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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23:05:23

우키타 히데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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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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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우키타 히데이에.jpg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うきた ひでいえ)[1]우키타가 맞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한국식 독음으로 읽으면 풍신수길이 되는 것처럼 우키타 히데이에 역시 한국식 독음으로 읽을 경우 우희다수가가 된다.]
(1572 ~ 1655.12.17)
파일:우키타 가문 문장.svg
우키타 가문의 아자문 아(児) 문장.[2]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 아명은 하치로(八郎)다. 우키타 나오이에의 장남[3]으로 비젠 오카야마 57만 4천 석의 다이묘였다. 별명은 비젠의 재상(備前宰相)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큰 키(약 170cm)[4]를 가졌었고, 아버지[5]와는 다르게 성실하고 인정이 깊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기도 하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나 그 자리의 무게 때문에 크나큰 굴곡 진 인생을 지냈다. 임진왜란에서는 20세의 나이로 총대장을 맡았고, 1년 후 행주대첩에서 승자총통을 잔뜩 연결한 변이중 화차의 포격으로[6]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중상을 입었고 28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83살에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 55년 동안 태평양의 작은 섬 하치조마치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2. 생애

1581년에 부친인 우키타 나오이에가 병사하자,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1582년 가독을 계승하고 영지를 보장받게 된다.

전국시대에 이름난 간웅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는 비젠을 정복하면서 하극상, 암살 등과 심지어 자기 형제와 딸 그리고 마누라까지 이용하는 모략으로 비젠 국을 점령했기 때문에 주변의 적들이 매우 많은 상황이었다. 거기다 우키타 가문을 노리고 있는 오다나 모리와 같은 세력이 바로 옆에 있었고, 심지어 후계자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즉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면 미요시 가문이나 오다 가문, 아시나 가문 등 전국시대의 많은 예들처럼 그야말로 딱 망하기 좋았다.

결국 시간이 흘러 병석에 앓아 눕게 된 우키타 나오이에는 자신의 마지막 모략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키타 가문과 동맹이었던 오다 가문의 주고쿠(中國) 지방 군단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호출하여 후사이자 자신의 어린 아들 히데이에와 남은 식솔들을 잘 돌봐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명문가이자 유명한 간웅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가 자신에게 최후를 부탁하는 모습을 거절할 수 없기도 했고 모리 가문과 함께 맞서 싸우고 있는 우방이니 그의 부탁을 수락하여[7] 우키타 가문의 본령을 그대로 히데이에에게 계승시켜 주는 후견인이 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히데요시의 미담처럼 들리지만 문제는 그 방법이 우키타 나오이에 과부 자신의 첩으로 넣어버린다는 거였다.

그 덕분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의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히데요시는 말년에 요도도노가 아들 츠루마츠 히데요리를 낳기 전까지 아들이 없었으므로 양자를 많이 들었으며 히데이에도 아들처럼 여기며 매우 아꼈다.[8] 이후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으며 이제는 양자 취급이 아니라 진짜 양자로서 도요토미 본성과 하시바 묘지에 이름 중 한 자(秀)를 하사 받았고, 실제로도 사석에서도, 공석에서도 항상 자신을 도요토미 히데이에(풍신수가/豊臣秀家)로 지칭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우희다수가라고 기록하기도 했고, 일단 우키타 나오이에의 후계자인 만큼 우키타라고 부르는 것도 무작정 틀리다고는 할 수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 후계자였던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죽고 다른 양자들이 다른 집안으로 보내지는 와중에도[9] 히데이에는 양자로 잘 살았다.

반면에 가토 기요마사와 같이 네네 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무장들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에는 평민 출신이기도 하고 네네가 육성한 일종의 친족 취급을 받았는데, 히데이에는 이름있는 가문 출신에 히데요시가 첩과 함께 직접 기른 양자 취급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실제로도 임진왜란이나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때도 가토 기요마사와는 별로 교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교류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당시 주고쿠 지방을 공략하던 중인 하시바 히데요시 군에 편입되어 빗추 다카마츠성 공략 등에 명목상 참전했지만 아직 어렸으므로, 실제 지휘는 숙부인 우키타 타다이에가 대신했다.

히데이에는 성인이 되자 히데요시의 이름에서 한 자(秀/히데)를 받았으며, 1586년 히데요시의 양녀이자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인 고히메를 정실로 삼는다. 이러한 경위로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고, 또한 이에 부응하여 히데요시 생전에는 5대로의 한 사람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였으며, 사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참가한 무장 중 가장 많은 수의 군사[10]를 이끌고 참가하여 분전하는 등, 충성을 다했으며 실제로도 자신을 우키타 히데이에라고 지칭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우키타 가문의 사람이 아닌 도요토미 가문의 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총대장 겸 제8군 사령관으로서 참전하였다. 그러나 행주대첩 권율의 조선군에 대패하고 자신도 승자총통을 여럿 장착한 변이중 화차의 집중사격으로 문자 그대로 벌집이 되는[11] 큰 부상을 입었다. 이때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하였기에 자신의 대장기가 있는 쪽에 조선군이 집중 총포격을 가해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운이 좋게 병사들이 그를 업고 달려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독성산성에 포위된 권율이 쌀로 말을 씻기는 걸 보고, 조선군 측에 물이 풍부한 줄 알고 포위를 풀어버렸다는 설화가 유명하다.[12] 하지만 벽제관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13]에서의 승리로, 중납언(中納言)에 임명되기도 했다.

히데이에는 임진왜란의 굵직한 전투에 이름을 올리고, 나름대로 성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를 아꼈던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굴복시키면 조선의 통치자로서 히데이에를 임명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가장 신뢰받는 양자였으니까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의 유학자이자 일본군 포로로 지낸 강항의 < 간양록>에 의하면 약탈을 금하는 등 민심 수습책을 펼쳤으나 퇴각하면서 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모리 테루모토와 함께 코가 베인 조선인들을 동정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서군에 속하여 초반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동군과 격전을 펼쳤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등의 배신으로 전세가 급속히 불리해지자 결국 패배,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로 도망친다.[14]

시마즈 가문이 그를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이에야스가 체포를 명하자,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는 사실을 인정하고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그를 넘겼다. 이후 타다츠네와 처남인 마에다 토시나가의 탄원으로 구노산 도죠쿠에 유폐되었다가 곧 아들 우키타 히데타카 등과 이즈 제도 하치조지마(八丈島)[15]로 추방된다. 이는 탄원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키타 개인은 별로 위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우키다 히데이에는 특출난 능력 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고 실제로 그 자신이 노력은 했지만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전략이나 전술, 정치적 사안 처리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맡았고 우키다 히데이에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이에야스도 커다란 위협은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가 반역을 꾀한다고 하더라도 그를 보좌하거나 도울 만한 인물들은 이 시점에서 죄다 처형되거나, 자기 목숨 지키기도 급급한 판이었다. 또한 지리상으로도 섬에 갇혀 평생을 보내는 우키타의 입장에서 반역을 꾀하려면 일단 본토에 상륙부터 해야 하는데 우키타의 입장에서는 꽤나 골치가 아프다. 도쿠가와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우키타 히데이에가 일본 본토에 상륙할 경우 그때부터 생각해도 전혀 대응이 안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관심조차 없을 가능성이 높다.
시마즈 가문과 마에다 가문의 후원으로 유배지에서 풍족한 생활을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풍랑으로 인해 잠시 하치죠지마로 상륙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하에게 술을 얻어 마셨다는 일화나 하치죠지마의 대관에게 주먹밥을 얻어 먹었다는 일화, 또 밥을 더 달라고 해서 주먹밥을 만들어 아들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일화, 뜸을 만들어 잡곡과 바꿔 먹으며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쌀밥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는 일화[16] 등, 그가 불우하고 궁핍하게 일생을 보냈다는 전설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또한 일본의 역사 서적인 도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에 따르면 하치죠지마에 유배된 우키타 히데이에는 평소 [17]을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그것을 먹을 것과 바꿔 먹으며 덧없는 목숨을 간신히 이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사실 하치조 섬은 일본 본토와 매우 멀리 떨어져있는 섬[18]이기 때문에 당시로선 왕래가 상당히 어려우며, 특히 풍랑이 생길 경우 완전히 고립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위에 상술된 우키타 히데이에의 궁핍 일화는 이러한 난점들이 작용해서 제때 식량 조달이 안 되었을 경우, 특히 풍랑이 심할 경우 마에다 가문 측에서는 풍랑이 멈출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므로 이 때 한정으로 궁핍함을 겪었을 수는 있다.

히데이에는 유배지에서 50여 년을 보내다가, 다시는 본토의 땅을 밟지 못하고 1655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다이묘 중 가장 오래 생존한 인물이다. 더군다나 그가 죽을 당시의 일본은 에도 막부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치세 시절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살아있는 동안 쇼군이 3번이나 바뀌었다.

히데이에가 하치죠지마에서 낚시를 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로 해변에는 1997년 오카야마현에서, 오카야마 성 개성 400주년[19]을 맞아 히데이에와 부인 고히메의 석상을 세웠다. 우키타 가문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 섬에서 평화롭게 가문을 이어 왔는데, 근대에 도쿄로 나왔다가 다시 조상을 모시기 위해 섬으로 귀향했다고 한다. 전국시대에 멸문되어 버린 여러 가문들 중에서 살아남아 평온하게 혈통을 보전하는 데 성공한 점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승리자일지도 모르겠다.

두 석상은 옛 영토인 비젠과, 옛 거성(居城)인 오카야마 성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3. 평가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았고, 임종을 앞둔 히데요시를 보고 슬퍼서 너무 격하게 울어버리는 바람에 "하치로,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주렴." 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야사도 있을 만큼 감정도 풍부했던 인물이었다. 다만, 현대 학계는 해당 야사를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당시 우키타는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파견되어서 본토에 없었다.

나이도 어리고 재능도 없는 우키타 히데이에는 임진왜란 당시 총대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고쿠다카였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57만 석이나 되는 고쿠다카의 규모로 인해 여러 제장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자연스럽게 총대장이 되었을 뿐 자질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참고로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20만 석, 가토 기요마사도 20만 석, 이시다 미츠나리는 19만 4천 석 등 우키타 히데이에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임진왜란에서는 행주성 전투에 출진했으나 그저 그런 군재로 인해 적장 권율을 상대로 거의 일방적으로 두들겨맞다시피 했으며 심지어 중상까지 입는 등, 10분의 1가량 되는 권율군의 적은 병력에 심하게 고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전황이고 나발이고 당장 죽이러 가겠다며 분노를 표했던 걸 보면 도련님다운 정의감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히데요시 사후에 정치력의 한계로 가문의 분열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오타니 요시츠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자기 가문의 일을 남에게 맡기는 촌극을 보여주었고, 벽제관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를 거두어 중납언(中納言)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잦은 실수를 저지르며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한 휘하 장수들에게 총대장으로서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가 지닌 한계 역시 분명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장이 되어 하치죠지마로 유배되어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가독을 승계하고, 절대 권력자인 히데요시에게 신뢰와 지원을 받았던 인생 전반기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당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격이다.

정리하자면 큰 키를 가진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지만[20], 평범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군재와 약간 문제가 있어 보이는 정치력이 아쉽다면 아쉽다고 할 수 있겠다. 아마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이러한 점을 간파하여 그를 죽이지 않고 하치죠지마로 유배만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쉽게 말해서, 외딴 섬으로 보내버리기만 하더라도 이에야스 자신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할 인물이라는 것이다.

너무 젊은 나이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후 50년 넘게 섬에 갇혀 유배를 당하고 인생의 과반수가 훨씬 넘는 기간을 유배로 보냈기 때문에 80살을 넘게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기록이나 업적은 20대 초반에 사망한 사람과 거의 비등하다.

4. 여담

당대 기준으로 키가 큰 장신인 것은 맞으나, '얼굴'이 잘생겼었다는 말은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인의 기준으로 당대에 그려진 초상화를 보고 각종 대중매체와 게임 일러스트 등지에서 얼굴이 잘생긴 꽃미남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잘못된 인식이 생긴 것. 정작 우키타 히데이에가 얼굴이 잘생겼었다는 신뢰할만한 기록은 없다. 무엇보다 당시 그림과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일본의 미의 기준을 고려해봤을 때[21], 우키타 히데이에의 얼굴은 추남은 아닐지라도 미남 소리를 듣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전근대 동북아에서는 성인 남자에게 얼굴이 아름답다는 표현 자체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22], 미인(美人)이라는 말은 현재도 그렇게 쓰이지만, 당연히 여자를 위해 만들어진 말이었다. 남자의 가치는 오로지 얼마나 출세했느냐로 평가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검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대청(大廳)에 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고 있었는데 문득 작은 방 안에 다섯 자루의 검이 있어 심복에게 검의 주인을 맞추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검도 섞여 있었는데 히데요시는 우키타의 검을 가리키며 "히데이에는 성격상 무엇이든 화려한 것을 좋아하니 저 황금이 박힌 검이야말로 그 아이의 것이다." 라고 말했고 확인해본 바 정말로 히데이에의 검이었다고 한다. 역시 도련님답게 화려함을 추구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주로 그를 좋아하는 팬들 사이의 사용하던 애칭은 도련님(坊ちゃん)이었지만 후술할 2ch의 한 글 때문에 현재 일본에서는 '수영의 달인'이라는 조크에 가까운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발단은 2ch의 한 스레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역사를 잘 모르는 어떤 유저가 '히데이에가 오사카 공방전에 참전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일본에서는 히데이에가 세키가하라 전투 때 주력을 담당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하치죠지마에 유배되었다는 것은 일본사 교과서에서도 배우는 기본 상식에 가까운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럼 하치죠지마에서 헤엄쳐서 오라는 거냐?' 식으로 그 유저가 비웃음을 받는 흐름이 조성됐다.[23]

그런데 갑자기 한 유저가 매우 진지하게 우키타 비젠 츄나곤 하치로 히데이에, 도요토미 가문의 위기를 듣고 하치죠지마에서 헤엄쳐서 왔다!라는 글을 작성했고 이것이 히데이에의 캐릭터와 이상하게 어울려서[24] 스레를 읽고 있던 유저들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며 그 글을 퍼날랐고, 일종의 밈으로 정착되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나무위키와 흡사한 유희적 성격인 니코니코 대백과의 우키타 히데이에 문서는 모든 단락이 ~(으)로부터 헤엄쳐서 왔다!라고 작성됐다. '개요로부터 헤엄쳐서 왔다!' '관련 동영상으로부터 헤엄쳐서 왔다!' 하는 식. 해당 영상이 그의 이미지를 말해 준다.

덕분에 코에이의 게임 노부냐가의 야망에서 진짜로 열심히 헤엄쳐서 오는 모습의 일러스트로 참전했다. 주먹밥 얻어먹은 일화도 반영되어 주먹밥에 한이라도 맺혔는지 훈도시 차림으로 수영하는 와중에도 주먹밥은 소중하게 머리위에 안젖게 묶어 놓은 모습이었다.

센고쿠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로 센고쿠 시대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치세 기간까지 생존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어린이를 주워다가 처가인 마에다 가문에 입양시켰고 그 아이는 자라서 마에다 가문의 든든한 가신이 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5.1. 게임

< 임진록 2>에서는 도끼로 무장한 젊은 장수로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한국 위키백과에서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무기가 도끼로 되어있다. 사실상 조선 침공에 관한 모든 일을 총괄하는 총대장의 위치로 조선 류성룡, 명나라 이여송과 비슷한 지위로 그려진다. 심지어는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의 다툼도 말리는 등의 스토리 비중이 많다. 후속인 <조선의 반격>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양군 지도자인 이시다와 도쿠가와가 핵심인물이 되는지라 우키타는 스토리 비중이 공기여서 대사가 1줄도 없다. 성우는 김수중이며 같은 일본군 장수인 미츠나리와 중복이며 그래서 우키타의 목소리가 그대로 나온다.
파일:宇喜多秀家2.jpg 파일:宇喜多秀家3.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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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혼노지의 변 무렵부터 오카야마현 일대의 다이묘로 나오고, 세키가하라 전투 전까지는 대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종속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낮은 능력치가 부여되었으나 창조에서 통솔 80대에 나머지도 70대로 엄청나게 상향되었고, 대지부터는 무용도 80을 돌파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 버프로 우키타 히데이에가 권율에게 아주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것을 감안하면 저 능력치는 절반으로 깎는 게 실존인물에 더 부합된다.

창조 PK의 세키가하라 이벤트 합전에서는 참전 다이묘 중 가장 병력 수가 많은 아군이다.[25] 이벤트 합전 초반에는 히데이에의 부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서군 승리의 향방이 갈리게 되는데 보통은 많은 병사 수를 믿고 메인 탱킹을 맡기게 된다. 다만, 주의할 점은 서군의 초반 장수진이 매우 빈약한데 반해 동군 측은 시작부터 후쿠시마 마사노리, 도도 다카토라,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요시아키, 이이 나오마사 등 최소한 전투에서는 A급 이상인 장수들이 일제히 밀어닥치는 관계로 생각없이 싸워서는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다. 도도 다카토라의 전법을 맞은 상황에서 이이 나오마사와 난전을 벌이게 되면 대번에 피떡이 되므로 탱킹은 하되 최대한 난전은 피하며 와키자카 야스하루 부대와 교체하며 어그로를 끌고[26] 나머지 서군 부대는 병사 수가 적은 부대 또는 히데이에 부대를 집중 공격하느라 바깥으로 밀려난 부대 등을 일점사하거나 비교적 병사 수가 적은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를 노리자. 동군 부대를 1부대 격파하면 멀리서 쵸소카베 모리치카가 원군으로 등장[27]하고 2부대를 격파하면 시마즈 요시히로가 등장[28]하며 동군 4부대를 격파하게 되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16,000명을 이끌고 서군에 잔류하게 되는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 혼다 타다카츠를 부장으로 데리고 무려 30,000명의 병력을 끌고 참전하게 된다. 두 무장 모두 능력치가 S급인데다 혼다 타다카츠의 전법인 청령절은 개사기 전법이므로 절대로 정직하게 난전을 벌여서는 안 되며 미리 살려뒀던 요시히로 부대의 유인매복 전법이나 야스하루 부대의 부장 오가와 스케타다의 전법인 저지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이에야스 부대의 이동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어그로를 끌며 계속 도망가는 탱커를 제외한 서군 전군으로 열심히 철포를 쏴대거나 제사를 사용하여 혼란에 빠지게끔 만들어야 한다. 여기까지 왔다면 서군 승리는 확정적.[29] 창조 PK의 회전 시스템에 어느 정도 익숙해야 하면서도 운을 필요로 한다는 점 등이 합쳐져 야마자키 전투 이벤트 합전과 더불어 최고 난이도에 속하는 합전이다.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은 이유는 실제 역사에서는 동군이 압승했기 때문이다.

역사대로 이벤트 합전에서 패배하게 되면 아카시 테루즈미의 도움을 받아 오사카까지 퇴각하며 영지로 돌아가 이에야스와 다시 일전을 벌일 것을 다짐하나 이후 나레이션으로 사쓰마까지 달아났다가 결국 3년 후 사형은 면하고 하치죠지마에 유배되어 생을 마쳤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벤트 이후 게임에서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으며 우키타 가의 다이묘는 우키타 아키이에가 이어받는다. 서군 멤버 중에 유일하게 히데아키를 의심하지 않는 무장이며[30] 전투 도중 히데아키 배반 소식을 듣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지금 당장 쳐들어가 킨고[31]를 쳐 죽이겠다"고 배신감에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인다.

세키가하라 이벤트 합전에서 승리하게 되면 서군 참전 약속을 지켜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칭찬하며 "또 무언가 큰 일이 생기면 이 이 어디에 있든 반드시 달려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비젠으로 돌아간다. 이벤트 이후 이시다 가문 및 고니시 가문과 무기한 동맹을 맺는다. 엄청 오래 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 일러스트밖에 없는데 나름 고증에 충실한 것이다. 히데이에는 인생의 70% 정도를 하치죠지마 에서 유배되었으므로 30살 이후에는 살아는 있으되 일본 본토에서는 종적을 감춘 상태이기 때문이다.

신생에서는 통무지정순으로 81/86/67/79.

< 태합입지전 5>에서는 통솔이 79로 전투 쪽에 치우친 듯한 능력치이다. 군학이 1레벨이지만 족경은 그나마 3레벨이고 기마와 철포도 2레벨이라 대충 활용할 수 있다. 의외로 건축이 2레벨이다. 문제는 등장하는 시나리오에서 모두 다이묘인데 1582년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이며 1598년은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으로 가담해서 승리하면 도요토미 히데요리 천하가 되는지라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심히 귀찮아진다는 것.

파일:지휘봉의 행방_우키타 히데이에.png

< 지휘봉의 행방>에서는 신장 168cm, 연령 21세, 취미는 독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우키타 가의 당주. 상당히 프라이드가 높고 자기 마음대로 구는 성향이 있어 초반에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다루는데 애를 먹었으나 미츠나리를 인정한 뒤로는 그를 신뢰한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에 누구보다 분노한 인물. 사실 지금의 성격은 어린 나이에 우키타 가문을 승계했기 때문에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의 발로이다. 명실공히 서군의 주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중앙 전선을 유지. 그러나 잇다른 배신으로 서군이 무너지면서 가신 아카시 테루즈미에 의해 정신을 잃고 강제로 전장에서 이탈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비젠 57만 석을 아까워하지 않고 반납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도록 다른 다이묘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3년 후 실제 역사에서 유배를 갔던 섬인 하치죠지마에 은거한다.

< 센고쿠히메>에서는 아예 여체화돼서 등장한다. 성실하고 착한 성격에 특정한 능력은 없지만 2ch의 드립을 그대로 수용해서 수영 하나는 엄청나게 잘한다. 심지어 최종스킬이 '헤엄쳐서 등장'이며 이로 인해 난데없이 수상전을 잘하는 캐릭이 되었다. 물론 게임 특성상 수상전을 할 일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 전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전국무쌍 4 편까지 클론 무장 신세다. 작품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추가 참전 투표 10위는 되니까 등장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앞으로 서군에 추가될 것이라고 예측할만한 장수는 히데이에를 제외하면 가토 기요마사와도 엮을 수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 모리가와 엮을 수 있는 안코쿠지 에케이뿐이다.

5.2. 드라마

2015년 KBS 드라마 < 징비록>에서는 배우 김리우[32]가 연기했다. 첫 등장은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한 장수들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하는 장면이었고 여기서 그는 "자기가 왜 조선을 치려 하는 것 같냐"고 묻는 히데요시의 질문에 "조선은 쌀이 많이 나고 명나라는 은이 많이 나는 나라이니 조선의 쌀과 명나라의 은을 합치면 일본의 경제력이 더욱 좋아질 것"이라는 상당한 식견을 피력했다. 명색이 총대장이지만 가토와 고니시 사이에서 맨날 중재만 하다가 열 받을 대로 받은 상태로 어찌나 열을 받았던지 "영지를 걸고 싸우든지 아님 조용히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할 정도. 경주 전투에서는 비격진천뢰에 피격당하고 행주대첩에서는 변이중 화차의 포격으로 중상까지 입는 등 수난이 상당하다. 디시인사이드 징비록 갤러리에서는 일본 개그 삼총사 중 하나로 웃기다로 불리고 있다.

2016년 KBS 드라마 < 임진왜란 1592>에서는 배우 한동호[33]가 연기했다.

2018년 tvN 드라마 <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한 일본군 육군 대좌인 모리 타카시 모티브가 이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1] '우기다' 혹은 '우키다'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확히는 [2] 우키타 가문의 선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우키타 가문의 선조가 백제 도래인이라는 것이며 이 깃발 또한 선조가 한국에서 건너온 다음부터 대를 이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가몬 안에 있는 兒는 아이 아이며 아이 아가 아닌 왜 아자문 아가 쓰였는지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역사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3] 위로 의붓 형인 미우라 도쥬마루가 있어서 우키타 히데이에를 차남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4] 당대 조선의 평균 신장이 161cm, 일본은 155cm 수준이었으니 현대 기준이라면 보통이겠지만 당대 기준이라면 장신에 속한다. 지금으로 치면 대략 185cm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참고로 오다 노부나가의 키가 저정도였다. [5] 부친인 우키타 나오이에는 평생이 모략과 암살, 그리고 음모로 점철됐던 인물이다. [6] 행주전투 당시 권율 장군의 조선군은 병력 숫자는 좀 적지만 대신 화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행주 전투 당시 우키타는 전투를 독려하러 최전열에 나갔고, 변이중 화차는 근거리에 포격을 퍼붓도록 설계된 병기였으므로 일본군 최전열에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조선이 운용한 신기전, 승자총통, 각종 화포, 비격진천뢰 등의 화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죽지 않은 게 기적이다. [7] 물론 비젠에 대한 영향력 등 복합적인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8] 오죽하면 히데이에가 어렸을 적 히데요시의 질문에 똑똑한 대답을 내놓았더니 곧바로 히데요시가 "허허, 하치로가 제법이구나." 하면서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는 일화가 존재할 정도였다. [9]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도요토미 히데야스는 유키에 보내져 유키 히데야스가 되고(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마쓰다이라 성이 된다) 처남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의 양자가 되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카츠는 자신과 함께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일찍 병사해서 고인이었다. [10] 17,000명. 1위는 동군의 이에야스로, 약 30,000명이었다. [11] 승자총통은 조총처럼 은으로 된 철환을 탄환으로 쓰며 관통력이 상당해 화차에 저격당하고 죽지 않은 게 기적이다. 현대에서도 승자총통처럼 만드는 사제총의 관통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12] 독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건물인 세마대가 여기서 유래됐다. [13] 1차 진주성 전투(진주 대첩)의 조선군 지휘관은 김시민이었고 일본군 측의 지휘관은 호소카와 타다오키였다. 결과는 일본군 참패. [14]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우키타 히데이에와 가신들간의 갈등으로 가신들이 이탈하는 사태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키타 본인의 능력도 별로였던 판에 경험이 많은 가신들이 이탈한건 상당한 타격이 되었을걸로 보인다. 재미있는건 그렇게 우키타 가문을 떠난 가신들이 이에야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는 정황증거들이 있어서 이에야스가 사전에 우키타 가문의 힘을 빼놓기 위해 뒤에서 공작을 한게 아닌가라는 설이 있다. 이에야스의 능구렁이같은 능력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가설이다. [15] 도쿄에서 남쪽으로 287km나 떨어진 섬. 한국으로 비유하면 포항시에서 울릉도까지의 거리보다 더 멀다. 정확히는 서울특별시에서 남원시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16]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이었다가 그를 배신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었던 하나부사 시마노카미가 히데이에를 배신한 것이 양심에 찔렸는지 배편으로 쌀 몇 가마니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17] 짚이나 부들 따위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물건으로 주로 비나 바람 그리고 햇볕을 막는 데 사용된다. [18] 287km. 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서울특별시에서 남원시까지의 거리와 거의 비슷하다. 더군다나 그 먼 거리가 땅 없이 전부 바다라는, 심각한 난점이 존재한다. 비행기가 없던 그 시절, 이곳을 왕래하기가 상당히 난감했다. [19] 400년 전인 1597년은, 히데이에가 오카야마 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한 해이다. [20] 당대 기준으로 장신인 것은 맞으나, 얼굴이 잘생겼었다는 말은 현대에 만들어진 말이다. 현대 기준으로 당대 그려진 초상화를 보고 각종 대중매체와 게임 일러스트 등지에서 미남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잘못된 인식이 생긴 것. 정작 우키타 히데이에가 얼굴이 잘생겼다는 당대 기록은 없다. [21]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은 유럽인들과 달리 빨간 눈물점이 보이는 큰 눈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즉, 작은 눈을 선호했다고. 이는 당대 미인도와 우키요에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22] 이는 유럽도 별반 다를바 없었다. [23] 하치조지마는 도쿄로부터도 훨씬 남쪽으로 떨어진 섬이기 때문에, 오사카성 전투에 참전한다는 건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제주도-서울 거리를 헤엄쳐와야하는 상황이다. [24]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소속감이 굉장히 강했으며, 또 범용하지만 성실한 성격이어서 주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헤엄쳐서 전장에 도착한다는 우스꽝스러운 글의 내용이 의외로 그럴싸하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25] 17,000명의 단일 부대인데 일정 조건을 만족시켜야 서군으로 참전하는 히데아키조차 16,000명이다. 히데아키의 능력치는 낮기 때문에 고기 방패로도 쓰기 힘든 수준이다. [26] 단, 야스하루 부대는 후반 이에야스 부대를 상대하는데에 핵심이므로 완전히 전멸해서는 안된다. 병사 수가 몇 백 정도로 줄면 반드시 빼서 살리자. [27] 단, 멀리서 나타나기 때문에 합류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28] 병사 수가 1,650명으로 너무 적기 때문에 초반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되지만 후반에 이에야스를 상대해야 할 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후방으로 빼서라도 살려둬야 한다. [29] 다만 이렇게 해도 운이 나쁠 경우 도쿠가와 부대의 발을 묶을 전법 포인트가 안타깝게 모자란다거나 어그로를 끌어줄 병력이 충분치 않다거나 하는 이유로 인해 패배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끝까지 방심하지 말자. [30] 히데아키는 게임상에서 도요토미 가문과 이시다 미츠나리에 원한을 품고 있다. 도요토미 가문의 경우에는 원래 후계자에 가까웠던 자신을 히로이마루 때문에 내쳤기 때문이고 이시다 미츠나리는 거기에 적극 가담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31] 히데아키의 별칭 [32] 삭발한 후 촌마게(일본식 상투) 가발을 쓰고 연기했다. 극 중 일본계 인물들은 비중있게 나오는 출연자 대부분이 삭발한 후 촌마게 가발을 썼다. 단, 풍신수길은 삭발없이 가발을 써서 단독 샷에서 가짜 티가 많이 난다. [33] 훗날 드라마 < 왕이 된 남자>, < 사랑의 불시착> 등으로 인지도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