있다는 명분을, 촉한은 왕조를 창립한 유비가 유승의 후예로서 고조 유방과 한나라 황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명분을 갖추었다.

시간이 흘러 이러한 생각들이 다음 시대로 전해지며 자연스레 촉한정통론의 형성과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2.2. 조위 서진의 단명

촉한정통론이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서진 및 그 전신인 조위가 100년도 못가서 단명한데다, 멸망 과정 또한 매우 한심하고 치욕스러웠기 때문이다. 즉 조위 서진 한나라만큼 통일 왕조로서 굳건히 확립되지 못하고 세워지자마자 멸망해버린 것은 촉한정통론 확산의 배경이 되었다. 조위 서진은 각각 40년 치세 끝에 혼란 속에서 멸망해 식자층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혹자는 그 창업 과정이 신하로서 주군을 배신한 하극상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찬탈로 수립된 왕조(예를 들어, 당나라, 송나라)라 하더라도 안정적인 통치가 지속되고 번영을 이루었다면 크게 비난받지는 않지만, 만약 이런 왕조가 단명한다면( 신나라, 수나라) 두고두고 매도되었는데, 조위와 서진도 이런 예로 볼 수 있다.

조위는 조조가 위공(213년)에 오른 때부터 치세가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고평릉 사변 이후로 사마의가 실권을 장악하는 249년까지 36년의 치세에 불과했다. 이후로는 사실상 사마소가 사실상의 황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신하된 몸으로 조정을 농단하고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으나, 정작 사마소 본인이 아버지 사마의와 형 사마사에게 그 권력을 물려만 받았기만 했지 본인의 큰 공로가 없으므로 딱히 위나라 황실을 겁박해 황위를 찬탈할 명분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소는 선양은커녕 그 중간 단계인 구석과 진공[3][4]조차 사양해야만 하는 형국이었다.

당시 황제인 조모가 사마씨 세력의 압박에 의해 사마소에게 진공, 상국, 구석을 내리고 이를 사마소가 거부하는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5] 황실의 권위를 무너뜨리기만 할뿐 무언가 큰 행동을 하지는 못하던 상태에서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터지고 마는데, 그게 바로 '사마소 시군(弑君)' 이다.

사마소의 찬탈에 대해 큰 불안을 가진 당대 황제인 조모는 직접 사마소를 죽이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허나 조모가 친위 쿠데타를 위해 부른 상서 왕경, 시중 왕침, 산기상시 왕업조차 반대할 정도로 세가 기운 상태였고, 이 때문에 조모는 겨우 노복이나 환관 수백 명 정도만을 데리고 사마소를 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는 당연히 실패. 황제인 조모가 직접 칼을 휘둘러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고, 이에 병사들은 감히 황제를 공격할 수 없어 이러저리 몸을 피하기 바빴으나, 가충은 성제에게 사마 대장군이 너희를 돌봐준 것은 바로 오늘과 같은 때를 위해서라고 다그치고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일렀으며, 결국 성제는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 창으로 조모를 찔러 황제를 시해했다. 한마디로 재위 중의 황제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수하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조모의 죽음은 사마씨에도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명분에 밀리던 사마씨 정권이었는데 그 망탁조의조차 하지 않았던 '현위 황제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수하에 의해 살해됐다'는 충공깽의 사태에 정권의 인상과 도덕성은 그야말로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게다가 이후 뒤처리 과정에서도 사마씨는 자신들이 저지른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모두 회피하고 거부했다.

이러한 사건을 거치면서 결국 단순히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는 명분으로만 사마씨가 새 나라를 세우기는 어려워졌고, 개국에 있어서 사마씨가 그나마 천하에 내세울 만한 위업으로 여겨질 만한 공이 절실해졌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후에 벌어진 촉한 정벌이다. 촉한은 기본적으로 후한이 위나라에 선양한 것이 조씨의 찬역이라며 위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었고 자신들이 진정한 정통임을 자부한 세력인 만큼, 이념 측면에서 '조씨가 꺾지 못한 촉한을 실질적으로 사마씨가 정벌하여 진짜 천명을 받은 정통이 누구인지 보여준다'는 것은 사마소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명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신하들이 반대할까 봐 오로지 자신의 뜻에 동의하는 종회와 함께 몰래 계획을 세우고, 그걸 공표한 이후에는 수십 만 대군을 동원했으며 이에 이의를 가하는 자는 바로 죽여 본보기로 삼기까지 했으니, 당시 사마소가 이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정벌이 끝나고 종회의 난 이후 촉한 정벌의 실질적인 최고 공로자인 등애에게 죄가 없음을 분명 알았음에도 역적으로 몰아 일족을 주살한 것도 그런 연유였을 것이다. 촉한 정벌의 공은 오로지 그걸 주도한 최고 권력자 사마소의 공이어야만 했을 테니까.

기본적인 건국 명분마저 외부에서 구해 오게 한 비정상적인 진나라 개국 과정이 촉한이 정통을 이어왔다는 인식을 유지, 강화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는 당대 서진의 인물들도 인식한 사항이기도 했다. 서진의 지리학자이자 관료인 배수는 자신이 지은 우공지역도 서문에서 대진이 용흥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우주를 깨끗하게 하는데 있어 용촉(庸蜀)[6]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말한다. 서진은 (위를 계승해서가 아니라) 촉 정벌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촉을 정벌한 공으로 사마염은 조씨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 자리에 올라 서진을 건국하고, 이후 오나라까지 정벌하여 마침내 대망의 천하통일을 이룬다. 여기까지 보면 사실 사마씨가 주군을 시해하는 무리수로 왕조를 개창했다고 해도 분명히 사마씨의 공은 있었다.

서진의 사마씨가 무리수로 제위를 차지했어도 촉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으므로, 이 왕조가 사실 몇백 년간 유지되었다면 그나마 촉한정통론이 확산될 여지를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진은 이런 대업을 이루자마자 왕조 말기 증상을 보이면서 혼란을 거듭했다. 오나라를 멸하고 삼국통일(280)을 이룬 지 겨우 10여년만에 팔왕의 난(291~307)이라는 내전으로 중국 전토에 군벌이 할거했던 후한말 못지 않은 막장상태가 되며, 그 혼란을 틈타 조조의 오환족 정벌(207)로 한동한 잠잠했던 북방 오랑캐들이 영가의 난(311)을 일으켜 중원으로 봇물 터지듯이 밀려들어 서진은 황제가 흉노에 포로로 잡히고 완전히 멸망한다. 그 이후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가 이어지며 중국은 대분열기에 접어든다. 그 혼란기에는 당연히 통일 제국 한나라에 대한 향수가 생겨났으며, 이는 촉한정통론의 배경이 되었다.

2.3. 위진남북조시대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조위정통론이나 촉한정통론 한 쪽이 우세한 듯하지 않고, 인물이나 왕조에 따라서 각각 자기에 유리한 쪽을 밀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배 계급은 대체로 조위정통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민간에서는 유비 세력에 대한 동정론도 꽤 있었던 것 같다.

서진은 당연히 그 전신인 조위를 정통으로 쳤다. 서진 시절 처음으로 삼국시대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인 정사 삼국지가 나왔다. 이 사서가 다루는 시기는 후한 영제(184)부터 오나라가 망하는 280년까지 약 100년간이다. 출판의 시점은 정확히 나오지 않으나 대체로 오나라를 멸하고 팔왕의 난이 벌어지기 전인 280년대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저자 진수는 차별을 명확히 하고자 위나라 군주만을 황제로 칭하여 그들의 연호를 연도 기준으로 삼았고, 촉한의 군주인 유비 유선은 각각 선주와 후주로, 동오의 군주는 이름으로 호칭하여 위-진을 정통으로 여겼다. 이처럼 당시 역사가 중엔 삼국 중 조조의 위를 정통으로 여기는 주장이 상당히 우세했다. 다만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위를 계승한 진 시대에 나온 서적이었기에 조조와 위나라를 정통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진수 자신은 원래 촉나라에 출사했다 촉나라가 망한 뒤 다시 진나라에 출사했으므로 촉나라에도 어느 정도 동정 여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인물의 호칭에 대해서는 조위정통론을 밀면서도 무통론의 입장 또한 어느 정도 견지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위촉오 각 왕조의 역사를 각각 독립된 서(書)로 나누어 표시했기 때문이다.

촉한정통론은 동진의 권신인 환씨의 찬탈을 막기 위한 것으로 처음 등장하게 된다. 즉, 환온이 한-위-진의 전례에 따라 선양을 받으려는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등장한 논리가 촉한정통론이다.

진나라의 창립자였던 사마염은 오나라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이루었지만, 그 이후로 이상하게 사치에 빠져버렸다. 사치풍조와 청담사상이 진나라에 만연하여 석숭이나 왕개가 돈지랄을 하면서 왕조 초기 실질강건해야 할 나라의 기풍을 흐려버렸다. 결과적으로 통일 후 10년만에 팔왕의 난이 벌어지며, 뒤에 중원은 장성을 넘어 남하한 흉노 뺏고, 한족이 강남으로 달아나 천도하였다. 바야흐로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정치계 인사들의 부조리함으로 인하여 동진은 이민족 왕조에 비해 국력에서 열세에 있었고, 더욱이 권신이었던 환온-환현 부자가 국정을 전횡하며 선양까지 노리는 상황이었다.[7]

쉽게 설명하자면 '한나라 헌제 조비한테 선양해준 것은 정통성을 부여한 게 아니다. 왜냐하면 한나라 황실의 후예였던 유비가 파촉에서 촉한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진이 정통성을 이어받은 연유는 세조 사마염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 태조 사마소 촉한을 항복시켰기 때문이다.[8][9] 거기에 사마씨는 선양을 받는 과정에서 황제를 살해하고 탈법적으로 정권을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위로부터 이어지는 선양논리를 들이대면 명분이 약한 사마씨를 환온이 얼마든지 들고 엎는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따라서 촉한정통론을 통해 환온이 한-위 선양을 본받아서 황제가 되려는 것은 헛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촉한정통론이 처음으로 등장한 사서는 습착치가 지은 한진춘추였다. 습작치는 후한의 정통성에 대해 이를 촉한이 이었고, 그 촉한의 항복을 받은 서진이야말로 후한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여겼다. 그가 '위진춘추'가 아닌 '한진춘추'를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에는 이러한 까닭이 있었다. 습착치는 조위는 후한 헌제를 협박하여 거짓 선양을 받은 역신 조비가 세운 나라이므로 사마염이 조위로부터 선양받아 진나라를 세운 것 역시 정통성에서 유효하지 못하며, 오히려 사마소가 촉한을 평정함에 따라 한이 멸망하여 진나라가 흥했다고 평가하여 하늘의 뜻은 세력이 있고 권위를 강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후에 동진으로부터 선양받은 유송은 성이 유씨라는 점을 내세워 촉한의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북조에서는 진나라를 장강 이남으로 쫓아낸 흉노 출신 유연이 한왕조의 후계자를 자칭하여 나라 이름도 한으로 지었고[10] 유선에게 새로 시호를 지어올리고, 유비를 한고제 유방 광무제 유수와 동격으로 삼아 제사를 올리는 등 북조에서도 남조의 촉한정통론과는 별개로 자연스럽게 촉한을 한의 후계로 인식하게 되었다.

다만 촉한정통론을 가장 많이 퍼트린 인사 중 한명은 유송의 초대황제인 송무제 유유였다. 유유 입장에서는 동진의 권위를 실추시키면서, 수도였던 건강(구 건업)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촉 지방의 민심도 자신에게 결속시키기 위해 촉한정통론을 밀었는데, 즉 유비와 같은 한나라 황실의 후손인 자신이 형제국가인 촉한을 멸한 사마씨를 쓰러뜨리고 촉한의 뜻을 이어받겠다는 뜻으로 천명했다. 이 때문에 그가 세운 유송은 촉한의 계승자 대접을 받았으며, 유유 본인의 위세도 높아졌다.[11]

2.4. 수당시대

서진대부터 이어져왔다 하는 촉한정통론은 어디까지나 개별 왕조의 필요에 의한 행위였고, 이는 후계 왕조의 공식적인 역사관이라 보기 힘들었다. 위에서 오호십육국-남북조시대에 특정 왕조가 내세운 촉한정통론은 자신들의 희박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내세운 측면이 강했다. 즉, 전조의 창업자 유요는 흉노족이며,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자신이 한고조의 후손이라는 것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한고조로 이어지는 촉한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것. 유송의 창업자 유유는 한고조와 혈연상 무관하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유씨를 칭하며 자신이 정통성을 가진 후한-촉한을 잇는 것이 정당함을 내세워 사마씨로부터 선양을 받아 동진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지배세력은 조위정통론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이 있다. 적어도 중국식 고대 국가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는 당나라는 조위정통론을 밀었다. 당나라 중종 시절 12명의 전임 황제를 모신 역대제왕묘가 중국 최초로 건립되었는데 조조와 사마염은 여기에 배향되었지만, 유비는 포함되지 않았다.[12] 당태종 이세민은 <제위태조문(祭魏太祖文)>을 지어 조조를 추모하였고, 당현종은 조조의 아명인 아만을 자기의 아명으로 쓸 정도였다.

2.5. 송원시대: 촉한정통론의 발흥 및 정착

당나라를 지배하던 조위정통론은 굳건히 이어져와 북송 시절만 해도 조위가 정통이라는 시각이 여전했다. 북송의 이름난 문인이자 관료인 구양수는 많은 역사적 저술을 남겼는데, 역시 조조를 정통으로 보았다.

송나라 진종은 조조의 고향인 초를 박주로 개편하면서, 이곳에 출신 유명인물인 노자 조조의 사당을 각각 지었다. 다만 조조의 사당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관리가 부실한 것을 보고 조조의 사당을 제대로 관리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 아들 인종이 즉위해 조조의 사당을 참배하도록 신하를 보냈는데, 그 신하는 이곳을 탐방하고 별로 관리가 안되고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렇듯 송대에 이르면 민간에서부터 성리학의 배경이 되는 도덕주의적 사고가 일어나, 백성들 사이에서도 조조의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송대와 동시대였던 한반도의 고려 시대 왕건의 업적을 조조에 비유한 것만 봐도 당시에는 조위정통론이 중국 및 다른 나라에서도 우세했음을 알 수 있다. 신하가 군주를 배신한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위진의 건국은 구왕조로부터 정당성을 물려받는 선양을 통해 이루어진 역성혁명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북송 후기 역사가 사마광 자치통감에서 조위의 연호를 따랐으되 조위의 정통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관점이었는데, 사마광의 논리는 " 구주를 하나로 통일하지 않으면 천자의 이름은 유명무실하다. 어떻게 구석의 한 나라를 정통으로 삼고 나머지를 감히 가짜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마광의 주장은 실상 삼국 가운데 정통이 따로 없다는 논리로, 이는 즉 무통에 가깝다. 다만 편의상 연대 표기만 위진의 표기를 빌렸다고 밝히고 있다.[13] 이 때문에 촉한정통론을 지지하는 학자들로부터 소극적으로나마 위정통론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14]

하지만 이후 북송이 금나라에게 정강의 변을 당해 강남으로 쫓겨나자 상황은 달라진다. 송나라가 요나라( 거란족), 금나라( 여진족)와 같은 북방 민족들에게 시달리고, 이들은 송나라로부터 화북을 빼앗은 뒤 한화되면서 정통 중화왕조를 자처했는데, 남송은 이 때문에 정통성에 민감해지게 되었다. 이런 정통을 중시하는 사관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보다도 남송의 특별한 위치에서 비롯된다고 여기기도 한다. 정강의 변 이후 남송은 금나라를 상국[15]으로 모시게 되었으므로 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통을 중시하는 성리학이 국교화하면서 남송은 모든 역사를 도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고, 도의나 명분(즉 고대에서는 왕조의 정통성을 합리화하는 것은 결국 혈통이다)을 중요시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부터 촉한정통론이 국가적으로 힘을 얻어 남송에서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북조 조위로, 자신들 남송을 동진 촉한으로 대응시키는 경향이 크게 늘어났다. 주자 자치통감의 사론을 맹렬히 비판하며 통감을 다시 춘추필법에 따라 다시 편집하여 자치통감강목을 지어 촉한정통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역사학자인 소상(蕭常)은 자신의 저서 속후한서(1188년, 총 53권)에서 촉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촉나라 기록에 위나라와 오나라의 일을 덧붙였다. 이후에 등장한 역사서들은 주자가 창립한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 촉한정통론을 따르게 되었으며,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 사대부 계층 역시 촉한정통론을 받아들여 이에 대한 반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16]

말하자면 위나라에 비해 약소하였지만 한실의 후예였던 촉한에 정통 한족 국가인 송나라를 투사하여 "우리는 정통"이라 생각하는 의식이 이러한 역사관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송대에 들어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통해 주자의 성리학적 역사관이 주요 역사관으로 자리잡았고, 그 뒤 주자의 성리학이 득세하자 유비와 그가 세운 국가인 촉한을 후한의 정통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일반화되었다.

다음으로 몽골 제국 치하인 원나라 시기에도 촉한정통론은 이어졌다. 원나라의 대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학경(郝經)은 자신의 저서 속후한서[17]에서 촉나라를 정통으로 하여 위나라와 오나라를 열전에 수록하었다. 관우가 원나라 시기 치우와 강태공을 앞질러 군신의 자리에 오른 것과, 송대 이후 민중의 인기를 얻은 삼국지평화 유관장 삼형제는 나관중본과 청나라대의 모종강본 연의로 발전함으로써, 유비와 촉한 세력을 완전히 한나라의 후계로 보는 인식을 확고하게 하였다.

원나라 초기의 대칸이나 황제들은 한족의 영웅인 관우에게 관심이 없었으나, 원나라 지배층인 몽골족도 점점 한족화하며 관우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관우를 영웅화한 희곡이나 문학 작품이 유행하며 촉한정통론은 민간층에게 확고히 자리잡혔다. 스스로 한시를 지을 정도로 문인이었던 문종은 이에 영향을 받아 관우에게 "현령의용무안영제왕"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관우 신앙을 널리 보급했다.

2.6. 명청시대

원말명초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는 이후 근대 명청시대의 촉한정통론을 백성 및 지배계급 모두 인정하는 주류 역사관으로 확고히 하게 하였다. 이는 황실까지 널리 받아들여져서 명나라 시기에 황실의 명으로 관에 의해 관우가 신으로 숭배되었다.

명태조 주원장은 남경에 도읍을 정하면서 역대제왕묘를 세우고 16위의 제왕[18]에 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500년전 당중종이 역대제왕묘를 세울 때와 달리 조조와 사마염은 빠졌다. 이때 조씨나 사마씨에 대한 평가가 이미 하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력제는 관우 신앙을 확산시키기 위해 관우를 황제로 추증하고 전국에 관우 사당을 지었다.[19] 이는 촉한정통론을 더 강화하였다.

이후 한족을 제압하고 만주족이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 시대에도 주류 이념으로써 촉한정통론은 계속 이어졌다.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는 젊은 시절 읽은 삼국지에 매료되어 골수 유비빠가 되었으며 당연히 촉한정통론을 지지했다. 누르하치는 특히 보잘 것 없는 세력을 거느렸음에도 한황실을 부흥시키려고 고군분투하는 유비의 대의에 흠뻑 빠져들었으며, 자신도 여진족이 북중국을 지배했던 금나라를 재건하겠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 그리하여 결국 그의 자손들은 중원을 차지하여 금나라보다 더 큰 대제국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

청나라가 북경을 장악한 순치제 시절 삼국지연의는 만주어로 번역되었고, 당시 사실상의 황제 노릇을 하던 섭정 도르곤과 황제 순치제는 친히 서문을 써 유관장의 충의를 높이 평가하며 자신들이 촉한을 잇는 중화의 정통이라 주장했다.

강희제 역대제왕묘를 세우며 촉한 소열제 유비를 정통으로 인정해 배향했지만, 조위 서진 정권의 모든 황제(즉 추존황제가 아닌 선양을 통해 황제가 된 조비 사마염포함)는 역대제왕묘에서 배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촉한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기에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과 싸운 악비의 위상을 약화시키기 위해 관우를 관제로 승격시켜 공식적인 무신으로 숭배함으로써 촉한정통론은 강화된다.

건륭제 사고전서를 편찬하도록 지시했는데, 이 사업은 전국에 산재한 글을 모아 거대한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북송시절의 문인인 목수(穆修)의 <박주위무제장묘기(亳州魏武帝帳庙記)>라는 글이 발견되었다. 이 글은 북송 진종 시절 조조의 고향인 박주에 건립되었으나,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던 조조 사당에 참배객을 유치하기 위해, 여러 조조의 공을 알리는 글이었다. 건륭제는 이것을 읽고 "역적을 옹호하다니 이자가 지금 살아있었으면 극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라며 크게 노하여 사고전서에서 빼라고 지시했다.

이런 조정의 공식적인 움직임이나 민간정서와 다르게 당시 학계에선 고증학이 지배하면서, 기존 관점을 많이 뒤집던 시기라 이전의 정통론 논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즉, 조위정통론(그리고 그를 이은 서진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의 분쟁보다는 정통론 자체의 문제에서 벗어난 논의들이 좀 더 주를 이룬다. 결국 진수나 습착치, 사마광이나 주자 등은 모두 각자의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저마다 정통론을 서술했을 뿐이라는 것이 청대 고증학자들의 논지이다.
그( 진수)의 기록은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았는데, 습착치에 이르러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지어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하였고, 주자 이래 습착치가 옳다하고 진수가 그르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치로 논하자면 진수의 오류는 무수하나, 시세로 논하자면 습착치가 한나라를 정통으로 한 것은 시세에 순응하는 것이니 쉽고 진수가 한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것은 시세에 역행하는 것이라 어렵다. 습착치 때 진나라는 남쪽으로 건너가 그 사세가 촉나라와 비슷했다. 편안(偏安)한[20] 자들을 위해 정통을 논쟁하는 것은 당시의 논자들에게 있어 믿음직했던 것이다. 진수는 진무제의 신하의 몸이 되었는데, 진 무제는 위나라를 이었기에 위나라를 거짓이라 한다면 진나라를 거짓이라 하는 것이 되니 어찌 그리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정은 송나라 태조의 찬립(篡立)이 위나라와 비슷하고, 북한 남당의 행적이 촉나라와 유사하여 북송의 선비들이 모두 회피하며 위나라를 거짓이라 하지 않다가, 이후 고종이 강좌(江左)에 편안(偏安)한 것이 촉나라와 비슷하고 중원의 위나라 땅이 모두 금나라에게 들어갔기 때문에 남송의 선비들이 분연히 일어나 촉나라를 정통이라 하였다. 이러한 일은 모두 마땅히 그 시세를 논해야 할 것으로, 한 가지만으로 정할 수 없는 것이다.[원문]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다만 이것은 고증학이나 의고학파가 유행한 학계 자체의 이야기고, 국가의 공식적인 입장이나 민간에서는 촉한에 대한 기존의 정통론적인 인식이 계속되었다.[22] 무엇보다도 모종강 부자가 개작한 삼국지연의가 삼국지연의의 정본이 된 탓이 컸다. 모종강 의 '모본(毛本)'은 이야기의 구조와 줄거리가 치밀해지고 언어가 간결하게 다듬어져 다른 판본들을 압도하여 오늘날까지 연의의 정본이 되었는데, 무엇보다 촉한정통론에 기인하고 있긴 하나 비교적 영웅쟁패의 입장에서 쓴 나관중과 달리 모종강 부자의 모본은 친촉/반위적인 서술이 늘었다. 모본이 민간에 유행하면서 민중은 기존의 민담, 전설로 전해내려오던 촉한에 대한 인식에 연의의 영향까지 합쳐져 촉한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2.7. 현대

현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과거의 촉한정통론에 비교적 냉담해지고, 조위를 좀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한중일 3국의 현대 역사관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삼국을 통일한 기초를 세우고 삼국을 통일한 최종 승자는 조조와 사마의이며 유교적 정통성을 내세운 촉한은 어쨌거나 과거의 논리에 얽매인 역사의 패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환관의 발호라는 후한과 똑같은 식으로 망했기에 더 평가가 박해진 바가 있다.

현대 동아시아 3국의 삼국지 매체에서 촉한을 대신해 조위와 서진이 주인공격으로 내세워지는 작품이 서서히 증가하는 것[23]도 3국의 역사관이 더 이상 촉한정통론에 대해 예전만큼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촉한정통론이 엄청나게 오래된 세월 동안 자리잡아 왔기 때문에 현재의 사학계 일부나 일반 대중, 삼국지 팬들에게 촉한정통론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분도 여전히 존재하긴 한다. 촉한정통론의 역사와 그 중심에 있는 삼국지연의의 영향력이 쇠퇴하지 않는 이상 촉한정통론은 학술영역에서는 의미가 없어졌지만 삼국지 팬덤이나 민간정서에는 영향을 끼칠 것이다.

2.7.1.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남송 이후 20세기까지 약 800년간 중국을 지배해온 촉한정통론은 이미 도학 및 명분을 중시하던 성리학보다는 근거와 논리를 중시하던 고증학 학계에서 지배적이 된 청대부터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이미 정통 중화와 결이 다른 만주족 지배의 청나라에서 촉한정통론의 근거가 되는 정통론은 퇴색한 측면이 있었고[24], 아편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서양 세력 및 일본에게 연달아 굴욕을 당하면서 정통론과 밀접히 이어져 있는 화이론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달았기에 촉한정통론은 이미 중화민국 시절에는 힘을 잃어간다. 게다가 신해혁명으로 군주제가 붕괴되면서 이런 유교사상에 기반한 명분론이나 정통론은 적어도 집권세력 내에서는 완전히 힘을 잃었다.

특히 중화민국 치세 내내 군벌이 대륙을 할거하면서 혼란이 계속되고, 서양 세력은 조계를 만들어, 특히 일본은 괴뢰정권을 세워 야금야금 중국 영토를 분할해 가면서 침탈하자, 비슷한 상태를 정리하여 질서를 잡고 북방 오랑캐가 노리던 화북 지역 통치를 확고하게 한 조조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1935년에 난징 국민정부는 일본의 침략을 맞아 중국사의 위인 여러명을 선정해 민족 정신을 고양하려는 운동을 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민간 정서에 지배적이었던 촉한정통론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지 조조는 뽑지 않았지만, 그 아들인 조식을 뽑아서 간접적으로 조조를 복권했다. # 중화민국의 저명한 작가였던 루쉰은 "조조는 능력의 인물이며, 적어도 영웅이라고 불릴만 하다. 나는 조조의 편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호평했다. 국민당군 출신 역사가이자,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논하다"는 역사서를 저술한 황인우(레이 황) 하버드 대학교 교수는 조조를 "조조는 도덕이 난세를 구하는데 전혀 쓸모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덕을 완전히 버리는 것도 난세를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평가하며, 조조를 난세를 평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수단을 합리화한 상황윤리가(즉 마키아벨리스트)로 묘사했다. 이는 조조의 악행 또한 당시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뒤를 이은 중화인민공화국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아예 유교를 지배계급의 이념으로 규정해, 건국 당시부터 부정했기에 이런 정통론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성리학적 정통론보다는 실제적인 통치력, 질서, 그리고 지배구조가 전대에 비해 얼마나 조직화되고 진보했는지에 대해 정통성을 부여했다. 이런 의미에서 내부모순으로 멸망한 후한을 그대로 이으려던 촉한은 대폭 저평가되고, 환관과 외척정치를 타파하고 백성을 조직화해 군벌들을 모두 타도하고 장강이북에서 질서를 잡은 조위정권이 높이 평가된 것이다.

현대 중국 사학계의 역사적 관점도 민국시대의 혼란을 경험한 정치적 입장에 영향을 받았다. '중국 영토에 존재했던 모든 정권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며 현재의 중국은 이 모든 역사를 아우르는 통일된 하나의 중국'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주의적인 역사관 외에도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 및 민중주의 역사관이 혼합되어 중국 역사관의 중심이 되었다. 이런면에서 민중의 인기와 유교, 성리학적인 입장이 혼합되어 완성된 전근대시대의 역사관이었던 촉한정통론을 도태시키려는 움직임이 강해졌다.

따라서 현대의 중국은 기존의 명분론적, 정통론적인 역사관과 달리 천하통일과 통일 왕조, 즉 중화제국을 유달리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현대 중국의 강역을 완성하고 대만을 정복한 강희제에 대한 찬양이나 장이모 감독의 영화 영웅 등에서 나타나듯 마냥 폭군으로 평가받던 진시황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는 소수민족, 한족을 가릴 것 없이 모두 하나의 중국이라는 현대 중국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25]

즉, 왕조의 개창 과정에 대한 유교(특히 성리학)적인 명분론이나 도의적인 평가보다는 실제적인 통치력 및 강역과 백성에 대한 장악력을 갖춘 왕조에 대한 평가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이에 따라 삼국시대를 보는 관점도 삼국 중 한나라의 강역과 체제역량을 가장 많이 아우른 조위와 조위를 이어 삼국을 통일한 서진 쪽에 우위를 두는 시각이 늘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두 왕조의 사실상 창건자들인 조조와 사마의에 대한 평가 역시 올라갔다. 중국의 건국을 주도한 마오쩌둥은 민국 당시의 조조복권론의 분위기를 이어받아 공식적으로 조조의 복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현대 중국 문학의 대가이자 스스로도 정치가였던 곽말약은 "누구는 조조를 가리켜 찬탈자라고 부르는데, 이는 옳지 않다. 체제의 정통성은 황제의 혈통이 아니라 체제가 백성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조조는 후한 말의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고 여러 정책을 시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했다. 이것이야말로 정통성의 근거가 아니겠는가" 하며 조조에 대해 후한 평을 내리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한 것이 조조의 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청조의 멸망 이후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고 다시 하나의 중국으로서 질서를 바로 잡은 현대 중국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조가 서주대학살 등의 여러 악행을 벌이고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을 쥐어짜기는 했으나[26], 어쨌든 장강 이북에서 황건적의 난 이래 후한말의 혼란을 정리하고 질서를 바로잡은 것은 사실이며, 중국은 이런 질서를 바로잡은 것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사마의에 대한 평가도 재밌는 부분이 많은데, 당장 사마의가 주인공인 중극사극 군사연맹의 시놉시스는 고평릉 사변을 두고 '위나라의 내란을 평정했다' 쓰고 있으며 '사마의가 쌓은 업적은 난세를 끝내는 기초가 되었다'는 둥의 서술을 하고 있다. 이는 곽말약이 조조를 평가하면서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여 백성을 구했다며 이를 조조의 공으로 삼은 평가와 다르지 않다.[27]

현대 중국의 역사관이 어떤 관점을 보이고 있는지는 이로써 명백해진다. 사회 질서 붕괴와 무질서 방치는 용인될 수 없으며, 이를 수습하는 과정이나 절차에서 충효인의와 같은 봉건주의적 가치나 민주주의와 같은 현대적 가치는 고려할 필요가 없고,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많은 희생이 따라도 질서를 빠르게 회복해 중국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일이야말로 가장 최우선의 가치라는 것이 현대 중국의 사관인 것이다. 19세기~20세기 중반에 발생했던 대혼란 (내전과 외환, 그리고 문화대혁명과 같은 정치파동)을 경험한 중국인들은 강력한 통치나 질서유지를 최고의 정치적 가치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2.7.2. 대한민국 일본

현대에 들어와 성리학 봉건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난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점도 점점 촉한정통론을 벗어나게 되었다.

일본에는 원래 에도시대 이전의 사무라이들은 가신으로서 주군과 계약적 관계였고, 충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었으나, 도쿠가와 막부가 성리학을 공식적으로 국교로 채택하고, 마침 이당시 삼국지의 한문본이 들어왔다. 당연히 이 당시에 일본에서도 촉한정통론이 주류였음은 이를 미루어 볼 때 짐작할 수 있다.

20세기 들어 일본에서는 현대 중국의 영향과는 무관하게 촉한정통론을 부정하는 방향의 작품이 계속 나왔다. 이미 메이지 유신으로 성리학을 권장한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며, 중국처럼 정통론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게다가 일본은 1930년대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 없이 고만고만한 군부 내 파벌들이 벌인 여러 갈등 때문에 혼란이 계속되었으며, 결국 군부를 제어하지 못한 정치권은 호전적인 방향으로 가버린 군부의 도구로 전락하여 침략으로 선회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요시카와 에이지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1939-1942 연재)도 조조가 후한말의 대혼란을 정리하는 영웅적인 측면을 부각하여 복권시켰다. 태평양 전쟁 이후에도 여러 일본 작가들이 조조를 중심으로 한 작품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일본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의 영향도 있다. 일본의 독자들은 삼국지를 자신의 역사적 경험으로 해석했을 것이고[28], 이 때문인지 조조를 중국판 오다 노부나가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조조 못지 않은 여러 악행을 벌였음에도 일본에서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일본인들의 조조관에도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전란 종식의 다른 두 주역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 과정은 거의 찬탈이었으며[29],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조씨나 사마씨가 선양으로 제위를 차지한 것을 무도한 일이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시각이 묻어 있는 요시카와 삼국지는 한국에도 널리 읽혀졌고, 많은 한국의 작가들이 그 영향을 받았다. 그중 하나인 고우영 삼국지도 조조와 마찬가지로 유비, 제갈량도 결국 한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잡으려는, 조조와 별다르지 않은 야심가로 묘사하여 간접적으로 촉한정통론을 부정했다. 보수주의적 작가인 이문열 또한 이문열 삼국지를 기획할 당시 조위정통론에 기울어져 있었지만 책의 머릿말에서 말하길, 촉한정통론이 없어진 번역은 삼국지연의가 아닌 다른 작품이 된다는 대만 작가의 충고를 듣고는 촉한정통론을 무너뜨리지는 않되 조조에 대해서는 최대한 호의적으로 자신의 평역판을 서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한국의 경우 민주공화정이 들어서고 민주화운동, 혁명 등을 통해 정권을 교체해 본 적이 있는 경험이 생기면서 과거 성리학적인 명분론인 촉한정통론이 밀려나는 경향이 생겼다. 성리학의 시조로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지킨 정몽주가 격하되고 역성혁명을 통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데 일조한 정도전이 오늘날 혁명가로 추앙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30] 또한 조조와 마찬가지로 반대파나 국민에게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결국은 탄탄한 경제대국의 기초를 만든 박정희가 높이 평가되는 것은 결국 보수 진영이 조조에 호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것과도 유사한데, 이문열이 보수 진영에 호의적인 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3. 결론

촉한정통론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나왔는데, 이것이 후대 성리학의 명분론까지 더해지면서 지금까지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조위가 정통이냐, 아니면 촉한이 정통이냐의 문제는 역사를 편찬한 중국의 역사가들이 속한 정권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졌으며, 결과적으로 당대(삼국시대)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즉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 시대부터 12세기 북송대까지 약 800년간은 조위정통론이 우세했으며, 그 이후 20세기까지는 촉한정통론이 우세했다.

역사학계는 촉한정통론을 멀게는 남조시대부터, 가까이는 송나라 시절 성리학의 명분론과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본다. 이는 민간에 촉한을 중심으로 한 삼국지 설화나 전설이 만들어져 널리 퍼졌던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송나라 초기까지 조위와 서진이 엄연히 한나라의 뒤를 잇는 정통성 있는 왕조라고 인식한 경우가 많았다는 부분은 결국 촉한정통론이 처음부터 압도적으로 사가들의 지지를 받는 학설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촉한은 마지막까지 한실부흥을 명분으로 북벌을 시행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암군 환관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하여 나라를 무너뜨려 본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정권으로, 결국 촉한이 중국을 통일하여 정통성을 이어받았으면 모르되 결과적으로 중국을 통일한 정권은 조위의 뒤를 이은 서진이었기에 많은 역사가들이 조위-서진을 정통으로 본 것이다. 물론 한진춘추처럼 삼국 당시부터 멀지 않은 시기부터 촉한-서진으로 정통성이 이어진다고 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어찌됐건 촉한정통론은 촉한이 멸망한 뒤 정통론을 중시하던 성리학이 득세한 남송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부각되었으며, 이후로도 계속 우세로 이어져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져 왔다. 왕조시대에는 역대제왕묘 같은 국가가 제사 지내는 공식적인 사당에서도 촉한정통론을 택했다.

송대 이후 동아시아의 여러 역대 왕조는 비록 조조와 비슷하게 찬탈로 정권을 잡았더라도 촉한정통론을 밀었다. 자신들이 조조처럼 왕조를 개창했어도 조조같은 권신에게 사직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은 꺼림직 했기 때문에 조조는 만고의 역적으로 규탄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촉한정통론을 밀어줄 수밖에 없었다.[31] 심지어 한족이 아닌 이민족 왕조들(북조의 여러 이민족 국가와 원나라[32], 청나라)도 촉한정통론을 지지했다. 이는 결국 혈통에 근거한 정통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질서와 봉건적 충효관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과거 군주제 국가의 정사로 대표되던 사학계와 달리 현대 사학계는 정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으며,[33] 특히나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선 현대 중국에서는 성리학적 정통론을 구시대의 유물로 보기에 무통론이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정치현실주의적으로 보자면 가장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던 조위를 더 중심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에 조위를 중시할 뿐이다. 즉, 현대 중국이라 해서 조위정통론을 따르는 것은 아니고 촉한의 의의 역시 인정하고 있다. 일례로 삼국지덕후이자 위빠였던 마오쩌둥 유비가 천하를 얻지 못한 면에서 실패한 영웅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유비의 능력에 대해서는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34] 현재도 조조, 순욱, 제갈량, 유비는 모두 존경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오나라의 손권, 노숙과 주유도 사당이 세워져 숭배를 받는다.[35]


[1] 中漢 : 후한을 가리킴 [2] 계는 ' 백중숙계'의 계로써, 중국어에서 막내를 의미한다. 손견의 아들들인 손책(백부), 손권(중모), 손익(숙필), 손광(계좌) 형제의 자를 보면 알 수 있다. [3] 진공의 작위라는건 단순히 공의 작위를 내리는 것만이 아니라 옛 진(晉)의 영역을 떼어서 분봉하여 독립된 공국을 세우고 이 공국이 황제의 주위를 제후로서 보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나, 실상은 조조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이름으로 황위를 찬탈하기 위한 첫걸음이나 다름없었다. [4] 진공, 진왕은 원래 태자가 아닌 왕자 중 가장 공이 크거나 서열이 높은 자에게 주는 자리다. [5] 나중에 사마소가 진공의 지위를 받아들일 때 작성된 조환의 조서에 따르면 여덟아홉이나 사양했다고 한다. [6] 용은 한중(인근 상용의 용 자가 이 용 자다.), 촉은 파촉을 나타내니, 이 단어는 바로 촉한을 뜻하는 말이다. [7] 결국 환현이 사마덕종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가, 유유가 이를 토벌하고 나서 다시 선양을 받아 송을 건국하여 동진은 멸망하였다. [8] 이 논리는 사실 그 자체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마소가 촉한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은 때는 사마염이 선양을 받기 이전이다. 조위가 정통성이 없어서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것이 헛일이라면 촉한을 항복시키고 획득한 정통성은 조위가 아니라 사마소 개인의 집안에 귀속되었느냐는 것이다. 즉 사마소는 정촉군을 직접 지휘한 것도 아니고 당시에 황제였던 것도 아닌데 국정을 농단한 권신이었다는 이유로 촉한 정벌로 얻은 정통성을 가져갔다는 것은 논리상의 문제가 있다. 더구나 사마소가 촉한을 멸망시킨 시점과 사마염이 진나라를 개창한 시점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있는데, 그렇다면 사마씨 가문은 황제가 되기도 전에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9] 조위정통론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 논리는 사마소가 촉한을 멸하고 그 공로로 진왕이 되었으며 진왕으로서 사마염이 진나라를 개창했다는 것이다. 즉, 정통 한나라인 촉한의 항복으로 인해 진나라가 세워졌고 왕국인 진나라는 곧이어 바로 황제국이 되었으므로 이를 통해 한나라를 대체한 새로운 정통왕조가 된다는 것이다. [10] 물론 한이라는 국호는 유연 사망 후 '조(趙)'로 갈렸다. [11] 다만 유유 본인은 흉노족의 국가인 전조와 저족의 국가인 성한의 예시를 보아 한족의 국가로 한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껄끄러웠는지 나라 이름을 송으로 하였다. [12] 여기에 모셔진 12명의 제왕은 우왕, 탕왕, 주문왕, 주무왕, 진시황, 한고조, 광무제, 조조, 사마염, 탁발규, 북주무제, 수문제였다. [13] 촉한 연표로 따지면 살짝 빠지는 것이 있다. [14] 이는 해당 사론 안에 촉한에 대한 서술에서 ' 유비가 한을 이었다고는 하나 족속이 소원하고(즉 촌수가 멀고), 그의 세수, 관직과 품위를 기록할 수 없어, 시비를 분별하기 어렵기에 광무제에 견주어 한씨의 남은 계통을 잇게 쓰진 않았다'는 식의 내용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자치통감에서는 촉한을 '촉'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쓰고 있어 당대의 호칭을 존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5] 군신 관계는 아니지만 숙질 관계 정도였다고 한다. [16] 사실 고려 시절만 해도 금석문에 보면 태조 왕건의 업적을 조조에 비유하며 '원흉을 없앴다'고 언급한 구절이 있다. 자기네 나라 시조를 비유한 인물에 대한 시각이 당연히 긍정적이면 긍정적이지 부정적일 리는 없으니, 이 때는 촉한정통론보다 조위정통론이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17] 학경이 1260년 송나라에 원나라 사신으로 갔는데 송나라의 재상 가사도가 15년 동안 억류하였다. 학경의 속후한서는 이때 지어진 책이다. 총 90권 36책. [18] 삼황오제(8명), 우왕, 탕왕, 주무왕, 한고조, 광무제, 당태종, 송태조, 원세조(쿠빌라이) [19] 그리고 만력제 자신은 유비, 조선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라 생각해 임진왜란 때 파병했다. 그리하여 조선에도 관우 신앙이 전해진다. [20] comfortable이 아니라 남쪽에 치우쳐(偏) 있다, 심하게 말하면 남쪽에 찌그러져 있다(...)는 뜻이다. [원문] 其書以魏為正統, 至習鑿齒作漢晉春秋, 始立異議, 自朱子以來, 無不是鑿齒而非壽。然以理而論, 壽之謬萬萬無辭, 以勢而論, 則鑿齒帝漢順而易, 壽欲帝漢逆而難. 蓋鑿齒時晉已南渡, 其事有類乎蜀。為偏安者爭正統, 此孚於當代之論者也。壽則身為晉武之臣, 而晉武承魏之統, 偽魏是偽晉矣, 其能行於當代哉。此猶宋太祖篡立近於魏, 而北漢南唐蹟近於蜀, 故北宋諸儒, 皆有所避, 而不偽魏, 高宗以後, 偏安江左, 近於蜀, 而中原魏地全入於金, 故南宋諸儒, 乃紛紛起而帝蜀。此皆當論其世, 未可以一格繩也。 [22] 조조를 연기했던 배우가 빡친 관객들에게 맞아죽을 정도였다(...). [23] 가장 유명한 작품이 중국의 대군사 사마의와 일본의 진삼국무쌍 시리즈. 그런데 진삼국무쌍 시리즈는 오히려 조위와 서진에 대한 미화와 윤색이 너무 과해서 비판받기도 한다. 조조(진삼국무쌍), 사마소(진삼국무쌍) 문서 참조. [24] 청나라는 문자의 옥으로 여진족이나 만주족 오랑캐라고 폄하하거나 그 통치를 비방하는 모든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렸다. 직접적인 비방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그렇게 해석될 여지만 줘도 얄짤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정통성을 잘못 논했다가는 목이 달아나니 학자들은 누가 정통이나 아니다를 논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된다. [25] 무협물 랑야방을 봐도 과거 화이론적 관점에서 오랑캐로만 보았던 소수 민족에 대해 현대 중국이 어떤 관점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지 드러난다. 물론 중국 정부와 민간인(특히 한족)들의 시선 차이는 어느정도 있을수도 있지만. [26] 사실 백성을 쥐어짠 것은 제갈량의 북벌 당시 촉한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의 행정 능력만 강조되지만, 위나라에 비해 국력이 1/5에 불과한 촉이 대위전에서 공세를 유지하려면 백성들의 희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 공명의 아들 제갈첨이 심지어 간신 황호와 손을 잡고 강유의 북벌을 계속 제지하려고 한 것도, 이런 백성들의 고통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촉나라의 멸망은 이런 과도한 군비 문제 외에도 환관이 발호하던 후한의 구태를 반복하였기 때문이며, 촉한이 환관을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한 조위나 서진보다 정치적으로 진보되었거나 개선되었던 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27] 물론 이 평가 역시 그다지 공정하지는 않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봉건 시대의 논리로 조조나 사마의가 사실상 찬탈을 자행했으니 그들를 가리켜 난신이라고 비꼬는 비난은 오늘날의 사관에 입각하여 합리적인 역사관이 아니지만, 이것을 백성을 위해서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이런 모든 행태를 그들이 정말로 백성을 정말로 구하려고 했다고 여기는 생각은 또 다른 봉건시대적 논리로 귀결된다. 이는 정권을 얻어 질서를 잡고 말고와 무관한 얘기인 것이다. [28] 이문열은 자신의 평역판 삼국지 서문에서 요시카와 삼국지 및 그 한국판 아류들을 "일본식의 중국이해"라며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29] 주군으로 모시던 인물이 사망하자 나약한 후계자로부터 정권을 빼앗았다. [30] 다만 정몽주는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보수파에 가깝고 정도전은 기존 질서를 개혁하는 진보파이기는 하나 이는 방법론의 문제지, 성리학적인 관점의 민본을 추구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역사적 평가는 현대의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역사철학자인 에드워드 카의 주장을 상기시켜준다. [31] 이는 이후 모든 왕조에서 그랬으며 조선 왕조도 마찬가지였는데, 개창자 이성계도 조조와 거의 비슷한 경로로 외우내환을 정리하는 업적을 세워 군벌에서 권신으로 떠올랐다. 이후 왕 두 명을 폐하고 공양왕에게 선양을 받았으며, 집권 전후로 자신이 폐한 세 왕을 죽이고 왕씨 몰살을 저질렀으니, 조선 왕조의 창립 과정은 굳이 따지자면 조위나 서진의 판박이었다. 그런데도 조선 왕조는 멸망할 때까지 촉한정통론을 지지하였고, 역대 조선 국왕들은 조조를 만고의 역적이라 규탄했다. [32] 원나라 문종은 유명한 제갈량-관우빠였다. [33] 물론 현대에도 역사적 입장은 정치와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 가령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민중 운동을 좀 더 우호적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아예 국가 차원에서 역사를 편찬하던 시대와 다르게 역사 분야 자체가 국가 기관에 소속되어있는 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34] "유비는 조조와 동급으로 대단한 영웅이다. 그리하여 제갈량같은 지모의 인재를 제대로 부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 [35] 현대 중국에서는 조조는 역적으로 매도되었던 과거와 달리 질서를 잡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의의 상징인 제갈량이나 관우가 저평가되지는 않는다. 즉 현실적으로 조조가 가장 큰 세력을 이뤄 질서를 잡았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만, 유교적 신념을 고수한 촉한 측의 인사들도 이념미의 상징으로 존경받는 것이다. 또한 손권이나 주유같은 동오의 인사들도 중국의 영역을 크게 확장한 강남 개척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평가받는다. 심지어 여포의 고향이던 섬서성 수덕현에는 여포의 동상까지 세워졌다. # 이는 여포가 삼국지에서 악당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유관장과의 3:1 일기토에서도 밀리지 않는 발군의 무용을 보였기 때문에 그 고장인들은 기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통"이라는 개념은 성리학에 기반한 것이며, 이에 바탕한 선악개념은 현대에서 의미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업적을 세운 삼국지의 영웅들은 현대에는(존경할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동탁이나 원술 같은 인물을 제외하면) 모두 존경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