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冷笑主義 / Cynicism냉소주의는 개인을 지배하는 거대 질서인 정부 체제, 사회 조직, 인간 관계, 국민성, 기타 정책 등을 비난 또는 자조하면서 그 현상을 비관적, 염세적,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상이다. 흔히 경제 불황이 찾아오거나 정치 안정성이 크게 저하되어 있거나 구성원 간 갈등이 심해 분열되어 있는 사회에서 이런 냉소주의가 유행한다. 냉소주의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이제 모르겠다, 될대로 되어라, 이대로 망해버려라 등이 있다.
이 문서에서의 냉소주의와 관련된 사례들은 주로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비슷한 것으로는 비관주의가 있다.
2. 역사
냉소주의의 어원이 되는 시니시즘은 본래 제도와 조직으로 얽매인 복잡한 삶을 거부하고, 기존의 인간 사회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믿으며 이를 떠나 자연스러운 생활 양식을 추구하는 사상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의 키니코스 학파가 주장한 사상(κυνισμός. 영어 cynicism의 어원)으로, 이는 한국어로 견유주의(犬儒主義) 학파라 번역된다. 말 그대로 개와 같이 살겠다는 뜻으로, 이들은 날고기를 먹고 길에서 자기도 했다. 동양의 도교 사상과도 어느 정도 유사하다.근대에 들어서는 이 단어가 정식적으로 등재된 단어가 안된 유행어처럼, 현재의 냉소주의를 뜻하게 단어의 뜻이 변했다. [1]
3. 원인
어느 정도 만연된
회의주의는 지적 원인보다는 사회적인 원인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 주요 원인은 언제나 힘이 없는 것에 대한 위안이다. 힘을 가진 자들은 냉소적이지 않다. 자신들의 사상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압제의 희생자들도 냉소적이지 않다. 그들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증오란 것은 다른 강한 열정들과 마찬가지로 부수적인 일련의 믿음들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중에서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중에서
냉소주의는 늘 최악을 준비하는 삶의 자세였다. 공적 영역엔 불신을 보내되, 사적 영역에선 신뢰할 수 있는 연고를 키우고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거는
처세술이었다. 냉소의 사전엔 실망과 좌절이 없다. 배신을 당할 일도 없고 상처를 입을 염려도 없다.
강준만
강준만
LG경영연구원에서는 기업 경영에서 노동자들이 나타내는 냉소주의의 원인에 대해서 반복적인 실패의 경험, 일시적 유행에 편승한 경영 활동, 경직된 소통 창구(커뮤니케이션 채널), 불합리한 조직 문화, 리더십 부재를 원인으로 정리하고 있다. #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주은우는 1990년대 ‘신세대’로 불린 새로운 주체들의 등장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으로 비롯된 민주화(대통령 직선제 및 문민정부 출범) 이래로 한국 사회에 대두했던 낭만주의적 열정이 종언을 고하고 한국 사회가 허무주의와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진입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1990년대가 실질적으로 끝난 계기가 1997년 외환위기와 IMF 사태라고 지목하였다. #
강준만은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보통 사용하는 냉소주의는 세상만사, 심지어는 자신과 무관치 않은 일까지 구경꾼의 자세로 보면서 빈정대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에 가깝고, 냉소주의 없이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세월이 너무 길었던 한국인들에게 오랜 친구였다고 지적한다. 조선 말기 관리들의 민중 수탈이 그랬고, 타 민족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일제강점기가 그랬고, 이념 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이 그랬고, 6.25 전쟁 중에는 정부가 서울 시민을 속이면서까지 도망치고는 돌아와서 피난 못 간 '잔류파'를 부역자로 몰아 처단하기 바빴던, 좌우 어느 쪽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말 그대로 목숨이 왔다갔다 했던 한국의 근현대사가 한국인들 사이에 냉소주의를 고착화시켰다는 것이다.
군사 쿠데타로 시작된 30여 년에 걸친 군사 독재가 끝나고 소위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뭔가 달라졌다고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질적으로' 나아진 것은 없다.[2] 갑자기 나라가 빚더미에 올라앉고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해 수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는가 하면, 이 나라의 양심과 도덕을 대변한다고 알려졌던 저명 인사들, 대통령의 권력을 사적으로 개인 에게 넘겨주고 그 개인의 딸에게 단지 대통령의 지인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특혜를 몰아준 추잡한 비리가 촛불혁명이니 뭐니 하는 그럴 듯한 민중의 심판을 거쳐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통해 척결될 줄 알았는데, 그 추잡한 비리를 앞장서서 비판하고 양심이니 도덕이니 운운하던 저명인사들이 실상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비리를 뒤에서 저지르고 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래서 또 이들을 심판하겠답시고 정권 교체를 했더니 이번에는 다른 형태의 부조리가 곳곳에서 제기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택하든 그놈이 그놈이고 다 똑같은 더러운 놈들이더라는 냉소가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냉소주의를 택한 사람들을 마냥 뭐라하는 것은 오히려 냉소주의를 더 깊이 뿌리박히게 한다.[3]
정치적 문제를 빼놓고 사회적 문제를 보더라도 구조적으로 냉소주의를 불러 올 수밖에 없는 구조적 부조리는 해결되지 못했고, 이를 해결해야 할 책임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이걸 해결할 의지도 없다. 기아자동차 노조 채용 비리 사건만 보아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책임과 능력이 있는 노조가 진작에 또 다른 기득권으로 타락한 지 오래라는 것 역시 까발려졌다. 장애인들에 대한 보행권 보장을 명분으로 지하철 운행까지 차질을 빚게 만든 사태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 인권을 외치고 암암리에 자행되던 사회적 여성 차별을 고발해내는가 싶더니 도리어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이어지는 일도 생겨났다. 스포츠계 및 법조계 내부의 성 추문에 대한 미투 운동은 분명히 쉬쉬하기 급급했던 내부의 권력형 성추행에 대한 문제 제기 및 피해자 발굴에 긍정적인 영향도 주었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쳐다봤다'는 이유로 여성에 대한 시선강간을 운운하며 잠재적 성폭행 가해자로 몰아가는가 하면, 쓰러진 여성을 인공호흡으로 응급처치한 남성이 성추행으로 고발당했다는 얘기까지 나돈다. # 이에 차라리 처음부터 여성들은 어떤 사적인 자리에 부르거나 아예 말도 섞지 말자는 남성들의 펜스룰이 생겨나는가 하면, 여성들이 분명히 범죄의 대상이 되기 쉽고 동시에 젠더기반폭력에서 남성보다 높은 비율로 물리적인 피해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을 두고 " 다른 나라 가 봐라. 다른 나라는 한국처럼 밤에 밖에 나다니지도 못한다"며 뜬금없이 외국 사례를 가져와 문제 제기의 목소리를 틀어막는 경우까지 있다.
4. 문제점
나는
고통과
인생이란 항상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고통이 잠시 사라질 때가 있다면 단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뿐입니다. ‘
오만’과 ‘냉소주의’는 깨어 있는 동안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줄 뿐이지요.
루쉰
루쉰
All I ask is one thing, and I'm asking this particularly of young people that watch: Please do not be cynical. I hate cynicism. For the record, it's my least favorite quality — it doesn't lead anywhere.
여러분께 단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특히나 젊은이들이 꼭 새겨들었으면 합니다. 냉소하지 마십시오. 저는 냉소주의를 경멸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불평불만이 삶에서 가장 쓸데 없는 기질이라 생각합니다.
코난 오브라이언
여러분께 단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특히나 젊은이들이 꼭 새겨들었으면 합니다. 냉소하지 마십시오. 저는 냉소주의를 경멸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불평불만이 삶에서 가장 쓸데 없는 기질이라 생각합니다.
코난 오브라이언
절대 절망에 빠지지 마십시오. 절대 냉소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후배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하지 마십시오. 현대 사회에서 모든 자본들은 사람들에게 바보가 되라고 강요합니다. 냉소주의는 사람의 기운을 빼앗아 갑니다. 절대 절망에 빠지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전 여러분 세대에 많은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싸우지 않는다면 죽어서 지하에 있다가도 제가 싸우러 나올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또 이후의 세대가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조세희[4]
조세희[4]
사회에 냉소주의가 지나치게 유행하게 될 경우 특정한 사안에 대한 해결 대신 푸념과 비난, 자조를 일삼으며 문제 해결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냉소주의의 문제 중 하나로 지적된다. 대표적인 예시가 자국 혐오 사상이라고 볼 수가 있다.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이나 부정적인 소식을 접해도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구조적 해결 방법이 필요한지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헬조선, 탈조선 등등을 운운하며 그 현상을 관망하고 비난하기만 하지 해결책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다. 혹여나 나라가 망할 때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내 일도 아닌데 내가 알 바냐", "어차피 안 될 텐데 될대로 되라지 뭐" 식의 심리적 방어기제만을 만들며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고 비웃으며 관망하는 것에 대해서도 "결국 상황은 나아지는 것 하나 없으며, 구성원들은 현학적 논의를 지속하며 파국으로 치닫는 것 아니냐"라는 비판이 따른다.
이런 냉소주의를 잘 보여준 말 중 하나가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이다. 집단이나 체제를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뉘앙스가 있다는 점에서 냉소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말과 비슷한 유행어로 누가 칼들고 협박함?이라고 사회나 제도의 문제도 분명하게 하나의 원인이 된 문제임에도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책임을 돌려 버린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발언도 존재한다. 국가나 사회의 오래된 적폐에 대한 해결 시도나 추진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제 와서 무슨 바람이래니? 지금까지 그런대로 제멋대로 하고 살더니."라는 비웃음 또한 냉소주의의 한 형태이다.
냉소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는 성악설을 곡해하는 미신, 일명 '악의 핏줄'[5]이다. ' 인간은 원래 악하기 때문에 교정도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이는 성악설[6] 이상으로 선인들의 존재와 노력 등을 싸그리 무시한 매우 극단적인 주장이며, 그들이 제시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국 "인류 혹은 인종 등의 멸망"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전쟁, 제노사이드(인종 증오 및 학살 범죄) 등 각종 인권 침탈 행위 혹은 그런 행위을 정당화하거나 옹호하는 비인도적인 행위'라는 매우 잔혹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냉소주의에 대해서 가장 비판적인 곳 가운데 하나가 종교 단체이고[7] 그 중에서도 개신교가 특히 심한데, 실제로 냉소주의를 검색해 보면 냉소주의를 비판하는 개신교 교회의 기고나 설교, 간증이 불교나 가톨릭 같은 타종교에 비해 상당히 꽤 많이 나온다. # # # # # # 아무래도 개신교 안에서의 온갖 적폐와 위선적인 기만 행위들에 분노해서 아예 교회 자체를 떠나 냉담자, 나아가 무신론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
4.1. 반론
고영복은 냉소주의를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기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비판하고 개선시켜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고, 멀리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며 이것저것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태도'라고 정의했다. 그는 냉소주의가 대체로 대안이 없는 비난이라는 점에서 건전한 비판과 전혀 다르며, 냉소적 인간은 현실에 대해 못마땅해 하면서도 변화를 진심으로 바라지는 않거나 변화, 발전을 위한 의지나 능력이 결핍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공동체 지향성을 선(善)으로 간주한 성격의 냉소주의 비판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아마도 사람들은 ' 한두 번 속아보나'라고 답할 게 틀림없다. 미국의 공동체 운동가인 어니스토 코르테스는, 공동체의 힘을 키우는 작업의 최대 걸림돌은 임금 노동자 계층과 소수민족 공동체에 널리 퍼져 있는 ' 반복경험에 의해 생겨난 무력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오로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느낌인데, 여기서 중요한 건 '먼저 나서면 먼저 당한다.'는 반복경험의 지혜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강준만 <한국인 코드>
이는 공동체 지향성을 선(善)으로 간주한 성격의 냉소주의 비판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아마도 사람들은 ' 한두 번 속아보나'라고 답할 게 틀림없다. 미국의 공동체 운동가인 어니스토 코르테스는, 공동체의 힘을 키우는 작업의 최대 걸림돌은 임금 노동자 계층과 소수민족 공동체에 널리 퍼져 있는 ' 반복경험에 의해 생겨난 무력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오로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느낌인데, 여기서 중요한 건 '먼저 나서면 먼저 당한다.'는 반복경험의 지혜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강준만 <한국인 코드>
냉소주의자들의 반응이 매사에 간단명료하게 ‘큰일이네요. 그래서 어쩌라고요?’ '위선 떨지 마시고 너나 잘하세요'로 일축되고 끝인 것은 딱히 그들만이 부정적인 유전자를 타고 나서 그런 게 아니고, 개인의 성격이 특출나게 이기적이어서도 삐딱해서도 아니다. 흔히 중립이 양극단 진영논리의 관점에서 회색분자, 기회주의자, 간잽이 하는 식으로 오해를 사기 쉽듯, 냉소주의라는 관점 역시도 사정 모르는 누구 말처럼 사회나 정치와 관련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문제라는 얘기다.
저출산 문제만 들어보더라도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저출산이나 부동산 문제 대책 같은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자고 아무리 지금이 힘들어도 내일을 보고 미래를 준비하자며 먼저 나 한 사람부터 인식을 바꾸자고 나서봤자 “저들은 성공했으니 저런 배부른 개소리도 말할 수 있겠지. 우린 그 잘난 사회나 나라보다 지금 당장 내 삶이 걱정인데?“, ”애를 낳는 게 그렇게 행복하고 보람차고 가치 있는 일이면 너희들부터 먼저 많이 낳아 보시든가.“라고 코웃음부터 친다.
저출산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석이나 그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은 안중에도 없이 " 아이를 낳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달라"느니, "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이가 주는 행복감이란 특별한 것이다" 같은 감성팔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면서 아이를 낳으라는 자들이 '전문가'라고 방송에 나와서 저출산 문제 해결을 외치는 게 냉소주의를 비판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껏 저출산이 생겨나는 원인에 대한 분석을 진지하게 하는 척 하더니 '너네가 아직 애 안 낳아 봐서 모른다. 낳아보면 예쁘고 귀여워서 힘들어도 견딜 수 있게 되니까 좀 낳아 봐라'라는 결론으로 가는데, 그에 대해서 '그럼 니가 낳든가' 하는 냉소가 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적인' 호소를 두고 냉소주의자들은 뭔가 대안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밖에 모른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8] 냉소주의자들더러 '대안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비판만 한다'고 비판해 봐야 냉소주의자들 입장에서는 "그러는 니들은 얼마나 잘났는데? 대안이 있냐? 저딴 걸 대안이라고 내놓는 니들은 뭔데?"라는 비아냥이 나올 수밖에 없고 이 비아냥이 마냥 비아냥으로만 치부될 순 없다는 게 문제다.
사회의 지도층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능하거나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대안이라고 제시하는 것도 현실은 전혀 반영되지 못하고 뜬구름 잡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장밋빛 낙관만 제시하지 실패했을 때의 대비책은 하나 없는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는 데에 1차적 원인이 있는 건데 그것마저도 냉소주의자들이 문제라며 냉소주의자들은 구조적 부조리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그것을 해결할 만한 어떤 대안 모색이 없다며 덮어놓고 비판만 하는 것은 냉소주의는 나쁘니까 안 된다. 왜냐면 나쁘기 때문이다. 식의 쓸데없는 순환 논법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냉소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냉소주의자들에게는 그럼 그렇게 원인을 잘 아는 니가 해보든가라는 비아냥의 대상 1순위가 된다. 어떤 사안을 한 마디 비판했더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나대지 말라"라는 핀잔만 들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더니만 "지금 뭐하는 거냐. 팔짱만 끼고 구경만 하지 말고 좀 뭐라도 해 봐라"라고 본인조차 절대 움직이지 못한 채 비판을 하는 것은 그냥 꼰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어차피 안 바뀌네 뭐네 남 탓, 사회 불평만 하지 말고 나 한 사람이라도 뭘 실천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의식을 바꿔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라는 소리는 진작에 "허이구, 깨시민 나셨네"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다. 그런 식으로 입으로만 떠드는 인간들이 실상 능력은 아무 것도 없었던, 그런 말만 떠들고 있으면 주위에서 깨어있는 사람이다, 지식인이다 하고 떠받들어 주니까, 그리고 자기가 뭔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대단한 정의로운 사람이 된 것마냥 자기우월감,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자신이 깨어있는 사람인 것처럼 떠들고, 정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강력 범죄 가해자 신상 공개, 엄벌주의를 떠들고 다녔지만 실상은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던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아니 그 이상으로 추악한 속물이었다는 것은 만천하에 까발려진 지 오래다.
냉소주의자들 입장에서는 발전이니 진보니 하는 건 어차피 자기 기득권 지키려는 이익 집단이 겉치레로 내세우는 빛 좋은 개살구이고 소위 ‘있는 것’들이 사람을 희망고문하며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해 먹으려는 환상 내지 허상일 뿐이다. 펜스룰과 마찬가지로 괜히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내가 손 대서 나대다 더 악화되고 책임까지 다 떠안게 될 바에는 차라리 처음부터 손을 안 대고 놔두는 게 적어도 내가 책임질 일은 안 만드니까 그쪽이 더 낫다는 쪽을 택했을 뿐이다. 명지대학교 박정호 교수는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들며 "다른 것 다 제쳐두고 냉소주의만큼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지금까지 냉소주의로 발전한 사람도 발전한 나라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애초에 발전이란 것이 존재한 적이 없다면[9][10] "냉소주의로 발전한 사람도 없고 발전한 나라도 없다"는 소리가 성립될 수 있을까?
인터넷 강사 이지영도 "너희 나이 때에는 그런 냉소적, 비관적인 태도로 현실주의 운운하는 사람들이 냉철해 보이고 그런 애들이 '그게 되겠냐' 하는 게 멋있어 보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바보다. 오히려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이끌고 바꿔 나가는 것이다"라며 냉소주의에 대해 비난했지만, 대책없이 낙관적으로 제 좋을 대로만 상황을 판단하면서 머릿속에 긍정 회로만 돌리다가 인생을 오히려 말아먹는 인간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점에서 가진 놈의 뭣 모르는 헛소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냉소주의자들을 수동적인 방관자라고 욕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 냉소주의자들이 문제다 식으로 냉소주의를 없애자 냉소주의는 나의 원수 이런 식으로 몰아가면 사회 문제가 다 해결될 거냐 하는 건 장담할 수 없다. 방관자 항목에서도 보듯 그들이 방관을 택한 것도 결국 그들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의 말처럼 먼저 나서면 먼저 당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오랜 역사의 경험을 체화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 뿐이다. 이런 사람들의 냉소적인 반응을 깨기 위해서 이들을 어르고 달래서 지지를 끌어내야 하는 쪽에서는 더욱 실현 불가능한 장밋빛 이상, 대책없는 낙관들을 늘어놓게 되고, '혹시나 이번에는'이라고 혹했다가 그 이상이 처참하게 깨진 뒤에 더욱 분노해서 콩으로 메주를 쒀도 안 믿는 철저한 불신으로 고착화되는 사람이 늘어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강준만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만연하는 언어의 인플레이션"이라고 지적하며 냉소주의에 대해 "너 그렇게 살면 손해야", "세상이 이렇게 좋은데 넌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냐?"라는 식으로 '오만하게' 깨거나 "저런 매사에 삐딱하고 부정적인 것하고 함께 있으면 나만 안 좋은 영향을 받으니까 일찌감치 손절해야 한다"며 부정적으로 배척하려고 들지 말고 '겸허하게' 껴안으라고 주문했다. #[11]
냉소적인 사람이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보다 슬픔이나 실망, 분노 같은 우울한 감정을 더 쉽게 떨쳐내고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
5. 관련 문서
-
남북관계
남북통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통일반대론자들 중에는 '남북이 통일이 되건 말건 내가 알 바 아니다.', '어차피 통일된다 한들 나아질 게 없는데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게 낫다'라는 사고를 보이는 것을 넘어 매체의 북한 관련 보도 자체를 ‘또 정권 흔들리니까 북한 끌어다 안보팔이/평화팔이 하냐’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관심없으니까 보도하지 마라’라는 비아냥은 덤이다. - 누칼협
-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 염세주의
- 인터넷 커뮤니티
- 자국 혐오
- 정치적 무관심
-
정치 혐오
정치적 무관심의 유형 가운데 하나인 ‘굴절적 무관심’은 냉소주의와 흡사한 면이 있다. - 좆간
- 체념
- 탕핑족
- 패배주의
- 허무주의
- 헬조선 - 탈조선
- 헬지구
- 현실주의
[1]
학계에서 '냉소주의'는 이 문서의 내용이 아닌 시니시즘을 가리킨다.
[2]
무력으로 자신의 반대되는 의견을 억압하는 일이 없어진 정도가 전부일텐데, 이마저도 이후 무력 외의 방법으로 반대되는 의견을 억누르는 일이 많이 발생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물론 '군부 독재를 없앤 게 의미없고 하찮다는 것인가?'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아직도 기존의 수많고 심각한 문제점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3]
"그놈이 그놈이라고 내버려 두면 제일 나쁜 놈이 다 해 먹는다"는 말도 냉소주의의 관점에서는 그냥 '어쩌라고?'로 축약되고 끝이다. 더하든 덜하든 어차피 나쁜 놈인 건 똑같은데 뭐가 다르겠냐는 거다.
[4]
2008년 11월 14일 교보생명빌딩에서 열렸던 기념문집 『침묵과 사랑』 헌정식 및 낭독회가 끝날 무렵에 잠시 한 마디 하겠다고 발언권을 얻어서 했던 말이다.
# 이후 조세희는 2011년 7월에 인권연대 12주년 기념강연회에서도 "20대들은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라. 냉소주의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공동의 일, 공동의 숙제를 해낼 수가 없다. 냉소주의는 우리의 적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출처
[5]
'악마의 씨', '악의 혈통' 등으로도 불린다.
[6]
성악설은 차라리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그러므로 악한 본성을 예악을 통해 끊임없이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교화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7]
종교라는 게 '신앙'으로 성립되고 존속할 수 있는 건데 냉소주의의 특성이 만사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니 서로 충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8]
저출산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들을 보면
여성들을 1년 조기 입학시켜서 향후 적령기 남녀가 서로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도록 하고
노인들은 해외 이민을 보내 생산인구 비중을 확대하자 하는 것들이 정부의 인구정책 입안을 위한 기본적 연구를 자임하는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연구자한테서 나온 연구 결과(?)다.
명색이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정치인이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나 혼자 산다 같은 예능이 문제"라며 예능 방송 탓을 하지 않나
#, 그러면서
갖춰진 것 하나 없는 상태에서 덜컥 애부터 갖게 된 미성년자, 사회 취약층 부모들의 구질구질하고 처절하기까지 한 현실을 가벼운 오락성으로 다룬 예능을 "저출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며 칭찬한 것은 덤이다.
#
명색이 서울시의원이라는 사람이 케겔 운동을 저출산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9]
애초에 '발전'이니 '진보'니 부르던 것들이 사실은 '발전' 내지 '진보'라는 이름만 붙은 퇴보이고 또 다른 의미의
개악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은 인류 역사에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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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가 잘 안 된다면
문화대혁명을 한번 생각해보자. 이름만 '
혁명'이지 실상은 '문화대파괴', '문화대숙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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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문제에서도, 처음에 여성에 대한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폭로 이후 차라리 처음부터 여성들은 어떤 사적인 자리에 부르지도 말고 아예 직장에서도 말도 섞지 말자는 남성들의
펜스룰이 생겨나고, 지하철에서 여성이 쓰러졌어도 손도 대지 않고 머뭇거리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기도 하는 상황이 터지자 이에 대해 '또 다른 형태의 여성 혐오'라는 비난이 터져 나왔지만, '쳐다봤다'는 이유로 여성에 대한 성적인 대상화라느니 운운하며 잠재적 성범죄자로 몰리는 판국에 남성들은 그런 형태의 '찌질함'과 '좀스러움'을 택하지 않고는 생존마저 위협받는 지경에 처한 상황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남성들의 주장처럼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니 하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커졌다는 여성의 목소리가 정작 그 이전부터 운위되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권력형 성범죄의 위험성을 척결한 것도, 그와 관련한 부정적 관행들을 없앤 것도 아니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성 역할의 차이를 바탕으로 하여 개인의 의지와는 달리 약자에게 행해지는 물리적·언어적·성적 폭력, 즉 젠더기반폭력의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라는 현실은 미투 운동, 펜스룰 이전이나 이후나 변함이 없다.
# 이런 것을 '발전'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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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
카게무샤의 유명한 도입부에서, 다케다 신겐의 카게무샤 역할이 맡겨진 좀도둑은 신겐이 자신을 좀도둑 운운하는 말에 코웃음을 치며 “난 고작해야 푼돈 몇 푼이나 훔친 새끼 도둑이지만 넌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수백만 명을 죽게 만든 더한 도둑놈 아냐? 왜 너한테 내가 도둑놈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되냐?”라며 비웃지만, 신겐은 그 좀도둑의 빈정거림에 분노해 발끈하지 않고 좀도둑이 하는 말을 가만히 다 들은 다음 “네 말이 맞다. 나는 내 아버지를 추방했고 아들을 죽였으며 많은 목숨을 죽여 왔고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더한 짓도 할 수 있는 대악인이다.”라며 “어차피 누군가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는 이상, 이 난세에 피의 강물은 멈추지 않고 시체의 산은 높아지기만 하는 법 아니더냐?”라며 차분하게 좀도둑에게 자기 입장을 설명한다. 좀도둑도 푼돈을 훔쳐 연명하듯이 자신도 전란의 시대에 전쟁을 끝내려고 전쟁을 벌인다는 논리. 물론 그게 뭐가 다르냐는 비웃음은 나올 수 있겠지만, 적어도 신겐은 좀도둑 앞에서 자신이 행하는 일이 악행이라는 것은 틀림없다고 인정하고, 좀도둑의 말에 발끈해 그의 입을 틀어막아 내쫓는 게 아니라 자신 앞에서 저렇게 말하는 배짱이 마음에 든다며, 처음 생각을 바꾸어 그를 자신의 카게무샤로 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