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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전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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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徐成
(? ~ 392)

전진의 인물. 자는 불명. 거기대장군 서숭의 숙부.

2. 생애

성품이 순박하고 올곧았으나, 키가 6척 밖에 되지 않았고 추레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맹은 서성의 본성을 잘 꿰뚫어 보고, 전연을 정벌하러 갈 때 그를 사성교위로 삼아 건무장군 등강의 부관으로 배속하였다.

건원 6년(370년) 10월, 노천(潞川)에서 전연의 태부 모용평이 이끄는 대군과 대치하게 된 왕맹은 서성을 보내 전연군의 허실을 살피게 하였다. 서성은 떠나기 전에 정오에 돌아오기로 하였으나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오자, 왕맹은 군법에 의거해 서성을 처형하려 하였다. 이때 그의 상관인 등강이 간청하여 말하기를
"내일 당장 전투를 벌이려 하는데, 지금 적은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서성은 대장이므로 마땅히 용서해야 합니다."
라 하니, 왕맹이 거절하며 답하였다.
"만약 서성을 죽이지 않는다면 군법이 서지 않을 것이오."
등강이 다시 한번
"서성은 이 등강의 군대에 소속된 장수입니다."
라고 간청하면서 다음 날 전투에서 서성에게 나아가 전공을 세움으로써 속죄할 기회를 주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왕맹이 끝까지 이를 허락하지 않자, 등강은 분노하여 자신의 군영으로 돌아가 병력을 정비하고 북을 크게 울려 왕맹의 군영을 습격할 준비를 하였다. 왕맹이 등강을 말리기 위해 그 이유를 물으니, 등강이 답하였다.
"저는 멀리 있는 적을 토벌하라는 조서를 받았습니다. 한데, 지금 적과 가까이에서 대치하고 있는 마당에 서로 죽이는 일이 발생하여 먼저 이를 제거하고자 합니다."
이에 왕맹이 사람을 보내 등강을 말렸다.
"장군은 그만두시오. 내 지금 그를 바로 사면하겠소."
이리하여 서성은 풀려났다. 등강이 왕맹의 진영을 찾아가 사죄하러 갔을 때, 왕맹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장군을 시험했을 뿐이오. 장군이 지방의 장수로서 이와 같거늘, 하물며 국가에서는 어떻겠소? 나는 더이상 적이 두렵지 않소."
이후 서성은 전연군과의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워 적진을 누비면서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건원 7년(371년) 2월, 병주(并州)자사에 임명되었다.

건원 7년(371년) 3월, 구지가 내분에 휩싸인 틈을 타 서현후 부아, 양주(梁州) 자사 양안과 함께 정벌하여 구지를 평정하였다. 이후 응양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건원 9년(373년) 10월, 전금장군 모당과 더불어 30,000 군사를 이끌고 동진의 검각(劍閣)을 함락시키고 익주(益州)와 양주(梁州) 2주를 침공하였다. 이후 익주와 양주를 모두 평정하자, 서성은 우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건원 20년(384년) 6월, 천왕 부견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친히 20,000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여 후진을 건국한 요장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였다. 전진군은 북지(北地)에서 후진군을 격파하여 요장을 조씨오(趙氏塢)로 몰아세웠고, 호군장군 양벽(楊璧)이 3,000 기병으로 요장의 퇴로까지 차단하였다. 이때 종군하였던 서성은 우군장군에 임명되어 좌군장군 두충, 진군장군 모성(毛盛)과 함께 후진군을 다시 격파하고, 둑을 쌓아 조씨오로 통하는 수로를 끊었다. 후진군은 얼마 안 가 갈증에 시달려 무리가 붕괴되기 직전에 이르렀으나, 운이 좋게도 비가 와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고, 때마침 모용충의 선비족 군대가 장안성을 공격해준 덕에 부견이 급히 물러가면서 겨우 멸망을 면하였다. 천왕 부견의 본군이 퇴각하자, 숨통이 트인 요장은 70,000 무리로 반격하여 호군장군 양벽을 대파하고, 양벽, 서성, 모성, 전군장군 제오(齊午) 등 장수와 관리 수십 명을 사로잡았다. 요장은 사로잡은 전진의 장수와 관리들을 모두 예를 갖추어 돌려보냈다. 이후 양성은 진주(秦州)자사에 임명되어 행성(杏城)을 진수하였다.

태초 2년(387년) 12월, 후진의 좌장군 요방성(姚方成)이 행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서성을 사로잡으니, 서성은 후진에 투항하였다.

건초 7년(392년) 3월, 무소제 요장이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태자 요흥을 중앙으로 불렀다. 이때 정남장군 요방성이 요흥을 찾아가 서성 등 항복한 전진 출신의 관리들을 모두 제거할 것을 권하였다. 요흥은 이를 받아들이고 서성, 왕통, 왕광(王廣), 부윤(苻胤), 모성 등을 전부 숙청하였다.