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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01:05:09

간(칭호)

한국사 군주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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干支,
干岐,
旱岐

1. 개요2. 의미3. 역사
3.1. 신라
3.1.1. 6부 간지 목록
3.1.1.1. 모량부3.1.1.2. 본피부3.1.1.3. 습비부
3.2. 가야
3.2.1. 금관가야의 구간3.2.2. 가야 간기, 한기 목록3.2.3. 가야 차한기, 하한기 목록

1. 개요

신라 가야에서 군주를 일컫던 말.

2. 의미

간의 한자 표기는 고정되지 않고 기록에 따라 여러가지 표기가 있다. 아직 중국식 체계와 문물이 완전히 들어오기 이전 고대 시대에 주로 사용되었고 한자는 단지 원래 존재하던 순우리말 칭호를 음차한 것일 뿐이므로 한자 각 글자의 뜻은 의미가 없다.

'간' 단독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간지'라고 하여 고대의 존칭 접미사인 '-지'가 붙을 때도 많았다. 즉 '간지'는 '간(왕) + -지(존칭 접미사)'로 추정된다.

'간(干)' 자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북방 유목민족의 칭호인 ''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흉노가 북방에 있을 때이므로 흉노어 내지는 투르크 조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1][2] 즉 신라에서 사용되었다고 정사에 명확히 기록된 거서간, 마립간 등의 간호와 궤를 같이한다. 즉 '간' 자는 '거서간', '마립간'의 '간'과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야에서 많이 사용된 표기인 한기(旱岐)와도 음운상 유사점이 있어, 방언의 차이 혹은 음차에 사용할 한자를 다른 글자로 선택했을 뿐이지 동일 어원으로 추정된다.[3] 양서 신라전에서 이벌찬을 자분한지(子賁旱支)로 쓰고 있는데, 支는 당시에 '기'에 가깝게 읽혔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등 신라의 기록뿐 아니라 일본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후기 가야에는 차한기(次旱岐), 하한기(下旱岐)라는 직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안라국에는 대불손이란 사람이 있는데 안라의 하한기(下旱岐) 대불손(大不孫)으로 기록에 나와있다.

여기서 차(次)는 다음간다, 버금간다는 뜻이고 하(下)는 훈으로 '아루시'라 적혀있다. 그리고 알한지(謁旱支)는 아질간(阿叱干)과 통하는 듯하다.[4] 이로 보아 아찬의 '아'는 다음간다, 버금간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5]

6세기 초에는 신라의 관등 체계가 완전히 잡히지 않아 잡찬, 파진찬 등의 관등이 보이지 않고, 아간지와 일간지가 최고위 관등으로 나온다. ( 포항 중성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 그리고 차로부인(次老夫人)을 아로부인(阿老夫人)으로 쓰기도 하는데 차로(次老)의 로(老)는 말음표기로, 차(次)는 '아'로로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한자음의 'ㄹ' 받침이 예전에는 [t]로 발음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알한지의 알은 '앝'으로 백제어 '오토(下)'와도 연관되며 일본어 '오토', 신라어 '알지(閼智)'와도 연관지을 수 있다. 계림유사에 소(少)를 '아퇴(亞退)'라 한다고 적혀있다. 일본의 '오토'는 다음, 어린, 끝 따위를 나타내는 말이고, 알지는 어린아이를 뜻한다고 삼국유사에 적혀있다.

또한 '까치설'이 본래 '아치설'이며 이때 '아치'는 '작은'이라는 뜻임이 알려져 있으므로 '아치'와 어원이 같을 수 있다. '계림유사'에는 고려 시대 전기 중세 한국어의 친족 호칭들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ᄎᆞᆫ아ᄃᆞᆯ(조카)' 등의 '아ᄎᆞᆫ'이다. 기초적인 친족(가족) 명사 앞에 나왔으므로 '아ᄎᆞᆫ(앛-ᄋᆞᆫ)'의 어근을 '앛-'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앛-'의 기원도 '아찬'의 '아' 부분에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찬'은 '앛-간(한)'의 구성이 되며, 말음이 파찰음 내지는 마찰음이 되므로 '叱(향찰에서 '-s' 음을 나타내는 데 사용)'과의 연관성도 나타난다.

3. 역사

3.1. 신라

지증왕 대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따르면 6부 중 본피부와 사피부 족장, 지방 촌주의 관등이 간지(干支)로 나오고, 삼국사기에서는 신라가 멸망시킨 진한 음칠벌국의 군주 이름을 타추간(陁鄒干)이라 기록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신라의 인질 ' 미사흔 파진찬'을 '미질기지 파진간기(波珍干岐)'라 기록하고 있다.

즉 초기 신라는 여러 소국들을 흡수하며 성장한 만큼 각국의 간지(干支)들을 관등으로 격하, 신라 군주 밑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것이 신라 관등제의 유래일 수도 있다.

신라가 6세기에 마립간이라는 '간'호를 쓰지 아니하고 중국식 왕호를 지증왕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듯이, 가야 역시도 6세기 들어 힘이 강한 나라들은 간지 계통의 칭호에서 왕호로 갈아타며 인근 작은 나라들과 차별화하려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서기 사비회의 참석자 명단 기록에서 가야 안에서 크고 강한 나라인 가라( 반파국)[6], 안라국의 임금은 왕(王), 그리고 가라와 안라에는 왕 밑에 여러 한기(旱岐)가 있고, 그리고 그 외 가야 안의 여러 작은 나라들은 각자의 임금을 한기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후자는 왕국, 전자 두 나라는 제국과 같은 구조 차이를 띄고 있다.

신라가 지증왕 이후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경주의 조정 아래에 전국이 관료제로 묶이면서 간의 의미도 달라진다. 더 이상 지방 소국의 임금 같은 존재가 아니라 신라 관등의 일부로 변형된 것이다. 우선 간의 음이 변한 찬(飡)은 파진찬, 대아찬 같은 경위 관등명이 된다.

한편 간(干)이라는 글자는 통일신라 때에는 하급 관서의 실무 관료에 붙는 호칭으로 변화한다.

심지어 신라 이후 고려, 조선시대에도 이런 용법으로 흔적이 남아 계속 쓰인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에 소속되어 사원전을 경작하던 직간(直干)이 있었고, 국농소(國農所)에 소속되어 토지를 경작하던 농부들도 ‘간’이라 불렀다. 원래는 작은 나라의 임금을 부르던 호칭의 의미가 관료를 거쳐 평민까지 내려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조선시대 초기에도 소금을 구워 공납하는 사람을 염간(鹽干)이라고 부르거나 생선을 공납하는 사람은 생선간(生鮮干)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흔적이 남는다. 조선 중기부터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3.1.1. 6부 간지 목록

3.1.1.1. 모량부
3.1.1.2. 본피부
3.1.1.3. 습비부

3.2. 가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록된 수로왕의 가야 건국설화에서 수로왕 이전 김해의 아홉 마을의 추장을 간(干)이라 불렀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일본서기 흠명기를 보면 가야 연맹 중 지도국이었던 안라(삼국유사에서는 아라가야), 가라(대가야 반파국)에 '하한기(下旱岐)'나 '차한기(次旱岐)' 등의 작위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래 하 자나 버금 차 자가 붙은 만큼 후기 가야 제국도 간지를 세분화하여 관등처럼 수여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다른 표현으로 한기가 있는데 가야의 옆동네 진한- 신라 지역에서 많이 사용된 간지(干支, 干岐 등) 계통의 칭호들과 음운상 유사점이 있어 방언적 차이가 있을 뿐 동일 어원으로 추정된다.

3.2.1. 금관가야의 구간

수로왕의 가야 건국설화에서 등장하는 아홉 마을의 추장들이다.

3.2.2. 가야 간기, 한기 목록

3.2.3. 가야 차한기, 하한기 목록



[1] 다만 초기신라ㆍ가야와 동시대 북방의 흉노에선 선우라고 했고 칸 계통 호칭은 쓰이지 않았다. 칸 계통 호칭이 해당 지역에서 쓰인 것은 좀 더 후대의 일이다. 오히려 한반도의 간이 시기상 먼저고 북방으로 넘어갔을 거란 주장도 있다. 이는 삼국사기 초기 기년 긍정설에 기반했을 수도 있는데, 이건 제쳐두고 고고학으로 보정해도 가한 호칭의 등장 시점과 비슷하다. [2] 기록상 가한을 칭한 것이 처음으로 확인되는 인물은 모용토욕혼인데, 3세기 말 사람이지만 기록 자체는 5세기 말에 편찬된 < 송서>에 등장한다. 한편 한반도에서 '간' 칭호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사례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로, 6세기 초 기록이다. 이 외의 기록이 워낙 부족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시기상 어느 쪽이 앞섰는지 단정지을 방법이 없다. [3] 고대 한국어 음운 체계에서 ㄱ계/k/와 ㅎ계/h/는 잘 변별되지 않는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두 음운의 뿌리가 연구개 마찰음 /x/와 유사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4]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야는 신라의 직제를 따라해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 등의 품계를 두었다고 한다. [5] 아(阿)와 알(閼)의 어리다는 뜻을 보아 가야의 한기아(旱岐兒)와 엮기도 한다. [6] 이 6세기경에 원조 가야였던 김해 금관가야는 이미 국력이 약해져 가라 호칭을 고령에 넘겨주고 '남가라'라고 불리었다. [출처] :가야의 정치구조-'부체제' 논의와 관련하여(백승충), 동북아역사재단 역주 일본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