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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6:57:39

이여송

<colbgcolor=#F0C420><colcolor=#800000> 이여송
李如松
파일:이여송.jpg
이름 이여송(李如松)
자무(子茂)
앙성(仰城)
본관 철령 이씨[1]
출생 1549년
대명 산동성 요동도사 철령위
사망 1598년 (향년 49세)
대명 산동성 요동도사 광녕위
가족 아버지 이성량, 자녀 이천근 외 3남
국적 파일:명나라 보.svg 대명

1. 개요2. 생애
2.1. 초기 행보2.2. 임진왜란 파병2.3. 평양성 탈환2.4. 벽제관 전투 및 이후 행보2.5. 죽음
3. 가족 및 후손4. 기타5. 야사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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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군.

여진의 발호를 늦춘 명장 이성량이 친부로, 요동에서 군벌이라 여겨질 정도로 영항력이 크던 가문의 덕을 많이 봤다.

임진왜란 시기에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되었다. 평양성 전투 등을 지휘했다.

2. 생애

2.1. 초기 행보

이여송의 본관은 철령 이씨로, 본디 성주 이씨였던 7대조 이천년[2]과 6대조 이승경까지 고려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5대조 이영이 살인죄를 저질러 요동으로 피신해 중국에서 벼슬하며 철령 이씨가 시작됐다.

요동에서 권세가 있어 요동 철령위를 세습하던 철령 이씨는, 이여송의 부친 영원백 이성량 대에 이르러선 변방에서 비교할 바 없이 강세해져 이여송의 군 경력에 큰 도움이 됐다. 이여송은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다니며 병기와 전술을 배워 무관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산서총병관, 선부총병관 등의 직급으로 복무하며 명성을 얻었다. 1592년 영하의 역[3]이 일어나 제독[4]으로 임명돼 지지부진하던 공세를 수공을 통해 3개월 만에 제압한다.

2.2. 임진왜란 파병

영하의 역을 진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에서 왜란이 벌어진다. 이에 만력제는 북병의 지휘관 조승훈을 보내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급작스러운 원병에 따른 화기의 부재와 군 내 소수민족 간의 불화, 일본군의 기습에 참패하고 만다. 이에 만력제는 다시금 4만 2천의 군을 내어 이여송을 보낸다.

조정으로부터 '제독 계·요·보정·산동등처군무, 방해어왜총병관'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달고 요동경락 송응창[5]이 함께 조선으로 넘어온 이여송을 선조는 버선발로 마중했다. 조선 측에서는 명군이 상황을 타개할 전력을 보여주리라 기대했지만, 이여송은 겨울 내내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전세를 관망하며 미적대기만 했다. 이에 초조해진 조선의 대신들이 당장 공격할 것을 종용한 끝에 1593년이 되어서야 병력을 이끌고 남하했다.

병력은 제1군으로 이여백, 이영, 갈봉하, 제2군으로 양원, 사대수, 제3군으로 장세작, 왕필적, 유정, 오유충, 조승훈, 낙상지로 편성했다.

2.3. 평양성 탈환

적장( 고니시)은 보아라! 우리가 한 번 거사하면 너희를 모두 섬멸키에 충분하나, 차마 인명을 모두 해할 수 없어 살 길을 열어주고자 하니, 너는 여러 제장을 거느리고 속히 원문으로 나와 나의 분부를 받들라!
연광정 토굴로 피신하여 저항하는 고니시에게 이여송이 유시한 말

남하한 명군은 만여 명의 조선군 지원과 함께 도합 5만 명으로 평양성을 포위했으며, 평양성에 죽치고 있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과 격돌했다. 초기의 섣부른 공격으로 공세 초기에 상당한 피해를 입는 등 잠시 삐걱거리긴 했지만, 이여송은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해서, 신중한 작전을 계획했다.

이여송은 명군이 보유했던 모든 화포를 평양성에 쏟아 부음[6]과 동시에 병력을 전개시켰고, 일본군은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화포가 없이 대조총이 포 역할을 했으나[7] 명나라군도 일본군의 조총 앞에서 처참하게 갈려나가기도 했다.

이여송의 직속 부대인 요동 기병[8]은 병과 특성상 공성전에선 큰 역할을 하지 못했고, 절강이나 양광 등지에서 파견된 남병, 즉 척계광 등의 대 왜구 훈련을 받은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대활약했다. 척계광의 병법은 3수병 체계로 조총을 쏘는 포수, 을 쏘는 사수, 그리고 이들을 근접 엄호하는 을 다루는 살수가 있었으며, 조선군이 일본의 장창에 대응하지 못해 전부 찔려서 죽을 때 압도적인 위용으로 일본 장창수 및 철포대를 제압했다. 전술한 것처럼 일본은 조총만 있었지, 화포는 없었으며 대조총이 화포 역할을 했다. 결국 명군이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불랑기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조총을 쏠려고 폼을 잡는 순간 화포 세례를 맞아 대부분 궤멸했고, 조총수를 보조하던 궁수 역시 남병의 활과 조총 사격에 궤멸했으며 근접 전투에서는 몽골 칼을 쓰는 북병 기병들에게 밀렸다.

평양성의 일부 성채는 함락했으나, 고니시 군이 남은 성채에 모여 방어를 강화하자 협상으로 포위망을 풀어주었고 이에 일본군이 남쪽의 황해도 쪽으로 철수해서 평양성을 수복했다.

이여송은 평양 탈환전에서 일본군을 살려서 보내주면서 반쪽짜리 승리를 거두었다. 참고로 이여송이 이 전투에서 조선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조선 조정은 이를 부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평양성 전투 문서 참고. 정확히는 이여송이 주도했다기 보단, 성을 일종의 전리품으로 여기던 차하르부와 칼간부, 투메드부, 우랑카이부 소속 몽골인 용병들이 선조인 칭기즈 칸이 그랬듯 일본군 포로 전원을 학살하고 성 안의 조선인 민가들까지 약탈한 것이었다. 이들 몽골인들은 나중에 병자호란때 몽골팔기를 구성해 한양을 약탈했고, 대칸인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의 약탈 금지 지시도 무시한채 마구잡이로 약탈하며 조선인들을 붙잡아 청나라로 끌고 가고 귀중해 보이는 물건은 모두 훔쳐갔으며 포로들도 선조인 칭기즈 칸처럼 마구 처형했다.

평양성이 탈환되자 선조와 조선 조정은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고,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을 계속 추격하며 2주 후에는 개성을 탈환했다.

2.4. 벽제관 전투 및 이후 행보

그리고 이 시기부터 명장이라는 거품이 걷히기 시작한다. 평양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신나게 추격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우키다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병력을 포함한 일본군 상당수가 재집결하고 있다는 걸 간과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군을 추격하던 명군 기•보병 9천 명은 벽제관에서 일본군의 반격에 직면했다. 게다가 북병 위주로 급하게 진군하여 그만 남병을 제외하는 바람에 평양성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조총 화포가 없었던 명군은 일본군과 뒤엉킨 개싸움을 시작했다. 백병전 끝에 상당수 기병을 손실했는데, 이 와중에 칼에 맞을 위기에 빠진 이여송을 부관 이유성이 목숨을 바쳐 구해내기도 했다.

정오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명나라측에 큰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명군에게 개활지에서 조총 사격을 퍼부었으며, 명군은 이때 조총 등 화약무기 없이 '만구다이'라 불리던 몽골 궁기병이 무리하게 기병돌격을 감행하다가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조총의 기병 저지력이 뛰어난데다가 조총은 장창병의 호위하에 운영한 터라, 일본군의 장창진을 만구다이만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일본군은 다가오는 명군 본대와 전투를 벌일 준비가 되지 않은 터라 해가 진 후 한양으로 물러났고, 명군은 2500여 명을 잃고 완전히 패배한 탓에 진격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이여송은 자신의 직속 부대인 몽골족으로 구성된 요동 기병 다수를 잃고 무력감에 빠졌다.[9] 이후 이여송은 이쯤에서 더 이상 피해를 막고 적당히 일본과 타협하여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조명 연합군 전체에 더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 곳에 눌러앉은 명군은 식량과 물자를 현지 조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이 '현지 조달'이지 실질적으로는 약탈이었기에 조선의 백성들에게 크나큰 부담과 고통을 주었다. 특히 나사 풀린 차하르부와 투메드부 몽골 기병들은 마구잡이 약탈로 원성이 높아서 조선인들이 아래처럼 통곡하기도 할 정도였다.
달자( 몽골족)들이 왜놈보다 더하다.

2.5. 죽음

그렇게 이여송은 별다른 전투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전투 회피로 명나라 조정에서 탄핵을 당하여 유정(劉綎)에게 조선 주둔 명군의 지휘권을 인계한 후, 명나라로 돌아가 중군 도독부 좌도독으로 지냈다.

나중인 1597년 요동총병이 되었을 때 북쪽으로부터 침공해온 토만[10]이 이끄는 차하르부를 토벌하기 위해 내몽골 국경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는 1598년 경기병 4천 명만 이끌고 숲 주변을 정찰하다가 차하르부 병력 수천 기의 매복에 걸려 포위되었다. 끝까지 저항했으나 탈출에 실패하여 포로가 되어 결국 몽골군한테 처형되었다.

사후 만력제가 애석해하며 후히 장례를 치르라 명하고, 소보(少保), 영원백(寧遠伯)으로 추증했으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편 이여송이 떠난 뒤 조선의 명나라 지원군은 화포 조총, 삼안총, 승자총통, 화창 등 화약무기를 다수 보유한 절강 및 복건 남병이 주력으로 담당했으며, 일본군과의 일전에서 화포가 없던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행주산성에서도 권율이 화약무기인 승자총통 화차 등을 이용해 일본군 대부분을 벌집으로 만들고 명군 없이 큰 승리를 거두는 등 조선군도 전열을 가다듬었다.[11]

3. 가족 및 후손


이여송은 조선 파병 당시 본관이 봉화 금씨(琴氏)인 여인과 동거했다. 이여송이 명나라로 돌아가고 몇 달 뒤에 아들이 태어났고 이름을 이천근(李天根)이라고 했다. 청나라에서 명나라 유민 쇄환 요구가 오자 거제도에 숨어 살았고, 이들의 후손이 현재 거제도 장승포에 산다.

한편 이여송의 손자와 이여매(이여송의 아우)의 손자 역시 훗날 조선에 정착했는데 이들의 후손이 농서 이씨이다.

이여송 본인이 조상의 나라인 조선에 대해 애착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주기까지 했음을 감안하면, 이후 조선에서 그의 후손이 이어지게 된 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4. 기타

참고로 바이두백과에서는 이여송의 민족을 한족으로 기재하는데, 조상이 한국계라고는 해도 구체적인 배경이나 행적, 그리고 현대의 조선족 집단이 형성되기 이전 시대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족보다는 한족으로 보아야 타당하기는 하다. 오히려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혈통이 부각되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한국계 일본인들만 해도 일본에 살면서 자신이 한국계임을 숨기는 사람들도 있고, 한국이 국력이 약했던 시절에는 더욱 그러했다. 대표적으로 절대 한국말을 안 쓸 정도로 독하게 정체성을 숨긴 역도산이 있다.
당시 명나라와 조선은 국력이나 규모뿐 아니라 주종관계가 명확했다. 물론 이여송이 실제로 자기 혈통을 숨기지야 않았지만, 딱히 조상의 나라라고 챙길 이유도 없었다. 이여송은 철저히 명나라의 장군으로서 조선을 대했으며, 보급 문제로 명군의 대민피해가 심해 조선에서 적지 않은 원성을 샀다. 사실 당시 명나라는 군량 대신 은을 군대에 지급하고 군은 그 은으로 상인들로부터 군량을 구입하여 조달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운용했다. 이여송 역시 이에 따라 만력제로부터 은 20만 냥을 하사받아서 조선으로의 장도에 나섰다.
문제는 명나라 상인들이 압록강 너머서까지 들어오질 않았고, 파견온 조선은 전화에 휩싸이고 상업과 도로가 명나라보다 심하게 뒤떨어진 터라 군량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사람이 지고 나르는 것 외에는 제대로 운송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 이로 인해 평양성 전투 이후 명군은 공세 역량이 급격하게 감소하여 개성에 이르면 보급을 받지 못해서 군사들이 굶주리고 군마 만 필이 대량으로 폐사해 전력에 치명타를 입었다.[13]

5. 야사

전국 각지에 이여송과 관련된 야사와 전설이 전래된다. 설화 속 이여송은 대체로 콧대 높고 오만해 소국인 조선을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다가 조선의 숨은 이인과 기인들에게 크게 혼쭐 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6. 대중매체에서



[1] 성주 이씨 중에서 명나라로 넘어간 사람들의 후손들이다. [2] 동생으로 이조년이 있었는데, 그의 손자가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이다. [3] 몽골인 발배가 일으킨 난이라 발배의 난, 혹은 발배의 몽골어 이름을 따 푸베이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4] 명나라는 철저한 문관 우위여서 제독 및 총독의 직위는 문관만 역임할 수 있었으나, 영하의 역 당시 관군의 추태로 인해 무관으로서는 처음 이여송이 제독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5] 이여송은 무관이었기 때문에, 문관 우위 국가였단 명나라가 이여송을 보내려면 문관이었던 송응창이 제독을 통제한다는 명분이 필요했다. [6] 이때 포르투갈로부터 얻은 서양 화포인 불랑기포가 등장했다. [7] 포르투갈인들이 나가사키에 상륙시 불랑기포도 소개했으나 사무라이들의 대규모 회전이 주축이었던 일본은 공성전이 많았던 명나라와는 달리 화포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해 조총만 수용했으며, 화력을 올리기 위해 대조총을 고안했다. 일명 대총이었다. 그러나 이 대조총도 원본은 조총이라 사거리가 50보 이내에 불과해 명나라가 막상 화포를 끌고 오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8] 한족, 차하르/칼간/투메드/우랑카이부 소속 몽골인, 해서부 및 건주부 여진족 혼성 부대로 남병에 비해 군기강이 문란했다. 주축은 기병답게 차하르부와 투메드부 소속 몽골족이었으며 이들은 전투력이 강하고 잔인하기까지 해서 약탈도 서슴치 않아 조선인의 원성을 샀다. 게다가 저항할 힘을 잃은 일본군 포로들을 선조인 칭기즈 칸처럼 마구 학살하기까지 했다. [9] 이후에는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는 한편, 용산의 일본군 군량 창고의 위치를 알아내고, 부총병관 사대수에게 그곳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10] 이 토만이라는 인물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국 쪽 자료들을 보면 차하르 몽골의 대칸인 투멘 칸을 말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당시 투멘 칸은 산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토만이 단순히 동명이인인지, 아니면 투멘 칸의 아들인 보얀 칸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은 단순히 몽골의 군사 체계인 투멘(土門. 다른 말로는 만호萬戶. 투멘 칸과 한자는 다르지만 몽골어 발음이 같다)의 장을 부르는 것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참고로 인터넷에는 이여송이 토번에게 죽었다고 잘못 알려진 자료가 많은데 이여송은 당시 요동총병이었다. 고로 절대 서쪽에 있는 토번에게 죽은 것이 아니다. [11] 이때 총사령관 우키타는 승자총통 세례를 맞고 총알이 온 몸에 박혀 벌집이 되다시피 했다가 부하들이 업고 뛰고 대신 총탄에 맞아줘서 간신히 살았다. [12]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전투 후에 자결했다. 앞서 간 두송과 마림의 부대가 후금군에게 전멸하고 본대까지 괴멸 위기로 온터라 총사령관 양호로부터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퇴각하여 전력을 보존했지만, 그 행보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의심을 받자 자결하게 된다. [13] 《징비록》에 따르면 개성에 주둔한 시기는 행주대첩 직전 상황이었는데 이여송은 곧 진군 준비를 마치겠다고 말해놓고 개성의 보급이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조선의 장수 몇 명이 이럴 거면 평양으로 후퇴하고 다시 공세 준비를 하자고 말했는데, 이여송은 조선군 장수들에게 정신머리가 없다고 호되게 일갈했다. 그러나 이여송은 이렇게 질책하고선 정작 얼마 뒤 함경도에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평양 공격을 준비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바로 평양으로 돌아가버렸다. [14] 이덕형의 본관은 광주 이씨, 이덕형의 아내 이씨는 한산 이씨 이산해의 딸이다. 다만, 이덕형의 아내 이씨는 임진왜란 와중에 피난가다가 일본군이 피난지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자결했다. [15]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졌는지, 전근대 중국사에서 부부의 성씨가 같은 유명인은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넓은 땅에 수많은 인구가 넘실거리는 중국에서 말이다. 동성결혼의 금기는 근현대에 와서야 풀렸다. [16] 조선도 현종 시기에 본관이 달라도 같은 성씨면 혼인할 수 없다는 법이 만들어지며 동성결혼이 금지되었다. [17] 《성호사설》에 따르면 '남월왕(南越王)이 중국에 공물(貢物)을 바칠 때 비취(翡翠)는 40쌍까지 바쳐도 계두는 겨우 한 그릇밖에 바치지 않았다 하니, 그 계두란 것이 희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할 만큼 계두는 귀한 식재료였다. [18] 당연하지만 요즘보다 해산물이 귀했던 데다가 교통이 훨씬 열악했던 당시에 문어는 , 전복 등과 함께 상당한 고급 식재료였다. [19] 북유럽과 마찬가지로 괴물, 흉물 취급이다. [20] 징비록》에 기록되었다. [21] 심지어 최근인 6.25 전쟁 때 한국군이 남긴 쇠말뚝에도 이런 오해가 붙기도 했다. [22] <조선의 반격> 출시 후 기술이 추가되었고 <임진록 2> 단독으로는 마지막 패치 때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