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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蘇我,ruby=そが)][ruby(氏,ruby=うじ)] 소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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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60360> 우지데라(氏寺) 기와문 | |
소변 연꽃무늬 수막새[1] 素弁蓮華文軒丸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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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성 | 소가노 오미(蘇我臣) |
본가 | 황실(皇室) |
씨조 | 타케우치노 스쿠네(武内宿禰) |
종별 | 황별(皇別) |
본관 |
야마토국 타카이치군 소가읍 (大和国高市郡蘇我邑) |
후예 | 이시카와씨(石川氏) |
[clearfix]
1. 개요
소가(蘇我)는 고대 아스카 시대의 중심지였던 나라현에 있던 지명으로, 지금도 나라현에는 소가천(蘇我川)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참고로 당대 아스카에서 소가 바로 북쪽의 명칭은 다름아닌 백제(百濟)였다고 하며, 소가천도 백제천(百濟川)이라고 불렸다.흔히들 소가하면 이 지역의 호족으로서 해당 지역의 이름을 사용한 소가씨([ruby(蘇我氏, ruby=そがうじ)])를 주로 일컫는다. 당대의 토착 호족들은 자신들이 번성한 해당 지명에서 따온 씨(氏)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소가씨는 을사의 변 이전까지 아스카 시대 야마토에서 가장 강대한 권세를 휘둘렀다.
을사의 변에서 덴지 덴노(당시는 나카나오에 황자)에게 숙청당한 뒤부터는, 황자의 정변을 도운 후지와라씨(당시 나카토미씨)가 소가씨를 밀어내고 조정의 권신 가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2]
2. 역사
일본 학계에서는 소가 가문의 뿌리를 나라현 일대의 대호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소가 가문이 6세기 후반 권력을 장악한 이후 천황의[3] 거처가 이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거한다.궁궐을 한 번 지으면 일반적으로 대대손손 물려주던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헤이안 시기 이전의 일본에서는 제위를 계승할 때마다 황궁을 새로 짓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대로 새로 짓는게 아니라 아예 2~3년마다 새로 짓고, 옮겨다니다시피 했다. 물론 멀리 옮겨간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기존 궁궐의 바로 옆이라든지, 근처에 궁전을 새로 짓고 기존 궁궐을 허무는 식이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관념이지만 그 자체로 종교적인 의식이었다.[4]
이후 오오미(大臣)[5] 자리에 올라 라이벌이자 오무라지(大蓮)[6] 자리를 역임하던 모노노베 가문과 정쟁을 벌인 끝에[7] 모노노베 가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모노노베 가문에게 승리를 거둔 소가 가문은 오무라지의 작위를 폐지함으로써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심지어 어떨 때는 천황 역시 소가 가문에게 꼼짝 못했는데, 애초에 소가 가문이 황실의 외척이기도 했던 데다가 제32대 스슌 덴노의 경우 소가 가문을 억누르고, 황권을 강화하려다가 소가 가문이 보낸 닌자에게 암살당했다.[8]
그렇게 약 반세기 가량 일본 열도 최고의 권세가로 군림했던 소가 가문은 645년 을사의 변을 통해 몰락하고 말았다. 다만 멸문지화에 이를 만큼 몰락한 것은 본가였고, 방계 가문의 경우에는 지방이나 한직으로 좌천당하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지위를 유지한 것으로 사료에 그려진다.
3. 개혁파 설
사실 흔히들 알려진 것과 달리 소가씨는 오히려 대왕(천황)가를 적극 비호한 개혁파였다는 추측이 많다. 백제 일변도의 외교에서 수-당, 신라, 고구려와 직접 교역해 외교관계의 다변화를 꾀하고, 왕진이 등의 도래인을 활용하여 외부 문명을 적극적으로 들여왔으며 대왕가의 직할령인 둔창을 설치하고 확대해,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대왕권을 강화하는 데 앞장섰다. 거기다 소가노 이루카 사후 제36대 고토쿠 덴노가 진행한 나니와 천도도 이미 소가노 이루카의 대에 계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일본서기》에는 소가노 이루카가 대악인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을사의 변 이후 사람들이 제38대 덴지 덴노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를 싫어했다는 정황이 많다. 제37대 사이메이 덴노가 붕어하기 전 주변 사람들이 급사했으며, 그녀가 귀신을 보았는데 그 귀신이 소가노 이루카의 귀신이라고 믿었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도 죽기 전에 집에 벼락이 내리치자 소가노 이루카의 원령이 저질렀다고 믿었다고 한다. 마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는 사람들이 이들의 죽음을 꼴 좋다고 여겼다는 뜻이며, 소가씨를 지지했다는 뜻이 된다. 소가노 이루카가 죽였다는 야마시로 황자도 존재 자체가 조작된 티가 너무 난다는 평가이다.
오히려 을사의 변과 다이카 개신으로 인해 기존의 개혁이 좌절되었고, 덴지 덴노 사후 임신(진신)의 난을 거쳐 제40대 덴무 덴노가 즉위하면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4. 기원에 관한 설
크게 야마타이국의 여왕 토요의 후예라는 설과 백제- 마한계 도래인이라는 설이 있다. 참고로 두 지역은 모두 Cis-AB형 혈액형이 관찰되는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양자 모두 모순없이 성립이 가능하다.4.1. 토요와의 관계
소가씨가 야마타이국의 전설적인 여왕 토요(臺與)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설이다. 토요는 소가씨가 권력을 가진 6세기 기준으로 300여년 전인 서기 200년대에 일본의 여왕이었다고 《 삼국지》에 기록되었다.소가씨 계열의 왕족인 쇼토쿠 태자가 황자 시절 '토요토미미 황자'(臺聡耳皇子)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제33대 스이코 덴노의 시호는 '토요미케카시키야히메'(豊御食炊屋姫尊)였으며, 궁궐은 아스카의 토유라노미야(臺浦宮)였는데, 이는 '토요의 항구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진구 황후의 궁궐과 완전히 같았다.[9] 스이코 덴노의 오라버니인 제31대 요메이 덴노의 시호인 '타치바나노토요히노미코'(橘豊日尊)에도 '토요'(臺)가 들어간다.
소가노 이루카나 소가노 에미시도 '토유라노오미'(臺浦大臣)라는 이명을 가지는 등 아스카의 소가 정권과 소가 계열 덴노들은 전부 토요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때문에 소가씨가 사실 야마타이국의 전설적인 여왕인 토요의 후예[10]라는 추측이 있다.
소가씨가 임신의 난에서 즉위를 도왔던 제40대 덴무 덴노도 시호인 '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토노스메라미코토'(天渟中原瀛真人天皇)에 누(ヌ)=누(瓊, 구슬 경)=히스이{ヒスイ, 옥(玉), 비취}가 들어 있는데, 본래 소가씨는 신보(神寶)였던 히스이 산업을 독점하던 일족이었다. 또 진구 황후는 조몬 시대 이래 신보(神寶)로 내려온 히스이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소가씨가 멸문된 뒤 야요이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히스이 산업은 사라지고 밀았다.
4.2. 도래인설
4.2.1. 백제- 마한계 도래인설
11세기에 편찬된 역사서인 《 부상략기》에는 제33대 스이코 덴노 시절인 593년 1월 " 아스카사 목탑 초석에 사리를 안치하는 행사를 할 때 소가노 우마코를 필두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나타나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줬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역시 소가 가문과 백제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백제계인 것은 확실치 않지만 백제와 깊은 연관이 있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끊임없이 소가 가문이 백제 출신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고, 한국 사회에서는 소가 가문이 백제 출신인 것처럼 그려지지만, 일본 사학계에서는 증거가 없다며 무시하고 있다. 한국 역사학자들이 소가 가문의 뿌리가 백제에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 5세기의 대신인 소가노 마치(蘇我滿知)와 비슷한 시기 활동한 백제 목만치(木滿致)의 한자가 비슷하다.
- 둘째. 소가 가문의 역대 계보를 살펴보면 한자(韓子), 고려(高麗)와 같은 한반도 풍의 이름이 자주 보인다.[11]
- 셋째. 소가 가문이 도저히 그 유래를 추적할 수 없다가 5세기에 갑자기 일본 정계에 갑툭튀했는데, 또 교묘하게도 백제의 8성 귀족 중 하나였던 목(木)씨가 비슷한 시기 소리 소문 없이 백제 중앙 정계에서 사라져버렸다. 즉 목씨 가문 전체가 다 같이 일본으로 이주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반론도 존재한다.
- 목만치가 일부러 왜국에 가서 나무 '목'과 관련없는 '소가'라는 성씨를 썼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
- 《일본서기》 기년상 소가노 마치는 적어도 리추 덴노 재위기인 401년부터 국정에 관여한 인물인 반면, 목만치는 구이신왕이 즉위한 420년 무렵까지 백제에서 전횡하다가 왜국으로 소환된 것이기에 활동 시기가 맞지 않는다.
- 백제계라 고려(고구려)와는 빈번한 전투로 반감이 있었을 텐데, 고려라는 이름을 쓸 이유가 없다.[12]
- '한자'는 일본인이 한반도 출신의 여성과 결혼해서 낳은 혼혈이라는 뜻이라고 《일본서기》에 쓰여 있다.[13]
- 소가씨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5세기 중반 이후에도 목간나, 목리불마, 목리마나, 목윤귀, 목리미순, 목리금돈, 목리문차 등 목씨/목리씨에 속하는 백제 인물들이 여럿 나타나므로, 목씨가 정계에서 사라졌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특히 목리마나와 목윤귀는 각각 중·하좌평의 높은 벼슬을 지냈다.
하지만 소가노 이루카의 별칭으로 제시되는 林大臣, 我入鹿, 鞍作大郎 등을 인용했을 때, 鞍作은 《 부상략기》에 의하면 백제계 도래인으로 명시되어 있어, 그의 출자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말이 많다. 언급되었던 林大臣 또한 《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左京諸蕃百濟林連百濟國人木貴公之後也
임씨는 백제국 목씨에서 나온 가문이다.
라고 적혀 있다.임씨는 백제국 목씨에서 나온 가문이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백제계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 중이다.
쇼토쿠 태자의 전기 자료인 《상궁성덕법왕제설》에 소가씨가 원래 임(林)씨라는 기록이 있는데, 위의 막연한 근거들보다는 좀 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목씨가 전부 건너가서 소가씨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 《상궁성덕법왕제설》의 임씨였다는 점을 미루어 백제권에 속했던 영토에 본관을 둔 임씨들을 조사할 시 종가가 소유한 정자 아래서 마한 유력자의 유물이 출토되는 걸 볼 수 있다. 적어도 이들은 전부 건너가지는 않았으며, 현지에서 목씨만이 아닌 다른 성씨들까지 통합하여 소가씨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4.2.2. 신라계 도래인설(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
미국의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소가'는 애초에 고대 한국어, 정확하게는 신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소'는 '쇠'의 고대형인 '*sori'와 연관이 있으며, 이는 다시 신라의 성씨 ' 김'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14] '가'는 왕을 뜻하는 '* kan'과 연관이 있다고 봤다. 즉 '소가'는 직역하면 '김씨 왕'이 된다는 것이다. 즉 도리어 신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15]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조. 참고로, 해당 논문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보빈은 오진 덴노와 진구 황후 역시 고대 한국어를 쓰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소가나 오진, 진구 등이 한국어족 화자라고 가정해도 그들의 정체성이 한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16]5. 가계
이시카와스쿠네 | ||
마치 | ||
카라코 | ||
코마 | ||
이나메 | ||
우마코 | ||
에미시 | 쿠라마로 | |
이루카 | 이시카와마로 | 아카에 |
6. 관련 문서
[1]
소가씨의 씨족사(氏寺)인
아스카데라의 여러 수막새 중 가장 흔한 것인데 소가 씨족 고유의 문양이라 하기는 어렵다. 이런 형태의 연꽃무늬 기와는
불교의 상징으로서 일본 국내외의 수많은 사찰에서도 보인다.
[2]
비교적 전성기가 짧았던 소가와는 달리 후지와라의 위세는 무가(武家)들의 대두 이전까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근대에는 후지와라의 후손들이
화족으로 편입되어 작위를 받고(예: 공작 작위를 받은
고셋케, 후작 작위를 받은 청화가 등) 그 위세가 다시 한 번 부활했다.
[3]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덴노(천황)라는 호칭은 소가 가문이 몰락한 이후인 7세기 후반
진신의 난을 거치면서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당시까지 일본의 군주를 지칭하는 명칭은 오오키미(大王)였다. 다만 이 문서에서는 이 시대의 군주들도 후대에는 천황으로 사실상 추존됐기 때문에 그냥 천황으로 호칭을 통일했다.
[4]
이세 신궁의 식년례를 생각하면 쉽다. 이세 신궁은 5세기 이후 현대까지도 20년마다 옆으로 옮겨 짓고 옛 건물은 허문다.
[5]
오미는 야마토 정권이 세력을 점차 확대해나가는 과정에서 각지의 유력한 부족장들에게 내린 일종의 계급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신라의
진골 정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오오미는 이 오미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세력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6]
무라지 역시 오미와 마찬가지로 야마토 정권에 의해 부여된 일종의 계급인데, 오미의 유래가 (원래는 독립적이었던) 각 지방의 유력 부족장들이라면, 무라지는 초창기부터 야마토 정권의 실무를 담당하던 관리 출신들이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신라의
6두품 정도와 비교할 수 있다. 다만 진골과 6두품의 상하관계가 명확했던 신라와 달리 오미와 무라지 세력은 6세기 후반 야마토 조정의 양대 축으로서 정국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7]
주된 갈등 원인은 바로
불교 공인 문제였다. 소가 가문이 불교의 조속한 도입을 주장했던 반면, 모노노베 가문은 기존의
신토 신앙을 지킬 것을 주장했다. 한번은 흉작이 들자 이게 다 부처 때문이라면서 모노노베 가문이 사병을 동원해 소가 가문의 사원을 습격한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8]
소가 가문 입장에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닌데, 스슌 덴노의 경우 소가 가문이 서포트를 해줘서 황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막상 황위에 올라서 뒤통수를 냅다 후려쳐버리니 열이 받는 상황이었다.
[9]
진구 황후의 토요 설과 소가씨의 조상이자 제15대
오진 덴노의 아버지라는 설이 있는
타케우치노 스쿠네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떡밥이다.
[10]
꼭 핏줄을 이었다는 뜻만이 아닌 그의 세력이나 의지를 이어받은 것까지 포괄해서 부르는 것이다.
[11]
고려 하면 보통 한국에서는
왕건의
고려만을 생각하는데, 5세기
장수왕 시기에 고구려도 국명을
고려로 변경했다.
[12]
삼국시대 최후반부의 고구려-백제 vs 신라-당 동맹구도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수백년을
서로
왕을
죽고
죽이는 철천지 원수지간이었고, 백제는 중국(북조, 수, 당)과 협력해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시도도 많이 했다. 백제가 당나라에 미련을 끊고 갈라서는 것은 멸망 직전 불과 10여 년 정도뿐이었다. 즉 고구려와 백제가 공통된 조상을 섬기고 있다고 해도 마치 현대의 남북한처럼 극도로 사이가 나빴는데 백제계가 고려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제 시조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의식이 있었다지만 백제는 고구려보다는
남부여 국호와 같이 고구려 이전의 원조
부여에서 이어지는 정통성을 주로 강조했다.
[13]
게이타이 덴노 24년(530년) 9월 기사에서 키비노 카라코 나타리(吉備韓子那多利)라는 인명에 대해 "일본인이 이웃 나라의 여자를 취하여 낳은 자를 한자(韓子: 카라코)라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
[14]
다시 말해서 당시 신라에서는 '金'을
훈독해 '*소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15]
만약 그렇다면 윗 문단의 개혁적인 행보와도 관련이 있게 된다.
[16]
사실 과거의 국가별 정체성을 근대적 민족 개념에 무리하게 주입할 수는 없다. 고대에는 언어가 비슷해도 속한 나라나 부족이 다르면 사실상 별개의 민족이나 다름없었으며, 근현대 이후에도
영국 본토인과
영국계 미국인,
독일 본토인과 독일계
스위스인·
오스트리아인,
스페인 본토인과 스페인계
아메리카 국가 국민들 같은 비슷한 케이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