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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С-4 (Объект 701)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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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4M 기동 영상[1] |
원래는 3번째로 채택되었어야 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나온 동생 IS-3이 먼저 채택되어 4번째로 밀리는 바람에 종전 이후에나 양산됐다. 키릴 문자로는 ИС-4로 라틴 문자로는 IS-4 또는 JS-4로 표기한다.
2. 제원
개발 및 생산 | ||
개발기관 | SKB-2 | |
개발연도 | 1943~46년 | |
생산공장 | ChTZ | |
생산연도 |
1947~1949년 1951년 (IS-4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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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량 | 258대 | |
운용연도 | 1947~60년대 | |
운용국가 | 소련 | |
제원 | ||
전장 | 6.6m (포신 포함 시 9.79m) | |
전폭 | 3.26m | |
전고 | 2.48m | |
중량 | 60t | |
탑승인원 | 4명 (전차장, 포수, 조종수, 탄약수) | |
공격력 | ||
주무장 | 48구경장 122mm D-25T 전차포 1문 (30발) | |
조준 및 사격장치 | TSh-45 직접 조준경 | |
상하 부앙각 | −3 / +19° | |
좌우 회전각 | 360° | |
부무장 | 12.7mm DShKM 기관총 2정 (1,000발) | |
승무원 무장 | F-1 수류탄 (20발) | |
기동력 | ||
엔진 | ChTZ V-12/12M V형 12기통 4행정 액랭식 디젤 엔진 | |
최고출력 / 회전 수 | 750hp (552kW) / 2,100rpm | |
출력비 | 12.5hp/t | |
현수장치 | 개별 토션 바 | |
최고속도 | 41~43km/h (야지 주행 시 15~20km/h) | |
항속거리 | 170km (야지 주행 시 80~140km) | |
접지길이 / 접지압력 | 4.385m / 0.9kg/cm² | |
초호능력 | 2.8m | |
초월능력 | 0.9m | |
등판능력 | 35° | |
도하능력 | 1.5m | |
방어력 | ||
장갑형식 | 주조 및 균질 압연 장갑 | |
차체 | 전면 |
상부: 140mm / 61°, 하부: 160mm / 40° |
측면 |
상부: 160mm / 30°, 하부: 160m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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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 |
상부: 95mm / 37°, 60mm / 20°, 100mm / 32°, 하부100mm /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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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 | 상부: 30mm, 하부: 30mm | |
포탑 | 전면 | 250mm° |
측면 | 200mm / 34° | |
후면 | 160mm / 36° | |
상면 | 30~90mm |
3. 개발사
IS-2의 후속 전차이자 기존 스탈린 전차보다 방어력이 뛰어난 신형 전차를 개발하기 위해 1943년 7월부터 ChTZ(당시 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의 SKB-2에서 Object 701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목표는 독일제 75mm와 88mm 전차포에 대해 전방위에서 방호가 가능한 전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오비옉트 701 프로젝트는 1943년 12월에 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에서 설계한 K 중전차 설계안을 바탕으로 개발되었고, 개발단계에서 총 6가지 사양의 프로토타입이 제작되었다.[2] K 설계안은 IS-2의 실전배치보다 앞서서 개발되었으나, 이미 얼추 알려진 IS-2와 그 전신인 IS-1 설계의 단점들을 보강하기로 계획되었다. 참조 IS-2를 대폭 현대화해야 한다고 GATBU가 결정을 내린 1943년 11월부터 본격적인 설계가 시작되었고, ChKZ에서는 IS-2 부분변경과 별도로 완전한 신형 전차를 개발하기로 하였다. 동시기에 LKZ에서도 100번 공장과 협업하여 오비옉트 252( IS-6)라는 이름의 신형 전차를 개발했다. 또한 ChKZ의 신형 전차 프로젝트도 개발진이 갈라지면서 키로베츠-1(오비옉트 703)과 오비옉트 701로 갈라졌으며, 이들은 훗날 IS-3와 IS-4로 완성되었으며, 소련군 신형 중전차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3]
ChKZ의 K 설계안은 오비옉트 701로 결정되었다. 참조 극초기 K 설계안에서는 포탑 후방 기총까지 있는 IS-2와 비슷한 포탑을 적용했으나, 1944년 초에 오비옉트 701로 넘어가면서 후방 기총을 제거하고 포탑 지붕도 새로 설계하였다. 그렇게 1944년 4월에 0호 시제기(701-0)가 제작되었다. Tanks Encyclopedia
ChKZ의 SKB-2 설계국에서 701의 개발이 진행되었고 1944년에 5월에 시제차 2대가 새로 발주되면서 추가로 만들어진 1번 시제차량(Object 701-1)과 2번 차량은 각각 주무장으로 122mm S-34-II와 100mm S-34-I를 장착했다.[4] 또한 1번 차량에는 51mm 박격포도 달려있었고, 포탑의 탱크데산트용 손잡이들은 밀어버렸다. 2번 차량에는 신규 전조등이 사용되었다. 1번차와 2번차는 6월과 7월에 각각 여러 테스트를 거친 후 분석을 위해 7월 말에 분해되었고, 시험에서 V-12 엔진과 구동계의 문제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후 8월에는 실사격 시험을 위해 부분적으로만 완성된 3번차가 만들어졌다. 테스트에서 3번차는 여러 독일과 소련제 대전차포를 상대로 방호 여부 테스트를 받았고, 8,8cm KwK 43을 상대로 우수한 방어력을 보였지만 포탑의 포수 조준경과 차체 전면의 조종수 관측창이 관통당했고, 차체 측후면의 용접부위가 찢어졌다. 한편 동시기에 2호차는 주행 테스트를 받았는데, 변속기 기어의 내구성이 떨어지면서 2번씩이나 기어를 교체했다.
2번과 3번 차량들은 1번 차량보다 방어력이 강화되었지만 변속기에서 문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다음에 제작된 4번 차량에는 여러 개선과 방어력 강화 사항이 반영되었으며, 새 변속기를 장착하고 1944년 9월에 제작되었는데, 주행테스트에서 변속기의 결함을 완전히 해결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후 1944년 말에 장갑을 한차례 더 강화한 5번 차량(Object 701-5)가 제작되었고, 주행을 포함한 모든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여 양산에 적합하다고 판명받았다. 마지막으로 5번 차량에서 조종수 관측창의 형상 등을 수정한 6번 차량이 1945년 4월에 제작되어 테스트를 거쳤다.
개발된 차량 중 Object 701 No. 6 전차가 1945년 상반기에 채택되어 신형 중전차로 양산이 결정되었으나, 양산 직전에 경쟁작 IS-3(오비옉트 703)가 경쟁에서 승리하여 우선적으로 채택되면서 프로젝트 진행과 양산 계획이 중단되었다. 당시 소련군 수뇌부는 반구형 포탑과 쇄기형의 차체 전면 장갑을 갖춘 IS-3를 혁신적인 전차로 생각했기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공장 개발진 사이의 정치적 입지로 생산이 보류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IS-3 차량들에서 여러 중대한 결함들이 발견되었고, 1945년 8월에 다시 오비옉트 701 프로젝트가 부활하면서 개발 진행이 허가되었고, 1946년에 IS-3의 양산이 중단된 이후 결함품 IS-3를 대신할 중전차를 찾던 소련 육군의 눈에 오비옉트 701이 들어오면서, 개발이 다시 허가됨과 동시에 IS-3에 이은 IS-4로 채택되었다. 본격적인 양산은 1947년에 시작되었고, 1949년까지 총 233대의 IS-4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4. 특징
IS-4는 IS-2의 방어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이 시작된 만큼 기동력과 화력보다는 방어력을 집중적으로 강화하였다. 그 결과 전차의 거의 모든 부위가 티거 2에 탑재된 8,8cm KwK 43 (L/71) 전차포에서 발사된 포탄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장갑을 가지도록 설계되었다.
차체의 형상은 전측면 장갑의 각도가 더 붙은 상태로 IS-2 1943년형과 IS-2 1944년형의 전면부를 합쳐놓은 것 처럼 생겼으며, 전체적으로 IS-2에 비해 장갑 두께가 훨신 증가했다. 장갑이 이전의 소련 중전차들보다 전체적으로 두꺼워진 만큼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IS-2가 약 46톤, IS-3가 약 46.5톤인것과 달리 IS-4는 중량만 50톤 후반~60톤 초반에 달하는 중량을 가졌다.
라이벌인 IS-3가 IS-2와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의 무게를 가지고서도 특유의 뱃머리 형상의 경사장갑과 냉전기부터의 동구권 전차를 대표하게 되는 반구형 포탑, 설계부터 재대로 도입된 내부 공간장갑 같은 신기술을 대폭 도입하여 기존 IS-2와 동일한 수준의 비교적 얇은 장갑으로도 실질적인 방어력이 대폭 상승한 혁신적인 전차라면 상대적으로 IS-4는 IS-2나 T-34 전차에 적용된 기존의 전차 설계사상을 유지하되 IS-2의 약점을 제거하고 더 두꺼워진 장갑으로 포탄을 막아내는 보수적인 전차에 가깝다.[5] 차대 플랫폼 설계의 경우 그 반대로, IS-2의 섀시를 거의 그대로 유용한 IS-3와 달리, IS-4는 처음부터 신형 중전차로 설계되었던만큼 IS-2에 비해 섀시 설계가 여러 부분에서 새로워졌다.
차체 전면 상부 장갑은 두께 140mm에 (평지기준)약 61도의 경사를 가져서 280mm를 넘는 실 방호력을 갖췄다. 전면 하단과 차체 측면은 순수두께만 160mm로 전면 상부보다도 두껍고[6], 차체 후면부[7]도 대부분의 부위가 순수 두께만 100mm인 경사장갑으로 보호받았다. 포탑 장갑도 매우 두꺼운 편으로 포탑 전면부는 두께 250mm의 장갑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장갑수치는 같은 중장갑으로 유명한 8호 전차 마우스랑 비교시 부분우위 부분열세인데 60톤급 중전차가 무려 200톤 가까이 나가는 초중전차와 어느정도 방어력이 비슷하다는 거부터 이 전차의 위용을 알 수 있다. 너무 무거워서 실전 투입도 못하고 잉여 전력으로 구석에 박아둔 것도 두 전차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전폭을 제외하면 IS-2보다 조금 작은 차체의 사방으로 떡장갑을 두른 결과 실내 공간이 좁아지면서 IS-2보다 승무원 거주성이 악화되었다는 문제점도 있었다.[8] 그리고 중장갑화로 인해 가격은 IS-3보다 비쌌지만 정작 방어력을 제외한 나머지 전투력 성능은 IS-3와 비교해서 크게 뛰어나지 않았다.
화력의 경우 122mm D-25T 전차포를 주무장으로 장착했기 때문에 동일한 주포를 장착한 IS-2, IS-3와 별 차이가 없다. 기동력의 경우 미쿨린 AM-38F 항공기 엔진에 사용된 과급기를 장착해서 출력을 750마력까지 끌어올린 개량형 V-2 엔진을 사용했기 때문에 톤당 마력 비율은 더 가벼운 IS-2, IS-3와 비슷했고, 이 덕분에 60톤에 달하는 중량에도 불구하고 IS-2, IS-3와 비슷하거나 더 나은 직진 기동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과급기를 단 결과 엔진의 연료 소비량이 더 늘어나면서 연비는 영 좋지 않아서 항속거리는 IS-3보다도 짧았고, 에어필터도 품질이 영 좋지 않았던데다가 V-12 엔진 수명이 기존 V-2 계열보다 급감하여 유지보수가 까다로워진 문제가 생겼다. 변속기의 신뢰성도 좋지 않아서 변속기의 수명이 짧은가 하면 주행중 잦은 잔고장이 발생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외에도 현가장치와 브레이크에도 잔고장이 잦은 것처럼 주행계통을 중심으로 하자가 심각한게 문제가 되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열이 더 많이 발생하는 과급 엔진을 사용하여 더 고성능인 냉각장치가 필요해짐에 따라 기존 소련 전차와는 다른 신형 쿨링 시스템이 적용되었다는 점이 있다. 신형 엔진 냉각장치는 2차 대전 당시 노획한 독일군의 5호 전차 판터들의 마이바흐 HL230 엔진에 적용된 독일제 냉각장치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엔진룸 좌측과 우측 상단에 독립적으로 설치된 에어 인테이크와 대형 쿨링팬이 튀어나왔고[9], 라디에이터 배치와 커버 형상이 IS-2나 IS-3같은 이전 소련제 중전차보다 판터와 티거같은 독일 전차들과 더 닮았다.[10]
설계에서 IS-2보다 발전된 점이 있다면, 차체 전면부의 약점을 없애면서도 차체에 조종수용 탑승구[11] 해치를 탑재했다는 점이 있다.[12] 차체의 조종수 해치는 IS-3처럼 옆으로 열리는 방식이며, 전면부 방어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포방패 아래쪽으로 밀착되었다. 해치가 튀어나온 곳의 앞과 주위에는 방어력 강화를 위해 추가로 장갑판이 용접되어 튀어나왔다. 6번 시제차에서는 조종수의 전방 관측을 위해 IS-2 1944년형처럼 장갑에 슬릿을 뚫어놓았지만, 이것이 약점이 된다고 판단되자 슬릿 관측창을 제거하고 해치 위에 페리스코프를 2개 놓는 방식으로 바꿨다.
현대화 개량형 사양인 IS-4M 전차는 1951년에 25대 생산되었으며 그전에 생산된 분량들도 IS-4M 사양으로 개량되는 현대화 작업을 거쳤다. IS-4M을 포함하면 총 258대가 생산되었다.
5. 같은 명칭의 다른 전차
5.1. IS-4/IS-100/Object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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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ject 245 |
6. 형식
6.1. IS-4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처음 생산된 233대의 차량들.6.2. IS-4K
IS-4의 지휘차량형. 탄약 적재량이 줄어든 대신 추가 통신장비와 야간 관측장비, 거리 측정기, 6배 줌 망원 관측장비 등의 추가 관측장비들을 추가했고 내부에는 지휘관을 위한 서류 보관함과 실내 조명, 접이식 테이블도 배치되었다. 1946년부터 계획되어 1974년에 시제차가 만들어질 계획이 있었으나 결국 개발이 취소되었다.6.3. IS-4M
완성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각종 결함들을 해결하고 품질을 개선한 현대화 개량형 IS-4M이 만들어졌다. 1951년 하반기에 25대가 IS-4M 사양으로 신규 생산되었고[14], 기존에 생산되었던 IS-4들도 1951년 말까지 대부분 IS-4M 사양으로 개량되었다.[15]IS-4M에서는 주포 조준용 관측창이 개선되고 추가적인 배기 부품이 장착되었으며 포탑 외부에 대공 기관총이 신설되는 등의 변화가 생겼다. 포탑의 환풍기와 탄약고도 개량되었다.[16]
본 개량을 통해서 기존 차량들의 불안한 변속기 내구성을 해결하기 위해 개선된 변속기가 장착되었고, 엔진도 신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량되어 V-12에서 V-12M으로 명칭이 바뀌었다.[17] 그리고 T-10에 적용하려고 개발한 신형 알루미늄 궤도 커버와 사이드 스커트[18], 펜더 부품이 적용되었다. 궤도 커버와 사이드 스커트 부품은 이후 IS-2M, IS-3M에도 추가되었다.
1958년에는 기존 통신장비들이 신형 R-133 무전기와 R-120 인터콤으로 교체되었다.
7. 파생형
7.1. ST-1
IS-4의 프로토타입 개발이 진행중이던 2차 대전 말기에 제시된 개선형 차량. 승무원 거주성을 비롯한 기존 IS-4의 단점들을 해결하고자 IS-4 차체를 기반으로 포탑을 중심적으로 재설계한 설계안이다. 승무원 거주성과 도하 능력이 크게 개선되었지만, 포탑의 설계변경으로 늘어난 가격이나 전고에 비해 다른 성능은 IS-4보다 크게 우위가 없다는 이유로 프로젝트가 취소되어 설계도로만 남았다고 한다.ST-1을 기반으로 확장된 포탑을 달고 쌍열포를 장착하는 것을 고려한 ST-2 설계안도 있다.
7.2. 화염방사기 장착형
IS-4 기반으로 계획된 화염방사전차. 시제차 1대만 제작되었다고 한다.7.3. 오비옉트 715
IS-4의 차체를 기반으로 계획된 중자주포. IS-3를 기반으로 개발된 오비옉트 704의 후속으로 계획되었고, 152mm 구경 M-31 또는 M-48 곡사포로 무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냉전기에는 ISU-152같은 중자주포가 시대에 뒤쳐진다고 판단되면서 개발이 취소되었고, 설계도면으로만 남았다. #오비옉트 715 이후, 나중에 나온 T-10 중전차를 기반으로 설계한 오비옉트 268 중자주포가 개발되었고 시제차까지 만들었지만 이 역시 채택되지 못했다.
7.4. 오비옉트 717
교량전차 설계안.8.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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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19] | 폴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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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지역 | (장소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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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또는 쿠릴 열도 |
그러나 당시에는 배치된 IS-4의 수가 적어서 이를 달성할 수 없었다. 1950년 5월 말 기준으로 IS-4 전차는 217대가 운용 중이었고 그중 78대가 공장에서 수리 중이라, 139대만 운용 중이었는데, 이는 2개 연대를 채우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1950년과 1951년 사이에 IS-4들은 ChKZ로 일괄적으로 보내져 현대화 개량과 정비를 거쳤고, 이후 벨라루스 군사 지구의 앞서 언급한 부대로 다시 보내졌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남한 편으로 참전하자 1950년 11월에 스탈린은 소련군의 한국전쟁 참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거의 모든 IS-4들을 한반도와 가까운 극동지방에 보내어 주둔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소련 육군은 6.25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IS-4가 전쟁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극동지방으로 보내진 IS-4들은 6.25 전쟁이 휴전에 접어든 이후에도 그곳에 남아[20] 1960년대까지 극동 주둔 소련군이 운용하다가 퇴역했다.
운용중이던 1954년에 중전차 사단이 편성되었는데, 이는 3개의 중전차 연대(65×3 전차)로 구성되었다. 1957년까지 8개의 중전차 사단이 편성되었고, 이들은 해체된 자주포 중전차 연대에서 가져온 IS-2, IS-3, IS-4 중전차로 구성되었지만, 소수의 T-10도 사용했다. 1960년대에 IS-4는 다시 한 번 개조를 거쳤고, 그 후 오시포비치에 있는 창고에 보관되었다.
이는 소련군이 IS-4의 선조격 IS-2와 배다른 동생 IS-3를 현대화 개수해서 더 오랫동안 운용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소련군이 IS-4를 일찍 퇴역한데는 품질문제 외에도 60톤에 가까운 과도한 중량으로 인해 철도 수송과 소련군의 중전차 운용교리를 충족하기 어려웠던게 이유로 보인다.[21] 또한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는 더 효과적인 대전차 병기들이 등장하면서 중전차의 몰락이 빨라지던 시기였다. IS-4는 기본적으로 생산가가 비싼 중전차였던데다[22], 결함 해결을 위해 개발이 완료되고 생산이 진행되는 중에도 수많은 개선이 적용되는 상황이라 다른 전차들보다 운용 부담이 커진 것도 있다.[23]
IS-4는 기존의 IS-2는 물론, 당시 나온 T-54 초기형과 비교해서 구동계 결함으로 인한 처참한 주행성능을 보여주면서 소련군은 이를 쓸만한 물건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시작하여 IS-4 배치 직후부터 조만간 신형 중전차로 대체하려고 계획했다.[24] 결국 비싼 가격에 비해 형편없는 품질문제가 지적되었고, 공장의 QC에도 심각한 하자가 있었다는게 드러나면서 1948년부터 추가 생산 중단이 명령되었고, 1949년에 나온 12대를 끝으로 기본형 IS-4는 233대 가량이 생산되는 선에서 그쳤다. 당초 IS-2의 문제를 개선한 후속작으로 개발된 전차였지만, 당시 기술 수준으로 무리하여 방어력과 기동력을 다 업그레이드하려고보니 문제들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소련군이 처음부터 IS-4를 완전히 손 놓은건 아니였으며, 1940년대 말에는 공간장갑 추가로 RPG 로켓 대항 방어력을 증강하거나 적외선 탐조등을 추가하는 개량도 고려되었고, 탐조등을 부착하고 시험을 받기도 하였으나 모두 유의미한 성능향상이 없다고 판단되어 취소되었다. 변속기 개량도 계획되어 개량형 변속기와 신형 자동변속기도 개발되었으나 IS-4에는 쓰이지 못하고 IS-7과 더 나중에 나온 T-10에 가서야 장착 시험을 받았다. 이 외에도 접지압을 더 낮추고 험지 주파력 향상을 위해 궤도 측단에 광폭 블레이드를 다는 시험도 거쳤지만 주행속도가 10km/h로 너무 낮아진다고 판단되어 취소되었다.
IS-4는 1960년대까지 소수가 사용되다가 점점 치장물자로 전환되었고, 여러 차량이 고정포대로 전환되었다. 마지막으로 1970년대에 극동지역에서 훈련에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퇴역 이후 많은 IS-4 차량들은 대부분 소련(러시아) 극동 지역, 혹은 중국[25]이나 유럽과 인접한 국경지대, 사할린과 쿠릴 열도 같은 장소에서 포탑만 떼어다 지하 벙커에 붙이거나 전차 자체를 헐 다운 자세로 땅에 묻어서 만든 고정포로 전환되어 더 쓰이거나, 사격표적 등으로 활용되다가 버려졌으며, 현재도 구소련 구성 국가들의 내륙 국경지대 인근에 여러대의 IS-4가 버려진 상태로 남아있다.[26] 위의 사진들이 고정포대로 활용되다가 버려진 차량들로, 그나마 출처가 있는 사진 몇 개를 추려본다.
그나마 새로 개발된 IS-4의 차대 설계는 이후 T-10을 개발할 때 상당부분 유용되었다.
현재까지 관리를 받아서 외형이 온전하게 전시된 IS-4는 5대 미만으로 이중에서 주행이 가능한 IS-4는 쿠빈카 애국 공원에 보존된 IS-4M 한 대가 유일하다. 쿠빈카 외에도 치타 지역의 군 장교 거주지, 카자흐스탄의 Semey 야외 군사 박물관에서 각각 IS-4M 1대를 보존하고 있다.
9. 미디어
모 게임의 영향으로 인지도가 높아졌다.9.1. 게임
9.1.1. 워 썬더
|
IS-4M |
9.1.2. 월드 오브 탱크
|
IS-4 |
2023년에는 IS-4 개발 초기 단계에서 제시된 설계안이 K-2라는 이름으로 소련 8티어 프리미엄 중전차로 추가되었다.
10. 모형
10.1. 프라모델
파일:external/www.trumpeter-china.com/55cd44507e981.jpg }}} ||Soviet JS-4 Heavy Tank 05573 |
10.2. 페이퍼 크래프트
게임 월드 오브 탱크 러시아 서버 공식 홈페이지에서 IS-4M 종이 도면 2개를 배부하고 있다. 링크1, 링크211. 둘러보기
<colbgcolor=#006400> 소련의 중전차 | |
전간기 | T-35, KV-1, KV-2 |
대전기 | KV-85, IS-1, IS-2, IS-4A, IS-3 |
냉전기 | T-10, IS-7B |
※ IS-4의 경우 프로토타입으로 존재하였으나, 종전 후 양산 ※ IS-7의 경우, 종전후 수대의 프로토타입만 제작되고 중량 문제로 불채택. 허나 분명히 정식으로 제식명칭을 받은 차량임. |
기갑차량 둘러보기 | ||
대전기(1914~1945) | 냉전기(1945~1991) | 현대전(1991~) |
[1]
동시대 차량과 비교했을 때 60톤급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꽤나 속력이 빠른 것을 볼 수 있다. 상단 사진과 동일한 차량이며, IS-4 중에서 유일하게 주행이 가능하나, 이마저도 2001년 행사 때 주행했던 것으로 이때를 이후로 행사를 뛰지 않아 이마저도 현재까지 주행이 가능한지는 불명이다.
[2]
#,
#
[3]
IS-3가 개발이 조금 더 늦어서 코드번호는 더 뒤에 왔지만 제식명칭은 더 앞선 이유는 2차 대전 말에 경쟁에서 먼저 IS-4를 누르고 승리하여 먼저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4]
100mm 포가 같이 고려된건 122mm의 낮은 관통력 문제 때문이라고 하는데 나중에는 IS-2와의 주포 호환성과 생산성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122mm D-25T를 탑재하는걸로 확정났다.
[5]
물론 IS-4도 IS-2와 비교하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듯 상당한 장갑형상 변경이 있었다. IS-3와 대칭되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보수적인 설계인 것이지 IS-4가 그냥 IS-2에서 장갑만 늘어난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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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측면 상부는 30도 경사를 가졌고 측면 하단은 완전히 수직장갑이라 차체를 추가적으로 선회하지 않는 한 평지에서의 실 방호력은 전면보다 낮다.
[7]
변속기 정비창 제외. 이 부분은 두께 30mm에 약 85도 경사를 둔 경사장갑으로 보호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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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중량 증대를 억제하면서 장갑 두께를 늘린 결과다. 전차의 전반적인 크기를 줄이면 그만큼의 부피에 쓰이는 장갑 재료의 무게가 줄어들기 때문에 줄어든 무게만큼의 재료를 장갑의 두께를 늘리는데 쓰기 용이해진다. 단 IS-4는 거의 모든 부위의 장갑을 기존의 소련제 중전차들보다 대폭 늘려버린 결과 크지 않은 덩치에도 무게가 IS-2와 IS-3의 4/3배에 달하게 되었다.
[9]
양 옆에 라디에이터가 따로 배치된 설계는 한쪽이 화염병 공격이나 오염물질 등으로 고장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다.
[10]
이는 이후 개발된
T-10의 프로토타입(IS-5)에도 이어졌다. 양산형 T-10에 와서는 라디에이터 커버 형상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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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직경이 너무 작아서 제대로 출입용으로 써먹기는 힘들었다.
[12]
IS-2 1943년형(초기형)에도 조종수 해치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탑승구가 아닌 시야확보를 위해 여닫을 수 있는 관측창이라 탑승구와는 개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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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는 견인포로는 1944년부터 쓰이게 된다. 반면에 122mm A-19는 M1931과 M1937의 두 버전으로 이미 붉은 군대에서 대량으로 사용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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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말이 신규 생산이지, 실상은 공장에 남아도는 잉여 차체와 부품 재고를 완전히 처리하는 것에 가까웠다.
[15]
233대중 대략 217대가 개량되었다고 한다.
참조.
[16]
원래는 포탑 후방에만 환기장치가 있었지만 주포 포연을 더 효과적으로 빼기 위해 전방에도 환풍구를 새로 추가했다. 이에 따라 포탑 앞쪽 지붕에도 돔형 환기장치가 생겼다.
[17]
T-10에 적용된 V-12-5 엔진을 개발하면서 생긴 노하우들이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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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센추리온 전차처럼 차체 측면 대부분을 보호하는 장갑이 아니라, 흙먼지가 튀는걸 막는 목적의 부품이라서 리턴 롤러와 궤도 상단부만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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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게시자에 따르면 1984년까지 핀란드 국경에 고정포로 운용된 IS-4M의 포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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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loga Steven. IS-2 Heavy Tank 194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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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T-10이 개발될 때도 한계중량을 50t 미만으로 정한 것의 가장 큰 이유는 철도로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서였다. 여름만 되면
라스푸티차가 열리는 당시 소련의 열악한 교통망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22]
워낙에 장갑이 두꺼웠던 탓에 원자재 비용도 많이 들었고, 생산 공정도 다른 전차들보다 까다로워져서 최첨단 기술이 사용된 전차가 아님에도 비쌌다.
[23]
1948년까지 IS-4의 생산 비용은 994,000 루블에 달했고, 중형전차 T-54는 같은 기간 동안 생산 비용이 326,000 루블로 줄어드는 추세였다.
[24]
애초에 IS-4는 당초 IS-3와의 경쟁에서 탈락했음에도 IS-3가 형편없는 품질 문제를 가지고 있는게 드러나면서, 냉전이 서서히 고조되어가던 분위기 속에서 전차를 빨리 더 많이 배치하고자 한 소련육군에 의해 뒤늦게 대안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채택된 IS-4도 주행계통을 중심으로 큰 결함이 있었다.
[25]
아직 현역으로 사용되던 1950년대 말에
중소결렬이 일어나면서 IS-4를 운용하던 소련군 부대들이
자바이칼 지방이나 만주, 연해주 지대의 중국과 인접한 국경으로 이동했다.
[26]
중국 인근에 위치한 고정포들의 경우 1997년에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국경 비무장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철거되거나 완전히 방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